'간화선 비판과 심화증 수행' 글을 읽고
권태욱님이 주창하시는 심화증 수행이라고 명명한 수행은 간화선 수행을 제대로 하고 있는 수행자라면 아상을 내려 놓는 수행으로 이미 더 깊이 하고 있는 수행입니다.
看話라고 하여 화두만 본다라고 뜻을 축소화시키시는데, 이런 것을 보고 옛어른들은 '말에 속는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경계에서 나름대로 너무나도 요긴하였고 성과가 좋았다고 판단되어
자신이 명명한 감정수행방법에 대한 애착심으로 간화선 수행의 과정과 의미를 너무 협의화한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권태욱님이 주창하시는 심화증수행에 대한 장점을 내세우기 위한 전제라고는 하지만 1)당시 중국사회의 정신문화 수준에 대한 편견적 규정과
2)간화선으로 수행하는 도중에 체험할수 있는 여러 경계들중 하나를 궁극의 깨달음이라고 오해하고, 또 더 나아가 자신이 잘못 규정한 점에 의거하여 간화선 비판을 하신 점은 문제의 소지가 많습니다.
1)의 원인 또한 근본적 원인이 2)에 있다고 할 수있으므로
궁극의 깨달음의 경지, 불 조사님들의 심경지는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더 깊이 참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話頭'란 단어는 말머리로써 말이전의 心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떠난 화두란 있을 수 없습니다.
화두는 불 조사님들의 여여한 心을 알고 그 心경지에 가서 그 心을 쓰기 위한 방편인 것입니다.
그런데 看話라 하면 근본적 뜻이 말이전의 心을 보는 것인데,
마음을 배제한채 화두만을 본다라고 규정하면
그런 화두야말로 옛어른들이 경계하신 죽은 화두입니다.
그런 죽은 화두를 들고서 그 어떤 기특한 경계를 체험했더라도 궁극의 깨달음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궁극의 깨달음이라면 불 조사의 심경지에 가서 마음의 苦를 해결했음인데,
수행과정에서 삼매체험을 했다고 그것이 궁극인줄 알고서,
마음의 고를 일으키는 식의 흐름과 관성화된 습기를 제거하지 않고
보지도 못한 채로, 궁극의 깨달음이 아닌 자기자신 나름대로의 깨달음에 머물러
그 경계의 안목에서 모든 것을 가름하여 사량분별해버리면
배우려는 후학들에게 혼란을 주게 됩니다.
그러므로 권태욱님이 이름한 감정수행이라는 것은
제대로 가고 있는 간화선 수행자라면 수행과정에서 잠깐 경험하는 식작용경계이며, 수행목적과는 거리가 멀어 곧바로 투과해서 뛰어넘는 부분입니다.
선사들은 서양의 어떤 뛰어난 심리학자보다도 인간의 心에 관해서라면
단편적이 아닌 총체적으로 꿰뚫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사들이 학인을 점검할때도 情識에서 사량분별로 나온 말인지,
깨달은 심자리에서 나온 말인지,
그 말이 나온 心자리를 꿰뚫어 보는 것이지 말 재주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서 무의식이란 용어를 최초로 쓴 프로이트에게 영향을 끼친
프로이트 이전에 무의식을 연구한 철학자들은 불교에서 그 영감을 받았습니다.
집단적 무의식이니 심층의식이니 하는 것들도 인간의 총체적 심의 한 단면을
말한 것일 뿐이며, 심층의식이니 초개인심리학이니 초월심리학이니 해서
불교에서 말하는 心에 이제서야 학문적 접근을 서서히 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학문적 체계적 정립이라는 면에서도 천오백여년전에 인도의 유식학파에 의해서 그들 자신들의 직접적인 수행체험으로써 현대에서 심층의식이라 규정한 식이 말나식 아뢰야식 아타나식등으로 이미 규정되었고, 수행과 깨달음에 있어서도 육의식과 말라식에 있는 거친 번뇌 거친 습기를 제거하고 아뢰야식에 있는 미세번뇌 미세습기를 닦아 轉識을 이루어서 깨달음에 이른다고 이미 정립되었습니다.
그러면 초기 불경에 말라식이니 아뢰야식이니 하는 용어가 나오지 않았다고, 부처님 시대 수행자들이 말라식과 아뢰야식을 보지 못하고 닦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초기 불경에 '화두'란 용어가 규정되지 않았다고 부처님이 화두를 들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요?
부처님의 화두는 어떻게 마음의 고를 해결하느냐였고, 마음의 苦에 대한 철학적 해결과 더불어서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분상의 추번뇌와 미세번뇌를 모두 조복받아 실천적 심수행으로 마음의 苦를 궁극적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대제자들 사후에 눈에 보이는 산 모범이 안 계시고 말씀만 전하다보니, 그 전하는 말씀만으로 깨치지 못하는 근기가 많아지고, 여러 근기들에게 대중화 시키려다보니 깨달음과 식에 대한 학문적 체계적 필요성이 대두되어 유식학이 성립된 것입니다.
그리고 간화선 시대의 중국사회도 살펴보면, 서장에서 대혜스님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 수행자들을 보면, 스님들도 있지만 거의 당대 속가의 지식인층들입니다. 사서삼경도 달달달 외우고, 불교공부도 웬만한 경들은 앞으로 꿰고 뒤로 꿴 사람들입니다. 지식인들의 특징은 자신의 이해범위 안에 있어야 믿습니다. 자신의 이해안에서 정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이론 공부를 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자신들의 아직 닦지 못한 사량識으로 이해, 분별하려고만 하지 말고 곧바로 心으로 들어가서 실천수행하라는 뜻에서 화두를 들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지식과 정보가 넘쳐나지만, 말 그대로 지식과 정보일 뿐이어서
지식과 정보를 받아들일 주체가 바른 견해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더욱 혼란스러운 때입니다. 그리고 지식의 주입식 교육, 반쪽짜리 이데올로기교육으로 철학이 형성될 근간인 사색력의 약화로 옛 수행자들보다도 정신적인 면에서는 훨씬 근기들이 하열하다 할 수 있습니다. 지식의 축적과 과학의 발달로 기능적인 면에서 진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수행의 깊이면에서는 성취가 미약하다고나 할까요?
권태욱님의 수행경계는 얕지 않은 훌륭한 경계이지만 전반적인 통찰력이 부족합니다. 그 이유는 我를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의 수행방법을 드날리기 위해서 간화선의 본 뜻을 눈감아버렸습니다.
我를 내려놓았다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자신이 얻은 뜻을 고인들의 말씀과 어떻게든 배대를 시킬려고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부처님과 조사님들의 공부방향은 철저히 我를 놓는 방향이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처음 시작이 무언가 성취를 해서 我를 채우기 위해 공부를 하였다면,
수행과정에서 여러 식작용은 경험했을지언정 깨달음과는 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불조사님들의 심자리에 대한 신심을 가지고서
我를 내려놓는 수행에 매진해서 궁극의 깨달음을 성취하신 다음
수행과정의 모든 경계를 현대적 용어로써 잘 표현하셔서
큰 포교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2006. 06.13 高松
'지혜의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13. 무명주지 번뇌와 부동지 / 운암(雲庵)스님 (0) | 2018.11.18 |
---|---|
[스크랩] 11. 선문의 현묘한 도리 / 협산 선회(夾山善會)스님 (0) | 2018.11.18 |
[스크랩] 붓다의 마음 - 선 - 연기실상 (0) | 2018.11.18 |
[스크랩] 간화선의 본질과 수행구조 (0) | 2018.11.11 |
[스크랩] 오매일여(寤寐一如)는 과연 가능한가? (0) | 2018.11.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