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요(禪要)

[스크랩] 제십일편

수선님 2018. 11. 18. 12:14

거사에게 보이는 말씀 (제십일편)

 

자기 본연의 자리를 몰라서 참구한다는 것은

출가자와 재가자를 나누지 않고 다만 한가지 결정한 선지식에 대한 믿음을 요함이니,

만일 능히 당장에 믿어서 미치며 잡들어 정을 익히며 의심을 지어서

주인이 되게하여 세속의 다섯가지 쾌락에 끄달리지 아니하여

무쇠로 만든 막대기와 같이 한다면

죽음에 이르기전에 깨달음을 이루는 것을 취하면

항아리 속에서 달아나는 자라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어찌보지 못했느냐

화엄회상에 선재동자가 일백입십성(보살지의 점차로 닦아 들어가는 오십오위를 말함)을

지나서 오십삼 선지식을 찾아가서 물어 위없는 과를 얻음도,

또한 이 한낱 선지식을 믿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법화회상에서 여덟살의 용녀가 바로 남쪽 무구세계에 가서

부처님께 구슬을 드리고 성불함도 이 한낱 믿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열반회상에서 광액 백정이 소를 잡는 칼을 놓아 던져버리고

나도 이 일천 부처님의 한 부처라고 말하는 것도 또한 이 한낱 믿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옛날에 아나율타가 (부처님의 사촌동생) 평생에 잠이 많아 부처님이 꾸짖어 이르시되

어찌 잠만 자는고 너도 소라와 조개만큼이나 잠을 많이 자는구나

한번 잠을 자면 천년동안에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한다 하시는

꾸짖음을 입어 용맹심을 내어 칠일을 잠을 자지 않아서 두눈을 읽어버리고

대천세계를 보기를 마치 손바닥의 과일을 보는 것과 같이 하는 것도

또한 이 한낱 믿는 마음에 벗어나지 않으며,

 

다시 어떤 여린 비구가 늙은 비구를 희롱하여

아라한의 과를 증득함을 인가하여 준다하고

드디어 가죽공으로써 머리를 네번 쳤더니

곧 수다원 아나함 아라한과를 얻음도 또한 이 한낱 믿는 마음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양기 방회가 자명화상을 찾아뵙고 예배드린 후

소임을 맡은지 십년에 이르러 잃어버리고 도를 깨달아 천하에 드날리는 것도

또한 이 한낱 믿는 마음에 벗어나지 않으며,

옛날부터 이렇듯이 부처님과 조사스님이 확철대오에 뛰어오르사

마음이 우주와 둘이 아닌 경지에 계합하여 자유자재함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도

모두가 이 한낱 믿는 마음이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이며

믿음이 위없는 부처님의 깨달음이며

믿는 마음은 영원히 번뇌를 끊는 근본이며

믿는 마음은 능히 나고 죽음이 본래 없음을 증독하는 문이라 하시니라.

 

옛날에 선성비구가 있어 부처님을 모신지 이십년에

부처님 좌우를 떠나지 않되 대체로 이르기를

이 한낱 믿는 마음이 없어서 성인이 되는 도를 이루지 못하고 살아서 지옥에 빠지니라.

오늘 신심이 있는 거사는 비록 결혼하여 세속에 살고는 있으나

능히 이와 같은 결정된 믿는 마음을 갖춘지라.

지나간 임오년에 산에 올라와서 나를 만나기를 바라다가 받아들이지 않아서 돌아가고

또 다음해 겨울에 지공거사를 동행하여 찾아와서 비로소 문안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였더니,

이제 또 한해를 지나가매 식량을 꾸려싸고 익힌 식량을 꾸려싸고

특히 서로 반가워서 출가자의 계를 받기를 빌며 제자 되기를 원할 새

그러한 까닭으로 몇일을 두고서 그 이유를 따지고 물어보니

돈독한 신심으로 깨달음에 나아가려고 하는 뜻이 있는지라. 

 

유마경에 이르시되 높은 언덕 땅위에는 연꽃이 피어나지 않고

낮고 지저분한 진흙땅에 연꽃이 피어난다 하시니 정히 이것을 이른것이다.

고봉이 이런 까닭으로 말미암아 어루만져서 한낱 힘 떨리고 닦기 쉬운

일찍이 내가 증험한 화두를 가져서 두손으로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 고를 내리어 분부하노니,

오직 믿는 마음으로 화두를 잡들어서 의심해 갈지어다.

 

모르지기 화두 의심은 믿는 마음으로써 마음의 근본체가 되고

깨달음은 화두 의심이 밀밀하게 계속 이어짐으로써 쓰는 용이 됨을 알지니,

믿는 마음이 십분이 있으면 화두 의심이 십분을 얻고 화두 의심이 십분을 얻는 것인지라,

비유하자면 물이 불어오르면 배가 높아지고

화두 의심이 크면 클수록 깨달음도 커지는 것과 같으니라.

 

인도와 중국의 옛과 지금의 선지식이 마음을 깨달아 밝힌

밝은 광명을 발견하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널리 깨닫게 하시되

다만 이 한탄 화두 의심을 타파하지 않음이 없을 따름이라

천가지 의심하고 만가지 의심하는 것이 다만 이 한가지 화두를 의심하는 것이니

이 화두 의심을 타파하는 사람은 다시 나머지 천칠백가지의 화두 의심이 없을진대

 

곧 석가와 미륵과 유마거사와 방거사로 더불어

마음의 본래 면목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둘이 없고 다름이 없어서

동일하게 눈으로 보고 동일하게 귀로 들으며 동일하게 수용하며

동일하게 나고 죽음에 자유자재하여 천당과 지옥을 마음대로 왕래하고

호랑이 굴속과 마구니의 궁전에 종횡무진으로 걸림이 없어서 자유자재로 이루어질것이며

뜻을 이룸에 자유자재하리니,

 

그러므로 열반경에 말씀하시기를

태어나고 죽음 그대로가 곧 열반의 낙이다 하시니

모름지기 알아라 이 열반의 낙은

중생들의 추번뇌, 세번뇌에서 나오는 망상심이 주인노릇하는 마음 작용으로 느끼는

오욕낙을 즐기는 쾌락이 아니라

이에 중생의 추번뇌, 세번뇌의 망상심은 티끌도 없고,

티끌도 없는 일체 관념이 붙지 않는 절대적인 그 자리를 망상심 그대로가 열반의 낙이니라.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옳다 하시고,

공자의 제자 안회는 한 바가지의 밥과 물로써 팔을 베고 누워있어도 만족했고

증자의 아버지 증범이라는 사람은 무라는 땅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읊으며 자연을 즐기는 모습으로 돌아오니

모두가 나고 죽음이 본래없는 마음이 우주와 둘이 아닌 경지에 계합하여 자유자재함을 가짐이니라.

 

진실로 혹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선지식을 믿지 않을진대

비록 네가 가부좌를 틀고 않아 미륵 부처님이 다음 세상에 출현하심에 이르더라도

잡초처럼 무성한 생각에 의지하고

나무에 붙은 혼백 뿐인 영혼의 귀신과 영혼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놈을 지으리니다. 

그 가운데 말씀하시기를

성문, 연각의 생각을 통일해서 관념으로 닦아 들어가는 소승의 작은 수행관법은

비록 팔만겁의 큰 힘을 얻은 선정에 들어갔으나 태어남과 죽음의 두가지가 본래 없는 마음이,

우주와 둘이 아닌 경지에 계합하여 자유자재하는 이일을 믿지 못할새

한뜀에 부처가 되는 최상승선을 만나기가 더욱 멀어서 항상 부처님의 꾸짖음을 입는다 하시니라.

 

바로 크게 믿는 마음을 일으키며 크게 의심을 일으켜서 의심하여 오고 의심하여 가면

 화두 의심뿐인 한 생각이 만년이 가며 만년의 화두의심뿐인 한 생각이라.

확철대오하여 이 마음 근원의 깨달음을 보고자 할진대,

사람으로 더불어 태어나고 죽음의 번뇌와 원수를 맺음과 같이 비유를 하여

마음이 분노를 참지 못하여 한 칼로 두조각을 내고자 하여

비록 잠깐사이에 심각한 문제에 있더라도 신경을 바짝 차려서 맹렬히 채찍을 붙이는 시절일지니라.

만일 화두를 의심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화두가 의심되어

깨도 잠들때에 화두 의심이 계속이어져서

눈이 있으되 소경처럼 먼 것같고 귀가 있으되 먹은 것 같아서

문자를 보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서 알고 있는

지식이라는 고정관념에 떨어지지 않는데 이르더라도

오히려 이 능히 움직이고 일하는 주체와 되어 가는 객체나 대상의 대립이 있게 되면

상대가 끊어진 참 이치에 들어가지 못하며

갈구하고 헐떡거리는 생각을 쉬지 못함이니,

간절히 마땅히 화두를 의심하는 가운데에 배나 의심을 더하여

의심으로 하여금 행하되 행함을 알지 못하고 앉되 앉음을 알지 못하며

동과 서를 가리지 못하고 남과 북을 나누지 못하여

한 법을 가히 생각이 일어남이 있음을 보지 못함이

한낱 구멍이 없는 무쇠로 만든 방망이와 같이 비유하여

의심하는 주체와 분별하는 상대적인 생각과 화두의심과

밖의 경계가 추번뇌 세번뇌 겹으로 뛰는 번뇌가 동시에 잊고 동시에 없어서

없다는 생각까지 없음도 또한 없어지게 할 것이니,

화두 의심이 이 경계에 이르러서는 발을 들고 발을 내리는 곳에

간절히 큰 바다를 밟아 거꾸러져 뒤집혀지지 말고

수미산을 발로 걷어차서 거꾸러뜨림을 꺼리며 (화두를 지어가다가 사량복탁해서 화두가 타파되어 중도에 다 깨달은 줄 알고 화두에 의심이 다 깨달은 줄 알고 화두에 의심이 안되어 공부를 못짓는 묵조사선을 말함)

구부리고 베풀때에 화두를 간택할때에

달마의 눈이 밝은 안목과 동일하게 안목을 갖추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코구멍을 부딪쳐 문질러 없어지게 함을 이루어지게 할지니라.(부처님이라는 견해와 법이라는 견해에 머물러 있지 않음)

만일에 그렇지 못할진대 다시 더불어 설명을 더 할 것이니,

스님이 조주화상께 묻기를 만가지 법은 하나로 돌아가거니와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 가나니잇고?

조주화상께 묻기를 내가 청주에 있어서 한벌의 베장삼을 만들었으니

무게가 일곱근이라 말씀하시니,

고봉이 이르기를 점잖은 조주가 진흙을 끌고 물속에 빠졌도다.

특별히 그 스님을 위하여 의정을 끊어주지 못할 뿐이니라

또한 이에 천하에 참선공부하는 수좌스님들을 속여서 말의 시비속에 죽어 있게 했도다.

 

고봉은 그렇지 아니하여 오늘에 문득 사람이 있어 묻기를

만가지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고? 묻는다면,

묻는 사람을 향해 대답하기를

개가 뜨거운 기름 가마를 �는다 할 것이니,

거사여 거사여

만일 이 뜻에 계합하여 태어나고 죽음에 자유자재할수 있다면

다만 그토록 강조한 이 선지식을 믿어야 한다는 말도 또한 눈가운데 먼지 가루를 붙이는 것이리라.

출처 : 通達無我法者
글쓴이 : 통달무아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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