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제일에 대중에게 보이신 말씀 (제십삼편)
주장자로써 세번을 들어보임과 세번을 내려치고는 대중은 또한 알겠느냐.
만일 주장자를 세번 들어보이고 세번을 내려치는 것을 바르게 알진대
여래선과 조사선과 밤송이 덩어리와 금강왕 보배칼의 할이란 것은
한할에 온갖 생각과 알음알이를 끊어 버리는 것이요
땅에 버리고 앉은 사자의 할이란 것은
말을 하거나 입김만 내 쏘아도 모든 마군의 머리가 터지는 것이요,
탐지하는 것이요
또 한가지 할은 한 할로만 쓰이지 않고 세가지 현과 네가지 손과 주인 같은 것들을
다 갖추어 있는 것과 조동종의 다섯자리는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은 아랫 근거들을 다루는 법이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는 것은 중등 근기들을 다루는 법이요,
사람과 경계를 빼앗는 것은 상등 근기를 다루는 법이요,
사람과 경계를 갖추고 빼앗지 않는 것은 격밖에 사람을 다루는 법이다.
근본체 가운데 쓰는 용이 있고 근본 이치 가운데
사변지의 일이 갖추어 있는 것을 알아서 세가지 현이 갖추고 있고
쓰는 용이 근본 이치를 여의지 않음을 알아서 쓰는 용이 근본 이치에 들어가는 것이요
손 가운데 손은 배우는 이가 살피는 눈이 없는 것이니 물음이 있고 대답이 있는 것이요
손 가운데 주인은 배우는 이가 살피는 눈이 있는 것이니 주인도 있고 법도 있는 것이요
주인가운데 손은 스승이 살피는 눈이 없는 것이니 묻는 것만 있는 것이요
주인가운데 주인은 스승이 살피는 눈이 있는 것이니 기특한 것도 해롭지 않다.
먼저 비치고 뒤에 씀은 사람이 있는 것이요,
먼저 쓰고 뒤에 비치는 것은 법이 있는 것이요
비침과 쓰는 용이 한 때로 되는 것은
밭을 가는 농부의 소를 빼앗되 주린 사람의 밥을 빼앗는 것이며
비침과 쓰는 용이 한 때가 아닌 것은 물음이 있고 대답이 있는 것이다.
바른 이치란 것은 소림 굴에서 돌아앉아 있는 따위요,
평상 도리란 것은 화산의 북을 친다는 따위요,
본분이란 것은 산승은 모르노라 한 따위요,
거짓을 꾸민다는 것은 달마대사가 알지 못하노라 한 따위들이다.
이것을 조동종의 다섯자리라고도 하며
또한 임제종의 종지와 똑 같은 것이니
한 구 가운데 세 현이 갖추어 있고
한 현가운데 세 요가 갖추어 있으니
한 구는 말자취와 생각 길이 갖춰 끊어지어 이치나
일에 걸림없는 것이 마치 도장을 우주에 찍은 것과 같은 것이요
이것을 조사선이라고 말하며
둘째 구는 생각과 알음알이가 아주 끊어지지 않아서
말자취가 있고 이치 길이 남아 있어서 마치 도장을 물에 찍은 것과 같아
여래선이라고 말하며
셋째구는 말이나 글로 해석하고 설명하는 선을 이름이니 마치 도장으로써 진흙에 찍으면 도장을 찍은 이빨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과 같아 의리선이니라.
첫째 요는 비침이 곧 큰 기틀이요
둘째 요는 비침이 곧 큰 말씀이요
셋째 요는 비침과 쓰는 용이 한때가 된다.
체 가운데 현은 삼세가 한 생각이라는 따위들이요
구 가운데 현은 양구로써 한참 말이 없이 침묵하고 있는 것인데,
그 첫기록으로 어떤 외도가 부처님께 묻기를
말씀하지도 말고 말씀 안하지도 말고, 진리를 가르쳐 주소서 하는데 부처님은 양구하였다.
그러매 그 외도는 깨치고 나서 부처님을 찬탄하였고
둘 아닌 법에 대하여 여러 보살들이 제각기 말하는데
유마힐은 양구하여 여럿의 칭찬을 받았다.
그 뒤로 종문에서 법담하는 데 이 특별한 양구와 여덟가지 방망이로써
영을 내려서 이치에 돌아가게 하는 것과
닥치는 대로 쓸어버려서 바르게 하는 것과
이치도 내버리고 바른 것까지도 쳐버리는것과
법찌게 책망하는 것들은 벌을 주는 방망이요,
종지에 맞도록 하는 것은 상을 주는 방망이요,
함부로 쓰는 것은 눈먼 방망이요
범부와 성인을 함께 쓸어 버리는 것은 바른 방망이와 네가지 할 같은 것들이니라
이와 같은 법들은 임제종과 조동종과 운문종과 법안종과 위앙종의 가풍이 되며
위로 모든 부처님과 조사스님으로부터 아래론 중생들께 이르기까지
다 제대로 갖추어 있는 당연한 일이다.
만약 이것을 여의고 설법한다는 것은 온전히 거짓말이니라.
조동종의 다섯가지와 임제종의 삼현삼요가 서로 뜻이 통하지 않음이 없으며
근원이 계합하지 못함이 없으리니,
임제종을 바르게 알면 조등종을 바르게 알수 있는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서는
무슨 간화선과 묵조선을 따로이 말하며
관념을 통일해서 큰 번뇌만 항복 받아서 미세한 번뇌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소승선과 최상승선과 소승선을 합해서 향해 나가는 대승선을 말하리오.
화두 의심이 타파되어 일체 번뇌가 없는 것과
참으로 잠잠하여 일체의 미세한 망상도 없는 것이 해탈 아님이 없으며
일체 번뇌가 없는 참으로 잠잠한 경지에서 나오는 힘을 사용하는 묵조선과
화두의심이 타파되어 일체의 추번뇌 세번뇌의 장애를 받지 않고
직관하는 가운데 용심이 나오는 평상심이다.
이름이 열반이려니와,
만일에 알지 못할진대 너희들 한 무리의 대중이
이미 제각기 식량을 싸들며 식량을 구하여 모으고
화두타파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을 일으켜서 오늘날까지 온지라
결제의 구십일 가운데 이십사시간안에 화두 의심을 간절하고 정성스럽게 경책하며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이르느냐 이르지 못하느냐 하는 것과
화두타파 하느냐 화두타파 하지 못하느냐 함을 묻지 말고
도량을 떠나지 말고 몸을 얽매며 다리에 힘을 붙여 틀고 앉아서
얼음위를 밟고 지나가는 것과 같이 화두를 의심하며
칼날 위에 달리는 것과 같이 하여 목숨을 버리고 몸의 형상을 잊어버리고
다만 화두를 의심하여 갈지니,
겨우 화두의심이 생겨지고 혼탁한 번뇌가 다한 곳과 생각이 쉬어지고
큰 번뇌를 항복받은 경지에 이르러서 경계가 바뀌어져서
본래 마음에 계합하게 되면 한 뜀에 뛰어 올라
부처가 되고 조사스님의 말씀에 속지 않음을 얻게 될 것이니,
설사 이렇듯이 깨달아 가더라도 오히려 이것은 내 마음이 곧 부처이다 하는
관념이 따라 붙는 일이라 만일에 내 마음이 곧 부처이다 하는
상대적인 관념을 초월한 절대적인 자리를 이를진대 꿈에도 보지 못함이니 무슨 까닭인가.
천리의 눈을 다하고자 할진대
다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격외선에 오를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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