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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비구들이여, 이 모임은 이와 같다. 이 비구들 중에는 아라한으로서 번뇌가 다하여 더없는 것을 얻어 마땅히 할 바를 하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스스로의 이로움을 얻어 맺혀 있는 것을 모두 없앤 비구가, 올바른 지혜로써 해탈한 비구가 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비구 중에는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고 화생으로서 남김 없는 열반에 들어서 저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된 비구가 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욕계의 세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고 탐진치를 엷게 하여 오직 한 번 이 세상에 돌아와 고를 모두 없앤 비구가 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들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욕계의 세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고 예류과를 얻은 자, 나쁜 곳으로 가서 떨어지지 않은 자, 확실한 도가 이루어진 자, 올바른 깨달음으로 갈 비구들이 있다. 여러 비구여, 이와 같은 종류의 여러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해설 붓다의 회상(會上)에는 수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있어 이 중에는 수행이 높은 성자들도 많이 있었다. 이 중에는 아라한(阿羅漢)의 세계를 증득한 성자도 있고,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성자도 있고, 일래과(一來果)를 얻은 성자도 있으며, 예류과(預流果)를 얻은 성자도 있었다.
아라한과를 얻으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더없이 안온함으로 가서 마땅히 하고 싶은 일을 행하는 힘이 생긴다. 여기에는 어떤 정신적인 집착도 없고, 자신의 지극히 참된 곳에 머물러서 더 바랄 것이 없게 되며, 지혜가 바르게 나타나 모든 걸림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수행이 극치에 이르러서 자기가 완성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세계를 얻은 사람을 진인(眞人)이라고도 하고, 마땅히 존경받을 만한 성자라고 하여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며, 번뇌의 적을 완전히 없앤 사람이라 하여 살적(殺賊)이라고도 하고, 다시는 번뇌로 고민하는 중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하여 불생(不生)이라고도 한다.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성자다. 또한 아라한은 인간의 정신이 최고의 이상에 도달한 것이므로 더 배울 것이 없는 세계라 하여 무학과(無學果)라고도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올바른 지혜가 있고 올바른 행이 행해진다.
다음에 불환과는 중생이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번뇌, 곧 탐욕, 노여움, 나나 우리 등을 고집하는 아집, 계로 정하여 금하고 있는 사항을 그릇되게 이해하여 취하는 소견(戒禁取見), 인과의 도리를 의심하는 것 등이다. 이로 인해서 고통받고 있으므로 모두 없애고,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서 다시는 고통받는 번뇌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게 된 성자의 세계다. 이런 세계에 도달한 사람은 다시는 고통받는 욕계에 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불환과를 아라한과의 밑에 해당하는 단계로 본다.
일래과(一來果)는 욕계의 세 가지 번뇌, 곧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인간계와 천상계에 통하게 되니, 인간계에 있으면서 이를 얻으면 반드시 천상에 있다가 이 과를 얻으면 우선 인간으로 가서 다시 천상과 인간계를 한 번 왕래한다. 이는 일래라는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류과는 수행자가 천상계에서 얻는 세계이다. 고의 원인인 번뇌를 없앰으로써 고가 없는 성자의 길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단계다. 여기에 이르면 불교의 근본 진리인 고집멸도 사성제를 명료하게 보는 지혜가 열린다. 더 수행하여 이 단계를 지나 번뇌를 더욱 많이 끊으면 천상계에 태어나서 천상의 낙을 맛볼 수 있는 일래과에 이른다.
그러나 일래과에서는 아직 인간의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은 인간계로 돌아온다. 더 수행하면 모든 번뇌를 끊고 적정의 참된 즐거움을 몸으로 증득하는 불환과에 이른다. 여기에서 다시 더 나아가면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세계인 열반에 들어서 생과 사의 미혹의 유전함이 없는 성자, 즉 아라한에 이르게 된다. 경에서 말한 '나쁜 곳(지옥 등)에 떨어지지 않는 자'는 일래과를 얻은 자요, '결정된 자'는 불환과를 얻은 자요, '올바른 깨달음으로 갈 자'는 아라한과를 얻은 성자다. 이러한 성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 이 회상이다.
원시불교나 소승불교의 수행목표는 이 네 가지다. 그러나 대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살이나 부처의 세계가 설해지고 보살이나 부처가 되는 수행을 닦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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