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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사념처(四念處)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가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주 속에 사정근(四正勤)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종류의 비구들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사신족(四神足)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같은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오근(五根)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들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오력(五力)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칠각지(七覺支)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여러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거룩한 여덟 가지 길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해설 앞에서 말한 아라한과, 불한과, 일래과, 예류과의 세계는 우리가 불도를 닦는 첫 단계에서 들어가는 성문(聲聞)의 길이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수행하여 자기완성을 목표로 해탈에 이르려고 애쓰는 출가한 성자들이다. 이들은 삼십칠도행을 닦아서 번뇌를 없애고 성자의 세계에 머물러서 열반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은 사념처를 닦아서 이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사정근을 닦아서 이에 머물 수도 있고, 사신족을 얻은 이도 있고, 칠각지를 얻어서 머무는 이도 있고, 팔정도의 수행을 완성하는 이도 있다.
그러므로 경에서도 이들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성팔지도의 수습에 정진하여 이에 머물고 있는 성자들이 모여 있다. 그러면 사념처의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
흔히 불도를 닦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 다섯 가지 그릇됨을 없앤다. 곧 부정관(不淨觀)으로 탐욕을 없애고, 자비관(慈悲觀)으로 성내는 마음을 없애고, 인연관(因緣觀)으로 어리석음을 없애고, 계분별관(界分別觀)으로 실체가 있다는 아견(我見)을 없애고, 수식관(數息觀)으로 마음의 산란을 없애고, 염불관(念佛觀)으로 여러 가지 번뇌를 없앤다.
다섯 가지 그릇된 마음을 없애고 관법을 닦은 뒤에 사념처관을 닦는다. 사념처관은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하며 몸을 골똘히 생각하여 몸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신념처(身念處)의 수행을 닦는다. 또한 마음을 골똘히 생각하여 받아들여지는 모든 감수작용에서 마음에 즐거움을 주는 음행이나 자식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즐거움이나 재물로 인한 만족스러운 즐거움 등이 끝내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고가 됨을 아는 수행을 닦는다. 또한 골똘히 생각하여 우리의 마음을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늘 변화하며 생멸한다는 무상함을 관하는 수행을 닦는다.
또한 모든 사물을 골똘히 생각하여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수행을 닦아서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영원불멸하다는 상(常)과 즐거움이라는 낙(樂)과 실체가 있다는 아(我)와 깨끗하다는 정(淨)의 잘못됨을 없앤 사람들이 있다. 이 수행에 있어서는 이들 다섯 가지를 각각 나누어서 골똘히 생각하기도 하고, 모두 다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가치의 전환이 이루어지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소승에서 이 수행은 열반을 증득하는 방편으로 닦는다. 그래서 오정신관 다음에 이 사념처관을 닦아서 도를 깨닫는 길로 들어간다고 하여 《삼십칠도품경》에서는 첫 번째의 행법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념주는 지혜를 얻는 수행이다.
다음으로 사정근(四正勤)을 닦아서 부지런히 애쓰는 비구가 있다. 이는 네 가지 바른 노력이다. 나타나지 않은 악을 끊기 위한 노력, 이미 생긴 악을 끊기 위한 노력,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 이미 나타난 선을 더욱 증대하기 위해 힘쓰는 노력 등이다. 이런 노력은 태만심을 끊고 마음의 장애를 없애기 때문에 사의단(四意斷)이라고도 한다. 《삼십칠도품경》에서는 두 번째의 수행이라고 설해진다. 그러므로 이 사의단은 계의수행에 해당한다. 이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이 이루어진 비구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
다음에는 사신족(四神足)을 닦아서 이에 머물고 있는 비구가 있다. 사신족은 네 가지 신족, 즉 네 가지 뛰어난 정신력이다. 사물을 투시해 그 실체를 아는 천안통(天眼通)을 얻는 수행과, 아무리 미세한 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청력을 얻는 수행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능히 꿰뚫어볼 수 있는 힘을 얻는 수행과, 허공을 날 수 있는 신통력을 얻는 수행 등 네 가지 자재력을 얻은 비구들이 모여 있다. 이 네 가지 신통력은 정신집중으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사신족은 정(定)의 수행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오근의 수습으로 이에 머문 비구가 있다고 했다. 오근은 흔히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의 다섯이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에 있는 감각기능을 말한다. 이들은 각각 밖의 대상을 잡아서 이에 적응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삼십칠도품경》에서는 이런 신체기관의 기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다섯 가지 기능을 말한다. 이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번뇌를 누르고 올바른 길로 나가게 하는 뛰어난 힘이 있다고 한다. 바로 믿음(信)과 정진(精進)과 골똘히 생각하는 능력(念)과 정신집중(定)과 지혜(慧) 등이다. 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근이 바로 이들 다섯 가지 정신기능이다. 이들 오근은 번뇌를 없애는 힘이 되기 때문에 오무루근(誤繆루근)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누(漏)란 번뇌를 말한다.
믿음이 확립되어 마음에 유순함이 생기고, 하고자 하는 일에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정진력이 생기고, 사물을 생각하고자 하면 언제나 골똘히 생각할 수 있으며, 정신이 집중되어 한결같이 부동심을 가지고 올바른 지혜로 사물을 분별하는 힘이 최고에 이르는 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이 이루어진 사람은 다시 다섯 가지 힘을 얻는다. 곧 다섯 가지 근본능력의 힘을 말한다. 오근의 힘(五力)이 갖추어진 사람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게 된다.
칠각지의 수습에 머문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사념처에서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까지의 수행은 번뇌를 굴복시키는 수행이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수도위(修道位)에 속한다. 오력이 증대하면 버노니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머물면 드디어 깨달음이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돕는 일곱 가지라 하여 칠각지라고 한다. 이것은 '삼십칠도품' 가운데 제 6의 행법이다.
일곱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불도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지혜로써 잘 살펴서 가려내는 데 7종이 있다는 뜻이다.
① 법을 살펴서 선악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擇法覺支), ② 수행할 때 마음의 삿됨을 버리고 용맹하게 바른 길로 정진하는 것(精進覺支). ③ 선한 법을 얻어서 마음이 기뻐하는 것(喜覺支), ④ 그릇된 견해나 번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알아서 거짓됨을 버리고 선근이 생하는 것(除覺支), ⑤외경의 집착을 없앨 때에 그릇된 추억을 버리는 것(捨覺支), ⑥ 정신집중이 되어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正覺支), ⑦ 항상 골똘히 생각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念覺支) 등이다. 마음이 혼침하면 ①-③으로 일깨우고, 들뜨면 ④-⑦로 다스린다. 이와 같이 칠각지가 이루어지면 진리를 여실히 보게 되고, 생사를 떠나서 열반에 들게 되므로 도에 이른다. 이것이 일곱 번째의 팔정도로서 설해졌다. 그래서 《삼십칠도품경》에서는 다음의 팔정도를 제7의 행이라고 하여 팔도지(八道支)라고 한다.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까지는 아직 번뇌가 있는 것이요, 칠각지와 팔정도에서는 번뇌가 이미 없어진 것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팔정도의 수행이 이루어진 세계는 어떠한가. 이 여덟 가지 길은 거룩한 진리 그대로 행해지므로 성팔지도(聖八支道)라고 한다. 《삼십칠도행경》에서는 팔직도(八直道)라 했다. 불교실천의 8종이다. 이는 중도(中道)이며, 정도(正道)이며, 성도(聖道)이다. 여덟 가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팔정도지(八正道支), 또는 팔정도분(八正道分)이라고도 한다. 정견(定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定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옛 번역에서는 《삼십칠도품경》에서와 같이 직견(直見), 직치(直治), 직어(直語), 직행(直行), 직업(直業), 직방편(直方便), 직념(直念), 직정(直定)이라고 했다.
이들 여덟 가지는 계(戒), 정(定), 혜(慧)에 배당시켜서 볼 수 있으니 붓다가 설하신 근본 법문이다. 이는 붓다의 근본교리이므로 사제(四諦), 십이인연설(十二因緣說)과 함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다. 정견은 지혜요 인연법이요 중도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이다. 정사유는 모든 사유분별은 실다운 것이 없으며, 생각하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가 없다고 여겨 집착하지 않는다. 일체의 사유분별이 평등하기 때문에 집착할 바가 없다. 정업은 올바른 행위를 말한다. 말이나 몸, 마음의 움직임이 모두 걸림 없는 정업이다. 이러한 모든 움직임은 허망하고, 실다움이 없고, 악업이나 선업에도 끌리지 않으며, 행한 바나 지은 바가 없으니 정업이다. 정명은 올바른 생활이니 모든 생활이 삿되지 않아서 인연법 속에서 살며, 옳고 그름에 머무르지 않고, 청정한 지혜로써 살고, 행하는 생활이다. 정어는 올바른 말이니 실다운 말만을 하여 제법의 실상을 나타낸다. 모든 말이 청정한 구업을 짓도록 한다. 정정진은 정심(定心) 속에서 노력하니 고나 낙에 집착하지 않고, 근심과 기쁨에 끌리지 않으며, 악법을 용감히 떠나고 선법에도 애착 없이 한결같이 용맹하게 노력한다. 정정은 올바른 선정이니 선정에 들어서 흔들리지 않고, 들뜨거나 가라앉지 않는다. 또한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인연법을 알아서 선과 악의 일어나는 바를 알고, 선법의 인연에 따라서 스스로 선정에서 유희하여 행함에 자재하고 출입에 걸림이 없다. 이와 같이 37종의 행이 닦아지면 열반에 이른다. 열반이란 번뇌가 없는 곳이다.
그러면 왜 37종을 모두 닦아야 하는가. 37종의 도행은 처음 수도하는 사람이 도로 들어가는 도정이다. 수행자는 먼저 스승에게 도를 닦는 방법을 물어 그 길을 배운다. 그리하여 먼저 마음가짐을 다져야 한다. 이것이 사념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부지런히 노력하면 사정근이 된다. 부지런히 닦아서 정진하면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고 뜻대로 움직인다. 이것이 사신족이다. 마음이 섭심되어 내뜻대로 되면 마음의 힘이 생긴다. 이것이 오근이고, 그 힘이 더욱 증진하여 능히 번뇌를 끊으면 오력이다. 힘을 얻으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선법을 모아 나의 것으로 삼으니, 이것이 칠각지다. 이렇게 하여 진리가 내 것이 되면 열반의 세계에 머물러서 모든 삶이 진리를 떠나지 않고 무위삼매에서 자재하게 된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경에는 이런 세계에 도달한 성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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