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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부정관(不淨觀)을 수습하고 애쓰며 노력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무상관(無常觀)을 수습하고 애쓰며 노력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해설 좌중에 부정관과 무상관을 닦아 간직하려고 애쓰는 비구가 있음을 찬양한 것이다. 부정관은 우리의 몸이 깨끗하지 않음을 아는 관이다. '깨끗하지 않다'는 '더럽다'의 반대 개념이다. 불교에서는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라 번뇌가 있고 없음에 따라서 더러움과 깨끗함이 나누어진다. 즉 번뇌가 있는 마음을 더럽다고 하고 번뇌가 없는 마음을 깨끗하다고 한다. 그래서 번뇌를 물들은 더러움, 즉 염오심(染汚心)이라고 한다. 번뇌는 우리의 몸에 의해서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구성이나 작용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이에 매이지 않게 한다. 이것이 청정이다. 번뇌는 집착이기 때문이다. 몸이 부정하다고 하여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로 이루어지고 인연으로 모여 있으므로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의미를 떠나서 존재한다. 이를 절대적으로 잘못 알고 집착하기 때문에 멋대로 깨끗하다고 생각하여 집착한다. 몸은 이미 고나 낙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늙고 병들면 고민에 빠진다. 모든 고는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부정관으로서 깨끗하다는 잘못된 견해를 없애면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고가 없어져 열반에 이르게 된다.
무상관도 이와 같다. 무상관은 우리의 마음을 관찰하여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음은 실체가 없으므로 어떤 것이 나의 마음인지, 어떤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인지, 악한 마음인지, 선한 마음인지 알 수 없다. 마음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서 일어나고 없어지므로 걸릴 것이 없다. 움직이며 변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여서 열반의 세계로 간다.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五蘊)은 인연에 의해서 생하고 멸하므로 무상이요 고요 무아임을 알면, 적정의 세계 속에서 고를 떠나 낙에 머물고, 무상을 떠나 상에 머물고, 무아를 떠나 참된 나에 머문다. 이것이 열반의 세계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어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니 고가 있을 수 없다. 고가 없으니 스스로 고요한 적정락이 있게 된다. 이를 무루(無漏)의 낙(樂)이라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