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摩訶)
‘마하’는 범어로 ‘Maha’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보는 것처럼,
마하는 범어의 ‘Maha’를
발음만 그대로 따온 것일 뿐,
한자로는 특별한 뜻이 없습니다.
‘마하’의 뜻은,
‘크다, 많다, 뛰어나다’는
의미로서,
우리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의 크고 많다는 개념을
훨씬 초월하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라든가, ‘엄청나게’, ‘무진장’등의 개념으로도
이 마하를 풀이하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이
마하는 절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분별의 세계에서 상대적으로 다른 것보다 크고,
다른 것보다 많고, 상대보다 뛰어나다는
정도의 개념이 아니라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크다는, 그리고 많다는 개념인 것입니다.
‘마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상대 세계의 분별심으로부터 과감히 벗어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누군가를 보고 ‘아! 저 사람은 키가 크다’고 했을 때,
우리들의 생각은 어느 정도의
키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170cm 정도? 혹은 180cm,
아니면 190cm 정도를 키가 크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딱히 어느 정도를 큰 키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시절,
못 먹고 배고프던 시절의 큰 키의 기준과
지금처럼 잘 먹고 잘 사는 시절의 큰 키의 기준이
엄연히 차이가 나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정년 퇴임하신 대학 교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당신의 키가 164cm인데,
젊었을 때는 보통 정도의
키는 되었기 때문에
키에 대한 컴플렉스가 전혀 없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지금은 175cm의 키를 가지고도
보통 수준으로
인정받기가 힘들다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키를 예로 들어보았는데,
이처럼 키가 크다고 했을 때 그 기준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항상 바뀌게 마련인 것입니다.
옛적의 기준과 지금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지요.
그렇기만 할까요?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 간에도
이런 상대적인 개념의 차이를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키가 큰 농구 선수들 사이에서는 180cm 정도의
키가 작은 키로 통할 것입니
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현재 우리 사회에서 180cm 정도면 꽤나 훤칠하고 큰
키가 아닙니까.
이처럼 우리가 ‘크다, 작다’ 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지 상대적인 분별심일 뿐입니다.
누군가의 키가
176cm이라 했을 때,
180cm가 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작은 키이고,
170cm도 안 되는 작은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제법 큰 사람으로 통할 것입니
다.
다시 말해, 우리가 ''크다・작다''
혹은 ''많다・적다'',
''뛰어나다・어리석다''라고 느끼는 등의 모든 분별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즉, 무엇을 붙들고,
잘났다거나, 못났다거나, 혹은 크다거나, 작다거나 하는 등의
분별심을 내는 것은 무명(無明) 때문에 일어나는
어리석음의
과보(果報)일 뿐인 것입니다.
비슷한 다른 예로
젓가락을 가지고 길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또한 전봇대라는 인연
앞에서는 짧게 되고,
이쑤시게라는 인연과 함께라면 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젓가락 그 자체만을 가지고 길다 짧다고 한다는
것은
잘못된 우리의 분별일 뿐,
본래자리에서는 그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인연따라 짧을수도 길수도 있을 뿐,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잘생겼다, 못생겼다는 분별
똑똑하다, 어리석다는 분별,
뚱뚱하다, 말랐다는 분별...
이 모든
분별들은 본래부터 있던 고정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인연따라 분별하고 고정지어 놓고는
스스로 지어 놓은 고정관념에 빠져
괴로워하고 답답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보고 크다고 할 것이며,
무엇을 보고 작다고 하겠습니까?
이처럼
고정된 것이 없기에,
‘크다, 작다’ 라고 하는 인식의 극단을 벗어나라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중도(中道)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분별은 단지 주위의 환경[인연]이 어떠한가에 따라
달라지는 개념일 뿐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위의
인연 따라,
예컨대 작은 사람들 앞에서는 큰 사람도 되었다가
또 큰 사람들과의 인연 속에서는 작은 사람도 되고,
이렇게
일체와 함께 돌아가는 것일 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나 혼자 무인도에 살았다면,
‘내가 크다・작다, 잘났다・못났다,
똑똑하다・어리석다’라는
분별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무 인연이 없고 오직 혼자 뿐이니 무슨 분별이 생기겠습니까.
즉, 큰 사람이 있으니 작은 사람도 있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르침을 다른 말로 연기법(緣起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닌 연(緣)하여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이해한다면,
중도, 연기의 가르침을
무아(無我), 무분별(無分別),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만물이 본래 크고 작은 것이 아니라
주위의 인연, 주위의 조건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이 크다, 작다고 하는
분별심을 일으키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본래 적정(寂靜)하고
청정한 깨달음의 세계에서 보면 무분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본래자리에서는 분별할 것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스님네들이 ‘분별하지 마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정되게 돌아감이 없는 세상에서
무엇을 붙들어 ‘나다’ 하고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큰 것이
나인가요, 작은 것이 나인가요?
착한 것이 나입니까, 악한 것이 나입니까?
그러므로, ‘나다’ 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것이고,
그렇기에 부처님께서 무아(無我)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나는 키가 크고, 잘생겼고, 똑똑하고...
등등의 분별을
짓고 살았지만
이 모두가 인연따라 조건따라 잠시 이름지어진 것일 뿐
딱히 고정지어 이러저러하다고 할 만한 ‘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는 없다는 것, 무아라는 말입니다.
그렇기에 아상(我相)이 깨어진 자리를 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다’ 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세상이므로,
나 이외의 다른 무엇도 딱히 내세울 것이 없으며,
그런 까닭에 일체제법엔 자성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즉 무자성(無自性)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무자성이며,
무아이고,
일체가 연기되어 함께 어울려 돌아가는
이 세계의 모습을 바로 공성(空性)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공(空)했다 이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근본이 되는 공 사상이며,
불교의 근본사상인 연기법인 것입니다.
이런 연기의 세계, 공성의 세계인 이 세계를 법계(法界)라고 부릅니다.
이후 인도불교 사상사에서
용수가 반야 공사상을
체계적으로 제정립한
중관 사상의 핵심논서인 『중론』 관사제품에서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여러
인연으로 인해 생한 법을 나는 공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임의로 만들어진 가짜의 이름이며, 또한 중도의 의미이다.
일찌기 한 법도
인연으로 좇아 생하지 아니함이 없으니,
이런 연고로 일체법은 공 아님이 없다.“
이와 같이 우리가 사는 이 법계는
바로 상대적인 세계, 연기의 세계입니다.
이처럼 일체가 상대적으로 돌아가는 상대의 세계에서,
이 경의 제목에는 재미있게도
‘마하’라는 절대 개념이 붙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마하’는, ‘절대적으로 크고 많고 뛰어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것이 아니고,
절대적으로 큰 것,
즉 일체를 초월하는 절대적으로 큰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하고,
공간적으로 무한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절대적으로 크고, 많고,
뛰어나다는 것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은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기에
일체의 모든 상대 개념을
초월합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일체의 모든 상대적인 것과 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이 아니므로 대비할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상대가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상대이기 때문에
절대일 수 있는 것입니다.
너와 내가 따로 따로 있게 되면
상대적으로 크고 상대적으로 작아질 수 밖에 없지만,
일체가 둘이 아닌 하나의 자리에서는
내세울 상대가 없어지기 때문에 절대를
내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하’라는 수식어가 경의 앞에 붙어 있는 것은
단순한 문자의 표현이 아니라,
‘최고의 경지, 부처님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일체가 둘이 아닌 법신 부처님의
법계 편만하시고, 원융(圓融)하신
모습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쯤에서,
‘마하’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마하’를 좀 더 자세히 구분해 보면,
크게 세 가지의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는 ‘크다(大)’의
의미로
이는 우주, 허공, 삼천 대천 세계, 수미산 등을 부를 때
쓰여지는 공간적인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많다(多)’로
팔만 사천, 항하사(恒河沙), 미진수(微塵數) 라는
불교 용어에서 지극히 많음을 표현하는 수식어로
양적인
개념으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불교 경전에서 ‘팔만사천’ 혹은 ‘항하사’
등의 비유가 나오면 그 말의 의미는
실제로
팔만 사천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많다는 개념, 즉 마하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초월하다, 뛰어나다,
탁월하다’의 뜻으로
불변, 진실, 수승(殊勝)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처럼, ‘마하’의 의미는,
감히 우리 범부의
눈으로 자로 재듯이 재어 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처음 중국에 불경이 전해질 때,
그 뜻을 번역할 단어가 마땅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단어로 번역하면 의미가 변질될 것을 우려해
‘마하’라는 말을 발음 그대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괜히
기존에 있던 어설픈 단어로 사용했다가는
그 단어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인해
의미가 한정되어질 수 있음을 경계한
까닭입니다.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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