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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들이여, 비구가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힌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모든 받아들임에 있어서 받아들임을 따라서 관하면 그때 전일한 정진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것을 모든 받아들임 속의 받아들임이라고 부른다. 곧 모든 입출식에 마음을 잘 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모든 받아들임에 있어 받아들임을 따라 관하면서 그때에 전일하게 정진하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해설 수념처행(受念處行)의 가르침이다. 여기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우리의 감수작용, 곧 기쁨이나 즐거움 등과 같이 하여 그것을 깨달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숨의 출입에 따라서 마음속에 기쁨이나 즐거움이 받아들여졌다면, 그 기쁨이나 즐거움은 즐거움도, 기쁨도 아님을 알게 된다. 경에서의 '모든 받아들임에 있어서 받아들임을 따라 관하면서'는 모든 감수작용을 감수되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호흡이 같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때 받아들여진 그 감수작용은 고요한 마음에 비친 직간의 힘에 의해서 달라진다. 즐거움이나 기쁨이 느껴진 그대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올바른 앎이다. 그러므로 이에 탐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에서 '세간에 있어서의 탐욕이나 근심이 조복된다.'고 했다. 세간적인 탐욕이나 근심은 받아들이는 느낌 그대로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이 집중되어 그것의 길고 짧음을 깨달아서 아는 마음은 이미 세간을 떠난 마음이다. 항상 흔들리고 집착하는 마음이 세간이기 때문이다. 호흡에 생각이 같이 따라서 고요함과 움직이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의 감수작용은 기쁨이나 즐거움이면서도 세간적인 차원을 떠나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이것이 도이다.
그래서 경에서 '나는 그것을 받아들임 속에 있는 받아들임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일반적인 감수작용과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인 기쁨과 즐거움이다. 감수작용인 수(受)는 수이면서 앞의 수와는 다르다. 세간적인 수가 아니라 출세간적인 수이다. 속(俗)으로서의 수이면서 진(眞)인 수이다. 이때는 속의 수가 진의 수로 바뀌었으니 어찌 근심이나 탐욕이 있으랴. 기쁨이나 즐거움이 기쁨이며 즐거움이면서도 그에 탐착하지 않고, 없어져도 근심하지 않는다.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서 그런 마음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근심과 탐욕이 따르는 수를 부정하고 다른 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앞의 수가 바뀌는 것이다. 곧 조복이다. 앞의 수와 뒤의 수는 서로 떠나지 않으면서 앞의 수가 뒤의 수로 바뀐다. 이를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올바른 앎이 있고 한결같은 정진이 있으며 인연법을 생각하여 떠나지 않는 억념(憶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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