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실천강의

[스크랩] 구경열반 삼세제불 - 16강

수선님 2017. 12. 17. 12:42

 

반야심경 강해 -16강-

구경열반 삼세제불

 

 

구경열반

‘우리는 무엇 때문에 불교를 믿고 있을까?’ ‘과연 불교가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궁극의 결과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은,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행복은 무엇인가’하는 물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최고의 목표는,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젊은 사문이 깨달음을 얻어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신 것처럼, 그와 똑같은 열반, 해탈을 증득(證得)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다 수행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의 궁극적인 목표도 마찬가지로 바로 이 것, ‘구경열반’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현실생활에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온갖 두려움, 괴로움, 마음에 걸림, 전도된 몽상 등을 깨끗이 씻어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결국에 궁극의 열반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수행이 바로 반야바라밀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열반이란 과연 무엇인가? 원어로는 ‘니르바나(nirvana)’의 음역으로, 원래의 의미는 ‘불어 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불어 꺼버린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말은, 괴로움이 모두 소멸된 상태인 절대적인 행복, 최고의 행복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앞에서 누차 언급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제(諸)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열반에 대하여 간단히 언급해 두고자 합니다.

『잡아함경』에서는 “탐욕, 진에(嗔恚), 우치(愚癡)가 길이 다하고, 일체 번뇌가 길이 다한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근본 불교 경전에서는 탐, 진, 치 삼독심이 모두 소멸된 상태를 열반이라고 이름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본래로 내가 공하여 무아(無我)이며, 무자성(無自性), 공(空)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보지 못하여, ‘나다’ 하는 아상에 얽매여 있으므로, 그로 말미암아 탐, 진, 치 삼독심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탐진치 삼독이 모두 소멸하여 ‘나다’, ‘내 것이다’, ‘내가 옳다’, ‘내 맘대로 한다’고 하는 아상이 모두 소멸되었을 때, 열반의 즐거움은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열반의 두 종류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법의 열반계가 있으니, 유여(有餘), 무여(無餘)이다. 유여는 어떠한 것인가? 이에 비구가 다섯 가지[貪, 瞋, 身見, 戒禁取見, 疑]를 면하면, 곧 저것이 반열반으로서 이 세상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또 무여는 어떤 것인가? 이에 비구들이 유루를 다하고 무루를 이루면 의(意) 해탈, 지혜 해탈이니, 제 몸으로 증(證)을 지어서 스스로 생사에 유희해 마치고, 범행(梵行)이 이미 성취되어서 다시 유를 받지 않고, 여실히 아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열반계는 마땅히 방편을 구하여 무여 열반계에 이른다.” 이처럼 열반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 성취하는 열반을, ‘생존의 근원’, 즉, 육신이 남아 있는 열반이라 하여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이라 하며, ‘생존의 근원이 남아 있지 않은 열반’을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이라 하는데, 이는 완전한 열반을 의미하므로 반열반(般涅槃)이라고 합니다. 이는 정신적, 육체적인 일체의 고가 모두 소멸된 상태의 열반을 말합니다.

이와 같이, 열반은 일체의 괴로움이 모두 소멸한 최고의 행복의 경지이지만, 우리들은 열반에 대해서 너무도 멀게만 느낄 뿐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절에 오랫동안 다니시는 신도님들에게 당신의 소망이 무엇인지, 왜 절에 다니는지를 물어보면, 대부분 ‘자식 대학 붙게 하기 위해서’, ‘남편 직장에서 진급할 수 있기 위해서’, ‘가정의 화목 때문에’, ‘병 낫게 하기 위해서’ 등의 대답을 자주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 라고 대답하는 이는 열 중의 한 분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은가 생각이 됩니다. 이것 또한 전도된 생각이 아닐까요. 대부분의 경우, 당장의 이익만이 가장 중요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해서 영원한 행복을 추구해야지, 당장에 시급한 문제들에 대해서만 너무 답답하게 집착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깨달음, 열반이 되어야 합니다. 생사를 초월한 행복을 추구해야지, 당장 지금 이 시간에 얽매여서 작은 행복에 집착한 나머지, 커다란 근본의 행복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면 안 될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까지고 괴로운 윤회를 반복하는 것이지요. 그 힘을 돌려 근본에 물을 대 주려고 하는 의식의 전환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행복한 사람만이 편안히 앉아 도(道)를 닦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삼세제불

삼세제불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지칭합니다. 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들이 모두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선 ‘삼세제불’이 나타내고 있는 대승불교의 부처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을 한 분으로 한정시켜 역사 속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신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와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분의 부처님이 등장합니다. 시간적으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서 등장하시며, 공간적으로는 시방(十方)이라 하여 동・서・남・북 사방과 4 간방(間方)인 동남・남서・서북・북동 그리고 상・하의 두 방향을 합하여 열 방향을 설정하여, 이 모든 시간과 공간에 상주하고 계신다고 말합니다. 이렇듯 대승불교에서는 시공을 초월하여 한량없이 많은 부처님이 계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누구인가요? 불교의 우주관을 보면, 우주는 끊임없이 성・주(住)・괴(壞)・공(空)을 반복한다고 하는데, 이 각각의 성겁・주겁・괴겁・공겁의 기간을 중겁(中劫)이라 이름하고, 이 네 가지 중겁이 모여 하나의 대겁[一大劫]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대겁이 경과한 과거의 우주를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이라 하고, 현재의 우주를 현재현겁(現在賢劫)이라 하며, 다가올 미래의 우주를 미래성숙겁(未來星宿劫)이라고 합니다. 경전을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세에 일천 불이 출현하셨고, 또 출현하리라는 기록을 볼 수 있습니다.

『삼겁삼천불명경(三劫三千佛名經)』에 의거해 보면, 과거장엄겁 천불은 제 1 화광(華光) 여래불로부터 시작하여, 제 1,000 번째로 비사부(毘舍浮) 여래불이 계셨다고 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현겁의 부처님이신 현재현겁 천불은, 제 1 구류손(拘留孫) 여래불, 제 2 구나함모니(拘那含牟尼) 여래불, 제 3 가섭(迦葉) 여래불, 제 4 석가모니(釋迦牟尼) 여래불, 제 5 미륵(彌勒) 여래불, 제 6 사자(師子) 여래불 등에서 시작하여 제 1,000 번째는 누지(樓至) 여래불이 계십니다. 미래성숙겁의 부처님은, 제 1 일광(日光)여래불로부터 제 1,000번째로 수미상(須彌相) 여래불이 출현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삼세의 부처님 가운데 현재 현겁의 네 번째 부처님이 바로 2,500년 전 이 땅에 태어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신 것입니다.

이상에서 말한 시방삼세의 제불이란, 이처럼 구체적인 부처님의 명호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실은 구체적으로 이러한 부처님에게만 한정된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누구라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되면 부처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방삼세의 어떠한 중생이라도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 것이지요. 바로 이 부분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우리 모두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증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즉 모두의 가능성, 최고의 존엄성을 일러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명호는 각각 다르고, 중생의 모습은 각각 다르지만, 사실 본래 몸은 하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것을 이름하여 법신(法身)이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법신(法身), 보신(報身), 화신(化身)이라는 삼신불(三身佛)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법신(法身)이란, 영원불멸의 진실한 모습으로, 진리 그 자체를 몸으로 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순수하여 차별상이 없으므로 공(空)과 같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이 깨달으신 절대 진리 그 자체를 인격화시킨 것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실상반야의 지혜가 바로 법신의 모습을 깨달아 그것과 하나된 지혜인 것입니다. 이러한 법신불을 『화엄경』에서는 비로자나 부처님이라 하고, 『대일경(大日經)』에서는 대일여래(大日如來)라고 하는데, 큰 절에 가보면 비로전에 바로 이 법신 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수인(手印)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 보신(報身)은 진리 그 자체인 법신이 인연을 따라 나타난 불신(佛身)입니다. 한량없는 시간에 걸쳐 무수한 수행을 쌓은 결과, 모든 것이 진리와 하나되어 무한한 공덕이 갖추어져 있는 부처님이십니다. 대표적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들 수 있는데, 이 부처님은 법장(法藏)이라는 비구로 여러 생을 수행하며, 48 대원(大願)을 성취하여 부처님이 되셨고, 스스로 극락(極樂)이라는 정토를 만들어 중생을 교화하고 계십니다.

세 번째, 화신(化身)으로, 응신(應身)이라고도 부릅니다. 아미타 부처님과 같은 보신불(報身佛)을 친견하지 못한 인연 없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몸을 드러내 주시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2,500여 년 전 이 땅에 태어나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사시며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이 바로 화신불인 것입니다.

법신의 진여실상, 상주불변하는 모습을 곧잘 달에 비유하며, 보신은 법신에서 온갖 공덕이 생겨 두루 일체를 비춘다고 하여 달빛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또한, 화신은 인연을 따라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화하여 출현하시는 몸이기에, 달 그림자가 물에 비치는 것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소승불교에서는 오직 석가모니 부처님을 교주로 하여 믿고 있는 데 비해서, 대승불교에서는 시간적으로 삼세, 공간적으로 시방에 항상 상주하고 계시는 법신과, 인연을 따라 모습을 보이시는 공덕의 몸인 보신, 그리고 이 세상에 직접 출현하셔서 중생의 어리석음을 일깨우시는 화신의 부처님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한 분, 두 분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걸쳐 수많은 부처님이 계시며, 공간적으로도 동방 만월 세계의 유리광 여래불, 서방정토 극락세계 아미타불 등 시방(十方)에 수많은 부처님이 계시다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소승불교의 불신관(佛身觀)과는 사뭇 다른 점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법상스님 지음
출판사
무한 | 2004-08-04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실질적인 행복과 내적 평...
가격비교

출처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글쓴이 : 법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