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강해 -15강-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앞의 입의분에서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추어보고 일체의 고통과 액난에서 벗어났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절차로써 괴로움을 여의고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수행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파사분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입의분과 파사분에서 자세히 다루었던 반야바라밀다에 대한 수행의 결과는 과연 무엇인가? 다시 말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보리살타, 즉, 보살은 과연 어떠한 이익과 공능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을 바로 이 장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심무가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를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보리살타가 보리살타일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즉, 보리살타, 보살이란 반드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야 한다는 속뜻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면 어떠한 공능,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가 이어서 나타납니다. 우선 첫째로, 마음에 걸림이 없게 되며, 둘째로, 걸림이 없기에 일체의 공포가 없고, 셋째는, 뒤바뀐 허망한 생각, 즉, 전도몽상(顚倒夢想)을 멀리 여의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현실에서 부딪치는 괴로움, 공포, 잘못된 생각 등의 잘못들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공덕이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하여 마지막에는, 마침내 모든 괴로움의 뿌리를 끊어 버리고 열반의 즐거움에 이를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씩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공능인, 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부분부터 살펴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입니다. 공(空)의 세계에 무슨 걸릴 것이 있겠습니까? 나와 너 모든 일체가 스스로의 자성이 없어 무아이고, 그 존재 속에서 벌어지는 선악, 빈부, 귀천, 이 모든 것이 공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걸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 크나큰 장벽이 나를 가로막고 서 있다고 느끼는 적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관찰해 보면 나를 막아서고 있는 장벽은, 실은 나를 막아서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되어 인연 따라 잠시 내 앞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일 뿐입니다. 장벽을, 장벽으로 보면 나를 괴롭히는 장벽이 될 것이고, 공으로 본다면 다만 고정되지 않고 잠시 왔다가 스쳐 가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허깨비이며, 꿈과 같은 환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본시 실체가 없어 이러할진대, 여기에 걸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헛개비,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진짜로 있는 것이라 착각하여 걸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장벽이 나타나고 괴로움이 실체(實體)로 나타나서 외부의 사물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스스로 마음이 걸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걸림 없이 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아주 중요한 일을 추진한다고 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이런 저런 온갖 주위의 경계에 이끌려 마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걸려 있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올바르다는 생각으로 진행을 하였지만, 주위에서 사람들이 그 일에 대해 비난을 하게 되면 대부분 실망하여 힘이 빠지고, 그러다가 해야 할 일도 흐지부지 되는 경우가 많게 마련입니다. 일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칭찬과 찬양을 받으면 그 일이 잘 되고 잘못 되고를 떠나서 어깨를 들썩이며 행복에 젖어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주위의 비난과 칭찬 어느 것에도 흔들리거나 걸리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의 중심을 잡고 밀고 나아갈 수 있는 우직함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어느 극단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도를 실천하는 길이요 걸림 없이 살아가는 반야바라밀 수행의 공능인 것입니다.
무가애고 무유공포
앞에서 ‘무가애’라고 하여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통해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이익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반야바라밀다의 수행을 통해 어떠한 경계가 닥치더라도 여여(如如)하여 걸림이 없음을 체득한 보리살타에게 공포가 없음은 당연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마음에 걸림이 없는 이는 공포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일이 벌어지더라도 마음에 걸림이 없어 어디에도 흔들리지 않는 이라면, 어느 마음을 딱히 찍어 두려움이나 공포심이 몰려올 수 있을까요. 여기에서 공포심이라고 하면, 작게 생각하여 두려움, 공포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괴로움, 불안함 등의 모든 괴로운 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대품반야경』에서는 이러한 공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모든 선남자 선녀인은 혼자서 빈집에 있거나, 혹은 무서운 황야를 가거나, 혹은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있게 되어도 마침내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는다.” 여기에서, 반야바라밀을 듣고, 의지하며, 바르게 사유하는 이는, 세 가지에 대한 두려움을 여의게 된다고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혼자서 빈집에 있거나’ 라고 한 부분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이야기하고 있는 공포심의 대표적인 것이지요. 이 공포심은 ‘무서움’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누구나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특히, 경문에서처럼 혼자 빈집에 있다거나, 밤길을 홀로 걸어가던가 할 때 느끼는 통상적인 공포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공포심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공포심에서 벗어나려면 모든 공포의 대상들이 사실은 공하고 실체가 없다는 반야바라밀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무서운 황야를 가거나’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곳은 맹수가 득실거리는 곳입니다. 다시 말해, 무서운 도둑, 강도가 난무하여 재물과 목숨을 노리고 있는 요즈음의 세상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언제 자동차라는 무서운 맹수가 달려들어 우리의 목숨을 앗아갈지, 비행기가 갑자기 추락하여 덮치게 될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휴식을 즐기며 쇼핑을 잘 하다가도 갑자기 백화점이 무너져 내려 수많은 이의 목숨이 끊어지는 것을 보았고, 학교, 직장 출근길에 다리가 무너져 강에 빠져 죽는 것도 보았습니다. 길을 걷다가도 언제 도시가스가 폭발할 지 모르는 두려움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뿐이겠습니까. 세상은 온통 두려움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이러한 모든 공포심도 반야바라밀다라는 수행을 통해 쉽게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러한 공포심이 객관세계가 오염되는 데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공포심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모두가 내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많은 사람이 있는 곳에 있게 되어도’ 라는 말이 나옵니다. 즉, 이것은 위에서 보았듯이 사람을 서로 믿지 못하고, 서로를 위협하는 세상을 표현한 말입니다. 요즘은 사람들 이 느끼는 인간소외 현상이나, 왕따 문제, 사람들 사이의 갈등, 대립 문제 등 대중 속에서 오는 괴로움을 말합니다. 또한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이들이 나의 경쟁자가 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무관심도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모두가 따뜻한 내 이웃이고 도반이 되어야 할텐데, 우리는 항상 이웃, 친구를 경계하고, 견제하며, 경쟁의식 속에서 이겨야 한다는 논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갑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어찌 인간 소외 현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마음을 나누어야 할 때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지혜에서 실천되어져 나오는 동체대비의 자비심으로써 극복해야 할 두려움인 것입니다.
이처럼 공포심이야말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가운데 가장 괴로운 감정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보시바라밀을 실천할 때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두려운 마음을 없애주는 무외시(無畏施)를 큰 보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무외시는 마음이 불안한 이를 불안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최고의 보시이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이 모든 공포심에서 후련하게 벗어나, 진정으로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로우며 행복한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원리전도몽상
어두운 밤중에 뱀을 보고 기겁을 하여 도망가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와보니 새끼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어요? 뱀이 아니라 새끼줄인 것을 밝게 깨쳐 알고 난 다음이야 새끼줄을 뱀으로 착각하여 마음을 괴롭히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전도(顚倒)된 몽상(夢想)을 여의는 생활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느끼는 두려움이나 괴로움 등의 온갖 감정들은 이런 전도된 몽상[뒤집어진 꿈같은 생각] 때문에 일어난 것들이 상당히 많습니다. 현실 그 자체가 괴로움이거나 두려움은 아닌데, 다만 우리의 마음이 잘못 착각을 일으켜 괴로워하는 경우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예를 하나 더 들어봅니다.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서 아둥바둥하며 생을 힘겹게 살아가지요. 행복이란 사실, 우리가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가족이 화목하며, 이 몸을 좀더 편하게 하고자 하는 쪽으로 방향이 잡혀지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돈을 버는 목적도 바로 행복의 추구가 그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돈을 얻기 위해 남편, 아내, 혹은 연로하신 부모님을 교묘히 죽이거나, 자식 손가락을 자르거나, 스스로 발목을 잘라 보험금을 받으려고 애쓰는 등의 비윤리적인 방법을 행하는 대담한 사람들이 매스컴에 많이 등장합니다. 이 얼마나 전도된 행복의 추구인가요?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내 몸이 올바로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가족과 함께 누릴 수 있는 단란한 행복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본바탕을 망각하고, 돈을 위한 수단으로 근본을 버리는 방법을 사용하여 주객이 전도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어리석게 살아가게도 됩니다. 이와 같은 전도된 분별망상들에 빠지고 집착하면 괴로움이며 불행이지만, 그것에 빠지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이러한 분별망상을 여의게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체의 모든 현상에 대해 전도된 몽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반야심경』에서 강조하는 수행이 바로 반야바라밀다 수행인 것입니다.
이처럼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의 지혜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가 없으며, 뒤바뀐 꿈같은 허망한 생각에 놀아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반야바라밀 공의 지혜에 밝은 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이 꿈처럼 허망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 어떤 대상에도 마음이 걸리지 않으며, 마음이 걸리지 않으니 텅 빈 대상에 대해 공포심을 일으키거나 괴로운 마음을 일으킬 수 없으며, 그러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반야 정견(正見)의 지혜에서는 뒤바뀐 전도된 몽상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바라밀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조견’하는 지혜의 실천입니다.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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