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 실천강의

[스크랩] 17강 -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수선님 2017. 12. 17. 12:43

 

반야심경 강해 -17강-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의반야바라밀다고

이상에서 언급한, 시・공간 속에 생생히 살아 계시는 모든 부처님은 과연 무엇에 의지하여, 어떤 수행을 통해 부처를 이루었는가? 그 해답을 『반야심경』에서는 ‘의반야바라밀다고’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같이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의 수행이야말로 모든 수행의 기본이며, 핵심이라 하였습니다. 반야바라밀은 공의 지혜, 무소득의 지혜, 무집착의 지혜이며, 오온개공의 이치의 조견(照見)을 통해 나타나는 ‘비움’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수행의 기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지혜 중의 지혜인 것이지요. 그래서, 시간적으로 삼세, 공간적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이 이 ‘반야바라밀’에 의지해 깨달음을 이루신 것입니다. 이처럼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불모(佛母)]라고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대품반야경』에는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시다. 반야바라밀은 능히 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은 이 법에 의지하여 행하고, 이 법을 공양・공경・존중・찬탄하신다. 무엇을 이 법이라고 하는가? 소위, 반야바라밀이다.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머물고, 이 반야바라밀을 공양・공경・존중・찬탄하신다.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을 출생시키기 때문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반야바라밀이야말로 모든 불보살의 어머니이며,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을 공양하고, 공경합니다. 이처럼 반야바라밀을 어떤 인격을 가진 존재로 인격화(人格化)하는 듯이 서술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은 우리가 해석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를 떠나, 일반적인 관념을 초월한 신행(信行)의 대상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반야바라밀에 의지하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됩니다. 여기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최상의 깨달음을 뜻하는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구경열반(究竟涅槃)과 상통하는 의미입니다. 앞에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가 없으며, 뒤바뀐 허망한 생각을 멀리 떠나 마침내 열반을 증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서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열반을 증득하는 모습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고 했을 때, 이처럼 보살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증득한 결과는 무엇일까? 이미 언급했듯이, 구경열반이 그 궁극적인 경지인 것입니다. 구경열반이라는 것은 바로 부처님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바로 삼세에 걸쳐 존재하는 모든 부처님의 열반 또한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고 있음을 나타내 줍니다. 그러면, 여기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혹은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번역합니다. 그 뜻은, 말 그대로 ‘가장 높고, 바르며, 원만한 깨달음’이라는 뜻으로, 최고의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무상(無上)’이란, 더 이상 이보다 더 높은 깨달음이 있을 수 없는 최고의 가르침이란 의미이며, ‘정(正)’이란 객관적이고, 타당성이 있는, 편견 없는 가르침,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조견(照見)한 가르침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팔정도의 ‘정(正)’과 같은 의미이며, 중도의 ‘중(中)’, 공 사상의 ‘공(空)’과 같은 의미입니다. ‘등(等)’은 보편적인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어느 한 쪽에만 타당한 가르침이 아니라, 모든 존재에게 동시에 적용되는 가르침인 것입니다.

요컨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이란 이 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보편 타당한 가르침이며, 일체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깨우친 바른 진리, 최고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은, 바로 이 보편 타당하고, 더 없이 높은 가르침인 무상정등정각에 오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정등정각’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임은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고지 반야바라밀다

이상에서 경의 공능분(功能分)을 모두 살펴보았습니다. 공능분이란, 다시 말해, 반야바라밀 수행이 우리들에게 주는 한량없는 이익, 공능을 언급한 부분을 말합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반야바라밀 수행이 마음에 걸림이 없으며 공포가 없고, 전도된 몽상에서 벗어날 수 있으므로 구경에는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이익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으며, 또한,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바로 반야바라밀에 의해서 무상정등정각을 얻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까지가 공능분이라면, 앞으로 살펴볼 마지막 장은 총결분으로, 지금까지 공부해 온 『반야심경』의 핵심 가르침을 총괄적으로 결론 내리고 있는 부분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결론은 다른 경(經)들과는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용상 결론을 내리지 않고, 앞에서 설명한 반야바라밀에 대한 일체의 공덕과 깨침의 깊이를 하나의 주(呪)로써 간주하여 그 공능을 총괄하여 결론짓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어떠한 상을 짓고 이해하고자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떠한 모양도 내세울 수 없는 무자성(無自性), 무소득(無所得), 무집착(無執着)의 철저한 공성(空性)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어떠한 언어적, 내용 이해적인 결론을 두게 된다면 그 어구에 걸려 오히려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반야심경』에서는 이 반야바라밀을, ‘신비하고도, 밝으며, 위없고, 어느 무엇에도 견줄 바 없는 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반야심경』의 반야바라밀을 공부해 오던 수행자들에게 그 가르침 자체에 대한 상을 과감히 타파해 버릴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동시에 수승한 비밀의 주를 설함으로써 여기에 더 없는 공능을 담아 내고 있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어쩔 수 없이 언어를 빌어깨달음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기는 하지만, 언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진리를 설할 수 있지는 못합니다. 다시 말해 언어라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될 수 있고, 저마다 스스로 정해 놓은 언어의 고정관념을 색안경처럼 만들어 놓고 그에 투영하여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총결분에서는 총괄적으로 결론을 지으면서 그런 말의 허물로 인해 그 밝은 이치가 훼손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소소하게 설명을 한 것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한 방편이었다면, 총결분에서는 이제 손가락도 필요 없고 그저 깨달음의 세계, 즉 달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의 본론 부분 내용을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뗏목에 비유한다면, 총결분은 뗏목을 버리고 나아갈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어(뗏목)를 버리고 이제 깨달음의 세계를 직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지(故知)’ 라는 것은 ‘그러므로, 알라’라는 말로서, 지금까지 언설(言說)로써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언급했던 『반야심경』의 본문 내용에 대해 주의 환기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비밀의 주를 설하고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언급한 내용을 올바로 이해・체득하고 있다면, 이것은 도무지 언설로써 견줄 수 있는 바가 아님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어서 나오는 내용에는 언어를 초월한 반야바라밀다에 대한 새로운 결론적 총괄의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주(呪)에 대하여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주(呪)’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주’는 자신과 타인의 재액(災厄)을 없애거나, 혹은, 적에게 재액을 주기 위해 외우는 주문이란 의미로 보통 사용되는데, 전자를 선주(善呪), 후자를 악주(惡呪)라 한다고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주문(呪文), 신주(神呪), 금주(禁呪), 밀주(密呪)라고도 합니다. ‘주’는 보통 범어 ‘만트라(mantra)’의 번역으로 보는데, 혹은, ‘다라니(dharani)’, ‘비디야(vidya)’의 번역으로 보기도 합니다. 한편, 만트라(曼陀羅)를 밀주(密呪), 다라니(陀羅尼)를 총지주(總持呪), 비디야를 명주(明呪)로 번역하여 구분하기도 하지요.

‘주’를 외우는 것은 인도에서 옛부터 있었던 전승으로 추측되며, 불교 경전에도 종종 ‘주’가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술을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고, 특별히 수행상 일신(一身)의 보호를 위해서 약간의 주에 의지하는 행위를 묵인하셨다고 경전에서는 말합니다. 이처럼, 부처님께서는 어느 정도 세속의 신앙에 대해 유화적이고 포용력 있는 자세를 견지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유화적인 태도로 인해 이후에 밀교가 생겨날 즈음에는 주(呪)가, 다라니, 만트라, 진언이란 이름으로 불교 수행의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만트라

그러면, 우선 ‘만트라’에 대해 살펴보면, 인도의 오랜 종교적 전통을 불교에서 수용한 것으로, ‘찬가(讚歌), 제사(祭詞), 주문(呪文)’ 등을 나타내는 말이며, 보통 문자, 언어의 의미를 가집니다. 대승불교에서 ‘만트라’는, 모든 부처님을 상징하는 산스크리트 문자나 불타에 대한 찬가(讚歌), 기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특정한 말을 가리킵니다. 한자로는 진언(眞言)이라고 음역하며, 밀교에서는 ‘다라니’라고 부르기도 하여, ‘진언’, ‘다라니’, ‘만트라’를 혼동하여 사용하기도 합니다. 다만,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용례는 장구(長句)로 된 긴 것을 ‘다라니’, 몇 구절로 된 짧은 것을 ‘진언’, 한 자 두 자 등으로 된 것을 ‘주(呪)’라고 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천수경에서 앞에 나오는 짧은 어구인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나, 정법계진언(淨法界眞言) ‘옴 남’ 등은 말 그대로 ‘진언’이라 부르고,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바로기제...’ 로 이어지는 긴 것을 신묘장구대다라니라 하여, ‘다라니’로 부르는 것이지요. 또한 ‘옴’ 과 같이 한 글자로 되어 있는 것을 ‘주’라고 합니다. ‘진언(眞言)’이라고 하면 ‘진실한 말’이라는 의미로, 부처님의 참된 경지를 밝히는 말소리라는 뜻입니다. 또한, 입으로 불러서 무명을 타파하고 마음을 통일하는 거룩한 귀절이기 때문에, ‘명(明)’, ‘명주(明呪)’라고도 합니다.

 

다라니

‘다라니(陀羅尼)’는 본래, 정신을 집중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간직하는 것, 혹은 그 결과로서 얻게 되는 정신집중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 이것이 재앙을 막는 등의 공덕을 짓는 주문의 의미로 간주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만트라’와 ‘다라니’의 구분은 그다지 엄밀하지 않으며, 대체로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라니’는 보통, ‘총지(總持)’, ‘능지(能持)’, ‘능차(能遮)’라고 번역하는데, 모든 선법(善法)을 능히 지녀서 산실(散失)하지 않게 하므로 총지, 능지라 하고, 악법을 막아서 일어나지 않게 하므로 능차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과 마음공부

저자
법상스님 지음
출판사
무한 | 2004-08-04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실질적인 행복과 내적 평...
가격비교

 

출처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글쓴이 : 법상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