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상(我相, 산스크리트어 Atma-samjna)이란>
아상(我相)은 사상(四相)의 하나로서, ‘나’를 중심으로 형성된 일련의 관념을 말한다. 아상에 해당하는 산스크리트어는 ‘자아의 관념’을 뜻하는 ātma-saṃjñā, ātma-lakṣaṇa인데, 유사한 개념으로 아견(我見, ātma-dṛṣṭi), 아집(我執, ātma-grāha), 아만(我慢, ātma-māna) 등이 있다. 모두 ‘내가 있다’ ‘’나‘라는 실체가 있다’ ‘내가 잘났다’는 근원적인 무지에서 파생된 미혹한 관념이다.
아상(我相)은 오온(五蘊)이 일시적 인연으로 모여서 이루어진 자기를 영원한 실체라고 집착하는 것으로, 사상(四相)의 기본이 된다. 즉, 사상은 모두 아상으로 인해 비롯된다. 따라서 아상만 떼면 사상을 떼기가 쉽다. 자기를 으뜸으로 생각하고 남을 멸시하는 마음, 잘난 체, 똑똑한 체, 아는 체하며, 남을 멸시하는 마음이다.
중생들에게는 ‘나(我)’란 영원성을 상징한다. 항상함, 영원함, 변하지 않음, 그것이 곧 나(我)라고 본다. 변하는 걸 나(我)라고 부르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나(我)’라는 것은 어떤 독립적인 실체를 가진 영원성의 개체를 뜻한다. 중생들은 어릴 적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다고 여긴다. 이렇듯 ‘나’라는 것의 의미는 변화하지 않고 영원함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어리석은 범부중생들의 착각이다.
부처님 법인 무아(無我)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아상이다. 즉, 아상이란 무아를 깨닫지 못해, ‘내가 있다’는 어리석은 착각, 허망한 의식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아상(我相)이란 자아(自我)가 있다는 생각, 자아의식(自我意識)을 뜻한다.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에서는 아트만(atman)을 주장하고 있었다. 아트만은 만물에 내재하는 영묘한 힘, 영원불멸하는 우주의 근본원리, 인간 존재의 영원한 핵을 이르는 브라만 철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이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아트만을 아상이라 해서 이를 부정하셨다. 즉, ‘나’라고 하는 허구적인 관념을 부정하셨다, 인간에게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다.
그런데 아상은 그런 내가 실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즉, 아상이 있다는 것은 내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상대방이 생겨나고 그로부터 모든 만물이 생겨나서 이 현상계가 만들어진다. 그래서 아상을 버리게 되면 해탈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성립된다. 반대로 아상이 있으면 해탈을 못한다.
아상에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육신, 나의 이름, 나의 학력, 나의 직장, 나의 사회적 위치, 나의 능력 등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아상(我相)이나 아만(我慢)은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 잘 났다는 생각, 교만심, 월등의식 등이다. 요즘 말로는 ‘자존심’이다. 무엇이 있는 자존심도 아닌 빈 속의 자존심이다. 요즘 아상과 아만 두 단어는 거의 비슷한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본디 아상은 힌두철학에서 말하는 아트만(atman)을 뜻한다. ‘영혼’ ‘아(我)’ ‘자아의식(自我意識)으로서, 영원히 변치 않는 자아, 아트만 같은 것이 자기에게는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변해 ‘남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제 잘났다는 생각’ 등으로 많이 쓰인다. 일단 이 병에 걸렸다 하면 약이 없다. 오직 부처님만 그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한다.
자기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 것이 아상(我相)이다. 좋아하는 것만 받아들이려는 이기주의가 바로 아상이다. 아상은 언제나 자기 기준을 정해놓고 좋아하는 것은 삼키고, 싫어하는 것은 뱉어버리는 일만 할 뿐이다. 우리는 언제나 이런 아상의 놀이에 놀아난다.
그리하여 아상은 언제나 나를 위하는 척, 나를 돕는 척하면서 나타나서 나를 집어 삼키는 무서운 번뇌이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매 순간의 아상에 놀아나고 휘둘리는, 아상의 노예와도 같은 생활이고 행위이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미워하는 사람, 보고 싶은 것과 보기 싫은 것,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 이렇게 양 극단으로 나누어 놓고, 그 중에서 좋은 쪽, 좋아하는 편만을 좇아가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우리야말로 아상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이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불행해진다.
그런데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삶은 ‘나의 삶’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모두 변화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것은 없다. 있다가가 없어지고, 심지어 죽게 되면 모두가 해체돼버리고 육신도 결국 화장하거나 땅에 묻히고 만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러 보니, 우주 안의 모든 사물은 성주괴공(成住壞空)하고, 생각은 생주이멸((生住離滅)한다고 하셨다. 따라서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결국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그것이 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이에 반대되는 말이 아상이다.
무아(無我)를 비아(非我)라 하기도 한다. 비아(非我)란 말은 “아(我)인 상태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즉, 무아란 내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불교는 “있다, 없다” 하는 존재론적인 언설을 금하고 있다. 때문에 내가 있다든가 내가 없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공무(空無)가 아니란 말이다. ‘무아’란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내가 아니다. 내세울 아(我)가 없다는 말이다. 내세울 ‘아’가 없으니 욕심낼 것도 없고, 남과 다툴 것도 없으며, 남을 싫어하거나, 남에게 아부하거나, 남에게 화낼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나’를 고집하는 아상(我相)의 반대말이 무아이다. 즉, 무아는 아상(我相)을 부정하는 말이고, 영원한 ‘나’라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아상이란 ‘나’를 내세우고, ‘나’라는 실체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무아란 불변의 실체라 할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붓다의 인간관이다.
예컨대, 우리가 검토할 대상을 녹색의 한 나뭇잎이라 하자. 시간이 지나면서 단풍이 들어 그 녹색 잎은 붉은 색을 띨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것의 모양, 조직, 색깔, 그 밖의 다른 성질들이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이처럼 단풍이 든 붉은 색의 잎과 녹색의 싱싱한 잎 사이에는 동일성을 밝혀 줄 요소가 없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동일한 잎으로 본다.
달리 말하면, 잎이라 불리던 그 대상은 이미 변해버렸고, 지금 우리는 그 대상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변화 과정뿐이다. 이런 사정은 우주의 모든 현상에 적용되며 사람이란 존재도 결코 예외가 아니다. 사람도 계속 변한다. 이와 같이 변화과정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 변화를 담당하는 ‘당체’는 없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무아(anattā)’의 개념이다.
진짜 ‘나(我)’라면 변화가 없어야 하고, 항상 하기에 즐거움이여야만 한다. 그러나 잘 관찰해보니 그렇지 않더란 얘기다. 모든 게 다 변화한다. 내 몸도 변하고, 내 마음도 항상 변해가고, 주변 사람과 주변 사물들 그 모든 게 다 변화해간다. 중생은 특히나 내 몸을 ‘나’로 여기는데, 내 몸도 변화한다. 즉, 늙어간다. 내 몸이 진짜 ‘나’라면 내 뜻대로 돼야 하고 늙고 싶지 않으면 늙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내 몸의 주인이라면 내 몸이 내 뜻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생각 또한 내 뜻대로 안 된다. 인간이 자신으로 여기는 게 바로 마음속의 생각인데, 이 생각조차 언제나 변화해간다. 다만 이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 생각을 영원한 ‘나’로 여기는데, 이게 멍청한 짓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걸 ‘나’로 여기는 것이니까.
무아란 덮어놓고 ‘나’라는 게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아(無我)에서 ‘아(我)’라는 것은, 영원성을 의미한다. 무아(無我)의 뜻은 ’나‘라는 게 없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고, ‘나‘라고 여기는 몸과 마음에 내재된 영원함을 유지한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은 변화해갈 수밖에 없다. 변화한다는 것은 곧 그 안에 어떤 영원성이 내재해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많은 분들이 무아(無我)를 한자 무(無)에 얽매여서 그냥 단순하게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내가 없다. 그럼 이 글을 쓰는 ‘나’는 누군인가.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누구인가. 영원불멸한 것은 없다. 변하지 않고 고정된 것은 없다. 그러나 찰나적으로 생사를 거듭하는 끊임없는 생명의 흐름(연기에 의한 오온의 집합체)은 있다. 이 게 글을 쓰는 나요, 이 글을 읽는 너다. 따라서 무아를 ‘내가 없다’고 해석하면 안 된다.
불교 교의의 두 기둥이 무상(無常)과 무아(無我)인데, 무상(無常)과 윤회(輪廻)의 개념은 부처님 당시 브라만교나 자이나교에서 이미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무아만은 석가모니불이 성도한 후 최초로 설파한 가르침이다. 빠알리어 atta는 ‘참나’이다. 따라서 anatta(무아)란 참나가 아니란 말이다. 무아는 ‘참나’까지도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인생길이 여유로운 사람은 생각도 여유롭다. 말투도 부드러럽다. 깨달은 사람, 수양된 사람, 스스로의 부족함을 아는 사람은 온유하다.
헌데 자신이 도(道)를 닦아 세상이치를 다 깨달은 듯 건방진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은 말씨부터 삐딱하다. 자신이 최고이니 당연히 존댓말을 잘 안 쓴다. 반말 잘 하는 스님일수록 빈 깡통이다. 깨달음도 없으면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식의 허황된 문구만 일삼는다. 이런 사람들을 불교에서는 '증상만(增上慢)'이라 한다.
<금강경>에서는 특히 아상을 경계하라는 말을 강조한다. 모든 깨달음의 길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삼가 경계하도록 경책하고 있다. 우주의 이치를 깨달으려면 먼저 자기 스스로를 잘 알아야한다. 본시 깨달음은 밖에 있는 게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다.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니라(須菩提 若菩薩 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則非菩薩).」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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