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유정법(無有定法)>
마나사로바 호수(성호)와 수미산(성산)
<금강경> ‘제7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제가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이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고정된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취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 수보리 어의운하(須菩提 於意云何) 여래득 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如來得 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여래유 소설법야(如來有 所說法耶), 수보리언(須菩提言) 여아해불소설의(如我解佛所說義) 무유정법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有定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역무유정법 여래가설(亦無有定法 如來可說), 하이고 여래소설법 개 불가취 불가설 비법 비비법(何以故 如來所說法 皆 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무유정법(無有定法)이란 정해진 것은 없다는 말이다. 어떤 현상을 볼 때, 보는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고, 본 느낌이 다를 것이다. 이와 같이 다 다르니 정해진 법, 일률적인 법은 없다는 말이다. 획일적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가운데에 같은 것, 일관된 것이 있으니 그것이 실상(實相)이니 그것을 보라는 말이다.
따라서 위 문장 속에 나오는 무유정법(無有定法)이란 정해진 진리란 없다, 고정된 진리 - 진리라고 규정(規定)한 그런 진리란 없다는 말이다. 즉, ‘이것이 진리다’라고 이름 짓는 - 규정하는 그 순간에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 그것이 지어진 이름의 틀 속에 갇혀버리므로(올가미를 씌우는 꼴이 되므로) 진리가 아닌 것이 된다는 말이다.
<금강경>에 즉비(卽非)의 논리라는 게 있다. 「A는 A가 아니다. 다만 그 이름이 A이다.」 이런 식의 문장구조이다. 그리하여 진리라고 이름 지어지는 형식논리의 약점을 꼬집어 초월로 향하게 하는 논리전개 방법이다. 바로 무유정법이란 이와 같은 논리를 전제로 한 말이다.
그리고 불법(佛法)은 근본적으로 무유정법(無有定法)이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고, 이것은 참이고 저것은 허망이고, 그런 식의 틀은 곧 분별이고, 다만 사람이 그렇게 정해놓은 것일 뿐, 모든 가치관은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 즉, 무유정법(無有定法)은 불교 진리관의 특징을 말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분별을 번뇌 망상으로 본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정해진 고정불변의 원칙(법)이 없다. 다만 인연(상황, 조건, 여건) 따라 정해진 원칙이 있을 뿐이다. 인간 스스로 정해진 진리가 있고, 정해진 법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정해진 법이 없다는 것이 법이며 진리이고 무유정법(無有定法)이야말로 바라밀이다.
따라서 정해진 법이 없는 것이 최상의 법이다. 왜 그럴까? 연기된 법이기 때문이다. 서로 의지한 것으로 자성(自性)이 공하기 때문이다.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 법칙이 연기법이다. 연기한 제법은 독자적인 존재성을 지닐 수 없다. 무시이래로 무명(無明)으로 인해 고통 받는 연기는 유전연기(流轉緣起)이다. 반면 수행해서 해탈하는 연기는 환멸연기(還滅緣起)이다. 명(明)의 상태에 들어가 보면 일체가 텅 비어 공한 상태이다. 이렇게 텅 빈 상태가 제법의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해진 법이 있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왜 중생은 괴로운가? 집착하기 때문이다. 양파 껍질 같다. 허망한 것이지만 있나 없나? 있으니 유(有)다. 그런데 수행해서 환멸문에 들어가면 있나 없나? 없다, 무(無)다. 그래서 비유비무(非有非無)다. 「무명에서 공으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다.그래서 <금강경>에서 무유정법(無有定法)의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했다.
마음만이 있으면 살 수 있다는 유심론적(唯心論的) 주창자나, 모든 물질이 인간을 기쁘게 한다는 유물론적(唯物論的)으로 행동하는 자만 있다면 이 세계는 단순논리에 빠지고 만다. 마음은 대상을 움직이는 주관적 능동자이다. 물질은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대상적 현존이다. 이 세상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이 상호보완관계를 유지돼야 원만히 살 수 있다. 오직 하나만의 주관이나 객관으로 이룩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어떤 주관이던 대상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연기법을 이해하도록 무유정법을 가르치셨다. 그리하여 <금강경>에서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主而生其心) -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고 했다.
무유정법, 병에 따라 약을 주는 것일 뿐, 만병통치의 정해진 법이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가장 높고 바른 깨달음(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설한 바 법이 있다고 주장 하지도 않았다. ‘진리를 얻었다’거나 ‘설한 법이 있다’는 자체가 정해진 상(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없다고 하면 상에 대한 집착을 벗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있다고 해도 상에 걸리고, 없다고 해도 상에 걸린다. 있다고 해도 맞지 않고, 없다고 해도 맞지 않는다. 고정된 법, 정해진 법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 때 그 때 그 상황과 그 사람의 근기에 맞추어서 법을 설해 주면 된다. 바로 이점이 유일신교와 극명하게 차이나는 부분 중의 하나이다. 오로지 진리는 하나이며 나머지는 모두 거짓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법과 질서만 찾는 원칙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고정불변의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불교이다.
이 세상에 본래부터 미리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사는 것이 진리다’라고 할 만한 정해진 법칙이나 행동지침이나 계율이 있지 않다. 물론 계율이 있지만, 그 또한 정해진 절대적인 행동수칙이 아니라 개차법(開遮法)이라고 해서 열고 닫을 줄 알아야 하는 방편의 가르침일 뿐이다.
그 어떤 특정한 수행이나, 특별한 계행, 혹은 특별한 두타행을 실천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불법을 깨달은 사람이거나, 그것 자체에 무슨 특별한 효용가치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방편으로 필요한 가치일 뿐이다.
물론 수행과정에서는 계율을 지키고, 수행자다운 검소하고 청정한 두타행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것만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여기거나,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을 무조건 탓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좋은 생활양식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과도하게 집착해 사로잡혀 있거나, 그것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오히려 번뇌만 조장할 뿐이다. 오히려 법상(法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법에 걸려 넘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불법의 실천에서 중요한 점은 중도(中道)에 있다. 어느 한 가지 양식이나 계율이나 수행법에 과도하게 집착해 그것만이 옳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중도에 어긋난다.
육조 혜능(慧能, 638~713) 대사는 <금강경 오가해>에서 <금강경>이라고 하는 것은, 「무상위종(無相爲宗) 무주위체(無住爲體) 묘유위용(妙有爲用) - 무상(無相)으로 종(宗)으로 삼고, 무주(無住)로 체로 삼으려, 묘유(妙有)를 용으로 삼는다.」고 했다.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세 마디로 표현을 했다.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금강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말인데, 상(相)에는 온갖 상이 있다.
특히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렇게 사상(四相)을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상(相)이라고 하는 것은 미혹한 중생들의 본업(本業)이다. 사실은 상(相)이 있는 것이 아닌데, 미혹하기 때문에, 어리석기 때문에, 마음이 어두워서 없는 상을 있는 상으로 본다. 그래서 <금강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래 없는 상(相)을 없는 상으로 가르쳐주는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 즉, 근본취지로 삼는다고 해서 무상(無相)으로 종(宗)을 삼는다고 한 것이다.
다음 무주(無住), 머무름이 없는 것을 본체(本體)로 삼는다. 사구게(四句偈)에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而生其心) 하라 했듯이, 우리 마음의 마음 됨은 본래 어디에도 머물고, 집착하고, 어디에 눌러 붙고, 이렇게 하지 않는 것이 마음의 속성인데, 우리들이 어리석고, 거기에 또 애착이 생기고, 관심이 가고, 이러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거기에 머물러 앉게 된다. 우리 마음의 속성은 본래 그렇게 머물지 않고 자유롭게 돼 있는데 우리의 애착하는 습관 때문에 머물러 앉아버린다.
그러니 집착하거나 빠지지 말라, 그래서 무주(無住)로 위체(爲體)라고 했다. 머물지 않도록 돼있는 우리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의 본령대로 어디에도 머물러 집착하지 않는 것. 그것이 근본이라 해서 위체(爲體), 체로 삼는다고 했다.
다음이 묘유(妙有)로 위용(爲用)이라 했다. 모두 공(空)하고 물거품이다. 사구게에서 말했듯이 꿈이요, 환영이요, 물거품이요, 그림자요, 이슬이요, 번갯불이다. 이 세상사라고 하는 것이 전부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뭐냐? 그런 허망하고, 본래 없고, 물거품 같고, 꿈같고, 그런 것 가운데서 또 이렇게 있다.
그러니 이렇게 있는 것을 바로 보라는 말이다. 그게 묘이다. 묘하게 있다는 것이다. 본질(本質)은 없다. 찾아보면 없다. 크게 깨닫지는 못했다하더라도 분석해보면 없다. 또 경험해보면 더욱 없다. 또 견해가 좀 높은 사람들은 앉은 자리에서 없는 걸 본다.
그러면서 이렇게 있는 것을 잘 이해해라는 것이다. 그게 없는 가운데 묘하게 있는 것이다. 그 묘유(妙有)로써 위용(爲用), 작용을 삼는다, 그런 말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고, 내가 ‘나’로서 세상을 살아가고, 온갖 세상사와 더불어서 이렇게 우리가 살지만, 이것이 묘하게 있다. 없는 것 가운데 묘하게 있는 것, 이것을 잘 쓰면서 살아라. 그게 묘유위용(妙有爲用), 묘유로써 작용을 삼는다는 말인데, 작용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삶을 말한다.
이렇게 육조 대사께서 <금강경>을 해설하면서 서두에 무상(無相)으로 으뜸을 삼고, 무주(無住)로서 체(體)를 삼고, 묘하게 있는 것으로서 삶의 작용을 삼는다고 한 것이다. 이렇게 세 마디로써 <금강경>을 해석하는 것, 이것이 아주 뛰어난 해석이다.
그리고 <금강경>에서 부처님의 지혜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라 하고, 일정한 법이 없음[無有定法]을 이름 하는 것이라 했으니, 이는 일체의 법은 공(空), 무상(無相)이라는 파상교(破相敎)의 뜻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는 육조 혜능 조사의 어록인 <육조단경>의 근본사상을 설명한 글이기도 하다.
즉, <금강경>에서 말하는, 무상법(無相法)의 상(相)이란 일체에 있어서 고정된 모습이나 고정된 특성을 말한다.
그런데 그런 것은 정해진 것이 없으며 그러므로 규정할 수도 없다. 이러한 것을 여실히 깨닫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한다.
또한 보시의 방법에서도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해서 내가 했다는 생각, 무엇을 했다는 생각, 누구에게 무엇을 해줬다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생각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했다. 심지어 부처라는 것도 32상과 같은 것으로 규정하려하면 부처를 볼 수 없다고 했다. 무규정성(無規定性)이다.
요컨대 일체는 고정된 모습이나 특성이 없다는 것을 가리켜 무상(無相)이라고 한다. 상(相)이 없는 것이 바로 실상(實相)이다. 그러므로 실상을 본 자는 그 무엇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를 무주상(無住相)이라고 한다. 무유정법(無有定法)이나 무상법(無相法)이 같은 말이다. 공성(空性)과 맥을 같이한다.
「그런데 무상(無相)과 무주(無住)는 <금강경>이 본문에서 늘 강조하고 있는 바인데, “묘유(妙有)의 용(用)”만은 <금강경>에서 다루지 않았다. 다른 불교 경전도 마찬가지인데, 이 부분은 길을 밟는 각자에게 맡겨져 있다.
불교는 이를테면 터를 고르는 정지작업만 해 줄 뿐, 거기 무엇을 세우고 지을지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이것은 불교의 필연적 선택이다. 만일, 짓기로 작정하면, 그때 불교는 도그마가 되고, 억압이 돼 유연성과 적응력을 잃고 만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곳을 아예 의식하지 않다간 불교는 정재(淨財)를 좀먹는 기식 집단으로 떨어지기 쉽다. 이 두 해협 사이를 잘 지나가야 진정 여법(如法)한 불교가 될 수 있다. 자성(自性)은 ‘범부들의 불선한 마음을 제거하면’ 저절로 드러난다. 거기 이르는 방법과 스타일은 달라도 이르고자 하는 곳은 같다…. 그러나 또한 서로 다르다. 불선한 마음을 제거한 점에서는 서로 같겠지만, 그 마음을 쓰는 묘유(妙有)의 용(用)은 서로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 - 한형조
불교는 고정된 틀을 지양한다. 그것이 무유정법(無有定法)이다. 어떤 규범, 어떤 이념이나 사상, 어떤 말씀에 얽매인다면 그것은 불교적이지 않다. 왜? 불교는 연기법이기 때문에 틀이 아니라 흐름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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