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무경(唯識無境, 산스크리트어 vijñapti-mtrat)>
유식무경(唯識無境)은 오직 식(識)뿐이며, 보이는 대상은 실제가 아니다,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만법유식(萬法唯識)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여기에서 ‘식(識)’은 인식하는 주체에 해당하는 마음속의 인식작용인 심식(心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인식작용을 떠나서 별도로 인식의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심식은 마음의 구체적인 인식작용을 말한다. 따라서 대개 식(識)과 심식(心識)은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리고 여기서 ‘대상’이란 심식이 인식하고자 하는 그 상대가 되는 것을 말하며,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를 포함한다.
따라서 유식무경이란 오직 식만 있고 (바깥)대상은 없다는 말이다. 헌데 여기에서 없다는 말은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은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는 뜻이다.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을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 별로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내가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 세상에 자신의 생각을 덧칠한다. 내 생각을 통해서 세상을 본다. 즉, 내 생각으로 세상을 본다는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인식한 대로 세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내가 본 것이 그대로 있다고 여긴다.
무경(無境), 대상이 없다는 말은 내가 본 것을, 그렇게 있다고 여기는 그런 것은 실제로 없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무(無)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본 것처럼 그렇게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데 유식불교가 내세우는 “오로지 식만 있고 경은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은 결코 세계 존재를 부정하려는 명제가 아니다. 유식무경은 아는 것과 있는 것, 식(識)과 경(境)을 완전히 분리된 둘로 간주하는 이원론(二元論)과 정신과 무관한 물질세계 자체를 주장하는 유물론(唯物論)을 비판할 뿐이다. 유식무경이 의미하는바 식을 벗어난 경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식과 경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 자아와 세계, 주관과 객관은 의식 표층의 분별일 뿐, 그 심층에서는 일체가 하나로 융합돼있다는 깨달음이 자리 잡고 있다.
불교가 그 근원적 하나를 ‘일심(一心)’이라고 부른다. 신(神)도 아니고 물질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너지나 기(氣)도 아니고, 바로 마음, 한 마음이 근원이다. 그것은 곧 정신과 물질, 자아와 세계의 하나 됨을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자각하고 깨달아 알 수 있다는 말이다. 특히 자신 안에서 그 일심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심층으로 분석해 들어가는 것이 유식불교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식(識)이란 일체의 주관적 마음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식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또는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상관없이 일체의 심리현상을 포괄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경(境)이란 그와 같은 식의 대상이 되는 일체의 객관적 존재를 의미한다. 감각에 대한 ‘감각대상’, 사유에 대한 ‘사유대상’, 욕망에 대한 ‘욕망대상’ 등 일체의 대상이 모두 경이라 칭해질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주관적인 심리상태가 발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객관대상이 일단 그 자체로 존재하고, 그것이 부수적으로 우리 마음을 자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境)은 그 자체로 실재하고, 식(識)은 그 경을 반영하면서 발생하는 2차적 현상이라고 간주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실재한다고 생각된 경도 어디까지나 식 안에 드러나는 경이다. 식을 떠난 경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식의 존재가 일차적이고 경은 오히려 식을 통해 드러나는 2차적 산물이다.
예컨대, 아프리카의 부시맨은 콜라병을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콜라병이라는 개념, 즉 이름이 없다. 따라서 그들은 콜라병을 인식하지 못한다. 부시맨에게 콜라병을 보여주며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대답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비행기에서 실수로 콜라병을 떨어뜨렸다. 이것을 주운 부시맨은 하늘이 내려준 신성한 무엇으로 생각했다. 이와 같이 동일한 사물을 동일한 사람이 본다고 해서 동일한 인식이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책을 놓고 보려는 의도로 보면 책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밥을 놓고 먹으려는 의도로 보면 식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름은 인식의 대상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는 사람의 의도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이것은 책상이다"라는 말은 "이것은 내가 책을 놓고 보려는 욕구가 있을 때 그 욕구를 만족시켜 주고 있다"는 말과 동일한 의미인 것이다. 이름은 이렇게 욕구를 지닌 의식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식(識)과 경(境)의 문제는, 인식되는 객관세계를 독립적 실체로 상정해 놓고 인식주관의 심리적 발생과정만을 설명하는 ‘인식적’ 또는 ‘심리적’ 차원의 논의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문제는 식과 경, 곧 우리 마음과 그 마음이 인식하는 대상 세계 중 과연 어느 것이 궁극적으로 실재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대한 유식(唯識)의 입장을 가장 간명하게 표현한 것이 바로 ‘유식무경(唯識無境)’이다. 즉,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식일 뿐이고, 식을 떠난 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상(境)은 심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이다. 부시맨의 심식은 콜라병을 하늘이 내린 선물로 결정한 것이다.
결국, 유식무경(唯識無境)이란 심식이 대상을 인식할 때, 오직 인식의 주체인 심식은 인정되지만 그 대상은 없다, - 무의미하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들은 대상이 있음을 보고, 그것을 통해서 인식작용이 일어나고, 그 결과로 대상이 있는 것, 유의미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눈앞에 보이는 대상은 분명하게 있는 것 같고, 그것을 인식하는 심식은 마음속에 있으므로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래서 유식무경(唯識無境)은 현실적인 우리들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가 되는 것이므로 유식(唯識)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이 말은 일상적인 우리들의 인식경험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헌데 이 경우도 우리들의 심식과 대상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경우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다시 정리하면,
유식무경(唯識無境)이 “오로지 식만 있고 경은 없다”고 하는 말이지만 결코 외부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외적인 사물들이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주변에는 비슷하게 많은 대상들이 분명히 있다. 그걸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없다고 하는 것일까?
주변에 많은 사물들이 있지만, 그 모두가 마음에 끌리는 것이 아니라 그 중에서 특정한 몇몇 대상만 마음에 끌리는 경우가 일반적인 현상이다. 그런가 하면, 같은 대상일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른 인식의 결과를 가질 수 있다. A는 좋아하는데, B는 그 사람을 싫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같은 대상일지라도 인식주관에 따라서 다르게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은, 대상이 그렇게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 각자가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대상이 달리 인식된다는 말이다.
대상이 분명하게 결정돼있다면 누구나 동등하게 인식해야 하며, 항상 같은 인식의 결과를 가져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상이 실지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서, 우리들의 인식주체인 심식의 상태에 따라서 그 대상의 모습이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다. 갑순이라는 여인이 있는데, A는 그녀를 좋아하지만 B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나는 A라는 향수를 좋아하는데, 아내는 그것은 싫고 오히려 B 향수가 좋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식작용을 결정하는 데에 있어서 대상보다 심식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심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오직 심식만이 있고, 대상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 유식무경이다.
대상이 없다는 것은 실지로 눈앞에 보이고 있는 사물이나 인식되고 있는 정신작용의 대상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중요하지 않다, 별 볼일 없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 ‘무경(無境)’이다.
대상이 없다는 것은 대상의 실질적인 존재나 작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식하는 그대로 현존(現存)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대상은 그 자체로 정해져 있지 않으며, 심식의 인식작용에 의해서 다르게 인식되기 때문에 정해진 대상은 없고, 인식되어지는 것만 있을 뿐이라는 의미이다.
유식무경에서의 유식(唯識)이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유심(唯心)과 같은 말로서 인간의 의식을 의미하는 것이고, 유식무경의 경(境)은 일체유심조에서 일체(一切)와 같은 말로서 의식 외부의 사물을 말한다. 그래서 일체유심조와 유식무경, 만법유식(萬法唯識)은 같은 맥락의 말이다.
서양 철학사에서 유심론과 유물론의 논쟁이야말로 철학사상을 장식하는 일대 에필로그(Epilogue)이고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정신이 먼저인가 물질이 먼저인가 라는 문제는 과학문명의 발달이 정점에 달한 현대에 있어서도 인류가 고뇌하는 어려운 문제이다. 더구나 외계의 비실재(非實在)를 완전무결한 이론을 가지고 증명하는 것은 어렵다.
부처란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이 미혹의 세계에서 각성한 사람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우리들이 경험하는 현실세계도 하나의 꿈의 세계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이 세계는 “환(幻)과 같은 존재”라는 말은 인도인이 즐겨 사용하는 표현이지만, 이것을 각자(覺者)의 입장에서 달리 말한 것이 유식무경이다. 그래서 <유식20송>에 있는 “유식(唯識)은 부처의 경계이다”라고 했다. 그만큼 현실세계와 유식에서 말하는 심식의 경지는 같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프로이드나 칼 융은 꿈을 무의식(無意識)을 아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유식(唯識)에 있어서는 그것을 현실세계 즉 의식의 세계의 비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이치는 단지 머릿속으로 이론적으로만 조직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불교의 본질이자 진수라고 하는 선정(禪定)을 닦아 그 체험에 근거해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제창된 이론이다.
예를 들면, <섭대승론> 등에서 인용돼 있는 미륵의 저술인 <분별유가론(分別瑜伽論)>의 송(頌)에,
「菩薩於定位 觀影唯是心 義想旣滅除 審觀唯自想 如是住內心 知所取非有 此能取亦無 後觸無所得」라고 설해져 있다.
“정신을 어느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마음을 적정 상태에 두면, 즉 선정에 들면, 자기 심중에 나타난 대상의 모양, 영상은 자기의 마음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관하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다.
영상(影像)의 원래 의미는 거울 속의 상(像), 그림자 등의 의미를 가지고 어떤 사물과 닮은 모양을 말한다. 이것이 인식작용에 있어서 쓰여 질 경우, 영상(影像)이란 심리학에서 말하는 표상(表象)에 가까운 개념이다. 그러나 실재론자가 말하는 표상에는 그것에 대응하는 사물이 외계에 실재(實在)한다. 그리고 그 사물의 인상이 그 사물의 표상이 된다.
그러나 선정 중에 있는 사물의 영상 즉 표상은 마음 그 자체가 그와 같은 사물에 닮아서 현현(顯現)한 것이다. 즉 ‘선정 중의 영상’이란 ‘마음에 자기 생산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착(無着)의 저서인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에는 모든 표상은 마음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하는 유식의 이치를 증명하는 가운데,
「유정심자재력고 수기소욕정심경계영상이생(由定心自在力故 隨其所欲定心境界影像而生) - 선정을 깊이 해가면 자기의 생각대로 자유롭게 영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하는 선정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대상의 영상은 마음에 지나지 않는다. 또는 마음은 임의의 영상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고 하는 관찰은 어디까지나 선정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리상태 아래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관찰 사실을 바로 일상의 경험세계에 맞추어서 외계의 사물은 모두 자기 마음이 변화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불교적 견지에서 보면, 바른 불자라면 선정의 세계는 결코 특수한 심리과정이 아니라 차라리 그렇게 있어야 할 세계이고, 사물의 본질은 보다 바르게 파악할 수 있는 심리상태이다. 거꾸로 범상한 우리들이 익숙해 있는 일상은 허위의 세계, 환(幻)의 세계라는 것이다.
선정 체험을 떠나서 불교사상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정 체험을 경험해야 불교의 근본교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선정 체험을 하기 전의 기초교육 단계는 오히려 허위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이치에 관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유식무경의 이론적 증명은 현대의 과학적 입장에서 보면 불충분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사상의 본질은 논리나 이론 이전의 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다. 과학이면 모두가 해결된다고 하는 과학만능주의에 입장에서 파악하는 견지는, 불교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자연(自然)과 자기(自己)와의 진실 된 모습을 망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오늘의 우리들은 깊은 선정 체험에서 뿜어져 나온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이치에서 많은 것을 배워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은 대승불교 유식(唯識)의 기본관념으로서 유심(唯心)사상의 하나이다. 유심사상은 대승불교의 핵심사상으로, 유식학뿐만 아니라 대승의 다른 종파들 역시 그와 같은 유심사상을 포함하고 있다.
화엄(華嚴)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이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천태(天台)의 일념삼천(一念三千) 등은 모두 그러한 유심사상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처럼 불교는 언제나 중생 안에 내재된 각성과 해탈의 주체로서의 마음, 즉 일심(一心)을 강조했지만, 그 중에서도 유식은 그 유심사상을 가장 체계적으로 완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유식이 유가승(瑜伽僧)들의 수행적 통찰로부터 출발해 그 통찰내용을 인식논리학적 치밀함으로 이론화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해진 것이다.
이 세상은 오직 내 마음의 투영일 뿐이기에 내 마음 바깥에 있는 것 같은 대상경계와 사건 사고 현상은 일체가 고정된 실체가 없는 환상(幻想)일 뿐이다. 그러니 사실은 지금 여기 이 자리 이 순간 내 앞에 드러나 있는 삶, 인생, 현실은 영원불변하는 독립적인 고정된 실체가 없는 꿈, 허깨비, 신기루,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 같은 것이기에 애써 받아들이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냥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런데 그러함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실을 부정하지 말고, 큰 경지에서 현실을 긍정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이것이 유식무경의 가르침이다.
◎ 유식무경(唯識無境)의 논증 ──────────────────
유식무경의 논증으로서 널리 알려진 것은 4지(四智)이다. 즉, 다음의 4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외부의 사물이 존재 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1) 상위식상지(相違識相智)---같은 사물에 대해서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이 다르면, 그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아귀(餓鬼)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물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로 보며, 인간은 물 또는 파도로 보는 등 제각기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약 외적인 사물이 실재(實在)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 보는 대로 보인다는 말이다.
2) 무소연식연가득지(無所緣識現可得智)---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일, 꿈속의 대상이나,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기도 하는 것이다.
3) 응리공용전도지(應離功用無顚倒智)---수행을 하지 않고서도 오류가 없는 무전도(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임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어,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처럼 실재한다면 누구나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4) 수삼지전지(隨三智轉智)---다음 세 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① 자재자(自在者)의 지혜를 따라 바뀐다. 즉, 마음에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하고자 하는 대로, -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
② 관찰자의 지혜를 따라 바뀐다. 즉, 지관(止觀)을 닦은 요가 수행자가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때, 대상은 사색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난다.
③ 무분별지(無分別知)를 따라 바뀐다. 무분별지가 일어날 때에는 어떤 인식대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인식대상이 독립적으로 자존(自存)하는 것으로 실재한다면 ①②③과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들 세 가지 일은 일어나므로 인식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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