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선과 악의 기준

수선님 2018. 12. 16. 11:35

선과 악의 기준

 

위라라트네(W.G. Weeraratne) 지음/ 마성 옮김


이 글은 W.G. Weeraratne, Individual and Society in Buddhism (Colombo, 1977), pp.34-45, Chapter 3 Criteria of good and bad를 번역한 것이다.

어떤 종교에서든 선(善, good)과 악(惡, bad) 혹은 옳음(right)과 그름(wrong)의 기준은 그 종교의 근본적인 교설에 전적으로 의존하는데, 그것은 곧 사물의 기원과 그 본성 그리고 그 종교에 의한 삶의 목표와 이상에 대한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도 적용되는 진실이다.

인도의 고대 리그 베다(Rigvedic) 시대에서의 사람들은 해(surya)·달(candra)· 바람(vayu)·새벽(usas)· 땅(prithivi)과 같은 자연의 힘을 통제하는 신성(神性)이 있다는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침에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과 같은 이 세상의 규칙적인 법칙이 있다는 것도 믿었다. 또한 사람들은 그들의 행동 양식도 그에 따랐다.

그 시기에는 이 사물의 법칙을 당시에는 리따(rta)라고 불렀다.[1] 이 세상의 법칙에 따라서 사는 것이 삶의 올바른 길이나 선(善)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명령을 어기는 것을 그름이나 악(惡)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자연력을 지닌 신(神, god)이 그들을 지켜주고, 그들의 의식 절차를 감독하는 것으로 믿었고, 세계의 법칙 역시 당시 가장 힘있고 중요한 신으로 간주된 바루나(Varuna)라고 부르는 신의 관리하에 있다고 믿었다. 그 신은 세상의 법칙과 일치하여 사는지 아닌지를 관리했는데, 그 법칙을 어긴 사람들에게 벌을 주고 그 법칙에 따라서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상을 주었다.[2]

그러나 사람들은 가끔씩 물소 젖의 버터기름, 버터, 응유(凝乳)와 이따금 동물들과 같은 중요 음식을 바루나(Varuna)에게 제물을 바침[供犧]으로써 그들의 적극적인 죄[作爲]와 소극적인 죄[不作爲]를 보상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그 사회에서 선과 악의 기준은 이 신의 심판[裁可] 사항이었고, 사람들은 이성적인 기초 혹은 이해 없이 대부분 기계적으로 그저 이에 순응했다.

 

 

시간이 계속 나아가자 그 밖에 특히 공희(供犧)가 우위의 입장에 서게 되었던 브라흐마나(Brahmana) 기간이 될 때까지 공희(供犧, yagna)에 더욱 더 중점을 두고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3] rta의 이념 혹은 세상의 법칙은 업(業, karma)사상으로 바뀌었는데, 이것은 브라흐마나(Brahmana) 성전에 저장된 의례(儀禮)의 자세한 내용에 따른 공희의 바른 실행에 불과한 것이다. 세상의 법칙에 순응하는 것은 선이고, 이에 반대하는 행동은 악이라는 간단한 이념을 대부분 잊어버리고, 오직 공희의 바른 실행만이 강조되었다.

이 기간동안 사람들은 공희를 실행했을 때 신으로부터 원했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충분하고 강력한 에너지와 같은 것을 가져온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신 자체보다도 공희가 더 중요하게 되었고, 공희는 당시 사회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활동이 되었다.[4] 브라흐마나 성전에서 추천된 여러 가지 공희를 실행하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불행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들의 생애동안 많은 공희를 실행했다.[5]

법칙과 규칙에 따라 모든 것이 끝난 여러 가지의 공희를 착하고 칭찬할 만한 것으로 여겼다. 공희를 위해 이로운 동물에게 고통을 주거나 간혹 죽이는 것조차 선행으로 여겨졌으며, 사람들은 그러한 제물로 잔인한 고통의 희생이 되는 이로운 동물들이 그와 같은 죽음을 당하는 것은 뒤에 천국의 기쁨을 얻는 행운이라고 믿었다.[6] 이 공희에 중점을 두다보니 때때로 신을 위해 인간까지 잔인하게 죽였다.[7] 공희의 효험을 믿는 것이 우세하여 모든 인도주의적이고 합리적인 고려는 뒤로 밀려났다. 그리고 모든 것은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고, 공희는 옳고 바람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높음과 낮음 같은 여러 가지 범주로 나뉘었고, 약간의 사람들은 모든 힘, 즉 쾌락과 안락을 즐기는데 쏟았다. 그 동안 삶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인간의 선행조차 부정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자가 바라는 것이라고 믿었을 뿐, 그것이 부당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8] 그래서 브라흐마나(Brahmana) 시대에는 창조설과 공희의 효험을 믿는 것이 선과 악의 기준이었다. 우주적 이데아인 모든 삶의 존엄성이나 모든 인간들의 자유와 평등은 그 문화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우리는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와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 그리고 유명한 육사외도(六師外道, six heretical teachers) 가운데 앞의 다섯 고행자들의 가르침에 있어서 선악의 기준도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육사외도는 붓다와 동시대의 사람들로서 전통적인 유일신론(唯一神論)의 형태를 버리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한 분들이다.

그들은 인간을 심리적으로 높은 위치로 향상시킬 수 있는 정신적 훈련 방식을 가르쳤다.[9] 그러나 사물의 진실한 본성을 이해하도록 만들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은 별문제로 하더라도 알라라 깔라마와 웃다까 라마뿟따의 교설에 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육사외도(六師外道)가운데 다섯 고행자(Pancavaggika)들은 윤회(輪廻, Samsara)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으로써 극도의 고행주의를 신봉했으며, 함께 하는 사회적 생활을 몹시 싫어했다.[10] 그래서 그들의 종교교리에는 사회에 관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지 않다.

육사외도 중에서 처음 4명, 즉 푸라나 깟싸빠(Purana Kassapa), 막카리 고살리(Makkhali Gosali), 아지따 께싸깜발린(Ajita Kesakambalin), 그리고 빠꿋다 깟짜야나(Pakudha Kaccayana)는 하나 혹은 다른 종류의 결정론자(決定論者)였으며, 사람들에게 솔선하는 것도 부정하고 함께 하는 도덕성도 거절했다.[11] 그러므로 그들의 가르침에서 어떤 선과 악의 기준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다섯째 산자야 벨라띠뿟따(Sanjaya Bellatthiputta)는 자기 자신의 교리는 가지고 있지 않았던 회의론자(懷疑論者, amara vikkhepavadin)였다.[12] 그러므로 그는 옳음과 그름 혹은 선과 악의 문제에 대해 대답을 제시해 줄 수가 없었다.

 

 

니간타 나타뿟따(Nigantha Nathaputta) 역시 다른 종류의 결정론자로 불려질 수 있지만[13] 그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는 수많은 개인적 영혼의 존재를 믿었다. 개인적 영혼은 영원히 변치 않지만 각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영혼과 자기 자신의 행위로 쌓여진 업물질(業物質, karmic matter)에 의해서 윤회에 묶여 있다.

그의 가르침에 의하면 해탈(liberation)은 극도의 고행주의의 실천과 간혹 죽음에 이르러 새로운 행위를 짓지 않으므로 도달할 수 있는 업물질인 영혼의 자유에 의해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이다.[14] 윤리적 체계로서는 붓다의 가르침과 니간타 나타뿟따의 가르침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다섯 가지 맹세(vow or vratas),[15] 즉 죽이지 않는다, 거짓말하지 않는다, 훔치지 않는다, 성교를 삼간다, 세속적인 모든 흥미를 포기한다. 이러한 것들은 나중에 오계(五戒)의 단서가 된다.[16]

다시 말해서 살생을 삼간다(不殺生),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을 삼간다(不偸盜), 부정한 성행위를 삼간다(不邪淫), 거짓말을 삼간다(不妄語), 취하게 하는 술이나 마약 등을 삼간다(不飮酒) 등이다. 하지만 이러한 맹세를 지키는 이유가 니간타 나타뿟따의 체계에서는 보다 자기 중심적이다. 그러므로 단지 이들 맹세의 부정적인 양상이 강조되었다. 그들은 살아있는 것들을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것을 삼가고자 기대한다. 왜냐하면 행위를 함으로써 무거운 업물질이 일어나 사람의 영혼을 보다 무겁게 하고 윤회의 속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아있는 것들을 해치지 않는 극단적인 실행에 종사한다(ahimsa).

살아있는 것이란 유정(有情) 뿐만 아니라 나무와 식물도 또한 포함되며, 이것들은 어떤 종류의 영혼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17] 게다가 업설은 행위에는 현재와 미래에 반응이 있다는 일반적인 교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다. 자이나교에 의하면, 모든 행위는 그것이 의도적이든 또는 그 반대이든지 반응 혹은 결과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만약 당신이 길을 걷고 있는 동안 당신도 모르는 사이 살아있는 생물을 짓밟았다면 그 생물이 파멸되거나 죽게 되는 원인의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 결과로 고통을 받게 된다.

다시 만약 당신이 물 혹은 공기 중에 있는 짧은 생명을 죽였다면, 당신은 다시 죄를 범한 것이다. 자이나의 수행자들은 엄격한 채식주의자들이고, 물 여과기를 가지고 다니고, 천조각으로 그들의 임을 가리고 다니며, 그들이 움직이는 동안 전방의 길을 쓸고, 우기(雨期)동안 자유스럽게 돌아다니는 것을 삼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18] 그 밖의 맹세에 대한 것도 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지금 논의하게 될 불교에 있어서의 선 혹은 악으로 결정되는 기준 혹은 기본과는 그 견해가 매우 다르다.

 

 

이 장을 시작하면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교에 있어서 선과 악의 기준은 세 가지 사항과 관련되어 있다. 즉 사물의 기원과 그 본성에 대한 관점, 삶의 목적과 목표에 대한 관점, 그리고 인간에 대한 관점이다.

첫째, 사물은 인과관계로 상호 관련이 있으며, 조건에 의해 생성되기 때문에 무상(無常)하고, 연기법에 의거하며 쇠퇴하고 파괴된다. 둘째,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해 있는 이 삶의 과정에 대한 가르침이다. 모든 괴로움을 완전히 소멸시키려면 삶의 괴로움이 끝나야만 된다.

이것을 끝내려면 오직 갈애(渴愛, tanha)라고 불리는 윤회(samsara)의 근본 원인을 소멸시켜야 한다. 갈애는 오직 사물의 본성에 대한 통찰의 향상에 의해 소멸될 수 있다. 사물의 본성에 대한 통찰은 오직 집중한 마음의 계발에 의해 이룰 수 있다. 마음의 집중은 계율 혹은 덕의 실천에 의해 마음의 모든 편견의 극복에 의해서 가능하다. 마음의 훈련은 인류애를 일으키는데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행위인 사회생활과 관계가 있다. 마지막으로 요컨대 하나를 위한 선이 전체를 위한 선이 되고, 전체를 위한 선이 하나를 위한 선이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관점이 된다.

 

 

불교에 의하면, 인간의 행위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몸으로 짓는 행위(kayika kamma, 身業)·입으로 짓는 행위(vacasika kamma, 口業)·뜻으로 짓는 행위(manasika kamma, 意業)가 그것이다.[19] 인간의 세 가지 행위는 윤회에 헤매게 하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선행은 이 세상에서 궁극의 진리를 실현시키는 이익(samparayahita)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삶을 기쁨과 행복으로 만들어 준다(ditthadhammasukha, 現法樂). 그리고 그 반대로 가는 모든 행위는 악이다. 불교에 있어서 선과 악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여러 가지 술어들이 있다.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된 술어는 꾸살라(kusala)와 아꾸살라(akusala)이다.[20] 꾸살라(kusala)라는 단어는 '능숙한', '현명한', '유능한', '노련한'의 의미로 사용되었고, 아꾸살라(akusala)는 그와는 반대를 나타낸다.[21] 주석자(註釋者) 담마빨라(Dhammapala, 法護)는 이 술어가 '악을 몰아낸다는 의미에서 꾸살라(Kusala)라고 불렀다.'(kucchita salama atthena kusalam)라고 정의를 내린다.[22] 불교에서 선과 악을 나타내는 이들 두 술어의 선정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악을 행하거나 삶을 자기본위로 사는 것은 매우 쉽다. 힘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 이것을 자연적인 성향이라고 부른다.

집착과 증오는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 가져오고, 무지는 모든 사람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편견 없이 사물을 바라보고, 우호적으로 느끼고, 집착을 극복하는 길은 매우 어렵고, 약간의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매우 중요한 것은 탐욕, 성냄 및 어리석음[無明]을 약화시키는데 기여하는 모든 행동은 꾸살라(kusala, 善)이고, 그 반대는 아꾸살라(akusala, 惡)라는 것이다.

 

 

선과 악을 나타내는데 사용된 두 가지 다른 술어는 뿐냐(punna, 福)와 빠빠(papa, 惡)이다.[23] 이것들은 간혹 공덕(功德, merit)과 죄(罪, sin)로 번역되기도 했다. 주석자 담마빨라(Dhammapala)는 뿐냐(punna)를 '마음을 정화하고 가득 차게 한 것'(santanam punati, visodheti)이라고 정의를 내린다.[24] 이 술어를 다룬 팔리성전협회(PTS) 사전에서 뿐냐(punna)는 언제나 천상의 재생과 미래의 축복 받는 상태의 기초와 조건, 과거생에 쌓여진 공덕에 의존하여 즐김과 지속기간으로 묘사되었다.[25] 이러한 의미에서 빠빠(papa)는 '불행의 상태에서의 고통의 기초와 조건'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팔리 정전(正典)에서의 이들 두 술어의 쓰임새는 불교의 업설과 주로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그가 행한 선과 악에 따라서 미래의 존재 상태가 결정되는 심리학적인 세력이다. 이와 같이 마하망갈라(Mahamangala sutta, 大吉祥經)[26]에서도 사실 선업을 쌓아 축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훌륭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 두 술어가 불교 -- 보다 합리적인 근거에 의거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지 사이를 구별할 수 있는 사람과 함께 -- 에서 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진술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업설을 비교함에 있어서, 불교의 업설에서 기본적으로 다른 점은 의도(意圖, centana)적인 행동이 중요하며, 개인적으로 업력이 발생하는 한 그리고 자신의 심리적 조작인 관심과 의도 혹은 흥미는 모두 중요하며, 이 점에서 선행과 악행은 단지 이것을 근거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앙굿따라 니까야(Anguttara Nikaya, 增支部)의 마하박가(Mahavagga, 大品)에서 붓다는 승려들에게 말한다. "비구들이여, 내가 행위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의도를 의미한다(cetanaham bhikkhave kammam vadami)"[27] 비록 어떤 사람이 의식적으로 한 것이라도 즉 어떤 동기나 의지를 가지고 한 말이든 혹은 생각이든 그것은 실행한 행위에 따라서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어떤 힘을 말하는데, 그것은 즉시 여기서 그리고 지금, 내생이거나 어떤 그 다음 생에서 나타날 수 있다.

또한 담마빠다(Dhammapada, 法句經)[28]에서 말하길, "마음이 모든 행동의 앞선 원인이며, 마음이 최상이고,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일으킨다." 나쁜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은 나쁜 결과[惡果]로 일어나며, 좋은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은 좋은 결과[善果]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탐심(lobha)과 진심(dosa)이거나 치심(moha)이 동기가 된 행동은 언제나 악(akusala)이며, 그와는 반대인 것이 동기가 된 행동, 즉 탐심이 없는 것(無貪, alobha), 성냄이 없는 것(無瞋, adosa), 어리석음이 없는 것(無痴, amoha)은 언제나 선(kusala)이고,[29]

위에서 언급한 선이나 악의 뿌리와도 연결되지 않는 그러한 행동은 중립적인 행동, 즉 무기(無記)인 것이다. 팔리어 용어에서 아로바(alobha)는 단지 탐욕이 없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해야만 한다. 이것은 탐욕이 없음[無貪]에 적극적인 특성, 즉 희생의 정신 혹은 연민(karuna)을 낳는 관용(caga, 捨)을 더했다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도사(adosa, 無瞋)는 증오가 없음에 우호적인 생각과 결합한 동정(同情) 혹은 자애(metta)를 의미하고, 아모하(amoha, 無痴)는 어리석음 없음에 적극적인 측면이 결합된 것, 즉 지식 혹은 지혜(nana)를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에 제외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일반적인 규칙은 좋은 의도가 동기가 된 행동은 좋은 결과를 생기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혹 겉보기에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이 엄청난 재난의 결과를 가져 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잠자는 주인을 귀찮게 하는 파리를 좇아버리기 위해서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주인의 두 코를 자른 헌신적이었던 원숭이의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단적인 예로 인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원숭이의 행동은 좋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즉 그의 주인이 잠을 잘 자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서의 동기는 지혜(nana)와 결합되지 못했다. 이것은 실제로 무슨 결과를 초래할지를 모르는 무지에 이끌렸던 것이다. 그래서 의도가 행위의 본질을 결정함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실제로 의도가 지혜와 결합하느냐 혹은 무지와 결합하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개인과 자신의 업(kamma)에 대한 심리적 결정에 대한 관점으로부터 의도는 모두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와 개인의 심리적 결과의 상호작용의 관점으로부터 의도는 중요할 뿐만 아니라 행위의 결과나 과보는 똑같이 중요하다.

이 점에서 선이나 옳음으로 판단되는 행동은 행위자나 다른 사람에게 조금도 해로움을 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그것은 행위자나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인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암바라티까-라후로와다 숫타(Ambalatthika-rahulovada sutta, 敎誡羅?羅菴婆藥林經)[30] 에서는 이 측면을 자세하게 논의했다. 붓다는 자신의 젊은 아들 라훌라(Rahula)에게 말씀했다. "라훌라야, 거울은 무엇에 쓰는가" 라훌라는 자신의 얼굴을 비추어 보는데, 거울이 쓰인다고 대답했다.

"그렇다." 붓다는 계속해서 "너는 이전에 네가 행한 말과 뜻과 몸으로 행한 어떠한 것도 비추어 보아야 한다. 비추어 보았을 때, 만약 네가 숙고한 행동이 너에게도 해가 되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도 해가 되지 않고, 또한 너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적극적으로 이로운 것이라고 느낀다면, 그와 같은 행동은 선(kusala)으로 간주해도 될 것이며, 수행해도 될 것이다. 반대로 네가 비추어 보았을 때, 만약 네가 숙고한 행동이 너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너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해로운 것이라고 느끼면, 그와 같은 행위는 악(akusala)으로 간주해야 하며, 단념해야만 한다.

위에서 언급했던 논의에 대한 기본이 되는 규칙은 선이나 악으로 여겨지는 어떤 행동을 판단하는 기준을 7가지 범주로 공식화 할 수 있다.

 

 

1. 행위자에게 해로운 행동이지만, 나머지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악행이다.
2. 행위자에게 이익을 주는 행동이지만, 나머지에게 해로운 것은 악행이다.
3. 행위자와 나머지 모두에게 해로운 행위는 악행이다.
4. 행위자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이지만 나머지에게 효과가 없는 것은 선행이다.
5. 나머지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이지만, 행위자에게 효과가 없는 것은 선행이다.
6. 행위자와 나머지 모두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는 선행이다.
7. 행위자와 나머지 모두에게 효과가 없는 행위는 선행도 악행도 아니다.

 

 

여기서 그 이상의 문제가 제기된다. 그것은 어떤 수단을 채택하든 행위의 본질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은 여기서 검토되어져야 한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행위의 본질을 결정할 때 수단은 물론 결과도 동등하게 중요하다. 전술(前述)한 논의에 따르면, 어떤 해로운 것일지라도 행위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거나 다른 사람에게 간혹 매우 좋은 결과에 도달하기도 하고, 해로움이 단지 결과적으로 선행에 도달하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다. 채택된 수단과 도달한 결과는 독자적으로 판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다시 말해서 개인은 자신의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해야 한다. 어렵게 발생할 경우에는 간혹 그것을 해야 할지 해서는 아니 되는 것인지를 결정하고자 할 때는 중도(中道)를 따라야 한다. 예를 들면, 설사 불교에서 나쁜 것으로 여기는 거짓말을 하더라도, 개인과 집단에 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때에 조금이나마 거짓말을 하여 여러 생명들을 살리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선행이 되거나 또한 그러한 거짓말이 어느 부분에도 어떤 명백한 손해의 원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숲속의 길을 가고 있는 어떤 남자가 머리카락이 헝클어진 채 숨을 헐떡이며 복장이 흩어진 상태에서 달리고 있는 어떤 여인을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그는 여인이 가까운 덤불 속에 몸을 숨기려는 것을 보았다. 마침 그가 몇백 야드 앞으로 나아갔을 때, 그는 잔인하게 보이고, 몹시 화가 나서 손에 뾰쪽하고 날카로운 칼을 들고 여인이 도망간 쪽으로 달려가는 어떤 남자를 보았다. 그 남자는 여행자를 보자말자 멈추어 서서 그에게 그 방향으로 달아나고 있던 어떤 부인을 보았는지를 물었다. 여행자는 그가 여인을 죽이거나 육체적인 상해를 입힐 목적으로 그 여인을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의 형색으로부터 알아차렸다.

만일 여행자가 진실을 말하게 된다면, 그 여인이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며, 또한 살인자는 자연적으로 그러한 결과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행자가 그 상황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을 자제하게 된다면, 다시 말해서 그가 그 상황에서 이로운 거짓말을 하게 된다면, 이것은 여인의 목숨을 구하게 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중대한 어려움에 떨어지는 것을 예방할 수가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의 거짓말은 정확하게 여행자에게 해로운 것이 아니지만, 동시에 중대한 범죄를 예방한다. 우리는 붓다조차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큰 이익을 행하기 위해서 그와 같은 방법에 의지했다.

우리는 죽은 아들의 시체를 껴안고 붓다께 찾아왔던 여인을 기억할 것이다.[31] 그 여인은 죽은 자식을 살려달라고 붓다께 간청했다. 그 때 붓다께서는 '태어난 자에게는 반드시 죽음이 있다'(Jatassa nama niyato maccu)라고 꾸밈없는 진리를 그 여인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대답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대신에 그녀가 이전에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던 어떤 집에서 겨자씨 한 움큼을 가져온다면, 죽은 자식을 살려주겠다고 그는 매우 조용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겨자씨를 찾으려 이집저집으로 다녔다.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으며, 그녀는 예전에 모든 집에서 죽음이 있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그 여인은 이것이 자신에게만 생긴 불행이 아니며, 죽음은 태어난 모두에게 일어나는 매우 자연적인 사건임을 깨닫게 되었다. 난다의 이야기,[32] 이른바 고귀한 신분이 약속되어 있던 싯닷타 왕자의 배다른 동생, 난다가 종교생활에서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재판 역시 또 다른 그와 같은 사건이다. 보다 많은 예증은 {方廣大莊嚴經(lalita-vistara)} 및 {妙法蓮華經(Saddharmapundarika sutra)}[33]과 같은 불교 범어 자료에서 볼 수 있다.

전체의 {방광대장엄경}은 인간으로서 세상에서 노닐었던 우주적 진리 그 자체일 뿐인 초인적인 붓다는 당장 훌륭한 가르침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이며, 사실 그는 태어나지고 않았으며 죽지도 않았다고 우리들에게 알려주는데 헌신하고 있다. 히나야나(Hinayana) 혹은 소승(小乘)은 미묘한 대승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적 능력이 낮은 사람들을 단지 만족시키기 위해서 붓다께서 설법했던 것이며, 그 소승은 한쪽에 치우친 진리에 불과하다라고 {묘법연화경}은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다.[34] 이러한 방법을 방편(upaya kausalya)이라고 부른다. 즉 악의 없는 속임 방법은 긴급한 재난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한다.

그리하여 나중에 올바른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올바른 것과 나쁜 것을 결정하는데 다른 방법은 맛지마 니까야(Majjhima Nikaya, 中部)[35]의 아빤나까 숫따(Apannaka sutta, 無戱論經)와 아빤나까 자따까(Apannaka Jataka, 無戱論 本生譚)[36]에 설해져 있다. 이러한 방법은 진리 혹은 사물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방법(ekamsika, aviruddha, niyyanika)이라고 불렸다.[37] 이러한 방법은 대개 선행과 악행의 효력과 신(神)의 존재와 같은 종교적 문제들에 관해서 무엇을 믿고 받아들여야 하며, 무엇을 믿지 않고 거부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데 서술되었다.

이것들은 그때까지 사람들이 진리로서 무엇이 유익한 것인지 받아들이기 위해서 행해야 하는 것에 대한 보다 높은 지혜의 계발 이후의 이해와 확인을 하기 위한 문제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통의 사람들은 형벌의 두려움을 통해서 반사회적 행위를 금해야겠다고 결심하며, 그들은 내세에서의 부와 번영 및 행복을 기대하여 선을 행하기로 결정한다. 이 경우에 있어서 불교는 선행과 악행의 효과를 믿기보다는 그들이 선을 행하고 악행을 스스로 피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복지와 행복은 물론 다른 것도 결과로 간주한다. 붓다는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고려한 선을 행했을 때, 그것은 두 가지 점에서 이익이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로 그와 같은 사람들은 현자와 좋은 사람의 칭찬을 받을 것이며, 그들은 존경받게 될 것이며, 그 결과 그들은 명예와 존경을 받고, 어느 곳에서나 훌륭하게 대접받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처럼 비록 그의 믿음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그의 행위에 관해서는 어떠한 손실도 없다. 다른 한편 만일 그의 믿음이 진실이라면 그의 행위는 지금 여기서 이익을 가져다 줄 뿐만 아니라 또한 내세에서도 이익을 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아빤나까 자따까[38]의 설화에 실례가 있는데, 그곳에 사막을 가로질러 갔던 여행단이 물을 담은 용기를 운반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도중에 몇 마일밖에 차가운 물로 가득한 큰 연못이 있고, 물은 청결하며, 어렵게 물통을 운반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던 악마에게 속았다. 여행자들은 악마의 말을 믿고 물통을 비우고 나서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악마의 말과는 반대로 그곳에는 연못이 없었다. 그들은 크다란 갈증 속에서도 여행을 진행했다.

결국 모두 악마의 먹이가 되고 말았다. 그것을 실행했던 다른 그룹도 같은 악마를 만났다. 그들도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악마를 믿지 않고 물을 운반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만약 악마의 말이 진실이라면 연못 근처에서 물통을 비우고 연못에서 물을 마시고, 그 연못에서 다시 깨끗한 물로 채울 것이다. 만약 그의 말이 거짓이면 가지고 있는 물로 마시고 갈증을 풀 수 있다. 그들은 언제나 그것을 가져야 된다는 생각을 일으켰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사막을 건너는데 성공했고 안전하게 자기들의 길을 갈 수 있었다.

 

 

선인지 악인지를 결정하는 또 다른 접근 방법이 아누마나 숫따(Anumana sutta)[39]에 설해져 있다. 이 경에 어떤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할지 혹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결정하는데 그 기준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을 것을 삼가야 한다고 말했다. 논의는 다음과 같다.

즉 "나는 그를 좋아하지 않으며, 그를 미워한다와 같이 이러이러한 사람은 악을 마음에 두고 있으며, 악의 영향 아래 있다. 마찬가지로 만일 나 역시 악을 마음에 품게 된다면, 그리고 나를 지배하고 있는 악의 생각을 허용한다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러한 반성으로,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악의 생각을 뿌리 뽑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는 이러이러한 사람과 그의 방법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같은 일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나 이와 같은 방식의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고 남을 헐뜯는 것을 삼가지 않으면 안된다. 이 논의는 성냄, 자만, 질투 등과 관련된 것이 계속되고 있다.

 

 

벨루드와라 숫따(Veludvara sutta)[40]는 같은 이념을 약간 다른 방법으로 표현했다. 이 경에서는 다음의 고려할만한 어떤 사항들을 피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했다. "나는 날기를 원하지 죽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행복을 갈구하고 괴로움을 원망한다. 이러한 존재를 만일 어떤 사람이 나를 죽인다면, 내가 좋아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을 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만일 내가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며 행복과 쾌활하기를 원하고 괴로움을 혐오하는 다른 사람을 죽인다면, 이것은 분명히 그가 좋아했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즐거움과 좋아함이 아니며, 도한 다른 사람에게도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즐거움과 좋아함이 아닌 것이 나에게 행해졌던 그와 같은 것을 어떻게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심사숙고한 다음, 자기 스스로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고, 죽이기를 다른 이에게 고무시키지 않으며, 살생과 생명에 상해를 야기하는 것을 삼가는 것을 칭찬하는 말을 해야만 한다. 도둑질·관능적인 품행[간통]·거친 말·중상하는 말·험담 등과 같이 일반적으로 악으로 용인된 다른 것들에 관한 같은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아직 언급하지 않은 다른 행위의 윤리를 판단하는 기준, 즉 지혜로운 사람이 칭찬하는 것이거나 비난하는 것에 대하여 언급할 필요가 있다.[41]

멧따 숫따(Metta sutta, 慈悲經)[42]에서는 현자의 비난과 불찬성의 결과를 초래하는 사소한 것조차도 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아빤나까 숫따에서도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해서는 안되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서의 그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정신적으로 매우 성숙하지 못하고 지적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권장된 기준으로 보인다. 사회생활을 영위함에 있어서 사회에서 평화스럽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각 개인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될 일들이 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결정할 수 없을 때, 그는 그 사회에서 현자나 훌륭한 사람으로 인정된 사람의 예를 따라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논의했던 관념의 기초를 이루는 근본적인 개념은 인간은 모든 생물 가운데 최상이며,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며, 생명은 모든 유정(有情)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며, 자신과 모든 사람들의 행복에 이르는 행위를 누구나 각자가 수행해야만 된다. 또한 모든 사람들은 여하튼 사회에서 평화를 방해할 수 있는 행동들을 삼가야만 한다고 다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끝>

 

 

Notes:

1) ERE. Vol. 12. p.603. [Return to Text]
2) Faquher, J. N., An Outline of the Religious Literature of India, p.12; John Dowson, A Classical Dictionary of Hindu Mythology, p.337. [Return to Text]
3) Martin Haug, Aitareya Brahmana, p.73f. [Return to Text]
4) ERE. Vol. 2, p.800. [Return to Text]
5) ERE. Vol. 12, pp.613-616. [Return to Text]
6) Manava Dharma Sastra, ch.5. vs. 42. [Return to Text]
7) A. IV. p.151; Sn. vs. 303. [Return to Text]
8) Manava Dharma Sastra, ch.9. vss. 334, 335. [Return to Text]
9) M.I, pp.165-166. [Return to Text]
10) Vin.I, pp.8-9; M.I, pp.77-79. [Return to Text]
11) D.I, pp.52-60. [Return to Text]
12) D.I, p.59. <譯註: 산자야의 주장은 흡사 장어를 잡을 때처럼 미끌미끌 빠져나가는 것과 같아서 捕鰻論(amara-vikkhepa, 不死矯亂論)이라고 불렸다. 즉 오늘날의 詭辯論을 말한다. 水野弘元, <原始佛敎>, p.72.> [Return to Text]
13) ERE. Vol.7. p.469 (see under karma). [Return to Text]
14) ERE. Vol.7. p.471; Vol.4. p.484. [Return to Text]
15) ERE. Vol.5. p.470. [Return to Text]
16) Bu.II.190; D.I.4. [Return to Text]
17) ERE. Vol.7.p.469. [Return to Text]
18) ERE. Vol.7.p.471. [Return to Text]
19) Sn. v. 232. [Return to Text]
20) D.III, p.157; M.I, p.489; S.V, p.91; Miln. 25; Nett. 161, 192. [Return to Text]
21) PED. p.51. [Return to Text]
22) VvA. 169; DhsA. 39. [Return to Text]
23) D.III. p.119; S.I. p.114; S.II. p.82; A.I. p.154. [Return to Text]
24) VvA. 19. [Return to Text]
25) PED. p.86. [Return to Text]
26) Sn. Vs.260; HOS. Vol.37.p.64. [Return to Text]
27) A.III.415. [Return to Text]
28) Dhp.vss. 1,2. [Return to Text]
29) M.I.47, 489; A.I.203; Nett.183; D.III.214; Dhs.32, 313. [Return to Text]
30) M.I.414-420. [Return to Text]
31) Thig.174ff; Ap.II.564f.; DhpA.I.270ff. [Return to Text]
32) J.I.91; II.92ff; DhpA.I.96-105; UdA.168ff.; SnA.273. [Return to Text]
33) Sdmp. upayakausalya parivart (ch.2.p.23-46). [Return to Text]
34) Sdmp.p.35-36. [Return to Text]
35) M.I.400-413. [Return to Text]
36) J.I.104. [Return to Text]
37) J.I.104. [Return to Text]
38) J.I.98-105. [Return to Text]
39) M.I.97-98. [Return to Text]
40) S.V.353-56. [Return to Text]
41) M.I.406. [Return to Text]
42) Sn.vs.145. [Return to Text]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3365910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