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義湘) 대사 법성게(法性偈)>
의상대사
화엄일승법계도
신라의 의상(義湘, 625~702) 대사가 중국에 가서 <화엄경(華嚴經)>을 공부한 후 <화엄경>의 핵심내용을 7언 30구 210자로 표현한 게송이 <법성게>이다.
그리고 이 30구의 게송을 도표화 한 것이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이고, 줄여서 <법계도(法界圖)>라고도 한다. 30구의 게송을 54각(角)의 네모꼴로 도표화한 도인(圖印)이다. 이를 <해인도(海印圖)>라고도 한다.
<법성게>는 <화엄경>의 내용과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한 글로 유명하다. 의상 대사의 탁월한 안목과 지혜, 간절한 자비심이 담겨 있다. 부처님 가르침인 팔만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방대하고 내용이 깊다는 <화엄경>을 축약해서 그 진수를 뽑은 글이다. <화엄경>의 사상을 그 핵심만 추려 간략히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해동화엄(海東華嚴)의 발원지가 된 명문(名文)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가히 유식에서의 <유식삼십송>에 비견할 <화엄 삼십송>이라 할 만하다.
이로써 저자 의상(義湘) 대사는 해동화엄의 초조(初祖)라 칭송된다. 의상은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해, 원효(元曉)를 만나 같이 입당 유학을 꾀하게 된다. 그러나 1차 입당 시도는 실패하고, 36세 때 행한 2차 입당 시도가 성공해 중국 화엄의 제2조 지엄(至相 智儼, 602~668)에게 사사했다. 이때 중국 화엄의 제3조가 될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과는 동문이 됐다고 한다.
진여(眞如)나 불성(佛性)이나 법성(法性)이나 다 같은 말인데, 법성을 법과 성으로 글자를 떼어 해석할 때는 법은 제법(諸法)의 법으로 모든 존재의 상황을 함께 묶어 표현하는 말이 된다. 곧 현상 속에 전개되는 일체만유의 차별상이며, 이 차별상을 에워싼 시간과 공간적인 상황 전체가 법의 범주에 모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성(性)은 불변의 본체를 말한다. 즉, 성(性)이란 일체 모든 존재가 일체존재인 까닭이며, 도리(道理)인 것을 말한다. 일체 모든 존재는 결코 무의미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기 독자적인 모양과 특성을 가지고 서로 서로 의지하고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존재하고 있다. 또한 각기 어떤 일정한 공간(생활환경)과 어느 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확한 대자연 질서와 불변의 법칙성에 의해서 존재하고 있다.
존재론적인 차원에서는 법은 존재 자체와 존재하는 방법이 모두 법의 카테고리에 들어간다. 이러한 법의 근원인 본래의 성품인 성은 모든 상대적인 차별에서 벗어나 전일적(全一的)인 것으로 원융무애하다고 설명한 것이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법성은 원융해 두 모습이 없으며」라는 <법성게>의 첫 구절이다.
<법성게>의 중요한 게송은 아래와 같다.
•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 법성은 원융해 두 모습이 없다. 법과 성품은 원융해 두 가지 차별한 모양이 아니다.」
<법성게(法性偈)> 첫 구절이다. 법성은 원융무애(圓融無礙)하다는 말이다. 이 원융무애사상이 바로 화엄사상이고 이 화엄사상을 아주 엑기스화해서 구체화한 것이 <법성게>이다. 따라서 <법성게>만 잘 이해하면 <화엄경>을 이해한 것이 된다. 그 <법성게> 전체의 대의를 말한 것이 이 첫 구절이다.
원융무애하다는 것은 원만하고 융통해 걸림이 없으며, 방해됨이 없이 융합하다는 의미이다. ‘원융’은 원만하게 두루 융섭해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연기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무애’는 치우침이나 편견 없이 서로 통해 완전한 일치 내지 조화를 뜻하고, 중도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원융무애는 연기와 중도의 또 다른 표현이다. 또한 원융무애는 대립이 없는 초월의 경지에 나타나는 현상이며, 바로 화엄사상을 말한다. 원융(圓融), 원융무애(圓融無礙), 원융회통(圓融會通), 원통무애(圓通無礙)가 다 비슷한 말이다.
•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 일체법은 움직이지 않고 본래 적멸하다.」
<법성게> 제2구이다. 여기서 법이란 절대가 아닌 드러난 현상을 말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그리고 제법은 일체 모든 법이란 말이다. 즉, 우주 일체가 드러난 모든 모습, 만유를 일컫는다. 그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현상은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는 법이란 도저히 있을 수 없다. <화엄경>은 변화의 가르침이다. <화엄경>은 법계연기(法界緣起)를 통해 생명체와 사물의 변화과정을 설하고 있다. 화엄은 사사무애법계로 연기를 설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제법은 부동이라 했다. 왜 그럴까?
여기서 부동은 법의 본질, 정(靜)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 모든 존재의 본래 모습이 적멸하다는 말이다. 흔들림 없이 평안함을 나타낸다. 법성(法性)으로 원융(圓融)하게 사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본래(本來) 고요함이다. 이는 수행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 그러하다는 말이다.
'본래적(本來寂)'이라 글자 그대로 옮기면 '본래 고요함'이다. 본래 고요함'에서 '본래'의 뜻은 어떤 벌어진 상황의 최초를 가리킨다. 우주(宇宙)에서 우(宇)는 공간(space)을 말하고, 주(宙)는 시간(time)을 말하는데, 공간과 시간이 고요하다고 했다. 공간(宇)은 공간대로 본래 고요하고, 시간(宙)도 시간대로 본래 고요하다. 처음에는 고요했는데 지금은 시끄럽거나. 즉, 현상은 시끄럽게 움직인다.
그러나 움직인다고 하는 것은 껍데기다. 물리적으로 봤을 때 모든 것은 움직인다. 그렇다면 정말 물리의 세계는 움직일까? 움직임이 아니라 움직인다고 느낄 뿐이다.
하늘(天)이 공간적으로 활짝 열리고(開), 땅(地)이 시간적으로 솟구쳐 쪼개지니(闢), 엄청난 움직임이 일어났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이는 움직였다는 생각일 뿐 하늘도 땅도 움직인 적이 없다. 과거(本)에서 미래(來)에 이르기까지 이 지구 전체, 이 세상 전체를 놓고 본다면 결국 어떤 것도 늘거나 줄지 않는다. 이것이 이른바 부동(不動)의 법칙이다. 그래서 부동이라 했다.
모든 법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 같으나 그로 인해 지구 무게가 늘거나 줄지 않는다. 부동은 움직이지 않음이고 질량이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음이다.
그러나 개개를 봤을 땐 움직인다. 그래서 법계연기를 말한다. 전체를 봤을 땐 부동이고 본래적(本來寂)이다. 세상 모든 법은 부동의 세계고 이의 본질은 본래로 고요함이다. 잠시 시끄럽고, 움직일 뿐 결국은 다 사라진다.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죽지 않는 생명체가 없다. 낡고 사라지지 않는 게 없듯이 끝내 없어지지 않는 사건이란 없다. 지구상에 영원히 남아도는 사건은 없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죄다 본래적이다. 본래적(本來寂)의 본(本)은 근본이다. 그 근본은 본래 적하다고 했다.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 하나에 일체가 있고 일체는 하나에 있으며,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이다.」
우리의 진성(眞性) 자리에는 모든 것이 전부 포함돼 있다. 하나 속에 많은 것이 다 포함돼 있다. 포함돼 있지 않는 게 없다. 그 속에 전부 다 포함돼 있다. 그래서 하나 가운데 전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가 곧 전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 성품 자리가 그러하다. 내 한 성품이 다른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과 일체 세상의 성품하고 통해 있다. 다 포함돼 있다. 그리고 그 전체 속에서 내 한 사람이다. 그래서 내 한 사람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사람 속에서 내 한 사람이 있다. 이것은 비단 사람, 혹은 나 한 사람만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도 다 그런 관계를 맺고 있다. 상즉상입(相卽相入)하고, 중중무진(重重無盡) 한 무진연기(無盡緣起)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화엄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전체와 내가 둘이 아니다. 이 우주와 내가 둘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이다. 한 구성원 속에 그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분리하려야 분리할 수 없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말이다. 그게 일중일체(一中一切) 하나가 곧 전체고, 다중일(多中一) 전체가 곧 하나다. 왜냐하면 하나하나 빠져나가면 결국 전체가 없어진다. 전체라고 하는 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전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잘 돼야 전체가 잘 되고, 전체가 잘 돼야 나도 잘 되는 것이다.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그대로 하나이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화엄의 가르침이다.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여럿 속에 하나가 있어 하나가 곧 일체요, 여럿이 곧 하나라는 말이다. 화엄종의 중요 명제이며, 기본 교의이다. 앞에 나온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일즉다 다즉일", 즉 한 알의 쌀을 보고 사회전체, 우주전체의 일들을 알아낸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한 알의 쌀에는 그것을 생산한 자연, 농민의 땀, 비료, 농기계 등 산업과 유통, 먹고사는 인간의 생명 등 온갖 것들이 다 담겨 있다. 이들 모든 것이 어떤 질서에 얽매어 단위(多)를 이루는 것이다. 한 알의 쌀은 쌀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쌀 한 알을 물리적으로만 봐서 분해하고, 인간 생명의 비밀을 유전자로서만 해명해 그 물질적 구조만을 연구한다면, 물질적인 면은 설명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 삶의 근원적인 해탈에는 도달하기 어렵다. 그런데 낱낱은 또 전체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불교적인 인간관은 일즉다 다즉일 (一卽多 多卽一)이다. 단순히 개인이 모여서 사회를 형성하는 것만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전체)를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나 이외의 백 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백 명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나에게 있어서 그 백사람이 모두 어떤 관계를 갖고 있다. 곧 나 자신이 백 명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전체는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이 소중한 만큼 전체도 소중하고, 전체가 소중하려면 개인이 소중해야 하는 것이다.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 한 개의 티끌 속에 온 우주를 머금고 있다.」
작은 티끌 하나 속에도 시방세계(우주)가 다 펼쳐져 있다는 뜻인데, 이는 시방세계의 티끌 속에도 또 다른 시방세계인 무한한 우주가 펼쳐 있으므로, 이렇게 이어지는 우주는 무한해서 끝이 없다는 말이다. 비슷한 속어에 ‘보현보살 털구명’이란 말이 있다. 보현보살의 작은 털구멍 속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또 미륵보살 누각 안에 시방세계가 다 펼쳐져 있다는 말도 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대해 두 가지 방식으로 관찰할 수 있다. 하나는 ‘국소(局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편재(遍在)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것이 특정한 위치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고, 그 사건이 온 세상에 퍼져 있다고 볼 수도 있다.
예컨대, 9.11 테러를 단순히 뉴욕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고, 온 세계에 걸쳐 기독교와 회교도의 갈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럴 때, 단순히 뉴욕에서의 벌어진 사건으로 보는 것은 ‘국소(局所)적’ 관찰이고, 기독교와 회교도 간의 세계적 갈등관계로 보는 것은 ‘편재적 관찰’이다. 전자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관찰이고, 후자가 바로 화엄적인 관찰이다. 촛불 하나를, ‘겨우 촛불 하나’로 볼 수도 있지만, 넓게는 촛불 하나가 온 방 가득히 밝힌다고 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일미진중함시방은 곧 편재적 관찰을 말한다.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 낱낱의 티끌 마다 온 우주가 들어 있다.」
인다라망(因陀羅網) 보석 그물이란 말이 있다. 제석천(帝釋天)이 사는 선견성(善見城) 위의 하늘을 덮고 있는 보석그물을 말한다. 이 그물에는 그물코마다 보배구슬이 박혀 있고, 수많은 보석 하나하나의 구슬마다 다른 모든 구슬의 영상이 비치며, 구슬마다에서 나오는 빛들이 무수히 겹쳐 무수한 보주들은 서로 비춘다.
모든 티끌마다 우주가 다 들어있다는 말은, 인드라망의 구슬 어느 것 하나를 잡아도 그 속에는 이 세상의 모든 모습, 모든 소리, 모든 냄새, 모든 빛깔이 다 들어 있음과 같다는 말이다. 온 우주에서 발생한 모든 사건들이 구슬 한 개 속에 다 들어있다. 마찬가지로 구슬이 아니라 티끌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티끌마다 온 세상의 정보가 다 들어있다. 이를 두고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라 한다.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 초발심 할 적의 마음 그대로가 바로 부처님 마음이다.」
‘초발심을 했을 때가 문득 정각이다’라는 말로서, 깨달음을 이루려는 맨 처음의 결심이 깨달음을 이루는데 가장 중요하다는 뜻이다. 혹은 처음 발심 한 그것이 변치 않고 그대로 있으면 곧 부처의 경지라는 말이다. 누구나 처음 시작할 때 가진 마음이 순수하고, 지극하며, 애틋해서 이때의 마음가짐을 오래 지속하면 그것이 믿음의 핵심이고, 성불하는 길이라는 말이다. 일반사회에서 ‘초심으로 돌아가서’라는 말을 곧잘 하는데, 이와 비슷한 말이다.
변정각(便正覺)에서 변(便)자는 ‘같다’는 뜻이다. 그리고 정각(正覺)은 바르게 깨닫는다는 말이다. 깨달으면 모든 이치를 다 알고 다 행할 수 있는 것으로 보지만, 깨달음에도 차이가 있다. 깨달을 오(悟)의 경우, 오도(悟道)라고 하는 것은 성품을 깨닫는다는 뜻이며, 정각(正覺)은 바르게 깨닫는다는 말이다.
따라서 초발심시변정각이라 함은 처음 발심을 하게 되면 그 서원이 부처의 마음과 일치가 됨에 부처의 깨달은 마음과 같다는 것이며, 그 같은 마음이 육바라밀과 십바라밀을 통해 공덕을 원만성취해 정각을 이루는 길임을 말한다. 그리고 정각의 경지에 드는 것을 등각(等覺) 혹은 묘각(妙覺)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 ― 나고 죽는 깨달음의 바탕은 한 덩어리,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 한다.」
나고 죽는 것과 열반(涅槃)의 대도(大道)가 항상 같이하며 중생과 부처가 따로 없다. 생사는 우리가 떠나고 싶은 자리고, 열반은 이르고 싶은 자리인데, 떠나고 싶은 그 자리와 이르고 싶은 그 자리가 결국은 한 덩어리인 자리다. 생사에 윤회하는 진성(眞性)이나 열반대도(涅槃大道)에 있는 진여(眞如)나 근본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공화동성(共和同性)이라는 말이다.
나고 죽는 깨달음의 바탕은 한 덩이다. 생사와 열반은 항상 조화를 이룬다. 생사와 열반은 하나다. 생사를 떠나 따로 열반이 있지 않다. 누군가의 죽음에 다른 누군가의 태어남이 있고, 누군가의 태어남에 다른 누군가의 죽음이 있다. 무아(無我)의 세계니 연기(緣起)의 흐름만이 있다. 그러므로 생사의 끊임없는 변화 곧 무상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지혜이며, 모든 불만족을 벗어나는 길이다.
역설적으로 생각해서, 태어나기 때문에 죽는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죽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해보면, 여러 가지로 새롭게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죽음과 삶은 중간에 문이 있는 양쪽 방과 같다. 중앙에 하나의 문이 있고 양쪽으로 방이 있다고 생각할 때, 그것을 한중간 위에서 본다고 가정해보면, 누군가 문을 닫고 방을 나가지만, 다른 방에서 보면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들어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죽음과 태어남이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며, 어느 것 하나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경전은 태어남과 죽음을 대부분 함께 설명하고 있다.
이상의 대의가 화엄사상이다. 때문에 글귀들의 대의가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모두가 원융무애(圓融無礙) 한 무진연기(無盡緣起)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법계도>와 관련해서 신비스런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의상이 스승 지엄(智儼)에게서 <화엄경>의 도리를 배우던 때, 어느 날 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스스로 깨달은 바를 저술해 남에게 알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일러주었고, 또 어느 날은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나타나 머리가 총명해지는 약(藥)을 10여 제(劑)나 지어주었으며, 또 하루는 청의동자(靑衣童子)가 나타나 비결을 전수해주었다.
하도 기이해 의상이 이 사실을 스승에게 고하자, 스승 지엄은 “나는 꿈에 한 번 신인을 만났을 뿐인데 너는 세 차례나 만났으니 멀리서 찾아와 공부한 것이 헛되지 않았다.”며, 그 동안 얻은 바를 책으로 정리하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의상은 <대승장(大乘章)>10권을 편집해서 스승에게 올렸는데, 스승은 이를 보고 “의리(意理)는 아름다우나 문장이 옹색하다.”고 해서, 의상은 다시 번거로운 것을 삭제하고 뜻이 통하도록 한 다음 <입의숭현(立義崇玄)>이란 이름으로 다시 지어 올렸다.
이를 받아본 지엄은 의상과 함께 불전(佛殿)에 나아가 아뢰기를, “원컨대 이 글이 성인(聖人)의 뜻에 맞는다면 불에 타지 마소서.”라고 서원한 뒤, 책을 태웠는데, 다른 부분은 모두 불에 탔으나 210자만은 타지 않자, 스승은 이 글자를 주워서 의상에게 주면서 <화엄경>의 요지로 다시 쓰게 했다.
그리하여 의상이 며칠 동안에 이를 <게송>으로 새로 지으니 이것이 <법성게>이며, 이어서 이를 <해인도(海印圖)>라는 도표에 써넣으니 이것이 바로 <화엄일승법계도>이다. 그리고 이것을 지엄에게 제시해 인가받았다고 한다.
스승 지엄(智儼) 화상은 자신이 그린 72인(印)보다 의상의 1인(印)이 더 훌륭하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스승 지엄은 경탄해 가로되, “나는 72개의 해인(海印)을 그렸는데 그대는 한 개 해인으로 다했노라. 그대의 해인은 총체(總體)가 되고 나의 해인은 별개(別個)가 되노라.”라고 했다고 한다.
즉, <법계도>는 <법성게>를 해인삼매(海印三昧)에 비추어 도인(圖印, 圖形) 형태로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을 곧잘 바다에 비유한다. 바다는 깊고 넓은 것이며, 또 한없는 보배를 간직하고 있다. 또한 만상(萬象)을 비쳐주는 능력이 있다. 마음의 바다도 이와 같아 깊고 넓으며 무한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며, 깨달음의 세계를 마음을 통해 비춰볼 수 있다. 다만 깨달음의 세계, 곧 참된 진리의 세계가 비춰지기를 바라기 위해서는 먼저 물결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파도가 일고 있는 바다에는 만상이 비춰지지 않는다. 파도는 바람이 불어 일어난 것, 따라서 바람이 자면 바다는 고요하며 만상이 저절로 비춰진다. 마음의 바다에 무명의 바람이 불지 않아 번뇌의 파도가 쉬면 고요한 법성의 세계가 여실히 나타나게 된다. 파도가 잠든 바다, 거기에 진실한 실상의 세계가 나타난 것을 일러 해인(海印)이라 하고, 번뇌가 잠든 마음의 바다를 해인삼매(海印三昧)라 한다. 이래서 <법계도>는 <해인도>라 불리어지기도 한다. <법계도>는 직관으로밖에 증득할 수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상징하는 하나의 표징이다.
--------------------------------성불하십시오. 작성자 아미산(이덕호)
※이 글을 작성함에 많은 분의 글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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