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물것인가 벗어날 것인가
글을 쓸 때 제목을 나중에 붙인다. 좋은 소재가 생각나서 글을 구성하고 난 다음 핵심어를 키워드로 하여 제목을 단다. 그러나 때로 제목을 먼저 짓고 그 제목에 맞추어 구성하는 경우도 있다. 잘못된 습관과 관련하여 ‘머물것인가 벗어날 것인가’라는 말이 떠 올랐다.
착하게 살자 하지만
머무는 것은 ‘현실안주’를 뜻한다. 소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때 되면 밥먹고 졸리면 자는 식이다. 지혜로운 삶이 될 수 없다. 벗어난다는 것은 현 상태를 건넘을 뜻한다. 적극적인 삶의 방식이다. 땡기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사는 것이다.
흔히 ‘착하게 살자’라고 말한다. 초등학교 다닐 때 들어 보던 말이다. 그러나 ‘지혜롭게 살자’는 말은 좀처럼 듣기 힘들다. 착한 것과 지혜로운 것은 다른 것이다. 조폭이 ‘차카게 살자’라고 다짐 하였을 때 어떤 착함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폭력을 일삼는 폭력배가 개과천선하여 ‘지혜롭게 살자’라는 말을 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착한 것과 지혜로운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작용만 하는 마음
불교에서는 반드시 착함만을 강조 하지 않는다. 착하게 살아 하늘나라에 태어나기를 말하긴 하지만 그것이 불교의 목적이 아니다. ‘착하게 살자’라는 구호는 타종교에서도 볼 수 있다. 착하게 사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건넘을 요구한다.
선업공덕을 짓는 것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선업공덕을 짓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악하고 불건전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선업도 짓지 않고 악업도 짓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작용심이다. 이를 ‘끼리야찟따(kiriyacitta)’라 한다.
작용심은 대상을 보았을 때 과보를 생산하지 않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다. 설령 선한 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선한행위를 했다는 마음을 내지 않는 것이다. 보시를 했다고 하여 티를 내지 않는 것과 같다. 하늘나라에 태어나기 위하여 보시 하지 않는 것이다. 대가를 바라는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업을 해도 이를 공덕으로 만들지 않는다. 공덕을 그 자리에서 회향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선업도 악업도 쌓지 않았을 때 재생의 근거가 되는 업의 과보를 받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아라한의 삶이라 한다.
모든 부처님 말씀하시길
착하게 사는 것은 필요하다. 왜 그런가? 처음부터 ‘불사선불사악’이라 하면 아마 막행막식할 것이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식이다. 이렇게 ‘땡기는대로’ 살았을 때 악업을 지을 수밖에 없다. 걸림없이 산다고 하지만 지혜가 없다면 내키는 대로 살기 쉽다. 그래서일까 법구경에서는 모든 부처님들이 이렇게 말씀 하셨다고 전한다.
Sabbapāpassa akaraṇaṃ, (諸惡莫作)
kusalassa upasampadā, (衆善奉行)
Sacittapariyodapanaṃ (自淨其意)
etaṃ Buddhāna' sāsanaṃ. (是諸佛敎)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이것이 모든 깨달은 님들의 가르침이다. (Dhp183, 전재성님역)
게송의 키워드는 빠빠(papa)와 꾸살라(kusala)와 빠리요다빠나(pariyodapanā)이다. 각각 악행, 선행, 청정이라 번역할 수 있다.
빠빠와 꾸살라
빠빠는 악하고 불건전 한 것이다. 대게 공덕을 뜻하는 ‘뿐냐’와 함께 나온다. 또 빠빠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뜻하는 꾸살라와 대비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이런 빠빠는 십악행이 대표적이라 볼 수 있다. 첫 번째 구절은 악업을 짓지 말자는 것이다. 한자어로는 제악막작(諸惡莫作)이다.
꾸살라는 착하고 건전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십선행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꾸살라는 단지 착하고 건전한 행위 그 이상이라는 사실이다. 꾸살라는 착하고 건전한 행위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꾸살라에 대하여 “건전하고 지혜로운 것(wholesome, skillful)”이라 한다. 이는 단지 한문에서 착할 善(선)자에만 집중해서 “착하게 살자”라고 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착한 것에다 지혜가 결합된 것이 꾸살라이다. 이렇게 지혜가 결합되면 ‘파워’가 커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제압한다.
꾸살라가 왜 지혜로운 행위일까? 꾸살라행을 하면 궁극적으로 탐, 진, 치가 제거 된다. 이는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은 세 기지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가 있다. 세 가지란 무엇인가? 탐욕의 여읨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이고, 성냄의 여읨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이고, 어리석음의 여읨이 착하고 건전한 것의 뿌리이다.” (A3.69)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탐진치가 소멸되면 해탈과 열반의 길로 가게 되어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뿌리를 뽑아 버렸을 때 “악하고 불건전 한 것들은 버려지고, 뿌리째 뽑히고, 종려나무 그루터기처럼 되고, 존재하지 않게 되고, 미래에 다시는 생겨나지 않게 되어, 현세에서 고통을 여의고 절망을 여의고 고뇌를 여의어 행복하게 살고, 현세에서 완전한 열반을 성취한다.” (A3.69) 라고 말씀 하신 것에서도 알 수 있다.
탐진치를 소멸하여 꾸살라행을 하는 자에 대하여 해탈한 사람,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 한다. 꾸살라행은 단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수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자로는 ‘중선봉행(衆善奉行)’이라 하여 ‘선을 받들어 행한다’라는 식으로 번역되어 있다.
왜 아비담마논장인가?
세 번째 구절을 보면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라고 했다. 한자어로는 자정기의(自淨其意)라 한다. 이는 Sacittapariyodapanaṃ를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sacitta’는 ‘one's own mind’의 뜻으로 ‘자신의 마음’이 된다. 또 ‘pariyodapanā’는 ‘purification’의 뜻으로 ‘정화’이다. 그래서 ‘Sacittapariyodapanaṃ’는 ‘자신의 마음을 정화한다’라는 뜻이 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 즉 다섯 가지 장애를 극복하는 것”(DhpA.III.237) 라 했다. 자정기의는 오장애의 극복을 말한다.
법구경 183번 게송에 대하여 특별히 칠불통계게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과거 출현하였던 모든 부처님들의 공통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짤막한 네 구절의 시에 불교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고 한다. 첫 번째 구절 “모든 죄악을 짓지 않고(諸惡莫作)”은 율장을 뜻하고, 두 번째 구절 “모든 착하고 건전한 것들을 성취하고(衆善奉行)”은 경장을 뜻하고, 세 번째 구절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自淨其意)”은 논장을 뜻한다고 했다.
칠불통계게는 빠알리 삼장의 가르침을 압축해 놓은 것이라 했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 구절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自淨其意)”이 논장을 뜻한다고 했다. 이는 빠알리어 ‘pariyodapanā’가 ‘purification’의 뜻으로 ‘청정’의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테라와다 불교에서 주석서이자 수행지침서라 볼 수 있는 청정도론은 바로 ‘청정’을 주제로 한 것이다. 그래서 칠청정에 대하여 단계적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초기불교에서 논장은 경장이나 율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다. 빠알리 삼장이라 하여 거의 거의 동등하게 다루고 있다. 일반적으로 논장을 대표하는 것은 아비담마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해 놓은 것이다. 마치 교과서에 대하여 보충설명하는 참고서와 같고 목적지를 찾아 가는 지도나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마음의 지도를 보면
참고서나 지도와 같은 것이 아비담마 논장이다. 가르침을 체계화 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방편이 있을 수 없다. 또 근기에 따라 설명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있는 그대로 해설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난해하기 그지 없다.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체계화 하였다. 일종의 마음지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또 일종의 마음의 얼굴이라 볼 수 있다. 마음에 대하여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마음의 거울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마음지도, 마음얼굴, 마음거울은 어떤 것일까?
아비담마에서는 마음을 수십가지로 분류 하였다. 그런 마음은 마음을 구성하는 마음의 요소(cetasika)에 의해 결정된다. 모두 52가지가 있는데, 선한 것으로는 믿음, 사띠 등 25가지가 있고, 불선한 것으로 탐욕, 성냄 등 14가지가 있다. 이들 마음의 요소에 의한 마음을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갖가지 모양의 마음이 있는 것과 같다. 마음과 마음의 요소는 다음과 같다.
<도표 1> 89/121가지 마음(citta)
세간적인 마음(lokiya-cittāni) 81 | |
욕계 마음(kāmācara-cittāni) 54 | |
불선한 마음(akusala-cittāni) 12 |
(1) ~ (8) 탐욕에 뿌리박은 마음(lobha-mūla-citta) 8 |
(9) ~ (10) 성냄에 뿌리박은 마음(dosa-mūla-citta) 2 | |
(11) ~ (12) 어리석음에 뿌리박은 마음(moha-mūla-citta) 2 | |
원인없는 마음(ahetuka-cittāni) 18 |
(13) ~ (19) 선한 과보의 마음(kusala-vipāka-citta) 7 |
(20) ~ (27) 불선한 과보의 마음(akusala-vipāka-citta) 8 | |
(28) ~ (30) 원인없는 작용만 하는 마음(ahetu-kiriyā-citta) 3 | |
욕계의 아름다운 마음(kāmācara-sobhana-cittāni) 24 |
(31) ~ (38) 욕계 선한 마음(kāmācara-kusala-citta) 8 |
(39) ~ (46) 욕계 과보의 마음(kāmācara-vipāka-citta) 8 | |
(47) ~ (54) 욕계 작용만 하는 마음(kāmācara-kiriya-citta) 8 | |
색계 마음(rūpacara-cittāni) 15 | |
(55) ~ (59) 색계 선한 마음(rūpāvacara-kusala-citta) 5 | |
(60) ~ (64) 색계 과보의 마음(rūpāvacara-vipāka-citta) 5 | |
(65) ~ (69) 색계 작용만 하는 마음(rūpāvacara-kiriyā-citta) 5 | |
무색계 마음(arūpācara-cittāni) 12 | |
(70) ~ (73) 무색계 선한 마음(arūpācara-kusala-citta) 4 | |
(74) ~ (77) 무색계 과보의 마음(arūpācara-vipāka-citta) 4 | |
(78) ~ (81) 무색계 작용만 하는 마음(arūpācara-kiriyā-citta) 4 | |
출세간 마음(lokuttara-cittāni) 8/40 | |
출세간 선한 마음(lokuttara-kusala-cittāni) 4/20 |
(82) ~ (86) 수다원도의 마음(sotāpatti-magga-citta) 1/5 |
(87) ~ (91) 사다함도의 마음(sakadāgāmi-magga-citta) 1/5 | |
(92) ~ (96) 아나함도의 마음(anāgāmi-magga-citta) 1/5 | |
(97) ~ (101) 아라한도의 마음(arahatta-magga-citta) 1/5 | |
출세간 과보의 마음(lokuttara-vipāka-cittāni) 4/20 |
(102) ~ (106) 수다원과의 마음(sotāpatti-phala-citta) 1/5 |
(107) ~ (111) 사다함과의 마음(sakadāgāmi-phala-citta) 1/5 | |
(112) ~ (116) 아나함과의 마음(anāgāmi-phala-citta) 1/5 | |
(117) ~ (121) 아라한과의 마음(arahatta-phala-citta) 1/5 |
<도표 2> 52가지 마음의 작용(cetasika)
다른 것과 같아지는 마음의 작용(aññasamāna-cetasika) - 13 |
아름다움 마음의 작용(sobhana-cetasika) - 25 | |
모든 마음에 공통되는 마음의 작용(sabba-citta-sādhāraṇa-cetasika) - 7 |
아름다운 공통되는 마음의 작용(sobhana-sādhāraṇā-cetasika) - 1 | |
(1) 감각접촉(觸, phassa) |
(28) 믿음(信, saddhā) | |
(2) 느낌(受, vedanā) |
(29) 알아차림(念, sati) | |
(3) 인식(想, saññā) |
(30) 잘못을 부끄러워함(懺, hiri) | |
(4) 의도(思, cetanā) |
(31) 도덕적 두려움(愧, ottappa) | |
(5) 집중(心一境, ekaggatā) |
(32) 탐욕없음(不貪, alobha) | |
(6) 생명기능(命根, jīvitindriya) |
(33) 성냄없음(不嗔, adosa) | |
(7) 주의 기울임(作意, manasikāra) |
(34) 중립(tatramajjhattatā) | |
때때로의 마음의 작용(pakiṇṇka-cetasika) - 6 |
(35) 몸의 경안(kāya-passaddhi) | |
(8) 일으킨 생각(尋, vitakka) |
(36) 마음의 경안(citta-passaddhi) | |
(9) 지속적인 고찰(伺, vicāra) |
(37) 몸의 가벼움(kāya-lahutā) | |
(10) 결심(信解, adhimokkha) |
(38) 마음의 가벼움(citta-lahutā) | |
(11) 정진(精進, viriya) |
(39) 몸의 부드러움(kāya-mudutā) | |
(12) 희열(喜悅, pīti) |
(39) 몸의 부드러움(kāya-mudutā) | |
(13) 열의(欲, chanda) |
(40) 마음의 부드러움(citta-mudutā) | |
불선한 마음의 작용들(akusala-cetasika) - 14 |
(41) 몸의 적합함(kāya-kammaññatā) | |
모든 불선에 공통되는 마음의 작용 (sabba-akusala-sadhārana-cetasika) - 4 |
(42) 마음의 적합함(citta-kammaññatā) | |
(14) 어리석음(痴, moha) |
(43) 몸의 능숙함(kāya-pāguññatā) | |
(15) 잘못을 부끄러워하지 않음(無慙, ahirika) |
(44) 마음의 능숙함(citta-pāguññatā) | |
(16) 도덕적 두려움 없음(無愧, anottappa) |
(45) 몸의 올곧음(kāya-ujukatā) | |
(17) 들뜸(掉擧, uddhacca) |
(46) 마음의 올곧음(citta-ujukatā) | |
불선한 때때로의 마음의 작용(sabba-akusala-pakiṇṇka-cetasika) - 10 |
절제(virati) - 3 | |
탐욕에 관계된 세가지 |
(18) 탐욕(貪, lobha) |
(47) 바른 말(正語, samā-vācā) |
(19) 사견(邪見, diṭṭhi) |
(48) 바른 행위(正業, samā-kammanta) | |
(20) 자만(慢, māna) |
(49) 바른 생계(正命, samā-ājīva) | |
성냄과 관계된 네가지 |
(21) 성냄(嗔, dosa) |
무량(無量, appamaññā) - 2 |
(22) 질투(嫉, issā) |
(50) 연민(悲, karuṇā) | |
(23) 인색(吝, macchariya) |
(51) 더불어 기뻐함(喜, muditā) | |
(24) 후회(惡作, kukucca) |
어리석지 않음(不痴, amoha) - 1 | |
해태와 관계된 네가지 |
(25) 해태(懈怠, thīna) |
(52) 통찰지의 기능(慧根, paññindriya) |
(26) 혼침(昏沈, middha) |
||
(27) 의심(疑, vicikicchā) |
이것이 마음의 지도이다. 또 마음의 거울이라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마음을 체계화 시켜 놓은 것이다. 마음의 요소 52가지에 따라 89가지 마음(세간적)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받으려면
칠불통계게에서 제악막작은 율장, 중선봉행은 경장, 자정기의는 논장을 뜻한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율장이나 경장, 논장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단지 착하게 살면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살아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만일 착하게만 산다면 이 언덕에 머무는 것이 된다. 지혜롭게 살아야 저 언덕으로 건너 갈 수 있다. 저 언덕으로 건너 가려면 가르침을 알아야 한다. 가르침을 알아야 청정해질 수 있다. 청정한 삶을 살게 되면 저 언덕으로 건너 갈 수 있다.
이 언덕에 머물지 않고 저 언덕으로 건너가려면 인간의 몸을 받아야 한다. 설령 인간의 몸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가르침을 접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이렇게 표현 되어 있다.
인간의 몸을 얻는 것도 어렵고
죽어야 하는 자가 사는 것도 어렵고
올바른 가르침을 듣는 것도 어렵고
깨달은 님이 출현하는 것도 어렵다.”(Dhp 182)
도덕적으로 착하고 건전한 업을 쌓아야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다. 여기서 착하고 건전한 업은 십선행이라 볼 수 있다. 아비담마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아름다움 마음의 작용(sobhana-cetasika)’ 25가지가 될 것이다.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들다고 했다.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해야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불선한 행위를 하면 인간몸 받기가 힘들 것이다. 불선이란 어떤 것일까? 일반적으로 십악행을 하면 불선업이다. 그런데 불선한 마음을 갖게 하는 마음의 요소가 탐욕, 성냄 등을 비롯하여 14가지 된다는 사실이다. 그 14가지에는 자만, 질투, 인색, 후회, 해태, 혼침도 있다.
단지 착하게만 산다고 하여 인간의 몸을 받는 것이 아니다. 불선한 행위를 하지 않아야 인간의 몸을 받을 수 있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듯이 마음 내키는 대로 산다든가 욕망이 땡기는 대로 산다면 인간의 몸을 받을 수 있을까? 지금 화가 난다고 하여 화풀이하였을 때 인간의 몸을 받을 수 있을까? 게으르고 무기력하고 권태롭고 하품이나 하며 해태와 혼침으로 살았을 때 인간의 몸을 받을 수 있을까?
일생을 살다 보면 선한업이 더 많을까 불선한 업이 더 많을까? 대다수는 불선업이 더 많다고 한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착하게 산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업과 불선업의 대차대조표를 보면 불선업이 약간 더 많다고 한다. 그것은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몸 받는 것 보다 깨닫는 것이 더 쉽다
비록 착하게 폐끼치지 않게 산다고 하지만 때로 욕심부리고, 때로 성내고, 때로 자만하고, 때로 질투하고, 때로 인색하고, 때로 후호하고, 때로 게으른 삶을 살았을 때 불선업이 우세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인간의 몸 받기 힘들 것이다.
맛지마니까야에 따르면 “맛을 탐하고 악한 행동을 한 어리석은 자는 몸이 파괴되어 죽은 뒤에 축생으로서 어둠속에서 태어나”(M129) 라 했다. 비록 착하게 남에게 폐끼치 않고는 살지만 욕망에 이끌려 땡기는 대로 산다면 축생으로 태어나기 쉬울 것이다. 착하기는 하지만 탐욕, 성냄, 자만, 질투, 인색, 후회, 해태, 혼침으로 산다면 악행을 하는 것이다. 축생으로 태어날 운명인 것이다.
부처님은 한번 축생으로 떨어지면 인간의 몸 받기가 힘들다고 했다. 이에 대하여 “눈 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 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수행승들이여, 한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M129) 라 했다. 이른바 맹구우목의 비유이다. 축생에서 인간의 지위를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말해 준다. 이 말은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 축생에서 인간이 되기 보다 훨씬 쉽다는 것을 말한다.
인간의 길어야 백년을 산다. 그런데 부처님은 눈 먼 거북이가 백년 마다 한 번씩 떠 올라서 그 구멍이 하나가 뚫린 멍에에 목을 끼워 넣는 것이 한번 타락한 곳에 떨어진 어리석은 자가 인간의 지위를 획득하는 것보다 빠르다라 했다. 축생으로 있다가 인간이 되는 것 보다 인간의 몸을 받았을 때 깨달음을 이루기 더 쉬움을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여기서 머물러야 할까? 벗어나야 할까?
2016-03-27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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