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에 대하여 아홉 가지 기억하기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 하루는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하루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그리스 철학자 소포클레스가 한 말이라 한다. 이와 비슷한 말이 있다. 그것은 “네가 헛되이 보내고 있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렇게도 살고 싶었던 내일이다.”라는 말이다. 이는 칸트가 한 말이라 한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날이 그날 같지만 밤낮으로 세월은 흘러 간다. 과연 나에게 주어진 오늘을 보람 있게 보내고 있을까?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바라던 오늘인데 헛되이 보내는 것은 아닐까?
톨스토이는 “오늘 밤까지 살라, 영원히 살라”고 하였다. 하루를 일생처럼 살자는 것이다. 오늘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올지 내생이 시작 될지 알 수 없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람의 앞날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이전에 보았던 사람도 죽었다. 수 백년 전 사람들이 아직 까지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하였다. 길어야 백년 안팍을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백년이 보장 되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업(業)대로 살기 때문이다.
천상에서 수명은 보장 되어 있다. 수명만 보장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복도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천상은 ‘수(壽)’와 ‘복(福)’을 갖춘 곳이다. 지상에서 이상적인 삶은 수복일 것이다. 그래서 옛날 회갑잔치 할 때 수복이라는 문구가 이를 말해 준다.
수복을 갖춘 자는 천상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인간계는 수와 복이 보장되지 않는다. 수복은 희망사항이다. 그래서 회갑이나 칠순잔치 상에 수복이라는 말을 써 넣었을 것이다.
업대로 사는 인생은 변화무쌍하다. 지금 행복하다고 하여 언제까지 행복할지 알 수 없다.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기대수명대로 산다는 보장이 없다. 한마디로 언제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죽음에 대한 명상, 마라나사띠(maraṇasati)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라면 내일 죽을 수도 있다. 이는 각종 사고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 시퍼렇게 살아 있다고 해서 내일도 그렇게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이렇게 본다면 두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나는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이고, 또 하나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반드시 죽음을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죽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법상 모순이다. 죽음은 삶 이후의 일인데 이를 기억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럼에도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왜 그럴까? 그것은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을 말한다. 딱 오늘밤까지만 산다고 생각해야 한다. 왜 오늘밤까지만 인가? 그것은 영원히 살기 위해서이다. 오늘 하루를 하루살이 처럼 살았을 때 헛되이 보낼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을 충실히 살면 영원히 사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자신의 글에서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말은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톨스토이가 불교경전을 접하여 그런 말을 하였는지 알 수 없지만 초기경전에 이미 나와 있는 말이다. 이는 다름아닌 죽음에 대한 명상이다. 그래서 부처님은“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아라. (bhikkhave maraṇasatinti)” (A6:19)라 하였다.
앙굿따라니까야에‘죽음에 대한 새김의 경(maraṇasati sutta, A6.19)’이 있다. 경에서 중요한 술어는 ‘마라나사띠(maraṇasati)’이다. 이는 죽음을 뜻하는 마라나(maraṇa)와 기억을 뜻하는 사띠(sati)의 결합어이다. 그래서 마라나사띠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 된다. 전재성님은 ‘죽음에 대한 새김’이라 하였고, 초불연 대림스님은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마라나사띠(maraṇasati)에 대하여 빠알리사전을 보면 ‘Recollection of death, meditation on death’라 되어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한 기억 또는 죽음에 대한 명상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가 기억(memory)의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기억은 어떤 것일까?
마라나사띠(maraṇasati)는 부처님의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본다면 전재성님의 번역어 ‘새김’은 사띠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초불연 번역어 ‘마음챙김’은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라 하였을 때 이는 정확한 번역이 아니다. 왜 그런가? 죽음은 마음챙김해야할 대상이 아니라 기억해야 할 대상이다.
죽음이라는 것은 기억의 대상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대들은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아라.”라 하였다. 어떤 죽음에 대한 기억, 어떤 죽음에 대한 가르침일까? 이에 대하여 어떤 수행승은 “세존이시여, 여기 저는 이와 같이 ‘내가 하루 밤낮 동안만을 살더라도 세존의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면, 나는 많은 것을 이룬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와 같이 저는 죽음에 대한 새김을 닦습니다.”(A6:19) 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죽음에 대한 기억을 말씀 하셨다. 어떤 기억인가? 이는 ‘가르침에 정신활동을 기울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바로 이 말이 죽음에 대한 기억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고 되새기는 것을 말한다. 사띠가 기억(memory)의 의미 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마음챙김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기억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죽음에 대하여 아홉 가지 기억하기
늘 죽음을 생각하면 어떻게 될까? 염세주의자가 될까? 세상을 빨리 떠나고 싶어 할까? 정반대이다. 죽음의 명상 즉, 죽음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면 할수록 삶은 풍요로워진다.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바라던 오늘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사띠할 때 모두 죽는다는 것과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분명한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에 하나 더추가하면 죽을 때 공덕 이외에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반드시 죽는다.
2) 언제 죽는지 결정되지 않았다.
3) 죽을 때 담마 이외에는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세 가지는 결정적 사실이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적용된다.인터넷카페에서 원담스님 글에 따르면 죽음의 기억에 대하여 아홉 가지로 소개하였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죽음이 오는 것은 결정되어 있고
어떤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
2) 수명이 더해지는 것은 없고,
계속 줄어들기 때문에 반드시 죽는다.
3) 살아있을 때
수행할 틈이 없이 죽는다.
4) 일반적으로 남섬부주(지구)에서 수명은 정해진 것이 없다.
죽음이란 불청객은 언제든 올 수 있다.
5) 죽음의 원인은 많고 삶의 원인은 적기에,
언제 죽을지 정해진 것이 없다.
6) 물거품처럼 무너지기 쉽기에,
언제 죽을지 정해진 것이 없다.
7)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하고,
나는 반드시 수행하겠다고 결심한다.
8) 언제 죽는지 결정되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나는 지금 바로 수행해야겠다고 결심한다.
9) 죽을 때 담마 이외에는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나는 반드시 수행하겠다고 결심한다.
결국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수행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산다. 탐욕으로 성냄으로 어리석음으로 사는 것이다. 백년도 못사는 인간들이 마치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하루를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업에 의해 던져졌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악하고 불건전하게 산다. 이는 탐진치로 사는 것이 중생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죽음을 맞았다면 어떻게 될까? 이띠붓다까에 이런 내용이 있다.
Idāhaṃ bhikkhave ekaccaṃ puggalaṃ paduṭṭhacittaṃ evaṃ cetasā ceto paricca pajānāmi: “imamhi cāyaṃ samaye puggalo kālaṃ kareyya, yathā bhataṃ nikkhitto, evaṃ niraye.
[세존]
“수행승들이여,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이 사악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나의 마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읽어 ‘이 세계에서 그 사람이 죽을 때, 그는 그것이 작용하는 대로 지옥에 떨어진다.’라고 분명히 안다.”(It.12, 전재성님역)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왜 그런가? 지금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가 있다. 원한에 맺혀 상대방을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할 때, 그 순간에 죽음을 맞았다면 어떻게 될까? 가르침에 따르면 ‘지옥행’이라 하였다. 왜 그런가? 이는 경에서 “그것이 작용하는 대로(yathā bhataṃ nikkhitto)”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빠알리어 bhataṃ는 ‘born’의 뜻이고, nikkhitto는 ‘thrown down’의 뜻이다. 따라서 bhataṃ nikkhitto의 뜻은 ‘던져져서 태어난다’라는 뜻이 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업의 작용에 따라 ‘즉시’ 악처에서 태어남을 말한다. 이에 대하여 주석에서는 “조건이 화합하여 그 사람이 순간적인 포착의 인식과정을 통해서 다른 곳으로 죽을 때, 옮겨진 대로, 가져와서 놓인 대로, 자신의 업에 의해 던져져서 지옥에 놓이게 된다.”(ItA.I.72)라 하였다.
지금 악행을 저지른자가 있다. 이전에도 악행을 했고 지금도 악행을 하고 있다. 사람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므로 지금 악행으로 사는 자가 급사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전에 지은 악업의 힘에 의하여 지은 업에 적합한 곳에 던져질 것이다. 그래서 “업에 의해 던져져서 지옥에 놓이게 된다”라고 하였다.
“그대에게는 노잣돈 조차도 없구나”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어느 날 급사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될까? 지은 공덕이 하나도 없다면 업력에 의해 지옥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이는 “이러한 때에 사람이 죽음에 이르면, 그는 지옥에 태어날 것이니 마음이 사악하기 때문이다. (Imamhi cāyaṃ samaye kālaṃ kayirātha puggalo, Nirayaṃ upapajjeyya cittañ-hissa padūsitaṃ)”(It.12) 라는 게송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이러한 때(Imamhi cāyaṃ samaye)’는 대책 없이 죽었을 때를 말한다. 탐진치로만 살고 지어 놓은 공덕이 없이 죽음을 맞이 하였을 때 대책이 없는 것이다. 그럴 경우 법구경에서 여비조차 없다고 하였다. 게송을 옮겨 보면 다음과 다.
Paṇḍupalāso va dānisi,
Yamapurisā pi ca taṃ upaṭṭhitā,
Uyyogamukhe ca tiṭṭhasi,
Pātheyyam-pi ca te na vijjati.
“이제 그대야말로 낙엽과도 같다.
염라왕의 사자들이 그대 가까이에 있고
그대는 떠남의 문턱에 서 있으나,
그대에게는 노잣돈 조차도 없구나.”(Dhp235, 전재성님역)
평생 악하고 불건전하게 살아 온 자가 있다. 또 평생 인색하게 살아 온 자가 있다. 그들은 늙도록 어떤 공덕도 짓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육체 한몸 즐기는데 평생을 바쳤다. 그러다 마침내 죽음의 침상에 누웠을 때 어떤 생각이 들까?
게송에서 “낙엽과도 같다”고 하였다. 이는 죽음을 의미한다. 가을이 되어 간신히 붙어 있는 잎파리는 떨어지게 되어 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떨어지고 만다. 그래서 나이가 늙었을 때 “낙엽과도 같다.”라고 하였다.
평소 아무런 공덕을 짓지 않았을 때 노잣돈이 없는 것과 같다. 죽는 순간까지도 탐진치로 살았다면 그가 갈 곳은 뻔하다. 지옥이다. 그래서 염라왕이 가까이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그 나이에 공덕을 지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다. 아무런 대책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죽음의 여행을 위한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뭐? 나이 들어 한가할 때 수행하겠다고?
사람들은 백년도 못살면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허송세월한다. 그러다 보니 즐기는 삶을 살게 된다. 어떤 노인은 인생은 즐기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여생을 즐기며 살겠다고 하였다. 조금이라도 힘이 있을 때 마음껏 즐기자는 것이다.
어떤 이는 수행은 나이 들어 해도 늦지 않다고 한다. 젊었을 때는 즐기는 삶을 살고 나이 들어 수행을 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젊은 나이에 출가한 수행자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 본다. 과연 그럴까?
죽음은 언제 찾아 올지 모른다. 그래서 현명한 자들은 평소에 공덕을 쌓아 놓는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은 즐기면서 허송세월한다. 그러다 지금 죽음을 맞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공덕을 쌓고 수행을 하는 것은 먼 후일의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해야 한다.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데 죽음이 결정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이나 아이나 언제 죽을지 모른다. 오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가는 것은 순서가 없다.
오늘 죽음을 맞이 한다면 어떻게 될까? 다행히 수행을 해 놓은 사람이라면 죽음은 축복이다. 그러나 아무 공덕도 쌓아 놓지 않았다면 악처에 던져지기 쉽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나이가 들어 한가할 때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당장 시작 해야 한다.
2015-10-28
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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