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빠사나
** 목차 **
1. 위빠사나의 의의
2. 위빠사나의 원어적 의미
3. 위빠사나의 주요 개념들
4. 지혜(paññā)의 개발 과정
5. 위빠사나의 실제
6. 마치는 말
1. 위빠사나의 의의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에게 과연 어떠한 의의를 지닐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이 행법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직접 의거한다는 점을 내세운다.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부처님의 유훈으로 전승되어 왔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남방불교의 수행 전통에 따르면, ‘위빠사나(觀)’란 곧 ‘사념처의 수행’을 가리킨다.
예컨대 부처님께서 마지막으로 행하신 가르침으로, ‘自燈明法燈明 自歸依法歸依’ 즉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 의지하라’ 이 구절에 대해 求那拔陀羅는 “비구들이여, 자기의 섬에 머물고 자기에 의지하여 머물러라. 법의 섬에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러라. 다른 것에 머물지 말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말라(諸比丘. 住於自洲. 住於自依. 住於法洲. 住於法依. 不異住. 不異依)”로 옮긴다.
해당 빨리어와 산스크리트어 異本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求那拔陀羅의 번역에 정합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필자는 본 고의 성격상 우리에게 친숙한 번역의 사례를 채용하여 ‘自燈明法燈明 自歸依法歸依.... ’로 옮긴다.
는 말씀이 있다. 불자(佛子)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구절인데, 바로 이것이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관련 경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난아,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느낌(受)에 대해... 마음(意)에 대해...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와 사띠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아난아, 이것을 일컬어, 비구가 자신을 등불로 삼아(自燈明)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自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한 법을 등불로 삼아(法燈明)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法歸依)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아난아, 내가 [입멸한] 후에, 자신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자신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이에게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또한 법을 등불로 삼아 머물고 법에 의지하여 머물고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그는 곧 나의 제자들 중에서 최고의 비구가 될 것이다.” 인용문에 나타나는 내용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3개월 전에 행하신 법문이다.
‘만약 부처님께서 입멸하신다면, 제자들은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합니까’라고 아난이 질문을 하자, 이와 같이 답변하신 것이다. 바로 이 법문을 통해 ‘자등명 법등명’의 실제 내용이 사념처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부처님의 유훈으로 전승된 사념처의 수행은 모든 불자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인증된 가르침으로서의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우리의 주변 일각에는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소승의 행법으로 폄하하는 경향들이 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마지막 유훈으로 남긴 가르침이 사념처라는 사실을 확인한 이상 이를 소승의 관법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불교라는 종교 안에서 부처님을 능가하는 또 다른 권위를 내세울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법문 또한 동일한 맥락에서 사념처관의 의의를 설하는 대목이다. 이 행법이 어떠한 의미와 의의를 지니는가에 대해 부처님께서 직접 밝히신 것이라는 점에서 새겨둘 필요가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 한 갈래의 길(一乘道)이 있다. 이것은 중생을 정화하는 길이며, 슬픔과 근심을 초월하는 길이며, 고통과 고뇌를 소멸하는 길이며, 지혜를 증득하는 길이며, 열반을 실현하는 길이다. 이것은 곧 사념처의 수행이다... ”
2. 위빠사나의 원어적 의미
‘위빠사나(vipassanā)’라는 용어는 빨리(pāli)어로서 두 말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여기에서 ‘위(vi)’는 ‘분리하다’ ‘쪼개다’ ‘관통하다’ 등을 의미하고, ‘빠싸나(passanā)’는 ‘관찰’ ‘식별’ ‘봄’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위빠사나의 온전한 의미를 번역하자면 ‘꿰뚫어 봄(洞察)’이 적당할 것이다. 한역에서는 이를 ‘관(觀)’ 혹은 ‘관법(觀法)’으로 번역하여 사용해 왔다.
‘위빠사나’는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의 4가지를 테마로 하는데, 이를 곧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ā)’라고 한다. 이러한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구체적인 수행의 과정에서 ‘아누빠싸나(隨觀, anupassanā)’라는 말로 대체된다. ‘아누빠싸나’란 어떠한 현상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본다’는 의미이다. 예컨대 몸(kāya)에 대해 위빠사나를 행하는 것을 일컬어 ‘까야누빠싸나(身隨觀, kāyanupassanā)’라 하고, 느낌(vedana)에 대해 위빠사나를 행하는 것을 ‘웨다나누빠싸나(受隨觀, vedananupassanā)’라 한다.
이와 같이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에 대해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anupassanā)’을 이름하여 ‘사념처의 위빠사나’라고 부른다. 이들 4가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따라가며 보면서, 세간에 얽힌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머무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의 요체이다. 관련 경구를 다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는 몸(身)에 대해 몸을 따라가며 보면서(隨觀)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知)와 사띠(念)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느낌(受)에 대해서는 느낌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와 사띠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마음(心)에 대해서는 마음을 따라가며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와 사띠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법(法)에 대해 법을 따라가며 보면서 머문다. 열렬함과 삼빠자나와 사띠를 지녀, 세간에 관련한 탐욕과 근심을 벗어나 [머문다]”
인용문은 사념처의 위빠사나에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경전상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정형구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용어로는 일단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 anupassanā)’ 즉 ‘아누빠싸나’라는 술어를 꼽을 수 있다. 더불어 ‘삼빠자나(知, 正知, sampajañña)’라든가 ‘사띠(念, sati)’ 따위의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들 역시 중요한 개념들이다.
‘아누빠싸나(隨觀, anupassanā)’, ‘삼빠자나(知, 正知, sampajañña)’, ‘사띠(念, sati)’ 등에 대한 번역 문제는 국내 학계에서 이미 충분히 논의되었다. 특히 맨 후자의 ‘사띠’는 ‘마음지킴’, ‘마음챙김’, ‘수동적 주의집중’ 등으로 번역된 사례가 있는데, 이에 관해서는 조준호, 「초기불교에 있어 止․觀의 문제」, 韓國禪學,
제1호, 한국선학회, 2000, pp.321-356; 조준호, 「위빠사나(vipassanā)의 인식론적 근거」, 보조사상 제16집, 2001 pp.41-88; 임승택, 「사띠(sati)의 의미와 쓰임에 관한 고찰」, 보조사상 제16집, 2001 pp.9-39; 임승택, 「마음지킴의 위상과 용례에 대한 재검토」, 보조사상 제19집, 2002. pp.319-351 등 참조.
이러한 ‘삼빠자나’와 ‘사띠’는 ‘아누빠싸나’를 이루는 일종의 ‘마음작용(cetasika)’인데, 그러한 ‘삼빠자나’와 ‘사띠’로써 몸과 느낌 따위를 ‘아누빠싸나’ 하는 것이 곧 사념처라는 의미이다. 이들 용어는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 원리를 드러내는 까닭에 별도의 설명이 필요하다.
3. 위빠사나의 주요 개념들
1) 아누빠싸나
‘아누빠싸나(anupassanā)’란 위의 인용문에서 ‘따라가며 보는 것(隨觀)’으로 번역한 말이다. 원어로서 제시되는 ‘anupassanā’에서, 접두어 ‘anu’는 ‘-을 따라(along, after, behind)’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것은 대상에 대해 주관적 의지를 개입시키지 않고서 그것을 수동적인 입장에서 관찰․주시한다는 의미 맥락이다. 이러한 ‘아누빠싸나’는 ‘몸’이나 ‘느낌’ 등에 대한 사념처 수행의 구체적 양태를 지칭한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몸을 따라가며 보는 것’을 일컬어 ‘까야누빠싸나’라 하고, ‘느낌을 따라가며 보는 것’을 ‘웨다나누빠싸나’라 한다. 따라서 사념처의 수행을 일컬어 ‘아누빠싸나’의 수행이라 부르는 것 또한 가능하다. 바로 이것이 사념처 수행에서 ‘아누빠싸나’가 지니는 일차적인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아누빠싸나’는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되기도 한다. 예컨대 초기불교의 수행론을 집성한 문헌으로서 빠띠삼비다막가에는 ‘무상에 대한 아누빠싸나(無常隨觀)’․‘소멸에 대한 아누빠싸나(滅隨觀)'․‘달라짐에 대한 아누빠싸나(變易隨觀)’ 등의 용례가 나타난다.
앞에서 언급한 ‘까야누빠싸나’ 등이 관찰되는 대상에 근거하여 ‘아누빠싸나’를 사용한 것이라면, ‘무상에 대한 아누빠싸나(無常隨觀)’ 따위는 그러한 관찰을 통해 ‘체득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춘 ‘아누빠싸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2가지 용례는 동일한 ‘아누빠싸나’에 대해 각기 다른 측면을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관찰의 대상’과 ‘체득되는 내용’이라는 2가지 측면에서 ‘아누빠싸나’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양자는 실제 수행에서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관찰의 대상’과 ‘체득되는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상에 대한 아누빠싸나(無常隨觀)’ 따위는 ‘몸이나 느낌에 대한 아누빠싸나’를 행해 나갈 때 체득되는 내용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나아가 빠띠삼비다막가에서는 이러한 ‘아누빠싸나’를 일괄하여 ‘위빠사나(vipassanā)’의 하위 개념으로 재분류한다. 관련 문구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무상에 대한 아누빠싸나(無常隨觀)는 위빠사나의 힘[에 의한 것]이다.
고통에 대한 아누빠싸나(苦隨觀)는 위빠사나의 힘[에 의한 것]이다. 무아에 대한 아누빠싸나(無我隨觀)는 위빠사나의 힘[에 의한 것]이다. …내지… ‘버림에 대한 아누빠싸나(捨離隨觀)에 의해 취착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사나의 힘[에 의한 것]이다.
‘무명에 대해 그리고 무명을 수반하는 여러 번뇌와 구성요소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위빠사나의 힘[에 의한 것]이다”
본 인용문은 앞에서 언급했던 ‘체득되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서 ‘아누빠싸나’를 분류한 것이다. 여기에 따르면 ‘아누빠싸나’는 ‘위빠사나’를 이루는 세부 요인이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무명을 수반하는 여러 번뇌와 구성요소에 대해 동요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는 위빠사나 수행의 양태로 풀이됨을 확인할 수 있다.
초기불교의 경전상에서 ‘위빠사나’라는 용어는 사념처 자체와 관련된 직접적인 용례를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의 내용을 통해 ‘사념처’가 곧 ‘아누빠싸나’에 상응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불어 ‘아누빠사나’는 ‘위빠사나’를 이루는 하위의 개념으로 설명됨을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사념처를 근거로 하는 남방불교의 수행법을 통칭하여 ‘위빠사나의 수행’라고 부르는 데에는 이상과 같은 의미 맥락이 전제되어 있다.
이상에서 언급한 주요 용어들의 관계를 나열․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념처(四念處) ⇔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아누빠싸나(四隨觀) ⇔ 몸․느낌․마음․법에 대한 사띠(念)와 삼빠자나(知) ⇔ 아누빠싸나의 여러 양태(十八隨觀) ⇔ 위빠사나(觀)
2) 삼빠자나(知, sampajañña)
지금부터는‘아누빠싸나(隨觀)’의세부요소로묘사되는‘삼빠자나(知, sampajañña)’와 ‘사띠(念, sati)’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삼빠자나’란 편견이나 왜곡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如如, yathātaṁ)’를 분명하게 알아차린다는 의미이다. 즉 몸으로 일어나는 현상, 느낌으로 일어나는 현상 등을 그때그때 명확히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대상은 비단 위에서 언급한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에 국한되지 않으며,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현상들이 포함된다. 경전에서는 이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비구들이여, 비구의 삼빠자나(知)란 무엇인가. 이 가르침 안에서,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나 물러날 때 삼빠자나로 행한다. 볼 때나 관찰할 때 삼빠자나로 행한다. 구부리거나 펼 때 삼빠자나로 행한다. 겉옷과 발우와 옷을 착용할 때 삼빠자나로 행한다. 먹거나 마시거나 먹고 난 이후에나 맛을 볼 때나 삼빠자나로 행한다. 대소변을 볼 때에도 삼빠자나로 행한다. 가거나 서거나 앉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이야기할 때에나 침묵할 때에도 삼빠자나로 행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곧 비구의 삼빠자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고플 때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싶을 때 자는, 그러저러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낸다. 그리고 경험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매순간 알아차리면서 지낸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평범한 사실에 대해 순일하게 알아차릴 때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밥을 먹는 경우,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알아차리면서 먹는 시간은 실제적으로 극히 짧다. 밥을 먹는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을 습관적인 상념 속에서 보낸다. 그리하여 이러저러한 생각과 번뇌 속에서 밥을 먹는다. 일상 그대로를 여여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항상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든다. 이것은 일정한 시간동안 지속적인 마음집중을 시도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항상적인 알아차림의 상태를 유지하겠노라 작심하지만, 언제 그러했느냐 싶게 다른 생각에 팔려 있는 경우를 경험하곤 한다.
따라서 명확한 ‘알아차림’ 즉 ‘삼빠자나’로써 현재에 머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삼빠자나’를 통해 의도하는 것은 현재의 순간에 충일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습관적인 상념의 굴레에 얽매이지 말자는 것이다. 항상 깨어있는 마음상태로 사물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진실되게 보자는 의미이다.
3) 사띠(念, sati)
‘사띠(念)’이란 그와 같이 과거와 미래를 정처 없이 넘나드는 마음을 현재의 상태로 되돌리는 마음을 말한다. 좌선을 처음 해보는 사람은 자신에게 그렇게도 많은 잡념이 일어날 줄 몰랐다는 사실을 실토하곤 한다. 언제 잡념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고 한참 동안을 방황한 연후에야, 비로소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거기에서 ‘잡념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삼빠자나(知)’ 즉 ‘알아차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삼빠자나’에 의해 ‘마음을 되돌리는 것’을 ‘사띠(念)’라 할 수 있다. 더불어 되돌린 마음으로 일정한 집중의 상태를 유지․지속하는 것을 ‘사띠’라 한다면, 그러한 상태에 대해 분명하고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삼빠자나’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사띠(念)’와 ‘삼빠자나(知)’는 위빠사나 수행을 이끌어 가는 한 쌍의 축으로 기능한다. ‘사띠’란 ‘잊지 않음(不忘)’이라는 원어적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사띠’에 대해 경전에서는 “사띠란 곧 [감각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비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나아가 이러한 용례 이외에도, ‘감관의 억제(indriyasaṁvara)’․‘감관의 통제(indriyasaṃyutta)’․‘감관의 문의 지킴(indriyesu guttadvāro)’ 따위의 표현을 사용하여 이 용어를 해설한다. 이러한 용례들은 ‘깨어있는 의식으로 일정한 집중상태’를 유지시키는 기능을 지닌 ‘사띠’의 쓰임을 잘 나타낸다고 하겠다.
이러한 까닭에 ‘사띠’라는 용어는 협소한 의미의 ‘위빠사나(觀, vipassanā)’에 국한되지않고 ‘사마타(止, samatha)’까지에 연결되는 내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즉 ‘잊지 않음의 기능’을 통해 ‘감관을 통제하고 마음을 집중하는 것’은 곧 고요함을 의미하는 ‘사마타’에 직결된다고 할 수 있고, 이것을 통해 현존하는 대상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위빠사나’ 원래의 의미에 통해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넓은 의미로 볼 때, ‘사띠’와 ‘삼빠자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양자 모두에 대해 통해 있는 포괄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의 경문은 이와 동일한 맥락으로 파악된다.
“비구들이여, 마치 옷에 불이 붙어 있고 머리에 불이 붙어 있어, 옷과 머리(의 불을) 끄려는 것과 같이, 극단적인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사띠(念, sati)와 삼빠자나(知, sampajañña)를 행해야 한다. 바로 그와 같이 비구들이여, 비구는 그러한 선한 법을 얻기 위해, 극단적인 바램과 노력과 정진과 맹렬함과 물러남이 없는 사띠와 삼빠자나를 행해야 한다. 바로 그러한 연후에, 그는 ‘안으로 마음의 가라앉음(內心寂止=사마타)’과 ‘탁월한 혜로써 보는 법(增上慧法觀=위빠사나)’을 얻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사띠’와 ‘삼빠자나’를 원리로 삼는 사념처의 수행은 ‘지혜의 개발(觀)’과 더불어 ‘마음의 평온(止)’까지를 이루게 하는 행법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균형잡힌 실천은 이후 발달된 부파와 대승의 모든 가르침에서도 한결같이 강조되었다. 지관균행(止觀均行)이라든가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같은 언급들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 행법은 비단 초기불교의 가르침에 한정되지 않으며, 시대를 관통하여 발전을 거듭해 온 불교 수행의 전형적인 특징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지혜(paññā)의 개발 과정
이상에서 기술한 내용을 정리하자면, ‘위빠사나’란 ‘사띠(念)’와 ‘삼빠자나(知)’에 의해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에 대해 ‘아누빠싸나’를 행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이러한 위빠사나를 실천해 나갈 때, 수행자는 비단 ‘몸’이나 ‘느낌’ 따위의 직접적인 관찰대상 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여러 현상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지각하는 상태를 체험한다.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지혜(paññā)’의 개발을 본분으로 하는 위빠사나의 원리를 규명하는데서 매우 중요한 대목이다.
경전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일컬어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감지된다(viditā honti)’고 하는 형식으로 설명한다. 관련 문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긴 들숨과 날숨의 힘에 의해 마음의 하나됨과 산란하지 않음을 알아차릴 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느낌(受)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의 특성이] 드러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느낌이] 사라진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지각(想)이 일어난다....
감지되는 것으로서 사유(尋)가 일어난다..... ‘무명의 일어남(集)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조건(緣)에 의한 일어남(paccayasamudaya)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이 감지된다(vidito hoti).... ‘무명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느낌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지각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사유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
인용문은 일차적인 관찰대상으로서 ‘코끝’ 혹은 ‘면상’에 대해 ‘사띠를 확립하고난 후(satiṃ upaṭṭhapetvā)’에 진리가 체득되어지는 과정을 기술한 것이다. 이 문구에서 핵심이 되는 용어는 ‘감지되는 것(vidita)’이다.
이러한 ‘ 감지되는 것’의 원어인 ‘vidita’는 동사원형 ‘√vid(보다, 알다, 경험하다)’에서 기원한 말로서 과거수동분사․복수․주격의 문법형식을 취한다. 따라서 이 용어에 의해 수식을 받는 ‘느낌’․‘지각’․‘사유’ 따위는 수행자의 자발적 의지와 상관이 없이 저절로 드러나 포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조건(緣, paccaya)’에 의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감지된다’는 의미이다.
‘사띠(念)’와 ‘삼빠자나(知)’에 의한 위빠사나 수행이 단순하게 ‘고요함(samatha)’만을 의도하는 것이라면, 일차적인 관찰대상 즉 ‘코끝’이라든가 ‘배의 움직임’ 따위에 대해 집중된 상태에만 논의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그와 같이 집중된 상태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낌(受)’ 따위의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피동적으로 ‘감지된다(viditā honti)’는 점을 더욱 구체적으로 부각시키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
인용문에 제시된 내용으로서, 느낌(受, vedanā)․지각(想, saññā)․사유(尋, vitakka) 등은 수행의 과정에서 포착되는 일체의 모든 것을 망라한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이들 부차적인 포착의 대상들은 ‘코끝’이라든가 ‘면상’ 혹은 ‘배의 움직임’이라고 하는 직접적인 관찰 대상으로부터 의식이 분산될 때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깊은 선정의 상태에 이르게 되면 저절로 없어지는 것들로서 다름 아닌 번뇌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다.
즉 일어남과 사라짐을 반복하면서 스스로 고갈되어 없어질 때까지 과도적으로 존속하는 현상들이다.
그러나 인용문에 나타나듯이, 이들은 인위적인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를 깨닫기 위한 매개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무명의 일어남으로부터 느낌의 일어남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일어남의 의미로 느낌의 일어남이 감지된다.... 무명의 소멸로부터 느낌의 소멸이 있다고 하는 조건에 의한 소멸의 의미로 느낌의 사라짐이 감지된다... ”는 따위의 언급이 그것이다. 바로 이 내용은 직접적인 관찰대상 이외의 것에 대해서도 깨여있는 상태를 유지함으로써, ‘조건(緣, paccaya)’에 대한 자각을 내용으로하는 ‘지혜(paññā)’의 개발 과정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사리불 존자의 위빠사나 체험담을 전하는 「부단경(不斷經, Anupadasutta)」에는 이 대목이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비구들이여, 사리뿟다는 보름 동안에 걸친 ‘순서에 따른 법에 의한 위빠사나’를 수행하였다..... 그에게 ‘감지되는 것(viditā)’으로서 그들 현상이 일어났다. ‘감지되는 것’이 드러났다. ‘감지되는 것’이 사라졌다. 그는 이와 같이 알아차렸다.
‘실로 이들 현상은 나에게 있지 않다가 발생한 것으로, 있고 난 후에 알게 된 것이다’고. 그는 그들 현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anupayo), 혐오하지 않고(anapāyo), 의존하지 않고(anissito), 메이지 않고(appaṭibaddho), 벗어난 상태로(vippamutto), 얽히지 않은 상태로(visaṃyutto), 자유로운 마음으로(vimariyādīkatena cetasā) 머물렀다.”
인용문은 앞에서 살펴 보았던 내용과 동일한 맥락의 내용을 담고 있지만, 위빠사나를 실천해 나가는 마음가짐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후반부에 나타난 내용은 위빠사나를 진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육체적․정신적 현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감지되는 것들(viditā)’에 대해 “집착하지 않고, 혐오하지 않고, 의존하지 않고, 메이지 않고, 벗어난 상태로, 얽히지 않은 상태로, 자유로운 마음으로 머물렀다”는 내용이그것이다. 감지되는 내용으로서 나타나는 느낌(受)․지각(想)․사유(尋) 등은 여러 모습을 지닐 수 있다. 예컨대 부정적인 모습을 취한 것(逆境界)일 수도 있고 긍정적인 것(順境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해 동요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 현상에 얽히어 새로운 속박에 묶이게 되는 것이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기술한 위빠사나의 원리를 다시 한번 정리․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위빠사나’란 ‘삼빠자나(知, sampajañña)’와 ‘사띠(念, sati)’라는 2가지를 통해 몸․느낌․마음․법의 4가지를 따라가며 보는 행법이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일컬어 ‘아누빠싸나(隨觀, anupassanā)’라고도 하는데, 이를 통해 여러 육체적․정신적 현상들이 폭넓게 감지된다(viditā honti). 이렇게 해서 지혜(paññā)를 개발하고 진리에 대한 체득으로 나아가게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감지되는 일체의 현상에 대해 집착하지도 혐오하지 않는 평정된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자의 기본 자세이다.
5. 위빠사나의 실제
1) 사념처의 세부내용
사념처의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기본적인 관찰대상으로서의 4가지란 몸(身)․느낌(受)․마음(心)․법(法)이다. 그런데 이들은 수행의 과정에서 포착되는 모든 현상들을 총괄적으로 아우르는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들 4가지 각각은 또 다른 세부항목들을 지닌다.
「대념처경(Mahāsatipaṭṭhāna-Suttanta」에 나타나는 이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몸에 대한 사띠
① 호흡의 출입에 대한 알아차림 (身念處,)
② 몸의 동작에 대한 알아차림
③ 몸의 행동에 대한 알아차림
④ 몸의 구성하는 32가지의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⑤ 몸의 4대요소에 대한 알아차림
⑥ - ⑭ 몸의 부패과정을 9단계로 관찰
(2) 느낌에 대한 사띠
①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受念處)
②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③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④ 속된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⑤ 속되지 않은 즐거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⑥ 속된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⑦ 속되지 않은 괴로운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⑧ 속된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⑨ 속되지 않은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3) 마음에 대한 사띠 ① 탐욕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② 탐욕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心念處) ③ 분노가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④ 분노가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⑤ 어리석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⑥ 어리석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⑦ 산란함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⑧ 산란함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⑨ 넓은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⑩ 넓은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⑪ 우월한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⑫ 우월한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⑬ 고요한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⑭ 고요한 마음이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⑮ 해탈한 마음이 있음에 대한 알아차림
⑯ 해탈한 마음이 있고 없음에 대한 알아차림
(4) 법에 대한 사띠
① 다섯 장애(五蓋)에 대한 알아차림 (法念處)
② 다섯 집착된 온(五取蘊)에 대한 알아차림
③ 여섯 터전(六入處)에 대한 알아차림
④ 일곱 깨달음의 요소(七覺支)에 대한 알아차림
⑤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의 법에 대한 알아차림
이상과 같은 사념처의 세부항목은 수행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을 4가지 유형으로 종합․분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미얀마나 태국 등지에서 위빠사나를 지도하는 스승들은 바로 여기에 열거된 세부항목들에 근거하여 고유의 가풍으로 가르침을 펼친다. 미얀마나 태국 등지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여러 유형의 위빠사나를 일목요연하게 살펴 볼 수 있는 소개서로는, 잭 콘필드(김열권 옮김)의 위빠사나 열두 선사(서울: 불광출판부, 1997)가 있다.
예컨대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마하시 사야도(Mahasi Sayadaw, 1904~1982) 계통의 수행센터에서는 신념처의 ②와 ③의 항목에 비중을 두는 수행법을 가르친다. 또한 마하시 사야도의 가르침을 독자적으로 계승한 쉐우민 사야도(Shwe Oo Min Sayadaw, 1910~2002)의 경우에는 심념처를 위주로 하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
이들은 예비적인 선정을 익히지 않고서도 행할 수 있는 ‘순수 위빠사나(純觀, suddhavipassanā)’를 가르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한편 재가자로서 인도에서 널리 활약하고 있는 고엔까(S. N. Goenka, 1924~)는 신념의 ①항목과 수념처에 비중을 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고 한다. 그 이외에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 1899~1962)는 수념처와 심념처를, 순룬 사야도(Sunlun Sayadaw, 1878~1952)는 독특한 ‘정화 호흡법’과 함께 수념처에 비중에 비중을 둔 위빠사나를 가르친다.
고엔까의 행법은 그의 스승인 우바킹(U Ba Khin)의 가르침과 동일하다. 우바킹의 가르침은 앞의 각주에서 언급한 위빠사나 열두 선사에 정리되어 있다.
한편 인경스님(옮김), 단지 보기만 하라(서울: 경서원, 1990); 일중스님, 「고엔카 수행법과 大念處經」 대념처경의 수행이론과 실제(서울: 근본불교수행도량 홍원사, 2002) 등도 고엔까 수행법을 살펴 볼 수 있는 소개서이다. 그 외에 모곡 사야도라든가 순룬 사야도의 가르침도 위빠사나 열두 선사에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들의 가르침 역시 일상적인 삶 속에서 포착 가능한 대상들을 위빠사나의 주제로 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그러나 파옥 사야도(Pa Auk Sayadaw, ?~)와 같이 ‘사마타(止)’를 먼저 익히게 한 다음, 위빠사나로 전향시키는 경우도 있다. 파웃 사야도의 가르침은 Mindfulness of Breathing and Four Elements Meditation(by Pa-Aut Sayadaw, Malaysia: WAVE, 1998)에 개괄적으로 정리되어 있으며, 국내에서 발간된 서적으로는 김열권 지음,
보면 사라진다(서울: 정신세계사, 2001)에 일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그의 가르침에는 일정기간 신념처의
④항목에 속한 뼈․골수․콩팥 등에 대한 관찰법과 함께, 위숫디막가(Visuddhimagga, pp.123-126)에 기술되어 있는 ‘까시나(kasiṇa) 명상법’이 포함된다고 한다.
‘까시나 명상법’이란 마음의 집중을 얻기 위한 ‘도구’로서 ‘까시나’를 이용한 선정수행을 가리키는데, 위숫디막가(pp.123-126)에 기술된 까시나(kasiṇa) 명상법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예컨대 ‘흙에 의한 까시나(地遍)’의 경우, 인위적으로 조성한 흙이든 혹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흙이든, 흙에 대해 마음을 집중하여 눈으로 한참 보고난 후, 그것의 영상을 마음에 새긴다. 그리하여 거기에 마음이 완전히 고정될 때, 여러 잡다한 번뇌와 욕망 등이 차단되어 ‘첫 번째 선정(初禪)’ 등에 이른다. 다른 ‘까시나 명상법’도 대략적인 방법과 원리는 마찬가지인데, ‘물에 의한 까시나(水遍)’, ‘불에 의한 까시나(火遍)’, ‘바람에 의한 까시나(風遍)’, ‘푸른색의 까시나(靑遍)’ 등 도합 10가지에 이르는 까시나가 있다.
거기에는 특별한 집중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따라서 파웃 사야도의 가르침은 순수한 위빠사나라기 보다는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혼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남방불교의 위빠사나 스승들은 제각기 다른 가풍(家風)을 전수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위에서 열거한 사념처의 세부항목들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또한 실제 수행에서 사념처의 4가지는 엄격히 분리된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위빠사나의 힘이 증장되면 눈․귀․코․혀․몸․마음의 감관에 와 닿는 모든 정신적․육체적 현상들이 기민하게 포착된다. 이때가 되면 사념처의 4가지에 대한 구분은 큰 의미를 잃는다.
즉 특정한 대상에 편중됨이 없이 일체의 현상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위빠사나를 행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마하시 사야도는 “초보적 수행단계에서는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관찰을 해야 하지만, 수행이 진척되면 6근의 영역 전체로 관찰대상을 확대해야 한다”고 가르치며, 정동하 옮김, 앞의 책, pp.105-106; pp.114-115 참조.
쉐우민 사야도 또한 “처음 수행을 해 나갈 때는 ‘내(puggala)가 무엇을 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수행을 오래 하다가 보면 법(dhamma)이 저절로 드러나 이끌어 준다”고 언급한다. 현재 쉐우민 사야도의 가르침은 문헌으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 여기에서 소개한 구절은 쉐우민 센터에서 주석하는 한국인 수행자 청현스님이 현지 법문을 통역한 것이다. 그러한 설명들에 비추어 볼 때, 여기에서 소개한 각각의 가풍과 그것에 따른 수행법들은 결국 앞에서 언급한 ‘한 갈래의 길(ekāyana)’로 통하는 방편들이라 할 수 있다.
2) 위빠사나의 실천
이상과 같이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사띠’와 ‘삼빠자나’라는 2가지 원리를 통해, 4가지 것에 대한 관찰로 이어지는 차제적인 순서를 거친다. 그런데 이들 과정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배양되는 ‘사띠의 힘’과 ‘삼빠자나의 힘’은 비단 일상적인 삶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니까야에는 그러한 ‘사띠’와 ‘삼빠자나’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등장하며, DN. vol.2. p.99 등 참조. 심지어는 죽음에 임하는 순간이라든가, 죽고 난 이후에 다른 생을 선택할 때에도 ‘사띠’와 ‘삼빠자나’로써 행한다는 내용들이 기술되어 있다. 관련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난아, 그와 같이 보살은 도솔천에서 몸이 죽고 난 후, 사띠(念)와 삼빠자나(知)를 지니고서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갔다..... 아난아, 그와 같이 보살은 사띠와 삼빠자나를 지니고서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태어났다... 아난아, 그와 같이 여래는 사띠와 삼빠자나를 지니고서 목숨의 형성력(命行)을 포기한다... ” DN. vol.2. p.108 인용.
인용된 내용은 위빠사나 수행의 기본 원리인 ‘사띠’와 ‘삼빠자나’가 과연 어떠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기능하는가를 단편적으로 나타낸다. 특히 이 대목은 위빠사나 수행이 삶과 죽음의 전 영역에 걸쳐 진행될 수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모든 수행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용구에 나타나는 내용은 부처님과 같이 고원한 경지에 계신 분이나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인 입장에서 볼 때 아무래도 거리감이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까닭에 실제 수행자에게 위빠사나 수행이 어떤 공덕을 가져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달리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경구를 인용해 본다.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 즐거운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면, 탐욕의 부림(使)을 받아, 거기에서 떠날 길을 보지 못한다. 괴로운 느낌을 느낄 때, 괴로운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지 못하면, 성냄의 부림을 받아, 거기에서 떠날 길을 보지 못한다.... 만일 비구가 정진하여 바른 지혜가 흔들리지 않으면, 모든 느낌에 대해 지혜로써 알아차린다. 모든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게 되면, 현재의 법에서 온갖 번뇌가 아주 다하게 되나니, 지혜에 의존하여 목숨을 마치게 되고, 열반에 들어 중생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 잡아함경, 권37, 1028경 인용.
인용된 경구는 ‘느낌(受)’을 중심으로 위빠사나의 공덕을 이야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떠한 느낌이 발생하면 그 느낌을 곧바로 알아차려, ‘탐욕(愛, taṅhā)’과 ‘집착(取, upādāna)’ 따위의 번뇌가 발생할 여지를 차단하여야 한다는 것이 요지이다. 그와 같이 행할 때 온갖 번뇌가 다한 열반의 공덕이 기대된다는 의미이다.
이 경구와 관련하여 특히 모곡 사야도(Mogok Sayadaw)의 해설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12연기의 해석에관련한 모곡 사야도의 가르침은 The Doctrine of Paticcasamuppāda(by U Than Daing,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Vipassana)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특히 전반적인 교리체계에 입각한 십이연기의 각 지분에 대한 독특한 해설과 함께, ‘느낌(受, vedanā)’과 ‘탐욕(愛, taṅhā)’의 ‘소멸(nirodha)’을 ‘연기로부터의 출구(exit form paticcasamuppāda)’로 풀이한 내용 등이 도표로 간략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면 12연기의 발생(流轉) 과정에서 ‘무명(avijjā)’에서부터 ‘느낌(vedanā)’까지의 지분은 전생의 업력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것이다. 즉 현세의 의지와 상관없이 개개인에게 다가오는 조건들이다.
그러나 ‘느낌’ 이하의 지분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해 제어하는 것이 가능하다.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곧 위빠사나이다.
위빠사나가 진전됨으로 인하여 수행자는 모든 느낌(受)들이 일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감각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명확히 체득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것에 대해 ‘탐욕(愛)’과 ‘집착(取)’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수행이 원만해 졌을 때, 재생으로 통하는 업력이 힘을 잃게 되고, 마침내는 ‘무명(avijjā)’ 자체가 종식된 ‘지혜(vijjā)’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위에서 인용한 “모든 느낌에 대해 알아차리게 되면, 현재의 법에서 온갖 번뇌가 아주 다하게 되나니, 지혜에 의존하여 목숨을 마치게 되고, 열반에 들어 중생의 목숨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이 그러한 모곡 사야도의 해설과 일치한다.
사념처의 위빠사나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갖가지 느낌의 유혹에 노출된 채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삶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그러한 유혹을 인위적으로 멈추게 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매순간의 ‘느낌’들을 곧바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인해 야기되는 탐욕과 애착에 끄달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부단한 ‘알아차림’과 ‘마음지킴’ 즉 ‘삼빠자나’와 ‘사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인용구에 나타나듯이 ‘즐거운 느낌’을 하나의 ‘감각현상’으로 즉각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의 실제를 놓치게 된다. 그리하여 거기에 대해 ‘탐욕(愛, taṅhā)’을 일으키게 되고, ‘집착(取, upādāna)’에 빠지게 된다. 탐욕과 집착에 얽혀 새롭게 야기되는 ‘존재(有, bhava)’를 일으키고, ‘늙음과 죽음(老死, jarā-maraṇa)’의 굴레에 빠져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러하듯이 사념처의 위빠사나는 12연기의 교리적 해석과도 정확하게 맞물려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지평에서 현실적인 삶으로부터 열반의 세계에 이르는 과정을 담지해 낸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정리하는 시점에서, 이러한 사념처의 위빠사나를 과연 얼마만큼 해야 하는가를 밝히는 법문을 소개한다. 수행에 필요한 기간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문제는 기간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됨됨이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으로라도 사념처의 공덕을 밝힐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무언가 절박함이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구들이여, 누구든지 이 사념처(四念處)를 7년 동안 행한다면, 그에게는 두 가지 결과 중에 어느 한 가지가 기대된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아라한의 경지(阿羅漢果)를 얻든지, 남은 번뇌가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음(不還果)을 얻게 된다.
7년이 아니라 6년, 5년, 4년, 3년, 2년, 1년이라도.... 일년이 아니라 7개월이라도.... 7개월이 아니라 6개월, 5개월, 4개월, 3개월, 2개월, 1개월, 보름이라도.... 보름이 아니라 7일 동안이라도, 이 사념처를 열렬히 수행한다면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한 가지가 기대된다. 즉 현재의 상태에서 아라한의 경지를 얻든지 남은 번뇌가 있을 때에는 돌아오지 않음을 얻게 된다.... ” DN. vol.2. pp.314-315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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