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출식념경(入出息念經)
1. 녹모강당에 모인 장로 비구와 비구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사위성의 동쪽 동산에 있는 녹모강당(鹿母講堂)에서 깊이 깨달은 많은 장로 제자와 같이 머물고 계셨다. 존자인 사리불(舍利佛), 대목건련, 대가섭(大迦葉), 대가전연, 대구치라, 대겁빈나, 대순타, 아나율(阿那律), 이바다(離婆多) 및 아난(阿難) 내지 그 외 깊이 깨달은 장로 제자와 같이 계셨다.
문헌에 의하면 붓다가 가르침을 설하면서 다니신 곳은 멀리는 서인도와 스리랑카까지 미쳤다고 하나, 확실한 증거는 없고 직접적인 전도 행각의 범위는 갠지스강 중류에 한정된다고 보아진다. 즉 갠지스 강 남쪽의 마가다국, 북쪽 유역의 브리지 연합 릿차비족의 영토, 그리고 약간 북서쪽의 코살라국과 말라족, 콜랴족의 지방, 약간 남서쪽 야무나강과의 합류점에 가까운 바트사국 등이다. 이밖에 마가다국 동쪽에 인접해 있는 앙가국과 코살라국 서쪽에 인접해 있는 판차라국, 쿠루국에도 갔엇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붓다가 흔히 머문 곳은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자그리하와 코살라국의 쉬라바스티, 곧 사위성과 릿차비족의 수도 바이살리였다. 이들 세 곳은 당시 3대 강국의 수도로서 사람들도 많이 모여들었으므로 설법의 적지였다.
여기에 나오는 사위성은 푸라세나짓트 왕 치하에서 번영했던 곳이다. 이 성의 남쪽 교외에는 유명한 기원정사가 있었다. 동쪽에는 녹모강당이라는 곳이 있어서 그곳에 붓다가 머물고 계셨다. 녹모강당은 '므리가라 마트리'가 기증한 강당이다. 녹모는 사위성의 장자인 녹자(鹿子)의 아내가 된 앙가국 장자의 딸 비샤카가 마치 남편녹자의 어머니와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녹자모라고 하게 됐다고 한다. 이 녹자모는 석존의 교화를 도와 사위성의 동쪽에 정사를 지어서 바쳤다. 그리하여 그 정사를 녹자모강당이라고 한다.
여기에 사리불 등 수많은 여러 장로 제자들이 모여서 머물고 있었다. 사리불은 '사리푸트라'로서 붓다의 10대 제자 가운데 지혜가 제일이었다. 대목건련은 '마우드갈라야나'로서 바라문의 아들로 태어나 출가한 사람이다. 붓다의 10대 제자 중에서 신통이 제일이었다. 대가섭은 '마하카샤파'로서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인데 바라문 태생으로 붓다가 성도하신 지 3년 뒤에 제자가 되었으며, 10대 제자 중에서 두타행이 제일이었다. 곧 의식주에 대한 탐착이 없는 철저한 수행자였다.
대가전연은 '마하카챠야'이니 붓다의 10대 제자 중에서 논의가 제일이었다. 대구치라는 '마하카우스티라'로서 사리불의 외삼촌이다. 변재가 뛰어나서 문답 제일이라고 한다. 대겁빈나는 '마하카핀나'로 비구의 이름이다. 대순타는 '마하륜다'로서 석존이 입멸하시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공양한 대장장이다. 아나율은 '아니룻다'로서 붓다의 10대 제자 중에서 천안 제일이라고 알려졌다.
붓다의 사촌동생이며 귀의한 후 붓다 앞에서 자다가 꾸지람을 듣자 자지 않고 여러 날을 수도하여 눈이 멀었으나, 그 뒤에는 천안통을 얻어서 천안 제일이 되었다. 이바다는 '레바타'로 붓다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비를 피해서 어떤 신사에 머물러 있다가 두 귀신이 송장을 서로 자기 것이라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는 사람의 몸이 거짓으로 모여 있는 것임을 깨닫고 출가했다고 한다. 아난은 '아난다'로서 붓다의 10대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지식이 많아서 다문 제일이라고 한다. 석가족 출생이다.
이런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 있는 강당에 붓다가 계셨다. 특히 이 모임은 장로 제자들이 중심이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장로는 학덕이 높고 불도에 들어온 지 오래된 이로서, 대중의 존경을 받는 연로한 승이다. 지혜 제일의 사리푸트라(사리불), 신통 제일의 마우드갈라야나(목건련), 두타 제일의 마하카샤파(대가섭), 천안 제일의 아니룻다(아나율), 해공 제일의 수부티(수보리), 설법 제일의 푸르나(부루나), 논의 제일의 카차아나(가전연), 지계 제일의 우팔리(우바리), 만행 제일의 라훌라(라후라), 다문 제일의 아난다(아난다) 등 10대 제자와 지혜, 신통, 두타, 논의, 문답, 천안, 다문 등이 뛰어난 장로 7명, 그 외에 모두 각각 덕행이 뛰어난 장로들이 모여서 각각 여러 비구에게 설법을 한다.
2. 동짓달 보름날 밤의 강론
이때 여러 장로 비구들은 새로 배우는 비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장로 비구는 1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2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3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40명의 비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새로 온 비구들은 여러 장로 비구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점차로 수승한 높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마침 보름이니 포살(布薩) 날이었다. 비구들이 대중에게 죄과를 고백하는 참회의 자자법회가 있어서 보름달이 둥글게 떠 있는 밤에 세존은 여러 비구들에게 둘러싸여 노지에 앉아 계셨다.
이때 세존은 묵연히 앉아 있는 비구들을 둘러보시고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였다. "비구들이여, 나는 이렇게 올바른 행에 부지런히 애썼노라. 비구들이여, 나는 이 올바른 행에 마음을 써서 애썼노라. 그러하니 그대들은 아직 얻지 못한 것을 얻기 위해서,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기 위해서 부지런히 정진하라. 나는 이 사위성에서 '넉달 뒤의 코무디(Komudii(10-11월: 카티카 kattika 달)의 만월에 돌아오리라.' 하고 떠난 지 넉 달만에 다시 돌아왔노라."하시니 여러 비구들은 넉달 뒤의 코무디의 만월에 이 사위성으로 돌아오실 것이라고 듣고 세존을 뵙기 위해서 찾아왔다.
이날은 마침 하안거의 마지막 날이었다. 여러 비구들이 부처님을 따라 여름 석 달 동안 유행하지 않고 수행 정진하던 것을 마치고 그동안 듣고 보고 의심나는 일 등을 대중에게 고백하여 참회하는 날이었다. 이 행사는 달이 둥근 보름달이나 새로 달이 뜨는 그믐날에 행해진다. 15일 간에 걸친 자신의 수도생활을 반성하여 대중에게 고백하고 가르침을 받는 행사였다. 이때 새로 입문한 비구들은 각각 나누어져 여러 장로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마지막으로 붓다의 설명을 들은 후 자신의 갈길을 정한다. 그리하여 세존은 대중에게 설법을 하신다.
석존께서는 쉬라바스티의 기원정사 외에도 앞에서 말한 므라가라 마트리(鹿子母)가 기증한 동쪽 동산의 녹자모강당과 푸라세나짓트 왕이 여승들을 위해서 건립한 라자카 아마라(王圍精舍)에 머물고 계셨다.
석존은 성도하신 뒤 3년째 되는 해의 우기를 이곳에서 지내셨다고 하는데, 그 후에도 20여 차례의 하안거를 쉬라바스티와 그 근처에서 지내셨다고 한다. 그러므로 석존은 기원정사나 녹모강당에서 설법하신 일이 매우 많았고, 이에 대한 많은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이 아나파나사티 숫타도 여기에서 설하셨다. 때는 코무디 만월의 밤이요, 장소는 녹모강당이요, 청중은 여러 장로 제자와 비구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 이런 곳, 이런 때에 설법을 하신다. 이때 장로 비구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3. 한자리에 모인 스승과 제자들
여러 장로 비구들은 한창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어떤 장로 비구는 10명의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20명의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30명의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어떤 장로 비구는 40명의 새로 온 비구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들 새로 온 비구들은 장로 비구들에게 배움을 받아서 점차로 수승한 높고 오묘한 이치를 깨달았다. 마침 세존은 그날의 포살을 맞아 사 개월 뒤인 코무디 둥근 보름달이 뜬 밤에 비구들에게 둘러싸여 노지에 앉아 계셨다.
석존께서 넉 달 뒤에 돌아오겠노라고 약속하고 다른 곳에서 유행하신 뒤 이곳 녹모강당으로 오셨다. 약속대로 석존이 오시니 여러 장로 비구를 비롯하여 많은 비구들이 각각 수행에 힘쓰고 있었다. 그들의 수행은 법을 아는 일과 법을 닦는 일, 그리고 법을 지키는 일이다. 이렇게 세 가지 공부를 부지런히 한 후 회향하는 날이 된 것이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모두 한자리에 모여서 각각 반성하며 참회한다. 여기에서 석존의 인격을 그리워하며 여러 지방에서 모여든 수행자들이 집단생활을 하고 있었고, 각각의 장로 비구들이 그들을 분담해서 가르쳤던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다. 붓다는 자신에게 귀의한 사람들에게 지위고하나 출생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소중히 맞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치 자식과 같이 가르쳤다. 그리하여 그들은 '가르침을 듣는 자'인 동시에 불자(佛子)라고 불려졌다. 이런 사람들이 경에서 말하는 제자이다. 그들은 오늘날의 스승과 제자와는 비교할 수 없는 관계에 있었다. '가르침을 받는 사람 savaka'인 경우에는 집을 나온 비구와 재가자도 포함되나, 석존의 밑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자라고 불렀다.
4. 만인에 대한 붓다의 자비
이때 석존은 묵연히 앉아 있는 비구들을 둘러보시며 여러 비구에게 고하셨다.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묵묵히 말을 하지 않는구나.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묵묵히 말을 하지 않는구나. 청정하고 참됨에 안온히 머물렀도다.
비구들이여, 이제 그대들은 마땅히 우러러 받들며 공양 합장하여 모실 비구들이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더없이 거룩한 복전이니라. 비구들이여, 이 자리에 있는 비구들, 이 무리에게 베풀면 작은 베품도 많은 것이 되고, 많은 베품도 더욱 많아지는 이와 같은 무리로다.
비구들이여, 실로 그대 비구들이여, 여기 모인 그대 비구들은 이 세상에서 쉽게 볼 수 없는 희유한 무리들이로다. 여러 비구들이여,실로 이 비구대중, 비구들이여, 여기에 모인 그대들은 그대들을 만나기 위해서 수없이 먼 곳으로부터 먹을 것을 갖고 찾아가더라도 만나기 어려운 사람들이니라. 여러 비구들이여, 여기에 모인 비구들은 이와 같은 사람이로다."
불교는 당시 사회에서 굳게 자리잡고 있던 신분계급의 차별을 무시하고 교단에 귀의한 사람은 누구든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존귀하며 받들어모실 대상으로 대우했다. 그들은 어떤 이념에 의한 인위적인 제도가 아니라 오로지 붓다의 자비와 지혜에 귀의했다. 교단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가난한 사람, 천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우상을 받드는 사람의 아내나 가족이 모두 죽어서 홀로 남은 가난한 과부, 추위와 더위에 못 견디고 달려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하층계급의 사람들만이 석존의 대자비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지배계급이나 상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도 붓다에게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가다국의 아자타삿투 왕과 코살라국의 파세나지 왕이 그랬고, 바라문인 가섭 형제가 천 명의 제자를 데리고 석존에게 귀의했다. 사밧티시의 급고독 장자는 숲을 기증했다. 붓다께서는 이러한 모든 제자들을 한결같이 "비구여!"하고 다정히 부르셨다. 그리고 그들을 한결같이 평등하게 존중하고 아끼고 받들었다.
경문에서는 붓다의 자상하고 따사로운 숨결이 느껴진다. 붓다는 모든 제자들을 무상의 복전으로 보셨고, 한없이 베풀어야 할 거룩함으로 보셨으며, 귀하게 받들어 공양할 지존한 존재로 보셨다. 무상의 복전이요, 더없는 복전이다. 복전이란 복덕을 낳는 밭이다. 흔히 불법승 삼보나 부모를 잘 맏들면 베푼 대로 그 공덕을 받는다 하여 밭에 비유한다. 붓다의 교단에 들어온 이는 무한한 복의 밭을 가진다. 가장 거룩한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베풀면 작은 것도 큰 것이 되고, 많은 것은 더욱 많아진다. 마치 밭에 곡식을 심으면 작은 씨앗이 점점 커져서 열매를 맺어 더욱 많은 곡식을 얻게 되는 이치와 같다.
도를 닦아서 법을 알게 되면 복전을 닦은 것이요, 복전을 가지는 것이다. 불법은 수천만 겁에도 만나기 어렵다. 하물며 그런 불법을 닦으러 온 비구들 역시 수천만 겁에도 만나기 어려운 희유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어찌 다시 보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겠으며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부처님은 모든 제자들을 더없는 복전이요,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희유한 인연이므로 더없이 소중하고 거룩한 법의 맺음으로 보셨다. 이렇게 보고, 이렇게 말이 나오고, 이렇게 행해지지 않으면 깨달음이 아니다. 법을 본 자는 법을 행하게 된다. 법을 본 자는 말과 행동이 법 그대로 되고 자비스러운 말과 온화한 얼굴로 대하게 된다. 붓다가 여러 비구에게 말씀하신 이 첫 말씀을 우리는 깊이 귀담아 들어서 부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지 않으면 안 된다.
5. 무리 속에 있는 수많은 깨달은 자들
여러 비구들이여, 이 모임은 이와 같다. 이 비구들 중에는 아라한으로서 번뇌가 다하여 더없는 것을 얻어 마땅히 할 바를 하고, 무거운 짐을 버리고 스스로의 이로움을 얻어 맺혀 있는 것을 모두 없앤 비구가, 올바른 지혜로써 해탈한 비구가 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비구 중에는 욕계의 다섯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고 화생으로서 남김 없는 열반에 들어서 저 세계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게 된 비구가 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욕계의 세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고 탐진치를 엷게 하여 오직 한 번 이 세상에 돌아와 고를 모두 없앤 비구가 있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들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여러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욕계의 세 가지 번뇌를 모두 없애고 예류과를 얻은 자, 나쁜 곳으로 가서 떨어지지 않은 자, 확실한 도가 이루어진 자, 올바른 깨달음으로 갈 비구들이 있다. 여러 비구여, 이와 같은 종류의 여러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붓다의 회상(會上)에는 수많은 수행자들이 모여 있어 이 중에는 수행이 높은 성자들도 많이 있었다. 이 중에는 아라한(阿羅漢)의 세계를 증득한 성자도 있고, 불환과(不還果)를 얻은 성자도 있고, 일래과(一來果)를 얻은 성자도 있으며, 예류과(預流果)를 얻은 성자도 있었다.
아라한과를 얻으면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더없이 안온함으로 가서 마땅히 하고 싶은 일을 행하는 힘이 생긴다. 여기에는 어떤 정신적인 집착도 없고, 자신의 지극히 참된 곳에 머물러서 더 바랄 것이 없게 되며, 지혜가 바르게 나타나 모든 걸림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아라한은 수행이 극치에 이르러서 자기가 완성된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런 세계를 얻은 사람을 진인(眞人)이라고도 하고, 마땅히 존경받을 만한 성자라고 하여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며, 번뇌의 적을 완전히 없앤 사람이라 하여 살적(殺賊)이라고도 하고, 다시는 번뇌로 고민하는 중생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하여 불생(不生)이라고도 한다.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경지에 이른 성자다.
또한 아라한은 인간의 정신이 최고의 이상에 도달한 것이므로 더 배울 것이 없는 세계라 하여 무학과(無學果)라고도 한다. 이러한 세계에서는 올바른 지혜가 있고 올바른 행이 행해진다.
다음에 불환과는 중생이 가지고 있는 다섯 가지 번뇌, 곧 탐욕, 노여움, 나나 우리 등을 고집하는 아집, 계로 정하여 금하고 있는 사항을 그릇되게 이해하여 취하는 소견(戒禁取見), 인과의 도리를 의심하는 것 등이다. 이로 인해서 고통받고 있으므로 모두 없애고, 열반의 세계로 들어가서 다시는 고통받는 번뇌의 세계로 돌아오지 않게 된 성자의 세계다. 이런 세계에 도달한 사람은 다시는 고통받는 욕계에 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불환과를 아라한과의 밑에 해당하는 단계로 본다.
일래과(一來果)는 욕계의 세 가지 번뇌, 곧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이 엷어져서 인간계와 천상계에 통하게 되니, 인간계에 있으면서 이를 얻으면 반드시 천상에 있다가 이 과를 얻으면 우선 인간으로 가서 다시 천상과 인간계를 한 번 왕래한다. 이는 일래라는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류과는 수행자가 천상계에서 얻는 세계이다. 고의 원인인 번뇌를 없앰으로써 고가 없는 성자의 길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단계다. 여기에 이르면 불교의 근본 진리인 고집멸도 사성제를 명료하게 보는 지혜가 열린다. 더 수행하여 이 단계를 지나 번뇌를 더욱 많이 끊으면 천상계에 태어나서 천상의 낙을 맛볼 수 있는 일래과에 이른다.
그러나 일래과에서는 아직 인간의 번뇌를 완전히 끊지 못했기 때문에 한 번은 인간계로 돌아온다. 더 수행하면 모든 번뇌를 끊고 적정의 참된 즐거움을 몸으로 증득하는 불환과에 이른다. 여기에서 다시 더 나아가면 닦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세계인 열반에 들어서 생과 사의 미혹의 유전함이 없는 성자, 즉 아라한에 이르게 된다. 경에서 말한 '나쁜 곳(지옥 등)에 떨어지지 않는 자'는 일래과를 얻은 자요, '결정된 자'는 불환과를 얻은 자요, '올바른 깨달음으로 갈 자'는 아라한과를 얻은 성자다. 이러한 성자들이 모두 모여 있는 곳이 이 회상이다. 원시불교나 소승불교의 수행목표는 이 네 가지다. 그러나 대승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보살이나 부처의 세계가 설해지고 보살이나 부처가 되는 수행을 닦게 된다.
6. 37종의 수행을 갖춘 성자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사념처(四念處)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가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주 속에 사정근(四正勤)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종류의 비구들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사신족(四神足)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같은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오근(五根)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들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오력(五力)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칠각지(七覺支)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여러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거룩한 여덟 가지 길의 수습과 노력에 정근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런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앞에서 말한 아라한과, 불한과, 일래과, 예류과의 세계는 우리가 불도를 닦는 첫 단계에서 들어가는 성문(聲聞)의 길이다. 성문이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수행하여 자기완성을 목표로 해탈에 이르려고 애쓰는 출가한 성자들이다. 이들은 삼십칠도행을 닦아서 번뇌를 없애고 성자의 세계에 머물러서 열반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수행자들은 사념처를 닦아서 이에 머물기도 하고, 혹은 사정근을 닦아서 이에 머물 수도 있고, 사신족을 얻은 이도 있고, 칠각지를 얻어서 머무는 이도 있고, 팔정도의 수행을 완성하는 이도 있다. 그러므로 경에서도 이들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 칠각지, 성팔지도의 수습에 정진하여 이에 머물고 있는 성자들이 모여 있다. 그러면 사념처의 수행이란 어떤 것인가.
흔히 불도를 닦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서 다섯 가지 그릇됨을 없앤다. 곧 부정관(不淨觀)으로 탐욕을 없애고, 자비관(慈悲觀)으로 성내는 마음을 없애고, 인연관(因緣觀)으로 어리석음을 없애고, 계분별관(界分別觀)으로 실체가 있다는 아견(我見)을 없애고, 수식관(數息觀)으로 마음의 산란을 없애고, 염불관(念佛觀)으로 여러 가지 번뇌를 없앤다.
다섯 가지 그릇된 마음을 없애고 관법을 닦은 뒤에 사념처관을 닦는다. 사념처관은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하며 몸을 골똘히 생각하여 몸이 부정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신념처(身念處)의 수행을 닦는다. 또한 마음을 골똘히 생각하여 받아들여지는 모든 감수작용에서 마음에 즐거움을 주는 음행이나 자식을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즐거움이나 재물로 인한 만족스러운 즐거움 등이 끝내 즐거움이 되지 못하고 고가 됨을 아는 수행을 닦는다. 또한 골똘히 생각하여 우리의 마음을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늘 변화하며 생멸한다는 무상함을 관하는 수행을 닦는다.
또한 모든 사물을 골똘히 생각하여 그 자체로는 실체가 없다고 관하는 수행을 닦아서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영원불멸하다는 상(常)과 즐거움이라는 낙(樂)과 실체가 있다는 아(我)와 깨끗하다는 정(淨)의 잘못됨을 없앤 사람들이 있다. 이 수행에 있어서는 이들 다섯 가지를 각각 나누어서 골똘히 생각하기도 하고, 모두 다같이 생각하기도 한다. 이렇게 하여 가치의 전환이 이루어지면 열반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남방에서 이 수행은 열반을 증득하는 방편으로 닦는다. 그래서 오정신관 다음에 이 사념처관을 닦아서 도를 깨닫는 길로 들어간다고 하여 《삼십칠도품경》에서는 첫 번째의 행법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념주는 지혜를 얻는 수행이다.
다음으로 사정근(四正勤)을 닦아서 부지런히 애쓰는 비구가 있다. 이는 네 가지 바른 노력이다. 나타나지 않은 악을 끊기 위한 노력, 이미 생긴 악을 끊기 위한 노력, 아직 나타나지 않은 선을 나타내기 위한 노력, 이미 나타난 선을 더욱 증대하기 위해 힘쓰는 노력 등이다. 이런 노력은 태만심을 끊고 마음의 장애를 없애기 때문에 사의단(四意斷)이라고도 한다. 《삼십칠도품경》에서는 두 번째의 수행이라고 설해진다. 그러므로 이 사의단은 계의수행에 해당한다. 이 네 가지 올바른 노력이 이루어진 비구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해서 모였다.
다음에는 사신족(四神足)을 닦아서 이에 머물고 있는 비구가 있다. 사신족은 네 가지 신족, 즉 네 가지 뛰어난 정신력이다. 사물을 투시해 그 실체를 아는 천안통(天眼通)을 얻는 수행과, 아무리 미세한 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청력을 얻는 수행과, 다른 사람의 마음을 능히 꿰뚫어볼 수 있는 힘을 얻는 수행과, 허공을 날 수 있는 신통력을 얻는 수행 등 네 가지 자재력을 얻은 비구들이 모여 있다. 이 네 가지 신통력은 정신집중으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사신족은 정(定)의 수행에 해당한다.
다음으로 오근의 수습으로 이에 머문 비구가 있다고 했다. 오근은 흔히 안근, 이근, 비근, 설근, 신근의 다섯이다.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에 있는 감각기능을 말한다. 이들은 각각 밖의 대상을 잡아서 이에 적응하는 기능이다. 그러나 《삼십칠도품경》에서는 이런 신체기관의 기능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다섯 가지 기능을 말한다.
이에 의하면 우리의 마음속에는 번뇌를 누르고 올바른 길로 나가게 하는 뛰어난 힘이 있다고 한다. 바로 믿음(信)과 정진(精進)과 골똘히 생각하는 능력(念)과 정신집중(定)과 지혜(慧) 등이다. 경에서 말하고 있는 오근이 바로 이들 다섯 가지 정신기능이다. 이들 오근은 번뇌를 없애는 힘이 되기 때문에 오무루근(誤繆루근)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누(漏)란 번뇌를 말한다.
믿음이 확립되어 마음에 유순함이 생기고, 하고자 하는 일에 용맹스럽게 나아가는 정진력이 생기고, 사물을 생각하고자 하면 언제나 골똘히 생각할 수 있으며, 정신이 집중되어 한결같이 부동심을 가지고 올바른 지혜로 사물을 분별하는 힘이 최고에 이르는 수행이다. 이러한 수행이 이루어진 사람은 다시 다섯 가지 힘을 얻는다. 곧 다섯 가지 근본능력의 힘을 말한다. 오근의 힘(五力)이 갖추어진 사람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게 된다.
칠각지의 수습에 머문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사념처에서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까지의 수행은 번뇌를 굴복시키는 수행이다. 그래서 여기까지는 수도위(修道位)에 속한다. 오력이 증대하면 번뇌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머물면 드디어 깨달음이 가까워진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돕는 일곱 가지라 하여 칠각지라고 한다. 이것은 '삼십칠도품' 가운데 제 6의 행법이다.
일곱 가지 법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불도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지혜로써 잘 살펴서 가려내는 데 7종이 있다는 뜻이다. ① 법을 살펴서 선악의 진위를 가려내는 것(擇法覺支택법각지), ② 수행할 때 마음의 삿됨을 버리고 용맹하게 바른 길로 정진하는 것(精進覺支정진각지). ③ 선한 법을 얻어서 마음이 기뻐하는 것(喜覺支희각지), ④ 그릇된 견해나 번뇌를 끊어버리기 위해서 알아서 거짓됨을 버리고 선근이 생하는 것(除覺支제각지), ⑤외경의 집착을 없앨 때에 그릇된 추억을 버리는 것(捨覺支사각지), ⑥ 정신집중이 되어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 것(正覺支정각지), ⑦ 항상 골똘히 생각하여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念覺支념각지) 등이다.
마음이 혼침하면 ①-③으로 일깨우고, 들뜨면 ④-⑦로 다스린다. 이와 같이 칠각지가 이루어지면 진리를 여실히 보게 되고, 생사를 떠나서 열반에 들게 되므로 도에 이른다. 이것이 일곱 번째의 팔정도로서 설해졌다. 그래서 《삼십칠도품경》에서는 다음의 팔정도를 제7의 행이라고 하여 팔도지(八道支)라고 한다. 사념처, 사정근, 사신족, 오근, 오력까지는 아직 번뇌가 있는 것이요, 칠각지와 팔정도에서는 번뇌가 이미 없어진 것이라고 말해진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팔정도의 수행이 이루어진 세계는 어떠한가. 이 여덟 가지 길은 거룩한 진리 그대로 행해지므로 성팔지도(聖八支道)라고 한다. 《삼십칠도행경》에서는 팔직도(八直道)라 했다. 불교실천의 8종이다. 이는 중도(中道)이며, 정도(正道)이며, 성도(聖道)이다. 여덟 가지로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팔정도지(八正道支), 또는 팔정도분(八正道分)이라고도 한다. 정견(定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定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옛 번역에서는 《삼십칠도품경》에서와 같이 직견(直見), 직치(直治), 직어(直語), 직행(直行), 직업(直業), 직방편(直方便), 직념(直念), 직정(直定)이라고 했다.
이들 여덟 가지는 계(戒), 정(定), 혜(慧)에 배당시켜서 볼 수 있으니 붓다가 설하신 근본 법문이다. 이는 붓다의 근본교리이므로 사제(四諦), 십이인연설(十二因緣說)과 함께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다.
정견은 지혜요 인연법이요 중도로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견해이다.
정사유는 모든 사유분별은 실다운 것이 없으며, 생각하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가 없다고 여겨 집착하지 않는다. 일체의 사유분별이 평등하기 때문에 집착할 바가 없다.
정업은 올바른 행위를 말한다. 말이나 몸, 마음의 움직임이 모두 걸림 없는 정업이다. 이러한 모든 움직임은 허망하고, 실다움이 없고, 악업이나 선업에도 끌리지 않으며, 행한 바나 지은 바가 없으니 정업이다.
정명은 올바른 생활이니 모든 생활이 삿되지 않아서 인연법 속에서 살며, 옳고 그름에 머무르지 않고, 청정한 지혜로써 살고, 행하는 생활이다.
정어는 올바른 말이니 실다운 말만을 하여 제법의 실상을 나타낸다. 모든 말이 청정한 구업을 짓도록 한다.
정정진은 정심(定心) 속에서 노력하니 고나 낙에 집착하지 않고, 근심과 기쁨에 끌리지 않으며, 악법을 용감히 떠나고 선법에도 애착 없이 한결같이 용맹하게 노력한다. 정정은 올바른 선정이니 선정에 들어서 흔들리지 않고, 들뜨거나 가라앉지 않는다.
또한 어디에도 집착하거나 의지하지 않으며, 인연법을 알아서 선과 악의 일어나는 바를 알고, 선법의 인연에 따라서 스스로 선정에서 유희하여 행함에 자재하고 출입에 걸림이 없다. 이와 같이 37종의 행이 닦아지면 열반에 이른다. 열반이란 번뇌가 없는 곳이다.
그러면 왜 37종을 모두 닦아야 하는가. 37종의 도행은 처음 수도하는 사람이 도로 들어가는 도정이다. 수행자는 먼저 스승에게 도를 닦는 방법을 물어 그 길을 배운다. 그리하여 먼저 마음가짐을 다져야 한다. 이것이 사념처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부지런히 노력하면 사정근이 된다. 부지런히 닦아서 정진하면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안정되어 흔들리지 않고 뜻대로 움직인다. 이것이 사신족이다. 마음이 섭심되어 내뜻대로 되면 마음의 힘이 생긴다. 이것이 오근이고, 그 힘이 더욱 증진하여 능히 번뇌를 끊으면 오력이다. 힘을 얻으면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선법을 모아 나의 것으로 삼으니, 이것이 칠각지다. 이렇게 하여 진리가 내 것이 되면 열반의 세계에 머물러서 모든 삶이 진리를 떠나지 않고 무위삼매에서 자재하게 된다. 이것이 팔정도이다. 경에는 이런 세계에 도달한 성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7. 보살도를 닦는 성자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慈)를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자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남의 고를 없애주는 비(悲)를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자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남과 같이 기뻐하는 기쁨(喜)을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자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차별심을 버림(捨)을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여기서는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사무량심(四無量心)을 닦은 성자가 설해진다. 사무량심은 자비희사의 네 가지 마음으로 이는 무량중생에게 베풀어 주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한결같이 간직되어 머물고 있는 사람이 성자이다. 사무량심은 사등심(四等心)이라고도 하는데, 가없는 인연을 맺게 되는 경계에 따르기 때문에 사무량심이라고 하고, 마음이 그 인연이 되는 경계에 따르기 때문에 사등심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마음은 무량중생인 경계에 따라서 베풀어지는 평등심이며 자비희사의 네 가지 마음이다. 이 네 가지가 이루어져서 일체 중생에게 베풀어지는 것이 덕(德)이다. 그래서 이를 사덕(四德)이라고도한다. 자(慈)는 빨리어로는 메타 metta요, 범어로는 마이트리 maitri(maitra) 다. 어원적으로는 친구, 친분을 뜻하고, 비는 카루나 Karuna이니 동정, 연민의 뜻이 있다.
자는 남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을 주려는 적극적인 마음이요, 비는 남의 괴로움이나 해로움을 없애주려는 적극적인 마음이다. 따라서 자비는 순수하며 사랑의 기본이다. 마치 부모가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끼지 않고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만인을, 일체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또한 희는 다른 이가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얻게 하여 같이 즐거워한다. 사는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보아 가깝거나 먼 구별을 두지 않고 같이 평등하게 대한다.
이러한 네 가지 마음은 처음에는 자신과 관계 있는 이에게 일으키고 점차 모든 이에게 미치게 한다. 이런 마음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대립을 없애고 집착을 떠났을 때 일어나는 마음들이다. 이의 실천이 보살도이다. 집착을 떠나 평등하게 남을 보고 나아가서 남을 도와주면서 기뻐하는 마음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바로 열반에 이른 마음에서 일어난다. 자비는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대립을 떠난 절대적인 사랑이요, 희와 사는 너와 나의 대립을 떠난 절대적인 사랑이다. 열반의 세계는 너와 나, 미움과 사랑 등의 대립관념을 초월하여 모든 생명이 다같이 사는 부처님의 마음이다. 이런 사무량심을 닦는 수행자는 벽지불을 넘어서 보살도가 이루어진다.
8. 집착을 떠난 성자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부정관(不淨觀)을 수습하고 애쓰며 노력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 또한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는 무상관(無常觀)을 수습하고 애쓰며 노력하여 머무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좌중에 부정관과 무상관을 닦아 간직하려고 애쓰는 비구가 있음을 찬양한 것이다. 부정관은 우리의 몸이 깨끗하지 않음을 아는 관이다. '깨끗하지 않다'는 '더럽다'의 반대 개념이다. 불교에서는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라 번뇌가 있고 없음에 따라서 더러움과 깨끗함이 나누어진다. 즉 번뇌가 있는 마음을 더럽다고 하고 번뇌가 없는 마음을 깨끗하다고 한다. 그래서 번뇌를 물들은 더러움, 즉 염오심(染汚心)이라고 한다.
번뇌는 우리의 몸에 의해서 생긴다. 그러므로 우리 몸의 구성이나 작용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여 이에 매이지 않게 한다. 이것이 청정이다. 번뇌는 집착이기 때문이다. 몸이 부정하다고 하여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로 이루어지고 인연으로 모여 있으므로 깨끗하다거나 더럽다는 의미를 떠나서 존재한다. 이를 절대적으로 잘못 알고 집착하기 때문에 멋대로 깨끗하다고 생각하여 집착한다. 몸은 이미 고나 낙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깨끗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늙고 병들면 고민에 빠진다. 모든 고는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부정관으로서 깨끗하다는 잘못된 견해를 없애면 그로 인해서 일어나는 고가 없어져 열반에 이르게 된다. 무상관도 이와 같다. 무상관은 우리의 마음을 관찰하여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음은 실체가 없으므로 어떤 것이 나의 마음인지, 어떤 것이 과거, 현재, 미래의 마음인지, 악한 마음인지, 선한 마음인지 알 수 없다.
마음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인연에 따라서 일어나고 없어지므로 걸릴 것이 없다. 움직이며 변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움직여서 열반의 세계로 간다.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五蘊)은 인연에 의해서 생하고 멸하므로 무상이요 고요 무아임을 알면, 적정의 세계 속에서 고를 떠나 낙에 머물고, 무상을 떠나 상에 머물고, 무아를 떠나 참된 나에 머문다. 이것이 열반의 세계이다. 마음에 집착이 없어 번뇌가 일어나지 않으니 고가 있을 수 없다. 고가 없으니 스스로 고요한 적정락이 있게 된다. 이를 무루(無漏)의 낙(樂)이라고 한다.
9. 안반수의 호흡의 요지
비구들이여, 이 비구중 속에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마음을 두는 것을 수습하고 노력하여 머물고 있는 비구가 있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은 비구도 이 비구중 속에 있도다. 비구들이여,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마음을 두는 것을 수습하여 널리 익히면 큰 효과를 얻고 큰 공덕이 있나니라. 여러 비구여, 입출식념을 수습하고 널리 익히면 사념처를 만족하게 한다. 사념처를 수습하고 널리 익히면 칠각지가 원만해진다. 칠각지를 수습하고 널리 익히면 명(明)과 신통과 해탈이 원만해진다.
여기서는 입출식념(入出息念), 곧 아나파나사티 anapanasati를 설한다. 들어오는 숨과 나가는 숨에 마음을 두는 관법을 잘 익히면 몸이나 마음에 곧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미 앞에서도 누누이 말했듯이 몸에 있어서는 생리적인 효과로 산소의 공급과 일산화탄소 등의 배출양이 많아져서 혈액을 깨끗이 할 뿐만 아니라, 모든 기관을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하고, 신경을 안정시켜서 질병의 예방과 치료에 효과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육체적인 효과 외에 더 큰 정신적인 공덕이 있다. 곧 사념처를 원만하게 한다. 어찌하여 그렇게 되는가.
호흡의 나가고 들어옴에 마음이 같이 머물면 몸이나 감수작용, 마음이나 법에 따라서 마음이 끌리지 않으므로 그것과 하나가 되어 고요하고 순일하며 있는 그대로 인연에 따라서 생멸하니 사념처에 원만해진다. 입출식념은 행하고 머물고 눕고 앉음에 항상 마음이 대상과 떠나지 않고 같이 하여 들어오는 숨 속에서 신, 수, 심, 법이 있는 그대로 나와 하나가 되고, 네 가지에 걸리지 않고,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적정인 삼매를 얻어서 심신이 움직이지 않는 속에서 승묘한 법 그대로의 세계에 머문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이 그대로, 있는 그대로 나타나서 즐겁게 머물게 된다.
이것이 사념처의 원만이다. 경에서는 성주(聖住), 범주(梵住), 여래주(如來住)라고도 한다. 이러한 사념처가 원만하게 되면 나아가서 칠각지가 원만히 이루어지고, 칠각지가 잘 익혀지면 명(明), 곧 궁극의 지혜를 얻어서 해탈한다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입출식념을 잘 익히면 지혜를 얻어서 해탈, 곧 열반적정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닦을 것인가. 이에 대한 방법도 상세히 설해진다.
10. 해탈로 가는 호흡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입출식이 수습될 것이며, 어떻게 널리 익혀질 것이며, 어떤 큰 효과와 공덕이 있겠는가. 비구들이여, 여기에 비구가 있는데, 숲으로 가거나 나무 밑으로 가고, 혹은 빈집으로 가서 결가부좌하여 몸을 단정히 하고 생각을 나타내서 머물게 한다. 그러면 실로 생각이 있어서 숨이 들어오고 생각이 있어서 나간다.
혹은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숨을 길게 들어오게 한다.'고 깨달아 알고, 혹은 길게 숨을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나가게 한다.'고 깨달아 알고, 혹은 짧게 입식하여 '나는 짧게 입식한다.'고 깨달아 알고, 혹은 출식하여 '나는 짧게 출식한다.'고 깨달아 알고, '나는 온몸을 깨달아 받으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온몸을 깨달아 받으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온몸을 깨달아 받으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더없이 기쁘게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더없이 기쁘게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집중하여 머물게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집중하여 머물게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해탈케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무상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무상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탐욕을 떠남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탐욕을 떠남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도를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멸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떠나서 나감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떠나서 나감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입출식념을 널리 익히면 큰 효과와 큰 공덕이 있도다.
여기서는 숨을 들어오게 하거나 나가게 하는 것에 마음을 집중하여 마음과 숨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널리 모든 것에 미치게 하는 수련을 닦으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를 '널리 익힌다.'고 했다. 이 경의 장점은 널리 익히는 방법을 설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함경》에서는 이렇게 입출식념이 널리 익혀지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잡아함경》제26의 《아리비타경(阿梨琵咤經)》에서도 이를 설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은 다르다.
이와 같이 널리 익히는 것은 수식, 상수, 지, 관, 환, 정의 여섯 자기 중에서 관(觀)에 해당한다. 관은 집중한 상태로 인체의 모든 것을 관하니, 집중력이 확대된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몸만이 아니라 몸 이외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집중력을 확대할 수 있다. 이러한 수련을 강조한다. 숨에만 정신을 집중하기도 어려운데, 마음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숨이 그에 따라서 길게, 혹은 짧게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각지하기는 더욱 어렵다. 몸을 움직일 때에도 마찬가지다. 가령 뛰면서 숨이 길게 혹은 짧게 나가고 들어옴을 각지하고, 천천히 걷거나 앉아 있어가 누워 있으면서 이렇게 익힌다.
처음에는 고요한 곳에 결가부좌하고 앉아서 익혀야 한다. 숲속이나 나무 밑이 좋다. 혹은 빈 집에 홀로 앉아 결가부좌하고 숨을 길게 혹은 짧게 출입시키면서 정신을 숨에 집중한다. 첫 단계에서는 이런 방법을 행한다. 마음을 고요히 하기 쉽고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여기에서 더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숨의 길고 짧음을 임의대로 자유롭게 하면서 이에 마음이 머물게 한다.
다시 여기에서 몸의 움직임,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지각하면서 호흡한다. 몸의 움직임이 크게 될 수도 있고 고요할 수도 있으나, 이에 따라서 숨의 나가고 들어옴이 같이 따르고 몸의 움직임의 크고 작음이 각지된다. 이것이 뜻대로 이루어지면 다시 나아가서 마음에 나타나는 기쁨이나 즐거움, 또는 괴로움 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출입식에 마음이 머물게 한다. 마음의 집중력이 증장되어 나의 것으로 된 단계이니 환(還)의 단계에서 가능하다. 내 뜻대로 집중되는 것이다.
실제로 마음으로 밖의 모든 것은 것을 감지하거나 감각하면 호흡에 마음이 집중된다. 마음의 집중력이 확대되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온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주체가 되었으니 인연에 따라서 나타난 기쁨이나 즐거움의 감수작용을 마음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 단계가 이른바 견성(見性)이다. 자신의 자성을 보아 내가 확고히 섰으니, 나와 대상은 인연에 따라 상응한다. 이것이 묘적(妙適)이요, 청정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드디어 마음의 움직임을 스스로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그에 끌리지 않게 된다. 마음을 움직일 때든,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힐 때든, 어느 때나 항상 마음의 움직임에 따라서 숨이 조절되고 정신이 이에 머물게 된다. 주와 객이 하나 되어 객체는 없고 주체만이 있는 세계다. 오히려 주체 속에 객체가 섭수되어 하나가 된다.
주체만이 있는 세계다. 오히려 주체 속에 객체가 섭수되어 하나가 된다. 이때는 일체가 나다. 여기에는 더없는 즐거움이 있고, 이 즐거움은 절대적이다.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부동심이나 적정 그대로이니, 삼매 속에서 뛰어난 기쁨(勝喜)을 즐기면서 유희한다. 이것이 적정이니 정(定)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점에만 머물러 즐기면 안 된다.
여기에도 머물러 있지 않고 마음의 자재함을 얻어야 하니, 이것이 해탈이다. 오고 감이 아닌 속에서 자재로이 오고 가야 한다. 머무름이 아닌 속에 머물고, 고요가 아닌 속에 고요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해탈의 세계다. 이러한 세계는 무상한 마음의 움직임 속에서 그 마음에 따라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있다. 들어오는 숨에 집착하지 않으니 들어온 숨이 다시 나가고, 나간 숨이 다시 들어온다. 무상하기 때문에 무상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들어오고 나감이 자연스럽다. 움직이는 대로 따른다. 무상한 마음속에는 무상한 마음의 움직임이 있다. 이 상태가 어디에도 걸림이 없고 집착이 없는 해탈이다.
여기에 이르면 탐욕은 떠나고 고는 멸했으니 어디에도 집착 없는 자재로움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마음가짐을 따라 숨의 나가고 들어옴에 있어서, 즉 숨에 따라서 걸림이 없는 마음이 얻어진다. 여기에서는 마음과 숨이 항상 함께 하면서도 마음의 안온함이 열반을 떠나지 않으니, 여기에 또한 깨달음의 세계가 있다.
11. 신념처(身念處)에 대한 가르침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입출식을 수습하고 널리 익혀서 사념처를 원만케 할 것인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 길게 숨을 들이쉬면서 '나는 길게 입식한다'고 깨달아 알고, 길게 내쉬면서 '나는 길게 내쉰다.'고 깨달아 알고, 혹은 짧게 들이쉬면서 '나는 짧게 입식한다.'고 깨달아 알고, 짧게 내쉬면서 '나는 짧게 내쉰다.'고 깨달아 알고, '나는 온몸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 하고 익히고, '나는 온몸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몸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몸을 따라서 관하면 전일한 정신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것을 몸 속에 있는 모든 몸이라고 부른다. 곧 입출식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그때 비구의 몸에서 몸을 따라서 관하고, 전일한 정진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고 머문다.
몸과 감수작용과 마음과 법의 네 가지를 원만히 깨달아 아는 수행을 할 때 숨의 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하는 방법이 설해진다. 먼저 호흡의 집중만이 아니라 널리 온몸에 미치게 하는 관법이다. 신념처행(身念處行)이다. 호흡 속에서 몸에 마음을 집중하는 이러한 수행을 하면 몸의 부정함을 깨달아 알게 된다.
이 수행은 호흡할 때, 길거나 혹은 짧게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쉬면서 그 숨의 길거나 짧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기본이다. 곧 호흡과 마음이 같이 있게 된다. 이 호흡이 이루어지면 마음을 온몸으로 돌려서 온몸을 각지하면서 의식적으로 숨을 들이마시거나 내쉬는 연습을 한다. 숨의 길고 짧음을 아는 동시에 몸도 각지한다.
이때는 마음이 호흡을 떠나지 않고 몸도 떠나지 않는다. 즉 마음과 호흡과 몸이 하나가 된다. 이와 같이 하여 마음이 몸에 머물러서 몸의 각 부위에 따르게 된다.
이때는 마음이 한결같이 몸과 같이 있으려는 정진이 있고, 이에 따라 몸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생겨 부정함을 알게 되고, 몸의 생과 머뭄과 멸을 두루 생각하게 되어 이에 대한 탐욕이나 근심이 조복된다. 이로써 신념처(身念處)의 행이 원만히 이루어진다.
이때의 내 몸은 몸 속에 머물고 있는 나와 더불어 같이 한몸이다. '나'는 속에 있는 나의 몸이다 .나의 주체인 참된 나, 나의 주체인 주인으로서의 '나'는 속에 있는 나의 몸이다. 이 주체적인 나는 바로 입출식이다. 바로 '나'란 존재가 입출식을 있게 한다. 이렇게 되면 호흡이 바로 내가 된다. 나는 호흡이요,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이 나의 삶이다. '호흡이 곧 나'라는 자각에 이르러서 참된 신념처의 원만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가 닦아진다.
몸에 대한 수행은 마음이 몸의 각 부위에 머물고 , 다시 몸의 움직임의 크고 작음에 머물러서 호흡이 떠나지 않게 하는 수행이다. 이것이 이루어지면 몸에 대한 집착이나 탐욕, 근심이 없어진다. 몸의 부정함을 올바르게 알기 때문이다.
12. 수념처(受念處)에 대한 가르침
비구들이여, 비구가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기쁨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즐거움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숨을 들이쉬리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히 하여 숨을 내쉬리라.'하고 익힌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모든 받아들임에 있어서 받아들임을 따라서 관하면 그때 전일한 정진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그것을 모든 받아들임 속의 받아들임이라고 부른다. 곧 모든 입출식에 마음을 잘 쓴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모든 받아들임에 있어 받아들임을 따라 관하면서 그때에 전일하게 정진하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수념처행(受念處行)의 가르침이다. 여기서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숨의 들어오고 나감이 우리의 감수작용, 곧 기쁨이나 즐거움 등과 같이 하여 그것을 깨달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숨의 출입에 따라서 마음속에 기쁨이나 즐거움이 받아들여졌다면, 그 기쁨이나 즐거움은 즐거움도, 기쁨도 아님을 알게 된다.
경에서의 '모든 받아들임에 있어서 받아들임을 따라 관하면서'는 모든 감수작용을 감수되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호흡이 같이 행해지는 것이다. 이때 받아들여진 그 감수작용은 고요한 마음에 비친 직간의 힘에 의해서 달라진다. 즐거움이나 기쁨이 느껴진 그대로가 아님을 알게 된다. 이것이 올바른 앎이다. 그러므로 이에 탐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경에서 '세간에 있어서의 탐욕이나 근심이 조복된다.'고 했다. 세간적인 탐욕이나 근심은 받아들이는 느낌 그대로이다.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정신이 집중되어 그것의 길고 짧음을 깨달아서 아는 마음은 이미 세간을 떠난 마음이다. 항상 흔들리고 집착하는 마음이 세간이기 때문이다. 호흡에 생각이 같이 따라서 고요함과 움직이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이 되었을 때의 감수작용은 기쁨이나 즐거움이면서도 세간적인 차원을 떠나 새로운 가치를 지닌다. 이것이 도이다.
그래서 경에서 '나는 그것을 받아들임 속에 있는 받아들임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일반적인 감수작용과는 차원이 다른 절대적인 기쁨과 즐거움이다. 감수작용인 수(受)는 수이면서 앞의 수와는 다르다. 세간적인 수가 아니라 출세간적인 수이다. 속(俗)으로서의 수이면서 진(眞)인 수이다.
이때는 속의 수가 진의 수로 바뀌었으니 어찌 근심이나 탐욕이 있으랴. 기쁨이나 즐거움이 기쁨이며 즐거움이면서도 그에 탐착하지 않고, 없어져도 근심하지 않는다.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에 따라서 그런 마음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이다. 근심과 탐욕이 따르는 수를 부정하고 다른 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앞의 수가 바뀌는 것이다. 곧 조복이다. 앞의 수와 뒤의 수는 서로 떠나지 않으면서 앞의 수가 뒤의 수로 바뀐다. 이를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했다. 이때서야 비로소 올바른 앎이 있고 한결같은 정진이 있으며 인연법을 생각하여 떠나지 않는 억념(憶念)이 있다.
13. 심념처(心念處)에 대한 가르침
비구들이여, 때에 다라서 '나는 마음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깨달아 받아들이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지극히 기쁘게 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지극히 기쁘게 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고정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고정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해탈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마음을 해탈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힌다. 이와 같이 마음을 따라서 관하면 그때에 비구여, 전일한 정진과 올바른 앎과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나는 생각함을 잃거나 옳지 않은 앎이 있는 입출식념의 수습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마음을 따라서 관하면 전일한 정진과 올바른 앎,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해설] 마음을 따라서 관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마음은 항상 움직이면서 변하므로 무상하다. 마음은 마치 숨의 들어오고 나감과 같이 항상 움직이면서 생과 멸을 되풀이한다. 마음의 실상은 호흡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마음과 호흡이 하나가 된 세계에서는 호흡의 출입식이 무상하면 마음도 무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호흡의 무상함을 알면 마음의 무상함도 알게 된다. 마음은 볼 수도 없고 만질수도 없지만 분명히 움직이고 있다. 마음과 호흡이 같이 하고 있을 때에는 마음도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이 마음을 깨달아서 아는 것은 관이라고 한다.
마음은 이처럼 실체가 없으면서도 있으며 항상 움직이고 있다. 마음에는 기쁨이 있고 고정된 적정의 상태와 해탈도 있다. 이와 반대로 마음에는 괴로움과 산란함도 있으며 집착의 매임도 있다. 마음의 실상을 알면 마음의 본래 상태가 기쁨이고 적정이며 해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잘못되었을 때는 괴롭고 산란해지며 집착에 매인다.
그러므로 수행은 본래의 마음을 찾는 것이다. 흔히 본래의 마음은 청정하다고 한다. 청정은 곧 기쁨이요 적정이며 해탈이다. 마음의 조복과 신심이 청정이라고 말해진다. 번뇌가 조복되고 고가 없으니 기쁨이요, 무루(無漏)의 본심에 돌아왔으니 적정이요, 다시는 윤회에 들지 않으니 해탈이다.
마음은 몸을 떠나서 있을 수 없다. 몸이 호흡을 떠나서 있을 수 없듯이, 그러므로 호흡과 마음이 청정한 세계에 머물면 열반이다. 호흡은 몸을 건강하게 할 뿐만 아니라 마음도 안정시킨다. 마음의 안정은 이런 기쁨이나 적정, 해탈에 이르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 일시적인 안정은 안정이 아니다. 호흡이 나를 떠나지 않고 마음이 나를 떠나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이런 세계로 나가게 된다.
그래서 《안반수의경》에서는 자신으로 돌아온 환(還)에서 정(淨)으로 나간다고 했다. 환이란 주체의 확립이다. 주체가 확립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주와 객이 둘이 아닌 세계로 나가게 된다. 무아는 확립된 주체를 통해서 주체가 객체와 하나가 되어 주와 객을 나눌 수 없는 상태에 이른 주와 객이 자재롭게 조화되는 세계이다. 무아는 주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무아(無我)는 무심(無心)이다. 무심은 뛰어난 기쁨이 있고 고요함 속에 머물러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다.
14. 법념처(法念處)에 대한 가르침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는 '나는 무상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무상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탐욕이 떠나는 것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탐욕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멸을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멸을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출리(出離)를 따라 관하면서 입식하겠노라.'하고 익히고, '나는 출리를 따라 관하면서 출식하겠노라.'하고 익힌다. 이와 같이 제법에 있어서 법을 따라 관하면서 비구들이여, 그때는 전일하게 정진함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탐욕과 근심을 끊었음을 지혜로써 보고 잘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비구들이여, 제법에 있어서 법을 따라서 관하면 그때는 전일한 정진이 있고,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입출식을 수습하고 널리 익혀서 사념처를 원만하게 하나니라.
법념처(法念處)에 대한 교설이다. 법념처는 모든 사물이 실체가 없음을 관하여 아는 것이니, 실체가 없다는 무아(無我)는 곧 무상(無常)이다 .무상이기 때문에 무아요, 무아이기 때문에 무상이다. 형상으로 나타나는 작용으로 보면 무상이요, 그 본체로 보면 무아이다.
무상이며 무아인 제법은 결국 열반으로 간다. 이것이 공(空)이다. 공은 용수(龍樹)가 말했듯이 세 가지로 나뉜다. 연기의 도리 그대로 실현된 공성(空性)sunyatayam bbuta과 연기의 도리 그대로 희론이 적멸되는 공용(空用)sunyatayam prayojanam과 연기의 도리로 세간의 모습을 나타내는 공의(空義)sunyatayam artba이다. 공성은 곧 열반적정(涅槃寂靜)이요, 공용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며, 공의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일체개고(一切皆苦)이다 무아로서의 제법이 세간적 시설(施設)인 세속의 법으로 존재한다. 이는 또한 고(苦)로서 잇는 것이다.
모든 사물을 대할 때에 이렇게 관하면 올바른 앎이 있을 뿐 탐착이나 근심이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법념처의 수습도 숨의 입출 속에서 행해진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법이기 때문이다.
15. 칠각지(七覺支)에 대한 가르침
그러면 비구들이여, 어떻게 사념처를 수습하고 널리 익혀서 칠각지(七覺支)를 원만하게 할 것인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의 몸으로 몸을 따라 관하면서 전일하게 정진함과 올바른 앎이 있고, 생각함이 있고, 세간에 있어서의 탐욕과 근심을 조복하여 머물면 그때는 생각이 세워져서 없어지지 않을 때 염등각지(念等覺支)를 수습하면 원만하게 수습된다. 이와 같이 생각이 있어서 머물면서 저 법을 지혜로서 살펴서 보고, 살펴서 알아 두루 생각하게 된다.
사념처를 수습하여 칠각지를 원만하게 하는 방법을 설한다. 칠각지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7종의 행법으로 불도를 수행하는 방법이다. 이 중에서 먼저 염각지(念覺支)를 수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염각지는 염등각지라고도 하는데 불도를 수행함에 있어서 항상 잘 생각하여 마음이 적정에 머물고 지혜가 밝게 나타나게 한다.
실제로 이런 수행은 생각을 일으켜서 한결같이 바르게 서게 한다. 먼저 몸을 따라 관하여 이에 머물러 몸에 대한 올바른 앎이 이루어지고 탐욕과 근심 등이 조복되어 머문다. 이때 마음을 세워서 잊지 않고 머물게 하고, 생각이 떠나지 않게 하여 잊지 않으면 염등각지를 닦는 행법이 된다. 이러한 염등각지를 닦아서 생각이 끝내 잊혀지지 않으면 염등각지가 원만히 이루어진다.
염등각지는 생각이 깨달음을 떠나지 않고 한결같이 머무는 수행이다. 이를 수행하려면 먼저 마음을 일으켜야 하고 마음을 일으키려면 몸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이 몸에 머물게 해야 한다. 생각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머무르면 마음이 세워진 것이니, 이 마음을 굳게 하여 한결같이 머무르게 하면 염등각지가 이루어진다. 경에서는 '몸에 있어서 몸을 따라 관하여 전일하게 정진한다.'고 했다. 방편으로 염등각지를 닦은 것이다. 염등각지를 닦으면 몸이나 마음의 실상을 지혜로 살펴서 올바르게 알게 된다.
이를 염등각지의 원만이라고 한다. 그러나 《대지도론》에서는 '보살은 일체법에 있어서 생각하지도 않고 억념하지 않으니, 이것이 염각분이다.'라고 했다. 진정한 염각지는 생각을 일으켜서 한결같이 머물게 하나 진실로는 그 생각이 있으면서 없으므로 생각하지 않고 억념하지 않는 속에 한결같은 생각이 세워져 있다고 하겠다.
16. 사물을 두루 바르게 분별하는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이와 같이 생각이 머물면서 저 법을 지혜로 자세히 살피고 자세히 알고 두루 생각하면 택법등각지가 부지런히 행해진다. 그때에 비구가 택법등각지를 수습하면 택법등각지가 수습되어 원만해진다.
택법등각지, 곧 택법각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택법각지란 제법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깨달아 아는 수행이다. 이 수행을 하려면 먼저 어떤 사물에 마음을 집중하여 한결같이 머물러야 한다. 그러면 사물을 자세히 살필 수 있게 되고, 알게 되며, 그 사물의 생멸이나 변화를 두루 살펴 분별하는 힘이 생긴다. 그러면 제법을 분별하여 실상을 깨달아서 아는 수행이 행해지고 택법등각지가 행해진다.
택법등각지를 잘 행하면 제법의 올바른 분별이 이루어지고 사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얻어지며 그릇된 집착이 없어진다. 이것이 택법등각지의 원만이다. 다시 말해 칠각지 중의 택법등각지는 바른 법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한결같이 깨달아서 아는 수행이다. 이를 정구제법각의(精求諸法覺意)라고도 하며 한결같이 정성껏 구하여 제법을 분별하고 깨달아서 아는 마음이 된다.
용수는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이를 '일체법 중에서 선법, 불선법, 무기법(無記法)을 잘 살펴서 알려고 하나 얻을 수 없다. 이를 택법각분이라 한다.'고 했다. 제법을 올바르게 분별하여 깨달아서 안다고 하나, 결국 선법도 없고, 불선법도 없고, 무기법도 없어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비로소 택법각지가 원만해진다.
17. 몸과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저 법을 지혜로서 살펴 자세히 알고, 두루 사유하기 위해서 집착 없이 부지런히 정진을 닦으면, 정진등각지(精進等覺支)가 부지런히 닦여져서 그때 비로소 비구는 정진등각지를 수습하여 원만해진다.
[해설] 내 몸이 부정하고 내 마음이 무상하며 일체의 사물이 실체가 없이 인연에 따라서 생멸을 거듭하니, 영원한 존재가 어디 있으며 절대적인 존재 또한 어디 있으랴. 이러한 나와 세상을 알면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이 목숨, 저 일체 사물의 순간적인 존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다시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찌 세월을 허송할 것이며, 이 목숨을 가벼이 생각할 수 있으랴. 오늘 이 삶은 과거 무량한 삶의 연장이요, 영원한 미래로 이어질 삶이다. 그렇기에 더없이 고귀하고 존엄하다.
삶의 완성을 위해 부지런히 닦아 소원을 이루려면 몸과 마음이 흔들리지 않게 노력해야 한다. 이런 노력의 과정에서 사물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얻어 비로소 견고해진다. 생명의 무상함을 알지 않고서는 마음을 한결같이 굳게 정진하지 못한다. 심신이 견고해야 정진이 이루어진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면 안 된다. 일체의 법이 실체가 없어 연기의 법에 따라서 상이 상이 아님을 알면 그 때 정진등각지가 이루어진다.
깨달음을 얻어서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지런히 정진등각지를 행해야 한다. 정진 없이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정진은 선에 대한 노력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을 분별하여 선과 악을 분별하면 선으로 나아가게 되고, 선을 알면 선을 향해 나가려는 노력이 있게 되니, 이것이 정진등각지다.
윤회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선을 행해야 하며, 세간의 달콤한 맛에 끌려서 탐착하면 게을러진다. 게을러지면 마음과 몸이 헤이해져 견고하게 유지되지 않는다. 죽음을 소관하는 염라대왕 yama의 감시를 받는 우리가 어찌 음락이나 식락의 즐거움에 빠져있을 수 있겠는가. 정진은 택법등각지의 원만에서 비롯된다. 택법각지가 원만히 된 자에게서 집착 없는 정진이 있다. 그래서 경에서 '저 법을 지혜로서 자세히 관찰하고 자세히 알아서 두루 사유하기 위해서 걸림 없는 자의 정진이 행해지면 정진등각지가 있게 된다.'고 하였다.
18. 집착 없는 기쁨을 얻는 경지
한결같이 정진에 애써 노력한 사람에게는 집착 없는 기쁨이 생한다.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정진에 애쓴 비구에게 집착없는 기쁨이 생하면 희등각지(喜等覺支)가 정근되고 그때 비구가 희등각지를 수습하여 원만해진다. 기쁨에 몸도 평안하고 마음도 고요하다.
기쁨이 한결같이 간직되는 희등각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희등각지는 마음에서 기쁨이 솟아나 바라는 바가 얻어진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노력하여 마음속에서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기쁨이 솟아나는 것이다. 이때는 마음도 적정의 즐거움을 느끼고 몸도 평안하여 근심이나 기쁨의 상이 없어지고, 일체의 작법에서 얻어지는 즐거움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이 기쁨은 인연에 의해서 생했기 때문에 행하는 모든 일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일 집착이 생한다면 이는 무상에 집착한 것이다. 무상에 집착하면 그것이 무너졌을 때 근심이나 고통이 생긴다. 범부는 전도된 망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무엇인가에 집착한다. 상(常)에도 집착하지 않고 무상(無常)에도 집착하지 않는 그런 기쁨을 깨닫는 것이 희등각지다. 도를 닦는 자는 깨달음에 이르는 수도 중에 각 단계의 뛰어난 세계에서 진리를 깨닫고 기쁨을 맛본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진리를 관해 즐긴다. 마치 사람이 땅을 파서 물을 보고 기뻐하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물이 보이기 시작하면 기뻐하며 더 깊이 파들어간다. 즉 기쁨이 나타남으로써 더욱 즐겨 깊게 파들어간다. 더 팔 필요 없이 깊게 파면 거기에서 감미로운 물을 마실 수 있다. 희등각지는 정진각지 다음의 4단계에서 얻어지는 세계다. 희등각지에서 얻어지는 집착 없는 기쁨은 다음 단계인 경안등각지(輕安等覺支)를 수습하게 한다.
19. 심신이 경쾌하고 안온해지는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기쁨을 얻어서 몸도 평안하고 마음도 고요하면 그때 비구가 경안등각지(輕安等覺支)를 닦아서 수습하여 원만하게 된다. 몸이 평안하고 마음이 안온하여 안락하게 된 자는 마음이 안정된다.
[해설] 마음에 기쁨이 솟아서 수행이 더욱 정진되면 심신이 유순하게 쉬게 된다. 즉 경안등각지의 단계에 이른다. 이 단계에서는 몸과 마음이 경쾌하고 평안하여 마음에 나타나는 모든 인연을 떠나 어떤 것도 얻음이 없다. 그래서 제각지(除覺支)라고도 한다. 이때 느끼는 경쾌한 깨달음은 다시 몸과 마음을 안정되게 한다. 몸과 마음의 안정이 극치에 이르면 삼매를 얻게 된다. 따라서 경에서 '몸이 평안하고 마음이 안온하여 안락하게 된 자는 마음이 안정된다.'고 했다. 마음의 안정이란 정(定)이니 삼매이다. 정은 몸과 마음의 안정이 극치에 이르러서 흩어짐이 없고 한결같이 고요하다.
20. 마음이 고요한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에게서 몸이 경안하고 마음이 안쾌하여 마음이 고요하면 그때 비구가 정등각지(定等覺支)를 닦아서 수습하여 원만하게 된다. 이와 같이 적정에 든 마음을 잘 관찰하여 깨닫는다.
마음의 적정(寂靜)이 극치에 이르면 정(定)이 된다. 바로 삼매(三昧)이다. 정에 들어가면 일체의 사물에 집착함이 없고 의지할 바가 없으며 오직 고요한 마음만이 빛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린 세계라 하여 사등각지(捨等覺支)라고 한다. 이때는 마음이 고요 속에서 일체의 사물을 집착 없이 관찰할 뿐이다. 사등각지는 마음이 고요한 정등각지가 잘 수습된 단계이다. 마음의 적정 속에서 생각하고 보고 움직이면서도 한결같이 고요한 상태가 등(等)이다. 정등각지는 정이 평등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단계이다. 언제 어디서나, 또는 어떤 것에 있어서나 적정 그대로 있음을 스스로 깨달아 안다.
21.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경지
비구들이여, 때에 따라서 비구가 이와 같이 마음의 고요함을 잘 관찰하여 사등각지(捨等覺支)를 닦아서 익힌다. 그때야 비로소 사등각지가 원만하게 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사념처를 수습하고 널리 닦으면 칠각지를 원만히 하나니라.
모든 집착과 의지할 바가 없이 마음에서 모든 것이 버려진 단계인 사등각지에 대한 가르침이다. 사등각지는 마음이 고요함의 극치에이르러서 얻어지는 세계다. 집착이 없고 의지할 곳이 없이 모두를 버렸다고 하나 그 버린 마음도 보지 않는다. 버렸다는 생각이 있으면 버린 것이 아니다.
사등각지에서는 일체법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우고 비웠다는 마음조차 보지 말아야 한다. 이때야 비로소 음심이나 노여움이나 어리석음의 때가 없어졌음을 스스로 알게 되고, 뜻하는 깨달음의 세계가 나타났으니 나 자신을 찾은 것이요, 나를 수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호각지(護覺支)라고도 한다. 이와 같이 사념처(四念處)의 원만한 수습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나 사의단(四意斷), 사신족(四神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등이 널리 닦아져서 원만하게 된다.
그러면 어찌하여 이와 같은 삼십칠도품이 설해지는가. 보살은 이들을 모두 공(空)이라고 관한다. 37종의 수행은 바로 공의 세계이다. 공의 세계를 알고 증득하면 모든 희론(戱論)이 멸하여 해탈에 이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무상관, 고관, 무아관, 생멸관, 불생불멸관, 유관, 무관, 비유비무관 등.... 일체의 집착이 없어진다. 연기의 법은 무상(無常), 무연(無緣), 무작(無作), 무희론(無喜論)으로서 항상 적멸하여 참된 법의 모습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을 설하여 무상도 희론임을 알게 하고, 고를 설하여 고와 낙이 희론임을 알게 하고, 무아를 설하여 유와 무가 모두 희론임을 알게 하고, 생과 멸을 통해서 불생과 불멸을 알게 하고, 유와 무,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님을 설하여 모두 희론임을 알게 하기 위해서 37종의 도행을 설했다. 그러므로 삼십칠도행의 수습은 바로 깨달음의 세계인 인연을 알고 인연법을 따라서 열반의 즐거움에 머물게 하고자 하는 붓다의 자비심에 의해서 설해진 것이다.
22. 해탈을 향하여
그러면 비구들이여, 칠각지를 어떻게 닦아 익히고, 어떻게 널리 닦으면 지혜와 해탈을 원만하게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비구들이여, (고를) 떠남과 탐심과 (고의) 멸에 의해 버리고 떠나는 곳으로 향해 가는 염등각지(念等覺支)를 닦아서 익히고, 택법각지(擇法覺支)를 닦아서 익히고, ..... 내지 ...... 정진등각지(精進等覺支)를 닦아서 익히고, ... 내지 ....... 희등각지(喜等覺支)를 닦아서 익히고, ...... 내지 .....(고를) 떠남과 탐심과 (고의) 멸에 의해서, 버리고 떠나는 곳으로 향해서 가는 사등각지(捨等覺支)를 닦고 익힌다. 비구들이여, 칠각지를 이와 같이 닦고 익히면 지혜와 해탈을 원만하게 하나니라. 세존께서 이처럼 말씀하셨다. 비구들은 세존의 설법을 따라 기뻐하며 받들었다.
이상에서 설한 칠각지를 어떻게 익혀서 지혜와 해탈을 얻게 되는가를 다시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사념처로부터 칠각지에 이르는 수행을 가르쳤으며 마지막으로 칠각지가 닦아지면 지혜와 해탈의 세계에 이른다고 강조했다.
원시불교 경전에 속하는 이 경에서는 스스로를 등명으로 삼고 자기 자신의 진실인 법에 귀의하여 게으르지 않게 스스로 닦아서 행하라고 가르쳤다. 여기에 설해지고 있는 37종은 서로 다르면서도 떠나지 않으니 하나가 원만히 닦아지면 다른 것도 원만히 닦아진다. 계(戒), 정(定), 혜(慧)의 세 가지는 한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6년 고행을 버리고 즐거운 길을 택한 붓다는 우리의 한마음을 이렇게 설했다.
'나는 안락함에 의해서 이 안락함을 얻었노라.'고 했으니 붓다의 수행은 안락하고 즐거운 길이며 어떤 극단이 아닌 중도(中道)의 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붓다는 최초의 설법인 《전법륜경(轉法輪經)》에서 팔정도(八正道)를 설했으나 열반에 들기 직전에는 《삼십칠도품경(三十七道品經)》을 설했다고 한다.
"비구들이여, 이제까지 말한 내가 얻은 법을 너희들은 모두 잘 가지고 행하여 고요히 생각하고 널리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법은 '삼십칠도품'이니라." (《잡아함》의 《유행경》)고 했다. 초전법륜에서는 팔성도만을 설했고 입멸 직전에는 사념처 등 29종의 행법을 더 설한 것이다. 이 29종은 붓다가 때와 장소와 근기에 따라서 분류하여 스스로 실행하고 남에게도 실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설한 것이니 이들의 행법은 팔저도로 들어간다. 그러므로 팔정도를 나누어서 설하면 37도품이 되고, 37도품을 집약하면 팔정도가 된다. 그리고 다시 이들은 모두 계, 정, 혜의 세 가지로 섭수된다.
여기서 번역하여 해설한 《남전대장경》에 있는 《아나파나사티 숫타》에는 팔정도가 설해져 있지 않다. 이로 보아 이 경전은 붓다가 입멸하기 직전에 비구들에게 설한 모든 가르침을 요약하고, 수행 방법과 목표를 간결하게 보인 것이라고 하겠다. 이 경전이 《아나파나사티 숫타》라고 되어 있듯이 호흡의 들어오고 나감 속에서 이들 29종의 수행이 이루어짐을 가르친 것이다.
실로 부정관을 닦아서 탐욕을 끊고, 사무량심을 닦아서 노여움을 끊고, 무상관을 닦아서 아만을 끊고, '아나파나사티'를 닦아서 무념무상의 세계로 들어가서 일체의 의식에 매인 각상(覺想)을 끊는다. 의식이 숨의 나감에 따라서 멸하고 숨의 들어옴에 따라 일어나서 무념무상으로 이어지게 되면 여기에 열반적정의 즐거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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