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중심교리와 선정수행의 제문제
- 화두선 전통과의 교두보 확보를 위하여
(불교학연구 8호)
조준호(동국대 강사)
Ⅰ. 들어가는 말
초기불교의 수행론의 논의에 있어 필자가 특히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은 Vipassanā(이하 Vs로
약호)와 화두선과의 연결고리를 확보해보자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은 2000년 한 졸고의 결론의 마지막 단락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1) 이는 화두선 전통의 불교권에 초기불교 연구라는 필자의 오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이후 필자의 이러한 의도와는 다른 Vs 이해가 구체적으로 정리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기본적으로 제사선(4선) 이후야말로 본격적인 위빠사나 수행이 가능하다는 필자의 주장에 반해‘초선 이전부터’또는‘초선에서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라거나, 아니면 ‘처음 시작부터 관(觀)’은 물론 극단적으로 ‘선정의 바탕 없이 위빠사나’까지 가능하다는 입장들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결국 필자가 처음 의도한 Vs와 화두선과의 연결고리 확보라는 차원은 재검토할 처지에 이른 것이다.
1) 조준호,「초기불교에 있어 止 ․ 觀의 문제」,『한국선학』 제 1 호(서울 : 한국선학회,
2000), 355-356쪽
따라서 본고는 그동안 필자의 입장과 다른 몇몇 주장들에 대한 재반론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한 가운데 초기불교의 근본적인 의미의 Vs 수행론에 대한 재검토와 함께 그 동안 다른 연구자에 의해 Vs와 화두선간의 격차가 강화되거나 확대된 교리적 맥락을 다시 좁히기 위한 것이 또 하나의 목적이다.
Ⅱ. 불교 본래의 선정 개념은 ‘몰입(沒入) 개념’이 아니다
초기경전의 일반적인 분위기는 선정 단계가 높아질수록 Vs 또한 완성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후대 인도불교 선정사에 있어 선정을 ‘몰입(沒入)’개념으로 초점이 맞추어져 오히려 일점(一點)으로의 높은 몰입 수준이 될 때 상대적으로 인식의 폭은 줄어든다는 식의 삼매개념과 대조된다. 불교에 있어 선정 수행은 불교교리의 뿌리이며 핵심이다. 실천 수행론의 설명이 다름 아닌 교리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선정 수행론과 초기불교 전반적인 교리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 비추어 볼 때 초기불교의 선정 사상은 후대의 선정 사상과 그리고 다른 인도 종교의 선정론과 크게 대비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 선정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참된 진리 인식의 문제에 놓여 있다. 그러한 진리 인식을 통해 존재와 사물의 왜곡으로 기인하는 고통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다.
그리고 모든 초기불교 수행의 압축적인 한 마디의 귀결은 바로 Vs라는 관(觀)이라는 말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불교 교리사에 있어 관이 가장 중요한 단어로 부상한 것이다. 관은 ‘진리의 다른 표현인 여실에 대한 지견’이다. 다시 말해, 올바른 선정 수행의 방향은 진리의 관찰 즉 여실지견으로 향해 있는 점에 초점이 모아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선정 사상이 본래의 취지에 맞추어져 강조되는 것으로만 전승되었다기보다는 상당히 일탈한 측면이 또한 없지 않았다. 그러한 측면은 이미 초기 불교 경전에 그 맹아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Pāli본의 Mahāparinibbāna Suttanta(이하 Mpn로 약호)이나 그에 대응경전인 한역 『유행경』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다음 양전을 정리 해 보면 아래과 같다.
반열반에 즈음해서 붓다는 꾸시나가라에서 빠와로 향하는 말라족 출신의 뿟꾸사를 만난다. 뿟꾸사는 수하좌한 붓다에게 예를 올리고 출가자의 청정한 덕을 칭송한 후 바로 자신은 알라라 깔라마의 제자임을 밝힌다. 그리고 예전에 자신의 스승은 꾸시나가라성과 빠와성 중간쯤 되는 길가 나무 밑에서 선정에 들어 있었는데 마침 오백 대의 수레가 우루루 소리를 내며 그 곁을 지나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오백 대의 수레를 듣거나 보지도 못했다. 다만 다른 사람이 와서 이 사실을 물으니 전혀 알지 못했다 하자 잠을 자지 않았느냐고 묻지만 결국 상의에 튀긴 흙탕물을 보고 잠자지 않고 좌선해 있었음을 알고 깊은 존경을 표했으며 자신 또한 그러한 스승에 깊이 존경한다고 말한다. 이에 붓다는 뿟꾸사에게 다음과 같은 자신의 체험을 말해준다. 한 때 선정 수행 시에 소나기가 쏟아지고 천둥번개가 천지를 진동하면서 벼락이 쳐 네 마리 황소와 두 농부형제가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여들고 그 중에 한 명이 다가와 예를 올리자 붓다는 왜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놀라며 천지를 진동한 천둥번개 소리를 듣지 못하였느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붓다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고 하니, 다시 자고 있었느냐고 묻자 자지 않고 선정에 들어 있었다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알라라 깔라마의 제자인 뿟꾸사에게 하면서 어느 것이 더 높은 경지인지 비교해 보라 한다. 결과는 알라라 깔라마에 대한 존경심은 태풍 속의 먼지처럼, 급류 속의 나뭇잎처럼 날아가 버렸다 한다. 그리고 이 같은 희유한 일에 그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붓다에게 존경을 표하
고 떠나갔다는 이야기이다.2)
2) DN ii, 130-133쪽
아마 이 경전의 이야기는 MN의 Māratajjaniya Sutta(Sutta는 이후 경으로 옮김)의 내용과 함께 인도 불교 선정사에서 ‘몰입 선정’의 도입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늦은 논서인 Vism 나
Nikāya의 주석서에서 가서는 이러한 경향이 좀더 자연스러운 또는 과장된 형태로 정착되기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장로가 숲 속에서 멸진정의 선정에 들어 있었는데 소치는 사람 등의 여러 사람은 그를 이미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비(茶毘)를 붙이고 떠났다. 그런데 그 다음날 놀랍게도 마을로 탁발 나온 그를 보고 모두 대단히 놀라워했다. 즉 장로 주위에 장작과 풀등을 쌓고 불을 붙였으나 장로의 몸은 물론 법의도 불에 타지 않고 멸진정에서 깨어나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는 것이다.3)
3) MN i, 333-334쪽; Vism, 380쪽, 그리고 Vism 706쪽 등의 논서와 주석서에도 나타난다.
이 두 가지 이야기 가운데 Mpn에서 재미있는 것은 먼저 붓다와 관련된 몰입선정은 알라라 깔라마의 제자를 통해 나타난다는 점이다. 붓다 자신 또한 한 때 알라라 깔라마의 지도를 받았다 사실로 볼 때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은 불교 외의 선정은 주로 몰입에 초점을 맞춘 것임을 시사한다. 예를 들면, 바라문들에 있어 모든 감각기관을 차단하는 무감각한 경지를 자랑삼는 것을 붓다는 봉사나 귀머거리와 무엇이 다를 바 있냐고 비판하며 대신에 육근의 정화를 시설하는 경전의 맥락에서도 반증된다.4) 초기 자이나교의 선정 사상에서도 모든 기관을 제어하여 일정한 장소에서 더 이상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몸과 마음을 점증적으로 통어하는 것과 같은 철저한 ‘부동(不動)의 삼매론’과 비교해 보아도 통하는 바가 있다.5) 따라서 이러한 이야기의 처음 의도는 불교 이외의 다른 인도 종교에서 말하는 몰입 수준 또한 붓다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4) MN iii. 298-302쪽
5) 특히 초기 자이나교 경전의 Ayarang Sutta 223게와 특히 242게의 맥락, 그리고
Uttarajjhayana Sutta 29.72에서 불교와 달리 신행을 마지막에 두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전혀 다른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멸진정에 들면 앞의 장로의 몰입 정도에서처럼 의식 활동이 완전히 멈추어 있고, 호흡도 끊기고, 체온도 내려간 일종의 동면상태나 죽음에 이르기 직전의 빈사상태와 비슷하게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멸진정에 들면 어떠한 외부적인 영향이나 해도 입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불에 타지도 않는다는 물론 화상도 입지 않으며 심지어는 불이 났는지조차 모른다는 식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식의 선정을 멸진정의 상태로 보았으며 열반을 성취하기 직전의 상태라는 점에서 이러한 경지에로의 지향이야말로 마치 불교 선정의 방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오해하게끔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선정은 초기불교 전반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이질적이다. 극히 일부의 한정된 경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물론 석가모니 직제자들의 이야기로는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몰입 수준의 선정은 좌선의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으며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문제는 초기불교의 본래의 입장은 이러한 식의 선정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는 점을확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식의 선정론이 마치 불교 본래적인 또는 근본적인 입장이라도 되는 듯이 침입하여 자리 잡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에 따르면 이는 몇몇 초기경전에서 멸진정이 죽음에 비견되어 설명되는 것에 대한 비약적 전개이다. 멸진정을 말하는 경전에서 멸진정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총괄하는 신구의와 같은 삼행이 쉰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에 따른 질문으로 그렇다면 죽음과 어떤 차이가 있느냐이다. 이에 대한 답은 멸진정(상수멸정)과 죽음의 차이에 있어 죽음은 삼행의 쉼으로 ‘생명(Āyu)’이 이미 끝나고 ‘열기(Usmā)’ 또한 없으며 그리고 ‘모든 근(indriyāni)’이 허물어진 것이다. 반면에 멸진정은 삼행이 쉬지만 생명은 끝나지 않았고 열기 또한 있으며 그리고 모든 근이 허물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설명된다. 더 나아가 빠알리경은 한역 아함경과 달리 하나 더 수식하는 설명이 따라 붙는데 그것은 멸진정의 세 번째 ‘모든 근이 허물어지지 않고’‘지극히 투명해진 청정 상태(indriyāni vippasannāni)’라는 것이다. 그리고 Mpn에서는 붓다의 입멸 시와 관련하여 멸진정 상태에서는 마치 호흡이 완전히 정지되는 것처럼 여기게끔 하는 구절이 부가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6)
6) DN ii, 157쪽
하지만 같은 열반경 계통의 한역 대응경인 『유행경』에서는 이 구절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후대 부가를 의심하게 한다. 초기경전에 나타나는 멸진정에 관한 대략적인 설명은 이러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멸진정의 본래 의미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전혀 알 수 없는 몰입개념의 선정이 함의되어 있었다고 볼 수 없다. 다만 이렇게 죽음과 비견되는 이유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삼행의 쉼에 대한 비약적 전개에 따른 것이다. 때문
에 삼행을 시작으로 하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경전에 이미 밝히고 있듯이‘멸진정의 경지란’ 제행이 쉬어 정화된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사선에서 볼 수 있듯이 단계적인 행(조작심)의 쉼으로 대단한 수준으로 적정해진, 그야말로 고요함의 극치를 이룬 신심의 상태로서 모든 감각 기관이 지극히 투명해진 상태를 말할 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멸진정은 제사선의 연장이나 발전 또는 확장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초기불교경전에서 멸진정의 관한 구체적인 설명은 붓다의 직설로 나타나기 보다는 주로 제자들 간의 문답으로 한정되어 나타난다는 점이 이채롭다. 또한 Mahāvedalla 경과 Cūḷavedalla 경에서 볼 수 있듯이 멸진정의 설명은 상당히 아비담마적 분위기까지 베어 있는 것은 죽음과 비견된 이야기로서 상대적으로 다소 늦은 시기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7) 이에 반해 이른 층의 초기 경전에서 멸진정은 예를 들면, Suttanipāta에서 ‘수의 지멸(vedanākkhaya)’8)나 ‘상(想)의 지멸’9)로부터 고의 지멸을 이룰 수 있다는 가르침으로 간단하게 나타난다. 다시 말해, 상수멸의 상태란 오취온 가운데 수취온과 상취온의 쉼을 말하는데 이는 숙업(宿業)에 구속받지 않는 수(受)를 의미하지 흔히 상상하듯이 말 그대로 상과 수가 완전 중지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기에 상수멸의 원어인
saññāvedayita-nirodha에서 수는 과거형인 vedayita로 쓰인 것이다. 이는 수취온의 정화에 따른 여실지견의 환경을 의미한다. 다시 수는 바로 뒤의 상을 연기시키고, 때문에 수의 정화는 다시 상취온의 정화로 연결되어졌다는 뜻이다. Vs에서도 수념처가 이러한 맥락에 있는 말이다.10)
7) MN i, 292-308쪽
8) Sn. 739, 529게 : Sabba vedanāsu vitarāgo
9) Sn. 728, 732, 802, 847, 874, 1072게 등
10) 참고, Padmasiri de Silva, “Kamma and vedanānupassanā”, The Importance of
Vedanā and Sampajañña ,Igatpuri: Vipassanā Research Institute, 1990
따라서 초기불교의 오취온론과 관련하여 수와 상취온의 문제는 진리 인식의 문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된다. sati 확립으로 수상(受想)의 완전한 정화가 뒤따라야 만이 여실지견은 가능하다. 그렇기에 비상비비상처 위에 상수멸은 배치된 것이다. 이유는 선정 수행에 있어 사무색까지는 아직 유위(有爲)이며, 비상비비상처에서 상수멸에 이르러 유위의 상까지도 완전히 정화되었다는 것
이다. 따라서 상수멸은 유위에서 무위로 전환된 상태이며 삼행이 완전히 정화된 상태이다. 투명한 마음으로 존재의 모든 세계를 드러내는 Vs와 관련된 문제이며 이때문에 경전에서 항상 상수멸정에 이르러서야 반야지혜(paññā)라는 말이 명시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달리 말하면 진리 인식의 차원에서 볼 때 상(saññā)이 반야로 전환된 단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본래 상수멸정의 취지는 순전히 진리 인식 상에 있어 상수의 정화 문제에 놓여 있지 높은 몰입수준의 정지나 부동의
삼매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그러한 단초를 제공한 Mpn11)와 한역 『유행경』과 그리고 앞에 인용한 경전을 담고 있는 MN의 문헌 성립에 관해서는 특별히 인용을 않더라도 초기경전 가운데 다른 시기의 여러 층이 겹쳐진 매우 늦은 경으로 이미 잘 알려져 있다.12)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멸진정 상태에서 호흡의 중지나 천둥번개가 천지를 진동할 정도의 굉음도 듣지 못한 채 삼매에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몰입선정 개념이 거꾸로 반영된 첨가물임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
다. 왜냐하면 다른 Nikāya의 경전에서도 이러한 이야기와 관련된 아무런 근거도 찾아 볼 수 없고 초기불교의 전체적인 맥락의 선정 사상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 또한 이를 뒷받침해준다 하겠다.
11) DN ii, 130-133쪽
12) 대표적으로 M. Winternitz, History of Indian Literature, vol. Ⅱ, Delhi : Motilal
Banarsidass , 1990 & 1988, 38-40 을 참고
다음으로 앞의 MN에서 인용한 멸진정에 관한 이야기는 목련존자에 의해 구류손 과거불 시대의 일로 나타난다. 산지바는 사리불(사리뿟따)과 목련(마하 목갈라나)이 석가모니불의 양대 제자인 것처럼 구류손불의 양대 제자 중의 하나로 나타난다. 한 장로 이야기는 뛰어난 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경의 내용에 있어서도 목련존자의 복부에 침입한 빠삐만이라는 마라(魔羅)를 입으로 나오게 한 후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내용 자체도 상당히 신화적인 것은 물론 이는 과거칠불 사상이 성립한 시기의 연대기를 고려해 볼 때 같은 초기 경전 가운데도 마찬가지로 늦은 층으로 잡을 수 있다.13) 이러한 시기는 비문이나 문헌 등을 비교 분석해 볼 때 대략 제2결집과 아소카 왕 시대의 중간으로 볼 수 있다.14) 그렇지만 이러한 멸진정과 관련한 이야기의 성립은 그 보다도 더 늦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13) G.C. Panda. Swdiesin the Origins of Buddhism, Delhi: Motial Banarsidass 1981,
134-135쪽
14) 참고 R. Gombrich, "The Significance of Former Buddhas in the Theravādin Tradition",
S. Balassoriya, A. Bareau et. al. (eds.); Buddhist Studies in Honour of Walpola Rahula ;
“A Study of The Concept of Buddha" : A Critical Study Based on the Pāli Texts, Delhi :
델리대 학위논문. 1999, 233-237쪽.
Ⅲ. 지관(止觀)은 반비례 또는 배타적 관계인가?
불교 선정 사상은 여실지라고 하는 진리 통찰에 초점이 놓여있다. 달리 말하면, 밝고 투명한 마음 상태의 조성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이른 층의 초기불교경전에서 일수록 정학의 다른 말은 심학(心學 : cittasampadā)이나 증상심학(增上心學 :adhicittasampadā )이었다.15) 정학이란 수심(修心) 즉, ‘마음 닦는 문제’로서 다름 아닌 밝고 투명한 마음이 바로 증상심이다. 이러한 상태의 마음이야말로 진리 통찰을 위한 가장 탁월하고 뛰어난 마음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제사선의 평정심
을 시작으로 sati와 함께 청정심으로 결론 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이다. 분명히 몰입과 같은 어떤 용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집중을 의미하는 samādhi는 이렇게 청정심을 위한 조건에서 항상 그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선의 차제구조는 집중의 몰입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높은 차원의 안정(捨)과 청정(淸淨)을 낳을 수 있는 수준의 집중까지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집중은 제사선의 사념청정(捨念淸淨)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초기불교의 근본적인 의미의 선정 사상은 단계가 올라갈수록 마음의 청정과 투명함 또한 비례적으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투명한 마음의 확립은 여실지 즉 청정하고 투명하게 볼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다.
15) 대표적으로 DN의 첫 품.
하지만 이러한 정학의 이해는 아직까지도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반대로 선정 단계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오히려 몰입이 강화되어 인식의 폭은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의식의 협착(狹窄)과 같은 몰입개념의 선정 이해는 지와 관을 서로 배타적인 관계나 반비례 관계로 받아들이는 배경이라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인 의미의 정학과는 다른 불연속적 측면의 지관이해로 대승불교권16)은 물론 현재 초기불교 전통의 불교권17)까지 사로잡고 있다 할 것이다.
16) 참고 이현옥,「龍樹의 禪定論」,『불교학연구』제5호(서울: 불교학연구회, 2002), 290-291쪽
17) 김동화,『구사론』 , (서울 : 동국대학교 석림회, 1982), 350쪽.
예를 들면, 미얀마 일부의 Vs 이해에서 있어 초선 이전이야말로 Vs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파가 있고 또한 초선과 같은 낮은 선정에서 주장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선정의 바탕이 없이도 처음부터 Vs를 할 수 있다는 주장을 피하기 위해 부파불교의 산물인 삼매 개념인 찰나삼매, 근접삼매, 근행삼매 그리고 안지삼매등이 새롭게 동원되어 사용된다. 그리고 AN 등에 지극히 제한되어 나타나는“관을 먼저 닦고 후에 지를 닦는다”는 경구를 아예 처음 시작부터 선정 바탕 없이 Vs가
가능하다는 근거로 삼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맥락과 비슷하게 국내에서도 선정의 바탕 또는 전제 없이도 Vs가 가능하다는 주장에서부터 삼매가 깊어지면 마음현상이 잘 포착되지 않아 제이선 이상의 선정 상태는 오히려 Vs의 영역이 좁고, 반대로 초선이 Vs의 영역이 가장 넓어 가장 온전한 상태라는 주장 등이 있다. 이는 미얀마 계통의 Vs가 우리에게 소개되면서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모두 몰입개념의 선정에 바탕한 Vs의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할 것이다. 즉 삼매에 몰입되거나 빠지면 존재의 상황이나
작용 또는 활동에 대한 인지력이 현저히 둔화되거나 정지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정 바탕없이 수행의 처음 시작부터 관이 가능하고 지관의 겸수가 가능할 수 있는 것처럼 볼 수 있는 경전은 극히 한정적으로 나타날뿐더러 그 마저 후대 첨가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문헌적 그리고 교리적 비판은 이미 필자에 의해 검토되었다.18)
18) 졸고,「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수행에 관한 용어와 개념의 검토(Ⅰ):止觀을 중심으로」,
『한국선학』제 3 호 2001. 12
Ⅳ. 초선에서 열반은 가능한가
다시 이러한 맥락에서 “첫 번째 선정과 같은 낮은 단계의 삼매 체험만으로도 깨달음이 가능”하고 “번뇌의 소멸과 열반의 증득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전거로 석가모니 붓다의 전기와 관련된 Mahāsaccaka 경과 같은 한정된 경전을 들 수 있다.19) 이유인즉 이 경에서 “그것(초선)이 깨달음을 위한 길이다”는 말이 나타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경전의 맥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붓다는 오랜 동안 알라라 라마뿟따와 웃다까 라마뿟따 지도의 선정과 자이나 식의 고행으로 피폐해질 때로 피폐해진 상태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던 중 과거의 초선 체험의 경험을 기억하고서 새로운 가능성에 두 번이나 탄성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행(身行)의 고행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의업(意業)과 관련한 마음 닦는 문제로서 선정과 같은 수행의 실마리를 처음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19) MN i, 246쪽
이러한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감탄은 그 자체로 깨달음이나 열반의 충분조건으로 볼수 있는 맥락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더 이상의 이후 단계의 선정 단계를 설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초기불교의 선정론에 따르면 초선은 초선 상태로만 단지 머물러 있는데 큰 의미가 없다. 반드시 다음 단계로의 전개를 전제로 하고 있는 법이다. 따라서 문제의 경에서도 누진지와 열반 그리고 해탈지견의 탄성은 초선이 아닌 제사선 이후에서 터지고 있는 것으로도 잘 알 수 있다.20) 마찬가지로 다른 초기경전에서 초선과 같은 낮은 선정에서도 열반을 성취했다는 구체적인 사례 또한 찾아 볼 수 없다.
20) MN i, 249쪽
나아가 이 경의 한역 대응경전이 없는 것은 물론 매우 늦게 성립한 본생담 주석의 불타전 등과 일치한다. 특히 농경제 때의 초선 경험의 부분은 다른 초기 경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단지 이 부분에서만 서술되는 것으로 유일하다. 따라서 문제의 부분은 본생담 주석서의 이야기가 역류해 가필된 것으로 보고 있다.21)
21) E. J. Thomas, The Life of Buddha as Legend and History, Delhi : Motilal Banarsidass,
1993(첫 출판, 1927 뉴욕), 44 n.1 ; 마찬가지로 O. von. Hinüber, A Handbook of Pāli
Literature, Delhi : Munshiram Manoharlal, 1996, 34쪽. G.C.Pande, ibid, 135쪽을 참고
또한 같은 MN의 Mahāmāluṅkya 경22)을 들어 초선의 낮은 단계만으로도 깨달음과 열반의 증득이 가능하다는 주장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즉 초선부터 무소유처정까지 각 단계마다 오온을 무상․공․무아 등으로 보게(samanupassati) 되면 궁극적으로 열반과 같은 결과가 있게 된다는 다음과 같은 반복 경구에 따른 것이다.
22) 이 경전이 같은 MN 중에서도 후기층으로는 간주되는 이유는 G.C.Pande, ibid, 135쪽을 참조
“모든 법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진다. 이렇게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불사계(不死界)로 마음을 맞춘다. ‘적정하고 훌륭한 그리고 제행의 지멸, 모든 집착 대상의 방기, 갈애의 소멸, 이욕, 멸진 그리고 열반’인 (불사계로).”23)
23) MN i, 435-437쪽 : "So tehi dhammehi cittaṃ paṭivāpetvā amatāya dhātuyā
cittaṃ upasaṃharati.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a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nti. So tatthaṭṭhito
āsavānaṃ khayaṃ pāpuṇāti.
여기서 왜 무소유처정까지만을 한정하여 pajānāti의 사용을 피하고 samanupassati(본다)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지도 문제이다. 하지만 먼저 이러한 반복 경구가 설해지는 맥락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즉‘마음을 맞춘다’(upasaṃharati)의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완성이나 완료를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수행의 도상에서 어떤 대상에 마음을 ‘모으거나’, ‘견주거나’ 또는 ‘새기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해 초선의 범위에서 불사계의 열반을 완전히 성취할 수 있다는 함의를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궁극적인 열반의 불사계(不死界)로 ‘마음을 맞추고 불사계로 나아간다’는 표현이지 각각의 선정 범위 안에서 일체번뇌의 소멸인 열반을 완성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다시 인용된 경구 가운데 예를 들면, ‘제행의 지멸’, 그 자체만도 이미 초선 이상을 나타낸다. 따라서 초선은 첫 계기의 선정으로서 그 중요성은 크다고 할 수 있지 곧바로 열반성취의 적합한 환경이라고까지 보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경전에서 이와 관련한 납득할만한 교리적 설명을 찾아 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초선 상태에서는 분별사유의 유심유사(有尋有伺)가 있고 사(捨)가 아닌 희락(喜樂)이 있어 여실지견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초기 불교 이래 오랜 교리 사에 있어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상수멸정이 과연 열반의 상태와 같은가 다른가와 같이 적어도 제사선 이후의 단계와 열반이 이야기되지 초선과 같은 낮은 선정 단계가 아니다. 다만 무소유처정이 포함된 사무색 범위 너머에 열반이 있고 이러한 무소유처정은 유위로 무위의 열반에 오히려 부정된다.24)
24) Udāna 80 게
Ⅴ. Vipassanā 수행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필자는 본격적인 Vs의 범위를 제사선 이후로 주장하고 있다.25) 이는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측면임을 이미 밝혔고 본고의 기본 전제이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선정의 바탕없이 처음부터 Vs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물론 초선과 같은 낮은 수준의 선정이 가장 온전한 Vs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따라서 현재까지 이와 관련한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25) 졸고, 앞의 논문,《한국선학》 제 1 호 2000.
1) 먼저“‘위빠싸나는 ‘첫 번째 선정’ 이전의 단계에서부터 행해진다”라고 주장한다.26) 다음으로 “위빠싸나는 ‘첫 번째 선정’을 걸쳐 ‘아무 것도 없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27) 그리고 이후의 비상비비상처정이나 상수멸정에서는 위빠싸나를 행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26) 임승택,「선정의 문제에 관한 고찰」,『불교학연구』제5호(서울: 불교학연구회,
2002), 255, 261쪽 ; 「첫 번째 선정(初禪)의 의의와 위상에 대한 고찰」,『불교
학연구』제6호(서울: 불교학연구회, 2003), 185쪽 등
27) 임승택, 앞의 논문, 제5호, 261-262쪽 ; 제6호, 206-207쪽 등
2) 다음의 경우 미얀마의 Vs에 발맞추어 sati나 Vs 수행이 초선 이전 즉 선정수행과 무관한 행법으로까지 주장한다.28) 그리하여 한 경전의 예를 들면서 거꾸로 Vs의 사념처를 통해 선정의 제이선 들어간다는 경전 이해를 하고 있다.29) 계속해서 이러한 입장을 더욱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근거로서 후대 테라바다 부파적 수행론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리하여 결국 “사선을 전혀 닦지 않고 찰라정에 의지해서 觀行”의 가능성을 초기불교 범위까지 확보 또는 확대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
다.30)
28) 김재성,「위빠사나의 이론」, 불교학 연구회 2002년 여름워크샵 자료집, <명상과
불교수행 - 간화선․염불선․ 위빠사나>, 27쪽 ; 「염처경(念處經)에 나타난 수행법」,
『한국불교학결집대회논집』 제1집 하권, 2002, 99쪽
29) 김재성, 앞의 논문, 95쪽 n. 6
30) 김재성, 「순관(純觀, suddha-vipassanā)에 대하여- 남방상좌불교 수행론의 일고찰 -」
불교학연구 4호,
278쪽
첫 번째 주장부터 검토해보자. 위빠싸나가 초선 이전 즉 선정 이전부터 행해진다는 이유는 초선 이전에 이미 sati- sampajañña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sati-sampajañña 자체를 Vs와 바로 등치시킨 결과이다. 하지만 이들은 Vs 수행의 주요 요소이지 그 자체가 Vs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위빠싸나가 초선에서 무소유처정까지까지 가능하다”는 전거에 대한 일차적인 문제는 그러한 주장을 펴는데 경전적 근거로 단 한 경전만을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MN의 Anupada 경이 그것이다. 이 경전은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이미 서구에서 늦은 후기층으로 지적된 이래 현재까지 계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31) 이 경전은 전통적으로 현 미얀마식 상좌부의 Vs를 설명할 때 이용되는 이유중에 하나는 현재 연구가들의 주장처럼 Vs는 초선에서부터 가능할 수 있는 근거로
이용할 수 있는 드문 경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이 반드시 수행의 처음 시작부터 Vs가 가능하다는 전거로 보기에는 좀 더 신중한 교리적 분석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31) C. A. F. Rhys Davids, A Buddhist Manual of Psychological Ethics, London: Royal
Asiatic Society, 최 초 출판 1900, vii-ix쪽 ; T. Vetter, The Idea and Meditative
Practices of Early Buddhism, Leiden : Schmithausen의 전거는 앞의 Vette의 주 12
참고; E. J. Brill, 1988, 69-71 ; G.C.Pende, Ibid, 138쪽등 모두 '후대 부가'의
'후기층경'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졸고,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수행에 관한 용어와
개념의 검토(Ⅰ):止觀을 중심으로」,『한국선학』 제 3 호 2001, 139쪽 n. 43 또한 참조
먼저 sati가 초선이나 제이선에서 나타나니까 초선부터 Vs가 가능하다는 주장부터 살펴보자. 이는 수행의 처음 시작부터 낮은 수준의 선정 단계와 함께 Vs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왜 사선의 각각 단계마다 각각 같은 심소들이 이중으로 중복되어 불필요하게 나타는지에 대한 이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32) 내용상에 있어 이 같은 이유는 이미 제사선까지의 지(止)가 확립되고 난 후 다시 Vs 중심에서 관찰 대상으로 사선이 시설되는 맥락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초선
부터 무집착을 의미하는 anissito는 물론 사(捨 : upekhā)가 언급되는 자체가 바로 제사선 이후에 바탕한 Vs 상태임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경전의 시작은 분명히 ‘차제 관법’을 의미하는
anupadadhammavipassanā라는 말을 시작으로 Vs 중심의 사선이 관찰 대상으로 다시 관해지는 맥락을 보여준다. 흔히 생각하듯이 선정의 처음 시작부터 지관의 겸수나 쌍수 개념으로 초선부터 또는 제이선으로부터 Vs가 수행된다는 맥락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사념처 가운데 법념처의 내용으로 사성제 그리고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 그리고 다시 팔정도가 나오며 그 가운데 다시 정정은 관의 대상 또는 내용으로 나타나는 점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점에서 선정론이나 교리적으로 선정의 처음 시작부터 사(捨)가 초선부터 언급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있을 수 없다. 사선은 ‘조작’, ‘왜곡’을 쉬는 것으로 심, 사, 고(苦), 락(樂), 우(憂), 희, 입식, 출식이 적정하고 정화되는 단계법이다. 불선법과 선법이 차제적으로 그리고 조건적으로 연생(緣生)․ 연멸(緣滅)하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사(捨)는 다름 아닌 제사선의 최종적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실지견(如實知見)의 Vs는 이러한 심․사․우․희․고․락과 같은 느낌(受)과 생각(想)의 ‘투사’, ‘반영’, ‘조작’, ‘왜곡’의 힘 또는 작용부터 쉬고 보는 문제이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작용하고 있는 한 여실지견할 수 없다는 것이고 여실지견의 위빠사나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것들이 개입되어 있지 않는 상태를 ‘있는 그대로’(如實)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사선에서 위빠사나의 눈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법념처를 이루는 것 가운데 사각지(捨覺支)는 바로 제사선에 이르고서야 나타나는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사(捨)이며 이는 이 자체로 위빠사나가 제사선 또는 그 이후임을 보여준다.
32) 참고, 앞의 논문,『한국선학』 제 3 호 2001. 12 , 139쪽 n. 43
계속해서 Vs는 무소유처정까지 가능하다는 주장과 함께 그 이유로 무소유처정까지는 일곱 개의 심소를 pajānāti한다는 표현이 사용된 반면에 이후 두 선정에서는 다른 표현인 samanupassati 등이 기술되며 viditā 등의 용어가 일절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 두 선정 상태에서는 Vs가 행해지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33) 선정을 ‘몰입’개념으로 이해하여 몰입 수준이 올라갈수록 Vs의 폭이 상대적으로 줄어든다는 이해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
장을 위해 단 하나의 Anupada 경만을 전거로 삼고서 구체적이고 자세한 교리적 설명을 생략한 채 이외로 간단한 설명이 주어진다는 데에 먼저 문제를 느낀다. 여기서 이에 대한 자세한 교리적 검토를 생략한다하더라도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은 다른 경전에서 직접적으로 상수멸은 물론 그 이전의 비상비비상처정에서 Vs가 행해짐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滅盡定에 들려고 하는 사람이 반드시 修行해야 할 두 가지 법으로 止․觀”이 그것이다.34) 분명히 멸진정 이전의 비상비비
상처정까지 Vs가 이야기되고 있으며 멸진정 또한 Vs에 연결된 바탕위에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무소유처정 이후에 pajānāti라는 말이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주장 또한 사실은 pajānāti의 명사형인 paññā가 멸진정의 정형구로 경전 어디서나 분명히 나타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멸진정 이후에도 Vs는 계속 지속된다고 보아야함은 멸진정 이후의 열반 성취의 아라한이나 붓다에 있어 사념처 수행과 여실한 반야 상태로 서술되는 맥락이 바로 그것이다.
33) 임승택, 앞의 논문 제5호, 261쪽
34) 재인용, 졸고 《한국선학》 제 1 호 2000. 12, 346쪽 ; 그리고 전거를 몇 개 추가하면
다음과 같다. SN
iv, 293쪽, MN i, 296, 301-302쪽; SN v, 323쪽 그리고 伽摩經 등
따라서 빠알리 전통의 주석에서조차 이 두 선정에서 Vs를 전적으로 할 수 없다고 부정하는 맥락이 아니다. 예를 들면, 주석서에 따른 Bhikkhu Bodhi의 설명에서도 잘 보여주는데 비상비비상처정에서 그러한 언급이 생략된 이유는 이 선정은 극히 미세하기 때문에 보통 수행자가 아닌 붓다 정도에서 Vs의 관찰이 가능하다는 것이지 Vs를 아예 수행할 수 없다고 부정하는 맥락은 아니라는 것이다.35) 여기서 붓다만으로 한정한 주석적 설명은 사실 제자들과 차이를 강조하는 후대의 불타관의
반영으로 또한 볼 수 있다.
35) Bhikkhu Bodhi, MN의 영역 The Middle Length Discourses of the Buddha 1316쪽
n. 1051의 주 139 “이러한 간접통찰 방법은 사무색의 네 번째인 비상비비상처정에서
만 사용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성취는 극히 미묘해서 유학지(有學地) 제자들로서는
직접적인 포착 범위가 아니다. 단지 정등각자인 붓다만이 직접적인 관 찰이 가능하다.”
(This indirect introspective method must be used to contemplate the fourth immaterial
attainment because this attainment, being extremely subtle, does not enter into the
direct range of investigation for disciples. only fully enlightened Buddhas are able
to contemplate it directly.)
결론적으로 Vs는 제4선에서 갖추어진 ‘청정한 눈’으로 다시 초선 이전의 번뇌에서 번뇌가 없는 해탈심(解脫心)에 이르기까지의 일체법이 그 관찰 범위이다. 만약 몇몇 연구자들의 주장처럼 초선 이전이나 초선의 상태에서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 상태라면 초선 이후에 일어나는 법이나 심소는 아예 관찰 대상이 될 수 없다. 다시말해, 초선 이후라야 만이 나타나는 법을 초선 이전이나 초선의 안목으로는 담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념처는 일체법으로 분류한다.36) 구체적으로 사성제의 일체고(고제)는 물론 일체의 욕망(집제)과 열반(멸제) 그리고 일체의 수행도(도제) 또한 가장 큰 범위로서 법념처로 나타나는 이유가 된다.
36) 잡아함 제24권 『일체법경』
Ⅵ. 수행론과 관련한 특정 경전의 성립사 문제
본고는 불교 본래의 선정 개념이 몰입개념으로 잘못 받아들여진 맥락과 관련해 Mahāparinibbāna 경, Māratajjaniya 경과, 이러한 맥락에서 Vs 수행과 선정을 서로 반비례 또는 배타적 관계로 보려는 주장과 함께 같은 연장선상에서 초선과 같은 낮은 선정에서 열반의 가능성을 Mahāsaccaka 경과 Mahāmāluṅkya 경에서 구하고 그리고 Vs 수행의 범위의 전거로 Anupada 경을 각각 이용하여 주장하는 데에 대한 비판적 검토이다. 이를 위해 먼저 필자뿐만이 아니라 초기경전의 성립사와 관련한 권위를 가진 학자들에 의해서까지 이들 경전 모두를 한결같이 늦은 성립 시기로 분류하고 있음을 이미 앞 장에서 인용한 바와 같다. 더 첨언하자면 Anupada 경의 경우는 열 한가지의 심소의 나열은 다른 초기 경전과 비교했을 때 한 눈에 후대의 아비담마 불교의 도식적 법수 배열임을 알 게 해주며, 따라서 후대의 지관 이해가 거꾸로 초기경전에 반영된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이는 초기경전 속에 소속되어 있더라도 Paṭisambhidāmagga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반적인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지 않는 그렇지만 후대 논서 등에서 중요하게 정착된 전문 용어와 개념들이 대거 사용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전들의 특징 중 하나는 주로 사리불이 언급되면서 그 교리적 분석에 있어 거의 논장 수준에 육박한다. 또한 이러한 경전들은 대부분 MN의 일부 경전군에서만 한정적으로 찾아진다는 것도 특징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문제의 MN의 Anupada 경 또한 ‘차제 관법’을 의미하는 anupadadhammavipassanā, 승해(勝解)의 adhimokkho, 바라밀(波羅蜜)의 pārami37) 그리고 ‘결정 또는 고정된’의 vavatthita 등은 다른 Nikāya의 경전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오로지 이 경전과 후대 논서나 주석서 또는 대승경전에서만 사용되는 말이라는 점이다. 이처럼 길지도 않은 짧은 단독 경전에서 그것도 후대의 전문적인 용어가 다른 초기경전에는 단 한번도 나오지 않는 데에 반해 무더기로 나타나는 것
자체가 후기 성립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37) 波羅蜜은 보살의 실천 덕목으로 후대 대승 경전에서 아주 중요한 덕목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초기 경전에서 는 pārami는 물론 pāramitā까지 빠알리 경전은 물론 경장에
포함되는 Jātaka(『본생담』)에도 나타나지 않는 다. 다만 『본생담』의 주석서에만
나타날 뿐이다. (참고, 졸고, “A Study of The Concept of Buddha" : A Critical Study
Based on the Pāli Texts, Delhi : 델리대 학위논문, 1999, 280쪽)
따라서 이러한 경전들이 모두 ‘늦은 성립 시기’의 ‘후대 부가 경전’일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은 필자만의 전혀 근거없고 자의적이고 일방적인 산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불교학계의 큰 공백 중의 하나는 기초학으로서 경전의 연대기를 논하는 것이다. 경전의 성립시기를 분석하는 것 자체가 불교의 훼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부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경전의 연대기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 역사적 또는 사상적 논의를 한다는 것은 자칫 사상누각의 경우나 헛다리 짚을
우려가 크다.
흔히 Anupada 경과 Mahāsaccaka 경 등은 초기불교 수행론을 이야기할 때 빠알리 전통의 불교권이나 외국의 학자들이 주로 인용하는 경전들이다.38) 모두 특정한 Nikāya인 MN에만 한정되어 나타난다는 한계를 기본적으로 안고 있다.39) 그리고 그렇게 특정한 몇몇 경전이 이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들 경전이 초기불교 수행사상의 전반적인 맥락이나 분위기와는 달리 아비담마적 구체성과 조직성을 곁들여 다른 가능성을 주로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은 별로 어렵지 않게 눈에 띠는 것으로 이미 오래 전부터 많은 학자들에게 이러한 특별한 연대기가 언급되었다. 더 나아가 다른 초기불교의 부파인 한역 아함과 비교해 보았을 때도 아예 다른 경전과 달리 대응경전이 없는 것은 물론 이와 비슷한 내용을 담은 경전을 아직까지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자체로만도 순수히 빠알리 전통의 부파적 경전임을, 다시 말해 매우 늦게 성립한 층의 경전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지극히 한정된 일부 경전만을 계속적으로 그리고 반복적으로 전거로 이용하는 데에서 벗어나 확연히 초기층으로 간주되는 다른 Nikāya의 경전을 통해서도 경증이나 논증의 폭을 확대할 때만이 좀 더 확고한 설득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38) 예를 들면, J. Bronkhorst, The Two Traditions of Meditation in Ancient India, Delhi :
Motilal Banarsidass, 1993; T.Vetter, ibid, ; W. L. King, Theravāda Meditation, Delhi :
Motilal
Banarsidass, 1992 등
39) 각각 다른 Nikaya는 다른 전승집단에 의해서임은 이미 증명되는 바이다. 특히 MN의
전승집단과 관련한 문제는 최근의 연구 성과인 T.Endo, "Selective Tendency in the
Buddhist Textual Trading?", Y.Karunadasa(ed); Journal of Buddhist studies, Center
for Buddhist Studies, Sri Lanka vol.I.2003, 55-71 쪽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Ⅶ. 마치는 말
본고는 최근 몰입을 불교의 중심선정 개념으로 받아들여 Vs 수행과 선정을 서로 반비례 또는 배타적 관계로 보려는 주장이나 초선과 같은 낮은 선정에서 열반의 가능성을 그리고 Vs 수행의 범위를 무소유처정까지 한정해서 보려는 데에는 재고가 필요함을 비판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서 문헌의 성격에 관한 고려와 이를 바탕으로 교리적인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분석은 불교의 기본적인 선정론과 관련하여 화두선과 관계에서 어떠한 문제로 파생하는가 하는 즉 그러한 Vs 이해의 귀착점은 무엇인가하는 점을 알게 한다. 주지하다시피 근래에 들어 화두선 전통의 우리나라에 미얀마 등지로부터 위빠사나 수행법이 소개되면서 양자간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대부분 화두선 우위론의 입장에서 위빠사나 열등론이 제기되고 있다.40) 이러한 이면에는 화두선 스스로 최후 단계의 최상승선이라는 긍지에 따라 위빠사나를 ‘분별법’ 정도의 소승 수행법으로 간주하려는 경향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위빠사나 열등론의 배경에는 근본적으로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은 위빠사나 이해에 기인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위빠사나 수행은 ‘초선 이전부터 가능하다’는 견해나 또는 ‘초선에서 가장 온전한 위빠사나가 이루어진다’거나, 아니면 ‘처음 시작부터 관(觀)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은 물론 심지어는 ‘선정의 바탕 없이 위빠사나’는 가능하여 아예 선정과 무관한 행법이라도 되는 것인 양 이해하는데 기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의 맥락은 진리인식에 가장 중요한 용어들을 ‘알아차림’이나 ‘감지한다’나 ‘마음챙김’ 또는 ‘마음지킴’ 정도로 쓰고 있는 데에 또한 기인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당연히 경전의 선정론이나 실수(實修)의 잣대에 따라 ‘분별법’이나 챙김과 지킴과 같은 인위적인 ‘조작의 행법’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안고 그 비판의 여지를 제공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초기불교의 기본적인 선정론에 따르면 위빠사나를 초선 이전이나 초선 정도의 단계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보게 되면 결국 위빠사나는 언어와 문자에 사로잡힌 행법이 되며, 심사(尋伺)와 같은 분별사유조차 뛰어 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불교 경전에 나타나는 근본적인 의미의 위빠사나는 정학의 완성인 제사선에 이은 혜학으로서 본격적인 위빠사나가 수행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이해로 접근해 나갈 때만이 간화선과 위빠사나가 서로 만날 수 있는 여지의 교두보가 확보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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