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깨달음의 길-거해스님

수선님 2019. 1. 20. 13:21

깨달음의 길

위빠사나(vipassana)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셨던 수행법

거해스님

 

위빠사나는 팔리어(원시경전)의 위(vi)와 빠사나(passana)의 두 단어의 복합어로서 위(vi)의 뜻은 세가지 특성 즉 苦(pukkha), 無常,(Anicca), 無我,(Anatta)의 자연적 성품을, 빠사나(passana)는 '본다'라는 뜻으로 쉽게 풀이하면 '자신의 참다운 성품을 수행을 통하여 직접본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수행법은 원시경전 중 아함경의 대념처경(Maha sati pattahana)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부처님께서 직접 수행하신 법이며 모든 비구들에게도 이 수행법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지도하신 것으로서 그 역사성과 순수성의 측면에서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지금도 그 전통이 유지되어 동남아 불교권 내에서는 위빠사나가 수행의 기본골격이 되어있는 것이다.

 

이 수행법이 우리나라에 직접 전해지기는 1988년 (6월~7월) 버마(지금의 미얀마) 마하시 수도원장 마하반딧 우 빤디따 대화상께서 최초로 그 진수를 한국의 비구, 비구니 약 30여명에게 직접 설법해설과 수행지도 했던 것이다. 비록 대념처경의 수행법이 경전상으로는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졌을지라도 그 수행방법 자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지도하며 수행인들로 하여금 어느정도 수준의 체험을 얻게 하기는 처음인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은 필자가 직접 미얀마에 가서 여러 해 수행생활 하면서 들은 마하반딧 우 빤디따 수도 원장 스님의 법문과 수행의 체험을 바탕으로 위빠사나 수행법을 소개 하고자 한다.

 

추천서

[깨달음의 길]에 관하여

한국불교 역사상 가장 값 있는 책

석지현 스님

 

지금 우리나라 불교는 새로워지려고 나름대로 무척 애를 쓰고 있다. 그 한 예로서 기독교식의 기도문이 한글로 낭독되고 걸핏하면 '○○ 법회' 운운(云云)하여 대형의 현수막이 길거리에 나붙는다. 그리고 절마다 법회 때마다 찬불가 소리가 한창이다. 또한 정기적인 회보정도를 발간하는 절도 많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만으로 불교가 되살아 날 수는 없다.

 

뿌리를 건강하게 하지않고 그 가지와 잎을 아무리 감싸고 보호해줘봐야 별 효과가 없다. 그것은 마치 배 아픈데 배꼽에 옥시풀을 바를는 격이다. 배꼽에 옥시풀을 바르면 배의 통증이 잠시 멎은 듯하다. 그러나 불교는 신앙에 앞서 자각(自覺)을 주장하고 있다. 즉 자기자신 스스로가 절대불변의 차원을 체험할 것을 주장하고있다. (물론 불교도 신앙을 강조하고 있지 만 이것은 대승불교 운동이 일어나면서 힌두으 박띠신앙이 불교에 들어와 불교적신앙운동으로 구체화된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첫째 수행에 관한 정밀한 체계를 완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위빠사나(vipassana)' 라는 불교 특유의 명상관찰 수행법이다.

 

말하자면 이 '위빠사나' 수행법은 부처님께서 몸소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깨닫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위빠사나' 수행법이 중국으로 들어오면서 천태지관법(天台止觀法)으로 왜곡 되었다.

 

천태지관법은 위빠사나를 관념화한 수행법이며 이 천태지관법을 근거로 하여 조동종 계통의 묵조선(默照禪)과 임제종 계통의 간화선(看話禪)의 체계가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 에서는 간화선 계통의 화두 참구법(話頭參究法)의 방식으로 선 수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간화선 방식도 시대가 지남에 따라 참다운 선지식이 없음에 따라 제자리 걸음을 하고있다. 뼈깍는 노력을 했음에도 불고하고 그 결과는 노력을 따라가지 못하고있는 것.

 

이것이 오늘 날 한국 선 수행이 처해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10년, 20년, 30년 선을 하던 수행자 들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는 식의 옛중국 선승들의 죽은 글귀나 던져 세상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 어떤 수행자들은 아예 선을 버리고 도교의 단전호흡이나 인도 힌두성자들의 요가명상법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한국불교의 뿌리를 다소 소생 시키자면 가장 올바른 불교수행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그래서 그 방법을 통해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경지를 터득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경지에서 정신병적인 현대문명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줘야 한다. 그리하여 그 문명의 파멸을 막아야 한다.

 

여기 거해스님은 바로 이 불교전통의 수행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이는 한국불교 1600년 역사상 가장 값 있는 일이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비로소 한국에 부처님의 올바른 수행법이 소개된 것이다.

 

설령 우리나라의 절(寺)들이 모두 부서지고 경전이 모두 불태워지는 법난(法難)이 온다하더라도 [깨달음의 길] 이 책 한 권만 있으면 된다.

 

이 책에 소개된 방법을 통해서 부처님께서 가신 그 경지에 가면 된다. 그러면 불교는 다시 이 땅에서 힘차게 되살아나게 될 것이다. 지금처럼 불사(佛事) 위주의 겉치레 불교가 아니라 기독교식의 현수막이나 걸며 날뛰는 흉내장이 불교가 아니라 정말 활활 불타는 산불교가 되살 아나게 될 것이다.

 

깨달음의 길/ 목차

서문/ 위빠사나. 부처님께서 직접 행하셨던 수행법.........................거해스님

추천/ 깨달음의 길에 관하여..................................................석 지현 스님

마음집중 수행법/ 수행인의 목표와 자세/ 호흡은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는 것/ 몸의 움직이는 동작에 마음이 함께.

아난존자와 경행(걷기) 정진/ 수마를 극복하는 법(졸음을 이기는 법)

식사시의 관찰/ 여러종류의 마음(citanupassana).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 망상을 다스리는 법.

담마누빠사나(dhammanupassana)/ 아(我)에 관한 바른 이해.

마음집중(sati lakkahana)의 특성술( 물 위에 뜨는 것과 가라앉는 것)

사티락카나, 라시락카나/ 빠쭈빠타나(paccupatthana) 락카나.

자기점검과 분석/ 수행의당처를 놓치지 않음.

현상에 대한정면 관찰/ 빠타나(patthana)가 가지고 있는 뜻.

마음을 어느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samadhi)

수행법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다.

삼매의 기능은 불을 꺼 버림. 사마디 수행의 여섯개 항목

과거의 기억은 위빠사나의 적(敵) 미래라는 생각에 사로 잡힘.

좋은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도 망상/ 해태심에 대하여.

감각적 욕망(kamachanda/까마찬다) 부처님의 위대하심을 반조.

수매도( sumedho/수행인).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게승.

부처님의 지혜와 현실적 자비/ 부처님으로 부터 성스러운 유산을 물려받음.

서른 일곱가지 깨달음의 계발(bodhipakkhiyadhamma)

네가지 마음집중(Maha satipatthana)/ 네가지 바른 노력(viriya)

ccattaro sammappadhana 짜따로 삼압빠다나

바와나 -위리야(bhavana-viriya) 노력(viriya)의 세가지 특징.

균형잡힌 노력과 바른 겨냥/ 수면 무기력에 대하여(thina-middha)

졸음과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일곱가지 길.

네가지 如意足 (성취방법/cattaro-indhipada.짯따로 인디빠다)

다섯가지 기본기능(五根/pancindriyani/ 빤찐드리야니)

일곱가지 깨달음의 사실 (七覺支分/sambojjhanga 삿타 삼보장가)

팔정성도 (ariya atthanggikamagga 아리야 얕탕 기까 막까

계율은 교단의 생명선/ 어떤 사람을 비구라 하는가.

일반대중에 비친 빅쿠/ 갓 출가한 비구/ 크게 뉘우침.

계(戒)는 인간의 입과같다/ 지계(持戒)의 중요성(重要性)

새집의 주춧돌과 같은 것.

계(sila)는 만다나(mandana)와 같다.

재가신자(在家信者)의 오계(五戒)와 팔계(八戒)

계(戒)는 사려가 깊다는 뜻.

법(法)은 은혜를 법은 은혜를 법에 행(行)하는 자에게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결과를 보라.

모든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결과(結果)

정(定: samadhi)을 닦아야 마음을 계발. 수행의 다섯가지 장애.

수행의 길을 존중하고 반려하라. 사사공양(四事供養)에 대한 것.

수행인은 음식을 선택할 수 없다.

수행인은 시주물에 대해서 존경. 큰 소원이 담긴 시주공양.

이 세상은 비난과 비방이 언제나/ 탐심(貪心)과 진심(嗔心)의 방해

지난 과거는 위빠사나의 적. 번뇌와 망상은 불행의 원인.

번뇌없는 청정한 마음/ 견고한 마음과 속박된 마음.

부처님과 다섯 수행자의 만남/ 두가지 신심(信心).

함께 수행하는 도반에 관한 것.

부처님 말씀은 입에 쓴 약과 같다. 시간을 기다리지 말라.

지혜를 통하여 깊은 신심이 일어남/ 위빠사나의 실천적 체험.

정견(正見: samadhitthi) 바른 수행. 바른 신심.

지혜(panna)/ 두 종류 지혜/ 지혜가 지닌 깊은 뜻.

외적(外的)힘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한 증거.

바른 수행이 삿된 견해를 제거.

비물질이 비물질에의 조건/ 필요되는 원인에 의해 나타난 결과.

물질(rupa)이 물질에의 조건(물질과 물질의 관계)

음식(rupa)이 육체(rupa)에 미치는 영향

부처님의 포교와 은둔의 생활. 훌륭한 참선법사가 되려면.

수행인의 자기점검(열 여덟가지의 위대한 자기점검)

열 여섯가지의 위대한 내관적 지혜.

 

마음집중 수행법

많은 곳에서 여러가지의 마음닦는 법, 사마디(samadhi)를 지도하고 있으나 동남아의 미얀마 랑군에 소재해있는 마하시 센터(mahasi senter)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치심인 사띠빠따나( 네가지 몸, 느낌, 마음, 법, 身. 受. 心. 法)이라는 마음집중을 통하여 째달음을 성취하려고 한다.

 

이 수행법은 부처님과 모든 아라한 성자(聖者)들이 직접 수행하시어 깨달으신 법이며, 이 법을 통하여 사성제(四聖제)와 팔정성도가 나타났으므로 모든 미래의 부처님이 수행하실 법이며 지난 모든 부처님이 이 법을 수행하신 가장 진실하고 수승한 길이다. 따라서 이 길을 통해서 정각을 성취할 수 있고 열반을 증득하게 되며 위없는 지혜를 얻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띠빠타나(satipathana)는 두 단어의 복합체로서 사띠는 '마음집중' 이라는 뜻이며 빠타나는 '밀착.접착'이라는 ,즉 '머문다'는 뜻이 있다. 이 수행방법은 몸의 크고 작은 활동과 기능, 육체적 모든 현상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으로 몸의 동작은 쉽게 감지인식 할 수 있고 드러나며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좌선이라 할 때에 자신의 앉아있는 모습에 대한 현상이나 혹은 자신이 숨을 쉴 때 아랫배의 일어나는 현상을 하나의 자연의 현상 (인위적이 아니기 때문)으로 일어남이라 관찰하고 역시 숨을 내쉴 때 아랫배의 꺼짐을 사라짐이라고 하여 자세히 관찰하며 마음을 예리하게 집중 밀착시킴으로서 몸과 마음을 통하여 깨닫고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숨을 들이쉴 때의 아랫배의 일어남은 육체적인 운동작용이요, 이러한 운동작용이 있음을 아는 것은 정신적 혹은 마음의 분별의식인데 이 모든 육체적, 정신적 작용들이 상호연관 관계를 가지면서도 한편 영원 상주불멸이 아니라 계속해서 일어났다 사라지는 순간적인 현상에 불과함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은 하고자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요,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정지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적으로 스스로 일어나고 스스로 사라지는데 이 자연적 조건의 일어남과 사라짐에도 어떤 자연스러운 더 큰 조건을 만나면 원하거나 원하지 않거나 관계없이 모두 끝나 버리게 된다.

 

이때를 간단히 말해서 '우주가 정지됐다' 라고 할 수 있고 혹은 '한 개인의 생명이 끝났다'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자연의 현상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서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이며, 무엇에 의해서 이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가를 깨달을 수 있다.

 

수행자가 쉬엄없이 자신의 육체나 정신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계속 관찰하여 마음을 집중시켜 나갈 때 마음은 현상 당처에 머물며 동시에 일념이 되어서 삼매를 이루게 된다.

 

계속적으로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을 게으름없이 단 한 순간만이라도 놓치지 않은 채. 마음을 집중 관찰함으로서 번뇌가 침입해 올 수 없으며 마음속에 자리잡지 못하게 될 때 수행자는 모든 번뇌로부터 멀어지게 되고 번뇌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사납고 거칠어졌던 마음도 자연히 고요해지며 나쁜 언어습관은 정화되어 부드럽고 착하며 조용하고 품격이 높은 언행을 하게 된다.

 

이와같이 수행자가 부지런히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에서나 육체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서 지친 번뇌-위티타카마 낄래마(vititakamak-ilesa) 즉 육체적인 난폭한 행동은 계행(戒行)으로 다스리고 약간 거친 중간급의 번뇌-파리유타나낄래사(pariyuthana- kilesa)나 언어의 불순과 정신적 나쁜 생각 탐심, 진심 등은 정(定: samadhi)을 통해서 다스려 내외적으로 번뇌에서 멀어진 수행자가 되면 이러한 수행자를 사마디 비구라 한다.

 

수행자가 좌선정진의 주제로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으로 인하여 수행의 주제에서 멀어져 있게 된다면, 언제나 불선업과 가까이하게 되고 번뇌는 불꽃처럼 일어나 몸과 마음을 태우게 되므로 그 수행인의 행동을 유치해지고 법도에 맞지 않아 수행자답지 않게 되는 것이며 언어는 질서가 없고 의미 없으며 들어서 이익됨이 없으며 마음은 안정되지 못하며 초조와 불안으로 가득하여 어리석은 생각으로 가득하여 얼굴은 어둡고 고통스러우며 불안한 모습을 항상 지니게 된다.

 

수행자가 진정으로 깨달음의 상태에 들고자 한다면 언제나 수행의 주제의식에서 멀어 지지 않아야 되며 오직 부지런히 인식하고 관찰하는데서만 사마디 혹은 삼매(三昧)를 이룰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사마디가 이루어질 때에 몸과 마음이 진정 고요해져 청정한 수행자가 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수행인을 사마디 비구라 한다.

 

마음의 집중은 사실상 단순히 자신의 아랫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이 아니라 느낌의 일어나고 사라짐, 생각의 일어나고 사라짐, 감정 즉 슬픔. 그리움. 미워함. 싫어함 .좋아함 등의 일어나고 사라짐, 혀를 통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면밀히 관찰해 나가야한다. 그러나 우선 제일 쉽고 눈으로 볼 수 있으며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상이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나타나는 아랫배의 현상이기 때문에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위에 열거한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며, 동시에 몸밖의 모든 자연적 현상도 계속 변화되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서 부처님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 데 하나인 '제행무상'의 진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일체의 몸 동작이외에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아니 것이 어디 있는가? 나왔으니 들어가는 것이 변화하는 법이 아닌가. 앉았으면 일어서는 것. 바람도 같은 바람이 계속 불어오는 게 아니고 물의 흐름도 같은 물이 계속 흐르는 것이 아닌 현상의 진리를 통하여 부처님의 합리적이고 사실적이며, 진실한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는 위대한 길이기에, 모든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켜 일념을 만들고 자신의 성품을 확실히 보게 하는 것이다.

 

수행인의 목표와 자세

처음 수행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우선 바른 목표를 세우고 바른 자세로서 바른 수행법을 익혀 나가야 한다. 수행인에게 있어서 바른 수행법이란, 자신의 육체나 정신적인 모든 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면밀히, 정확히 관찰 내지 감지인식(感知認識)하는 수행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수 없이 많은 우리의 행동이나 정신적인 변화와 마음의 다양한 상태 중에서 어디에다 관찰의 촛점을 맞추어야 되는가.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우리를 살아있게 해 주는 현상이 있다.

 

이 현상이야말로 탄생에서부터 죽음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이며 이 현상이 계속되는 한, 우리는 100년 아니 그보다 더 살아 있을 수도 있다. 이 현상은 본인이 인식하거나 인식하지 못하거나 관계없이 작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인즉, 숨을 들이쉬고 내 쉬는 것으로서, 숨을 들이쉴 때는 아랫배의 깊숙이까지 미치게 하여 아랫배가 일어나게 하고 숨을 내쉴 때도 역시 완전히 내쉬어 아랫배가 꺼지게 하는 현상을 말함이다.

 

이는 흔히 세간에서 생각하는 단전(丹田) 호흡과는 매우 다르다. 단전호흡은 자신의 호흡을 규칙적으로 하면서 의식적으로 단전에 힘을 모으는 것이며 단전 부분을 단단하게 하고 호흡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어 가려는 것이다.

 

그리고 단전호흡은 자신의 생리와 자연적 조건에 관계없이 길게 들이쉬고 어느 기간 멈춘 다음 길게 내쉬거나 짧게 들이쉬고 길게 멈추었다가 길게 내쉰다는 등 갖가지 규칙적인 호흡을 통하여 자제함을 얻으며 마침내 호흡의 멈춤을 인위적 단련으로 이끌어 간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단전호흡은 앉아서 의도적인 호흡을 진행시킬 때는 의지에 의한 규칙적인 호흡이 가능하나 그 이외 시간인 자연적 생활 즉 걷거나 활동하거나 할 때에는 규칙적인 호흡이 되지 못하게 되므로 자연의 생리적 호흡으로 돌아오게 됨으로서 호흡이 이원화가 될 수 없으며 이로 인한 신체적 리듬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며 따라서 부작용도 일어날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에의 호흡은 완전히 자연적이며 생리와 생태의 리듬현상과 공기의 질적 함량따라 순간순간의 변화를 따르면서 진행시키되 다만 호흡의 진행에 마음을 연결시키어 호흡상태를 관찰하고 알아차리며 인식하고 깨닫게 하는 것 뿐이다.

 

숨을 들이쉴 때 자신의 아랫배가 일어남을 정신적으로 이름하여 '일어남' 이라 하고 숨을 내쉴 때 아랫배가 꺼지는 현상을 '사라짐'이라 하여 이후부터는 통칭해서 일어남. 사라짐 이라 한다.

 

수행인은 마음집중 수행을 위하여, 고요히 앉아서 자신의 아랫배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대상으로 하여 매우 예리하고 정확하게 밀착된 상태에서 자세히 관찰하고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자리에 앉을 때는 허리를 반듯이 펴고 몸의 긴장을 푼 채 바르게 앉으며 고개를 반듯이 하되 목에 힘을 주지 않고 자신의 귓밥이 어깨 위에 바로 떨어져 일직선이 되게 하며 다리는 가부좌나 반가부좌 혹은 무릎 아래 두다리가 서로 나란히 앞과 뒤에 놓이게 하거나 가장 자기에게 맞는 자세를 취하여 편안하게 한다.

 

직장에서일 경우 의자에서나 쇼파에 앉아서라도 다만 허리를 펴고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자세만 취하면 된다. 눈은 지그시 감아야 한다. 눈을 뜨거나 반쯤 뜬다면 눈으로 인해 정신이 산만해지며 신경쓰이게 되고 동시에 주변의 바깥현상에 관심이 쏠리게 되어 사실상 자신의 내적 정신집중 관찰이 어렵거나, 허트러지기 쉽기 때문이다.

 

입은 가볍게 다물고 혀는 앞니와 입천장 사이에 닿게 하며 좌우의 손은 배꼽부분 앞에 마주 잡히게 하거나 아니면 오른손 바닥 위에 왼손을 살포시 얹어 놓던지 또는 양손으로 자신의 무릎 위를 덮거나 손바닥이 위로 오도록 얹어놓는 등 편안하여 신경 쓰이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손의 자세에 정진이 잘되고 못되는 것이 아니며 손의 위치로 좌선의 틀을 잡는 것이 아니니 손의 모양잡기에 마음을 두어서는 안된다. 이와같이 앉은 상태에서 자신의 호흡이 코끝을 스쳐 들어감에서 부터 아랫배에 이르기까지 눈으로 보는 듯이 하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만의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켜 자신의 아랫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즉 움직이는 모습을 자세히 느끼고 예리하게 관찰하여 알아 차려야 한다.

 

호흡은 자연스럽게

호흡은 아주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쉴 때 들이쉰 숨이 아랫배까지 미치도록 하여 팽창됨을 피부로 느끼도록하고 정신적으로 '일어남' 이라고 읽어야 하며, 동시에 감은 눈은 자신의 아랫배의 팽창된 부분을 실지로 보는 듯하여 동작이 동시에 일어나도록 해서 관찰이 하나의 집중력이 되도록 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 얼마를 살아왔던 자신의 호흡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살피고 관찰해보며 피부로 느끼고, 코 끝을 통하여 들어가는 공기와 나오는 공기의 차이점을 느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처님께서는 이미 2600년 전에 이 법으로 깨달음을 성취하시었으며 이 법을 모든 제자들에게 가르치시었고 자신의 체험으로서 코끝을 스쳐 들어가는 바람에 네가지 상태와 나오는 바람에 네 가지 상태가 있음을 밝히셨다. 즉 그 네 가지란 들어가는 바람은 신선하고, 차가웁고, 가볍고, 빠르며 나오는 바람은 덥고, 섭하고 무겁고, 느리다는 것으로 우리 자신의 호흡을 통하여 위의 네가지를 직접 체험하게 되면 부처님이 느끼시고 체험하신 것과 우리가 체험한 것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 하여 같은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닌가!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은 아주 자연스럽게 해야한다. 절대로 어떤 규칙을 정하여 의식적으로 길게 내 쉬고 짧게 들이쉬거나, 짧게 내쉬고 길게 들이쉬거나 하지말고 다만 자연스러운 호흡이 되야 한다.

 

호흡이 매우 자연스러워야 하는 것은, 만약에 호흡에다 어떠한 규칙을 정하거나 인위적인 것이 되면 쉽게 피곤해지고 상기(上氣: 더운 기운이 머리까지 뻗치는 현상으로 머리가 무겁고 아픔)가 올라오며, 여러 가지 다른 좋지 않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러운 호흡을 하면서 다만 정신적으로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을 관찰 집중시켜 가는 것이다.

 

이 수행법에 대해서 어떠한 이름을 붙여도 관계가 없으며, 다만 바르게 자세 하여 정확하게 자신의 아랫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일념집중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아랫배의 일어나고, 진행 계속되고, 사라지는 것(우바다 upadha. 딪히 dithi. 방까 bhanka)이며, 숨을 들이쉴 때는 바람이 코 끝을 스치어 들어가는 부분은 처음이요, 가슴을 스쳐 지날 때가 중간이요, 아랫배에 와닿음이 끝맺음이다. 그리고, 내쉴 때는 아랫배의 꺼짐이 시작이요, 가슴을 스칠 때가 중간이며,코 끝을 스쳐지나는 것이 끝맺음이다.

 

처음 시작하는 이는, 다만 중간부분만 인식하게 되고 앞쪽의 끝남과 시작부분이 분명치 못하게 되나, 지속적인 노력으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게 되면, 처음에서 끝나는 부분까지 분명해지며, 아랫배의 일어남과 마음의 관찰이 정확하게 동시에 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서도 역시 같은 방법이어야 한다. 마치 돌을 던져 표적에 정확히 맞추듯이, 정확하게 관찰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신체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그 자연적 성품을 보는 것을 가야 누빠사나(kaya nupassana)라고 하며 동시에 우다야와야 빠싸나냐나(udaya vayapassana-nana)라고 한다.

 

가야누빠사나는 몸의 모든 동작을 관찰하여 몸과 마음이 함께 작용하여 일체가 되게 하며 마음으로 하여금 몸의 동작을 항상 인식 알아차리거나 깨어있어 행동의 진행을 낱낱히 살피게 하는 것으로 걷거나 앉거나 눕거나 서 있거나 구부리거나 팔을 올리고 내릴 때의 모든 동작이 스스로 움직임이 아닌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다야와야는 단순히 자신의 아랫배가 호흡을 통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몸의 가려움, 아픔, 다리의 저림, 벌레의 기어오름에 의한 피부의 스멀거림 등도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 어느 것도 지속적으로 오래가는 것이 없다. 오래도록 앉아 있음으로 인한 다리의 아픔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매우 빠른 속도이기 때문에 고통이 뭉쳐진 듯 아프다고 할 수 있는 것이지 사실 자세히 관찰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속도가 빠른 결과일 뿐이다.

 

이와 같이 모든 몸의 현상과 마음의 현상, 몸밖의 자연적 현상은 곧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요, 계속 변화 진행되고 있을 뿐 아무 것도 견고하게 영원히 남아 있거나 머물지 않음을 자신의 아랫배의 현상을 통해 깨닫게 되는 지혜를 낳게 하기 위함이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는 것

수행인이 부지런히 노력 정진해 가면 마음은 일념이 되고 순수해지며 청정하여 번뇌는 자연히 멀어지게 된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자신의 몸 부분에 어떠한 고통의 현상이 일어나면 아랫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던 마음을 고통이 일어난 그 당처에 관찰 집중시킴으로서 고통의 나타남을 알고 고통의 자연적 성품을 알게 되며, 그것도 일어남 사라짐의 현상임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고통이 육체적 변화에서 오는 하나의 인식능력임을 알게 되었을 때, 고통의 전반적인 성격을 분명히 파악하고 보게 되는 것이다. 이를 둑카누빠사나(dukkhanupassana) 즉 고통의 현존(現存)함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분명히 보았다는 뜻이다.

 

수행을 통하여 이 둑카(고통-심리적, 육체적 고통)의 존재를 확인 했을 때, 사성제(四聖제)중의 첫째인 고의 성제(dukkha) 수카(sukkha) 이해하고 자신이 본 것으로 다시 의심 없게 되는 것이다. 팔리어의 둑카(괴로움)는 수카(행복)의 반대어이면서도 고뇌, 슬픔, 비탄과 더불어 불완전, 무상, 공(空), 무아(無我)등의 깊은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성제가 완전히 좌선을 통해서 보였고 이해되었다면, 부처님 말씀 그대로 고(苦)를 본 사람은 고의 원인과 고의 소멸과 고의 소멸이 이르는 것을 본다. 즉 사성제를 모두 보게 된다는 것이다.

 

좌선 수행 중에 번뇌가 일어났을 때 번뇌가 일어난 현상을 파악하게 되고 그 번뇌의 자연적 변화를 관찰할 때 번뇌는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이 번뇌가 일어나는 현상과 사라지는 현상을 빠른 속도로 처리할 때 번뇌는 수행인을 이끌어 가지 못하고 수행인이 능히 번뇌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게 되며 동시에 번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분명히 보게 된다. 이것을 담마누빠사나(dhammanupassana)라고 한다.

 

흔히 번뇌를 제거한다고 한다. 그러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통해서 번뇌의 자연적 성품을 보게 되고 번뇌를 통해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번뇌의 노예가 되지 않음으로서 불선업에 떨어지지 않게 되며 정신적 차원이 높고 고결한 인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수행 중에 슬픈 마음이나 괴로운, 즐거운 혹은 진심 내는 마음이 일어나는 즉시 진심 내는 그 마음 당처에 집중, 그 진심이나 괴로운 마음 등이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얼마나 지속되는지 어떻게 종결되어 지는지 등을 면밀히 아주 가까이 관찰함으로서 그들의 자연적 성품을 분명히 알게 되고, 그 결과를 알게 된다. 그런 다음에 다시 그와 비슷한 상태가 두 번 되풀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여러 상태의 마음이 계속적으로 변화되며 한 상태의 마음이 오래 계속되지 않음을 분명히 보았을 때 짙따누빠사나(cittanupassana)라 하며 '자신의 참다운 마음의 성품을 보았다'라는 뜻이다.

 

마음의 순간 순간의 움직임을 관찰하면서 잠시라도 끊어짐이 없고 빈틈없이 밀밀한 상태로 슬픔에서 괴로움, 즐거운 마음으로 변화되었을 때 그 변화에 동요됨이 없이 옮겨 관찰하며 마음의 위치가 분명히 어디에 있나 알고 그 자연적 현상을 완전히 파악하고 보았다면 여기서 마음의 변화와 무상함을 확실하게 알게 되므로, 이를 아니짜누빠싸나냐나(aniccanupassana-nana)라고 하여 마음의 무상함을 보아 지혜를 가졌다는 뜻이다.

 

부처님 설법이 '무엇이든지 인연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곧 인연에 의해서 다시 멸한다'는 진리를 스스로 확증한 것으로 이 경지에 오르게 되면 수행인은 부동지(不動地)라 하며 생사의 어두운 밤은 깨지고 지혜의 해탈광명이 밝아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수행인이 이와같은 경지에 이르러 더욱 용기와 신심이 높아져 정진을 계속하게 되면 마치 여명의 아침에서 태양이 떠올라 밝은 낮이 되는 것처럼 수행의 진전이 매우 확실해져 물러섬이 없고, 좌절됨이 없으며 해태나 게으름도 피우지 않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수행의 길을 반조하고 존중하며 자신이 지금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분명히 알고 정진을 계속해 나갈 때 저 무명의 생사윤회의 두꺼운 벽을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에게 정진의 힘과 자신의 모든 마음과 몸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한 관찰의 참 지혜가 없다면 저 두꺼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방황하고 혼돈에 잠겨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대자비심을 내시어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직접 수행하시어 깨달으신 이 위빠사나 수행의 길을 통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고 자성(自性)의 영원한 존재라고 하는 환상과 착각의 아견(我見)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도록 매우 간곡히 이르시고 당부하신 것이다.

 

이 위빠사나 수행의 방법은 가장 쉽고 가깝고 평범한 길이며, 위대한 깨달음의 길이기에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이며, 이 수행법은 너무도 쉽고 이해가 빠르며 체험이 확실하기에 스승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수행이다. 자신이 지금 현재 진행시키고 있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라든지 지금 걷고 있는 몸의 동작에 마음을 연결하는 일은 다만,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할 뿐 특별한 환경과 조건을 만들며 현존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창조하여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기 몸에서 존재하고 있는 일들이기에 7세 난 소년소녀에서 80세 난 어른 노인에 이르기까지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몸의 움직이는 동작과 함께

몸의 상태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경우일 때는 우선 마음의 결정에 따른 변화를 인식 관찰하며, 다리를 바꾸겠다는 생각이 일어났음을 알고 '다리 바꾸기 원함, 다리 바꾸기 원함'이라 외운 다음 일체 몸의 동작을 하나하나 마음이 함께 하도록 아주 서서히 움직이면서, '움직임, 움직임, 움직임' 혹은 '다리를 폄, 다리를 폄, 다리를 폄'이라 하며 팔을 내릴 때는 '팔을 내림, 팔을 내림, 팔을 내림' 손이 어느 부분에 닿으면 '손이 닿음, 손이 닿음, 손이 닿음', 일어설 때는 '일어섬, 일어섬, 일어섬' 서 있을 때는 '서 있음, 서 있음, 서있음' 걷고자 할 때는 '걷고자 함, 걷고자 함, 걷고자 함'이라 하여 마음이 분명히 알게 한다. 왜, 그래야만 하는가.

 

음직임에 따라 명칭을 붙이지 않으면 움직이는 동작에 '나'가 개입되므로 '내가 움직인다' 라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만 명칭을 붙임으로 해서 중간의 어떤 주인(主人)이나 '나' 혹은 '自我'가 존재하지 않고 마음의 명령에 몸이 움직이는 현상을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함이며 습관을 들이기 위해서다. 마치 유치원생이 처음 글자 익히기 공부할 때, 배우는 글자를 흑판에 써 놓고 소리내어 읽음으로서 분명히 마음속에 기억되게 하며 분별을 갖게 해 주고, 인식을 빨리 하기 위함과 같은 뜻이다.

 

걷고자 하여 걸을 때 속도가 약간 빠르면 '오른 발 왼발, 오른 발 왼발, 오른 발 왼발' 을 계속하며 걷는 경행을 약 1시간 정도하며 마음을 걷기와 다리의 움직이는 변화에 집중시킴으로서 비록 몸이 움직이더라도 그를 관찰하는 마음은 앉아서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관찰하는 것이나 차이가 없게 됨으로써 앉아서와 걷기에 차별없는 정진이 계속되고 걷는 과정에서도 삼매가 함께 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서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걸으며 걷기 경행을 하려 한다면 3단계로 구분하여 시작한다. 걷고자 할 때, 역시 ' 걷고자 함, 걷고자 함, 걷고자 함' 을 하며 자신의 뜻을 밝히고 발을 들어 올릴 때 '들어 서'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들어 올리고 동시에 들어 올리는 다리를 관찰하고 몸을 받아 들이고 있는 다른 쪽 다리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피부와 근육의 감각을 통하여 느끼며, 다리가 들여 올려져 앞으로 밀 때에는 ' 앞으로'라고 외우면서 다리가 앞으로 나아갈 때 바람결에 스치거나 거슬리는 것을 느끼며 관찰한다. 다시 다리를 내려 놓을 때, '내려 놓음'이라 하여 ' 왼쪽다리 들어 앞으로 놓음, 오른 쪽 다리 들어서 앞으로 놓음' 이라 하여 1시간 정도를 일념이 되게 하여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몸의 움직임을 마음이 관찰하는 과정은 오직 비물질(nama)의 명령과 물질(rupa)의 운동에 의한 반응으로 상호 연관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물리적 현상으로서 하나의 행동이 끝나면 다음의 행동이 연속 되어지는 원인과 결과의 원리이며 이것이 변화하고 움직임으로서 저것이 변화되어 움직이며,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으며 저것이 없어지므로 이것이 없어지고 하는 연기의 법일 뿐, 그 당처에 '나' 라든지 '내 것'의 움직임이라는 어떠한 주관적(主觀的) 관념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체험을 통해서 알아야만 자신의 정신과 육체의 자연적 성품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함으로서 수행인의 삼매가 이루어지게 되고 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어떠한 물질의 행동에도 마음의 명령에 의한 움직임이 있을 뿐이며, 여기에서 마음과 몸(nama-나마/ rupa-루빠) 혹은 비물질(非物質)과 물질의 조화감을 이루게 된다. 걷기가 끝나면, 돌아오는 위치에서 자리에 앉을 때까지의 모든 행동을 처음 자리에서 떠날 때와 똑같이 관찰하며 하나의 동작이라도 놓침없이 자리에 앉는다. 그런 다음 원위치인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관찰로 돌아 왔을 때, 마음은 육체의 움직임에 동요없이 지속적이고 일관적인 일념상태가 되어 극히 평화로워지고 고요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관적이고 지속적인 정신집중이 계속될 때만이 강한 삼매를 이룰 수 있으며 이를 움직임 속의 고요함(動中靜)이라 하며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마음은 고요하나 고요함 속에 몸의 움직임이 있기에 (靜中動) 앉고 일어서며 움직임에도 마음은 계속하여 관찰로 한줄기의 물 흐르듯 할 때 마치 나무와 나무를 서로 마찰시키어 그 힘으로 불을 이루게 되는 것과 똑같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불을 일으키고자 하여 나무와 나무를 힘껏 문지르다가 팔이 아프거나 힘이 든다고 잠시 쉬게 되면 그 사이 뜨거워졌던 나무가 식어버리게 되므로 불을 얻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오직 지속적인 노력의 힘으로 마찰을 일으켰을 때 불은 타 오르게 되어 목적을 이루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여기서 참고 견디는 힘과, 끈질긴 노력이 없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이 사마디(samadhi : 三昧) 역시 계속적인 마음의 집중력에 의해서 이루어지게 되고 이 사마디를 통해서 내관(內觀)이 이루어져 도(道)와 과(果)를 얻게 되므로 이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끊임없는 정진을 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 수행인의 모든 행동에 마음이 함께하는 습관을 갖기 위해서는 모든 행동을 급히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움직여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이 몸의 움직이는 당처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나이든 노인네나 오랜 병을 앓고 나서 회복하는 사람이 움직이 듯 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건강한 사람들은 몸의 움직임이 매우 빠르고 민첩하나, 병약한 사람이나 노인네들은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매우 천천히 조심성있게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들도 이와 같이 함으로써 몸의 동작 하나하나가 마음이 명령에 따라 움직이거나, 아니면 몸의 동작에 마음이 함께 하는 결과가 됨으로서 마음이 간단(間斷)이 없고 계속적으로 집중되는 현상을 갖게된다.

 

처음 시작하는 수행인은, 이와 같이 천천히 움직이는 동작에 따라 마음으로 관찰하는 일을 몇주에서 2~3개월, 하루 10~16시간 정도 수련해 나가면마음이 단련되어 빨리 움직이는 경우에도 마음은 그 움직임을 언제나 인식하고 스스로의 행동에 자제하게 될 뿐아니라 순화된 태도를 갖게 되므로 수행이 되지 못한 사람과 매우 다르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은 비단 몸의 뭄의 움직임만을 천천히 병약자처럼 하는 것이 아니라 오관(五官)을 통하여 일어나는 모든 현상도 같은 방법으로 대응한다. 자신의 수행에 직접 관계되지 않는 것은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보지 못한 듯, 냄새가 있어도 없는 듯, 어떤 느낌이 있어도 없는 듯 관심 기울이지 않아야 되며, 만약 필요에 의해서 관심을 기울일 때는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아랫배의 관찰로 부터 옮겨 어떤 사물을 보고자 한다는 사실을 두고 '보고자 함, 보고자 함, 보고자 함'이라 3번 내지 4번 정도 관찰 인식하고, 다시 어떤 사물을 직접 보고 있는 동안에도 ' 보고 있음, 보고 있음, 보고 있음'이라 외우고 인식 관찰함으로서 자신이 그 사물에 몰입되어 즐거워하거나 싫어하는 현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한다. 이렇게 하여 집착과 소유욕을 일으키지 않게 됨으로서 자신을 물질적 유혹으로부터 지키게 되고, 동시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게 해주는 유일한 보호 방법이 되는 것으로서 기타 감각기관도 같은 방법으로 다스려 보고 듣고 느끼며, 냄새와 만짐에 차별을 두지 않아 평등해지고 마음의 동요를 받지 않게되면 번놔가 자라는 원인을 제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찰의 방법으로 여섯가지 문(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통하여 일어나는 좋아함과 싫어함 등에 매달려 끌려가면서 탐. 친. 치를 일으키는 마음을 다스릴 때 마음을 바깥 현상 경계에 끌리지 않고 고요해지며 평화로워진다. 이때 비로소 육근이 청정해지고(여섯가지 문단속이 잘되어 깨끗함) 사대(四大:우리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기본적 요소로써 흙의 성분인 뼈. 머리카락. 손톱. 물의 성분인 피. 고름. 소변. 눈물. 콧물. 불의 성분인 몸의 더움과 차가움. 바람의 성분인 손의 움직임. 눈의 움직임. 호흡등)가 강건 하여진다. 즉 네가지가 균형을 맞추어 기능을 발휘한다.

 

아난존자와 경행(걷기) 정진

수행인의 좌선 중 허리를 펴고 눕고 싶을 때에도 역시 우선 심경의 변화부터(눕고 싶다는 생각을 망상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 자체를 관찰함으로서 생각의 뿌리없이 움직이는 모습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깨닫게 해주는 또 다른 형태의 수행의 주제가 되는 것이라 함)관찰하여 '눕고 싶다, 눕고 싶다, 눕고싶다'를 관찰 인식하고 거기에 따라 관계되어 일어나는 모든 몸의 행동, 즉 다리를 펼 때 천천히 몸을 움직이면서 다리 근육의 이완과 팽창 현상을 피부로 느끼며, 마음으로 '다리를 폄, 다리를 폄, 다리를 폄'하며, 팔을 펴서 뒤로 돌릴 때도 역시 다리의 동작을 살피듯 한다.

 

또 손이 방바닥에 닿았을 때는 '손이 닿음, 손이 닿음, 손이 닿음' 허리를 펴고 누울 때는 ' 눕는다, 눕는다, 눕는다' 몸이 완전히 닿아서 누웠을 때는 ' 누웠음, 누웠음, 누웠음' 이라고 하여 몸의 모든 동작이 마음과 함께 끝난 다음에는, 마음을 다시 아랫배의 일어남, 사라짐에 집중시키되, 만약에 누운 자세에서 아랫배의 운동동작이 분명치 않아 스스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피부로 느낄 수 없을 때에는 자신의 두 손바닥을 아랫배의 배꼽 주위에 조용히 놓으면서 손으 동작을 관찰한 다음 손바닥으로 아랫배의 가벼운 진동작용을 느끼도록 한다.

이와같이 해서 맑은 정신으로 분명히 관찰하여 졸음에 떨어지거나 잠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서 1시간 정도 보내어야 한다. 그러나 처음 시작하는 수행인들에게는 가급적 누워서 수행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으며, 다만 취짐전에 와선(臥禪)을 하는 것은 누우면 쉽게 잠이 들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오랜 시자였던 아난 존자는 부천미생존 당시 오직 수다원과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다음 가섭존자에 의해서 오백(五百0아라한을 모아 부처님의 경전을 결집토록 하였다. 그러나 아난 존자는 경전의 결집 전 나라까지 아라한이 아니였기에 결집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난존자가 참석하지 못하면 경전의 외워냄이 불가능하여 경전이 결집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 때 아난은 아라한과의 성취를 결심하고 정진 노력 중이었으나 경전 결집 전날 밤에 이르도록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경행 정진인 까야같따사티(Kayaghattasati: 일정한 장소에서 마음을, 걷는데 집중 시키며 왔다 갔다 하는 것)를 계속하는데 경전 결집 날의 먼동이 터 오고, 이때 스스로 느끼기를 '정진에는 행. 주. 좌. 와의 균형을 지켜야 하는데 나는 너무 걷기만 했구나, 이제 처소에 들어가 누워서 허리를 쉬며 정진해야겠다' 라고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며 마음집중시켜 자리에 들었다. 그가 몸의 동작을 예리하게 정확히 관찰하면서 눕기 시작하여 머리가 배게에 채 닿기전에 자신의 다리가 완전히 침상바닥에 닿기전 몸의 균형 잃은 진동의 변화 순간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부담과 무거웠던 짐을 일시에 내려버린 듯 가벼운 몸이 되고 모든 번뇌로 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법에 대해 의심이 없어 부처님의 경전을 결집 하는데 참석했던 것이다.

 

아난 존자는 사실상 일반적 수행자세인 행. 주. 좌. 와 사위의(行. 主. 坐. 臥. 四威儀) 에 속하지 않은 자세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유일한 분인 것이다. 누워서 정진을 1시간 정도 행하고, 다시 일어설 때도 누울 때 처럼 모든 행동을 관찰, 만음을 집중시키며, 다음으로 걷기 내지 좌선으로 옮기면서 몸의 움직임에 마음이 함께 하였기 때문에 간단(間斷)이 없고, 흐트러짐이 없어서 적정(敵靜) 해 졌을 때, 삼매가 굳고 깊어짐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은 미세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마음 집중력은 응축되어그 힘이 마치 수소가 응축 극점에 달하여 조그만 충격에도 가공스러운 폭발력을 내 듯이, 모든 번뇌를 처리하는 무서운 힘을 갖게 된다. 동시에 깊은 내관을 이루게 될 때, 큰 깨달음은 일순간에 나타나게 되고 그것이 어느 때, 어느 곳인지 예측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인들이 적은 쉬임과 번뇌의 침입을 가벼이 여기고 마음집중을 간단 (계속되지 않고 잠시 끊어짐)이 있게 한다면 삼매가 지속적으로 유지되지 않기 때문에 깨달음은 자꾸만 지연되는 것이며, 이것은 마치 나무와 나무의 마찰로 불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자주 쉼으로 해서, 나무와 나무 사이에 충분한 열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수행인이 마음집중 수행에 조그만 간격이라도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인내로서 어려움을 극복하며, 큰 용기로써 하나의 현상도 놓치지 않으며 용맹스럽게 관찰하며, 굳은 결정심으로 정진하며,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깊어지므로 삼매를 이루게 된다.

 

공부 즉 수행을 신심있게 바르게 성실하게 지어가면 수행에 진전있음을 하루가 다르게 본인 자신이 느끼게 된다. 그 예로서 마음의 견고한 집중상태와 졸음의 적음, 망상이 기회를 얻지못하는 사실등 본인 자신이 너무도 선명하게 느끼게 되고, 알게되는 것이다. 수행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잠을 잘 때에도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깊은 잠이 들 때까지 계속 관찰하게 되고 또는 잠이 들었다가 깨어날 때에도 잠시의 공간없이 곧바로 일어남과 사라짐을 역력히 하게 되기도 하며, 더러는 잠을 자기 위해 누웠다가 2시간 3시간 정도를 정진으로 보내게 되는 경우도 있으며, 정신이 더욱 맑아지며, 이러할 때에는 육체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너무도 선명하여, 몸과 마음이 일체가 되어 오히려 잠을 자고 난 다음보다 더 상쾌함을 느끼게 해준다.

 

이와같이 극히 작은 행동 하나라도 놓침없이 하나하나의 현상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관찰하여 그 현상의 실체를 바르게 알아야한다. 하나의 현상도 놓침없이 관찰해 가는 것은 바다속에 돌을 던져 쌓으려는 노력과 똑 같은 것이다. 돌을 물 속에 던져 넣을 때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다고 중단하면 돌을 쌓을 수 없게 되나, 계속 쉬임없이 던져 넣을 때 돌 하나하나가 각기 자리 메움의 역활을 하여 어느 날 수면위로 차오르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마를 극복하는 법 (졸음을 이기는 법)

좌선 수행중에 육체적 피곤과 혹은 긴장감의 해소 내지는 경각심의 부족으로 인하여 마음집중이 약해질 때, 졸음이 가장 빨리 그 상태를 이용하여 침입해 온다. 이 때에 자신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졸음에 떨어져 혼미한 상태에서 거대한 몸이 바람 앞에 버드나뭇가지 흔들리듯 하며, 설사 몸은 심하게 움직이지 않는다 해도 고개를 떨어뜨린 자세라든지 심지어는 코까지 고는가 하면 앞 뒤로 흔들다가 앞이 마른 마루바닥에 찧는 경우가 예사로써, 이는 필자가 미얀마, 마하시 센터 수도원에서 외국인과 함께 생활할 때 종종 목격했던 사실이다.

 

이 상태에서 무엇을 인식하며 무엇을 경험하고 있을까? 어떤 수행인은 '졸음 속에 수행이 있다, 혹은 자기 주제가 역력하다.' 하는 데 이는 참으로 기적과 같으며 만약에 사실 그 정도로 정신력이 강하다면 왜 졸음에 시달리거나 마음이 몸의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여 몸이 앞뒤나 좌우로 흔들리며 본인이 그와같은 흔들림의 느낌조차 갖지 못하여 계속 흔들고 있을까? 그러하다가 졸음에서 깨어나면 그는 자세를 바로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분명히 졸음의 상태와 깨어 났음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해준다.

 

수행인은 졸음에 대해서 좀더 냉정하고 그 악영향을 깊이 생각해야 된다. 생각컨대 차라리 망상 피우고 있는 것이 졸음에 떨어져 있는 것보다 나으리라 본다. 왜냐하면 망상을 피우는 것이 졸음에 의식을 잃고 있는 것 보다는 훨씬 스스로를 깨닫고 정진하려 노력하는 기회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 중에 졸음이 올 때는, 우선 자신에게 지금 졸음이 오고 있음을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같이 인식되면 재빨리 '졸립다, 졸립다, 졸립다'고 관찰하고 계속해서 정신을 차리고 있으면 어느 정도는 쉽게 졸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강도 높은 졸음일 경우에도 쉽게 물러설 것이 아니라,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옴을 느끼며, 정신이 더욱 혼미해지려 할 때, 계속해서 '눈 꺼풀 닿음, 눈 꺼풀 닿음, 눈 꺼풀 닿음'한 다음 ' 졸립다, 졸립다, 졸립다'를 연속적으로 외우다시피 하며 노력하다보면 이제는 또다시 눈의 무거움을 느낀다. 이 때에는 졸립다 생각하던 것을 ' 무거움, 무거움, 무거움'이라 하고, 다시 '졸립다, 졸립다, 졸립다'를 계속하면 눈이 무엇에 찔린 듯 따끔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서 정신을 놓아 버리게 되면 일 순간에 깊은 잠에 떨어지게 되나 따끔거리는 사실을 재빨리 인식하고 눈이 ' 따끔거린다, 따끔거린다, 따끔거린다' 관찰하면 따끔거림이 가시면서 정신이 약간 맑아지는 듯하다. 이 때에 계속 다시' 졸립다, 졸립다, 졸립다'를 되풀이 하면 머리의 뒷 부분에서부터 어떠한 바람이 불어오는 듯함과 동시에 눈꺼풀이 일시에 확 올라가는 듯함을 느끼게 되며, 이 때에 졸음은 사라지고 맑은 정신이 된다. 이 때에는 ' 맑은 정신, 맑은 정신, 맑은 정신'이라 관찰한 다음 다시 원위치인 일어남. 사라짐으로 돌아간다.

 

이 진행시간이 대게는 약 2~3분에서 10~15분 까지일 수도 있으며 더욱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뒤에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졸음을 극복해 나가는데에 관해 설법 하신 것을 이야기 하겠다. 이와같이 졸음을 극복하도록 노력하여 실지로 졸음을 이겨내는 경험을 얻어냄 으로써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고 뒤에 배우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계속적이고 용기있게 노력했음에도 졸음이 가시지 않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누워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는 졸음에 항복함이 아니라 육체적 휴식이기 때문에 시간을 정하여 15~30분 정도로 그쳐야 하며 계속해서 일어남, 사라짐의 관찰을 놓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진지하게 열심히 수행하는 사람들은 졸음에 시달림이 적게되고, 잠을 자는 시간도 밤 10시에서 2시까지나 밤 11시에서 1시까지 정도이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허락하신 수면시간은 4시간에서 특별한 경우 6시간 정도이다. 이 특별한 시간은 환자나, 초보자나, 건강상의 이유가 있는 사람들로 제한 된다. 부처님께서는 삼경(1시~3시까지)의 정진삼매의 시간이 주무시는 시간이었다고 하시었다. 처음 수행하는 이들은 4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며 참으로 부족하다면 5~6시간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6시간의 수면은 수행인들에게 너무도 충분하므로 수면부족으로 인한 건강 문제가 생길 수 없을 것이다.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는 이는 수면을 줄여 가면서라도 정진에 힘을 써야 할것이며, 섬세하고 예리한 관찰력으로 모든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잠자리에서 깨는 즉시 자신이 잠에서 깨어남을 관찰하고 일어나는 순간서부터 자리 정돈, 대 소변, 세수과정 등의 모든 면에서 동작이 빠를지라도 가급적 마음으로 정확하게 관찰 인식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졸음을 다스리는 방법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우선 자기자신에게 졸음이 오고 있음의 인식이다.

 

마치 재산을 가진 집주인이 문단속을 잘하고 바깥상황에서 경계심을 가지고 있거나 바깥에서 도적이 들어오려는 상황을 바로 느낄 때, 인기척을 방안에서 내면 도적은 급히 달아나 버린다. 그러나 만약 도적이 접근하여도 방안에서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도적은 주저함없이 그 집안에 들어와 필요되는 물건들을 훔쳐가게 되는 것처럼 졸음이라는 도적이 수행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와 수행인을 망쳐 놓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다. 수행인들은 졸음에 대하여 참으로 경가심을 가지고 다스려 나가야 본인이 원하는 목표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식사시의 관찰

식사를 시작하기 위해 밥상 앞에 앉는 과정에서 밥상을 바라 볼 때에 마음은 ' 바라 봄, 바라 봄, 바라 봄'이라 하며 팔을 펴서 음식을 집어 먹을 때 등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서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음식을 참으로 수행하는데 필요한 약으로 먹을지언정 주린 배를 양껏 채우기 위해 먹지않게 되며, 시주자 혹은 음식을 만든 이에게 감사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음식을 입에 넣을 때와 씹을 때 그 동작을 관찰하면서 그 맛을 알게되고 소화액이 음식에 충분히 함유되어 소화에도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영양분의 흡수효과도 매우 높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식사중에 일어나는 모든 육체적인 동작을 관찰하고 인식해야되나 처음 시작하는 이로서 너무도 많은 동작을 모두 관찰할 수 없으므로 많은 부분을 놓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계속적인 노력을 하면서 마음집중이 점차 향상되어가며 좌선등의 시간에서 삼매를 경험하게 되면 쉬워지게 되며 수행이 깊어지게 되면 의식적으로 관찰인식하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연적 현상으로 함께 하게 되기 때문에 모든 행동에 주의가 뒤따르고 법도와 품위가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꼭 필요한 행동만을 하게 되기 때문에 수행인으로서 부족됨이 적어지게 되며 마침내 성(聖)스러운 고상한 행동으로 다른사람들의 모범이 되게 하는 것이 수행의 결과요, 수행에 대한 보람이며 마땅히 나타나야 될 현상인 것이다.

 

이와같이 수행자가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겸허하고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는 데서 수행자의 위치는 향상되는 것이며, 행동의 품위와 고결함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그리고 음식의 좋고 나쁨, 거칠고 섬세한 맛의 좋고 나쁨등에 차별심을 일으키지 않으며 그릇의 잡고 놓음, 음식의 집어 올림이나 입에 넣었을 때 씹는 소리등이 나지 않음으로 음식먹는 그 자체가 수행과 연결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음식을 맛따라 먹고 먹는 동안에도 소란스러운 태도와 이야기로 인한 시끄러움이 많으나 수행자들은 음식이 온 것에서부터 음식이 자신에게 주는 이익등을 깊이 관찰하고 반조해야 하기 때문에 조용히 안정된 자세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

 

여러 종류의 마음(Cittanupassana)

수행인이 죄선 중에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관찰하는 도중 지루함을 느끼게될 때, 그 지루함이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싫음으로 변하고 다시 혐오감 등으로 변하게 된다. 이 때에 신속히 지루함을 알고, ' 지루함, 지루함, 지루함'을 외우면서 관찰하면 지루함은 사라지게 된다.

 

기쁜 마음이나 분노심, 탐심, 진심, 악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등 마음의 변화를 일어나는 그 즉시에 인식하여 그 당처를 관찰하며 2번 내지 3번 되풀이 하여 외울 때( 입으로 소리내어 외우는 것이 아니며 머리로 생각하여 지어 가는 것) 이러한 마음들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라도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되 마음집중이 되지 못하고 다른 현상이 나타났을 때에는 즉시 그 자체를 인식하고 관찰함으로서 수행의 주제가 아닌 것은 곧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객이 주인 노릇하는 결과가 되며 갖가지 감정에 사로 잡혀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개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마음의 변화를 알고 그 일어남에 대해서 신속히 처리하여 사라지게 함으로서 그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를 찝따누빠사나(Cittanupassana: 자신의 참다운 성품을 보았다.)라고 한다.

 

인간은 이런 저런 생각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알려고 하고 또 다시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내가 그렇게 슬퍼했고, 괴로워 했고, 분노에 차 있었으며, 진심을 내고, 욕심부리며, 사랑하고, 미워했다는 등 인간은 어려서 부터 '나' 라고 하는 존재가 함께 성장 생활해오는 것으로 여겨왔다. 그러나 사실 '나'라고 하는 어떤 존재도 함께 해 온것은 아니다. 다만 행동과 사물의 존재에 대한 인식작용만이 조건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계속되었을 뿐 '나'라고 하는 개체가 따로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자아(自我)라는 관념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적이고 잘못된 신념이다. 그것은 '나', '나의 것'이라는 이기적인 욕심과 집착, 소유욕등에 의해서 발로(겉으로 드러남)된 것이며 그것은 동시에 속임과 교만과 이기적인 사고방식을 갖게 하는 것으로서 불선업(不善業)의 근본이 된다고 하시었다.

 

중생의 내면 깊숙이에는 여러가지의 관념이 자리잡고 있으며 그것으로 자기 보존과 영속적(오래 지속되는 성질)보호를 위해서 내세우는 영원성, 참다운 '나'라는 사실성과 진실성이 없는 공상적인 아사상(我思想: 자기 중심적인 생각) 이라고 할 수 있다.

 

중생은 본능적으로 이를 통하여 자기의 약점과 허구선을 보호하려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약점을 감추고 약한 의지를 강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창조적 절대자를 설정하여 그 속에 들어가 의지하고 보호 받으려는 것이며 그 가상적, 가정적인 절대자의 권능을 이용하여 자기의 욕구를 달성시키고 그 허상의 위치에 안주(安住)하려는 자기 속임수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두가 진실 앞에서는 하나의 물거품과 같은 것으로 모든 존재는 다만 조건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며 원인과 결과에 의한 하나의 현상적 연속이기에 "어떠한 실체도 이 심오한 진리의 현상 속에 있는 한 영속성을 지니지 못했다."라고 갈파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마음으로 부터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하나하나 관찰하고 그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자연적 현상이며 그 현상을 관찰하는 마음 혹은 인식능력도 역시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알면 여기에 '나'라고 하는 어떤 존재가 있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 나는 자아(自我)를 갖고 있다'라는 견해를 상견(常見: 세계나 모든 존재는 영겁불변[永劫不變]의 실재이며 사람은 죽으나 자아는 없어지지 않으며 五蘊은 과거나 미래에 상주불변하여 영구히 존재한다는 망신[妄信])에 빠져 있다고 하시었고, 동시에 ' 나는 자아를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도 단견(斷見: 세상만유는 무상[無常]한 것이어서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한 번 죽으면 몸과 마음이 없어져서 공무[空無]로 돌아간다고 고집하는 소견)에 떨어져 있다고 하시었다. 어떤 사람들은 슬픔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는 그 자체가 '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라고 반문 하겠지만 슬픔이 일어났다고 관찰하고 인식하는 그 자체가 역시 하나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다.

 

'나'(自我:attman)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는 거문고나 피리 소리에 비유하시었다. 거문고 자체에 소리를 저장해 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리가 완전히 없어진 것도, 또한 있는 것도 아니되 다만 줄을 튕기는 조건이 있으면 소리는 일어나고 또한 같은 이유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거문고나 피리소리는 그 소리를 낼 수 있는 조건을 만날 때는 장소나 시간에 구애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다. 육근(눈. 귀. 코. 혀. 몸. 마음)의 작용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이는 오직 스스로 수행을 통하여 증명할 뿐, 상상적이거나 관념으로는 대답이 될 수 없고 문제해결의 길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고통을 참고 견디는 것

수행인이 좌선의 자리에 오래 앉아 있게 되면 몸이 뻣뻣해지고 피로하고 여러군데 다리가 저려옴을 느끼게 된다. 이와같은 경우에도 역시 다리의 저려오는 부분이나 통증이 일고있는 부분에 마음을 집중하여 그 현상을 관찰하게 될 때, 가벼운 통증이나 저려옴은 즉시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 가벼운 통증이나 저려옴이 마음집중을 통해서 사라지지 않게 되면, 다리를 펴거나 다리의 위치를 바꾸게 되는데, 이 때에 움직이는 동작을 서서히 진행하면서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마음을 집중시키도록 노력하여야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몸위에 무엇이 기어오름이나 혹은 가려움등을 느꼈을 때에도 즉시 긁어 버리거나 기어 오르는 듯한 곳을 손으로 때려 무엇인가를 잡는 행동을 하지않고, 가려움이나 기어오름을 인식함과 동시에 마음을 그 곳, 당처에 집중시켜 '가려움, 가려움, 가려움'을 3번 정도 관찰하면 가려움이 없어져 버리므로 극서을 느끼지 않게 된다.

 

이와같이 모든 느낌을 통한 현상이 일어나는 즉시 그 당처를 관찰 마음집중 시킴으로서 사람짐을 분명히 알게 되었을 때 웨다누빠사나(Vedanupassana) 즉,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예리한 관찰을 통하여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가려움, 기어오름, 피곤함등에 '나'를 부여함이 잘못이다. 내가 얼마전에는 괜찮았는데 지금은 피곤하다, 무엇이 기어오른다, 가렵다 등을 분별하게 되면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하는 집중력이 약해지고 산만해져서 '나'의 피곤, '나'의 가려움, '나'의 등에 무엇이 기어오름이 된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그 현상을 인식 관찰하게 되면 그 '나'의 피곤이라든지, 가려움, 기어오름등은 사라지고 그것들은 '나'와 관계되는 것이 아니며 '나'라는 주체가 개입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는 하나의 새로운 현상이 일어나면, 먼저 것이 사라지고, 또 다른현상이 나타나는 계속적인 것으로 마치 전류의 흐름과 같은 이치이다. 전류가 흐름으로 해서 불은 밝혀지는데 불빛이 계속 있음으로해서 일반적으로 전류의 흐름에 끊어짐과 이어짐이라는 지속적인 현상이 있음을 마치 없는듯이 착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느낌이나 나쁜 느낌, 몸의 통증, 가려움 등을 매우 주의 깊게 자세히 관찰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현상을 정확히 알아야 되는 것이다.

 

이러는 동안 더러는 정말 몸이 뻣뻣하고 통증이 심하여 다리를 바꾸거나 일어서야 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참을 수 있는데 까지 참아야 한다. 부처님 말씀에 '참고 견디는 힘이 곧 열반[성불]을 증득케 한다' 하시었다.

 

수행 중에 일어나는 어떠한 고통도 중생이 윤회를 통해서 겪는 고통만큼 큰 것이 없기에 이 고통을 끊어 버리는 방법은 굳게 참고 견디는 수행을 통해서 열반을 증득케 하는 즉 성불의 길에 오르게 하는 것이다. 참을성 없이 다리의 저림이나 몸의 피곤과 긴장감 때문에 다리를 자주 바꾼다던지 자주 일어섰다, 앉았다 한다면 일념 정진이 되지 못하고, 고통이나 저려옴 등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지 못하게 되며 삼매를 증득 체험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일념 정진의 삼매를 이루지 못하면 내관적 깊은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고, 내관적 깊은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자신의 마음에 자연적 성품을 보지 못하게 되어 도(道: maga)에 이르지 못하며, 도(道)에 이르지 못하면 수행의 궁극적인 목표인 과(果: phala) 닙바나, 깨달음 즉 성불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수행인이 수행하는 목적은 깨달음을 통한 중생의 생사윤회를 벗어남이요, 성불함이기 때문에 어떠한 고통이나 어려움도 참고 견디며 수행하는데서 만이 목표가 달성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불하는 데는 참고 견디는 힘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수행인이 외적인 육체의 고통과 내적인 마음의 갈등, 불안, 초조와 괴로움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쉽게 자리에서 일어서거나 마음집중을 포기한다면 이는 매우 애석한 일로서 마치 목마른 자가 물을 찾아 헤매다가 우물 가까이에서 되돌아 가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수행인은 어떠한 어려움이나 고통이 있더라도 좀 더 참고 견디어 자신의 마음을 자유로이 방황하게 하며 이런저런 상황에 분별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다만 자신의 몸에서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떠한 현상이든지 그 현상 당처에 자신의 마음을 강렬하게 집중시킴으로서 그 현상의 사실적이고 진실한 모습을 바르게 보게 되며 그 현상들이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 일어나고 어떠한 조건에 의해서 사라지는지 원인과 결과를 반드시 보아야 하고 깨달아야 한다.

 

이는 수행자 자신이 직접 수행을 통한 체험에서 만이 이해되거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이며 이론만으로는 되는것이 아니다. 이론상으로는 얼마든지 설명되고 이해할 수 있다 하여도 경험이 없다면 실지로 그러한 상황에 부딪쳤을 때 자연히 긴장되고 당황하게 되며 뒤로 물러서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이나 저려옴이 있을 때에는 쉽게 자리를 옮기거나 자세를 바꾸기 보다는 고통이나 저려옴의 그 당처에 밀착 관찰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 성품울 보도록 하며 고통의 성질이 어떻게 진행되는가를 확실히 이해하고 깨닫게 된다.

 

이러한 체험이 있게되면 생사의 고통이 아무리 크고 무섭다 하더라도 더 이상 두려움이 없고 무서움 없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맞이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이 세워지는 것이다.

 

망상 다스리는 법

좌선으로 모든 행동이 정지되어 있을 때에는 마음이 언제나 분명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아주 밀착된 상태에서 자신의 아랫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에 집중되어야 한다.

 

이와같이 마음집중이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일어나고 사라짐의 현상따라 시작과 중간, 끝맺음이 분명하게 관찰되면 좌선의 자세가 매우 바르고 의연히 앉아 있어 몸과 마음이 아주 고요해지고 평화스러워지나 관찰하는 집중된 마음이 망상으로 인하여 흐트러지는 순간 몸은 동요를 일으키며 균형을 잃어 앞뒤로 흔들리게 되거나 허리가 구부러지게 된다.

 

이러할 때에 수행자가 즉시 자신의 육체적 변화가 마음의 흐트러짐 때문임을 관찰하고 '망상, 망상, 망상'이라고 관찰하게 되면 몸은 다시 바른자세를 고쳐 잡게 되나 만약에 몸의 진동이 크게 느껴지고 계속될 때에는 ' 흔들림, 흔들림, 흔들림'이라 관찰하면서 몸의 자세를 바르게 잡아야 한다. 만약에 계속되는 망상으로 인하여 몸이 옆으로 움직일 때에도 ' 움직임, 움직임, 움직임'이라 관찰하여 몸이 바르게 되면 다시 원 위치인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돌아와 그 현상을 예리하고 정확하게 밀착된 상태에서 관찰하게 되면 마음은 다시 고요해지고 평온스럽게 된다.

 

그러나 다시 망상이 꼬리를 이어 계속될 때에는 즉시 '망상, 망상, 망상'이라고 명칭을 붙여 관찰하면서 마음을 망상 당처에 두면 망상은 사라지고 다시 고요해질 때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도중에 어떤 망상이 원인이 되어서 탐심이 일어났을 경우, 탐심이 일어났음을 즉시 알아차려 ' 탐심, 탐심, 탐심'이라 관찰하여 알아 차리고 인식하여 마음을 수련하며, 진심이 일어났을 경우에도 곧바로 진심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알아 차리며 관찰하는 순간에 진심은 사라지게 되는 것인데. 진심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관찰되지 못하면 진심에 사로잡혀 버리고, 진심의 노예가 되어 여러가지 부작용을 일으키며 진심으로 인하여 잃는게 수 없이 많게 되는 것이다.

 

진심을 다스리려면 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만 참으려하면 진심은 더욱 기승을 부려, 자신을 다스릴 수 없는 경지에 까지 이르게 되므로 진심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재발리 인식하고 동시에 '진심, 진심, 진심'하며 마음을 집중하면 진심의 불꽃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유교에서도 진심을 다스리는 방법으로서 참을 인(忍)자 3번을 쓰게 되면 진심이 다스려진다고 하였다. 하물며 진심을 글로 쓰지 않고 진심이 일어났던 마음을 다스려 그 뿌리를 바꾸는데 어찌 다스려지지 않겠는가. 이와같이 하여 진심을 사라지게 하는 과정은 너무도 빠르기 때문에 밖으로 나타나기 전에 정리될 수 있으나 다만 얼마나 빨리 진심이 일어났음을 인식하고 자각하게 되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재빨리 포착인식하고 관찰하는 수행법이 요구되는 것이며 이 위빠사나(vipassana) 수행법이 탐. 진. 치를 다스려 덕이 높고, 평온하며, 슬기로운 수행인 내지 사회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차 있어 고정적으로 남아 있는게 없기 때문에 비울 수가 없는 것이 아닌가. 모든 현상은 잠시도 머무는 바 없이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질 뿐인데, 어디에 무엇이 머물고 있으며 채워져 있기에 비워야 되겠는가. 머무는 바가 없고, 가득한 게 없기에 비울 것이 없다.

 

다만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현상들을 하나라도 놓치지 아니한 채 세밀히 관찰해 감으로서 그 자연적성품울 알게되고, 그 원인을 알게 될 때 그것을 처리할 수있는 지혜가 열리게 되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불안과 공포가 없어지게 되고, 순간에 일어난 감정의 노예가 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는 수행단계를 찝따누빠사나(Cittanupassana)라고 하며 이는 곧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관찰을 통하여 명확히 보았다'라는 뜻이다.

 

만약에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관찰이 없다면 사람들은 쉽게 착각되어 마음은 고정된 것으로 판단하고, 어느 곳에 자리잡아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마음을 비운다고 하나 그것은 사실과 관계없는 하나의 관념인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마음의 현상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현상을 따라 그 자연적 움직임을 관찰하여 마음의 본성을 깨닫게 해 주는 유일한 수행법이다.

 

이 수행에서는 오직 사실적이며 현실적인 현상을 적나나(赤裸裸: 진리를 구하는 수행자의 해탈경계[解脫境界]가 마치 모든 분별심[分別心]이 떨어져서 발가벗음과 같다는 비유)깨닫게 해주는 것이기에 흔히 말하는 견성(見性)의 가장 바르고 빠른 길이 된다. 왜냐하면, 가식적이고 관념적인 마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자연적 활동의 껍질을 벗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담마누빠싸나(Dhammanupassana)

내적인 관념과 외적인 현상, 어떤 감정이나 생각, 즉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간에 그것에 사로잡혀 노예가 되지않고 초월하며, 완전히 다스릴 수 있다는 그는 대장부요, 어진 자이며,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자격은 어느 특정인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어떤 종교인이라도 관계없이, 능력과 잠재력기 있는 것이나 다만 그 방법을 달리 했거나 아니면 모르고 있기에 범부중생이라고 할 뿐이다. 수행인이 망상과 모든 감정의 일어나는 순간을 곧바로 알아 차렸을 때는 즉시 처리될 수 있는 것인데, 더러는 얼마간 시간이 지난 다음에 알 수 있거나, 아니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지나쳐 버리게 되고 만다.

 

이러할 때에는 자신에 대해서 미워하거나 분개심을 가질 수 있으나 그것이 오히려 좋지 못한 것이니 다만 더욱 굳게 결심하기를, 이후부터는 어떤 망상이든 어떤 현상이든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그 망상에 끌려가며 자리위에 앉아 있지 않도록 높은 경각심과 결정심을 가지고 수행할 뿐이다.

 

수행 중에 망상뿐만 아니라 관념, 생각, 개념, 사물, 즉 법과 눈으로 바라보는 빛이나 물질의 대상, 귀로 듣는 소리의 대상, 코로써 맡게되는 냄새의 대상, 혀로서 맛을 알게하는 음식의 대상, 몸으로 느껴지는 차고, 더우며, 부드럽고,거칠음 등의 대상에 관하여 그들이 어떻게 일어났다가 어떻게 사라지는가, 어떻게 성장해서 어떻게 쇠퇴하며 처리되는가를 관찰을 통하여 깨달아야 한다.

 

또는 좌선 수행중에 나타나는 갖가지 빛과 성상(聖像)등을 보게되며, 매우 즐거운 세계, 아름다운 동산, 자신이 허공 위에 앉아 있는것, 자신의 몸에서 광명이 나거나, 타는 듯한 불빛 같은 것이 나타나는 것, 구름위에 앉아서 많은 신비스러운 경계를 보거나 아니면 날아가는 모습 등도 역시 재빨리 인식하고 '경계가 보임, 경계가 보임, 경계가 보임'이라든지 ' 빛이 보임, 빛이 보임, 빛이 보임'이라든가 '성상이 보임, 성상이 보임, 성상이 보임'등 일어남 자체를 객관적인 차원에서 관찰하면 그 모든 경계가 순식간이거나 혹은 서서히 사라지게 된다.

 

이와같이 자연적 경계의 일어남과 사라져가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서 그 자연적 성품을 알게되어 다시 수행의 원 위치로 돌아와야 하는 데, 그와 반대로 그 경계등을 좋아하고, 집착하여 시간을 보내거나 아니면 없어진 것을 다시 나타나기 바라는 마음을 가져서도 안된다. 어떤 경계에 부딪쳐 좋다고 생각되는 현상도 결국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인 것일 뿐 실체가 아니기에 기대한다고 다시 나타나거나 원하고 좋아 한다고 오래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위와같은 모든 좋은 경계와 생각, 개념, 관념 등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을 통하여 분명히 보게되는 것을 담마누빠싸나(Dhammanupassana)라고 한다.

 

즉 '정신적인 모든 좋은 경계와 나쁜 경계등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현상을 세밀한 관찰을 통하여 확실하게 보았다.'라는 뜻이다. 수행인은 어떠한 경계도, 즉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두번 똑같이 계속 반복되는 결과가 없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연속적인 두 순간은 있어도 그들은 똑같지 않다.

 

매 순간마다, 그것들은 일어나고 또 사라지기 때문이요, 변하고 있는 진리이며 더 나아가 시간과 공간의 흐름과 환경적 변화, 자신의 신체적 변화, 그리고 마음의 변화가 너무도 빠르게 변화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모든 법과 일체의 현상이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관찰의 수행을 통하여 자세히 이해하고 깨닫게 됨으로서 스스로 확신이 되는 것은 제행무상의 진리이다. 이와같은 제행무상의 진리로 인하여 모든 집착과 애착, 소유욕에서 벗어나게 될때 절대적인 해탈의 지혜를 얻게되며 집착과 애착 그리고 소유욕등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지혜는 가장 고귀한 지혜이다. 이와같은 진리에 기반을 둔 해탈의 경험 또는 집착과 애착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운 경험은 흔들림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리를 체험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정도 수준에서도 위와같은 좋은 진리 체험을 얻게되고 참다운 지혜의 수행의 맛을 알게 되는데, 만약에 열심히 수행하여 깊고 높은 수준에 이르러 모든 사물 일체의 자연적 성품을 아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다면, 그 기쁨과 자유는 얼마나 위대하겠는가 쉽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이 깊어지면 육체적 행동과 정신적 인식, 관찰이 완전히 수레의 두 바퀴처럼 되며 자연스럽게 서로 돕는 듯이 동시작용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무엇을 놓치거나 애써 관찰 인식하려 하지 않아도 동시 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기에 마음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육체적 가벼움과 마음의 기쁨이 가득하여 모든 근심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다.

 

이를 법희삼매(法喜三昧)라 하는데 여기에 많이 집착하여 더 이상 수행이 진전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은 이 법희삼매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이므로 영원히 지속되지는 못한다. 짧게는 수분에서 길게는 몇 일씩 게속된다. 이러할 때 계속 그 자체를 인식 관찰하면서 다시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키면 이 법희삼매의 힘으로 더욱 깊은 삼매를 이루게 된다.

 

나아가 깊은 삼매에서는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이 극히 미세하여 아주 뾰족한 송곳의 두 끝이 계속적으로 닿았다 떨어졌다 하듯 하며, 깊은 물속의 어떤 밀폐된 상자속에 자신이 잇는 듯하게 되어 고요함의 극치에 다다르게 된다. 여기에는 다만, 비물체와 물체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속적인 현상으로서 일어남이라는 원인에 의해서 사라짐의 결과가 오고, 사라짐의 원인이 되어 일어남의 결과가 연속될 뿐, 어떠한 주체(主體)혹은 아(我)가 존재(存在)해서 이 운동 작용을 시킨다고는 결코 말 할 수 없다. 다만 두 기능의 작용일 뿐이다.

 

이것을 일러 삼매를 통하여 무아(無我)를 증득(證得)했다고 하는 의미로 아낫따누빠싸나(Anattanupassana)라고 한다. 법희 삼매를 팔리어로는 삐띠(piti)라고 하고 이 삐띠는 다섯 등급으로 구분된다.

 

1) 꾸따까(Khuddaka) 감각적으로 수행자체에 대한 약간의 흥미가 일어나면서 기쁨과 행복을 느끼게 되고 하얀 빛깔이 보이며 시원하거나 약간의 어지러움 등이 몸의 털이 서는 듯한 혹은 기쁨의 눈물도 나오는 정도이거나 혹은 약간의 두려움도 느끼는 듯하다.

 

2)까니까(Khanika) 순간적 기쁨 혹은 순간의 환의라고도 하며 반짝이는 빛을 보게 되거나 신경이 긴장되는 느낌 혹은 무엇인가가 온 몸에 기어오르거나 스멀거리는 느낌, 몸 전체가 평소보다 더운 느낌이 있거나 약간 정신이 후들거리는 기분이며 기쁨으로 인한 몸의 털들이 솟아 오르는 듯한 것이다.

 

3)옥깐띠까(Okkantika) 넘치는 기쁨이라하며 몸 전체의 진동, 얼굴이나 손발의 스스로 움직임과 경련 혹은 뒤틀림이라든가, 몸의 떨림, 그리고 노랑, 주황색 등의 빛이 보이며 몸이 앞뒤로 많이 흔들림 등이다.

 

4)웁벤까(Ubbenka)환희, 용약(좋아서 뜀), 기쁨으로 몸이 용솟음 친다는 표현이며 몸이 무엇에 끌리는 듯하고 몸 전체에 스물거림과 기쁨으로 설사까지 하게되며 몸이 사정없이 앞뒤로 흔들리고 좌우로도 많이 흔들리며 팔과 다리를 누군가 들어 올려 뒤틀어 놓은 것 같으며 억제할 수 없을 만큼의 동요 끝에 스스로 벌렁 누워 버린다든가 회색 빛, 은 빛 광채를 보게 된다.

 

5)파라나(Pharana) 기쁨이 몸 전체에 스며드는 듯하며 특징적인 것은 몸의 한기, 서늘함이 전체에 퍼지고 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움이 일어나며 몸 전체에 심한 가려움 현상과 졸음에 잠긴 듯 몽롱한 상태에서 움직일 의욕이 없어지고 머리에서 발까지 혹은 그 반대로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하늘 색이나 비취색 광명이 나타나 밝게 비치는 것 등이다.

 

이와같은 환희의 기쁨은 마음의 일념집중으로 인한 망상이 없어지고 고요하며 평화로운 상태에서 일어나며 영원함이 없는 진리따라 곧 사라지며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환희마(歡喜魔)가 아니며 여기에 집착되어 그것을 오래도록 지니려해도 오래가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 것을 미리 기대해서도 안되며 미리 두려워 해서도 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어떠한 현상이든지 일어나면 사라진다는 진리를 이미 자신의 호흡의 진행과정을 체득했으므로 집착하지 않고 다만 그러한 현상이 일어 났음을 알아 차리고 인식하여 관찰할 뿐이다.

 

아(我)에 관한 바른 이해

일반적으로 아(我)라고 하는 것은 산스크리트의 아트만(Atman)으로서 영혼, 자아(自我), 자기(自己)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우리의 미래를 연속시키며 절대적 불변, 영원, 불생불멸의 본질이라고 한다. 큰 것은 범, 브라흐만, 창조주, 법신(法身), 천사에의 영생(永生) 등이고 여기에서 파생된 작은 것은 아(我)라는 것이다. 아(我)는 개개인의 심중에 존재해 있으며 이 심중에 존재해 있는 것이 오랜 윤회 속에서 선업을 닦고 신(神)에 기도하며, 제사지내고, 공물을 바치며, 그이 이름을 외워서 찬탄하고 그럼으로서 깨끗해져서 마침내 창조신이나 범(梵)에 이르게 된다. 이렇게 아(我)가 범에 이르는 것을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무아(無我)를 가르치시고 위와같은 아(我)에 사로잡힌 것을 유아(有我)의 상견(常見: sakkaya-ditthi)라고 하시었다.

 

부처님의 가르치심과 다른 종교와의 차이점은 영혼, 자아, 즉, 아트만(Atman)을 인정치 않는 것으로서 종교의 사상사적 측면에거 사실상 독특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치심에는 자아(自我)는 환상적인 것, 혹은 가공적(架空的)인 것으로 실재(實在)와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신념 또는 믿음이며 '나'라든지 '나의 것' 이라는 것 때문에 탐. 진. 치가 일어나고 무명에 의한 생사윤회의 끝없는 고통이 존재하며 갖가지 삿된 견해와 교만, 속임수, 이기주의적 깨끗치 못함 등의 업을 익히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로인해 세상은 모든 불선업(不善業)이 존재(存在)하게 된다고 표현하시었다.

 

인간이 아(我)의 영원성을 강조하고 그것의 존재를 내세우는 것은 곧 자기 보존적 집착이며 의지의 약함과 소유에 대한 허무를 메꾸기 위해서 갖는 보호적 욕구라고 할 수있다. 여기서 '나'라고 하는 그 주체가 없다면 한 생명의 모든 꿈과 의욕이 상실되고 삶의 의미가 없다고 여기며 그 무엇에 의존함으로서 안전과 안녕을 기약하게 되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는 용기를 갖게 된다고 하나, 실재로는 그 실상 없음에 대한 두려움과 나약함에서 발생된 환상적인 것이다. 이 환상적인 유아(有我)가 사실적인 진리 앞에서 그 존재를 나타내 보일 수 없는 것이 부처님의 수행법에 의한 위빠싸나(Vipassana)이며 이 실질적 자연현상을 보게 되는 것이 아나따누빠싸나(Anattanupassana)로서 무지(無知)와 두려움, 욕망, 환상을 깨뜨리고 몸과 마음, 물질과 비물질의 기능사이에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한 체험으로 자연적 현상을 통하여 실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의미가 깊은 수행법 이기에 큰 뜻을 가졌거나 지적(知的)수준이 높은 사람은 시도해 보게 될 것이며 그 사실적 존재여부를 분명히 밝혀 보고자 할 것이다.

 

수행을 통해서 몰랐던 진리를 깨달았을 때 큰 기쁨이 있고 기쁨은 곧 법미(법味)를 체험한 것이되며, 자신이 자연적현상을 보았기에 다시는 의심 없으며 이제까지 두려움과 나약함, 절대자의 의존적(依存的)인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됨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서 자신의 성품과 모든 사물의 현상을 바르게 보는 법안(法眼)이 열리게 되고 이를 정견(삼마 딧티: Samma ditthi)이라고 하며 진리로 부터 물러섬이 없게되며 아견(我見)과 망견(妄見)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도(道)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무아의 삼매는 자신의 마음이 한 곳에 고요히 머물지 않고 계속 변화하고 움직이며 어떠한 형체나 빛깔이 없음을 깊은 삼매를 통하여 분명히 보았을 때 비로소 자기(我)에 대한 견해에서 자유로워진다. 위빠싸나 수행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자연적 관찰로서 육체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Rupa)을 마음이라 명칭한 나마(Nama)가 관찰 했을 때 나마 (마음)자체는 계속 변화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일 뿐이다. 그리하여 계속 새롭게 일어나는 마음의 기능이 새로운 현실을 이어가고 있음을 자세히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육근과 오온도 결국은 몸과 마음의 두 기능으로 구분되며 계속 변화되고 있는 마음의 현상을 보지 못하면 영원하고, '나', '나의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이것을 전도몽상이라 하며 생사윤회를 끝없이 받게한다.

 

브라만교(힌두교)에서는 마음이라는 것이 심장에 자리잡고 있다고 믿었으며 지금도 마음하며 심장을 가르킨다. 그러나 심장이 마음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잇지 않음을 현대의학의 심장이식 수술을 통하여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플라스틱 인공심장 이식으로 혈액을 순환시키어 살아있게 되고 (그것이 자연심장처럼 오래 지속되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동물의 심장을 이식하여 인공심장 기능을 하게 되었을 때, 심장이 진정 인간의 마음으로서 사고하고 분별하며 감정과 이성을 좌우하는 기능까지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플라스틱 인공심장을 넣고 인간의 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사실로 보아 마음은 심장 속에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심장 그 자체가 마음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님을 분명하기 때문에 마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특정장소에 자리하여 머무는 곳이 있는게 아니라여섯가지 감각기관의 기능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면서 조건에 의해 나타나고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현상에 불과함을 깨닫게 한다.

 

마음집중(Sati Lakkahana)의 특성

모든 법은 마음으로 쫓아 일어나고 마음으로 인하여 발전되며 마음에 의해서 이룩되는 것이기에 마음을 다스리면 모든 행동이 다스려지고 잘 다스려진 행동은 성스러운 것이요, 법다운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요, 훌륭하며 또한 업이나 운명을 다스리는 것이다. 망상과 마음이 둘이 아니며, 마음이 없으면 망상도 없는 것, 마음이 어떤 상황에 몰입하여 집중될 때에는 자연히 망상도 없고 오직 집중된 마음뿐이다. 그러나 집중된 마음이 그 대상에서 떨어질 때 집중되었던 마음은 망상으로 변하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아서 물길이 어느 쪽으로 잡아 주느냐에 따라 그 물은 생산적인 이익됨이 있기도 하고 파괴적인 손해도 끼치게 된다. 만약 흐르는 물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으로 흘러 들어오면 집을 파괴하는 나쁜 물이 되지만 미른 논에 물을 대주면 곡식을 회생시키고 성장시키는 좋은 물이 되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정법의 바른 수행의 길로 인도하면 독선과 아집, 편견 그리고 착하지 못한 업을 쌓아 무지와 어둠으로 가득하여 끝없는 생사윤회를 받게한다.

 

인간들이 이같은 독선과 아집에서 벗어나게 하는것은 스스로의 바른 선택이 중요하겠지만 지도하는 사람들의 자질적인 문제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 부처님의 직접 수행하시었던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직접 수행하시었던 길은 천하에 선포된 것이며 어느 누구든지 실천하여 즉시 확인 할 수 있고 이익됨을 알게되며 곧바로 결과가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그 수행법을 사띠 빳타나 즉, 자신의 몸과 느낌과 마음, 현상의 법등 네가지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여 일념이 되게 함으로서 망상이 일어나지 않게 되며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대체적으로 마음에 갈등이 심화(深化)되는 것은 몸과 마음이 갈라지고 마음이 현실을 떠나서 과거에 사로 잡히거나 아니면 미래에 사로잡혀 지금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다가 현실적으로 자신이 했어야 할 일이 처리되지 못했을 때 매우 큰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거나 책을 통해서 빨리 깨닫고 갈등이 함정에서 속히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마음집중 수행이라 한다.

 

마음집중 수행에는 보다 더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세가지 특징적인 것들이 있으며 그 세가지는 락카나(Lakkhana: 자연적 성품), 라사(Rasa: 기능적인 것), 사띠 빠쭈빠타나(Paccupattana: 나타나는 현상)등이 있다.

 

*물 위에 뜨는 것과 가라 앉는 것 *

마음집중(사띠)의 자연적인 현상을 현실적 예를 들어서 설명한다면, 먼저 콜크 병 마개를 물위에 던졌을 때 콜크가 물위에 뜨는 것이 자연적 성품이요, 돌멩이를 물위에 던졌을 때, 물속으로 가라앉는 것이 돌멩이의 성품임을 알게 된다. 이와같이 수행인도 마음집중(사띠) 법으로 수행할 때에 마음집중의 대상을 걷는데 두었을 때에도 현재 걷기위해 진행시키는 다리의 움직임 즉, 오른발과 왼발의 진행되는 동작에 마음을 집중시켜야 하고 만약에 무우를 칼질하는 가정주부라면 자신의 마음을 무우를 잡고 칼질하는 그 자체에 마음을 집중시키면 칼날에 손을 베일 염려가 없고 무우도 고르게 썰어지며, 앉아있는 상태일 경우에는 호흡을 통해서 진행되고 있는 코끝의 바람이 들어오고 나가는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키거나 아니면 코끝스쳐 들어가는 바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아랫배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하여 일어나는 상태를 관찰하면서 마음으로 일어남이라 명칭 부여하고 숨을 내쉴 때는 아랫배의 꺼지는 현상을 사라짐이라 하여 마음을 집중할 때 마음을 자신의 몸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과 함께 하게 되는 결과가 될 때 돌멩이가 물속에 가라 앉듯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같이 지금 현재 자신이 진행시키고 있는 모든 행동에 마음이 함께 할 때에 몸과 마음은 하나의 기능이 되고 갈등이 해소 되면서 평화롭고 고요해진다. 만약에 마음이 집중해야 될 대상에서 빗나가든지 아니면 표적에서 조금이라도 공간이 생겼다면 이는 마음집중(사띠)가 되지 않은 것이다.

 

*사띠 락카나*

수행인의 마음집중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지금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표적 혹은 당처에서 멀어져 있거나 방향이 맞지 않았다면, 마치 콜크마개가 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마음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상황당처에 집중되지 못했으므로 공간이 생기게 되고, 그 공간이 곧 번뇌가 일어나게 되는 자리를 마련한 결과가 되며 번뇌가 곧 주인이 되어서 모든 것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가 되니 그러한 상태에서는 모든 행위가 번뇌 즉, 탐심. 진심. 치심에 의해서 좌우되게 되니 자연히 착하지 못한 업을 쌓아가게 되고 이로 인하여 새로운 존재의 원인을 만들게 되니 이것이 곧 생사윤회의 수레바퀴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수행인의 생활은 남의 것을 가지고 자기 것으로 착각하여,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과 같은 어리석은 생활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인의 마음이 지금 현재 진행되는 상황 당처에 정확히 밀착되어 면밀하게 관찰하며 집중되고 있다면 조금의 공간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 번뇌가 침입해 오지 못하니 번뇌에 의한 착하지 못한 행동을 할 수 없게 되므로 자연히 수행인의 마음은 순수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고, 평화로운 상태가 되는데 이것을 사띠락카나 즉, 마음 집중의 자연적 성품이라 한다.

 

*라사 락카나 *

수행인의 마음 집중이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육체적 행동이나 느낌이나 심리적 현상 혹은 여섯 문(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통하여 나타나는 물질, 소리, 냄새, 맛, 촉감, 인식작용 등의 만남을 통하여 끌리지 않고 예리한 관찰로서 그 현상들의 자연적 성품을 바르게 보아 어떤한 집착이나, 소유의 애착을 혹은 탐심이나 진심을 일으키지 않고 상황에 흔들리거나 빗나감 없이 마음과 현상 당처가 완전히 일치되어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간다면 이는 수행인의 마음이 효과있게 집중되어 있으며 마음의 기능이 충분히 발휘하고 있는 것으로 이러한 상태를 사띠라사락카나(Satti-rasa-Lakkhana) 즉, 마음 집중이 기능적으로 잘 진행되고 있다 라는 것이다.

 

* 빠쭈빠타나 (Paccupatthana) 락카나 *

수행인은 마음이 상황에 따라 순간순간 변화됨을 즉시 알아 차리고 인식하여 변화가 진행되고 있는 마음을 또 다른 마음으로 하여금 면밀히, 지속성있게 관찰해 가면 변화되던 마음은 곡 사라지고 관찰하는 마음만이 남게될 때 마음이 마음을 관찰하고 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먼저 마음은 사라지고 변화하던 마음은 관찰하는 마음에 의해서 사라짐을 깨달으면서 계속되는 관찰의 마음이 하나의 줄처럼 이어져 가는 것을 일념삼매라고 한다. 이같이 계속되는 관찰력이 끊어지고 이어짐의 연속동작이 면밀하게 진행되는 동안에는 일체의 번뇌가 나타나지 못하여 오직 관찰되고 있는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가 되어 번뇌로부터 자유로유며 스스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움울 분명히 알고 기뻐하며 이에 대한 원인과 결과에서 (즉, 왜 자기 자신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 졌나) 조금도 의심없이 만족함과 평화로움이 몸 전체에 퍼질 때 사띠 빠쭈빠타나 락카나가 즉, 마음집중이 효과적이며 결과적으로 나타남이라고 한다.

 

수행인은 마음을 집중 시키는 대상으로 자신의 여섯 문 (눈. 귀. 코. 혀. 몸. 마음) 전체를 삼는다. 예로서 눈에 보이는 어떤 현상이 나타났을 때 즉시 마음을 일어난 현상에 집중시키고 ‘바라 봄, 바라 봄, 바라 봄’이라고 관찰함으로서 현상에 끌려가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자세히 관찰하여 그 자체의 자연적 성품을 알게되고 동시에 단지 기계적인 기능으로서 일어나는 현상을 보되, 보는 자는 없는 것으로 (물체. 눈. 인식능력)한다. 기타 나머지 다섯 문도 위와같은 방식으로 동일하게 관찰한다.

 

만약에 몸에 관한 것으로 육체적 움직임이 있을 경우에는 마음을 육체적 움직임 그 자체에 집중시키도록 노력함으로서 몸과 마음이 하나의 쌍으로 둘이되, 하나인 것처럼 움직이는 결과가 되게 한다. 지금 현재 앉아 있는 상태에서 일어서 밖으로 나가려 할 때에는 먼저 마음의 변화 결정에 있음을 관찰하여 ‘일어서고자 함, 일어서고자 함, 일어서고자 함’이라 알아 차리고 몸을 이으키는 동작에 따라 마음이 정확히 함께하여 몸을 일으키는 과정을 세밀히 관찰하도록 노력함으로서 마음의 흐름이 몸의 움직임에 따라 가도록 면밀히 진행시켜야 한다. 만약에 이와같이 되지 못하면 실제로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바가 되지 못하며 또한 몸의 움직이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몸의 자연적 현상 즉, 근육의 긴장과 풀림, 무릎의 구부러진 상태에서 펴짐에 따라 일어나는 반응 등과 고통의 존재가 어느 정도인가를 본인 자신이 모르게 되는 결과가 나타난다.

 

몸의 일어나는 동작에 관찰이 없으면 결과적으로 ‘내가 일어섰다’ 라는 자아의식이 부여되고 내 몸이 아프고, 쑤시고, 저리며, 불편하다, 하나 정작 자기 자신이 원했던 바인가? 본인은 자신의 몸이 쑤시고 아프기 원하지 않았음이 분명할 진데 누가 아프다 하는가? 그것은 순간순간의 변화라는 조건에 의해서 나타나는 하나의 인식작용이 아프고, 쑤시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이와같은 사실을 본인이 체험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동작중, 중요한 곳을 선택 집중 관찰하게 되면 순간순간의 모든 변화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자세히 보게되며 한 순간의 변화와 현상을 놓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진행되는 현상에 대한 참다운 모습을 본인이 직접 보게 되고 깨닫게 된다.

 

* 자기 점검과 분석 *

수행인이 마음 집중수행을 순간순간 일어나는 육체적, 정신적 현상을 대상으로 적용해 나갈 때 마음이 효과있고 정확하게 당처에 밀착되어 있는지 즉, 돌멩이가 물속 바닥까지 가라앉아 있는 것을 본인이 직접 보는 듯이 점검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수행인이 원하는 바 대로 마음의 집중이 당처에 있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콜크 병 마개가 물위에 떠 있는 것처럼 마음 집중은 당처로 부터 공중에 떠 있는 상태가 되겠지만 그와 반대로 마음이 목표에 밀착 집중되어 있다면 이는 수행인의 마음이 깊숙히 자연의 현상 속에 파고 들어가는 경우를 갖게 되며 따라서 몸과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순간순간의 작용과정에서 알게된다. 그러면 자신의 성품을 자연 그대로 '나' 라든지 '나의' 라는 어떠한 명칭이나 소유를 내 세우지 아니한 채 이해하게 되므로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 집중되어야 할 당처에 깊숙히 효과적으로 파고 들지 못하고 표면에 머무르게 된다면 삼매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며 자신의 참다운 성품을 볼 수 없게 된다. 이러할 때 자신의 수행과정이나 수행의 정도 등을 점검하고 무엇이 잘못되어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나 분석해 봄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재확인하여 다음 단계를 준비하게 되는 것이다.

 

* 수행의 당처를 놓치지 않음 *

수행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순간순간의 현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효과적으로 관찰하며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을 아삼모사라사(Asammosarasa)라 하는데, '마음을 당처로부터 멀어지지 않게 하여 놓치지 않는다.'는 뜻이며, 반대어로는 삼모사( Sammosa)로서 ' 주제를 잃어 버리다', 놓치다', '마음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등의 뜻이 잇다. 아삼모사는 '마음집중, 예리한 인식, 잃어버리지 않음' 등의 뜻으로 자신의 내면에서나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그 형태를 따라서 추적하여 마음 집중을 효과적으로 당처에 적용해 나간다면 이는 바로 아삼모사의 성취가 되는것이다.

 

또 다른 뜻으로 아삼모사라사를 설명한다면, 미꾸라지를 잘 움켜쥐어 마꾸라지가 손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것을 막는 것과 같은 것이니 수행인도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의 당처를 철저히 관찰하고 인식 하는데 경계심에 차 있고, 번뇌로 부터 침입을 막고자 긴장되어 있어서 어떠한 상황 아래서라도 관찰의 초점을 놓치지 않으려 각오가 되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서 아삼모사라사의 이해를 돕고자한다. 식탁위의 접시에 놓인 많은 음식 가운데 한 조각의 고깃점을 포크로 찍어 올리고자 한다면 포크로서 찍어내고자 하는 고기에 겨냥을 잘하고, 그 고기를 포크가 꿰뚫을 수 있는 힘이 주어져야 비로소 포크로 고깃점을 꿰뚫어 들어 올릴 수 있다. 이 하나의 사소한 일을 해내는 데에도 정확한 겨냥과 힘의 노력이 균형을 잡아야 하듯이 수행인이 자신의 육안(肉眼)을 통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관찰하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데도 똑같은 방법을 정확하게 행함으로서 수행에 성과를 가져오게 되고 자신의 수행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 현상에 대한 정면 관찰 *

수행인은 자신의 수행에 대해서 분석을 해야 한다. 자기가 지금 관찰하고 있는 당처에 대한 적합한 노력의 힘과 바른 겨냥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 둘 중에 하나라도 부족함이 있다면 마음의 집중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스스로 교정해 나가게 되어있어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두가지 중에 하나가 부족하다는 것은 마음의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수행에 대해서 분석해 봄으로서 자신의 마음 집중력이 효과적으로 정확하고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닌지 알게 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위와같이 자기 분석을 통하여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정확하게 분명히 마음의 집중이 당처에 잘 되어가고 있다면 두가지의 효과가 나타나게 된다.

 

첫째, 위시야 위무티 바오 빠쭈빠타나 (Visiya vimutti bhavo paccu-patthana)는 사물의 내용에 대해서 정면 대결한다는 것으로, 사물의 혹은 현상의 주체(主體)와 객체(客體)에 대해서 그 질적(質的)인 면을 정면으로 맞부딪혀 정확하고 자세하게 관찰한다는 뜻이다.

 

수행인이 마음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당처에 두어 집중 관찰할 때에 어느 부분이 아니고 정면이라야 되며 스쳐가는 정도가 아닌 자세하고 확실한 관찰로서 주. 객체(主. 客體)의 질적인 면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아야 하며, 바른 겨냥이 이루어 지고 있는지 혹은 거기에 알맞는 노력의 힘이 주어지고 있는가를 확인하고,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봄으로서 그 사람과 다른사람과의 차이를 알게 되고 기억이 잘 되어서 다음에 다시 만나더라도 쉽게 알아볼 수 있듯이, 수행인도 자신의 수행과정에 일어나는 모든현상 즉, 육근(여섯가지 문: 눈. 귀. 코. 혀. 몸. 마음)을 통한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 현상에 대해서나 육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맞이 하여 정확하게 파악하고 기억하며 노력의 촛점을 정확히 자세하게 맞추어 가야 위시야바오 빠쭈빠타나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수행에 아무런 진전과 경험을 가져오지 못하게 되고 다만 수행이라는 이름아래 자신의 귀중한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둘째는 아랙카빠쭈빠타나(Arekkha paccupatthana)로서 몸이나 마음을 통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육근동작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순간순간의 상태를 자세히 알게 된다는 뜻이다. 수행인은 자신의 육근동작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며 마음을 집중시킬 때 순간순간의 일어나는 현상이, 곧 무상(無常)의 진리(眞理)임을 깨닫게 되고 계속적인 관찰을 통하여 자신의 자연적 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다. 육근을 통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정확하게 마음이 밀착되어 가라앉은 상태로서 효과있게 집중시킨다면, 번뇌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곧바로 깨닫게 되며 이 마음의 번뇌에 대한 집중 관찰만이 번뇌를 물리쳐 버리게 되는 결과라고 확신한다. 그 예로서, 사람이 살지 않는 가정집에 여섯개의 창문들이 모두 열려 있다면 비와 바람 그리고 더러운 먼지가 들어와 집안을 모두 더럽게하고 집의 수명까지도 단축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집에 여섯개의 창문을 모두 닫고 열쇠를 채워두면 비바람이나 더러운 먼지가 들어오지 못하게 보호되어 집안은 깨끗하고 그 집의 수명은 길게 될 것이다.

 

수행인도 이와같이 자신의 육문을 통하여 침입해오는 번뇌 망상을 정확하고 자세하게 즉시 관찰하는 방법으로 모두 막아버려 번뇌 망상의 노예가 되어 한없는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게 하면 마음은 청정해지고 고요하며 평화스러워 행복하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 수행은 오직 스스로의 노력에 의한 체험에서만이 그 효력을 알 수 있고 결과를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노력하여야 되는 것이다.

 

빠따나 (Patthana)가 가지고 있는 뜻

빠따나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뜻을 각기 다른 측면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빠 (pa)는 아주 지나친, 강력한 뜻이며, 따나(tthana)는 머무름, 존재 밀착의 뜻으로서 육근을 통하여 일어나는 모든 내외적(內外的)인 현상에 마음을 집중 관찰하는 법을 적용하여 현상 당처에 정확하게 밀착시켜 머물게 한다는 뜻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보는 것과 느끼는 것, 마음이나 생각 등 육근을 통하여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사띠- 마음집중을 행하여 효과적으로 급속히 파고 들어가 밀착되어 머물면서 모든 번뇌로 하여금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 집중 법을 언제나 경계상태로서 육체적인 어떤 움직임이라도 점점 관찰하여 인식하고, 그 변화가 일어나는 당처나 움직이는 부분에 미음을 밀착시켜 잠시의 여유나 공간이 없게 함으로서 번뇌를 제거해 버리게 되는 것이 빠따나의 기능이다.

 

수행인은 언제나 경계심에 차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동분서주 바쁘게 움직이는 데에 대한 경계심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에 대한 확신과 더불어 조용한 마음으로 육근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번뇌의 작용을 하나라도 놓치지 아니한 채 꼭 붙잡아 묶어 버리겠다는 결심을 뜻한다.

 

예를 들어 럭비선수가 시합을 할 때 경계심에 가득 차있고 긴장된 상태에서 공을 붙잡겠다고 동서남북 운동장 전체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것을 바른 경계심이라고 할 수 없다. 선수의 경계심은, 자기 위치에서 공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어느 순간에 날아오는 공을 효과적으로 급속히 보는 즉시 붙잡을 수 있는 긴장과 준비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수행인은 이처럼 정신적인 준비상태가 되어 있어야 번뇌라고 하는 공이 날아올 때 곧바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다. 육근과 육체 혹은 염처(念處)를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의 당처에 마음을 집중, 일념을 만드는 마음집중 수행법은 어떤 현상이든 내적인 것이거나 육신의 일이거나 어느 한 구석이라도 빠트림 없이 완전하게 전체를 두로 관찰함으로서 놓치는 부분으로부터 번뇌가 다시 성장해 오는 것을 철저히 효과적으로 막아 버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동시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즉, 시작하는 단계에서부터 중간과 끝맺음까지 완전무결한 상태의 전체 모습을 관찰하는 것을 마음집중 수행법이라고 한다.

 

마음을 어느 한 곳에 집중시키는 것 (Samahdi)

‘사마디’ 라는 뜻은 마음을 어느 일정한 목표에 머물게 하여 일념을 만드는 것으로, 흐트러짐이 없고 흔들리지 않으며 일정한 목표에 머무를 수 없고 흩어지고 방황하며 정착되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한 것을 우따짜꾸꾸짜(Uddaccakukucca)라고 한다.

 

마음이 언제나 방황하고 이런 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의심을 일으키고 특히 자신이 직접 행하는 수행법에 대해서, ‘ 이 수행법은 진실로 나를 깨달음에 이르게 할 것인가, 참다운 나의 성품을 보게 되는 가’ 등의 의심이 생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을 위찌끼짜(Vicikicca)라 하며 아직 체험이 없고 모르기 때문이라면 당연하다. 그러나 게으르고 해태한 상태에서 마음의 집중이 되지 못하여 방황과 혼란 속에서 지내다가 일으키는 의심이라면, 마음이 안정되지 못했음이요, 한 목표에 머물지 못함이며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이나 혹은 순간순간 변화되는 마음의 상태와 정신의 변화 등의 당처에 머물지 못했음이요, 고정시키지 못하여 움직이고 흔들려 있는 상태인 것이다.

 

경전에는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우두짜(Udhuc-cca)라고 한다. 우두짜의 직접적인 뜻은 수행인의 마음이 수행의 당처에 접하지 못하고, 머물지 못하며, 멀리 떠나 방황하고, 불안해하는 상태를 말한다.

 

수행인이 수행의 당처인 관찰의 대상을 향해 완전히 밀착될 수 있고, 머물 수 있으며, 흐트러짐이 없는 마음이며, 어떠한 상황 아래서도 마음이 방황하지 않고 번뇌로부터 멀리 있으며, 순간순간의 변화를 놓치지 않고 깊이 파고들 수 있는 것을 사마디라고 하며 이, 사마디는 한순간 순간이 이어져 밀밀히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사마디는 또한 마음을 고요하고 조직적으로 다스려 일념이 되게 함으로서 정신적으로 균형이 잡히게 하며 마음을 고요하고 평화롭게 해주며 이 사마디는 바른 마음집중 수행법을 통해서 바른 노력이 뒷받침 되었을 때 사마디라는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사마디는 위빠싸나 수행을 하기 위한 기초가 되는 것이기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것이다.

 

사마디는 자신이 진행시키는 호흡이 코끝을 스쳐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것을 아사사(Asasa), 빠사사(Pasasa) 혹은 아나빠나(Anapana)라고 하며 혹은 수식관이라고 한다.

 

그리고 진언을 외우는 것, 다라니를 외우는 것, 화두하는 것, 염불 등 모두가 사마디에 속한다. 왜냐하면 마음을 위의 고정된 대상에 연결시키어 고정 정착시키고 밀밀하여 번뇌가 일어나거나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서 마음을 하나의 흐름이 되게 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견고하게 하나의 흐름이 되게 잘 이루어졌을 때 일념 혹은 사마디라고 한다.

 

사마디가 밀밀하고 길수록 마음은 더욱 고요해지고 강하게 연결되어 갈 때 마음은 곧 하나의 흐름처럼 되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행인은 시간도 잊고 자신의 모든 육체적 행동이 정지되며 몸의 존재마저 잊게 되는 경험을 얻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마음이 한 덩어리처럼 되어 참으로 순수하고 고요하며 청정함에 이르게 되나 수행인에게는 마음은 견고한 것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되며 착각된 생각이 곧, 마음은 곧 하나로서 여러 가지 빛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라 믿게 된다. 즉, 수정과 같이 맑고 깨끗한데 어떠한 색깔을 가까이 하면 맑은 수정이 색깔 따라 변화 하되 색깔이 수정을 떠나면 다시 본래대로 맑고 깨끗한 것처럼 마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은 본래로 청정한 것인데 탐심, 진심, 치심의 색깔이 옆에 있어서 오염된 마음을 지니었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빠싸나 수행을 위와 같은 이론을 수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조건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임을 깨닫게 해 주고 실지로 마음의 현상 관찰을 통하여 마음의 자연적 변화하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수행법에 대해 의심을 일으키다

수행인이 자신의 숨을 들이쉴 때 일어나는 현상과 숨을 내쉴 때 사라지는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켜 나가다가 힘이 들고 일념이 되지 못하며 번뇌가 침입하여 주인이 되어 버릴 때, 이 수행법 자체에 대해서 의심을 일으키고 회의적인 의견을 갖게 된다.

 

' 진실로 이 수행법,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을 보게 될 것인가? 잘못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마음속에 가득하다면 의심을 제거하기 전까지 마음의 상태는 관찰대상의 당처에 정착되거나, 머물 수 없음으로 사실상 좌선수행이 되지 못하고, 번뇌와 망상, 의심의 노예가 되어 앉아 있는 것과 같다 하고, 이렇게 의심의 번뇌가 자리잡고 있는 상태의 마음을 위찌기짜라 하고 이를 다스리는 길은 마음의 변화와 육체적 변화를 대상으로 관찰하여 마음을 집중시켜 감으로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갖게 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 이 수행자체에 의심을 일어키고 육체적 감각기관의 현상에 의심을 일으키며 ' 이 수행 법이 정말 부처님께서 직접 수행하신 법이며, 이 법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으셨을까?' 하는 등 수 없이 많은 불필요한 의심과 질문을 자신에게 해 본다는 것이다.

 

비록 부처님에 대해서는 스스로 신심이 깊고, 믿음이 강해서 의심이 해소된다 하더라도 직접가르치는 스승에 대한 의심 즉, 우리를 가르치기 전에 정말 이와 같은 수행을 통해서 깨달은 바와 수준 높은 경지를 직접 체험 했을까? 스승은 지금 어느 단계의 위치에 있으며 정말 자신이 체험하고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일까? 다만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아닐까?' 등 여러 종류의 의심과 회의가 여러갈래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의심이 부처님에 대한 것이거나 스승에 대한 것이거나, 깊고 낮은 정도에 관계없이 위찌기짜라 하며 이는 수행에 큰 장애가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말라 하시었고 자신의 가르침조차 조사하고 확인해 보라 초청하시었으니 모르는것에 대한 의심은 당연하다고 하겠으나 바르게 이해되고 실천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는 것을 단순히 의심하는 것은 건전하지 못하다.

 

실질적인 수행에 있어서 수행인의 마음을 수행 당처에 집중시킬 수 없을 때 마음이 방황하게 되며 흔들려 산란해짐에 따라 자연히 생각은 망상으로 가득하여 감각적인 쾌락을 생각하게 된다.

 

여기에서 좀 더 지나치면 아예 마음을 수행의 당처에 두려고 하지 않고 감각적 욕망을 행동에 옮기려 하여, 수행의 당처인 일어남이라든지 사라짐의 현상이나 욕망을 제 3자적 차원에서 관찰할 수 없는 심각한 상태에 이른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마음의 집중력을 이룰 수 없고 수행의 당처에 와 닿을 수도 없이 산란하고 불안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우두짜라고 하며 마음이 당처에 머물지 못하며 깊이있게 현상 자체에 파고들지 못한 결과이다.

 

의심과 초조 불안의 감정에 빠져있을 때는 스스로 결심을 굳히고 자신의 방황하고 의심하는 마음에 '방황과 의심, 방황과 의심, 방황과 의심'이라고 몇 번 집중 관찰함으로서 그 방황과 의심이 제거되고 마음은 다시 고요해지고 평화로워 지는 것이다.

 

이 때에 변화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여 다시 ' 고요하고 평화로움, 고요하고 평화로움, 고요하고 평화로움' 이라고 관찰 한 다음,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과 관찰하는 마음만 일념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었을 때 사마디가 이루어지고 이 사마디는 오직 지금 현재 진행되는 현상을 지극히 관찰하는데서만이 이루어지게 된다.

 

수행인이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것이 진실한 수행법이며, 이 법을 통하여 나로 하여금 위 없는 지혜에 이르게 하며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고 의심없이 믿고 부지런히, 정확하고, 분명하게 마음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당처에 집중시켜 방황하지 않고 언제나 순간순간의 현상을 놓침없이 관찰할 때 사마디가 형성되고, 마음으로 하여금 의심하고 방황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질적 수준이 높은 마음의 상태를 이루었을 때 모든 법과 자신의 수행에 대한 의심과 산란과 혼돈, 방황스런 마음인 위찌기짜와 우두짜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의심과 회의, 산란과 불안, 초조한 마음이 없어지게 되면 사마디는 자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위찌기짜와 우두짜는 사마디를 이루는데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수행인이 어느 쪽에 승리하는가에 따라 사마디의 성취와 실패의 두 길에서 하나를 택하게 되어있다. 결국, 위찌기짜와 우두짜가 마음 집중을 통해서 없어지게 되면 사마디는 자연히 성취되는 것이다.

 

사마디의 기능은 불을 꺼버림

사마디가 나타나는 것은, 마음이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이거나 간에 그 변화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당처에 밀착되어 집중이 잘되고 관찰이 잘되며 깊이 스며 들었을 때, 수행인의 마음은 당처에 고정되고 관찰하는 마음이 당처에 완전하게 밀착 되었음이 마치 밀가루가 물에 반죽 되었을 때 그 곱던 밀가루가 물과 한데 엉키어 부드러운 덩어리가 되듯이 해야 하는 것이다. 즉, 밀가루 자체로는 바람에 날리고 흩어져 버리게되며, 마침내 전체가 없어져 버리게 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물을 부어서 반죽해 놓으면 한데 엉키는 덩어리가 되어서 더 이상 흩어짐이 없고 바람에 날림이 없는 것과 같이 좌선수행도 이와 같아서 사마디가 일어나는 특성도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당처에 잘 집중되어 머물수 있고, 밀착되어 있으며, 순간의 변화도 놓침이 없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관찰되고 있을 때, 사마디의 기능 (Samadhi : Rasa)의 우수함이 나타나며 마음이 당처에 깊이 파고 들어 있으므로 잠시의 공간의 여유도 없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도 수행 도중에 수행에 뜻이 없고 미음이 흐트러져 산만해 졌을 때, 라사(Rasa)의 기능 즉, 정신을 가다듬고, 결심을 굳히며, 생사윤회의 두려움을 생각하고 깨달음의 영광을 바라며 힘을 내어 산만해진 마음을 수행의 당처에 굳게 집중 시키고, 정확하고 예리하게 순간순간의 변화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번뇌 망상이라는 적이 마음속에 자리잡지 못하도록 물리친다면, 수행정진의 승리자가 될 것이다.

 

예로서는, 참으로 바람 한점없이 고요한 어떤 방에 촛불을 켰을 때 그 촛불이 흔들리거나 어느 쪽으로 기울어짐 없이 아주 조용하게 자신을 태워서 방안을 밝게 빛내고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수행인의 마음이 당처에 집중 밀착되어 순간순간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인체 내부의 모든 현상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은 채 자세히 관찰하는 정진의 힘으로 깊숙히 파고들어 그 내부의 현상을 잘 파악하여 자신의 성품을 밝게 보게 되는 것을 일념 혹은 사마디를 통하여 성품을 보는 것이라 한다. 이 사마디의 힘은 불타는 번뇌 즉 탐심의 불꽃, 진심의 불꽃, 치심의 불꽃을 꺼버리거나 멀리하며, 다시 접근해오는 기회를 주지 않게 되므로 마음은 맑고 일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 즉 마음이 어떠한 현상에 집중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탐심과 진심 그리고 치심의 불꽃이 일어나 마음에 자리 잡는다면 몸과 마음, 모두를 불태워 버리고 말 것이다.

 

수행인이 마음의 집중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 현상에 정확히 밀착시켜 관찰하여 인식하여 간다면 아무리 뜨거운 번뇌의 열기라도 꺼지게 되어있고, 사라지게 되어 있으며 냉각되게 되어 있어서 더 이상 몸과 마음이 타는 듯한 번뇌에 시달리지 않고 차갑고 서늘함을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이것은 순간순간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 현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자세하고 분명히 관찰한 마음의 힘이요, 이 힘이 냉각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사마디를 통한 마음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힘인 것이다. 이 힘은 오직 마음만 냉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몸 전체까지도 냉각시키는 효과가 잇다. 이것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번뇌를 순간순간의 관찰력이라는 마음집중의 힘에 의한 사마디가 꺼져 버렸기 때문이다. 객관적 물리적인 현상을 통해서 위의 냉각작용에 대한 이론을 뒷받침할 수 있으며 직접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예로서 열 분자의 가속적인 운동 내지 진동작용을 통해서 분자를 담고 있는 물체와 분자를 더워지게 또는 뜨거워지게 하여 고열을 발생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열분자의 진동 내지 운동작용의 속도를 낮추게 함으로서 냉각효과를 가져와 분자와 담고 있는 물체의 고열은 낮아지기 시작하며 동시에 운동작용도 점점 낮아져 사실상 초저온 냉동의 수준에 이르게 되는 것을 크라이오 재닉(Cryogenic)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크라이오재닉의 이론은 위빠싸나 수행을 매우 강도있게 뒷받침 해주며 현대과학이 매우 오래된 종교의 수행법과 일치함을 볼 수있다.

 

크라이오재닉 이론은 수행인의 마음집중을 아주 효과있게 적용하는 것으로 분자와 물체의 운동작용에 의한 고열발생을 수행되지 않은 이의 번뇌에 비교될 수있다. 예로서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때, 증오로 인해 몸은 더워지고, 숨결은 가빠지며 분노의 힘이 온 전신을 떨게한다. 이러한 때에 슬기롭게 마음의 집중을 증오하는 마음에 두고 ' 진심이 일어남, 진심이 일어남, 진심이 일어남' 이라고 인식하고 생각하면서 변화되어 가고 있는 그 상태를 정확하고 자세히 관찰하게 되면 증오하던 마음도 곧 사라지고 몸은 다시 차가워지며 마음은 고요해져 평화스러워 진다. 이 때 모든 행동이 쉬어 버리게 되므로 증오로 인한 불선업도 정지되는 것이니 이것을 마음집중의 냉각효과 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은 수행인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의 내부세계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따라서 효과있게 마음 집중 관찰해 보면 곧바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 집중 수행법과 현대과학의 원리와 비교해 보면 그 효과적인 결과의 나타남은 조금도 차이가 없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어떤 음식을 더운곳에 넣어두면 음식내의 더운 기운이 박테리아를 자생시키게 되어 그 음식은 곧 상하게 되나 만약에 그 음식을 밖에 두지않고 냉장고에 넣어두면 차가운 기운이 박테리아가 성장될 수 있는 모든 요소를 제거해 버림으로서 그 음식은 부패되지 않은 채 여러 날을 보관할 수 있는 것이니 냉각효과로서 더운 기운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수행인의 불타는 번뇌를 현대과학의 크라이오재닉법 처럼 아주 효과있게 냉각시키는 방법은 자신의 마음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당처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강한 냉각효과를 가져와 모든 번뇌의 불꽃을 꺼버림으로서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고요하여 냉각되어짐에 따라 더 이상의 방황과 불안, 초조 그리고 혼돈이 없으며 모든 감각기관이 맑고 차가와짐에 따라 몸 자체도 서늘하여 법도에 맞고 더 이상의 탐심, 진심, 치심의 영향을 받지 않게 되므로 모든 불선업(不善業)을 행하지 않게 된다.

 

사마디 수행의 여섯개 항목

수행인이 사마디 수행 하는데 있어서 언제나 경계해야 할 6개의 항목이 있는데 이는 부처님께서 사마디 수행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설하신 법문이다. 여기에 보충 설명을 통하여 아래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1. 과거에 머물지 말라

수행인이 한 순간이 지난 (즉, 숨을 들이쉰 것은 이미 과거가 되어버림) 과거를 생각하고 기억하며 인식하는 데서 정신적 산란과 혼돈 그리고 망상과 분노심이 침입해 오는 것이다. 수행인은 이를 반드시 피하여 평화로운 마음, 일념된 마음을 만들어야 되고 산란과 혼돈, 망상에 빠지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과거도 이미 지나버린 것에 대한 집착된 마음이 지금 현재 진행시켜야 할 관찰을 놓쳤을 때 이는 다시 불안했던 과거가 되고 이 불안했던 즉, 미완성의 과거가 불안한 미래를 만들어 낸다.

 

2. 미래도 머물지 말라

수행인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를(숨 쉬기 전에)생각하고 꿈을 키우며, 설계하고 인식함으로서 마음 집중이 흔들리게 되고 정신을 빼앗기게 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집중을 현재의 당처에 두고 관찰하여 틈이 없게 하여야 한다. 그럼으로서 망상과 혼돈 및 산란함이 자리 잡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항상 완전한 현재는 완벽했던 과거가 되고 현재의 완전함이 밝은 미래로 연결된다.

 

3. 게으름으로 해태에 빠지지 말라

수행인이 해태에 지는 것은 게으름 때문이다. 게으른 생각을 버리고 경책심을 가지고 노력을 많이 함으러서 해태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혼돈, 혼침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늘 해야 할 이순간의 일을 다음으로 미룰 때 할 일이 없어지면서 게으름이 자라고 해태해 진다.

 

4. 지나친 노력도 오히려 방해다

수행에 균형을 잃고 지나치게 노력을 기울이면 흥분과 긴장, 동요가 되기 쉽다. 스스로 자제하고 억제하여 노력과 신심의 균형을 지켜 지나치지 않음으로서 흥분과 긴장, 동요에 빠지지 않게 되는것이다.

 

5. 유혹에 빠지지 말라

수행인이 어떠한 (물질이거나 애정이나)에 빠지게 되는 것은 탐심 때문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집중을 유혹이나 탐심이 일어 났을 때 그 당처를 관찰함으로서 유혹과 탐심에서 벗어나게 되고 마음이 산란하거나 동요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6. 나쁜 마음을 갖지 말라

수행인의 반발심이나 증오심, 시기심은 나쁜 마음의 영향을 받아서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야 하고 관찰하는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여 나쁜 마음이 자리할 수 없게 해야한다. 그럼으로서 마음의 산란과 동요, 나쁜 경계에 빠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은 위와 같은 6개 항목의 방해에서 벗어나게 되면 마음은 깨끗해지고 밝아져, 몸과 마음이 자연과 화합하게 되어 평화로와 지는 것이다. 경전상의 6가지를 다시 보충하면 다음과 같다.

 

수행인들이 지난 과거에 대한 것을 기억하고 그에 따라 실지로 있었던 일들에 대한 행동, 언어 등을 해석하고 스스로 기뻐하고, 슬퍼하고, 후회하고, 괴로워하고, 흥분함으로서 마음은 현실을 떠나 멀리 있으며 흐트러지고 동요되어 마음집중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상태가 이러할 때에는 필요한 방법을 택하여 효과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속히 자각하여 마음의 집중을 과거를 기억하는 그 당처에 적용, 관찰한다면 과거 기억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현재를 관찰하는 마음만 남게 됨으러서 원위치인 자신의 기억을 쫓아 버리는 바른 방법이며 고도의 기술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조금전에 일어났던 소리의 들음, 향기로운 냄새, 몸에 닿았던 부드러운 촉감, 아름다운 것을 보았던 것들에 대하여 다시 기억해 나타내려는 노력 등, 자신의 마음에 과거 기억을 자리 잡게하는 것은 현재 이 순간을 살고있는 우리에게는 적합치 못한 마음이요, 옳지 않은 정신적 자세로서 현재 이 시점의 순간순간 변화를 관찰하여 지혜를 충족하려는 이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과거 기억에 사로잡히는 마음은 현재의 중요하고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놓치게 되므로 마음이 동요되고 우울해지며 불안해 지는 것이다.

 

수행자가 좌선 정진이나 걷기 정진중에 지난 날의 과거에 사로잡혀 온갖 망상과 상상을 키워가면서 자신이 관찰해야 할 현실의 변화되는 상태와 목표를 망각하고 있다면 마음은 자연히 어두워지고 침울해지며 산란과 동요의 침입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위빠싸나바와나 수행이 좌선 중이거나 경행 중이거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시점의 움직이고 변화되는 당처에 마음을 정확히 밀착시켜 관찰한다면 자연적 현상을 바르게 깨닫게 되고 지혜를 얻게된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1일 전, 1주 전, 내지 10년 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낱낱이 기억하고 분석하며 스스로 흥분하고, 분노에 차며, 원한심을 가져 미워하는 마음을 다시 일으켜 스러하고, 괴로워함으로서 마음은 저 밑바닥 어둠속에 있게 되는 것이다.

 

특히나 지난 날 자신의 육근을 통해서 체험했던 기분 좋았던 촉감이나 앎다운 음악을 들었던 기억 등을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인해 마음은 산란해지고 동요하며 불안해짐으로서 수행에 흥미를 잃고 마음의 집중이 되지 않음으로 현재의 모든 중요한 현상을 놓치고 또한 자연의 현상을 알지 못하게 되므로 지혜는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난 과거를 현재에 다시 재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지금 현재의 모든 현상을 자세히 정확하게 관찰해야하는 수행에 오히려 방해가 될지언정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 것이니 위빠싸나바와나 수행에 큰 방해가 되고 장애가 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은 위빠싸나의 적(敵)

과거 기억은 위빠싸나바와나-마음닦는 수행법(견성선" 見性禪)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매우 위험스러운 적이요, 반대자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인이 수행중에 과거 기억이 되살아나게 되면 즉시 경각심을 일으켜 주의 깊이 관심을 기울이고 마음을 곧 과거생각이 일어난 그 자체에 집중시켜 '과거기억, 과거기억, 과거기억'이라 인식하고 순간순간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함으로서 효과있게 처리하는 기술적 솜씨를 나타내어야 하며 마음을 항상 현재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당처에 머물도록 노력함으로서 수행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려고 노력하는 것 보다는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 정신을 바짝차려 집중 관찰함으로서 순간순간의 현상에 깊이 파고 들게 되는 것이다.

 

위빠싸나바와나 수행인은 마음을 부지런히, 그러나 조심스럽게 순간순간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집중해야 한다. 즉 이곳에서 저곳으로 슬픈 마음에서 괴로운 마음으로, 기쁜 상황에서 불행한 상황으로 옮길 때 끊어짐이 없고 놓침없이 지속적인 상태로서 연결되어 마치 넘실넘실 가득찬 기름그릇을 조심스럽게 운반하여 다른 사람에게, 또 다른 사람에게 넘길 때 뜨거운 기름이 한 방울도 넘치지 않게 하여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시키는 것과 같은 그러한 집중력으로 일념을 이루도록 하여야 한다.

 

위와 같은 위빠싸나 수행은 어떤 한 목표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때 그때 변화되는 상황에 따라 그 자체를 관찰하여 일념을 이루게 되는 것으로 어떤 한 주제를 상대로 계속 머물면서 일념을 만드는 것과는 다른 수행법이다.

 

위빠싸나 수행인은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현상, 어느 곳 당처에 마음을 집중시켜 강하게 머물게 함으로서 일념이 되어 과거 어떠한 망상이나 기억이 침입해 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다만 현재의 움직임이나 현상, 변화에 빠르게 적용, 집중 관찰하여 일념이 되게 함으로서 마음이 평화롭고 고요해지게 되는 것이며 상황에 따라 마음의 즐거움과 집착을 버리게 하고 변화하는 마음과 몸의 내적 현상, 주변상황 등을 통하여 순간의 변화, 제행무상의 진리를 깨닫게 하는 지혜를 보게 한다. 이는 곧 마음집중의 효과요, 결과라 할 수 있다.

 

위빠싸나 수행을 다시 한 예로 든다면 다리 위를 걸어서 개울물을 건너는 것과 징검다리를 걸어서 개울물을 건너는 것과 같다. 다리위로 물을 건너는 사람은 몇차례 반복하다보면 자신이 물을 건너는 다리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육지의 연장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징검다리위로 물을 건너는 사람은 매번마다 물의 흐름을 자기 발 아래서 보게되는 까닭에 항상 사실감 있게 물을 건너게 된다. 지금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는 장소에 따라 그 현상을 관찰함으로서 바로 지금 이시간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분명히 파악하게 되고 이같이 파악하고 잇는 마음은 오직 현재에 머무는 마음 뿐인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우주공학에서는 백분의 1초로 계산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볼 때 지금 현재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순간에 벌써 몇 초의 시간이 흐르게 되고 이 시간을 우주공학의 시간 개념으로 본다면 아득한 시간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간의 개념에서 냉정히 살펴볼 때 금강경의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혹은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는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게 될 것이다.

 

미래라는 생각에 사로 잡힘

범부 중생은 언제나 현재의 중요한 시간을 두 길로 나누어 아무런 소득없이 낭비하는 것이다.

 

첫째는 지난 과거사에 사로 잡힘이요,

둘째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서 온갖 꿈과 희망과 소망을 걸어 상상을 해 가면서 현재의 가장 중요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나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에 사로잡혀 헛되이 보내어진 현재가 아무런 생산성 없는 과거가 되어 후회와 분노속에 다시 오늘의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기에 범부 중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위빠싸나바와나를 수행하는 이들은 더 이상 어리석은 범부중생이 아니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로 인하여 오늘의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보내는, 혹은 생산성 없이 낭비하는 생활을 계속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인간의 한 생애라는 것이 무한한 우주 공간적 시간에 비교한다면 극히 짧은 것인데 어찌 이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겠는가.

 

수행인이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사로잡혀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되면 마음이 산란해지고 동요하게 되어있어 자신의 수행이나 법(法)에 의심을 품게되고, 그럼으로서 마음이 현재 일어나고 사라지는 당처에 머물지 못하거나 집중되지 못하게 된다.

 

마음이 방황하여 안정되지 못하게 되며 순간순간 일어나는 현상속에 깊이 파고 들지 못하게 되면 흐트러지고 허공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허공에 매달리는 마음은 무엇이든지 아직 나타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생각과 상상으로, 보고싶고, 소유하고 싶고,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하며, 맛있는 것을 먹고싶어 하는 수 많은 욕망과 갈망, 갈등을 일으킨다.

 

미래에 대한 상상은 이와같이 마음으로 하여금 한 없이 방황하게 하고 산란케 하여 한 목표나 현상의 당처에 집중시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생각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구하기를 바라고, 존재하기를 바라는 등 상상에서 현실의 착각하여 감각적인 색욕을 일으키게 되며, 그 말초적 쾌감을 즐기고자 현실화 시키려고 노력하는 단계까지 가면서 마음은 완전히 수행의 주제에서 멀어져 버려 온갖 번뇌와 망상에 사로 잡히게 되므로 평화는 사라지고 지혜는 나타나지 않아 불선업까지 행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는 위빠싸나 수행인의 마음가짐이 아니요, 이러한 결과를 가져오게 해서는 자신이나 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분명히 인식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좋은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도 망상

좌선 중에 생각하기를, 깊은 내관(內觀)에 들어가거나 경험하기를 바라는 것, 특별한 경험 기를 바라는 것, 옆의 수행자와 자신을 비교해 보거나, 측정해 보는 것 등 이 모두가 미래에 대한 것이며, 망상스러운 생각이며 수행의 주제와 하등 관계없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마음을 더욱 산란하게 하여 현재와 현실의 모든 상황, 수행의 초점에서 빗나가게 되므로 수행인으로서 마음자세라 할 수 없고 마음이 집중할 당처에 밀착하지 아니한 것이다.

 

어떠한 상황, 비록 수행법에 관한 것일지라도 혹은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위한 것일지라도 지금현재의 위치는 자신의 인격 완성을 위하고 지혜와 자비를 갖추기 위해서 위빠싸나(Vipassana)를 수행하고 있는 수행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옳지 않은 생각이나 장애스러운 요소를 특별히 경계하고 멀리 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수행인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지극한 경계심과 부지런한 노력으로 하나라도 놓치지 아니한 채 관찰하고 집중 하므로서 하나의 현상에서 변화된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났음을 즉시 인식하게 된다. 동시에 밀밀히 관찰의 대상을 옮길 때 조금이라도 흔들리거나 빠짐없고 빈틈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옮기는 것이, 마치 횃불이 한사람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옮겨지듯 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충만된 마음집중이 될 때, 견고하고 예리한 집중력으로 당처에 깊이 파고들어 빈틈없이 완전한 상태로 원위치인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돌아와야 하는 것이며 철저한 주의력과 관심을 기울여 하나의 현상이라도 놓치는 바가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이 지금 현재 진행되는 현상에 예리하게 관찰되고 있을 때 이는 과거나 미래도 아닌 오직 현재의 찰나에 머문다 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위빠싸나바와나의 성취라 할 수 있다.

 

수행인의 마음이 순간순간의 움직임과 변화되는 곳에 낙착되어 머물게 되고 더 이상의 과거나 미래의 상상을 따라 방황함과 혼돈이 없게 되어 근본당처(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에 머물게 됨으로서 견고하고 예리한 마음집중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거던 즉시 인식하고 철저한 주의력을 기울여서 일어난 생각, 그 자체를 ‘망상, 망상, 망상’이라 외우며 예리하게 관찰하여 엄격히 다스려 더 이상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방법이요, 자신을 현재에 머물게 하며 변화 속에서도 관찰하고 인식하는 마음이 견고해져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고 인식하는 마음이 한 덩어리가 되게 한다. 그래서 다시 번뇌가 들어 올 기회를 주지 않게 되므로 위빠싸나바와나는 성취되고 미래에 대한 환상이나 착각 속에 해매이지 않으며 좋은 경험 있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완전히 사라져 마음은 고요하고 그러한 가운데 계속 관찰의 흐름만 있을 뿐이다.

 

해태심에 대하여

수행인은 현재의 순간만을 예리하게 관찰함으로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나,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초월하며, 현실과 현재에 충실하여 참다운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해태심으로 게으름에 빠져 모든 일에 의욕이 없으며, 활동성이 없고 자신의 일이나 가타 행동에도 적극성 없이 주저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게으르고 해태심에 차 있는 마음은 어떤 일이나 책임감이 없고, 임무를 수행하려 들지 않음으로 마음에 준비도 없고 주저함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하나도 완성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수행인의 마음이 수행이나 기타 일상사에 대한 의욕이 없이 풀어져, 해태에 있다면 언제나 게으름이 수행인의 마음을 점유해 버리는 것이다. 이러할 때에 수행인 스스로가 재빨리 자신의 심리상태를 점검하고 게으름에 의해 해이해진 마음 자체를 관찰, ‘해태심, 해태심, 해태심’이라고 인식하여 계속해서 평온을 찾고 강한 의욕과 분발심이 나타날 때 까지 노력한다면 기분은 전환이 되고 자신의 마음에 신선함을 느끼게 된다.

 

이 때에 잠시의 공백이나 방심함 없이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면밀히 관찰함으로서 예리한 관찰 활동과 마음 집중이 이루어지고 일체 모든 게으름이라든가 해태스러움이 존재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어느 한 상태도 오래 지속됨이 없으므로 다시 정진의 힘이 약해지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듯한 마음상태를 느끼면 수행 의욕과 분발심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일념은 멀어지며 다시 방황스러운 마음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모든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 상태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게으름과 해태심을 일어낫다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으로 인식 되었을 때, 기분이 저하되거나 낙담되는 상태를 되풀이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만 하나의 현상이기에 슬기롭게 그 자체를 관찰하여 평정을 되찾으려는 노력할 뿐, 수행의 법이 잘못된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수행인이 마음 집중에 일념을 이루지 못하고 지혜도 나타나지 않으며 자신의 인격이 저하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게으른 수행인이 걸어야 하는 가장 현실적인 상태이다. 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의사를 찾아가 진찰을 받고, 진찰결과에 따라 의사가 약을 주고 시간을 지키며 음식을 가리라고 지시했으나 환자 자신이 의사의 지시는 따르지 않고 음식을 가리지도 않은 채, 먹어야 할 것은 먹지 않고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을 먹으며 자기 생각나는 대로 약을 먹는다면, 그 환자의 병은 절대 고쳐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오히려 의사를 의심하고 약의 적합성에 대해 의심하며 병원을 옮겨 진단을 받고 새로운 처방을 얻어 약을 지었으되, 자심의 습관을 고치지 않은 까닭에 전번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니 이제는 의술 자체가 자기의 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환자가 참으로 자신의 병을 고치고자 한다면 의사의 지시에 따라야하며 의사를 믿어야 되는 것이다. 수행도 이와 같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선사(禪師)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 잘 듣고 부지런히 수행해서 스스로 경험을 얻고, 경험을 통하여 법에 대한 확신을 가져 열심히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밀착시켜 흐트러짐이 없을 때 일념을 이루며 지혜를 얻게 된다.

 

그러나 환자처럼 병을 고치고 싶어서 의사를 찾아가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나 정확하게 시간도 지키지 않고 음식도 가리지 않는다면 그 약은 환자의 병에 충분한 효과를 내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자가 수행 방법을 알고 지내지만 그것을 위해서 지키고 노력해야할 것에 게으르고 해태심에 빠져 있다면, 수행처에 아무리 오래 있어도, 아니면 수행한다고 아무리 시간을 많이 보내어도 아무런 효과나 경험이 쌓이지 않고 다만 그저 시간만 낭비했을 뿐이다. 마치 의사의 지시에 완벽하게 따름으로서 환자가 병을 말끔히 씻고 쾌유될 수 있듯이,

 

이 위빠싸나 수행도 인간이 중생병에서 벗어나 건강한 성자(聖者)가 되기 위한 처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생병 환자가 이 질병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으면서 실천을 통하여 치료하려 노력하는데도 과거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탓으로 바르게 부지런히 실천하지 못해서 계속 중생병을 앓고 있다면, 이는 처방을 내린 의사의 잘못이나 책임이 아니라 바로 게으르고 해태심에 빠져있는 중생환자인 수행인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감각적 욕망 (Kamachanda)

수행인이 게으름과 해태심에 빠지게 된다면, 마음은 흐트러지고 혼돈과 환상에 직면하게 되며, 현실의 실재에서 벗어나게 되어 그 사람의 위치는 낮은데 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지 슬기롭게 향상되어 가는 것이 아니다. 동시에 해태심으로 인하여 게으름 피우게 되면, 자연적으로 감각적 욕망(Kamachanda)에 사로 잡혀 자신을 타락의 감정으로 이끌고 가게 되는 것이다.

 

곧 ‘ 어디에서 아름답고 고운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서, 좋은 음악으로 귀를 기쁘게 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것들을 보고 싶어 하며, 맛있는 음식으로 혀를 만조케 하려는 등 감각적인 것만을 추구하려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자신의 품격이 떨어지고 이로 인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모르니 이것이 모두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이다.

 

또한 수행인이 어떤 사람을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혹은 자기네와 뜻이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상대방을 파멸시키려 하고, 파멸 시키는 방법을 생각하며 피해를 입히려 하고, 제거하려고 하는 등 파괴적인 생각과 증오심으로 갖가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것 역시, 감정에 의한 감각기관의 작용이며 욕망의 작용이 된다.

 

아무리 즐거운 것이라 해도 그 즐거움이 얼마나 오래갈 수 있는가, 즐거움은 곧 싫증으로 변화되고 싫증은 또 다른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는 연쇄 반응적이 된다.

 

남자들이 여자를 추구하는 마음이 마치 벌 나비들이 꽃은 찾아 다니 듯 한다고 한다. 나비들이 꽃 속의 감미를 추구하는 것처럼 남자들이 여성을 추구하는 것도 여성의 감미를 추구함인가?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환상적인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떠한 감각적 쾌락도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은 그 한순간을 위해 엄청난 비방과 비난, 자기 파멸의 댓가를 치루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의 위대하심을 반조

부처님의 위대하심을 제한된 지면과 한정된 조건 속에서 어떻게 묘사하여 이해 시킬 수 있을까? 그러나 부처님의 위대하신 대 자비와 지혜 그리고 인욕 등을 간단하게나마 설명하고자 한다.

 

부처님께서 아직 보살로서 깨달음의 길을 발견치 못했을 때, 당시의 유명한 수행인들과 여섯 스승들을 찾아 깨달음을 위해 편력( 이리저리 유행하며 가르침을 구함)하였다. 당시의 수행법을 따라 수행에 나가되 탐. 진. 치에 가려 갖가지 고행을 행하거나 아니면 감각과 욕망과 환상적인 생각에 사로 잡히는 극단적인 두 길을 헤매이면서도 '이것이 행복한 것이요, 수행도 이와같아야 하는 것이다, 깨달음이 이를 통하여 이루어 질 수 있다' 고 착각속에 지내시었다.

 

이렇게 육체적 핍박을 가하는 고행과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환상적인 생활의 양 극단적 방황의 연속으로 6년을 보내시다 마침내 보리수 아래에서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관찰을 통하여 평화를 얻으시고 사마디를 이루어 연기의 법을 깨달으시고 사성제 (四聖제)와 8정성도(八正聖道)를 이루시니 정각자 부처가 되시고 커다란 자비심과 지혜로 중생을 교화하셨다. &l! t;p> 부처님의 위대하신 지혜와 자비를 설명하기 위해 부처님의 과거생의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여기 하나 소개하여 이해를 돕고저 한다.

 

수매도(Sumedho) 수행인: 부처님의 과거생은 수매도 수행인으로 계시면서 디빵까라 붓다 (연등 여래)로 부터 교화 받고 아라한 과를 증득,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중생이 무명의 어두움에 가려 한량없는 윤회의 고통을 받고 있으니 이것을 참으로 가엾게 여기시어 자신의 깨달음을 다음으로 미루시고 중생을 위하여 많은 공덕과 지혜를 쌓기 위해 수 억겁을 생사윤회에서 헤매며 10 바라밀을 닦으셨다. 이 때에 갖가지의 몸을 받아 나셨으며 더러는 천상에서 태어나 많은 보시를 베풀었고 더러는 짐승으로 태어나 다른 짐승들에게 설법하며 자신의 몸을 희생하고, 굶주린 큰 짐승의 먹이가 되기도 했으며 더러는 인간이 되어서, 계. 행을 지키며 보시행을 닦아 많은 공덕을 쌓았다.

 

어느 때 짐승으로서의 한 생에는 원숭이가 되어서 나무 위를 날아 다녔는데 바라문 사냥꾼이 숲속에서 길을 헤매이다 그 지역의 식인종에게 붙잡혀 죽음 직전에 있는 것을 보고, 즉시 저 사냥꾼을 구해내야 되겠다고 위대한 자비심을 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작은 몸이 어떻게 저 큰 바라문 사냥꾼을 나뭇가지 위로 들어 올려 함께 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그 때 그 몸무게 정도되어 보이는 큰 물건을 들어 스스로 시험해 보니 바라문 사냥꾼을 들어 올릴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을 실험, 확인한 원숭이는 즉시 식인종 가운데 포위되어 있는 바라문 사냥꾼 쪽으로 날아서 안전한 장소에 도착하여 바라문을 내려 놓으니 자신은 기운이 모두 빠져 땅에 주저앉아 잠이 들었다. 그런데 이 사이 생명을 구한 사냥꾼은 깊이 잠들어 있는 원숭이를 보고 탐심이 일어났다. 재수없어 사냥도 못하고 죽을 뻔한 고통속에 이 원숭이가 나를 살려 주었으나 사냥을 못했으니 이 원숭이를 잡아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잠이 들어있는 원숭이의 머리를 때렸다. 이에 놀란 원숭이가 잠이서 깨어나자 사냥꾼이 말하기를 '오늘 나는 아무런 짐승도 잡지 못했으니 너라도 잡아가야겠다' 고 이야기 한다. 원숭이는 어이가 없어 하며 사냥꾼에게 말하기를 " 당신을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준 나를 잡아가겠다고요?" 반문한 다음 잠시 생각에 잠겼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소행이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서 보시행을 하고 인욕행을 하며 10바라밀다를 수행하는 수행자이기에 사냥꾼을 위해 자신을 보시하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리고 다시 사냥꾼에게 말하기를 " 지금 당신이 나를 여기에서 죽이면 당신이 이 숲속을 빠져 나가는 길을 몰라서 다시 고생할 것이요, 그러니 내가 길을 안내하여 이 숲을 무사히 벗어난 다음 나를 죽이시오" 하니 사냥꾼은 그게 더욱 좋겠다고 길을 안내하라고 명령하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원숭이의 자비심을 알 수 있다. 생명을 구해주고, 그 구함을 받은 자의 욕심으로 인해 생명을 빼앗길 위기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증오도, 원망도 없이 봉사하고 목숨마저 기꺼이 내 놓겠다는 원숭이의 인욕과 자비심.

 

여기 이와 같은 자기 희생과 철저히 베푸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공덕을 완성하신 부처님의 자비하신 모습은 얼마나 위대한가. 보리삿다는 이와 같은 모든 공덕 바라밀 성취의 마지막으로 까삘라 왓투(Kapilavatthu)의 숫도다나 (Suddhadana:정반 왕) 왕과 마하마야(Mahamaya) 왕비 사이에 태어나 샤카족의 왕자가 되었으며 모든 지혜를 갖추었다라는 뜻의 싯닷타(Siddhatta)이름을 가지고 화려한 궁중 생활속에 모든 교육을 마치시고 19세에 야소다라(Yasodhara)공주와 결혼 29세에 라훌라(Lahula)라는 첫 아들을 얻으시고 이 날 깨달음의 진리를 찾아 왕궁을 떠나 마가다(Magad-ha)국에서 당시의 유명했던 스승 알라라 깔라마(Alara Kalama) 웃다까 라마뿟따(Uddaka Ramaputta)등 여섯 스승들로 부터 갖가지 고행과 좌선 수행을 거쳐 마음은 비상비비상천 즉, 인식의 한계를 벗어나 인식이 아님도 아닌 경계에 까지 이르렀어도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는 아니었고 육신은 몹시 쇠약하여 마침내 고행을 포기하시고 음식을 받으시며 중도의 바른 길을 성취 하시었다.

 

이는 곧 사성제의 길로서 부처님 이전에는 들어 보지 못했던 진리이며, 이 사성제는 불교의 기본이며 핵심이며 전체이다. 이 진리 속에 연기의 법이 계. 정. 혜가 들어있고 세가지 법인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진리가 있으며 이는 곧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 현상을 깨달은 것이며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취하신 위대한 진리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한 계승

보디삿따께서 새나이가마 부락의 수자따 장녀로 부터 우유 쌀죽을 받아 드시고 스티야 목동으로 부터 길상초를 받으신 다음 네란자라 강을 건너시어 보리수 나무아래 동편을 향하여 좌선 자세로 앉으시어 결심하기를 ' 이몸의 근육이 말라붙고 피가 마르며 뼈가 으스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기 전에는 이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하시니 (이를 금강보좌, 즉 다이아몬드처럼 굳은 보배로운 자리라는 뜻으로 불리우게 됨) 그 굳으신 의지 어찌 하늘이 말리며 땅이 방해할까 보냐.

 

이 날이 보리삿따의 나이 35세요, 출가하여 6년의 왜삭의 달로서 혜성이 달과 가장 가까울 때 모든 생명이 소생하는 봄으로서 지금의 5월이요, 음력 4월 14일 이었으며 왜삭의 별이 밝게 빛나는 보름달 새벽, 완전 크게 깨달으시니 천지가 진동하고 천상의 기쁨이 매우 컸다. 보리삿따가 이제 완전 최고 정각자(Anuttara samma sambudha)가 되시고, 그 감동의 순간을 게송으로 읊으시니,

 

아네까자띠 삼사랑..............Anekajati sam saram

산다위상 아닙비상............. Sandhavissam Anibbisam

가하까라깡 가왜산또........... Gahakarakam gavesanto

둑카자띠 뿌납뿌낭............. Dukkhajati Panappunam

가하까라까 딛호시............. Gahakaraka ditthogi

뿌라개항 나 까하시............ Punageham na kahagi

삽바 떼 파수까 박가........... Sabba te phasaka bhagga

가하꾸당 위산키땅............. Gahaoutam visan khitam

위상카라 가땅 찝땅............ Visankharagatam cittam

딴하낭 카양 아짜가............ Tanhanam khayam ajjhaga

 

헤아릴 수 없는 세월따라 태어나면서

집을 짓는자가 누구인가 찾으려 헤매이다

끝내 찾지 못하고 계속 태어나고

또 태어남은 참으로 큰 고통이었다.

아! 집을 짓는 자여! 너는 이제 보였도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집을 짓지 못하겠지.

모든 서까래는 부서졌으며 기둥들은

흩어져 내렸나니 나의 마음은 위없는

깨달음에 이르렀고 모든 갈망의

끝을 이루었노라!

 

스스로 이루어 놓은 집은 갈망, 욕망, 번뇌요, 집착, 탐심. 진심, 치심, 속임, 삿된 견해, 의심, 혼침, 초조 불안, 수치를 모르는 뻔뻔 스러움, 두려움을 모르는 어리석은 용기였으며, 서까래를 받드는 기둥은 어리석음과 진리를 모르는 어두움으로 모든 욕망과 갈애, 집착의 뿌리였다.

 

지혜의 힘으로 기둥과 서까래가 무너지니 집 전체가 부서지게 된것, 마음의 탐심, 진심, 치심, 속임, 명예. 등에서 벗어나 더 이상 그들에 얽매이지 않고 더 이상 생사윤회의 갈애속에서 있기 원하지 않으니 자연히 집은 무너진 채 다시 세워지지 못하는 것이 곧 육신의 받아나는 것을 상징하고 집을 짓고저 하는 설계자로 곧 번뇌와 욕망, 갈애라는 뜻으로 모든 욕망, 갈애가 완전히 소멸되었으니 더 이상 생사윤회의 흐름속에 머물게 되는 집을 지을 수 없음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하신 부처님의 게송이라 하겠다.

 

이것은 곧 바라밀의 큰 힘으로서 내적관찰 수행이 원인의 진리라면 깨달음은 '결과'의 진리요, 원인과 결과에 의한 일체지 (一切智)는 각종 능력(육신통 六神通)을 갖추게 되니, 이것이 곧 바라밀의 완성이었다. 여기에서 다시 봉사와 희생의 진리를 설천하게 됨으로서 곧바로 전법 교화에 나서게 된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시기 위한 공덕 바라밀의 노력은 결과적으로 큰 자비심에 의한 중생구제가 근본적 동기이셨기 때문에 깨달으신 다음 자신만의 평화와 안일, 행복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곧바로 설법을 시작하시어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음의 진리를 증득하여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게 하고 깨달음의 진리를 함께 나누려 하셨다. 그 뿐 아니라 모든 중생들에게 생사해탈의 길을 보이심으로서 중생들이 그 길을 따라 생사를 해탈케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성스러운 진리를 증득하시어서 그 진리를 중생들과 함께 나누시기 위해서 밤과 낮을 가리시지 않으시고 하루에 2시간 정도의 휴식만을 취하시면서 생활하시기 45년간 마지막 열반의 순간까지 수밧다의 외도 수행자를 열반에 드시기 바로 직전에 교화시키시어 부처님 생애에 마지막으로 귀의, 교화하여 아라한이 되게 하신 것은 참으로 훌륭한 예로서 부처님은 중생을 아끼시고 구제하시려는 대자비심을 잘 보여주신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대지혜와 자비의 실천은 과거 수억겁에 걸친 숙원을 성취하심이며, 그 서원을 따라 중생을 교화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 행하신 모든 설법과 보여주신 생활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며, 어리석음을 버리고 지혜인이 되게 함이며, 모든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며 생사의 윤회 고통으로부터 대자유인이 되게 하기 위한 봉사요, 자기 희생이시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다음, '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아라한이 존재한다' 라고 선언하시었고 곧바로 과거 고행시 함께 생활하였던 꼰단냐(Kondanna), 마하나마 (Mahanama), 반디야( Bhanddhiya), 와빠 (Vappa), 앗싸지 (Assagi)등 다섯 수행인을 깨닫게 지도하시어 그들이 깨달음을 이루어 아라한이 되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다시 이 세상에는 오직 여섯 아라한이 존재한다라고 선언하시어 부처님의 아라한과 다섯 제자들의 아라한의 깨달음에 조금도 차이 없음을 나타내 보이셨고 이는 부처님과 제자들 사이에 수직관계의 어떤 높낮이가 있음이 아닌 수평관계의 평등과 동질성을 보여 주신 것이며 깨달음의 본질적 차원과 그 결과가 차별없음을 보여 주신 것이다.

 

다시 야사와 그의 친구 59명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아라한이 되었을 때 66명의 아라한들이 모였음을 밝히신 다음 65명의 아라한들에게 " 비구들이여! 어서 떠나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둘도 아니요, 오직 혼자서 가라. 고통받는 저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진리를 보이고 그들을 깨닫게 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여래의 진리를 보여라" 하시면서 최초의 전법 포교에 대한 의미와 목적을 부여시키셨고 그때 이후로 불교의 비구들은 항상 중생들의 평화와 행복, 깨달음을 위해 노력하는 성스러운 집단이 되었다.

 

부처님의 지혜와 현실적 자비

부처님께서 지니신 여러 가지 많은 훌륭하신 점 가운데서도 특히나 위대하시게 생각되는 것은 지혜와 자비일 것이다. 위없으신 부처님의 지혜와 중생들의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시는 현실적 자비심으로서 이는 수레의 두바퀴와 같으며 허공에 떠 있는 태양과 달과 같은 것으로서 태양의 빛이 만물을 성장 시키듯 부처님의 지혜로서 모든 중생들이 무지의 어둠에서 지혜의 밝은 빛으로 나아가게 하며 달밤의 서늘함이 모든 중생들을 고뇌의 아픔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듯 부처님의 자비가 중생들을 생노병사의 윤회 고통에서 해탈의 길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위와같은 지혜와 자비가 부처님을 모든 수행자나 성자들 보다도 훨씬 위대하시고 거룩하시게 하였으며 부처님께서 하셔야 할 모든 임무를 완성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모든 설법의 핵심을 생노병사 해탈에 두셨으며 이 단계까지 올라올 수 있도록 중생들의 능력에 따라 차례로 설법하시어 마침내 결과를 얻도록 하시었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심에 항상 듣는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시어 이익됨과 되지않음, 피해가 있음과 없음이며 어떤 길로 인도되는 것이 보다 평화와 행복이 되며 어떤 길이 그들을 불행과 고통이 따르는가 등을 확연히 구별지으시는 분별지(分別智)로서 중생들의 숙업과 근기를 살피시어 그들로 하여금 가장 빠르고 바르게 이해하며 좋은 결과를 얻도록 하시었다. 부처님의 지혜로우심, 자애심은 언제나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견해인 현상의 영원성, 인생의 행복함, 자아의 존재 등, 환상적이고 착각적 전도된 생각에서 벗어나는 가장 올바른 방법으로 인간들 자신의 몸과 마음의 자연적 현상인 네가지 물질적 요소, 흙(뼈, 손발톱, 머리카락, 이빨), 물(피, 고름, 눈물, 침, 가래, 골수, 대소변), 불(더웁고 차가운 체온), 바람(몸의 움직임, 호흡), 작용과 다섯모임(물질적인 몸, 비물질적인 느낌, 관념 의지구상, 인식 혹은 마음) 그리고 여섯문, 식, 대상(눈과 빛 안식, 귀와 소리, 청식, 코와 향기 비식, 혀와 맛 설식, 몸과 접촉 촉식, 마음과 법, 현상과 의식)등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진리를 통하여 모든 현상은 항상 변화하여 일어나고 사라짐이요, 모든 생명들은 항상 정신적, 육체적 불평, 불안, 고통, 불만 속에서 존재하며 이모든 고통과 불평, 불만 등이 언제나 변화되고 있음의 진실 그리고 법이라고 하는 것에도(自我)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조건따라 일어나고 사라짐이 있을 뿐임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와같은 가르치심의 법을 배운자들이 법에 대한 실천 수행을 하며 수행의 이상적인 목표는 스스로 깨닫는 것이며 닙바나의 성취로서 마지막 해탈의 길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탈은 다른 것에 대한 믿음이나 절대자의 도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적 현상관찰을 통한 자신의 성품을 바로 본 것이며 개인의 피나는 노력을 통해서만이 성취되는 것이다.

 

자신의 수행을 통한 성취가 있을 때 마지막 해탈의 성취가 있을 때 수행자들은 비로서 부처님의 자비가 어떠한 것인가, 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고 이해가 되며 왜, 부처님이 모든 설법에 핵심을 해탈, 깨달음에 두시었나 명확하여 의심이 없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지혜로서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데는 반드시 자비가 뒷받침이 되시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지혜하면 자비가 뒤따른다. 자비는 중생들에 대한 복지와 안녕 그리고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로 인도하는 기본 동기이다. 그러나 중생들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큰 관심없이 되어가는 데로 살아가도록 모든 것은 제 업에 달려있음이나 미루어 버리게 되면 사실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현실적인 자비를 함께 갖추셨으므로 잘못된 점과 불행한 결과를 가져올 점에 대해서는 절대 금하시고 훈계하셨으며 행복을 가져오고 기쁨과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권장하시고 격려해 주셨으며 행복하고 평화롭게 서로를 보살피고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위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신 것이다.

 

수행인들이 이제는 지혜와 자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며 어떻게 활용해야 되는가에 대해 많은 이해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모든 번뇌로부터 해탈을 얻으시고 깨달으신 정각자가 되신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특정한 사회(천상)에 접근하여 교화하시고 일반 사회인들과도 관계를 맺으시며 지내셨을까?

첫째는 보살로서 다생억겁에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을 따라 선업을 닦으시고 수행하신 모든 공덕과 자비와 지혜의 성취 완성인 것으로 중생들이 환상과 착각에 사로 잡히고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여 외부의 어떤 절대자(당시 브라흐마나의 신봉 사상과 그에 의한 구원사상이 절대적인 사회의 흐름이었음)를 내세워 그를 위해 생명을 희생시키는 제사 등을 하고 계급을 형성하여 절대평등의 인간들에게 심한 차별대우를 하는 등 잘못된 길을 걸으며 끝없는 윤회의 고통을 받고 있는 중생을 구하겠다는 큰 서원의 성취의 결과며, 깨달음의 진리를 내보여 모든 중생들이 해탈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셨다.

 

둘째는 깨달으신 다음 자신의 평화와 행복 그리고 안일 만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자비심을 내시어 사회에 나가셔서 법문하시고, 갖가지 방편으로 도움을 주신 것이다. 이는 부처님 자신의 명예나 영광을 얻고, 수 많은 제자들을 두어서 위대한 스승의 칭호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진실에의 사랑과 순수한 자비심에 의해서 중생들을 해탈케 하고 진정한 자유속에 평화롭고 기쁘며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부처님의 사랑이 근본 바탕이 되어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어떤 형태로든지 따르는 자들에게 물질적, 생명적, 정신적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불교의 가르침은 불교의 영광과 발전을 위해 신자들에게 희생하고 봉사하며 모든 것을 바치라 권하거나 억압적으로 명령하지 않으며 어디까지나 자율적이며 자유 의지적이기에 불교신자가 되는데도 절대신봉의 서약이나 선서가 없이 다만 자신의 의지력에 의해서 5계와 8계, 10계, 227계 등을 받아서 실천 수행하다 본인이 싫거나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언제라도 사회로 돌아가거나 자신의 포기 내지 뒤로 물러서더라도 부처님이나 누가 벌을 준다는 위협적인 언어와 속박이 없다. 왜냐하면 불교는 자신을 깨닫고 그 깨달음은 윤회와 부조리의 두려움과 공포의 속박에서부터 진정한 벗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여행자의 지도 혹은 이정표에 비유되었고 강을 건너는 땟목에 비유된 것이다.

 

중생을 위한 불교이며 그들을 위한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이기 때문이지, 중생이 부처님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당당히 선언하시기를 “해탈의 길은 모두를 위해 활짝 열려있다” 라고 하시었고 귀족이나 천민, 죄인이나 성자 등 모두를 보살피시어 그들로 하여금 해탈의 길에 이르도록 하시었다. 인도 당시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는 하나의 종속에 불과 했으나 여성의 출가 성직자 생활을 허락 하심으로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셨고 병들은 비구 뿌띠가따의 피고름 가사를 직접 빨래하시고 목욕시키시며 그를 상쾌한 기분이 되게 하신다음 설법으로 해탈케 하신 것 등은 부처님의 자비가 어디까지 미치었나 단적으로 증명하는 사례이다.

 

부처님의 자비에 의한 평등사상은 창녀 포주 암바빨이(Ambapali)를 받아 드리시어 성녀가 되게 하시었고 잔인한 살인마 앙굴리말라를 모든 공포와 생명의 위험을 감내하시며 설득 교화시키시어 성자가 되게 하신 것 등 약한자에게는 신념과 용기를, 강한자에게는 겸손과 사랑을 가르치시었고 분열된 단체를 화합케 하시었으며 어리석은 자들을 깨닫게 하신 것은 부처님의 실천적 자비심 이시었다.

 

지혜는 정신적, 지적 능력과 판단을 뜻하며 자비는 사랑, 친절, 인내와 고귀한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은 지혜가 모자라 지적 수준이 낮으니 정도(正道)와 사도 (邪道)를 구분 못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치 못하며 자비심이 부족하여 탐심을 내어 남을 해치고, 진심내며 미워하고 증오하며 스스로 괴롭고 남도 괴롭게 한다. 어떤 이는 지혜로우나 자비가 없다. 자비가 없는 지혜로운 행동은 교만하고 차가우며 독선적이요, 계산적인 자기 이익추구에 머물고 만다. 또 어떤 이는 자비로우나 지혜가 없다.

 

지혜없는 자비의 결과는 지적인 면은 무시되고, 정서적이며 부드러운 반면, 자기분수를 모르고 남을 돕는다며 활동하는 것이 곧 어리석음으로 나타나서 마음 좋은 바보가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지혜와 자비가 잘 갖추어 지면, 수레의 두 바퀴처럼 균형있게 되어 생산적이며 지적 차원이 높은 성품과 사랑과 친절, 인내의 고귀한 성품을 갖추게 되니 자기에게도 이익이 되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어 어리석음과 치우침에서 벗어나게 된다.

 

부처님의 자비는 일체중생이 고통받는 생사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에 이르도록 하기위한 대 자비인지라 한 중생이라도 해탈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피곤함도 괴로움도 모르시고 동서남북을 누비시면서 직접 전법교화 하신 것이다.

 

( 여기에서 저는 부처님의 발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넓디 넓은 인도의 광활한 대지를 몇일, 몇 개월 동안 걸어시면서 오직 법을 중생들에게 전하시겠다는 자비로우신 부처님의 발은 무디질 때로 무디졌을 두터운 발바닥을 생각하면서 마음이 저려옴을 느끼며 다시 한번 법의 인연에 감사를 올립니다.)

 

일체 중생의 근기를 아시는 지혜와 모든 중생이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도록 진리로서 이끌어 주신 부처님은 어느 곳에도 태양에도 비할 수 없으리만큼 위대하신 것이니 수행인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위대하심과 훌륭하심을 항상 반조하고 부처님께서 지니셨던 지혜와 자비가 자신에게도 갖추어 지도록 부지런히 갈고 닦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으로부터 성스러운 유산을 물려받음

수행인은 부처님으로부터 성법(聖法)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사람으로서 다른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하고 돌이켜 봄으로서 수행정진에 힘을 내어 게으름과 해태심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수행인으로서 부처님의 법을 이어받아 수행함에 있어서 7가지 재산인 즉, 칠보가 있다. 이 칠보의 재산은 여의주와 같아서 아무리 사용하여도 다함이 없고 부족됨이 없는 위없는 유산인 것이다. 세상의 유산은 쉽게 없어질 수도 있고 다른이에 의해서 내곁을 떠나 버릴 수도 천재지변에 의해서 없어질 수 있으며 힘에 의해서 빼앗길 수도 있으며, 유효하게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있으나, 부처님 제자들이 부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은 모두 높은 가치의 것들이라 아무리 사용하여도 다함이 없는 보배와 같다. 따라서 이 유산법(法)을 통하여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게 되고 지혜와 자비를 갖게 해주는 진리로서 누구나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일곱가지 보배의 유산

1. 신심(Saddha)=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여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나 평화로운 열반을 증득하겠다는 굳은 믿음. 이 믿음이야 말로 가장 으뜸가는 믿음이요, 모든 공덕의 어머니요, 도(道)를 이루는 기본이며 모든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힘이며 이세상의 모든 부(副)를 소유한 것보다 큰 부유(副裕)함을 가진 것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 믿음은 무조건 적인게 아니라 조사하고 객관적 이론을 가지고 뒷받침 할 수 있으며 수행자를 통해서 확인된 믿음이어야 하며 이 믿음의 뿌리가 될 때에 믿음으로 인간 재산을 소유하게 된 보배.

 

2. 계(Sila)= 수행인, 특히나 비구, 비구니는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와 율을 잘 지켜 스스로 탐.진.치에서 벗어나 청정하며 몸으로나 입으로나 생각으로나 일체의 불선업에서 멀어지며, 행동을 삼가함으로 덕이 쌓이고 지비로와지며, 인욕을 익혀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마침내 수행의 목표에 도달하여 인격자가 되게하는 위 없는 보배.

 

3. 참 부끄럼움(Hiri)= 잘못을 범하고 법도에 맞지 않는 일을 했을 때 즉시 뉘우치고 부끄러워 하며 스스로 겸손해지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 마음의 보배.

 

4. 뉘우치는 마음(Ottappa)= 작은 허물이라도 크게 두려워하며 어떤 작은 잘못이라도 저지르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서 비겁하거나 좁은 마음이 아닌 겸허하고 깨끗한 마음. 세심하고 주의 깊은 마음을 지니고 부처님의 법에 대해 조그만 잘못이라도 범하지 않으려는 경계심에 가득찬 조심성있는 마음의 보배.

 

5. 경(Suta)=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경전과 제정하신 계와 율을 자세히 잘배우고 깊이 이해하며 실천 수행을 통해서 직접 체험을 하고, 지혜가 깊어서 어느 누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질문하여도 주저함이 없이 명확하게 대답해주고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 열심히 배우고 노력 실천하여 갖춘 보배.

 

6. 짜가(Caga)= 고통받는 중생을 위하여 법이나 물질이나 기타 소유한 것을 베풀며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봉사와 희생에 대하여 조금도 인색함이 없이 너그럽게 활수(滑水: 물위를 미끌어 지듯 조건이 없음을 말함)하게 베풀어 주는 것으로 탐심을 다스리고, 파재(破財: 재물에 욕심과 집착이 없음을 말함)하여 탐심을 없앰으로서 진리의 재(財)를 소유한 보배.

 

7. 빤냐(Panna)= 자신의 성품을 알아서 다시는 생사윤회에 떨어지지 않고 무든 중생의 고통을 알고 생사윤회의 원인을 알며 수행을 통하여 깨달은 진리의 지혜로서 중생이 생사윤회를 벗어나도록 가르칠 수 있는 보배.

 

이와 같이 부처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위대한 유산을 가지고 항상 실천 수행하여 자신이 법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때 비로소 바른 법을 널리 선양하며 모든 중생이 지혜와 자비를 갖추도록 책임감과 사명을 느낀다면 무든 배우는 사람들은 부처님 법을 배워 실천함으로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가 일어나고 노력하겠다는 의지의 힘이 샘솟듯 하여 게으른 생각이나 망설이고 해태해진 마음에서 벗어나게 된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산을 물려받은 자는 어떤 특정인이 아니라 누구든지 계속 정진하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잠시라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놓치지 않고 마음을 그 당처에 집중시켜 그 자연적 현상을 알고 일념을 만드는 수행인이다.

 

그런 자는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밤낮없이 지속적으로 정진하는 수행인으로서 덕이 매우 높고 지혜로운 사람인 것이다. 수행인에게 정진의 힘이라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자기 극기의 힘이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여 참고 견디는 힘이다.

 

수행인으로서 이를 알고 노력한다면 수행에 진전을 얻게 되고 하루가 다르게 높아 지고 정진의 힘이 계속되어 사마디가 강해지는 것이다. 세간 사람들도 자식이 게으르고 태만하여 낭비꾼이고 성실성이 없어 많은 재산을 관리할 수 없고 증식할 능력이 없으면 유산을 상속시키지 않는데 하물며 위없는 진리를 증득케 해주는 보배로운 유산을 앞에 두고 수행인이 게으르고 해태심에 빠져 있으며 정신이 산란하여 자신에 대한 중심이 없다면 깨달음을 얻게 해줄 위대한 유산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인은 언제나 이와같은 사실을 반조하여 참으로 분발하고 용맹심으로 전진하며 깨달음을 성취하여 금생에 생사윤회에서 해탈하므로서 부처님의 위대한 진리리 상속인이 되고 고통받는 중생들의 의지처가 되고 무명의 어두움을 부수워버려 이 세상은 더욱 밝고 평화로우며 행복하게 만들어 가는 지혜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서른 일곱가지 깨달음의 개발(Bodhipakkhiya-dhamma)

좌선수행은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한 가장 바르고 정확한 길이며 그것은 또한 주어진 수행 주제에 대해서 보다 더 조직적으로 점검하고 관찰하고 생각하며 개발하여 보다 더 차원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함이며 세간의 법만 아는 것이 아니라 세간을 초월하는 지혜를 얻기 위함이이요, 궁극적인 목표는 생사해탈이요, 도의 성취며 깨달음의 닙바나에 이르기 위함이다.

 

경전상에도 비구들로 하여금 깨달음에 이르는 수행의 기본조건으로서 서른일곱가지 수행법을 강조하셨으며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간곡히 말씀하시었다.

 

" 비구들이여, 이 서른 일곱가지 깨달음의 개발 수행법은 나에 의해서 매우 잘 성명 된 것이며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하니 이 수행법을 잘 받아드리어 따르고 실천 수행하며 개발하여 감으로서 나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이 세상에 빛을 내게 되며 나의 제자들의 성스러운 종교 수행 생활에 지속될 것이며 이로서 자비에 의한 이세상의 이익됨과 발전을 가져오게 되어 모두가 행복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그러면 그것들은 무엇인가?

 

네가지 마음집중 (Maha satipatthana)

네가지 마음집중 (Maha satipatthana)

몸, 느낌, 마음, 법에 대한 현상 관찰과 함께 깨어 있는 마음, 알아차린 마음, 집중된 마음으로 머무는 것으로 몸이라는 것은 앉고, 걷고, 서있고, 누워있을 때 항상 마음이 지금 현재 상태에 집중되어 알아차리고 깨어 있어 자기 자신의 위치가 마음과 함께 있는 것.

 

느낌에 대해서는 지금 현재 어떤 느낌이 일어났을 때 그 느낌의 성질을 즉시 마음으로 하여금 깨닫고 알아차리며 집중하여 느낌의 현상을 알아차림하며 차고, 더운 것, 부드럽고 거칠은 것, 거칠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느낌.

 

마음에 대해서는 마음의 상태를 즉시 파악하고 마음으로 하여금 방황하지 않도록 언제나 몸의 움직임 혹은 느낌, 마음의 움직임 등을 순간순간 포착하여 잠시나마 지금 현재 진행되는 동작이나 느낌에서 떠나지 않아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여 느낌과 마음이 곧 함께 하는 것. 집중된마음.

 

법(Dhamma)에 대해서는 마음과 몸 밖의 경계와 번뇌로운 것등 육근의 대상으로서 물질, 소리, 냄새, 맛, 촉감, 인식 등의 현상이 일어났을 때 마음으로 하여금 관찰하여 육경(六境) 육식(六識)의 대상이 되는 여섯 경계, 곧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의 총칭의 현상을 파악, 자연적 성품을 깨닫는 것 등.

 

이와같이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으로 마음이 머물러 있는 결과로서 과거나 미래에 대한 환상과 번뇌가 스며들지 못하여 자아, 나, 너의 주체적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여 존재치 않음을 깨닫게 되어 환상적 착각과 관념에서 벗어나게 된다.

 

네가지 바른 노력 (Viriya. Cattaro sammappadhana)

네가지 바른 노력 (Viriya. Cattaro sammappadhana)

 

① 비구들이여,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불선업을 완전히 제거하고 다스려 순간이나마 일어나지 않도록 간절하고 긴급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라.

 

② 이미 일어났던 불선업과 번뇌 망상을 힘써 간절하고 긴급한 마음으로 강한 의지와 노력으로 다스리는데 최선을 다하라.

 

③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착한 업을 강한 의지와 힘찬 노력으로 개발하고 발전 시키도록 노력하라.

 

④ 이미 일어나 있는 착한 업을 강한 의지와 힘찬 노력으로 더욱 발전 시키고 개발하여 완벽한 선업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라.

 

위의 네가지는 최상의 노력( Sammappadhana)으로서 깨달음을 크게 돕는 것이다. 이들은 좌선 수행을 보다 힘있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수행에 도움을 주는 지원자이다. 이러한 의미가 있기에 또 다른 명칭으로는 마음집중의 절대요소 (사마디 빠락카나 Samaghi parikkhana)라고도 한다.

 

"비구들이여, 불선업의 생각이 떠올라 마음에 자리잡고 있으며 지배 당하고 있을 때 갈애, 증오, 환상적 착각된 마음이 되며 이는 선업의 반대로 작용하나 바른 노력으로 다스릴 때 불선업의 마음은 사라지게 된다." 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시었다.

 

바와나- 위리야(Bhavana-Viriya)

바와나- 위리야(Bhavana-Viriya)

수행인이 바와나( Bhavana- 마음닦는 수행)를 이루기 위해 부지런히 마음을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당처에 집중시켜 면밀히 관찰하고 인식하도록 노력하며 잠시의 공간적인 여유나 끊어짐이 없도록 정진한다면 번뇌는 멀리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마음에 번뇌가 자라잡아 성장하게 되고 그 번뇌가 지배하게 될 때 바와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수행인이 즉시 번뇌가 있음을 알고 인식하여 번뇌를 수행의 표적으로 삼고 관찰하면 번뇌는 사라지고, 번뇌를 관찰하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가 될 때 다시 마음집중을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으로 돌려 계속 일어남, 사라짐을 관찰함으로서 일념이 되어 사마디를 이루게 된다.

 

이와같이 계속적인 관찰력의 힘으로 사마디가 이루어 질 때 자연히 번뇌 망상은 존재할 수 없으며 불선업의 근원인 번뇌가 제거됨으로서 수행인이 행하는 모든 것은 곧 선업(善業)이 되는 것이다.

 

선업은 계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의 현상을 관찰하여 '나'라는 상념(想念)에서 벗어나게 되고 집착(執着)에서 벗어나게 되며 소유욕에서 벗어남으로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어떤 값진 물건을 보았을 때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관찰이 되어 있지 아니한 사람은 즉시, '나'는 저 물건을 가져야 한다. 저 물건은 내 것이어야 한다 라고 여기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게 되는 과정에서 불선업이 싹트게 되거나 아니면 행동에 옮기게 된다.

 

그러나 어떤 물건을 보는 즉시 ' 물건을 봄, 물건을 봄, 물건을 봄'이라고 객관적인 차원에서 관찰하는 사람은 어떤 사물 앞에서도 소유욕이나 탐심을 일으키지 않게 되고 평온함을 지니게 된다.

 

또 다른 예로서 진심(嗔心)이 일어났을 때 일어남, 사라짐의 현상을 모르면 ' 내가 화가 났다. 내가 화가 난 것은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는 데서 화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나 일어남, 사라짐의 그 자연적현상을 알았을 때에는 다만 그 진심 그 자체가 관찰의 대상이 되어 ' 진심일어남, 진심일어남, 진심일어남'이라고 인식하는 사이 진심(嗔心)은 사라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모든 자연적 현상은 어느 하나라도 영원히 같은 상태로 지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진리를 알면 자신의 모든 감정 처리를 쉽게 해 나갈 수 있고 어떠한 현상이 일어나도 불안과 공포에 휩쌓이지 않으며 그 방향을 바꾸어 관찰해 보고 원인과 결과의 상관 관계를 알게되니, 사실상 어떠한 현상도 처음 시작과 끝남이 같은 것이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와같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나 혹은 가려움을 긁는 육체적인 동작 하나라도 놓치지 않은 채 관찰하고, 모든 육체적 동작이 끝이나고 더 이상 움직임이 없을 때에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와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계속 관찰함으로서 관찰 대상만 바뀌었지 관찰하는 마음의 상태는 조금도 끊어지거나 공백이 없게 밀밀히 이어나가면 바와나의 적(敵)인 번뇌 망상이 사라지게 되고 마음이 평화로와 지는 것이다.

 

이것을 노력을 통한 바와나의 성취라 하며 계속적인 관찰의 노력이 이루어질 때 일념이 성취된다. 일념의 성취는 곧 마음의 다스림이며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보기위한 수단이다.

 

일념된 마음이란 마음이 견고하여 한 덩어리와 같은 것이 아니라 수 없이 많은 종이를 잘 포개어 견고하게 묶어 놓은 것과 같은 것의 의미이다.

 

만약에 묶어놓지 않은 일 백장의 종이가 이곳 저곳 흩어져 있다고 상상해보고, 다시 그것들을 차례로 포개서 다른 종이가 사이로 끼어들어갈 틈도 없이 묶어 놓았다고 상상해 보면 일념 삼매가 무엇인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묶어 놓은 힘이 바로 위리야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위리야로 흩어진 마음을 묶어 놓았을 때 바와나 위리야이다.

 

바와나(Bhavana)를 수행하는 사람은 다음 3가지 조건을 잘 갖추어 균형있게 노력해 나갈 때 수행에 더욱 큰 효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위리야(Viriya:정진 노력),

사띠(Sati: 심관<心觀>:마음집중, 깨어있음, 알아차림)

사마디(Samadhi: 선정<禪定>)

로서 이것은 솥의 3발과 같아 균형있게 갖추어 가야만 수행에 전진이 있게 되기 때문에 중요하다.

 

수행인이 부지런히 위빠싸나 바와나(Vippassana bhavana)를 성취하도록 노력하는 것은 위리야의 힘이 되며, 자신의 마음에 순간순간 일어나는 현상과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육체적 현상에 집중관찰하는 것이 사띠며, 이 사띠를 통하여 모든 번뇌가 침입할 수 없고 머물 수 없게 될 때에 사마디가 성취되어 마음은 고요하고 산란하지 않으며 흐트려져 있지 않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위리야 노력의 힘을 기울려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극히 미세한 부분까지 관찰해 감으로서 마음은 더욱 예리하고 섬세해지며 깊은 사마디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깊고 섬세한 사마디가 이루어질 때 마음이 닦이는 것이라 할 수 있고 이것을 바와나라고 하는 것이다.

 

노력(Viriya)의 세가지 특징

수행인이 사마디를 좀더 깊게 기능적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3가지 특성의 뒷받침이 절대 필요하다.

 

첫째는 위리야 락카나(Viriya rakkhana), 북돋는 노력의 특성으로서 수행인이 수행에 게을러질 때 마음에서 더욱 큰 힘을 내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 예로서 오래된 가옥이 옆으로 쓰러지려 할 때에 쓰러지는 쪽에 기둥을 대어서 넘어지려는 것을 떠받들고 있는 것과 같은 역활을 하는 것이다.

 

둘째로 위리야 라사(Viriya rasa)로서 '기능'이라는 뜻인데 넘어지려는 집에 대어진 받침대 나무의 역활과 같은 것이고 번개불에 비유했을 때 번개불이 어둠을 순간적이나마 밝히는 것과 같은 역활이다.

'노력하는 마음을 활성화 시켜 번뇌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라는 뜻과 같은 것이다.

 

셋째는 위리야 빠주빠타나(Viriya paccu patthana)로서 '현상적 나타남' 이라는 뜻으로 오래된 집을 떠 받들고 있는 나무의 형태와 같으며 번개불의 모양과 같은 것으로 강한 노력을 통해서 나타나는 정진의 효과라고도 할 수 있다. 그 효과라는 것은 곧 해이해진 마음이 다시 강한 노력의 힘으로 좌선의 의지를 굳히고 계속 정진하여 사마디가 나타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위의 3가지 특성을 살려 종합적으로 해석 판단하면 수행인이 수행을 할 때 항상 굳은 신념의 노력과 그를 뒷받침하는 힘 그리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결과로 이와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초인적인 의지와 인내로서 정진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력의 기능은 정진의 힘을 보다 더 효율적으로 하기위한 다방면의 노력으로서 게을러져 가는 마음에 자신의 생명의 존재가 단순히 한 순간의 호흡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속히 깨달음을 성취하여 이 무서은 공포로부터 벗어나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한다.

 

또는 부처님의 간절하신 말씀등을 기억해서 암송하고 뜻을 새김으로서 왜 자신이 열심히 수행해야 되는가를 깨닫게 하고 스스로 분발심과 용맹심을 불러 일으키도록 보다 더 기능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도록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좌선중에 나타나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스러움과 혼침, 망상 등을 이기지 못하여 지루해 하며 흥미를 잃고 다리에는 참을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이 일어 났을 때 공포와 불안에 쌓여 이러한 고통으로 평생 불구자나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한 생각 일어난 그 자체를 관찰하고 큰 결정심을 내어서 계속적인 갖가지 현상의 관찰을 통하여 모든 어려움과 불안, 공포가 가시고 마음이 안정 되었을 때에는 스스로 만족해 하고 다행스러워 하며 성공시킨 노력의 결과에 감사하는 것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인은 노력의 3가지 특성을 잘 이용하여 힘을 한곳에 모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하나라도 놓지 않은 채 점검하고 관찰하여 마음으로 하여금 모든 육체적 행동을 감시하듯 알게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마음 그자체가 방황없이 육신의 모든 동작에 꼭 결속되어 일념이 되게하며, 이로서 깊은 사마디를 성취하겠다는 강한의욕과 의지력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병사가 전쟁터에 나갈 때 충분한 장비를 갖추고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고 승리를 기약하며 출정하는 것과 같이 수행인 역시 자신이 겪고 있는 수행상의 문제들을 정면으로 대결하여 해결하겠다는 마음의 준비와 같은 것으로 이 노력의 3가지 특성을 이용하여 번뇌와 망상, 졸음과 혼돈, 게으름과의 싸움에서 영광스러운 승리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균형잡힌 노력과 바른 겨냥

위빠싸나(Vipassana)수행에 있어서는 부단한 노력과 함께 그 수행의 목표가 뚜렸하여야 하는데, 이 두가지가 균형잡혀 있으면 정진해 나아갈 방향을 바르게 잡고 수행에도 흥미가 일며, 자신이 해야할 바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되고 정진해 나갈 의욕도 생기는 것이다.

 

하나의 예로서 어린이들이 구슬치기를 할 때 자신의 구슬로서 상대방 영역에 있는 구슬을 맞추려 한다면 정확한 겨냥과 함께 거리에 맞게 던지는 힘의 노력이 갖추어야 상대방의 구슬에 정확히 맞추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힘의 노력은 있으되 목표의 정확한 겨냥이 없다면 던지는 구슬은 멀리 넘어가게 되고 목표의 정확한 겨냥은 있으나 던지는 노력이 부족하다면 상대방 구슬의 위치까지 이르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그러나 목표를 정확하게 겨냥하고 던지는 힘이 적당하도록 노력하여 이 두가지의 균형에 의해 상대방의 구슬을 정확히 맞추었을 때 그 기쁨과 성취감은 매우 큰 것이다.

 

위빠싸나 수행도 이와같아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마음을 집중시키는 겨냥과 노력의 힘이 서로 균형을 잘 잡았을 때 수행에 전진이 있게되고 계속관찰 인식해가는 힘을 얻게되는 것이다.

 

1분간을 한번도 놓치지 않고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했다면 18회의 지속적인 관찰이 되는 것이요, 5분간이라면 90회, 1시간이라면 1080회라는 기록의 정신 집중이 되는 것이며 이 순간은 일체 번뇌가 없는 순수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의 상태로서 이 상태에 있는 사람은 수행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행동 즉, 앉거나 섰거나 걷거나 팔이나 다리를 움직일 때에 항상 예리한 관찰로서 정신집중이 되어야 하며 하나의 동작에서 다음 동작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간단(間斷)이 없고 지속적이어야 하며 모든 동작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을 때 수행자라고 할 수 있다.

 

만약에 마음집중이 되지 못하여 산만해 있고 지루해 하며 게으름 속에 번뇌가 자리 잡고 있는 시간이 1분, 5분, 내지 한시간 이라면 여기 소비된 시간만큼 그 수행인의 마음은 어둡고 어리섞으며 더러움이 가득차 추한 사람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결코 진정한 수행자라고 할 수 없는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수행자가 되고 선업(善業:꾸살라깜마/ Kusala kamma)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열정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서 노력해야 되며 그럼으로 해서 맑은 마음, 지혜로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이익(利益)은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마음이며 노력과 지혜를 계발하여 자신의 성품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 이를 바와나(Bhavana)라고 한다.

 

수행인이 수행이 되지 못하여 마음이 밝지 못하고 예리하지 못하여 슬기롭지 못하다면 그 마음의 상태는 어리섞고 미숙하고 소극적이어서 마음씀과 생각과 그 행동거지가 모두 바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부지런히 노력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에 대해서 계속적인 관찰과 마음집중이 되어 있는 수행으로 단련되어 있다면 그 수행자는 지혜롭고 섬세하고 예리하며 모든 사물에 대한 판단이 다를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에 대해서 너그러우며 자비에 넘치는 선한 마음으로 성숙되어진 것이니 이것은 모두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이익이라고 할 수 있다.

 

수행인이라면 위와 같은 마음 상태를 소유하여야만 마음을 닦는 자, 번뇌로 부터 해탈한 자라고 할 수 있다.

 

수면. 무기력에 대하여(Thina-Middha)

위빠싸나 수행을 하는데 무기력과 졸음으로 인해서 수행이 마비, 정지되거나 진전되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헛되이 세월만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수행에 큰 장애가 되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는 방법과 부처님께서 설명하신 것을 소개하여 수행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티나미다는 빠알리어 로서 두 단어의 복합어다.

 

티나(Thina)는 게으름, 무감각, 나태라는 뜻이 있고 믿다(Middha)는 졸음 혹은 혼침이라는 뜻이 있는데, 이는 마치 달이 구름에 가리워 달빛이 흐리게 되거나 아주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며 숨겨진 뜻은, 마음이 게으르고 나태하여 활동성이 없고, 매사에 의욕이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뜻은 수행인의 마음이 안개에 가린 듯하고 근심, 걱정 등으로 마음이 위축 내지 수축되어 응결된 상태로서 널리 밝게 생각할 수 없는 좁고 짧은 어두운 소견에 사로 잡혀 있다는 것이다.

 

수행인이 이 혼침 망상(티나믿다)의 상태에 놓이게 되면 마음이 수축되고 사지가 나른하여 활동성이 없으며 모든 일에 의욕을 잃게 된다.

 

또한 마음이 굳어져 있어 널리 부드럽게 펴지지 못하고 감각기관이 예리하게 깨어있지 못하여 활동이 정지된 상태며 모든 신경이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정지되거나 희미한 상태로서 매우 약하며 게을러져 누울 자리만 생각하게 되니 이는 수행의 큰 적이며 위험스러운 요소인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다스리거나 제거해야 한다.

 

이 혼침 망상이 자리하게 되는 것은 수행의 주제가 선명하지 못하고 자신의 마음이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못한데서 나타나는 현상이기에 예리한 마음의 관찰력으로 자신의 코끝에 스쳐 들어가는 바람을 분명히 인식하여 아랫배까지 이르게 하는 과정을 선명히 관찰하고 있을 경우에는 절대적으로 혼침 망상이 일어나거나 침입해 올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관념적이 아니라 체험적인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정신이 흐릴 때 혼침이나 망상이 들어옴을 모르는 것이니 수행인은 참으로 생명의 존재가 한 순간의 호흡에 달려 있음을 크게 자각하고 자신의 생명을 확인하고 깨어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수행인의 마음이 게으름과 졸음으로 가득하여 활동성이 없고 수축되고 응결되어 있으며 비어있는 상태에서는 모든 것이 즉 자신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나 자신 밖의 자연적 현상에 대한 마음집중이 정지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에 수행인이 용감하고 영웅적인 결심으로 모든 번뇌를 정복시키고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노력을 기울이면 졸음과 게으름의 늪에서 벗어나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인에게 위와 같은 용감하고 영웅적인 결심과 노력이 부족하게 되면 마음의 상태가 매우 위축되고 견고히 굳어져 몸과 마음이 피곤해지기 때문에 육체적, 정신적 활동이 약해지고 의지력이 없어지며 게으름 피우게 되어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바른 자세의 좌선이 불가능해지며 억지로 앉아있다 해도 정신적 혼미함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되고 정신적 긴장감이 없는 육체는 흐트러져 앞뒤 쪽으로 운동하거나 손과 발이 제 위치를 벗어나게 된다.

 

이때 마음의 상태는 침체되고 위축되어 매우 무거운 상태요, 활동성이 없으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관찰은 사실상 정지된 것이다.

 

수행인의 마음이 게으름과 졸음으로 가득하여 활동성이 없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 현상의 관찰이 사실상 정지되면 그 정신이 무거워져 자연히 위축되고 지혜가 나지 않으며 노력하는 자세도 느슨해져 화력이 없으니 모든 생각이 협소해지고 옹졸해 진다.

 

그러다 보니 정진을 열심히 하는 다른 수행인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싫어하게 되며, 얼굴에 빛이 없고 일그러져 험상궂은 모습이요, 찌푸린 어두운 표정이며, 슬기롭지 못하고 부드럽지 못하여 수행인으로서 너그러움과 밝음과 명랑함이 없어져 옆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러니 수행인은 혼침 망상(티나믿다)의 상태에 빠지게 되는 즉시 영웅적 용맹심과 결정심을 내어서 벗어나야 된다.

 

수행인의 마음이 졸음과 게으름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오직 스스로 자신을 살피고 경각심을 가지고 생사윤회의 불더미에서 어서 속히 벗어나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정진의 2배, 3배의 노력을 가행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예리한 마음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지속적으로 관찰하여 정진해 나가면 모든 현상이 침체되지 않음을 분명히 알게되고 어떠한 상태도 정지됨이 없음을 알게되어 마음의 문이 열려 너그럽게 되고 용기와 힘이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물체의 일어나고 사라짐과, 정신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즉시 관찰하고 인식하겠다는 용기와 영웅적인 결정심으로 졸음과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마음은 넓어지고 이해함이 가득하여 맑고 밝아지기 때문에 정진에 더욱 힘이 나고 마음이 매우 활동적이 되므로 관찰력이 더욱 예리해지고 섬세해져 바로 지혜가 나타나게 된다.

 

티나믿다- 졸음과 게으름의 반대는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cara)로서 그 뜻은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의 힘으로 당처에 정확히 겨냥하여 꽉 묶어버렸다는 것이다.

 

마음이 방황하고 있는 것을 관찰하는 힘으로 완전히 묶어서 방황하는, 즉 슬프고 괴롭고 진심내는, 졸음에 잠기고 게으른 마음을 예리한 관찰력으로 부숴버리고 오직 관찰하는 마음이 굳게 일념이 되게 했다는 뜻이다.

 

수행인이 마음집중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몸과 마음의 현상에 완전히 밀착되어 성성적적(惺惺寂寂)해 있을 때는 졸음도 게으름도 망상도 일체 존제할 수 없고 다만 순수하고 맑은 관찰하는 마음만 순간 순간의 모든 현상을 정확히 포착하고 그 당처에 바르게 겨냥되어 한 순간의 방일함도 없게되니 이것을 위딱가위짜라라고 한다.

 

졸음과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일곱가지 길

수행인들이 졸음과 게으름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방황과 혼돈으로 세월만 보내게 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부처님께서는 졸음과 게으름에서 벗어나는 일곱가지 방법을 말씀하신 바 있다.

 

1. 마음의 관념을 바꾸고 자리와 자세를 바꿔라

마음의 관념 혹은 생각을 바꾸라는 뜻은 졸음과 게으름에 대한 자신의 사고방식을 점검하라는 것이다. 수행인이 어느 일정한 시간이 되면 나는 졸립다. 나는 이 시간에는 쉬어야한다. 어느 정도 이 시간에 쉬어야 다음 시간에 잘 할 수 있다. 등의 생각을 항상 지니고 있어서 그 시간이 되면 잠시 쉬었다 한다든가 아니면 의식적으로 자리에 눕거나 정진하는 것을 떠나는 것은 고정관념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념적 사고방식은 몸과 마음을 하나의 습관성으로 만들고 이 습관은 시간적으로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증가하여 쉬는 시간이 길어지고 횟수가 잦아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므로 이 관념적 사고방식을 바꾸라는 것이다.

 

또한 정진이 순조롭게 잘 되는 경우 많은 힘을 들이지 않아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관찰이 순수하게 잘 되어가면 이 때 수행인이 노력의 힘과 경계심을 갖지 않고 느슨히 풀리면서 간절하고 지극한 마음이 없어지게 되고 졸음이라는 마가 슬며시 들어와 자리잡게 된다.

 

수행인이 이렇듯 마음이 약해지거나 어떤 일에건 타성이 붙어 습관화 되어 버리는 나쁜 사고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나쁜 습관이 마음에 자리 잡으면 그 자체가 점점 성장되어 수행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고 결국 졸음과 게으름이 자신도 모르게 수행의 전부로 되어버리고 그렇게 되면 지혜와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지게 때문에 사고 방식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2. 경을 외우고 마음을 새롭게 하라

경전상의 부처님 말씀은 참으로 뜻이 깊고 경책과 경계심을 불러 일으켜 수행인에게는 분발심을 내게 하고 희망을 갖게 해주며, 용기가 나게 해주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그러니 졸음이 오고 게으름에 빠지려 할 때에는 정신을 차리고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몇번씩 되풀이 하여 외우면 졸음을 쫓아버리는 힘있는 무기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새롭게 하고 가다듬어 개으름이나 졸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할 때 신심은 더욱 높아지고 자신과의 투쟁에서 승리하는 결과를 얻을 뿐만 아니라 경계심에 차 있고 깨어있는 수행인이 될 것이다.

 

3. 자신의 지난 날 힘있게 정진하던 것을 기억

수행인이 졸음과 게으름에 빠질 때는 모든 생각이 깊은 늪에 빠진 듯하여 여기저기 생각하거나 이곳저곳 살필 겨를이 없어 그저 졸립고 사지(四肢)가 나른하여 어디에라도 눕고 싶은 마음뿐인 것이다.

 

잠시 누워서 휴식을 취하겠다고 생각하고 누우면 일어나기 싫은 것이 게으른 마음의 특성이다. 이러할 때에 수행인은 참으로 용기를 가지고 정신을 바짝차려 자신이 지난 날 용기있게 정진하던 때를 기억하고 분발하여 마음을 가다듬고 수마를 항복 받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자세를 단정히 고쳐 앉으면 졸음은 사실상 멀리 달아나게 된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지고 졸음이 올 때마다 노력하면 졸음이라는 현상이 더 이상 자리잡지 못하게 되어 스스로 포기해 버리게 되는 것이다.

 

4. 자신의 귀밑을 몇 번이고 잡아 당겨라

좌선 수행중에 졸음이 슬슬 오고 몸이 나른해 지거든 어깨를 펴고 허리에 힘을 주고 상반신을 좌우로 몇번 흔들고 귀밑을 몇 번 잡아 당기면 몸의 혈액순환이 활동적이고 신경기능이 일깨워지며 기분이 새로와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졸음이 오는 현상의 하나는 혈액순환과 신경기능과도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몸이 조용해 활동이 정지되면 사실상 신경기능과 혈액순환이 매우 느려지고 활동이 낮아지게 된다.

 

이러할 때에 졸음이 오게 되고 사지가 나른해 지는데 혈액순환을 촉진시키고 신경기능을 긴장케 하면 신진대사 작용이 좋아지게 되므로 정신이 맑아지고 몸의 기능이 신선해지는 것이며 이로써 졸음은 물러서게 되고 게으른 생각이 없어지게 된다. 이것이 졸음과 싸우는 한 방법이다.

 

5. 얼굴과 눈에 찬물을 끼얹어라

눈의 피곤함이 졸음을 더욱 빠르게하기 때문에 눈과 얼굴에 찬 물을 끼얹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된다. 정신이 희미해지면서 졸음이 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때 졸음에 떨어지게 되는데 졸음이 있음을 인식하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찬 물을 얼굴에 끼얹음으로서 졸음을 물리치는 결과가 된다.

 

6. 밝은 불빛을 올려다 보아라

자기 방에서 홀로 정진한다면 방의 불빛을 밝게하여 졸음이 오지 않도록 하고 대중과 함께일 때에는 가끔 눈을 크게 뜨고 밝은 불빛을 올려다 보면 눈이 부시게 밝은 불빛이 눈의 모든 신경에 자극을 주어 긴장시키므로 모든 졸음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극히 피곤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밝은 불빛 아래서 쉽게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사실을 생각해 보면 이해될 수 있으리라.

 

7. 자리에서 일어나 경행(걷기)하라

좌선 중에 졸음이 오거던 앉아서 졸음에 시달리지 말고 일어나 밖에 나가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걷는 운동을 하며 움직이는 다리에 마음을 집중시켜 졸음을 없애야 한다. 걸음을 시작할 때, 처음 시작에서부터 중간과 끝맺음까지 일체의 다리동작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된 마음을 갖는 순간부터 졸음은 사실상 사라지고 맑은 정신이 되어서 자신의 움직이는 다리와 걸음걸이에 마음을 집중 예리하게 관찰하게 한다.

 

세상 사람들이 밤새워 이야기 하면서 졸음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생각을 예리하게 하여 이야기를 기억하고 만들어내며 문장을 구성하기 위해 경각심에 차있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수행인도 항상 경각심을 가지고 마음을 긴장, 활동 시키면 졸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

 

수행인은 위의 7가지 방법을 각기 잘 적용하여 졸음과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여러가지 방법을 통하여 졸음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는데도 별다른 효과가 없을 때는 하는 수 없이 30분 정도 시간을 정하고 쉬는 것이다. 이는 졸음이나 게으름에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시간을 위해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목련존자가 출가하여 얼마되지 않아 수다원과에 들었을 때, 좌선중 몹시도 졸음에 시달리는 것을 부처님께서 보시고 위의 7가지 졸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설법하시어 목련존자로 하여금 분발 정진케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행인들도 위의 7가지를 잘 적용하여 졸음과 게으름에서 벗어나 수행에 힘을 얻고, 자신을 경책하고 경계하며 늘상 깨어 있는 예리한 수행인이 되어서 자신의 목표를 꼭 달성하도록 해야 한다.

 

수행중에 얻어지는 경험 즉, 어떤 현상이든 두가지가 동시에 나타나는 법은 없다. 하나의 현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다음 또 다른 현상이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수행인이 예리하고 긴장된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자세하게 관찰한다면 어떤 현상도 집착하거나 소유욕을 일으킬 수 없고 다만 관찰하는 그 현상만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롭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관찰하는 마음을 갖지 못했을 때, 그 현상은 곧 나의 현상이 되고 만다. 즉 그 현상에 얽매어 현상 그 자체가 곧 자기라고 판단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마음을 갖게되고 다시 그현상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마저 생겨나게 된다.

 

수행자는 특히 위빠싸나에 있어서는 마음의 즐거움이나 괴로움, 슬픔, 조용함과 산란함, 초조와 불안, 경직된 마음 혹은 방황하는 마음등 어떠한 마음의 상태이거나 현상이거나 치우침이 없고 집착됨없이 예리하고 밀밀하게 관찰하고 집중시키어 알아차리며 그 현상 당처를 주시하여 놓침없어야 한다.

 

이와 같은 노력을 가지고 모든 현상을 관찰 알아차리는 인식으로 다스릴 때 어느 한 상태의 마음도 오래 머물거나 집착됨이 없게되니 소유의 갈망을 일으키지 않게 되고 번뇌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 영웅적인 용맹심과 힘찬 노력의 힘에 의해서만이 이루워 지는 것이다.

 

네 가지 如意足(성취방법) (Cattaro Indhipada/ 짜따로 인디빠다)

1. 의지 如意足(Chandiddhipado/찬딛디 빠도)

비구들이여 의지 如意足을 마음집중력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개발하고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노력이 있어야 한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을 해나가는데는 자신을 너무 해이해진 상태에 머물게 하여도 아니 되며 너무 지나치게 힘을 써서 피곤하도록 하여도 아니 되나니 '나는 나의 의지력을 내적으로 너무 지나치게 게으름에 빠져 스스로 수행에 진전이 없게 해도 아니 되며 너무 지나치게 다급히 서둘러 지쳐서도 안되며 초조하여도 안되며 밖으로 너무 산만하여도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여 중도를 지키도록 하겠다는 강한 뜻을 如意足이라하며 의지 혹은 찬다(Chanda)라고도 한다.

 

2. 노력(Viriyaddhipado/ 위릴디빠도)

노력 如意足을 마음 집중력과 함께 조화를 이루어 개발하고 발전시키고자 노력한다면 기본적으로 정신적 노력이 있어야 된다. 이를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을 해나가는데 도로 자신을 너무 해이해진 상태에 머물게 하여도 아니 되며 긴장하여도 아니 되고 내적으로 초조하지 않으며 밖으로 지나치게 활동하여 몸과 마음이 산란스럽웁도록 노력을 기울여도 좋은 결과와 지복함을 얻지 못한다.

 

3. 마음 如意足 (Cittiddhipado 찔딛히빠도)

마음을 집중시키어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바르게 보기위한 수행자는 자신의 마음을 항상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몸의 동작이나 마음에 집중시킬 때 마음의 상태를 알게되며 또한 자신의 마음을 너무 해이하고 태만한 상태에 두지 않으며 안으로나 밖으로나 긴장하지 않고 산만하지 않으며 평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4. 사려(思廬) 如意足(Vimamsiddhipado/ 위망싣디빠도)

사려의 여의족을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지혜의 기능을 사려깊게 조사하고 여기에 정신적 노력을 기울여 자신의 마음이 방황하지 않으며 밤으로나 낮으로나 밖으로나 안으로나 항상 깨어있는 상태에서 마음이 침체되고 번뇌 망상에 휩싸여 스스로 혼돈과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을 사려와 조사라고 한다.

 

다섯가지 기본기능 (五根) (Pancindriyani 빤찐드리야니)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 성질로서 신심, 노력, 마음집중 혹은 깨어있음, 선정 지혜로서 모든 감각기관을 다스리고 인도해 가는 기본적 기능을 말하며 그 설명은 다음과 같다.

 

1. 신심 (Saddhindriyam 삳딘 드리양)

부처님의 제자들이 갖는 신심은 무조건 맹신이 아니라 이유와 논지에 합당한 자기 자신의 확신이며 스스로 내린 결심에 의한 의심없는 확신이다. 이 확신은 곧 부처님의 정각에 대한 것, 부처님은 모든 지혜와 자비를 갖추시어 모든 중생을 위하시고 이익됨이 있게 하시는 것, 부처님은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시며 모든 중생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하시는 위대하신 성자이시며 천상과 인간의 유일한 스승으로서 훌륭하심, 그리고 그 분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 수행함으로서 확실히 자신도 깨달음을 이루어 한량없는 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며 모든 지혜와 공덕을 모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는 확신을 의미하며 부처님의 말씀을 실천하여 스스로 확인한 믿음이다.

 

2. 노력 (Viriyindriyam 위인드리양)

부처님의 제자들은 게으름없이 자신의 수행 목표달성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며 특히나 이미 일어나 있는 착한 행동이나 마음을 더욱 발전시키며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것은 일어나도록 개발한다. 또한 이미 일어나 있는 착하지 못한 행동이나 마음은 속히 억제해 다스리는 힘찬 노력과 아직 일어나지 아니한 것은 완전히 차단하도록 한다. 이와 같은 노력은 잠시라도 멈춤이 없이 착실하고 완전하게 지어가며 좌선이나 경학 공부에도 마찬가지로 노력을 기울인다.

 

3. 마음 집중 챙김 (Satindriyam 사띤드리양)

부처님의 제자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기능과 작용에 대해 그 진실한 사실과 현상을 깨닫고 바로 알아차리기 위해 초능력적인 마음 집중 혹은 현상 관찰을 통한 알아차림을 뒷받침으로 자신의 행동이 언제나 마음과 함께  알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알아차린 상태와 정신이 지혜롭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 마음이 집중돼 있음을 의미한다.

 

4. 선정 (Samadhindritam 사마딘드리양)

무엇을 선정근(禪定根)이라하는가?

부처님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모든 번뇌를 다스리고 집착과 욕망을 놓아 버리기 위해서 수행의 주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여 수행의 주제와 마음이 하나가 되게 하고 밀밀하여 잠시 순간의 공백이 없을 때 사마디 선정근이 성취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의 수행의 주제는 52가지와 기타 매우 많으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네 가지 대상 즉 몸, 느낌, 마음, 법에 대한 현상관찰을 의미한다.

 

5. 지혜 (Pannindriyam 빤닌드리양)

지혜 根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모든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짐을 완전히 이해하여 그 기능과 가치를 완전히 지녔을 때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이 지혜가 곧 모든 종류의 심리적, 물질적, 육체적 고통을 다스리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른 수행자를 지혜와 기능을 갖춘 수행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위의 다섯가지 기능이 수행을 통하여 완벽하게 이해되고 개발되어 스스로 잘 나타날 때 의심, 태만, 게으름, 산란과 환상적 착각에서 벗어나게 되거나 잘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마음이 위의 몇가지와 같은 파멸적인 상태에서 다섯가지 기능의 도움으로 잘 개발될 때에 고결한 인품을 갖추게 되고 광명이 빛나는 것이다. 이를 사실상 깨달음의 사실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는 " 비구들이여 위의 다섯 가지 기능은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깨달음이 되게 하는 우수한 기능을 가졌기에 깨달음의 사실이라고 부른다" 라고 하시었다.(잡아함 5권)

다섯 가지 힘( 五力 Pancabalani 빤짜발아니)

 

다섯 가지 힘은 앞서 밝힌 다섯가지 기능과 조목이 똑같다. "이 다섯 가지 힘을 잘 개발함으로서 수행인은 닙바나에 이르게 된다. 마치 겐지스 강물이 동쪽으로 흘러가 마침내 바다에 들어가듯이 수행인들도 위의 다섯 가지 기능과 힘을 잘 개발하면 닙바나로 흘러가게 된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시었다.(잡아함 5권)

 

일곱가지 깨달음의 사실(七覺支分) (Satta sam-bojjhanga)

우선 빨리어의 해제부터 해보면 전체의 뜻이 들어난다. 샅따는 숫자로서 일곱이며 삼(Sam)은 훌륭한, 좋은 이라는 뜻이며 보디(bodhi)는 깨달음 혹은 깨닫기 위한 바른 노력이라 하고 앙가(anga)는 사실이며 또 다른 명칭은 보디싸 앙고 (Bodjissa ango)라 하며 어형변화상 보장가로 표기되었다.

 

보장가는 일곱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음 집중과 법에 대한 조사(진리에 대한 조사확인은 곧 자기의 몸과 마음 물질과 비 물질에 대한 진실한 모습을 보겠다는 바른 마음가짐으로서 깨달음의 사실에 제일 중요하며 사성제를 의미함)와 노력, 환희, 마음의 고요, 일념삼매, 평등 등으로서 삼보장가라 부른다.

 

1. 마음집중(念賞 Sati-Sambojjhanga)

마음이 항상 깨어있어 자기 자신이 지금 현재 무엇을 하고 있나 정확히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상태에서 한순간도 놓침없는 집중력이며 자신의 육체적이거나 정신적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행동 생각에 관한 것과 현상(몸밖의)에 대한 것들을 자세히 관찰하며 마음이 진행되고 있는 현상 당처에 완전히 밀착 집중시켜 그 진행되는 상태의 성질을 분명히 파악해 알게 되므로서 몸과 마음, 모든 현상의 적나라한 자연적 성품을 보게되고 확인하여 깨닫게 한다.

 

마음을 자신의 육체적 활동 혹은 호흡의 진행상태나 느낌(피부적) 마음이 변화되는 상태와 법(Dhamma) 혹은 삼라만상의 현상에 두어 관찰하여 알아차리지 못하면 우선 마음이 산란하고 경계와 현상따라 작용하여 한량없는 분별심을 내며 안정되지 못하고 나의 행동, 내 마음의 작용이라는 착각을 일으켜 집중된 마음을 갖지 못하니 내적 수행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마음을 자신의 몸과 느낌, 마음, 법의 대상이외에 두어 일념을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외적수행이요 따라서 마음 밖의 수행(外道)이라 하며 내적(內道)수행이라 할 수 없다. 내적 수행이라 하는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 느낌을 보게하며 일어나고 사라지는 진리를 깨닫게 하여 네가지(사성제)의 진리를 얻는데 의미가 있으며 자신의 마음을 보게 하는 것이다.

 

2. 법의 조사(Dhamma-Vicaya)

깨달음의 기본적 요소로서 마음이 깨어있어 지혜로운 마음으로 담마(법)에 대한 조사확인을 통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며 법에 대한 바른 선택도 의미한다. 모든 가르침을 실천 수행한다고 해서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없기에 반드시 올바른 법의 선택과 바른 이해에 대한 바른 노력이 있어야 수행에 대한 결과가 즉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어떤 가르침이라도 그 결과가 불확실하고 진행 되어가는 상태를 본인 자신이 알 수 없어 막연하다면 그것은 조사 확인해보는 지혜가 있어야 자신의 제한된 생명의 시간을 더 이상 낭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불교는 무조건 믿는 것을 절대 금한다. 부처님 자신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모르는 것에 대한 의심은 당연한 것이며 의심이 되는 것은 반드시 조사하여 의심을 풀고 확실하도록 만들어 모든 것이 확실해 졌거든 곧 실천 수행을 통하여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실천을 통하여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애매하여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가르침은 올바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의 조사 확인이 깨달음에 이르는 기본적 사실이며 깨달음의 일보가 되는 것이다.

 

3. 정진 노력(Viriya 위리야)

법에 대한 조사로서 확인이 되어있는 수행자는 즉시 노력을 기울려 정진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노력이 강한 추진력이 되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며 깨달음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수행인이 법에 대한 확신이 서 있게 되면 실천을 통해서 그 결과를 보고자 하는 의욕을 가지고 자신의 건강과 생명의 희생까지라도 각오하고 끝까지 정진하여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굳은 신념, 적극적인 관찰력이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 피곤함과 지루함 그리고 고통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이러한 노력이 곧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기본이며 사실이 되는 것이다.

 

4. 법희(法喜 Piti)

노력의 힘이 강해져 정진이 순수하게 진행되고 관찰력이 밀밀하여 순간의 공백이 없어 번뇌가 더 이상 자리하지 못하게 되어 일념이 될 때 큰 기쁨이 일어나고 이 기쁨은 감각적 쾌락이 아닌 평정하고 고요한데서 오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감정과 모든 감정이 다스려진데서 오는 것이기에 흔히 말하는 환희마가 아니며 세간적 얻음에서 오는 기쁨 환희가 아닌 깊은 사마디의 수행에서 얻어진 체험적인 것이다. 이를 통해 깨달음에 대한 확신이 더욱 굳어지는 기쁨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기본이 되는 것이요 깨달음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 법희는 다섯가지가 있다.

 

5. 평정(平精 Passadhi)

평소의 경직된 사회 생활속에서 불안과 초조 긴장상태가 자신의 호흡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관찰로 마음이 고요해지고 체험적 기쁨을 얻을 때 몸과 마음의 긴장과 불안 초조가 해소되며 평화롭고 안정되니 자연히 평안해지며 어떠한 문제에 얽매임이 없는 가벼운 마음, 정체되지 않는 마음이 된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는 긴장이 풀리고 휴식이 잘된 상태이기에 마음 집중이 더욱 쉬워지고 매사의 업무 진행이나 인간관계가 매우 유연해지며 깨달음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6. 선정(Samadhi sambojjhanga)

수행인의 마음이 평정하고 모든 긴장과 불안이 다스려진 상태에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호흡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라든지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또는 느낌의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현상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그것들의 자연적 성질 내지 성품을 보게 되므로서 어떠한 현상에도 집착함이 없이 마치 흐르는 물이 끊임없듯 관찰력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모든 번뇌 망상을 가두게 되고 망상이 자리 잡지 않을 때 청정한 마음, 일념된 마음, 순수한 마음이라 한다.

 

이와같은 사마디의 깊은 체험이 곧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근본적인 힘이 되기 때문에 정신적 안정과 육체적 평온을 얻게되고 행복함을 느끼며 쉽게 일념 사마디를 성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마디의 경험이 깨달음의 기초이며 번뇌가 없어진 마음이 무엇인가, 어떤 것인가를 본인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마디속의 밝게 깨어있는 마음은 지극히 고요한 가운데 평화가 있고 모든 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보이는 밝은 마음이 되며 깨어있는 마음이기에 깨달음의 일부가 되는 것이며 깨달음의 절대적 요인이 된다.

 

7. 평등(Upekkha-sambojjhanga)

수행인의 마음이 집중되어 일념 사마디를 이루었을 때 모든 현상은 한결같은 현상의 범위내 (즉 일어나고 사라지는)에 있으며 절대 평등으로 어떠한 예외적 차별이 없음을 보게된다.

 

세상의 어떠한 얻음과 잃음, 슬픔과 괴로움, 불행과 행복에도 휘말리지 않고 초연하게 되어 자기 중심을 지키는 침착한 상태, 근심이 없고 불안함이 없어 평온한 마음의 자세로 오직 법에 의지한 균형있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며 모든 과거 수행자와 셩현들과 자신의 수행에도 하등의 차별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이와같은 평등은 위없는 깨달음의 일부이며 깨달음에 있어 절대적 요소이다.

 

위의 일곱가지 깨달음의 사실은 깨달음(Bodhi)에 이르게 하며 정신적 차원 높은 경지의 체험을 얻게 해 주는 요인이요 사실이 되어 생사윤회의 크나큰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기에 보장가((bojjhanga)라고 하며 깨달음의 요소,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경전(잡아함)상의 말씀에는 '수행자가 자신의 수행목표를 달성코저 한다면 반드시 계행(Sila)이 엄정하고 청정했을 때 좌선수행의 기본적인 조건이 갖추어 지며 집착에서 벗어나고 욕망, 갈애를 다스려 모든 행업이 쉬어지고 놓아 버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의도했던 수행의 목표가 이루어진다'라고 하시었다. 이는 수행의 목표가 아무리 훌륭하고 완벽하다 해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기본적 조건을 갖추지 아니하면 높이 세워진 목표라 하더라도 의미없고 생산성이 없다는 뜻이며 동시에 결과도 없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조건과 요인 사실 등이 절대 필요 되는 것이다.

 

위의 일곱가지 보장가에는 항상 진지함( 아따삐 Atapi) 마음집중 혹은 정신의 깨어있음(사띠 Sati) 그리고 실상에 대한 혹은 모든 몸과 마음에 대한 것들을 명확히 파악하고 표현하는 기능 (삼빠잔냐 Sampajana)고정된 집중과 관찰력 (요니소마나시까라 Yonisomanasikara 식카띠 Sikkhati)등이 신심 (삳다 Saddha)과 노력(위리야 Viriya)의 균형 잡힌 힘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각기 보장가에는 제행무상과 일체개고 재법무아의 삼법인(三法印)의 특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위의 각기 보장가에는 또한 수행자로 하여금 네가지 관찰의 대상 (몸 까야 Kaya, 느낌 웨다나 Vedana, 마음 찔따 Citta, 법 담마 Dhamma)을 보다 더 강하게 해주며 네가지 대상에 대한 자연적 성품을 깨닫게 해주고 성질을 보게 해주는데 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며 이 수행을 통하여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고 성스러운 진리에 이르게 하며 지혜를 얻게 해준다.

 

팔정성도(Ariya Atthanggikamagga 아리야 앝탕기까막가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이여 무엇을 팔정성도(아리야 聖 앝탕기까 여덟 막가 도)라 하느냐? 라고 말씀하시고 '그것들은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言)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 정념(正念)등이니라.' 하시었다.

 

팔정성도는 서른 일곱가지 깨달음의 사실 혹은 요인중에 일곱 번째 마지막 부분이다. 여기 여덟이 포함되어서 서른 일곱이 되며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이 여덟에 이르기 위해서 앞서 29개의 여러 가지 수행자세와 질서를 정리했던 것이다.

 

여덟 가지의 도는 불교의 가장 으뜸가는 이상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며 현실을 이상화시키는 으뜸가는 진리요, 세상의 모든 진리를 뛰어넘고 모든 고통을 다스리고 제거하여 완전한 성스러운 생활이 이 세상을 떠나지 아니하고 이룰 수 있는 길임을 부처님께서 보여주신 위없는 길이요, 진리이다.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에 대해서는 바른 이해는 매우 중요하며 이는 반드시 실천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야 하며 단순히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하므로 그 진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여덟 성스러운 길이 포함된 네가지 진리(사성제)는 매우 심오하고 관범위하기 때문에 깨닫기 어려운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었다. 이 진리는 세간을 초월한 것이며 자아의 비어있음이기에 평범한 사람들은 쉽게 깨닫지 못하고 바르게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잘못된 생각에 사로 잡힌데서 비롯된 것이지 사실로 자아라는 것이 있어서가 아닌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몸과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보기위한 깨달음이 중요하고 그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여덟가지 성스러운 진리이 길이다.

 

1. 정견 (삼마딪히 Sammaditthi)

정견이라는 것은 우선적으로 사성제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며 (다음에 설명) 또한 삼법인을 바르게 보는데서 진정 정견이 갖추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모든 원인에 의한 존재며 원인과 결과가 계속해 되풀이 반복되고 있음으로 해서 이 세계가 존재하고 모든 현상의 생물 식물 갖가지 구조물 등이 존재하며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이 세상 어느 한가지라도 원인결과의 진행이 아님이 없음을 알아서 고통의 결과는 반드시 잘못된 원인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깨닫는 것이며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2. 정사 (삼마상갑빠 Sammasankappa)

바른 생각 혹은 의지력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세 가지를 포함한다. 즉 세상의 모든 쾌락을 벗어나겠다는 의지력과 원한심과 증오심을 없애 버리겠다는 의지력과 모든 생명을 해치지 않겠다는 의지력이다. 이와 함께 항상 깨달음을 금생에 성취하겠다는 바른 생각이요, 의지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위의 세 가지를 분리하여 실천할 때에는 출세간 적인 것이 된다.

 

모든 현상과 생명에도 제행무상의 현실이 있으며 행복보다는 불행이,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현상이나 생명에는 그 생명을 이끌어 나가는 절대자나 영원한 주관적 개체가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 것을 바른 생각 혹은 바른 의지력이라 한다.

 

3. 정언 (삼마 와짜 Sammavaca)

바른 언어 동작에는 네가지가 반드시 포함된다. 정직한 말 즉 사물에 대한 것도 사실 실상대로 표현해서 말한다. 즉 모든 현상은 변화한다. 모든 생명들은 기쁨보다 슬픔이, 즐거움보다 과로움이 있다. 自我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라는 것 등에 대한 진실을 표현의 말, 언어와 이간질하지 않는 말, 험담하지 않는 말, 욕설하지 않고 비방하지 않는 말, 등이다. 허튼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으로서 언어를 통하여 화합을 이루고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삼가 항상 화합과 평화가 있게 하고 듣는 이로 하여금 의미있고 기쁜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다.

 

입으로 업을 청정이 하여 또 다른 윤회업을 추가하지 않으며 입을 잘 다스려 언어를 부드럽고 곱게 하며 이익 됨이 있게 하는 것으로 차원 높은 언어 행동을 개발하여 완전히 착한 업을 쌓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4. 정업 (삼마 깜만따 Samma kamanta)

바른 업으로서 몸과 입의 행동으로 쌓아가는 것인데 세 가지가 매우 중요하다. 첫째는 생명을 해치지 않음이요, 둘째는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음이요, 셋째는 삿된 음행 행위를 하지 않음이다. 이와 같은 올바른 행동은 착하고 훌륭한 사랑을 베푸는 행동을 실천함이요, 남에게 널리 베풀어 돕는 것이요, 정숙하고 청정한 행동이다.

 

이는 몸으로서 행하는 도덕률의 실천이요, 불교 기본계율을 실천 수행하는 것으로 불선업을 쌓지 않는 것이다. 중생들이 무지로 인해서 몸과 입으로 착하지 못한 업을 쌓고 이와 같은 불선업이 원인이 되어서 태어날 적마다 불행하고 질병속에 헤매이게 되는 것이며 끝없는 생사윤회를 계속되게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올바른  진리를 배워 실천수행 하므로서 다시는 불선업을 짓지 않게되고 해탈의 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정명 (삼마 아 지와 Samma ajina)

올바른 직업으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올바른 직업을 가질 때는 착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직업을 갖지 않는다.

 

1. 시체 담는 관을 팔지 않는다.

2.노예나 무기 종류, 독약류 등을 팔거나 사지 않는다.

3. 술이나 마약류 등을 취급하지 않는다.

4. 도살장을 경영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유한 생활을 위해서 올바르지 못한 장사나 생활을 하지 않음으로서 차원 높은 생활, 도덕적인 생활을 하여 일체의 착하지 못하고 비난의 대상이 되는 생활을 하지 않게 된다.

 

6. 정정진 (삼마와야마 Sammavayama)

바른 노력은 앞서 설명한 네 가지 노력과 기타 여러곳에서 많이 밝혀 놓았기에 생략함.

 

7. 정념 (삼마사띠 Samma sati)

바른 마음집중. 바르게 깨어있음 등은 사념처로서 앞서 설명되었기에 생락함.

 

8. 정정 (삼마사마디 Samma samadhi)

바른 사마디란 바른 좌선수행을 통하여 선정에 들게 되며 굳은 결심으로 계속 좌선수행하며 깨달음 닙바나에 이르게 된다. 수행인은 좌선 삼매를 통해서만 닙바나에 이를 수 있으며 좌선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몸과 마음(Rupa- nama 물질과 빗물질)의 자연적 성품에 대한 현상 관찰이다.

 

몸과 마음의 자연적 성질과 현상이 아닌 것으로도 삼매 즉 마음이 일념되는 경지는 쉽게 이를 수 있으나 (사마타)몸과 마음의 대상이 아닌 삼매는 제한된 것이며 고정관념을 갖게하기 때문이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적멸 닙바나의 경지를 체험하지 못하게 되고 닙바나 적멸의 체험이 없이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가운데 멸(오온의 소멸)의 수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도에 들지 못한다.

 

적멸의 경지를 체험하지 못했을 때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가 완전히 깨닫지 못하게 되니 자연히 자신의 성품과 모든 현상의 진리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지혜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五온)의 성품을 보아야 하는 것이며 오온(빤자칸다스)의 집착에서 벗어나 새로운 원인을 만들지 않게 되고 원인이 없으니 결과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위의 일곱 그룹 37가지를 깨달음의 사실 옥은 요인의 개발이라고 하며 이들이 깨달음에 이르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요, 기본이라 한다.

 

계율은 교단의 생명선

계와 율은 부처님의 교법과 교단의 생명선과 같은 것이며 비구 자신들에게도 똑같은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엄격히 지키고 따라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 계(戒)와 율(律)의 의해서 비구의 격(格)이 갖추어지는 것이니 스스로의 안전과 보호를 위하고 인생에 번영과 발전. 행복을 갖고자 한다면 꼭 지키라고 하시었다.

 

출가인이거나 재가인이거나 관계없이 스스로 해당되는 계와 율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다.

 

계가 청정함으로서 모든 불선업에서 벗어나 자유로우며, 정(定)이 이루어짐으로서 모든 심적 고통과 번뇌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맑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할 수 있고, 혜(慧)가 발현(發現)되어 사물의 실상(實相)을 바로 보게 되면 미세한 망상가지도 제거하고 다스려 참으로 진리를 증득한 지혜로운 수행자가 되는 것이다.

 

계와 율은 마치 가정집을 지켜주는 견고한 울타리 내지 담장과 같다.

담장이 견고하게 잘 세워져 있을 때가 정이라고 하는 집이 안전하게 존속하며 강한 바람(다섯가지 욕망)의 피해와 도적들(여섯 가지 경계)의 침입을 막아 집이 흔들리지 않고 집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慧)이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하며 생산적인 일 (지혜의 계발)을 할 수 있어 그 집안 가족은 번성하고 발전해 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단체라도 튼튼히 성장하고 발전하려면 법규와 질서가 잘 지켜져야 하듯 불교교단도 발전하고 사회적 지도자로서 존경을 받으려면 반드시 계율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을 비구라 하는가

비구(Bhikkhu:빅쿠)는 팔리어로서 법(法)을 비는 자(乞法), 무소유자(無所有者), 걸식자(乞食者). 독신으로 세간을 떠난 자, 고요히 명상하는 자 (좌선 수행자)의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면 누구를 비구라 하는가?

실제에 있어서 팔리어의 뜻에 나타난 것을 보면 마음집중이 되어 있는 사람, 언제나 자신을 인식하고 깨어있는 사람, 자신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고있는 사람을 이름하여 비구라 하며, 혹은 비구라 부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일반 언어에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비구라는 명칭은 지역마다 다른 언어로, 지니는 의미도 조금씩 차이를 두고 불리워진다.

미얀마에서는 '지카'라 하여 높은 스승을 뜻하는 말이고, 태국에서는 '프라', 세일론어로는 '하므드레'라 하여 '으뜸가는, 위없는'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한국에서는 스승이라는 뜻이 담긴 '스님'으로 불리워지고, 영어권에서는 독신 수행자라는 뜻의 몽크(Monk), 신에게 제사지내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프리스트(Priest)라는 말이 사용되기도 하나, 모두 '비구'라는 말이 지닌 복합적인 내용을 담고있지 못하므로 여기서는 의도적으로 팔리어의 뜻으로 '비구'를 사용하기로 한다.

 

일반 대중의 눈에 비친 비구

일반적으로 비구는 머리를 깎고 가사(승복)를 입음으로서 비구라고 여기게 되나 가사를 입고 머리를 깎았다고 해서 모두 비구라 할 수 없다. 비구라는 명사 뒤에는 깊은 뜻이 있으며 그 깊은 뜻을 따라 설명해 나가기로 한다.

 

중생은 업에 의한 윤회 때문에 존재하며, 그 업은 선업과 불선업으로 오욕(五慾)과 육근(六根)의 감각기능에 의해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움직임, 즉 행동을 통해서 지어지는 좋고 나쁜 습관들과 각기 정도가 다른 정신적인 애착과 집착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이 원인이 되는 것인데 비구는 이와 같은 모든 현상에 대해서 언제나 마음이 집중되어 있고 정신적인 면에서나 육체적인 면에서 인식과 관찰을 분명히 해나간다.

 

비구는 설사 지난 과거의 불선업(不善業)의 영향으로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동물적인 행동을 행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를 억제하고 언제나 자신에 대해서 마음 집중이 되어있고 행동에 대해서 관찰하고 있으며 매사에 침착하고 경각심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며 방종 방일하지 않으며 겸손하고 친절하여 자비에 넘쳐있고 늘상 깨어있으니 혼침과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고 사리판단에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며 자신의 행동이 주위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자신의 육체나 정신에 대해서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을 관찰하여 일체 자연현상의 무상함을 깨닫고 정신집중이 되어 있는 자가 비구이다.

 

비구는 재산과 세속의 의미의 사랑과 수명과 먹는 것과 명예 따위 다섯가지 욕망에 대한 탐심과, 시기와 질투, 증오와 원한으로 인한 진심(瞋心)과, 자신을 모르고 자연적 현상을 모르는 어리석음 즉 치심(癡心)이 원인이 되어 고통스러운 윤회가 반복되어지는 것을 안다.

 

비구는 또한 법에 대한 잘못된 견해와 수행 내지 생활로 인해서 다시 탐. 진. 치가 증진되고 한량없는 핍박과 고통을 겪으며 희생의 제물이 되면서도 그 사실을 모르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게 생각하여 이들을 탐심, 진심, 치심의 쇠사슬에서 구해내겠다고 생각하고 깨닫게 하겠다고 노력하는 자며, 위의 모든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는 것도 중생의 마음이 탐. 진. 치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자 하는 자이다.

 

사실상 탐, 진, 치 자체도 일어남과 사라짐의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하나의 자연 현상인데도 다만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다시 탐. 진. 치에 사로잡혀 끝없는 중생의 생사윤회를 헤매는 것이다.

 

비구는 위빠싸나(Vipassana) 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정신적. 육체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함으로서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함을 증득 하고 제법(諸法)이 무아(無我)임을 증득 한다면 근본적인 생사윤회의 원인인 탐. 진. 치가 자연히 소멸된다는 사실을 아는 자이다.

 

비구는 생사윤회의 고통을 받는 것은 탐심. 진심. 치심에 의해서며 수행을 통하여 탐. 진. 치를 없애고 생사윤회도 끊어야 함을 알고 현재의 탐. 진. 치에 의한 불선업의 미래의 윤회가 되는 원인이요, 이 몸을 태우는 업화임을 아는 동시에 모든 물체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관찰을 통하여 업화를 꺼버릴 수 있다는 진리를 증득한 자이다.

 

비구는 인간(人間)의 소원하는 바는 끝이 없고 하나의 소원이 성취되면 계속해서 또 다른 소원을 바라며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불꽃처럼 치솟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진심내어 저주하고 원망하고 드디어는 자신의 꿈을 욕망으로 불태우는 어리석음과 칼로 째는 듯 아파하고, 괴로워하며, 가족과 사회를 비난하는 것 등이 모두 욕심과 어리석음이 원인을 아는 자이다.

 

비구는 중생이 격정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자제할 수 없을 때 번뇌가 일어나고, 이 번뇌 때문에 팀심. 진심. 치심이 일어나며 그로 인하여 다시 번뇌의 불꽃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모든 물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진리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데서 기인하며 '나'라는 것에 집착하는 어리석음 때문에 고통 당한다는 사실을 아는 자이다.

 

비구는 몸과 마음의 복합적이고 복잡한 역학(力學)관계를 자세히 알고 이해하며 몸과 마음의 모든 내적(內的) 외적(外的)현상을 일어남과 사라짐에 초점을 두어 관찰한다면 잠시도 머무는바 없이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는 그 현상이 어떤 주인이나 주체(主體)가 없이 다만 정확하게 지속적으로 반복되어지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니 이 기능에 대한 완전한 이해와 체험으로 모든 번뇌를 사라지게 하고 물질 , 비 물질에 대한 욕망과 애착, 집착에 사로잡혔던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비구(모든 욕망에서 쉬어버린 자)이다.

 

중생이 생사윤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번뇌 망상과 탐. 진. 치에 대한 자연적 성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까닭이다. 비구는 윤회의 고통에 대한 위험을 느끼고 그 원인이 탐. 진. 치에 있으며 또한 몸과 마음의 자연적 현상을 바르게 알지 못한데서 비록 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말씀에 " 모든 중생이 끝없는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데는 닦아 나가야 할 3가지 요소가 있다"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렇다면 3가지 요소는 무엇인가?

 

계(戒 Sila) 정(定 Samdhi) 혜(慧 panna)로서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속한다.

 

그 가운데 첫째인 계는 부처님께서 비구들을 위하여 특별히 제정하신 것으로, 강제성을 띠거나 부처님의

 

독단적인 제정이 아니며 그 당시 발생했던 여러 가지 사건에 따라 그 사건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비구들로 하여금 지켜 스스로 청정하도록 만드신 율법이다.

 

비구들이 이 계를 지켜 정신적인 자세를 바르게 하고 언어와 행동에서 모든 부도덕을 제거한다면 사회의 비난과 꾸짖음 비방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이 계와 율은 장소와 시대적 상황에 따른 적응성과 필요성 그리고 유효성에 대해서 토론이나 논쟁을 일으킬 수 없으며 어떤 계목은 없애거나 무시해 버린다든지, 또 어떤 계목은 시정하여 현실성에 맞추어야 한다든지 하는 이론(異論)을 제기할 수 없다.

 

그것은 사실상 절대성을 지닌 것으로서 모든 비구 비구니가 경건하게 받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비구로서 계를 잘 지키고 생활하거나, 만약에 이 계율이 개인의 적성에 적합지 못한다면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떠나야 하는 것이 불교 존속을 위해서 옳은 것이다.

 

갓 출가한 비구

특히 이제 갓 출가한 비구나 비구니 그리고 재가신자로서 귀의한 신자는 계율을 공부할 시간이 없어서 계율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성품을 관찰하고 반조하여 특히 출가자는 자신이 출가 사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여 비구로서나 비구니로서 행동을 해야하며 선배 비구. 비구니의 모습을 따라 배우되 어떠한 행동이든지 비구나 비구니로서 적합지 못하거나 아니면 어진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라 생각되면 자제하여 행동에 옮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매사에 마음을 집중시켜 먼저 이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자기에게 가져오게 되고, 다른 이에게 어떻게 영향이 미칠 것인가 생각해야 하며, 지금 자신의 행동이 신심이 있는 사람에게 신심을 더욱 샘솟게 하고 부처님이 가르치심에 이해를 돕게 할 것인가, 아니면 신심이 떨어지게 할 것인가 등을 깊이 있게 생각하며 행동해야 할 것이다.

 

비구나 비구니로서 보아서 안될 것은 보지 말며, 어떤 일을 행동에 옮길 것인지 아닌지 분명히 가려내고 모든 사항을 지혜롭게 생각하고 바르게 판단하되 그 기준은 '몸이나 말이나 생각을 통해서 나타나는 행동 및 일이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해롭고 남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면 옳지 않은 일이요,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고 남에게도 해가 미치지 않는 것이라면 바른 것이라 판단할 수 있는 것' 이라 하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둔다.

 

일체 행동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관찰한다면 비록 계와 율을 배우지 않았다 하더라도 법과 율에 맞게 생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비구나 비구니는, 이러이러한 계율은 오늘날 같은 우주시대에 맞지 않으며 시대적 적응성이 없다는 등 여러 가지 이유를 내세워 계와 율에 대해서 경시하거나 무시하며 계율을 비난하기까지 하여, 계와 율을 잘 지켜 수도 정진하려는 노력이 부족한 자신의 불성실을 호도하려는 태도도 없지 않다.

 

특히나 사회적으로 불교문화권이 아니거나 불교의 영향력이 거의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출가했을 경우 불교의 계와 율에 대해서 시정해야 할 점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비구. 비구니는 부처님의 제자들로서 부처님이 제정하신 계와 율을 존경하는 신심으로 생활하며 잘 지켜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계와 율은 부처님의 교법과 생명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비구. 비구니들이 계를 잘 지키고 보호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기회를 찾아 파괴하려 한다거나 무시하고 가벼이 여기려 한다면 인류의 등불인 부처님의 교법과 교단의 생명선은 끊어지고 말 위험에 부딪힐 것이며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떨어뜨리고 파멸의 길로 인도하는 어리석음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출가인 교단은 가장 오래된 민주주의이다. 그리고 가장 자율적 인격 위주의 집단이기도하다.

 

비구 대중들은 언제나 토론과 비평을 청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다수의 합의에 의해서 문제의 결론을 내리거나 결정짓기 때문이며 먼저 출가한 선배는 이제 새로운 사람을 강제적으로 뒤에서 채찍질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행동하여 본보기를 보여주며 새로운 사람은 스스로 보고, 느끼고, 판단하여 앞서가는 선배 비구의 행동을 흉내내며 따르도록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말로서 만이 뒷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의 행동으로써 가르치며 판단하도록 자유의사를 허락한다. 그것이 자율적이요, 민주주의 식이며 매우 합리적인 교육방법인 것이다. 이 전통은 교단의 창시자인 부처님에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 2천 6백년동안 이어지고 있다.

 

크게 뉘우침

어떤 비구가 작은 허물을 범하고 크게 뉘우쳐 두려웁게 생각하고 이후부터 작은 계율이라도 파하지 않으며 잘 지키려 노력한다면 이는 오히려 정신적으로 매우 건강한 비구이다. 부주의였건 고의였건 자신이 파한 작은 계율을 통하여 커다란 경각심을 일으키고, 참회심을 내어서 큰 허물 일어날 것을 미리 예방하게 되는 것이므로 이 비구는 다시 청정한 계율 지킴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계와 율은 불교의 생명선이므로 모든 비구 비구니는 계와 율의 가벼움과 무거움,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엄격히 잘 지키도록 노력하며 스스로 청정하여 자신과 모든 사람들로부터 신뢰받을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이들의 신심을 더욱 튼튼하게 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든다면 부강한 나라들의 시민들은 국가에서 제정한 법과 질서를 잘 지켜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가 튼튼하여 복지국가요, 부유한 나라가 되며, 질서 있고 깨끗하며 아름다운 사회를 유지하고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며 화합으로 이끌어 나가기 때문에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게 되어 그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시민정신과 투철한 준법정신을 지닌 훌륭한 시민이 되는 것이다.

 

비구나 비구니들도 마찬가지로 부처님께서 수행자들을 위하여 제정하신 계와 율을 잘 지키고 수행을 열심히 하여 청정하고 덕이 높으며 지혜로운 비구. 비구니가 되면 모든 중생의 의지처가 되고 복밭이 되며 부처님 제자로서 존경받게 되므로 교단이 존경받게 되고 영광이 쌓이게 되며 성장 발전하게 되어 더 많은 중생들에게 교화의 덕과 이익됨을 베풀어 나가게 될 것이다.

 

비구나 비구니들이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와 율을 잘 지키어 그 질서 속에서 화합하고 서로간에 존경하며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활동을 하며 수행을 통하여 지혜와 덕을 쌓아 모든 중생의 등불이 된다면 교단도 발전하고 비구. 비구니 자신들에게도 이로움이 많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의 명예와 영광이요, 전체 교단의 명에와 영광인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들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주는 계행 지킴에 소홀하여 함부로 행동하고 뉘우침이 없다면 그는 참으로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로서 짐승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계행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절대 생사윤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계행을 지키고 부끄러운 줄 알며 뉘우치는 마음을 가질 때 자신의 수행 생활을 향상 발전시켜 가려고 노력하게 되고 이 노력이 곧 마음을 집중시키는 수행으로 연결되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언제나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작은 허물이라도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짓지 않도록 하며 만약에 어떤 불가피한 상황에서 지어진 허물이 있다면 언제나 크게 뉘우치고 부끄러워하며 다시는 그와 같은 경우를 만들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마음을 집중시키는 사람이며 유심(有心)히 살아가는 수행자라고 하며 뉘우쳐 스스로를 경책하는 사람이라 한다.

 

계(戒)는 인간(人間)의 입과 같다

계(Sila)는 위리 인간의 입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입으로 모든 음식을 받아들여 몸을 건강케 하고 필요한 영양소와 음료를 공급받게 되어 생명을 유지하게 되는데 그 입이 쓰리고 아파서 일체 음식을 씹어서 넘길 수 없고 음료수를 마실 수 없다면 그 사람은 건강을 잃게 되고 마침내 생명까지 잃게 될 것이다.

 

비구나 비구니가 계를 지키는 것도 이와같아 계가 잘 지켜지고 거기에 따른 수행을 잘 하게 되면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되고 마음을 잘 닦아 지혜가 증장되면 생사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명예가 높아지고 존경을 받게 됨은 물론 모든 중생들에게도 생사해탈의 길을 열어 보이게 되어 한량없는 공덕을 베풀게 되는데 만약에 우리 입에 해당되는 계가 병들었다면 아무리 수행을 한다고 노력해도 결과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계(Sila)는 수행에 진전을 가져오는데 매우 중요하다. 계라는 입이 병들면 정(Samadhi) 혜(Panna)라는 음식을 몸에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비구나 비구니 재가신자 등이 수행하여 성과를 얻고자 하나 지켜야할 계행이 청정치 못하다면 비록 다소의 진전을 경험하여 지도 선사께 보고하여도 선사는 그 수행의 정도를 곧 알게 된다.

 

그와 반대로 계행이 청정하고 엄격히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의 향상 발전해 가는 속도가 매우 빠르게 되므로 정(定)과 혜(慧)가 쉽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 출가한 비구나 비구니, 혹은 위빠싸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스승이나 도반을 잘 선택하여야 하며 반드시 바른 방법을 택하고 계행을 잘 지켜야 한다.

 

수행인은 자신이 지키는 계(戒)의 힘으로 불선업(不善業)의 구업(口業)과 신업(身業)을 잘 다스리게 되고 동시에 수행에도 진전을 보게되며 거칠은 행동으로 범하는 번뇌(煩惱 Vittikhamakilesa)가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계(戒)로서 자신의 구업과 신업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그 거칠은 번뇌 망상에 의해서 말과 행동은 매우 거칠어지고 사나워지며 자제력을 잃고 방황과 혼돈의 연속으로 마음집중이 되지 않으며 안정을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거칠은 망상의 희생의 제물이 되는 가엾은 일로서 스스로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계를 잘 지켜 가면 정신집중이 잘되고 마음이 스스로 안정됨으로서 수행에 진전을 가져오게 되고 지혜를 얻게 됨으로서 모든 번뇌 망상이 침입해 올 기회를 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수행자가 계행을 깨끗이 갖지 못한다면 외형적인 비구나 비구니에 불과하며 번뇌 망상의 희생물이 되어 생사의 윤회를 계속 받게 되며 지혜가 증장되지 않으나, 계행이 깨끗하고 순수하다면 그 힘이 곧 모든 번뇌를 물리치고 마음을 편안케 해줌으로서 지혜가 자라나게 되니 계는 마치 모든 마군을 쫓아버리는 신비로운 주문(呪文)과 같은 역할을 해 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행인은 거칠은 망상에 희생의 제물이 되지 않도록 계를 잘 지키어 자신을 번뇌로부터 보호하고 생사윤회에서 벗어나며 일체 중생을 해탈케 하는 중생의 대복전(大福田)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계(持戒)의 중요성(重要性)

새집의 주춧돌과 같은 것

불교 수행의 세가지 요소 가운데 계(戒 Sila)를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이것이 수행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고, 다른 여러 가지 수행법에 선행되어져야 할 요소이기 때문에 비구들로 하여금 관심과 경각심을 갖고 지켜 나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계는 집을 지을 때 단단하게 자리잡은 기둥의 주춧돌과 같으며 큰 건물의 기초와 같은 것이다. 건물의 오랜 수명과 안전에 무엇보다도 단단한 반석이 우선이듯이 출가한 비구들도 계행이라는 기초가 튼튼히 되었을 때 어떠한 물질적 유혹과 기타의 불선업(不善業 Akusaia)에 동요되지 않게 되어 참으로 청정한 중생의 복전이 되어질 것이다.

 

이 계(戒)는 특히 이 시대(時代), 이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으며 위빠싸나(Vipassana)를 수행하려는 사람들이나 수행중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중요하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절제없이 타락된 사생활이나 공직생활(公職生活)은 사회를 썩어가게 하며 불선업(不善業)으로 이끌어가게 하는 반면, 수행인들이 보고 듣는 것에 대해서 바르게 선택하게 하고 스스로 행동에 대해서 삼가게 하며, 책임을 지게 할 뿐만 아니라, 적합하고 적합지 못함에 대한 분별력과 바른 행동으로 이끌어 주는 지침이 곧 계(戒)이기 때문이다. 비구가 계를 지켜 자신의 생활을 맑고 밝고 명랑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며 모든 불선업을 여의고 게를 지키는 마음을 항상 경건히 해나간다면 대중 앞에 매우 자신있게 서게되고, 당당하나 교만하지 않으며 떳떳이 품위와 인격을 지닌 채 대중 앞에 자신을 나타내 보일 수 잇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戒)가 잘 지켜지지 못했다면 그 비구는 대중 앞에 서기가 주저스럽고 용감치 못하며 위축된 상태가 되며 누구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떳떳치 못할 것이다.

 

계(Sila)의 다른 의미로는 만다나와 같은 것이다. 만다나(Mandana)는 인도(印度)의 팔리(Pali) 고대어(古代語)로서 몸을 아름답게 꾸민다는 뜻이다. 이 만다나의 장식에 사용되는 색상자료(色相資料)는 자연의 꽃에서나 기타 나무뿌리 광석 등에서 채취하여, 자연적 원색(原色)을 잘 살려 얼굴의 눈이나 입술. 볼위 등에 표시하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 얼굴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고 가꾸어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게 하고 호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비구가 계를 잘 지키는 것은 이와 같은 의미가 있다. 비구가 스스로를 조심하여 모든 일을 보고 듣고 행함에 마음을 집중시켜 유심(有心)이 되게 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슬기롭게 행동에 옮기면 어진 이를 기쁘게 하고 신심있는 사람들은 더욱 분발하여 깨달음에 이르도록 하며 신심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람들이라도 환희심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만약에 작은 잘못이라도 범하였다면 즉시 그 잘못된 점을 발견하여 고치고 뉘우쳐 다듬어 나감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번뇌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힘써 노력하여 몸과 입과 마음을 잘 다스려 가는 이를 계행이 청정한 수행자라고 한다.

 

만약에 비구가 계를 지킴에 청정하지 못하고 건실히지 못한다면 스스로 즉시 깨닫고 모든 행동을 삼가고 자제하여 더욱 엄격히 계행을 잘 지키도록 노력함으로서 청정치 못했고 건실치 못했던 계행은 더욱 청정해지고 밝아지게 되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사교 활동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의복을 잘 입고 금은보화로 치장하며 몸을 아름답게 꾸미고서 대중 앞에 나타나 자신의 세련되고 격조높은 언어와 행동으로 대중을 감복시키고 매혹되게 만들며 대중이 호감과 칭찬을 얻듯이, 부처님의 위없는 가르침을 배워서 지혜로우며 계로서 행동을 다스려 최상의 덕을 갖춘 비구들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빛나게 하여 일반인들에게 호감을 사고 존경을 받도록 하며 자신들의 승단 내에서나 일반사회의 등불이 되며 도덕률의 선구자가 됨으로서 대중 앞에 긍지를 보이고 신뢰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오직 계(Sila)라고 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장신구로서 비구의 몸을 잘 꾸민 후에 얻어지는 결과이다.

 

계(戒)는 나이에 관계없이 지켜야 한다. 부처님께서는 "계를 지키는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다발을 몸에 두르는 것과 같다"라고 말씀하셨다. 어느 때 비구가 부처님께, "계를 지키는 나이는 몇 살에서 몇 살까지가 가장 좋습니까"라고 여쭈니, 부처님께서는 "계, 라고 하는 것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다발을 몸에 두르는 것은 나이가 든 사람일수록 더욱 근엄하고 장엄하며 거룩해 보이고 지혜스러워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나이가 젊어서 계를 지키는 것은 본인에게 높은 도덕과 윤리적인 체험을 일찍 갖게 해 주며 깨끗하고 너그러운 마음과 베푸는 마음, 일체 생명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니게 하기 때문에 주위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비록 나이가 어려도 계를 지킴으로서 모든 행동에 생각하는 것이 깊고 옳지 않은 일을 행하지 않으며 언어는 부드럽고 조용하며 몸가짐은 단정하고 다른 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자비로우니 현명하고 어진 이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중년이 되어서 계를 지키는 것은 평화로운 인생을 즐기며 지난 세월의 모든 삶을 인생의 경험으로 삼아, 세상일에 대해서 더욱 슬기롭게 생각하게 되고 보다 더 성숙된 마음가짐을 갖게 됨으로서 아랫사람의 존경을 받게 되고 어진 이들의 칭찬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의 꽃다발을 몸에 치장하는 것은 나이에 구애없이 모두를 거룩하고 생각이 깊게하며, 스스로를 억제 내지 자제하여 근엄하고 정중한 태도를 갖게 하며, 부드럽고 사랑과 친절에 넘쳐 있으며, 슬기로움이 가득하여 모든 불선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해탈의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계의 공덕이요, 기능이라 할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나이에 따라 의복의 모양과 색깔, 형식 즉 디자인을 다르게 하며 신분과 위치를 구분하고 적합함과 적합치 못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만약에 나이든 사람이 나이 어린이의 옷을 입었다면 적합치 못해서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살 수도 있으며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든 사람의 옷을 입어도 그에 맞지 않아서 칭찬과 부러움을 사지 못하고 오히려 경멸 당하는 경우가 있으나, 계라고 하는 꽃다발을 몸에 두르는 것은 나이나 신분에 구애없이, 어린이거나 노인이거나 혹은 출가인이거나 재가인(在家人)이거나 자신의 위치에 따라 계를 잘 지키는 것은 큰 보배를 몸에 지닌 듯 언제나 마음에 부유함이 있고, 너그로움이 있으며 생각이 깊으므로 정중하고 무게있는 행동을 하게되어 많은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을 받게 되고, 어디를 가더라도 두려움과 무서움이 없는 자유인이요, 대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모두에게 계를 잘 지켜 각기 평화롭고 안락된 생활을 하며, 진정한 행복을 지니도록 하신 것이다.

 

비구가 자신의 행동과 언어에 대해서 마음집중이 되어 있지 않으며, 계행이 청정하지 못하여, 지혜가 없고, 덕행이 없이 가사를 입고 머리를 깎았다면 이는 마치 어떤 여인이 화장을 잘 하고 최신 유행의 비싼 옷을 입었으나 그 여인의 마음가짐과 언어 동작이 매우 천박하고 경박스러워 실질적인 내적 지성(內的知性)과 슬기로움 그리고 아름다움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서 그 외형적인 아름다움이 허영과 허세에 불과한 것 같으니, 뜻이 높고 도덕이 높은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당할 것이다. 여인이 그 외형의 용모에 맞게 언어 동작이 순화되어 부드러우며 뜻이 담겨있고 행동은 정중하고 지성미가 있으며 아름답고 사랑과 자비에 넘쳐 있다면 그 여인은 안과 밖으로 지성과 도덕을 갖춘 아름다운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비구나 비구들이 스스로 계행을 잘 지켜 청정하고 언어와 행동이 바름은 물론 사마디(禪定)을 잘 닦아서 마음을 단련하고 일체 행동에 미음이 집중되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몸과 마음의 인연관계와 자연적 성품을 알아서 그에 맞게 생활해 나간다면 사회에서나 교단에서나 떳떳하고 자신과 용기가 있으며 겸손하고 사려(思廬)가 깊으니 모두의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모두를 이익되게 할 것이다.

 

재가신자(在家信者)의 오계(五戒)와 팔계(八戒)

재가신자로서 가정의 일상생활과 사회생활을 위해서는 오계(五戒)

 

1. 살생하지 않음.

2. 훔치지 않음.

3. 음행하지 않음.

4. 거짓말, 사나운 말, 이간질 않음.

5. 술이나 마약 등을 먹지 않음

 

등을 잘 지키도록 노력하며 자신의 안전과 자유를 보장하여야 한다.

오계(五 戒)를 잘 지킴으로서 얻는 자유란, 불 선업(不善業)을 범하지 않은 데서 오는 불행으로부터 자유요, 모든 재난으로부터의 자유요, 국가의 사회법 저촉으로부터의 자유에서 더 나아가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대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안전이라 함은 도덕적인 생활, 깨끗한 생활을 함으로서 갖가지 중상이나 원한으로부터의 신변의 위협에 대한 것을 말하는데 계를 지키지 못하면 불 선업(不善業)을 범함으로서 갖가지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재가 신자로서의 오계(五戒)는 스스로의 윤리요, 가정의 윤리며 나아가 사회의 윤리요 도덕이요 질서유지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안정과 평화도 개인에서부터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다. 개인의 심리적 정신적 평화가 없고, 생활의 윤리와 도덕이 없이 어떻게 사회가 평화로우며, 질서가 있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 오계(五戒)는 모두의 기본적 도덕률이요, 사회의 지침이며 윤리라 할 것이니 마땅히 지키도록 노력하고 지켜지도록 서로의 협조가 있어야 되며 이로서 오직 인류의 평화와 행복, 그리고 사회의 안정을 약속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오계(五戒ms 어떤 특정 종교를 위함도, 사회나 단체를 위함도 아니요 다만, 각 개인의 안전과 자유 그리고 평화와 행복을 위함이기 때문에 계를 지킴으로서 얻어지는 이익은 곧 자신의 것이 되나 개인의 이익이 다시 사회전체의 이익으로 파급 승화되어 전체 사회를 평화롭고 안전하며 윤리와 도덕의 질서가 있는 곳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첫째로 일체 생명을 해치지 말라.

누구를 막론하고 어떤 목적이나 이유에서든지 또는 직업적인 일 일지라도 가급적 가능한 범위 내에서 남(모든 생명 있는 것)의 생명을 해치거나 희생하는 일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줄 알고 귀함을 안다면 남의 생명을 어찌 가벼이 여기며 함부로 해칠 수 있겠는가, 자기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남을 사랑할 줄 안다.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비하하며 모든 생명체에 대한 보호요 책임이 자신과는 무관한 것이라 여기고 그 창조자에 대한 사랑과 충성만을 고집하여, 남의 생명을 소홀히 여기거나 희생시킨다면 그것은 참으로 본인들을 위해서 불행한 것이요, 사회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특히나 우리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소중히 여겨 어떠한 이유로도 자학 내지 자해 행위를 해서는 안 되며 어떤 이유에서도 남의 생명을 희생시켜서는 옳지 않은 것이다.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보호하는 데서 인화(人和)가 이루어지고, 그 힘에 의해서 사회의 발전이 있으며 평화와 행복이 있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로 주지 않는 물건 갖지 말라.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는 것,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은 크게 베푸는 마음이요, 너그럽고 시기 질투가 없는 마음이며 욕심이 없는 마음이다. 크고 작은 범죄, 작게는 좀도둑에서 크게는 국고금의 횡령과 대형의 부정축재 등이 모두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가지려는 나쁜 마음에서 생겨난 결과이다. 응분의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공들지 않고 노력함이 없이 터무니없는 대가를 바라는 마음 역시 욕심이 근본 동기요, 주지 않는 것을 가지려는데 서 비롯된다. 도덕적 질서가 있는 공정한 사회에서는 서로가 신뢰하고 응분의 노력의 대가를 주고받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대가를 바라거나 적은 투자로서 큰 몫을 얻으려는 생각도 사회의 유통질서와 경제구조를 어지럽히는 원인이 되며 이 또한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고통은 그 원인의 대부분이 지나친 욕심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만족할 줄 알고 마음의 풍요로움을 지니며, 살아가면서 자신의 여유를 이웃과 함께 나누며, 이웃의 잘됨을 기뻐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할 것이요, 이것은 ‘주지 않는 물건을 갖지 않는다.’ 는 계를 지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셋째로 삿된 음행 행위를 하지 말라.

이 근래, 가정윤리의 문제가 심각한 상태에 놓여진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진 사회의 병폐라 하겠지만, 남성은 사회나 직장에 대한 불만과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하는데 오늘날 사회구조로 보아 가정이 아닌 곳, 순간적이고 자극적인 쾌락이 있는 곳으로 눈을 돌리기 쉽다. 그러다 보면 여유 있는 가정의 한가로운 주부들은 사치와 소비성향에 물들어 자꾸 가정을 벗어나게 되고, 남성에게 맞서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부르짖게 되나 이는 어머니와 아내의 역할을 잊게 되는 것이며, 가정과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식이 엷어지는 것이다.

 

결혼한 사람으로서 배우자에게 성실치 못하다는 것은 스스로의 기만행위이며 배우자에 대한 더없는 배신이라 하겠다. 남녀의 정이라는 것은 마치 평행저울과 같아서 어느 쪽이든지 무거운 쪽으로 기울어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결혼한 남성이 자주 만나는 어떤 여성에게 정이 기울기 시작하면, 그 만큼 자기 아내에게는 소홀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좀더 숙고하고 자신을 자제해서 정의 흐름을 바른 방향으로 유도했어야 한다. 만약에 자신의 배우자에게 충실하고 윤리적 사고(思考)수준이 높았다면 그와 같은 조건을 처음부터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예로서 남성이 방종하며 외박이 잦다면 자신의 배우자에게도 똑같은 기회가 주어지게 되며 동시에 다른 남성이 자신의 배우자에게 접근해 올 가능성이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될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남의 아내를 혹은 남의 남편을 차지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며 이는 정직치 못하고, 남의 가정을 불행하게 만들며 사회문제로까지 발전되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 질서를 파괴하는 불 선업(不 善業)이 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배우자에게 서로 충실하고 사랑을 베풀며, 인내와 지혜로 결혼생활을 이끌어 갈 때 가정은 평화롭고, 안정이 보장되며 함께 생활하는 기타 가족들에게도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방종이 가정과 가족관계를 와해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 도덕률과 사회의 법규를 잘 지켜나감으로서 부처님의 계와 법을 배워 행하는 재가신자(在家信者)가 된다면 다른 이의 본보기가 되며 평화롭고 신뢰 사회가 이루어지며 질서 있는 사회로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넷째로 거짓말, 이간질, 사나운 말 하지 말라.

사회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불합리(不合理)한 요소로 인하여 직접 간접적으로, 사실 혹은 진실이 회피되고 우회하여 전달되는 언어동작이 흔함을 볼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유언비어, 이간질, 악담, 험담 등 화합을 깨뜨리는 온갖 진실치 못한 이야기나 언어의 사용 등은 어떤 사회에나 존재하는 불순물이라 부처님께서 언어정화의 한 방편으로 무사와다(Musavada) 즉 진실을 말하는 계를 재정하셨으리라 생각된다. 계를 지키는 재가신자(在家信者)는 항상 진실을 말하며 나쁜 말, 잡다한 말,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과 근거 없는 말이나 이야기로 남을 비방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 말로 인해서 가정문제나 사회문제가 야기되는 경우가 우리주변에는 흔한데 그런 만큼 누구나 항상 말을 조심하고 경계해야 된다. 만약에 유익한 화제나 필요 되는 대화의 주제가 없을 때는 차라리 황금의 침묵으로서 자신을 반조하고 명상에 잠기는 것이 하찮은 대화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좋은 것이다.

 

다섯째로 술이나 약물을 택하거나 마시지 말라.

현대사회는 고도로 발달된 책임사회며, 경쟁사회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언제나 정신적 긴장이 쌓이고 책임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이게 마련이다. 세상에는 그러한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기위한 여러 가지 좋은 방법도 있겠으나 대개 손쉬운 방법으로 술을 마시거나 금지되어 있는 약물에 의지하는 사람도 많아서 그 영향이 청소년 문제까지 심각해지고 나아가 사회 문제화 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못될 뿐 아니라 개인과 사회에 끼치는 피해도 크다. 맑은 정신으로 자신의 의무와 책임에 매달려 노력해도 성공을 보장받기 어려운 고도의 경쟁사회에서 일시적 위안에 불과한 술이나 약물중독으로 인하여 정신이 몽롱하고 흑과 백을 구분할 수 없으며,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리게 된다면 이는 분명히 책임 있는 사람의 슬기로운 행동이라 할 수 없을 것이며, 성공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역행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음주나 약물 사용은 인간의 모든 신경기능을 이완시켜 감각을 무디게 하고 활동력을 저하 내지 정지시켜 일시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풀어주는 듯하나 근본적인 해결의 길이 아니므로 몽롱한 정신에서 깨어난 다음은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이 있게 되고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매우 크다. 정신이 깨어있지 못하고 혼미한 상태에서는 허황된 마음이 되어 온갖 범죄를 저지름에 두려움이 없고, 상식에 벗어나는 행동을 할 뿐 아니라 법이나 규범에 대한 의식도 무디어져 결국 사회의 낙오자가 되고 암적인 존재가 되어 불행한 생활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무서운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산란케하고 혼미하게 하는 것들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되며, 정신적. 육체적 피로는 고요히 자신의 호흡을 관찰함으로서 깊은 명상에 잠겨 저절로 해결되게 하는 것이 슬기롭고 현명한 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을 이기며 모든 외형적인 유혹을 물리치고 항상 자신의 모든 문제를 밖에서 해결의 길을 찾는 게 아니라 안으로부터 찾으려 노력함으로서, 마음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과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마음집중을 시켜 갖가지 정신적 번뇌로부터 벗어나고 스스로 해결하는 자기 정복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오계(五戒)에 대한 설명으로서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이며 윤리며 인류평화를 위하고 각 개인의 행복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 할 수 잇을 것이다.

 

팔계(八戒)는 지금까지의 오계에 3가지를 더한 것이다.

 

여섯 번째, 12시가 지나서는 일체 음식을 먹지 않음.

 

일곱 번째, 향수와 화장을 하지 않으며 춤추고 노래하며 즐기지 않고 꽃다발이나 꽃으로 몸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않음.

 

여덟 번째는, 높고 큰 침상위에 눕거나 앉지 않음을 일컫는다.

 

이는 대체로 특정한 시간과 조건에 지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즉 음력 초하루나 보름달은 계를 지니는 날이라 해서 정오가 지난 오후에는 일체의 음식을 먹지 않고 과일 쥬스나 냉수 정도를 마시며 다음 날 아침까지 지내는데 이것 역시 극기 훈련과 같은 것이다. 평소의 습관은 때마다 음식을 먹는 것이나, 특정한 날을 정하여 먹지 않음으로서 자신을 시험하고 소비를 절약하며, 시간을 가져 명상이나 기타 신행(信行)에 전념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은 자신의 교만을 다스리며 겸손하고, 웃어른을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법으로서 높은 의자나 침상 등에서 생활하지 않는다는 계(戒)이다. 높고 큰 침상 등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을 높이, 다른 이를 낮게 생각하는 정신상태가 되며 그와 같은 정신에서 나타나는 행동은 교만이요, 남을 가벼이 여기는 즉 화합적이고 우애적인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자신의 몸에 일체의 화환이나 꽃 등을 꽂아 자신을 아름답게 가꾸지 않으며 장신구, 금은보화 등을 사용하여 다른 사람을 현혹케 하거나 없는 이들에게 위축감을 주지 않는다는 계(戒)인데, 검소하고 겸손한 생활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자기의 부의 과시나 아름다움의 과시는 곧 다른 이를 멸시하는 경향을 낳기 때문에 진지하게 자신을 반조 명상을 하며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려는데 하등의 이로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계가 오계에 보태어져 팔계를 이룬다.

 

이상 설명한 계(戒)를 잘 지켜 스스로를 검소하게,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이 부유해지고 덕이 쌓이며, 지혜가 증장되어 자신의 인생문제 해결은 물론 남에게도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계(戒)로 인한 윤리와 도덕적 힘이 얼마나 자신의 인격형성에 도움이 되는가를 직접 체험을 통하여 증명해야 될 것이다.

 

계(戒)는 사려(思慮)가 깊다는 뜻

계를 엄격히 잘 지키는 것은 또 다른 뜻으로 사려(思慮)가 깊다는 것이다. 내가 만약 욕심에 눈이 어둡고 생각이 막히어 다른 이의 재산을 탐내고 명예를 탐하여 그를 해치려 할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약 다른 사람이 나에게 내가 지금 남에게 하려는 듯 해온다면 어찌 되겠는가 라고 가정해보라 나는 아마도 매우 슬프고 괴로우며 불행해질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내가 남을 그와 같은 곤경에 처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 반성하고 자숙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남을 해쳐서 나를 이롭게 하겠다는 생각마저도 부끄럽게 여겨 없애버린다면 이 사람은 생각이 깊은 사람, 계행을 잘 지키는 사람으로 덕이 높고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인간(人間)이 사려(思慮)하는 바가 없다면 남을 생각하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이익과 욕망의 달성을 위해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쁜 일이나 옳지 않은 행동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게 될 것이니, 이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면 그 사회는 온갖 범죄로 불안과 공포, 무질서가 지배하는 혼란과 불행의 사회가 되고 말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다른 이의 인격과 사회전체의 화합에 대해서 생각하는 바가 없고 보는 즉시, 생각하는 즉시 개인만을 위해 행동한다면 거기에는 오직 투쟁과 논쟁이 있을 뿐 평화도 질서도 없는 어두운 사회로 전락할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욕심과 어리석음이 꽉 차 있는 사람의, 상대방을 전혀 인식하지 아니하고 깊이 생각하는 바가 없는, 미래를 모르는 행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말씀에 ‘동물의 세계는 남에 대한 생각을 하는 바가 없고, 지혜가 없으며 도덕이라는 것이 없이 본능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큰 짐승은 작은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참으로 사실을 그대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요즈음 텔레비전에 ‘다스려지지 않은 세계’라 하여 아프리카 야생동물 생태를 기록한 프로그램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한 마리의 독수리가 나무위에 앉아서 땅위를 움직이고 있는 뱀을 노려보고 있고, 이 뱀은 그것도 모르고 가까이 있는 개구리 한 마리를 먹이로 하려고 노려보고 있으니 이는 부처님의 말씀을 현실적으로 분명하게 뒷받침해 주는 예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동물의 세계에는 부끄러움이나 남을 생각하는 바나 불선업(不善業)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것이다.

 

우리 인간사회에도 계율과 도덕으로 자신들을 단련하지 않고, 서로간의 이해와 존경 그리고 생각해주는 바가 없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여 어떤 행동이라도 분별없이, 두려움없이 실천에 옮긴다면 위의 동물세계와 다를 바 없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고 보살피며 도와주기는 커녕 오히려 짓밟고 해치고 넘어뜨려 다시는 일어나지도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잔인하게 앗아 버린다면 어찌 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계율과 도덕의 가치를 새삼 인식하고 계율이 인류사회에서 절대 필요되는 요소라고 깊이 생각하고 잘 실천 수행하여 질서있는 사회속에서 서로가 신뢰하고 도우며 이해와 용서로서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법(法)의 은혜(恩惠)는 법을 행(行)하는 자에게

수행인이 법을 열심히 배우고 실천 수행하면 법 역시 이 수행인을 보호하고 이끌어 주며 안전한 곳에 머물게 해주므로, 위빠사나(Vipassana)를 수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불 선업에 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인이 완전한 깨달음을 금생에 성취하지 못해 생사윤회를 받는다 해도 이 위빠사나 수행을 해온 마음 집중의 힘이 언제나 수행인의 정신을 일깨워주며 이 수행법을 다시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하여 마침내 생사윤회의 고통 속에 있더라도 크게 불행하지 않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러서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하며 많은 중생들에게 가르침을 전하도록 뒷받침해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수행인이 부지런히 노력 정진하여 몸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통하여 무상(無常)의 지혜(智慧)를 얻으며 자신의 성품을 깨닫게 될 때, 법의 은혜(恩惠)를 받게 되어 행복해지고, 지극한 평화를 얻게 되며 모든 중생의 고통스러움에 큰 자비심을 내게 된다. 그리하여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그 고통의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함으로서 은혜 받는 법에 다시 회향하게 되며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니 이는 법이 지니고 있는 위대한 힘인 것이다. 이 법의 힘은 아무에게나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부지런히 쉼 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는 수행인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해태심과 게으름에 빠져 잇는 수행인으로서는 이와 같은 훌륭한 법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수행인은 잘 반조하여 스스로 부지런히 노력하고 힘을 내어 정진하여 자신의 눈으로 수행의 결과를 보도록, 법의 은혜를 입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수행을 통하여 얻어지는 결과를 보라

수행인이 게으름과 해태심에 빠져 마음집중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두지 못하고 혼돈과 방황속에서 헤매이게 되는 경우가 매우 많다. 이러할 때에 그 함정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리고 힘을 내어 자신의 마음을 게으른 생각 그 자체에 집중시켜야 하며 동시에 부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적용하여 슬기롭게 자신의 환경을 관찰하며, 또한 9가지의 세간을 벗어난 위 없는 진리의 존재를 생각하여야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반조하는데서 분발심을 내게되고 용기가 생기며 정신을 새롭게 하여, 정진을 계속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9가지 세간을 벗어나는 위없는 진리으 지혜를 절대로 얻거나 경험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9가지 세간을 벗어나는 진리(Lokuttara dhamma)즉, 위없는 진리란 수다원도(道)와 과(果), 사다함 도와 과, 아나함 도와 과, 아라한 도와 과 등 4도(4道) 4果(果)에 열반법 닙바나 담마(Nibbana dhamma)을 포함한 것으로 게으르고 해태심에 빠져있는 수행인은 위와같은 초세간적 진리(超世間的 眞理)를 경험할 수 없게 된다. 수행인이 위의 초세간적 진리(超世間的 眞理)와 지혜(智慧)를 경험하기 위해서라면 참으로 몸과 마음을 다 바쳐 부지런히 정진하고 굳은 결심과 신심으로 모든 장애를 극복해야만 되는 것이다.

 

초세간적 진리(超世間的 眞理/ Lokuttara dhamma)는 3단어의 복합어로서 록까(Loka)는 세계, 우주라는 뜻이며, 깊이 숨은 뜻은 멸(滅)의 세계, 무상(無常0의 세계, 변천의 세계를 말한다. 우따라(Uttara)는 뛰어넘는, 위없는 불멸(不滅)의 뜻을 지니고, 담마(Dhamma)는 진리, 보호.안전, 자연적 현상.물질(物質)의 특성 등의 뜻을 가졌으므로, 전체의 뜻은 자연적 현상의 생멸 법을 벗어난 진리라고 할 수 있다. Lokuttara dhamma의 또다른 뜻은 생멸의 모든 현상으로부터 벗어나 보호되고 향상 발전 인도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심이 가게 되는 것은 누가 무엇으로부터 항상 보호되고 안전하게 되며, 생멸(生滅)이 없게 되는가? 수행인이 법을 잘 지키고 수행을 열심히 함으로서 법이 모든 파멸적인 현상으로부터 보호해주고 낮고 어두운데서 높고 밝은데로 인도해주며, 향상 발전시켜주고 불멸(不滅)의 위치에 이르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수행인이 그릇된 법을 배워 행하고 사견(邪見)에 빠져있다면, 그 그릇된 법은 수행인을 불안과 공포와 생사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지 못하며 보호의 혜택을 주지 못하게 된다. 그릇된 법이란, 자신의 마음 밖에서 진리를 혹은 깨달음을 구하고 도움받기를 바라며, 자신을 고행과 핍박속에 몰아넣으며 갖가지 종교의식이나 제사 같은 것, 즉 생명을 절대자에게 바치는 의식의 노력을 기울이며 절대자를 신봉하고 그 존재를 믿고 의지하여 보호 받으려는 일 들이다. 이는 잘못된 길이요, 그릇된 법이기 때문에 Lokuttara dhamma의 모든 이익됨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참다운 진리가 아니요, 진리의 영역 밖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느 누구라도 법의 질서를 파괴하거나 법 밖의 일을 행하여 생활 한다면 그 사람은 국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이, 수행인이 바른 수행법을 배워서 바르게 노력하고 부지런히 정진하여야만 법의 보호와 혜택을 받고 지혜를 얻게 되어 모든 불행과 파멸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수행인이 올바른 수행법 내에서 생활한다 하더라도 게으름과 해태심에 빠져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고 힘을 내어 정진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얻는 바가 없고, 보는 바가 없으며, 느끼는 바가 없는지라 수행의 경험이 생길 수가 없으니 이는 좋은 법의 범위 내에서도 법의 보호를 받거나 뒷받침을 얻지 못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이 걸으셨던 길의 결과(結果)

수행인은 수행방법과 길을 바르고 정확한 것으로 선택하여야 한다. 바른 수행 방법과 길이란 참으로 부처님의 가르치심을 바탕으로 하여 부처님께서 직접 깨달으셨던 길이어야 하며 모든 벽지불과 성제자들이 깨달으신 길이어야 한다. 바른 수행의 길이 직접 자신의 수행을 통하여 확인되었다면 방일하거나 주저함없이 부지런히 힘써 정진하여 경각심과 굳은 신념을 가지고 수행을 열심히 하여, 법으로부터 보호와 모든 이익과 위없는 결과를 얻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수행인은 부지런히 노력하고 힘써 정진하여 자신의 수행목표를 달성하고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노력을 하고 힘써 정진을 했는데도 수행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목표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 노력과 정진은 결국 헛수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자가 올바른 수행법을 택하여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정직하게 수행해 나가면, 그 결과 반드시 목표에 도달하게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이 수행법 마하사띠 빠타나 [대념처경(大念處經)]를 말씀하시고 가르치셔서 수 많은 성(聖)제자들을 두셨고, 지금까지 계속 전해 내려오며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의 길에 이르게 하신 것이다. 참으로 옳은 수행법이라면 실천수행에 반드시 진척되는 현상이 있을 것이며, 성과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만 수행인 자신의 노력이 부족했거나 아니면 바르게 행하지 못하여 목표에 달성되지 못한 것은 수행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봐야 하며, 스스로 자신의 수행과정과 진척상태를 점검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서 잘못이 발견될 수 있고 거기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되며 수행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고 여러 가지 법의 보호와 이익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바르고 정확한 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떠한 가르침이든지 그 가르침에 대하여 조사하고 실천을 통하여 체험적으로 확인하고 이 가르침을 통하여 여덟가지 성인이 배출되며 계율, 선정, 지혜가 바탕이 되어 탐심과 진심, 치심을 다스려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는 사성제와 여덟 성스런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옳은 길이기 때문에 배워서 실천하라. 이것이 올바른 법 선택의 규정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옳다는 것은 그 사람의 언어와 육체적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결과가 자신과 상대방에게 모두 유익하며 화합을 가져올 때 그것은 옳은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있으되 상대방에게 피해가 있거나, 상대방에게 이익은 있으나 자신에게 피해가 있거나, 양편 모두에게 이익이 없고 화합이 없으면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었다. 수행인들도 이를 기준으로 자신의 언어와 행동을 지어가는 척도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정(定:Samadhi)을 닦아야 마음을 개발

그러나 위와 같은 계율에 의한 행동적인 자제 만으로서는 높은 경지의 정신적 만족감에 이를 수 없다. 언어와 육체적 행동을 다스리는 엄격한 계율과 함께 사마디(Samaadhi)를 닦아 마음을 맑게하고 다스리며 개발하는 데서 참으로 안과 밖으로 청정해지면서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니, 계행과 선정이 균형있게 수행되어야 궁극적인 목표인 열반을 체험 증득하게 되고 지혜를 얻어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수행자가 계행을 지키고 남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으며 스스로 삼가는 힘이 평소에 있다 하더라도 어떠한 상황에 도달하게 되면 탐욕심이나 진심으로 인하여 너그럽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할 수 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 위빠싸나사마디(Vipassanasamadhi)를 수행치 않아 진심이나 탐심이 일어나는 자연적 성품을 모르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해 실질적 수행 체험도 없고 기타 방법이나 사마디를 통하여 정신적 심리적으로 닦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탐욕심의 유혹으로부터 방어하지 못하고 탐욕심이나 진심에 어두워져 너그럽지 못하고 자비롭지 못할 때에는 어떠한 큰 과오라도 순간적으로 범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동은 수행인으로서 아주 유치한 정신의 소유자임을 나타낸 것으로 밖에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행동을 다스리는 외형적인 계행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위와 같은 경우를 당하기 쉬울 것이다. 수행자가 위와 같은 경우를 진실로 피하기 위해서는 행동을 삼가는 계행을 가짐은 물론 선정(禪定) 수행을 통하여 마음을 닦고 개발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바른 수행법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계와 정을 함께 수행함으로서, 어떤 경우 탐심이나 진심의 영향으로 불선업을 행할 조건이 되더라도 그 원인과 결과를 속히 파악하여 행동에 옮기지 않고 피하는 지혜를 갖게 될 뿐 아니라 수행자로서의 성숙된 모습을 보일 수 있으며 청정한 계행을 지니게 되고 마음은 고요하며, 모든 자연적 현상을 바로 보는 지혜의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마디라는 단어는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으로 최초의 설법시에 팔정성도(八正聖道) 가운데 삼마 사마디(Samma samadhi)가 효시다. 사마디는 그 뿌리를 삼아다(Sam- a-dha)에 두고 있으며 그 뜻은 흐트러진 것을 한데 모은다는 것이다. 흐트러진 마음을 한데 모아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사마디 혹은 사마타라고 한다.

 

여기에 부처님 당시의 비구니 담마딘나(Dammadinna)와 재가신자 위사카(Visakha)사이의 대화를 통하여 사마디의 기능적인 면을 알아보도록 한다.

 

위사카가

“무엇이 사마디 인가요?”

질문하자 담마딘나 비구니는

“사마디는 현상관찰을 통한 마음집중으로 하나가 되도록 모으는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나가야 합니까?”

라고 다시 묻자

“네 가지 마음 집중 방법으로 해간다”

(몸. 느낌. 마음. 담마의 현상, 사띠빠타나)

“무엇이 요구되는 사항인가요?”

“네 가지 으뜸가는 노력, 일어나 있는 불선업의 제거, 일어나려는 것의 차단, 일어나 있는 선업의 개발, 일어나지 아니한 것이 일어나도록 개발하는 노력 등이 요구된다.”

“어떻게 닦으라는 건가요?”

위사카의 질문에

“심성의 일념개발과 일념을 더욱 증진 시키어 가기 위해서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밀착 집중시키도록 으뜸가는 노력을 통하여 개발해 나간다”

라고 대답하였다.

 

위의 대화를 예로서 사마디는 마음집중을 으뜸가는 노력으로 일념을 만들어 일체의 번뇌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여 순수한 마음이 되게 하고 이로서 마음을 청정히 하면 탐심과 진심, 치심을 다스려 더 이상 새로운 업을 쌓지 않게 되기 때문에 생사윤회의 바다를 건널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마음을 닦아 개발하는 수행인인 것이다. 앞서 밝힌 마음집중 수행법이 곧 定임)

 

수행의 다섯가지 장애

1. 탐욕심으로, 이를 카마찬다(Kamacchanda)라고 한다. 탐욕심이 모든 번뇌와 생사윤회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인데 물질에 대한 것과 비 물질에 대한 것을 함께 포함한다. 물질이라면,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즉, 형상이 있는 것으로서 움직일 수 있는 것과 움직일 수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갖가지 금은보화, 장신구부터 현금 등이며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가옥, 토지 등이다. 이런 물질에 대한 탐욕과 더불어 비 물질적 탐심으로는 명예욕, 수면욕, 색욕, 장수욕, 소유욕, 사랑 등이 있겠다.

 

2. 진심(嗔心)으로, 증오와 분노(도사 위야빠다 :Dosa vyapadha)라고 한다. 진심과 증오, 분노는 자신에 대한 것과 상대에 대한 것, 즉 사회와 타인에 관한 것 등이 있다. 자신에 대한 것은 자기의 욕구 불만과 성취되지 못한 학업이나 사업과 사회적 출세요, 사회에 대한 것으로는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서 사회에 대한 욕구불만이 원인이 되어서 생기는 진심과 증오 분노요, 개인적으로는 시기 질투에 바탕을 두어 일으키는 진심, 분노, 증오 등으로서 위의 1과 2는 오직 계(戒)를 잘 지킴으로서 다스릴 수 있으나, 다스려지지 못할 경우에는 참으로 큰 불행을 가져오게 하는 원인이 되며, 수행에 매우 큰 장애요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다스려야 한다. 이를 다스리는 방법은 다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현상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관찰해 나감으로서 발생의 원인을 알고, 나타날 결과를 알아 제거하거나, 그 자연적 성품을 알아서 그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3. 혼침과 망상과 무기력으로서 티나미따(Tina-middha)라고 한다. 대체적으로 정신활동이 맑지 못함을 말하며, 좌선 수행시에는 졸음으로 시간을 보내고 졸음이 없을 때에는 망상으로 혹 결단심이 없는 우왕좌왕의 심리 상태에서 자신의 해야 할 일에 확신이 없는 것이다. 좌선을 할 때에는 졸음 속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수행주제(어떤 목표)가 분명하다는 것은 자신이 한번도 맑은 정신으로서 성성적적(惺惺寂寂)의 체험이 없다는 자기 고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이 분명히 맑게 깨어져 있다면 육체적 안정과 평온이 유지되는 가운데 고요하고 근엄한 평화로운 자세가 갖추어지며, 마음이 흐트러짐이 없을 때 육체의 균형이 잡히게 된다는 것은 수행의 경험이 있다면 누구든지 긍정할 수 있는 사실이다. 혼침 속에서 헤어나려는 결심이 부족한 것을 여기서는 무기력이라 하는데,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는지 모른 상태에서 백일몽을 꾸거나 아니면 환상의 노예가 되어 현실이 망각된 생활이므로, 이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현재의 현상을 통하여 모든 사물의 자연적 성품을 보아 지혜를 얻는 데는 큰 방해가 되는 것이다.

 

4. 불안 근심으로서, 안정되지 못한 마음, 운다짜 쿠꾸자(Uddhacca-kukucca)라고 한다. 여러 가지 생각과 원하는 바가 너무 많은 반면, 그것을 이루지 못해 일어나는 불안과 근심과 좌불안석(坐不安席)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이 조급하고 안정되지 못한 탓으로 앉아 있으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살피거나 손으로 만지고 다리를 움직이거나 몸을 좌우로 흔들기도 하는데, 이런 태도는 수행인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자신과 더불어 주위사람에게까지 불안한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대화 중에 강압적 문구를 사용하거나 명령적이며 소리가 높아지거나 두서없는 것도 모두 마음의 불안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와같은 불안과 초조 근심에 찬 마음은 고요히 수행할 수 없게 만들며 자세나 위치를 자주 바꾸거나 장소를 옮기는 등도 마음을 닦는 수행에 큰 장애가 된다.

 

5. 회의적 의심: 위찌끼짜(Vicikicca)로서, 자신에 대한 회의와 의심, 사회에 대한 것, 자신의 수행과정 등이다. 다섯 장애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그 결과가 매우 무서운 것이다. 우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다. 그 예로서 내가 지금 수행을 해서 어떠한 결과를 얻을 것인가, 나는 전생의 업이 두터워 수행을 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과거 다른 종교인이었기에 이러한 수행이 맞지 않다 등의 의심이다. 또 수행 방법에 대해서도, 정말 이 법이 나로 하여금 무슨 경험을 해주면 어떤 이익이 있을 것이며 해탈이라는 길로 나를 이르게 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수행법을 통하여 해탈을 얻었을까 등으로 의심부터 미리하여 뒤로 물러서게 되는 경우 때문에 결과가 무섭다는 것이다.

 

슬기로운 사람은 자기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의심하는 게 당연하며, 또한 의심으로 끝내 포기해 버리지 않고 스스로 시험해 보는 것이다. 시험 결과 생산성이 없으며 효과가 나타나지 않고 이익됨이 없을 때 버려도 늦지 않은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무조건 자신을 약하게 생각하며 불가능을 전제로 의심하거나 법(法: Dhamma)에 대한 자세한 탐구도 없이 의심하고 주저하여 포기해버리는 것은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고 현명한 처사라 할 수 없다.

 

위의 다섯 가지 현상은 계(戒) 정(定) 혜(慧)를 지키고 수행함으로서 극복할 수 있고 위빠싸나(Vipassana) 수행을 통해서 해결 될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다섯 가지도 사실은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정확히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모든 사물의 무상(無常)함을 모르는 데서 나타나는 결과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데 방해되는 것이므로 이 요소를 반드시 제거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사로잡혀 옳고 그름과 밝고 어두움을 모르며,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모르면 지혜를 얻지 못하게 되고 해탈의 길에 이르기 어려워 질 것이다.

 

수행의 길을 존중하고 반조하라

수행인이 수행의 길에 대해서 존중하고 반조하라는 뜻은 ‘이 수행의 길을 통하여 어떠한 수행자와 어떤 분들이 이루 말로서 다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극복하고 생사윤회를 벗어나 열반을 증득 하셨는가? 살펴봐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수행에 힘을 얻게 되고 신심을 가지고 정진을 부지런히 하여 해태심에서 벗어나고 졸음 망상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 위빠싸나 수행법에 대해서는, 대념처경(Mahasati patthana)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부처님께서 이 수행법으로 성불하셨고,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과 벽지불이 그러하였으며, 모든 부처님이나 성제자들로 하여금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깨닫게 하였고 과거나 현재 및 미래의 부처님도 이 수행법에 의해 마음이 자연적인 성품을 관찰하시어 깨달음에 이르신 것이지 주력이나 기도를 통해서나 혹은 공상적이고 환상적인 생각을 더듬고 의지하여 관념적으로 깨달음에 이르신 바가 없는 것이다.

 

해태심에 빠져있고, 혼침 망상에서 시달리는 수행인은 반드시 이와 같은 진리에 입각된 수행법임을 생각하고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부처님과 성자들이 이 수행법을 수행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한다. 그러면 용기가 나고 의욕이 넘쳐 정진하게 되고 스스로 매우 다행스럽게 여기며, 영광스럽고 환희에 찬 마음을 가지고 정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이 위빠싸나 수행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요, 모든 수행인을 위해서 존재하는 공개된 길로서 누구나 뜻을 내어 이 길을 걷고자 하면 곧 바로 걸을 수 있고, 직접 체험을 통하여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수행법이 매우 좋고 모든 대중을 위해서 공개되어 있는 길이지만 본인이 직접 수행하고 노력하는데서 자신이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위빠싸나 수행은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각기 본인이 직접 실천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하고 바른 길이므로 굳게 믿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반드시 체험을 얻어 스스로 확인이 되고 결과를 보는 것이다.

 

오직 이 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직접 보게 되며 자신의 성품을 깨닫게 되어 해탈에 이르고, 정각을 성취하여, 큰 지혜와 대 자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큰 환희심을 가지고 부지런히 정진하며 해태심과 번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대념처경(Mahasati patthana)에 “모든 중생이 번뇌에서 벗어나 대자유 혹은 해탈을 얻게 되는 길은 오직 사념처(思念處 :몸, 마음, 느낌, 담마)의 직관(直觀)에서만 이룰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수행인의 마음이 방황과 혼돈 그리고 탐. 진. 치에 가려 있다 하여도 그 사실을 본인 스스로 깨닫고 그 당처에 마음을 집중 관찰하면 방황과 혼돈 탐심, 진심, 치심은 자연히 사라지게 된다. 마치 강한 바람이 달을 가리고 있는 구름을 벗겨 버리면 밝은 달이 스스로 나타나듯 번뇌 또한 관찰에 의해서 사라진 그 자리에 지혜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번뇌 즉 지혜 혹은 번뇌 즉 보리의 공식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거듭 말하는 바 위빠싸나 수행만이 모든 고통의 원인결과를 밝히며 몸과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사실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보도록 하며 어떠한 관념이나 환상을 허락하지 않는 가장 바르고 직선적인 수행법으로서 모든 고통을 소멸시키는 길로 인도하며 생사윤회를 벗어나게 되는 진리로서 가장 현실적이요, 사실적인 수행의 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과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 느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 번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 모든 자연적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여 아주 가까이 면밀하게 자세히 관찰하면 모든 현상에 대한 자연적 성품을 보게 되며 깨닫게 하여 자기 자신이 무엇이며 몸과 마음이 무엇이며 자신은 무엇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는가를 추상적이거나 공상적 관념 혹은 책이나 얻어들은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직접 체험으로 가장 바르고 정확히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이와 같은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고 이 수행법을 가장 존중하고 진지하게 반조하며 게으름없이 노력하게 되면 그 결과는 하루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사사공양(四事供養)에 대한 것

수행인이 네가지 (가사 즉 의복. 음식. 거주. 의약품)을 받아 수용하면서 수행하고 있을 때 졸음이 오거나 망상 혹은 해태심, 게으름이 일어나면 즉시 관찰하여 다스려야 하며 또한 네가지 공양에 대해 반조함으로서 경각심을 갖고 분발심을 내어 더욱 힘찬 정진을 해 나갈 수 있다.

 

특히나 출가수행(出家修行) 하는 비구(比丘)나 비구니(比丘尼)들로서는 이 네가지 공양구를 받아 수용할 적에 신심있는 신자들에게 깊이 감사하고 존경의 뜻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반조하기를 이 네가지 공양구가 어떠한 경로를 거쳐 수행인들에게 들어 왔는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출가 비구, 비구니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공양물에 대해서 단순히 감사하는 것 보다는 정말로 이 시주물이 수행인의 손에 들어 오기까지는 얼마나 많은 힘과 노력이 깃들어 있나 살피고 사용함에 있어서 항상 마음과 몸의 움직이는 당처에 집중 관찰함으로서 사용 물품에 대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나고 더 많은 것들을 갖고자 하는 탐심이나 시주물의 좋고 나쁨을 따지는 분별심을 내지 않도록 한다. 오직 수행을 위해서이지 배부르고 편하게 지내며 아름답게 꾸미기 위함이 아니라는 생각을 항상 지녀야 한다.

 

수행인의 마음가짐이 이와같이 될 때에 검소하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아주 쉽게 편안리 지낼 수 있고 신자들 역시 받들기 쉬우며 큰 부담감을 갖지 않고 자신들이 지닌 것에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바칠 수 있다. 이러할 때 공양 올리는 이는 복이 되고 신심이 일어나며 받아 수용하는 이는 올리는 이에게 이로 인하여 좋은 인연이 맺어지며 반드시 생사의 해탈에 이르도록 진심으로 축복을 내려주고 축원 해주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과 음식

위빠싸나 수행인은 어떤 음식을 먹거나 먹는 음식 자체에 마음을 집중 시키고 음식에 신경써서는 안되며 먹는 동작에 마음을 집중시켜야 한다.

 

예를 들면, 음식을 보는 순간에서부터 보는 자체를 관찰하게 되고, 수저를 들 때 손과 팔에 주어지는 힘과 그 현상의 변화와 팔의 동작을, 음식을 덜어서 입으로 가져갈 때, 입안에서 음식을 씹는 현상, 삼킬 때와 음식이 목을 통과할 때의 현상 등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러면 음식에 대해 좋은 마음과 나쁜 마음을 갖는 분별을 하지 않게 되고, 좋은 음식에 탐심을 내거나 좋아하지 않는 음식에 대해서 진심이나 싫어함을 내지 않게 되며, 다만 이음식을 마련하고 공급해 주는 수고와 시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이 음식을 취하여 수행을 하는데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여기게 되어 스스로가 채식을 했거나 채식이 아닌 음식을 취했거나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음식은 단순히 음식으로 취급할 뿐 자신의 동작을 관찰하고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정을 떠나 수행하는 사람들은 부처님께서 허락하신 음식을 받아들이 되, 좋은 것과 좋지 않은 것을 가리지 말아야 하고, 탐내지 말아야 하며, 집착하지 않아야 되는 것이다. 수행인으로서 거주하는 처소와 의복에 대해서 지나치게 사치스럽다거나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것 또는 너무 지나치게 검소하여 깨끗하지 못하고 벌거벗고(나체) 살아 간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종도(中道)적인 생활이 아니며 자신의 자연적 성품을 바르게 알지 못한 치우침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고 버려야 한다.

아무리 좋은 수행이라도 부처님의 법에 맞지 않는 것이라면 버려야 한다. 부처님의 법마저도 버리게 되어 있는데 하물며 편견의 법을 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행인은 음식을 욕심내어 저장하지 않으며 음식을 가려서 선호하지 않는다. 다만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취하는 약으로 여기어 한때의 주린 창자를 채우고 나면 만족하며 어떠한 음식이 들어가건 그것들은 모두 한결같은 대변이라는 찌거기가 되어서 배설되는 것 아닌든가. 음식은 시비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라고 여긴다.

 

비구는 음식을 선택할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로 하여금 채식만을 고집하지 않도록 하셨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비구들이 걸식을 통하여 수도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을 마련하게끔 되어있는 생활 조건 때문에 채식위주의 식생활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비구가 채소 음식만을 받아 드린다면 그것은 편파적인 견해일 뿐 아니라 당시나 지금이나 채식과 육식을 혼합하여 취하는 일반 신자들로서는 비구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데 제한을 받고, 비구들로서도 음식을 얻기 어렵게 되며 동시에 그 당시 사고방식으로는 신자들이 복을 지을 기회가 적어지게 된다는 것도 이유의 하나였다.

 

따라서 채소만을 선택하는 것을 금하는 한편 채소가 아닌 경우, 받을 수 있는 것과 절대 받아서는 안될 것을 따로 정하셨다. 채소와 더불어 다른 음식도 받되 특별히 받을 수 없는 것은 다음의 경우이다.

 

신자가 비구에게 공양하는 준비로 어떤 생명이 희생되는 것을 직접 보았을 때, 비구에게 바쳐지는 음식 준비로 어떤 생명이 희생되었다고 의심이 갈 때 등은 결코 그 음식을 받아서는 안된다.

 

예를 들면, 신자의 공양 청을 받아서 갔을 때 기르던 송아지가 없어지고 음식으로 쇠고기가 올라 있다면 그 집에서 기르던 송아지의 향방에 대한 의심이 갈 것이다. 비구는 그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 채소가 아닌 음식으로 아주 금한 것은 10가지 고기로서 다음과 같다.

 

1. 인간의 고기는 인간의 존엄성과 고귀함 때문에 절대 금한다.

2. 코끼리와

3. 말은 당시 국가나 사회에서 7보의 하나로 취급했으며 왕실의 교통수단이고 전쟁 중에는 기동력있는 수송수단이며 권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4. 개

5. 원숭이

6. 사자

7. 호랑이. 표범

8. 곰 등은 사나운 짐승으로서 위험하고 인간을 해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9. 뱀. 악어

10. 여우 등은 경멸적인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 밖에는 신자들로 하여금 시장에서 준비된 것을 구입하여 가정에서 조리하여 먼저 승려들에게 몇 몫을 바치고 가족이 취하도록 되어 있어서 비구는 이런저런 특정 음식을 선택하고 가려서 받아 들일 수 없게 되어 있다.

 

개인적인 건강상의 이유라면 얻어지는 대로 음식을 받아와서 채소와 채소 아닌 것을 가려 선택할 수 있으나, 대중에 선포하여 선택하는 것은 계와 율에 어긋나는 결과가 된다. 비구는 부처님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으로서 부처님이 정하신 것 이상으로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고 수행하려 한다는 것은 진실로 부처님과 법을 중히 여기며 배워서 행하려는 태도가 아닌 것이며 자만심을 키우는 결과일 수도 있다.

 

음식을 얻어서 먹지 못하고 직접 만들어서 먹어야 하는 경우에는 자연히 채식위주가 될 것이다. 비구가 음식을 원천적으로 손수 준비하게 되어있지는 않으나 지역따라 상황이 달라서 한국 같은 경우 사찰에서 음식을 준비하여 공양을 들기 때문에 자연히 채식위주가 될 수 있는 것이나 신도의 공양청이 있을 때는 신도의 형편따라 준비할 수 있는 것을 받아 들이는 것이 현실적이라 하겠다.

 

수행인은 시주물에 대해서 존경

위빠싸나 수행을 하는 남녀 신도들이 사찰에 와서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경비를 지불할 때에도, 그것이 자신의 노력의 댓가로 얻어진 것이든 부모 형제나 친지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이든 이 역시 시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수행자는 생각하기를 각자 필요한 수련비를 냈기 때문에 사용하는 물건은 모두 지불된 범위 내에서라 생각하여서 사중(寺中)의 공용물(共用物)에 대해 함부로 하거나 낭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상 자신이 지불한 경비를 따지기 앞서, 수행을 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시설과 기타 준비가 되어야 하며, 거기에 필요되는 모든 시설물과 준비등이 시주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과 수행인을 도와 장애없고 불편없는 봉사에 의해서 이루어 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남으로부터 도움받아 수도하는 과정인 만큼 4가지 공양을 사용하는 것이나 같은 의미가 있다.

 

비록 출가하는 비구는 아닐지라도 수행기간 동안 이용하는 모든 편의 시설물에 대해서 깊이 감사하고 자신을 깊이 관찰하여 좋고 나쁨과 편안과 불편함을 초월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자기 수행이며 진전에 도움이 되고 자연과 환경에 따라 적용하는 유연성을 갖는 것도 자기 수행의 일부인 것이다.

 

수행인이 자기가 사용하는 모든 시설물과 공양에 대해서 존경하는 마음과 가마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스스로의 마음가짐이 겸손해지고 자비스러워지며, 동시에 자신의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 마음이 생겨 잠시라도 낭비하는 일이 없이 아주 덕높은 생각을 가지고 부지런히 정진하려 노력하며 신심을 높이 가져 수행에 큰 성과를 얻게 된다.

 

특히나 비구, 비구니 수행인들은 부처님께서 많은 계(戒)와 율을 제정하시어 잘 지키도록 하셨으며 모든 일상생활이 계와 율의 바탕으로 엄격히 다스려져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신심가 덕이 높은 재가신자(在家信者)들로 하여금 4가지 공양구를 출가수행(出家修行)하는 비구, 비구니에게 공급하도록 하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편안하고 쉬운 인생을 즐기게 하려함이 아니라 모든 생활에 대한 얽매임에서 벗어나 좀더 많은 시간을 수행에 전념하여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며, 청정해지고, 지혜로우며 자비스러운 훌륭한 인격자가 되어 중생의 등불이 되고 자비의 의지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였다. 또한 수행중에 일어나는 더위와 추위를 피하고 비바람을 막으며 짐승들의 침입이나 벌레 등의 침입을 막아 안전하게 거주 수행하고 최소한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되는 음식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건물은 크고 아름답게 꾸며 소수인이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며 이 몸을 살찌우고 맛을 좇아 만족함을 갖게 하기 위한 음식 공양이 아니요, 피고름 주머니인 이 몸을 아름답게 감싸기 위해서 의복, 가사 공양을 받도록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가한 비구, 비구니는 4가지 공양구에 대해서 매우 큰 주의심과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비구, 비구니가 수행에 게을러 탐. 진. 치가 다스려 지지 못한 채, 지혜와 자비가 부족되어 있는 상태에서 계속 풍족한 시주 공양을 소비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스러운 일로서 마치 기름통을 등에 지고 불속을 통과하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큰 소원이 담긴 시주공양

시주의 너그러운 공양물은 한결같이 큰 소원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시주자들은 " 저의 정성스러운 공양을 받는 분들은 부터님이 정하신 계. 정. 혜을 잘 지키며 수행을 열심히 하여 생사 해탈하고 그 지혜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를 간절히 바라나이다." 하는 큰 자비심으로 공양할 것이다.

 

이와같이 참으로 정성이 깃든 공양을 받고 시주물을 사용하는 비구, 비구니들은 적합하고 적당하게 최저의 한도에서 최고의 효과를 갖도록 해야 하며 공양을 받을 때는 언제나 마음을 집중시켜 청정하고 순수한 겸손하고 감사하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받아서 법도에 맞게 사용해야만 공양을 올린 신자에게는 위없는 청정한 공덕이 되고 받는 이는 덕과 지혜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 공덕으로 시주자는 행복하며 수명이 장수하며 번성하여 신심이 높아지고, 받아 수용하는 자는 더욱 정진을 부지런히 하게 되어 지혜와 덕이 높이 쌓이고, 자비가 가득하여 참다운 중생의 복전이 되는 것이다.

수행인들이 4가지 공양물을 사용함에 있어서 그 출처와 목적을 반조하는 것은 스스로 깊이 감사함을 갖게 해주고 겸손함과 수행에 분발심을 내어서 더욱 정진에 힘을 내게하여 번뇌와 탐, 진, 치 무기력과 게으름에서 벗어나게 함인 것이다.

 

이 세상은 비난과 비방이 언제나

이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유해지기 바라고, 유명해지기 바라며, 명예를 좇아 온갖 일을 다하고,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얻지 못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노력함도 없는데 명예가 높아지고 부유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적인 노력의 댓가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전생의 숙업에 의해서 자신의 일을 완성하며 명예를 얻고 유명해지기도 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비난하고 비방하며 꼬집고 험담하기를 좋아한다.

 

"이봐요, 그 아무개 말이야, 과거가 이렇고 이런 사람인데 갑자기 절허게 됐지, 호박이 덩굴째로 굴러 들어왔어." 아니면 "어쩌다 운이 좋아 그렇게 됐겠지." 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실제 장본인은 그와같이 되기 위해서 숨은 노력과 많은 정진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편, 어떤 이는 남보다 노력을 몇 배 하고서도 자신의 일을 성공시키지 못했을 경우 "저 사람은 공부도 많이 하고 노력도 많이 하여 아는 것도 많은데, 하나도 성공 시키지 못하고 배운 것을 활용하지 못하니 그게 무슨 소용이야, 바보지. 가없가느 사람." 이라는 등 다른 이들의 비난과 웃음거리는 거의 벗어날 수가 없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매우 특별한 분으로서 원인과 결과에 대한 모든 현상을 완전히 깨닫고 이해하셨기에 비난과 중상 모략을 거의 받지 않으셨다. 물론 부처님깨서도 비난과 비방을 완전히 벗어났던 것은 아니지만, 제자 비구들이 거느리고 일어나 시중에 나가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 설법, 전교하시는 일에 있어서 조금도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구하려는 뜻을 두지 않으셨다. 오로지 큰 자비심으로 중생을 고통에서 건져 해탈을 얻게하고 생사유니회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일깨우고 가르쳐 보여주시는데 전략하셨으므로 그 분은 비난과 비방으로부터 초연하셨던 것이다.

 

수행인들이 장래에 법사(法 )나 선사가 되어서 중생을 교화하고자 한다면 약간의 수행이나 경전 수학의 이해 정도에 만족하지 말고 실제로 피나는 정진과 노력을 통하여 실질적인 경험을 깊이있게 쌓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 경전의 이론을 자세히 잘 배운 다음 스스로 소원을 세우되, 나를 통하여 부처님의 깨닫는 법을 배우는 자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고 이로 인하여 생사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열반을 증득하여 평화롭고 행복하게 실기 바라는, 그러한 근본동기로 삼아서 가르침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는 한편 배우는 사람들로 하여금 계. 정. 혜를 익히고 직접적인 수행을 통하여 몸과 마음 그리고 언어 행동에 품위와 교양을 쌓으며 덕을 길러, 그들의 인생목표나 수행목표를 달성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훌륭한 신념과 봉사적인 자세로서 남을 가르치고 인도하며 도와줄 때, 당연히 선사나 법사는 유명해지게 되는 것이다.

 

어느 수행인이 어떻게 위빠싸나를 가르쳐야 가장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라고 질문하였는데 이에 대한 대답은 이와 같다.

 

수행을 지도하려는 사람이 참으로 용맹스럽고 진지하게 수행하여 깊은 삼매를 거치어 적멸을 체험하고 자신의 성품과 모든 현상으 성품을 분명히 보았으며 만족할 수 있는 과(果)를 증득한 다음 경전상의 부처님 말씀을 잘 배워서 진실로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자비와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가르침을 행하면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명예나 생활을 위한 물질적 얻음의 도구로 삼게 되면 많은 노력과 시간을 보내면서 가르치려 해도 효과적일 수가 없고 오히려 비난과 함께 경멸을 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인은 부처님이 하신 행적을 거울삼고 그 거룩하신 사랑과 행동 그리고 생활하신 모습을 언제나 반조하여 자신의 방향설정에 거울이 되게 하고 나침반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탐심과 진심의 방해

수행인이 수행중에 일어나는 현상 즉 즐거움과 조용하고 평화로움 등이 계속적으로 나타나기를 바라는 욕망을 갖고서 수행을 한다면, 이는 수행에 큰 장애가 되는 것이다. 그같은 좋은 현상이나 나쁜 현상이 욕망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 현상을 관찰하는 수행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탐심이 동기가 되어서인 것이다.

 

수행인이 수행에 장애를 받는 원인을 분석하여서 탐심이 원인임을 알았을 때 탐심을 버려야 하며, 어떠한 인위적인 욕망의 인식작용이라도 위빠싸나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닫고 그로 인해 수행에 방해를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수행인이 자신의 수행진행 과정에 있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자신에 대한 불만인 미움과 기타 불안 등은 진심이 원인인 것이다. 위빠싸나 수행인은 수행의 진행과정에서 오는 모든 현상 즉, 불만과 불안까지도 집중력을 갖고서 관찰하는 것으로 수행을 삼기 때문에 현상에 끄달려 불안에 휩싸이고 불만스러움에 의한 진심을 일어킨다는 것은, 위빠싸나 수행을 통한 예리한 현상관찰이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좌선 중에 항상 조용하고 편안한 마음, 일념이 쉽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 불안이 없고 수행에 진전이 빨리 있기를 바라는 마음 등도 곧 수행의 장애임을 알아야 한다.

 

수행에 진전이 보이지 않음에 대한 진심이 일어났을 때 진심이 일어났음을 속히 인식하고, 진심 그 자첼르 관찰하여 진심이 사라지는 현상을 경험함으로서 다음 기회에 다시 진심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위빠싸나의 깊은 사마디를 통하여 자신의 아랫배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은 극히 부드러우며 섬세하되, 역력하고 분명하여 동시에 고요한 상태여서 마치 깊은 바닷속에 잠겨있는 듯하고 육체적으로는 매우 가벼워 뭄이 허공위에 앉아 있는 듯 지그히 평화롭고, 쾌적함을 느끼게 된다. 이 상태에서 잠시라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관찰을 놓치고 집착하거나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모든 것은 일시에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기를 갈망하는 생각으로 방황하는 마음만 있게 된다.

 

이와같은 방황하는 마음과 조금전에 있었던 섬세하고 평화로운 현상이 다시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현재 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없게 되므로 망상에 사로 잡히게 되어 순간순간 일어나는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한 상태를 다시 나타나게 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현실적 순간의 현상에 마음을 집중시키지 못하면 그 결과는 수행의 도(道)와 과(果)를 이룸에 큰 장애가 되고 큰 깨달음에 이르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지난 과거는 위빠싸나의 적

수행인이 지난 과거의 좋은 경험이나 황홀했던 순간 등이 미래에도 계속 되기를 바라는 것이나, 지금 현재에 다시 나타나기를 구하는 마음에 사로 잡히게 되는 것은, 위빠싸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도 매우 위험스러운 적인 것이다. 만약에 수행인이 미래의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바라고 이런저런 생각과 망상을 함으로서 순간순간의 자연적 현상을 놓치고 1분간을 지났다면 18회라는 인식작용을 놓침이요 5분간 계속되었다면 90회를 놓친 것이다. 이것은 사실상 청정치 못한 마음으로 방석위에 앉아 세월을 헛되이 보낸 것이며, 이러한 수행자세를 하루 한 달 내지 일 년을 보냈다면, 한량없는 세월을 불선업으로 보냈다는 결론이 되는 것이다.

 

수행인이 어떻게 하여야 긴 세월을 불선업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는가? 경전상의 부처님 말씀에는, " 수행인(비구)이 자신의 마음을 현재의 순간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당처에 정확하고 예리하게 밀착시켜 깊이 파고 들어 적나라한 모습을 자세히 관찰함으로서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깨달아 진실한 무습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바램에서 벗어나 극히 현재에 생활하는 수행인이 되는 것만이 모든 불선업을 짓지 않는 청정한, 즉 어느 시간적 한계에나 상황이 물들고 집착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라고 하셨다. 수행인이 어느 한 생각에 머물게 되면 그 생각을 따라 탐심과 진심을 일으키게 되고,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키려 갖가지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 감각적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감각적 욕망 자체가 계속 변화하는 것이 마치 달리는 말과 같은데 어찌 충족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어리석은 생각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 잡히게 되어 갖가지 행동을 제약받지 않고 옮기게 되는데서 불선업이 쌓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한 군데 머물지 않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관찰만이 모든 불선업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다.

 

번뇌와 망상은 불행의 원인

세상 사람들은 번뇌와 망상이 인간에게 고통과 불행을 가져온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이 부족한 듯하다. 그래서 번뇌와 망상을 극복 내지 제거하는 방법에 대하여 모르고 있으며, 그 번뇌 망상 속에서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현재를 살아가고 다시 불행한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위빠싸나 수행법을 통하여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면 번뇌와 망상의 자연적 존재를 알게 되고 번뇌와 망상 역시 하나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번뇌와 망상을 극복하는 우일한 방법은, 오직 마음을 현재의 순간순간에 일어나는 현상에 집중하여 자연적 변화를 관찰하며 한 순간의 변화라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수행자가 경계심에 차 있고, 경각심에 차 있을 때 과거와 미래의 생각에 머물지 않게 되며 탐심과 진심, 집착심등에서 벗어나게 되므로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불행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세속적인 예를 들어 번뇌 망상의 피해를 벗어나는데 이해를 돕고자 한다. 어떤 도시에 소매치기나 날치기범 등이 선량한 시민들 주위에 있어 언제나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하자, 각기 시민들이 도시내에 소매치기나 날치기 범 등이 있음을 알고 정신을 바짝 차려 경계심과 조심성에 차있고 자신들의 주택에도 문단속을 잘 한다면 범죄자들이 기회를 얻지 못해 시민들은 그들로부터 희생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시민들이 경계심이나 조심성이 없고 범죄자에 대한 인식이 없어서 방심하는 생활을 한다면, 어느 시기엔가는 범인들로부터 피해를 입는 희생자가 나올 것이다.

 

수행도 이와같아 수행인에게 번뇌와 망상이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방심하고 무사, 안일하며 경계심에 차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수행인이 경계심에 차 있고 깨어있는 상태에서 이몸의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순간순간의 변화하고 있는 현상을 모두 인식하고 있다면 번뇌가 도저히 마음에 자리잡을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직 이길만이 번뇌를 사라지게 하며, 번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수행인이 이 번뇌에서 벗어나 자유롭다면 곧 청정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며, 선업을 닦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번뇌없는 청정한 마음

수행인이 언제나 청정하고 선업을 닦는 사람이 되려면, 매우 굳은 신념으로 마음을 순간순간의 일어나는 현상에 예리하고 정확하게 겨냥하여 집중 관찰하면, 그 결과로 번뇌망상에 사로 잡히지 않으며 불선업을 짓지 않게 된다. 그러나 마음집중이 현상 당처에 밀밀하게 이루어지지 못하여 극히 세밀한 작은 간격이라도 생기게 되면 그 사이로 번뇌가 다시 침입해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즉시 깨닫고 잠시의 간격도 없이 면밀하고 성성(惺惺)하게 관찰하여 순간의 변화를 놓침이 없어야 된다.

 

이와같은 마음집중을 계속 면밀히 해나가는 길만이 번뇌와 망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뿌리를 뽑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라도 게으르고 방일하면, 번뇌의 뿌리는 어느사인지도 모르게 다시 자라게 되는 것이다. 다만 지속적인 마음집중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잠시의 공간적 여유가 없게 된느 것만이 가장 으뜸가는 길이요, 삼매를 이루는 길이며 도와 과에 이르는 경험을 얻게 되는 길이다.

이 도와 과에 이른 경험이 수행에 튼튼한 기초가 되어서 더 이상 번뇌, 망상과 욕망에 의한 혼돈과 방황함이 없어지고 열반을 증득하게 되며, 여기에서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느끼게 되며 마음은 순수하고 고요하며 청정해 지는 것이다.

 

수행인이 수행 중에 일어나는 좋은 현상도,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 보고 관찰함으로서 그 좋은 현상을 마음속으로부터 쉽게 제거할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하면 좋은 현상에 집착하게 되고 갈망하는 마음을 가지며, 따라서 번뇌가 다시 일어나는 결과가 된다. 그 하나의 예로서, 어떤 좋은 단체에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람이 들어와 그 단체를 깨버리려 공작을 할 때 그 단체는 한 사람의 나쁜 행동으로 능히 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에 단체 회원들이 모두 자각하여, 사상적으로 불순한 사람이 자기네 단체를 파괴하려 개별접촉을 통하여 공작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경계심을 가지고 그 사람을 관찰하며, 그 사람으로 하여금 각기 회원들에게 접근하여 공작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공작 활동은 자연히 제한 내지 정지되는 것이다.

 

수행인들도 이와같이 번뇌의 존재를 언제나 인식하고 경계심을 가지고 관찰할 때, 번뇌는 존재하지 못하거나 더 이상 발전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이 이와같이 노력함으로서 번뇌로부터 벗어나 성스러운 도에 이르고 위없는 진리를 체험하게 되나, 그렇지 못하면 약간의 좋은 경험이나 즐거움이 수행인을 속이고 이것이 내가 구하는 마지막 목표라고 착각하게 되는 아주 위험스러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수행중에 나타나는 어떤 좋은 경험이라도 하나의 자연적 현상인 것으로 알고 집착과 구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서 여여(如如)하게 관찰하면, 그 즐거운 혹은 좋은 현상이 나타날 때까지의 정신집중력이 되살아나 계속 더욱 강하고 힘있게 마음집중이 이루어지고 수행에 진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노력을 함으로서 차원높은 정신세계를 체험하게 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 성품과 현상을 바로 보게 되는 가장 으뜸가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때에는 번뇌와 망상이 장애가 아니라 일르 통하여 마음의 자연적 성품을 보게 되는 지혜로 바뀌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제 번뇌. 망상과 욕망,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모든 효과가 있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집중법이 얼마나 효과있게 번뇌와 모든 불선업을 다스려서 지혜와 선업이 되게 하는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견고한 마음과 속박된 마음

인간이 지닌 여러가지 마음 가운데 수행에 장애가 되는 것, 두가지를 소개하여 그 자연적 성품을 알게 하고 수행에 어떻게 적응해 나가야 하는가 설명하고자 한다. 그 두가지 마음은 째또킬라(Cetokhila)와 째또위니반다 (Cetovinibandha)이다. 째또킬라는 째또(Ceto)는 마음, 위니반다(Vinibandha)는 속박된 정신적 육체적 얽메임이라 해석하며 숨은 뜻은 거칠고 사나우며 완고하고 의심스러운 마음과 즐겁지 못한(Dosa), 즉 진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수행인이 수행에 전념하다 보면 스스로 마음이 외골수가 되고 적은 것에도 얽매이게 되며 용서함이 적어 화를 자주 내게 되고 고집을 세우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굳고 경직되며(킬라)와 거칠고 속박된 마음(위니반다)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의 상태를 잘 알고, 그것을 바른 수행으로 이끌어 인격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설명하고자 한다.

 

굳고 경직된 마음(째또킬라)의 성질 가운데 다음과 같은 5가지 의심은 수행에 장애를 가져오게 한다.

1. 부처님의 깨달음과 능력에 대한 의심.

2. 담마(가르침)에 대한 의심으로, 진실한 길로 깨달음에 이를 수 있을까? 와 같은 것.

3. 승가의 성제자들의 깨달음과 지혜에 대해서 품는 의심.

4. 계. 정. 혜 수행에 관한 의심.

5. 도반에 대한 미움, 시기 질투 등이다.

 

또한 수행인이 하나의 목표 즉 깨달음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다가 위와같은 의심이나 혹은 다음과 같은 의심을 스스로 품게 된다. '이 수행법이 진실한 것인가? 어떤 이점이 있을까?''등인데, 이와같은 의심의 상태는 수행의 노력이 성공치 못한데서 오거나 아니면 바르게 하지 못하여 어떠한 진전됨이 없을 때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스승의 진실한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좁은 견해와 고집 혹은 적은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도 얻은 바가 없거나 진전됨이 없을 때 일종의 패배의식과 함께 의심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서 어떠한 결과가 있다해도 이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바르고 정확한 노력은 바른 효과가 있으며 그릇되고 바르지 못한 노력은 헛수고의 공허만 남게 되는 것이니 이를 빨리어에서는 록까니야마(Lokaniyama)즉, 자연의 법칙이라고 한다.

 

수행인이 수행의 길을 선택할 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수행하거나 잘 수행한 선배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수행하게 되면, 반드시 진전됨을 보게 되고 좋은 결과가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만족치 못하고 의심이 날 때는, 지혜로운 경험이 있는 스승을 찾아가 탁마하여야 되며 스스로 마음을 부드럽고 어떤 고집에 얽매이지 않도록 노력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신심을 내어야 한다. 신심은 수행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만약 대나무를 구부려 자기가 필요한 물건을 만들고자 한다면, 먼저 통대를 불에 구워 부드럽게 하거나 아니면 쪼개서 구부려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불에 구워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쪼갠다는 것은 견고함을 없애고 닫혀 있는 고집스러운 마음을 버린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이렇게 견고한 대나무도 변형시켜 다른 용도의 물품을 만들 수 있는 것과 같이 수행인에게도 심신이라는 부드러운 핵심이나, 고집스러운 견고함에서 벗어나는 너그러움이 없으면 생각의 방향이 다른곳으로 향하게 되거나 더욱 견고하여져 거칠어지고 난폭하게 되어서 스스로도 다루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불교가 생소한 곳에서 태어난 사람이 부처님께 신심을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요, 불교의 영향권 내에 있다고 해도 부처님을 하나의 신적(神的) 존재로 믿는 환경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지하여 부천미과 같은 깨달음을 성취하겠다고 신심을 내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담마 즉 진리의 수행법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간적이거나 신적(神的)인 대상이 아니기에 신심을 낼 가능성이 있으며, 이 진리의 가르침에 신심을 내어서 실천 수행하면 이익됨이 있고, 그 결과를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으므로 자신의 수행목표 달성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한번쯤 노력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르침(담마)에 신심을 낼 수 있으며 가르침과 계(Sila) 정(Samadhi) 혜(Panna)에 대해서 신심을 내어 부지런히 정진하고 그 실천을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 것이다.

 

수행인이 가르침과 수행 자체에 신심이 없다면 수행에 흥미를 가질 수가 없고 노력을 할 수 없으므로 자연히 어리석음에 머물게 된다. 또 그렇게 견고하고 고집스러운 상태에서 스스로를 속박하여 너그럽지 못하게 되는 것은 수행의 근본이 아닌 것이다.

 

거의 모든 종교는 믿음-맹목적 신앙으로 여겨지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불교에서는 와서 보고 조사하고 깨닫는데 바탕을 두고 있다. 다른 종교처럼 그저 믿고 신앙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상으로 신심(信心) 빨리어어로 삳다(Saddha)라는 말이 있다. 이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을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한다면 모든 선과 악의 근본이 어리석음과 지혜로운 두 마음의 작용에서 나온다는 것에 대한 확실을 신념(信念), 삳다(Saddha)라고 한다. 서기 400년 경의 불교철학자 아상가(Asangha)는 3가지로 삳다(신심)를 분류 해석했다.

 

첫째. 생로병사의 윤회와 열반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확신.

둘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대한 큰 기쁨.

셋째. 확신에 의한 깨달음의 열망 등을 신심 혹은 삳다(Saddha)라고 하였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현실적을 나타낼 수 없고 보여줄 수 없을 경우의 일이다. 그러나 불교의 생노병사의 윤회와 깨달음의 열반은 수행을 통해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으며 성취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확신이며, 자신의 마음에 결정을 실천에 옮기는 과정인 것이다.

 

수행인이 수행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계. 정. 혜에 대한 실천을 통하여 몸과 마음, 언어 동작을 자제하고 잘 다스려가며 깨달음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면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얻게 된다. 또한 모든 번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여 그 자연적 성품을 보게 되면 번뇌의 근원을 부숴버리고 그 번뇌의 더러움에 다시 사로잡히지 않게 되니 이런 수행자는 진리의 견(見: Sacca ditthi)자며 지(智: Nana ditthi)의 성취자이며, 와서 보고 확인한 것 (Ehipassiko)이다. 경전 여러 군데에는 진리를 증득한 사람의 경계를 일러 [ 더러움이 없고 깨끗한 진리의 눈을 떴다.] (Dhamma cakkhu)라고 표현 했으며 혹은 [모든 사물의 현상을 바로 있는 그대로 보았다.](Yatha bhutam)이라고 했고, 부처님 자신께서는 '법안(法眼)이 생겨났다./지혜가, 빛이, 슬기가 생겨났다'고 하셨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신의 아랫배의 현상이나 정신이나 마음의 어떠한 현상도 모두 일어나고 사라지는 원인과 결과의 작용이요, 육체적 운동작용과 마음의 인식작용일 뿐인 것을 깨달았을 때 이는 물질과 비물질의 운동작용이요 [Nama(名), Rupa(色)] 그 어느 주체(主體)가 물질과 비물질 사이에 존재하여 명령을 내리는 소위 아(我)가 개입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때 표현하기를 '진리를 깨달은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라고 한다.

 

수행인이 수행하는 법에 깊은 신심을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면, 진리를 깨닫는 이익됨과 성스러움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지혜를 개발하고 청정함을 닦아 지니게 되므로 수행의 목표가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조사하고 실천하여 확인도 해보지 않은 채 의심부터 먼저 하거나 불필요한 고집을 부리게 되면, 수행의 이익이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며 어느 누구도 바르게 고쳐주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에는 다만 본인 스스로 깨달아 고쳐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도 "수행에 대해서 의심하는 병에는 치료할 길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하나의 예를 들어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부처님과 다섯 수행자의 만남

부처님께서 가야의 우루벨라에서 정각을 성취하신 뒤 7주 동안을 선정에 들어 갖가지 깨달음의 행복을 누리신 다음 대 자비심으로 다섯 수행자들에게 생사해탈의 진리를 전하는, 최초의 법륜을 굴리기 위하여 바라나시의 사슴동산으로 향하셨다. 이 때에 사슴동산의 다섯 수행자들은 얼마전 고행을 포기하고 다시 호화로운 생활로 돌아간 타락된 고타마 사문이 자기네들을 다시 찾아온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화합하여 결정하기를 '우리는 깨끗이 고행하는 수행자로서 타락된 사문을 앞에 나아가 맞이할 수 없으며 발 씻는 물이나 자리를 준비할 수 없으니 내버려 두고, 만약에 그가 가까이 와서 스스로 앉으면 그리 앉도록 하는 것이 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대자비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시고자 접근하시니 다섯 수행인들은 조금전의 결의 사항을 잊어버린 채, 바릿대를 받고 자리를 펴고 물을 가져오며 제각기 움직여 부처님을 맞이하여 윗자리에 모신 다음, 자기네들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부끄러워 하면서도 곧 부처님을 향하여, 아우소(Auso: 빨리어로서 수행자들이나 비구들이 아랫사람에게 부르는 칭호)라고 부르며 동등하게 그러나 경멸적인 태도로 대하는 것이었다.

 

부처님께서는 대 자비심으로 다섯 수행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에게 들어라. 나는 중도의 진리를 발견하고 깨달음을 성취했다. 그대들을 위하여 내 설하리라." 하셨다. 그러나, 다섯 수행인들은 부처님에 대한 의심과 자신들의 고집 때문에 듣기를 거부했다. 부처님께서 다시 두번, 세번 설득시켜 깨달음의 진리를 가르치려 하셨으나 모두 거부하며 부처님께 존경이나 신심을 나타내 보이지 않았다. 그들 다섯 수행인이 부처님께나 담마에 대해 신심과 존경을 나타내 보이지 않은 것은 그들의 완고한 마음, 편견과 저항적인 마음 탓이니 이를 째또킬라와 째또위이반다라고한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방법을 바꾸시어 그들에게 다가가 말씀하시기를, "과거에 함께 수행할 때에 지금처럼 '내가 진리를 발견했다. 나는 깨달았다.'라고 선언한 예가 있었던가? 우루벨라 숲속에서 고행을 함께 할 때 그와 같은 언행을 보인 적이 있던가?" 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자비삼매로서 그들의 생사해탈을 위해 설법하려 노력하시니 효과가 나타나, 그들의 마음에 변화가 오고 부처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깊은 지혜가 생겼던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와같이 인내와 자비로서 그들에게 최초의 법륜을 굴리기 시작하시어 최초로 꼰단냐가 법안(法眼)을 갖추고 수다원과를 증득하며, 차례로 네 수행인도 모두 법안을 갖춘 다음 마지막으로 무아(無我)의 특성이라 하는 안알따나락카나(Anattanarakkhana)경의 설법을 듣고 다섯 수행인 모두가 아라한이 되었다. 이때 부처님께서 " 이 세상에는 오직 여섯 아라한들이 존재한다."라고 선언하시어 부처님과 다섯 수행인의 깨달음이 조금도 틀림없음을 증명하시고 선포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 관심가지고 살펴야 한다. 불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고 수평적인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불교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특별히 법을 전하는 과정이 없다. 왜냐하면 생사해탈의 법은 모두의 것이요, 모두가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가장 평범하고 광범위한 문제이기에 어느 특정인에게 따로이 부촉 될 수가 없는 넓고 깊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처음 말씀하셨을 때, 왜 다섯 수행인이 모두 거부하고 듣지 않았던가? 그 이유는 그들이 부처님의 과거만 알았지 지금 현재를 알지 못한 것이며, 과거 생각에 집착되어 있고 자신들의 고집에 얽매여서 현재의 중요한 상항을 판단 못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비록 널리 알려진 유명한 의사일지라도 처음 찾아간 환자는 그 의사의 과거의 관계가 전혀 없기 때문에 곧바로 믿지 못하는 것이다. 유명한 의사라고 이야기는 들었을지라도 우선 그 의사를 통하여 자신의 병이 치료되고 건강에 도움을 얻었을 때, 비로소 환자는 그 의사를 신임하고 존경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두 가지 신심(信心)

종교를 가져 믿는데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신심이 있다. 첫째는 경전이나 문헌상의 믿을 만한 자료를 통하여 일어나는 신심이 있고, 둘째는 어떠한 가르침을 의지하여 자신의 실천적 체험을 통하여 일어나는 경우 등이다. 여기에서 바른 신심을 세우는데 도음이 될 만한 것으로, 부처님께서 한 부족들에게 하신 말씀을 소개하고자 한다.

 

부처님께서 코살라(Kosala)국의 캐사풋따(Khesaputta)라는 마을에 당도 하셨을 대 이곳의 부족인 깔라마(Kalama)시민들이 부처님께 말하기를, "부처님이시여, 이 곳 캐사풋다는 많은 수행자들이 방문하는 곳입니다. 그 방문하는 수행자들은 제각기 자신의 가르침만이 옳다고 설명하고 다른 이들의 것은 그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수행자의 가르침이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힘듭니다. 부처님께서 자비심으로 저희들을 위해서 바른 신심을 가질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 주십시요."하고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칼라마 시민들에게 충고하셨다. " 칼라마 시민들이여, 당신들이 어느 것이 그르고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고, 혼돈이 있는 것은 매우 당연한 것이요, 왜냐하면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에서 일어나기 때문이요. 칼라마 시민들이여, 견해나 전통적인 관습이나, 많은 대중의 소문에 끌려가서는 안되는 것이오. 종교적인 성전이나 권위와 형이상학적인 논리와 추론이나 외형적 힘이나 위대한 스승의 위엄이나 명상의 기쁨이나 이성에 끌려서도 안되는 것이요. 그러나 어떤 가르침 속에 부분적으로나마 불선업이며 평화와 화합이 없고, 독선적이거나 나쁘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면 그 때는 그것을 과감히 버려야 하는 것이요, 또한 어떤 가르침이 선업이며 평화과 행복을 가져오고 너그러움과 도덕과 윤리가 있고 좋은 것이라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실천하여 스스로 기쁘고 만족해야 하는 것이요, 이것이 나의 가르침이요."

 

이와같은 부처님의 가르침 때문에 불교는 신앙이 아닌, 신심 내지 신행이라 한다. 불교의 계. 정. 혜와 팔정성도(八正聖道)는 실천적 체험을 통하여 신심을 일으키고 지혜를 개발하여, 슬기로운 인격자로서의 사회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 지키고 열심히 수행하면, 지혜라는 결과를 반드시 얻도록 되어 있어서 체험적 신심을 가질 수 있고 확신할 수 있으며 자신의 체험이기에 어떠한 외부의 유혹이나 위협에도 동요되지 않는 확고한 신행 생활을 하는 것으로 값지고 보람되며 지혜로운 길이며 밝은 생활, 바른 믿음 혹은 확신이다.

 

다만 성전상이나 기타 문헌 혹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한 믿음이나 신심은 자신의 직접적 체험이 아니기 때문에 흔들리고 확신이 가지 못하여 방황하는 일도 있으며 진리의 실천적 탐구보다는 외형적 의식과 종교 활동에 심취되어 그저 구원이나 얻고자 하는 종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이 믿음은 진리의 체험이 아니요, 진리를 바로 보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직접적인 이익이 적으며 보다 나은 가르침이 있을 때 쉽게 동요되고 외부의 권유에 쉽게 동요 될 수 있거나 아니면 허상적 체험없는 믿음이기에 독선과 배타심만이 깊어질 수 있다.

 

이러한 믿음은 극히 위험하며 자신을 보다 안전하고 지혜로운 사회인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분리시키고 어리석게 생활하는 어두운 신심 혹은 믿음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맹목적으로 믿는 것은 건전한 것이 아니며 지혜롭기 보다는 어리석음이 있으며 이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탐심과 진심이 일어나며 자신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자신에 대한 불만이 곧 투쟁적인 활동으로 해소하려 할 때에 종교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그로 인하여 무수한 인간들이 아무런 가치없이 희생되는 것으로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올바른 신심은 체험적 사실적이며 논리적이요 합리적인 지혜를 창출하고 맹신적인 것은 독선과 무지 속에 투쟁과 갈등을 낳는다.

 

함께 수행하는 도반에 관한 것

굳고 경직된 마음(째또킬라)과 거칠고 속박된 마음(째또위니반다)은 함께 수행하는 도반을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보살피는 마음부터 먼저 갖도록 권하고 싶다. 경전상에 사브라흐마짜리(Sabrahmacari)는 동료 수행인에 대한 종교적 의무 이행에 대한 것으로서 7부 대중을 동료 도반이라 한다. 비구, 비구니, 식카마나, 사미, 사미니, 우빠새, 우빠시카 등이다. 함께 수행하는 도반끼리는 물론이고 어떠한 경우라도 불만이나 나쁜 사악한 마음이나 심술궂은 행동으로 용서함이 없이 7부 대중을 대한다면, 그것은 본인 자신의 심적 고통이요 불행이며 수행에 진전이 없고 대중과 함께 화합할 수 없으므로 결국 대중을 떠나야 하는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러므로 불화의 태도는 깨끗이 버려야 하고 용서하는 마음, 보살피는 마음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 의지하며 수행에 도움을 주어서 진전을 가져오고 인격 형성에 도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적인 사상은 중생들이 끝없이 받게 되는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며 모든 불선업을 떠나서 열반을 증득하고 진정한 평화와 행복을 누리기 위함인데, 그 법의 안에서 다시 평화가 없고 행복이 없는 생활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수행인으로서 금지된 것을 금하지 않으며, 잘 지켜야 할 계(戒)와 율(律)을 지키지 않으며 대중의 화합을 깨뜨리고 용서함이 없으며 보살핌이 없다면, 이 수행인은 무책임한 사람으로서 대중을 가까이 할 자격이 없는 것이다. 가령, 먼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이 많은 준비를 하여 길을 떠난 도중에, 자신들이 의견을 앞세우고 화합하지 못하여 여행길에 대한 의심이 나고 큰 장애를 만나면 그 여행은 계속 될 수 없이 되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수행인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Dhamma)나 수행의 길에 대한 의심이 일어나고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해 함께 생활하는 수행인들을 시기 질투하고 미워하며 비협조적이고 용서와 이해가 없다면 그 수행인은 대중과 함께 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이 더욱 굳어지고 편협하며 옹졸해지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일에 얽매어 도반의 충고나 지도에 귀를 기울리지 않게 되는 것은 그 마음이 굳고 경직된 마음(째또킬라)과 거칠고 속박된 마음(째또위니반다)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사실은 수행을 통하여 보다 너그러워지고 용서하는 마음이 많아져야 하며 자비로워지고 사려가 깊으며 이해와 협조가 두터워져 서로간의 화합과 평화가 있어야 되는 것인데도 그 반대로 시기 질투하여 잔인해지며 나쁜 생각을 품고 그 나쁜 생각들을 행동에 옮기는 현상이 있다면 이는 수행인으로 또는 자비와 지혜를 배우려는 부처님의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변화가 많고 복잡하여 여럿이 모여 사는데 있어서 불화는 당연히 일어날 수 있는 자연적 현상인지라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부처님께서 계와 율을 제정하셨다. 따라서 모든 수행인들은 부처님을 존경하고 가르침을 존경하여 해당된 계와 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하여야 한다. 수행인은 반드시 계. 정. 혜를 수행의 지침으로 삼고 의지하여 수행의 방향을 잡아감으로서 정신적 장애인 굳고 경직된 마음과(째또킬라)와 거칠고 속박된 마음(째또위니반다)을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도반(Kalyanimitta 善友-진리를 함께 수행하는 착한 벗들)에 대한 신심이 일어나는 것은, 담마를 수행하여 실질적 체험을 했을 때 부처님 및 가르침과 승가 및 도반에 대한 참다운 신심이 되고 모든 의심과 의혹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은 참다운 신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여러 사람들이 믿고 이야기해서도 아니요, 전통적 관습에 의한 것이나 위대한 사람들이 이야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직접 수행을 통한 체험이기 때문에 견고하고 뒤로 물러섬이 없고 바꾸어 질 수도 없으며 어느 누구의 권유나 압력과 탄압에 의해서 말살될 수도 없는 지혜로운 것이다. 이러한 체험적 신심은 어떤 삿된 길을 수행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직접 수행하셨고 말씀하신 계. 정. 혜(戒. 定. 慧)와 사념처경(四念處經)을 바탕으로 수행해서 얻어진 자신의 경험이며 이 경험이 경전상의 말씀과 일치되는 것이다.

 

수행인이 수행을 통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체험적인 확인을 하였을 때 비로서 바른 신심을 갖게 되고 스스로 탐. 진. 치를 떠난 마음은 평화스러우며 기쁨이 있어 자신과 실존현상의 참다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이런 신심을 바탕으로 수행을 통한 실질적 체험을 쌓으면 모든 의심이 제거되고, 동시에 다른 많은 수행인이 존재함을 알게 되어 다시는 성제자(聖弟子)들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입에 쓴 약과 같다

부처님은 자신에 대해서나 담마 즉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에게 신심을 강제로 강요하지 않으셨으니 이것이 다른 어떤 종교 창시자보다도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자신이나 그 가르침에도 공개된 비판을 허락하신 것은 너무도 완벽하기 때문이며 진실하기 때문이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행법에 대해서도 비구 제자들로 하여금 맹목적 신앙에 의한 실천으로 헛된 세월을 보내게 한 것이 아니라 먼저 조사하고 실질적 수행에 적용하여 체험을 통한 확신을 갖도록 권유하셨다. 또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서 체험을 바탕으로 우러나오는 신심을 인정하셨으며 일반 신자들에게도 그와같이 되게 하기 위해서 갖가지 방편과 수행방법을 제시하여 각기 개성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가장 정확하고 바르며 빠르게 체험하고 목표에 도달하도록 권유하시고 격려하셨다.

 

부처님의 설법은 언제나 듣는 이로 하여금 의미깊고, 이익됨이 있게 하셨으며, 어떤 때는 칭찬으로 수행자를 격려하시고 어떤 때는 잘못을 예리하게 지적 비판 하셨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비록 의미없는 말일지라도 칭찬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이것은 중생이 어리석기 때문이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들이 우선 입에 쓴 약을 싫어하니까 제약회사에서는 약에 설탕을 발라서 약을 삼키는데 달콤하도록 하여 입과 맛을 속인다. 그러나 사실상 어떤 병에는 당분이 부작용 내지 약효를 없애거나 줄여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을 보통사람들은 잘 모른다.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우선 믿기 쉽고 신앙심 내기 쉽도록 달콤한 말과 쉬운 방법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켜 다시 헤어날 수 없는 사견에 떨어져 생사윤회의 길을 한량없이 헤매이게 하는 것이다.

 

어떤 약은 매우 쓰기 때문에 먹기 어려우나 몸이나 병을 치료하는 목적에는 좋은 것이다. 부처님 말씀도 이와 똑같이 깨달음에 이르는 좋은 길이지만 행하기는 어려워, 귀에 거슬리기도 하고 마음에 부담이 되며 수행하기 힘들게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렇게 어렵고 귀에 거슬리고 부담스럽게 들릴지라도 지혜로운 사람들은 들어서 기쁘고 자신의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이며 깊은 뜻을 곧바로 이해하게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현실적인 진리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이고 사실적이며, 부처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한 봉사와 희생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또, 그 가르침은 직접 체험을 통하여 곧바로 증명할 수 있으며, 완전히 공개되어 모든 이의 비판과 조사를 받아들이므로 신심이 바르게 일어나게끔 되어있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신앙심을 금한 것은 오직 불교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다른 종교의 가르침에서는 편리하게 사람들은 지배하기 위해서 맹목적인 신앙을 강요하는데 비해 불교에서의 신심은 사실적이며,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실질적 체험을 통해서 일어나도록 하며 그렇게 해서 일어나는 신심은 침다운 신심이 되는 것이니 7가지 이익을 곧바로 얻게 된다.

 

첫째는 모든 불안과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고,

둘째는 슬픔과 비탄과 정신적 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셋째는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고,

넷째는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다섯째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며,

여섯째는 금생에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일곱째는 다음 생애에 대해서 더욱 행복하고 즐거움이 보장되는 것이다.

 

쉬운 예로서, 좋은 가정 환경 속에서 부모님들의 사랑과 가정교육을 잘 받으며 편안하고 행복하게 자라면서 필요되는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성장하여 가족을 떠나 자신이 독립된 생활을 하더라도 좋은 직장에 취직되어 충분한 생활 보장을 받기 때문에 행복하고 평화롭게 자기 인생을 영위해 나가는 것과 똑 같은 이치요, 진리인 것이다.

 

누구나가 위빠싸나 마음집중법을 수행하면 위의 7가지 이익이 곧바로 성취되는데 이것은 직접 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이 위빠싸나 수행법을 전혀 모르더라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거나 경전을 보고서 뜻을 내어 실천 수행하며 깨달음에 이르고 자신의 깨달음에 대한 체험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을 빠째카싣다(Pacckhasiddha, 즉 다른 이의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여 뜻이 성취된다)라고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다고 해서 누구나 신심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듣는 이의 목적의식이 분명하고 이해가 바르게 되어야 하며,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합리적인 인식능력이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어떠한 가르침을 통해서라도 모든 번뇌를 제거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을 지니겠다는 결정심이 있어야만 부처님의 설법이 자신의 뜻에 계합되어 바른 신심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하여 담마는 계. 정. 혜를 적용 실천한다는 뜻을 포함하고 있고 마음을 청정하고 평화롭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 법을 보는 자 나(부처님)을 보고, 나(부처님)을 보는 자는 법을 본다."라고 하셨다. 만약에 법문을 듣는 자가 파괴적이고 맹목적 비판적인 마음을 가졌다면 이 사람은 분별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명확한 지혜를 얻지 못하고 평화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바른 생각을 가지고 건설적이며 창조적이요 합리적인 마음으로 보든 번뇌와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겠다는 결정심과 목적의식이 분명하였을 때 법(담마)은 길잡이가 되고 어두운 밤에 횃불이 되며 지혜를 갖게 해주며 자신의 뜻을 성취케 해주는 힘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 조건은 듣는 이가 이익이 있을 때, 듣기를 원할 때, 사실이요 진실이며 즉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바탕으로 실증적이고 단순성이 있으며 사실성이 있게 하신 것으로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부처님의 설법 방식은 비유 은유적이며 문답 형식이요, 반대 질문식이며 게송을 읊으시거나 설화를 통한 듣는 자의 이해 증진과 사실에 대한 분석적 지혜로서 일깨우시거나 아니면 침묵하시는 것이다. 어떠한 질문이든 자세한 설명으로 잘문자의 이해를 돕는 것이며 침묵은 설명으로서 표현 할 수 없을 때가 아니라 의미없고 현학적, 형이상학적, 관념적인 질문일 때에 질문자의 생, 노, 병, 사라는 큰 문제 해결에 도움되지 못하는 것일 때 이시었다.

 

시간을 기다리지 말라

수행을 행하겠다는 소원이 있어도 수행에 대한 실천이 없이 오랜 공백 기간을 두어 어느 시기를 기다린다면 신심도 약해지고 따라서 소원도 희미해져 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흥미있는 일들에 몰두하게 되므로 수행에 대한 시간을 뒤로 미루게 되면서 그 간절한 필요성이 없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할 때 약해진 신심을 북돋아 주는 것은 무엇보다도 위빠싸나의 마음집중 수행법을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서 실천해 보는 일이다. 그러면 그 효과를 즉시에 알 수 있어서 다시 스스로 결심하기를, 어떤 다른 일보다도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바로 이 수행이며, 이 수행을 어서 성취하여 모든 번뇌와 고통을 제거하고 마음의 평화를 가져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계속 정진해 가게 되어 보다 큰 결실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실질적 체험을 매우 중요시 하고 오직 실질적 체험만이 스스로를 점검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좌선 시간을 많이 가질수록 번뇌가 멀어지게 되고 기타 나쁜 생각, 나쁜 행동을 멀리하게 되기 때문에 마음은 자연히 청청해지고 행동은 품위가 있으며 성스러운 생활인이 되는 것이다.

 

수행인이 실질적 체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문헌상의 이론만 안다는 것은, 마음의 갈망이 끊어지지 않으며 수행법 내지 담마에 확신이 적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토론하고 논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면 나쁜 생각 나쁜 말을 하게 되며 나쁜 행동이 뒤따를 수 있는 기회가 보다 많아지게 되므로 수행인다운 생활이나 신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종교인다운 생활이 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는 종교가 혹은 어떠한 가르침이 개인적인 생활과 인격형성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생사윤회의 고통을 벗어나는 지혜라든가 열반의 체험은 정말 생각조차 미치지 못하는 곳에 머물러 있게 되므로 윤회와 한량없는 고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수행의 시간을 뒤로 미룬다든지 생사윤회의 해탈을 다음 생으로 미룬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요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부지런히 위빠싸나 마음집중 수행법을 실천하여 자신의 성품이 무엇이며 모든 자연의 성품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보고 깨달아 열반을 증득하고 생사윤회의 고통을 어서 속히 벗어나야 할 것이다.

 

한량없는 생사윤회 속에서 언제 다시 수행의 좋은 기회를 만나게 될는지 누가 보장하며 확신할 수 있겠는가? 여기 담마파다(법구경) 182번째의 말씀을 살펴보기로 한다.

 

“남자로 태어나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요, 어려운 것은 죽음을 당하지 않는 것(닙바다)이며, 어려운 것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듣는 것이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다행하게도 금생에 아직도 부처님의 깨달음의 법이 이 세상에 존재할 때에 인간으로 태어나 수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가 탐. 진. 치의 영향으로서 이 좋은 기회를 다음으로 미룬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한 일이 아니겠는가!

 

지혜를 통하여 깊은 신심이 일어남

계행을 잘 지켜도 역시 신심이 향상되어 갈 수는 있으나 깊은 신심은 일어나지 않는다. 계행을 잘 지켜 몸으로나 입으로 짓는 착한 업을 닦아갈 수 있으며, 이 수행과정을 통하여 많은 체험을 얻을 수는 있으나 마음을 깨닫는 궁극적 목표에 이르는 길은 아니다.

 

또 사마디(定)를 바탕으로 내적체험을 적용하여 역시 신심을 증장시키고 마음을 청정히 하여 일념을 이루게 함으로서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을 한군데 집중 시킬 수 있다. 사마디를 통한 마음의 평화와 행복함을 느끼게 될 때 역시 신심이 북돋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계와 정의 상호의존관계에 의한 잠정적인 평화로서 몸과 마음의 다스림에 불과하며 최종적인 수행의 목표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러면 혜(panna)를 통하여 어떻게 신심을 일으키며 수행을 깊이 있게 체험하는가? 계(戒)와 정(定)의 도움을 바탕으로 해서 혜(慧)를 완성시킬 때, 수행의 목표에 도달하게 되고 혜를 갖게 해주는 위빠싸나의 수행을 통하여 자신과 자연의 참다운 성품을 보게 되고 모든 물체의 자연적 현상을 알게 되는 것이 도(道 막가 Magga)에 이르게 되며 닙바나를 성취한다. 수행인이 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 완전한 신심이 일어나고 이로 인하여 수행의 진행과정에 대해서나 이 수행법을 설하신 부처님. 담마. 승가 내지 현재의 스승에 대해 진실한 신심이 나타나고 참으로 깊은 은혜 입음에 감사하게 되며, 이 수행을 통하여 얻어진 평화와 행복을 고통 받는 여러 중생에게 회향하겠다는 큰 자비심을 내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이 위와 같은 실질적 체험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깨달음을 뒤로 미루고 다른 사람들을 먼저 깨닫게 하며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겠다는 것은 마치 운전기술이 없는 사람이 큰 자동차에 많은 사람들을 태워서 운반하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계. 정. 혜를 바탕으로 수행하여 얻어진 체험적 지혜와 도는 반드시 차원 높은 신심을 갖게 하며 진실한 자비심을 일으키고 중생에 대한 연민의 정이 깊어지기 때문에 생사해탈의 진리를 전하여 모든 고통과 윤회로부터 벗어나도록 헌신적으로 노력하게 되는데, 이것이 참다운 도(道)며 신심이요, 자비라 할 수 있다.

 

위빠싸나의 실천적 체험

위빠싸나 수행인은 마음이나 생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고 육체적인 움직임도 마음을 집중하여 그 현상 당처를 자세히 관찰함으로서, 마음의 욕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나 번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며, 육체의 움직임을 따라 나타나는 자연적 성품인 근육의 긴장과 해소, 더운 기운과 차가운 기운의 집중현상에 따른 고통의 일어남 등을 알게 되는 것이다.

 

마치 화살이 팽팽하게 힘있게 당겨진 활줄 위를 떠났을 때, 무서운 속력으로 날아가 과녁을 꿰뚫듯이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나 변화에 대해서 정확하게 관찰할 수 있고, 이와같이 함으로서 그 현상의 자연적 성품을 알게 되는 것이나, 만약에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당처의 핵심에 가까이 접근되지 못했거나 깊이 파고들지 못하면 당처의 자연적 성품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행인이 마음집중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어떠한 현상의 표면에 가볍게 두는 것이 아니라 강한 용맹심과 경각심을 가지고 정확하고 예리하게 전신의 힘을 다하여 밀착시켜 관찰해야 만이 실질적 순간의 현상이 어떻게 변화되고 있나 자세히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순간의 변화 현상을 자세히 정확하게 보았을 때, 모든 움직임과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자연적 성품을 알게 되고, 자신의 성품이 무엇이며 무엇에 의해서 생(生)이 이루어지고, 어떻게 해서 사(死)가 이루어지는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이 수행법을 가르치신 스승에 대한 신심과 법에 대한 신심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실질적 체험을 통해서 일어난 법에 대한 신심과 스승에 대한 신심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체험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므로 의심이 없고 흔들리지 않으며 물러섬이 없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은 이 경지에 이르러야 참다운 신심이 일어나고, 이 수행법이 위없는 가장 으뜸가는 것임을 깨닫고 큰 환희심에 차며 매우 만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수행하여 나가게 된다.

 

수행인이 위빠싸나의 수행법에 현상관찰을 면밀히 해 나갈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과 관찰하는 마음이 완전히 각기 독립된 두 개의 기둥처럼 존재하되 서로 간에 움직이고 변화되는 모습이 계속되면서 여러 가지의 형태로 나타났다가 관찰의 노력이 강하여 끊어짐이 없고 번뇌의 침입이 없을 때 관찰하는 마음은 깊은 삼매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이 삼매의 경지에서도 잠시나마 방일하거나 만족 내지 기뻐하지 않고 더욱 용맹스럽게 관찰해 나갈 때 관찰의 대상과 관찰하는 마음이 일시에 정지되어 버리게 된다. 이 상태에서는 모든 몸과 마음의 기능이 정지된다. 이 상태를 적멸이라 하며 잠정적 닙바나라고 한다. 여기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적어도 몇 시간을 며칠 사이로 반복) 난 다음에 비로소 고. 집. 멸의 사성제 진리 가운데 세 가지를 완전히 체험하게 되고 이 체험에서 비로소 도(막가 Magga)에 이르게 된다.

 

이 때에 사실상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의 길을 걷는 수행자 혹은 흔한 말로 도인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위빠싸나의 특징이 나타난다. 일반적인 마음의 안정을 도모하는 사마디 수행에서는 적멸을 체험하기 매우 불가능하기에 사마디는 위빠싸나 수행의 기초 작업이라 하는 것이며 위빠싸나 수행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정견 (正見; Sammaditthi)

수행인이 마음의 겨냥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 당처에 바르게 집중했을 때, 자신의 참다운 성품을 보게 되며 참다운 성품의 내용을 알고 그 현상의 활동을 자신이 직접 보고 느끼게 되는데 이것이 곧 지혜며 정견이라 한다.

 

팔리어로는, 삽하와 담마 빠띠 왜다니깡(Sabbava dhamma pati vedanikam) 즉, 정견이라 하며 자연의 성품을 확연히 알았다는 뜻이다.

 

사물을 확연히 알았다는 것은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요 경전상의 글귀를 통한 이해나 알음이 아니라 실지로 모든 물체의 자연적 성품과 그 활동을 자신의 눈으로 분명히 보고 느꼈다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자세히 설명한다면, 벽이라는 것으로 이쪽저쪽이 갈라졌고 그 벽의 장애로 인해 벽 뒤쪽을 보지 못하므로 그 곳은 완전히 모르는 미지의 세계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벽 뒤쪽의 세계를 일시에 한 눈 아래 자세히 적나나하게 본 것과 같은 뜻이다.

 

정견을 갖춘다는 것은 이와같이 모든 사물과 현상을 아무 것에도 가리거나 방해받지 않은 채, 분명하고 확실하게 본다는 것이다. 특히 몸과 마음의 물리적인 현상과 물질과 비물질의 운동관계와 일체 자연적 인위적 현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한 현상을, 소유욕에 가리지 않고 탐, 진, 치에 가리지 않고 아견(我見)과 편견과 ‘나’라고 하는 주관성 부여의 장벽에 가림없이 가장 정확하고 바르게 자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생긴 그대로 나타나는 현상 그대로 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몸과 마음의 현상을 그대로 보는 것일까?

우선 마음에 일어나고 있는 현상 즉 슬픈 생각이 일어나 슬픔에 잠겼을 때 슬픔의 현상을 일어난 그대로 하나의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을 말한다. 이 슬픈 현상이 어떤 과거 기억의 조건이나 현재의 어떤 충격에 의하여 일어났을 때, 그것이 조건이 되어 일어난 여러 마음 가운데 하나의 현상인데 그것을 <'내‘ 가 슬프다, ’나‘ 는 슬프다>라고 의식 한다면 슬픈 현상을 일어난 그대로 보는 결과가 되지 못한다. 왜 자신을 슬프게 했는가? 가 될 수 있지만 다만 하나의 일어난 현상이라고 보았을 때는 자신을 슬프게 하는 어리석음이 없어지고 그 슬픔이 자연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했을 경우 절대로 오래가지 않고 또 다른 조건에 의해서 곧 사라지게 되어있는데, ’내‘가 슬프다 할 때는 그 슬픔을 계속 의식 속에 지니고 있는 결과이며 오래갈 수 있는 인위적 조건을 만들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은 매우 많다. 그 가운데 하나로 숨을 들이쉴 때, 자신의 아랫배가 일어나는 현상을 오직 일어나는 현상 자체로 보되 거기에 ‘내 배가 일어났다 혹은, 내가 일어나게 했다.’ 라든가 하는 어떤 분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숨을 내쉴 때도 아랫배의 사라짐을 그저 사라지는 현상 그 자체로 보라는 것이다.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자세히 관찰하면 어떠한 명칭이 붙여지지 못하고 혀끝을 댈 수 없다.

 

다만 일어나고 사라질 뿐, ‘내가’ 일어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것도 아니요, 일어나는 것을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거나 사라지는 것을 사라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자연적으로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며 그 기능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분명히 분리되어 독립된 현상이지 하나로 연결된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한다. 또, 일어나고 사라지는 과정에서 근육의 팽창과 축소, 더운 기운과 찬 기운의 변화, 바람의 움직임, 긴장감과 외적, 내적 고통이 분명히 있음을 보고 비단 외적 활동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현상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극히 미세한 활동현상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아서 그와 같은 현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를 정견(Sammaditthi)이라고 한다.

 

이 정견은 다시 일체법(Sabhava dhamma)이라 하며 일체법이 즉 몸과 마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완전히 분리되어 독립된 하나의 현상으로서 서로 의존되어 있으되 연결된 것이 아님을 알고 각기 움직이는 현상을 알게 되었을 때 삽하와 빤냐(Sabhava panna)라 한다. 즉 일체의 현상이 여시(如是)하게 이해되는 지혜라는 뜻이다. 어두운 방에 여러 종류의 물건들이 많이 있으나 너무 어두워서 방안에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밝은 불을 켜면 방안에 어떠한 물건들이 있는지 일 수 있되 어느 특정한 물건을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는 다만 물건이 있음을 알게 될 뿐, 어떤 특성을 지닌 물건이 있는지 모른다.

 

이때 불빛 아래에서 자세히 관찰하여 모든 사물이 지닌 개체의 특성을 알고 자연적 성품을 그리고 현상을 알았다는 뜻이 삽하와 빤냐로서 정견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자세히 낱낱이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을 아사모하 빻쭈빻타나(Asamoha paccupatthana)라 하여 모든 사물에 대한 희미함에서 벗어나 혼돈 없이 아주 밝고 분명한 경계를 가진다는 뜻으로 모든 정견의 소유자는 이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수행인은 일체의 모든 물체가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진리 속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요 이 현상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조건의 원인임을 알아야 하고 그 현상을 존재하게 했던 복합적인 조건이 흩어지면 현상 또한 사라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았기에 어떠한 현상이나 물체에 대해서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집착과 소유욕을 가질 수 없음을 아는 것을 정견이라고도 한다.

 

바른 수행 바른 신심

수행인이 수행의 당처 즉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적 현상이 분명히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이해되었을 때 스스로 판단을 내리게 된다. 즉 ‘물질(몸)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운동 작용 내지 현상과, 그 현상을 감지(感知)하는 인식작용만이 존재함을 실제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라고.

 

이와 같은 판단과 함께 위빠싸나 수행법과 실지 수행에 대해서 이해가 바르게 되고 바르게 받아들이며 확인함으로서 담마에 대한 신심이 높이 향상되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적 지혜가 일단 일어나면 담마에 대한 신심이 자연적으로 향상되는데 이를 산따나 락카나 삳다(Santana lakkhana sad-dha) 즉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 특성 있게 나타나는 신심 혹은 확신이라고 한다.

 

개성 있는 특성의 신심, 실질적 체험을 통한 신심은 맹목적인 신심이 아니라 지혜가 포함된 신심이다. 신심이 실천적 수행의 체험을 통해서 나타날 대, 부처님이나 가르친 스승 등에 대한 의심으로 인한 모든 정신적 장애가 제거되고 동시에 수행인 자신의 마음도 매우 가벼우며 깨끗하고 고요해지며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수행인은 위빠싸나 정진을 부지런히 하여 수행체험을 얻고 마음의 변화와 발전 진행과정을 직접 확인하였을 때, 자신의 마음이 분명해지고 높은 신심이 나타나며 지혜가 깊어져 더욱 엄숙해지고 조용해지며 동시에 자신이 번뇌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지혜(Panna)

신심(Saddha)과 지혜(Panna)가 균형을 이루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즉 신심과 지혜는 마땅히 균형을 잡아야 한다. 만약에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진다면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타난다. 수행인들에게 신심이 강하고 지혜가 없다면, 그 결과는 삿된 신심이 일어나게 되어 부처님을 인격적인 스승의 위치보다도 절대적 지배력을 가진 자로 신격화 시켜 버린다. 그리고서 갖가지 기묘한 짓을 신심 혹은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게 되어 세상의 어진 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비난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 예로서 자신의 신앙이라는 환상적이고 자기도취적인 이야기를 종교화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같이 되기를 강요하거나 아니면 광신적인 태도로 건전한 신앙이 아니고 바른 종교관이 못되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에 매달려 자신을 돌아보지 않거나 모든 것을 바치고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절대자의 뜻에 의해서나 부처님의 뜻에 의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을 위해서 어느 개인을 희생하라고 가르친 바가 없으며 다만 자신의 어리석음을 버리고 욕심을 내거나 집착하지 말며 보다 더 지혜로운 자신을 알고 자신을 의지하며 자신을 책임지고 살아가도록 가르치신 것 뿐이다.

수행인이 또한 지혜는 넘치고 신심이 없다면 상상력이 넘쳐 스스로의 묘한 꾀에 사로잡히기 쉬우며 교묘한 생각 등으로 선량한 사람들을 속이고 현혹케 하며 삿된 길로 인도하여 사회문제를 일으키고 선량하지 못한 생활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성전이나 기타 학문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지식이지 지혜는 아니다.

참다운 지혜는 실천적 수행을 통하여 자연의 참다운 모습과 자신의 성품을 보았을 때, 모든 자연과 자신의 존재 및 현상에 대한 이해가 바로 되고 그것들이 어떻게 해서 일어나고 존재하며 사라지는 가를 완전히 깨달은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상상이나 추상적인 혹은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사실적인 것이다.

 

두 종류의 지혜

불교에서 가르치는 지혜는 두 가지가 있다.

 

첫 째는 다른 사람의 가르침 즉 부처님께서 깨닫고 얻으신 지혜를, 전해오는 경전을 통하여 배워서 실천하여 얻어진 것으로 지금 현재 우리 수행인이 얻을 수 있는 지혜이다.

 

둘째는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스스로 노력하여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 것으로 부처님의 지혜, 그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스승 없이 자신의 내적상황, 참다운 변화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통하여 모든 물체의 자연적 현상과 생명의 존재, 생사윤회의 근본법을 실증하시고 연기법을 깨달으셔서 아뇩다라 삼 먁 삼보리(正覺)를 성취하신 것으로, 이를 가장 으뜸가는 참다운 지혜라고 한다.

 

이 참다운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바른 마음으로 정진하고 노력하여 자신의 마음을 순간순간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정확하게 겨냥하여 밀착 집중시켜 간다면 잠정적 삼매가 성취된다. 더 나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시작과 중간과 끝맺음을 자세하게 알며 좀 더 깊이 있게 면밀히 관찰해가게 되면, 자신의 아랫배의 외적 움직임과 동시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원인과 결과에 의한 기계적인 움직임일 뿐이며 그 적나나한 현상에서 ‘나’ 혹은 ‘내가’라는 어떤 주체도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일어나는 현상이 하나의 독립된 작용이요 사라지는 현상 역시 독립된 작용으로서 서로 의존되어 있으되 연결되어 있거나 하나의 덩어리처럼 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될 때, 지혜가 얻어지는 것이다.

 

지혜는 현상의 존재가 하나의 연기의 법칙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체험적으로 얻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우리가 걸어간다고 하면 오른 발과 왼발의 움직임에 의한 진행이다. 왼발을 움직여 옮긴 것이 원인이 되어 오른 발을 움직여 옮겨 놓게 되고 오른 발을 옮긴 것이 원인이 되어 다시 왼발을 움직여 옮기는 결과가 되며 왼발을 움직여 옮긴 것이 다시 원인이 되어 오른 발을 움직여 옮기는 결과이니 모든 진행은 원인이면서 결과요 결과이면서 원인이 되는 상의 상관 관계라는 연기의 법칙을 체험으로 깨닫게 한 지혜이다.

 

지혜(Panna)가 지닌 깊은 뜻

팔리어(Pali)의 빤냐(Panna)를 지혜 혹은 영어로 위스덤(Wisdom)이라 해석하지만 지혜의 깊은 뜻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빤(Pan)은 여러 가지 각종 각색이라는 뜻이며 분별적, 분명한 식별작용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며 냐(na)는 아는 것, 이해하는 것 등의 뜻이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바른 노력과 바른 겨냥으로 마음을 그 목표에 맞추어 관찰함으로서 잠정적 삼매를 이루게 되고, 동시에 아랫배의 긴장과 팽창감, 축소와 부드러움, 풀림 등 운동작용의 마찰로 내적 기운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감지하여 바람의 힘에 의해서 내부의 움직임 등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아랫배의 움직임 하나를 관찰하는데도 갖가지 현상을 보게 되고 갖가지 현상이 복합적으로 상호 의존되어 일어나고 있음을 알게 되면서 여러 가지 견해와 현상의 해석을 달리하게 되고 인식하게 하며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 일상생활 주변과 대인관계, 감정, 생각, 행동 등 일어나는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면 얼마나 많은 경험과 지혜가 얻어지는 지 유추하여 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성품은 참으로 다양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경우나 상대방의 개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갖가지 혼돈과 미혹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다양한 성품이라든가 그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자연적인 현상에 대해 바르게 보고, 이해하여 깨닫게 되는 것을 지혜라고 하신 부처님의 말씀은 참으로 이치에 합당한 표현이라 하겠다.

 

다시, 빠(Pa)는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라는 뜻이며 원인의 의한 결과의 인식과 이해이다. 즉 단순한 예로서 마음속으로 손을 구부리겠다고 하면 그것은 원인이요 非물질(Nama)이며, 실지로 마음의 명령에 의해서 손을 구부려 쥐어보는 것은 결과이니 물질(Rupa) 혹은 물질의 반응인 것이다. 이와 같이 구부리고 펴는 동작을 다시 인식하는 것이 인식(마음-나마 名)-결과이며, 손을 구부리는 동작 자체가 물질-루빠(色)이며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종작에 나타내는 원인과 결과를 분석해보인 것이며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가 여러 가지로 분명하게 나타남을 아는 것을 혹은 깨닫는 것을 지혜(Panna)라고 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마음(Nama :名)의 명령이 원인이 되어서 일어나므로 마음이 먼저며, 행동(Rupa:色)dl 뒤따르게 되는데 그 진행과정이 너무도 빠르고 순간적 동시작용이기에 처음으로 마음과 몸의 관계를 관찰하는 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되기 어렵다. 그러나 수행이 깊어질수록,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의 원리에 의한 움직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고 더 나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예리하고 자세하게 관찰함으로서 자연적으로 서서히 바른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수행인의 수행이 깊어짐에 따라 마음이 맑아지게 되면, 자연히 사물과 현상의 근원이 명확하게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육체적 행동, 작게는 눈 한번 깜짝이는 것에서 몸 전체가 움직이는 것까지 모두 원인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즉 마음(Nama)의 욕망이 원인이 되어 몸(Rupa)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수행인의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모든 육체적 행동이 이처럼 마음과 몸의 상호 연관관계의 진행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분명하고 바르게 이해했을 때, 자신의 행동이나 감정을 얼마든지 억제하고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신념이 서게 되고 동시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참다운 신뢰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과 실증을 통해서 바르고 신심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을 체험적 실증이라 하고 또한 지혜라고 한다.

 

어두운 방에서 자신의 팔을 돌릴 때, 팔을 돌이는 현상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팔을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면 올바른 판단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다만 어둠에 의해서 눈으로 보지 못했을 뿐 팔을 돌리는 현상은 진행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원리로 마음에 의해서 몸으로 명령되는 것을 알지 못했으면서 육체적 행동이 무심히 했다고 한다면 그것이 옳은 생각이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세상의 모든 육체적 움직임은 육체 스스로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명령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아야 하며, 이러한 사실과 몸과 마음의 역학(力學)관계라고 한다.

 

외적(外的)힘이 존재하지 않음을 실증(實證)

수행인의 이와 같은 신심은 진실을 바탕으로 실질적 체험을 통해서 일어난 것이므로 쉽게 물러서거나 변경되지 않는다.

 

마음과 몸의 상호 연관관계와 원인, 결과에 대한 관찰의 체험이 없는 사람은 자신의 팔을 구부렸을 때, 무심히 구부렸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은 마음의 욕망(구부리겠다는 의지)이 원인이 되어 팔이 구부려진 결과로서, 그 진행 과정이 평범한 시간적 개념을 초월한 순간적인 것이므로 수행이 깊이 되기 전에는 그 현상을 보지 못하며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인과 결과에 의한 마음과 몸의 상호 연관작용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의 과정에서는 절대자의 힘이나 전지전능의 브라흐만 신이나 창조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위대한 신들의 명령에 의해서 눈이 깜빡거리고 팔이 구부러진다고 주장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절대자의 존재를 이 현상에서 내세울 수는 없다. 이렇듯 절대자의 존재를 이 현상에서 내세우지 못하게 되면, 절대자에 의해서 창조된 피조물이라 할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비구가 “세존이시여, 자아 속에서 영원한 어떤 것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고민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렇다, 비구여. 어떤 사람이 ‘우주는 아트만 바로 그것이다. 나는 죽은 후에 영원하고 상주하고 불멸하고 불변하는 그것이 될 것이다. 나도 영원한 것으로 영속될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믿고 있었다. 그러나 부처님과 제자들이 탐, 진, 치와 갈애, 존재에 대한 욕망의 불을 꺼서 모든 탐욕을 끊은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색적, 추상적 견해(번뇌)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가르침을 들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다시 ‘나는 이 세상에서 완전히 없어져 버릴 것이다. 나는 파괴될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고 근심하고 슬픔에 잠겨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방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비구여! 자아 가운데 어떤 것이 발견되지 않으면 사람은 괴로워하는 것이다. 영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부처님께서 위와 같은 말씀을 하셨을까? 비구여! 자아나 영혼을 유지하는 어떠한 것을 진실로 찾을 수 없을 때 ‘우주는 아트만이다. 나는 죽은 후에 영원하고 상주하며 불멸하고 변화하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 라는 견해는 완전히 어리석은 생각이 아닌가?“ 라고 비구에게 답하셨다.

 

창조신에 의하여 이루어진 피조물이나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곧 창조신도 존재하지 않음이 당연한 논리요 현실이요 진리인 것이다. 모든 사물의 존재에 있어서 원인과 결과에 의한 현상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며 체험적 실증을 보일 수 있으므로 상상적이고 추상적인 신에 의해 만들어진 영혼이라는 힘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깨달음을 삽바와 빻쭈빻쭈하나 빠리가하야나(Sabhava paccupatthana parig_ ghanana)라고 하는데 즉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의 지혜라는 뜻이다. 자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 원인과 결과, 인과응보의 진리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인식하고, 자신의 육체적 운동 작용과 마음의 연관관계를 통해서 원인-명령, 결과-행동으로 상황이 진행되는 것을 확인하고 체험을 통하여 실제로 증명할 수 있음을 알았다.

 

따라서 이는 세뇌에 의한 것도 아니요 강제적 권유에 의한 것도 아닌 까닭에 이 진리, 담마에 대한 신심은 흔들림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의 진행과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 했었고 지금 현재도 존재하며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나 중생이 다만 어리석음과 불안 공포에 휩싸여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극하고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오랜 수행을 통한 마음 집중이 되지 못하면, 위와 같은 현상은 사모하(Samoha), 즉 마음이 번뇌에 가리워지고 탐, 진, 치에 가리우며 안개나 구름에 가린 혼돈의 상태에서 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물체를 거리를 두고 볼 때 자신의 눈이 침침하면 응시하는 그 물체가 흐리고 희미하여 윤곽이 잡히지 않아 무엇인지 분간 못하고 다른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

 

중생이 수행이 되지 못하여 탐, 진, 치에 가리지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을 알며, 뜻으로 분별하는 것이 모두 청정치 못하고 자연적 실상을 알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맛을 취하고, 아름다운 소리를 들으면 그 맛과 소리에 혹은 눈에 나타나는 물체에 즉시 소유욕을 느끼고 또 그것을 구하고자 갈망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진심내며 착하지 못한 행동으로 취하려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의 마음이 혼돈과 방황, 번뇌에 쌓이고 가려 있다면 이러한 사실적 자연현상을 명확히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현상의 자연적 사실을 제대로 표현 못하고 왜곡되게 하는 것이다. 즉 창조신이나 절대자의 존재를 믿거니 부처님까지도 신격화(神格化)시켜 우리의 모든 행동을 위에서 내려다 본다고 믿게 되었다. 번뇌와 혼돈 그리고 그 어리석음이 원인이 되어 자연의 진실한 모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절대적 신이나 창조신이라는 힘을 내세우고 중생들은 스스로 눈을 감거나 자신의 무능함과 어리석음에 대한 도피의 방법으로 절대자에게 의지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물의 자연적 현상에 대한 진리를 모르니 자신의 마음과 육체의 원인과 결과에 의한 운동 작용이나 현상의 움직임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한데서 삿된 견해를 갖게 되어 어리석음은 더욱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른 수행이 삿된 견해를 제거

누구나 위빠싸나 수행을 통해서 모든 사물의 자연적 현상과 자신의 성품을 알게 되고 원인과 결과의 인과응보 진리를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의 영혼에 대한 관심과 창조신. 절대적 신에 대한 삿된 견해에서 벗어나고 진실에 대한 의심을 풀게 되며 이로 인한 어리석음 등에서 벗어나게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나는 자아 영혼을 갖고 있다’ 는 견해는 상견(常見)에 사로잡힘이요, ‘나는 자아 영혼을 갖고 있지 않다’ 는 단견(斷見)에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그릇된 견해인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존재한다’ 혹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그릇된 생각은 하나의 속박을 낳기 때문이다.

 

무아(無我)에 관한 올바른 입장은, 어떤 견해나 관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투영없이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나’ 또는 ‘존재’라고 하는 것이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계속적인 변화의 흐름을 따라 상호작용하는 마음과 몸의 혹은 정신적 물질적 요소의 결합이며 동시에 상황에 따라 흩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하고 지속적이면서 불변하는 존재는 한 물체도 없자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위빠싸나며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관찰하게 하여 생. 노. 병. 사의 고통으로부터 해탈하고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이 수행의 근본 목적인 것이다.

 

위빠싸나 수행이 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이나 자아가 없다면 누가 업의 결과를 받을 것이며 무엇이, 어떤 힘이 이 생에서 다음 생으로 윤회를 받게 하는가, 하는 의문이 일어날 것이다.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위와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비구여, 나는 모든 사물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기의 법칙을 보라고 가르쳤다.” 라고 대답하셨다.

 

무아에 관해 부처님의 가르침은 부정적으로나 허무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보게 되는데 이는 실제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실제가 부정적이거나 허무일 수는 없다. 부정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적이고 추상적 자아 속에 있는 거짓된 신념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무아, 영혼의 존재치 않음이라든지 절대자의 존재를 인정치 않음에 대한 가르침은 거짓된 신념 번뇌와 삿된 견해에 사로잡힌 어리석음 등을 몰아내고 지혜의 광명을 비춰주는 것이다.

 

이는 사실을 밝히는 진리요, 지혜의 눈을 갖게 해주는 위대한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이 진리를 뒤의 유명한 불교학자인 무착(無着:Asan-ga)은 ‘다만 무아(無我)라는 사실이 있다’라고 표현했다.

 

非물질이 非물질에의 조건

어떻게 非물질(非物質)이 非물질에의 조건을 제시하는가?

마음이 어느 조건에 집중되어 있을 때, 그 집중이 깊은 관심으로 인해 지속력이 강할 때에는 어떠한 다른 상태에서도 영향을 받거나 조건에 구애받지 않게 되나, 깊은 관심의 농도가 옅어지며 집중력이 약해졌을 때 새로운 생각이 나타나 관심 기울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 집중력이 이 상황에서 저 상황으로 옮겨지며 관심이 바뀌는 것을 마나사카라(Manasakara)라고 한다.

 

마음이 이미 어떤 대상에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계속 유지되어 있는 것을 마나시카라(Manasikara 관심집중)라고 하며 마음이 이미 관심 기울이고 있는 대상에서 새로이 나타나는 현상으로 재빨리 전환하여 인식하고 새로운 현상 자체에 마음을 집중시켜 가는 것을 사띠(Sati: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재빨리 인식하여 자연적 현상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라고 한다.

 

하나의 현상이 잠시 존재하다 사라지게 되면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 새로운 현상과 이미 존재해 있었던 현상과의 연결점을 가장 빨리 정확히 인식하고 알아차리어 잠시의 빈틈을 주지 않고 면밀하게 관찰하도록 노력하는 기능을 가리켜 윈히(Vithi)라고 한다. 그리고 관심집중은 어떠한 현상이라든지 그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되 관심 기울이는 중에 다시 그 관심 기울이는 조건으로 인해 새로운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도 모두 다 마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마음(Nama)이 조건이 되어 다른 마음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마음은 언제나 어떤 사항을 전제로 계속 연결지어가며 발전되어가는 것으로, 현재의 어떤 사람과 좋지 않은 관계가 그 사람과의 과거 관계까지 연결되어가면서 증오하고 저주하며 분개심에 차 긴장하는 것 등은 매우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예로서 어떤 사람이 책을 읽는데 마음이 책읽기에 집중되어 있다면 모든 관심은 그 책속의 이야기에 기울어져 주변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이 나타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책의 이야기에 흥미가 떨어질 때 관심집중은 약해지고 동시에 책의 이야기와 간접적으로 연결된 다른 이야기들, 즉 책속의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가 자기가 들었던 어느 친구의 실제 이야기로 전환되어 과거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며, 책읽기에 관심이 없어질 때 주변의 모든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새로운 흥미거리를 찾게되므로 책으로부터 관심은 완전히 멀어지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마음(Nama)이 조건이 되어 다른 마음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수행인이 자신의 호흡이 진행됨을 통해서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당처에 마음을 겨냥하고 관심을 기울여 일념을 가졌을 때, 주변의 여러 가지 시끄러운 일들이 있어도 그 시끄러움이 귓속에 스며 들어와 일념을 방해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수행인의 마음집중은 자신의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당처에 매우 강하게 밀착되어 있어서 어떤 다른 현상에 관심 기울일 수 있는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 마음집중이 어떤 소리로 옮겨져 버렸을 때에는 아랫배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놓쳐 버린 것이다. 이 현상은 마음의 관심이 소리에 옮겨져 소리 인식 작용이 이미 관심 기울이고 있던 마음에 영향을 주어서 마음집중이 소리의 인식으로 옮기게 된 것으로 마음이 곧 다른 마음에 조건을 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변화가 이처럼 다양하게 변하고, 어느 한군데 오래 머물 수 없다는 특성을 수행인으로 하여금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마음을 한 군데 고정시켜 고요하게 하는 사마디 수행은 성취하기 매우 어렵다. 그러나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 그 현상 자체의 당처를 관찰하는 위빠싸나 수행은 마음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그 자체로 삼매를 삼고, 그 삼매 속에서 마음이 다양하게 움직이고 변화하는 자연적 성품을 알게 되며, 모든 마음의 현상과 마음의 작용이 무상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또 번뇌가 일어났을 때, 그 번뇌의 존재 자체를 관찰하여 그 번뇌의 일어나는 현상과 행동의 자연적 성품을 알게 되고 사라지는 현상을 분명히 알게 되며, 그 자체 관찰을 통하여 번뇌를 제거하여 없애 버리는 대상이 아니라 여러 가지 현상 속의 하나의 자연적 현상임을 깨닫게 될 때 번뇌는 곧 보리가 되고, 번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과 자연적 성품을 통하여 제행무상 진리의 지혜를 얻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질(Rupa)이라는 조건이 마음(Nama)에 어떤 사물로 혹은 물체로서 비쳐지기 위해서는 눈의 기능과 인식능력 그리고 물체의 존재라는 기능이 동시에 작용해야 한다. 만약에 눈의 기능과 인식능력이 없다면 물체가 존재해도 눈(Rupa)이라는 기능을 통한 인식(Nama)능력이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또 반대로 눈(Rupa)의 보는 기능이 있고 인식(Nama)능력이 있다 해도 보아야 할 물체가 없다면 물체를 보는 인식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볼 수 있는 물체(Rupa)가 눈의 인식작용(Nama)에 영향을 끼쳐 눈(Rupa)이 물체(Rupa)를 보는 순간 눈의 인식(Nama)작용이 일어나고 그 물체에 대해 해석하고 분석하며 내용과 성질을 인지하게 되는 것이다. 간략히 정리하면 물체(Rupa)가 마음 혹은 인식(Nama)에 영향 내지 조건을 부여하여 마음의 기능을 작용시키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어떤 소리가 있을 때 그 소리가 귀의 고막에 전달되어 진동을 하게 되면 그 진동이 인식 기능에 전달되어 매우 빠른 속도로 해석되어 어떤 소리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소리의 존재, 고막의 진동에 의한 전달 그리고 인식에 의한 판단 이 세 가지가 모두 동시에 기능을 발휘하며 조화를 이루었을 때 듣는다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 세 가지 중 어느 한 가지라도 기능이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게 되면 듣는다는 결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창조신이 있어서 들어야 할 것을 못 듣게 하거나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게 할 수 있는 전능의 힘이 있다면 이 세상에는 귀머거리가 없어야 되지 않을까?

 

또 다른 예를 들면,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칠해져 있는 발화약에 적당한 힘을 주어 그었을 때 불이 일어난다. 불이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성냥개비의 발화약품은 건조하여 완전해야 하고 성냥갑 자체도 망가지지 않아야 하고 긋는 행위도 적당한 힘과 바른 위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아무데나 그어대서는 불이 일어나지 않는다. 위의 여러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듣고, 보고, 불을 일으키고 하는 모든 결과에는 그 원인이 되는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하는데 이렇게 모든 결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는 논리야말로 변할 수 없는 진리인 까닭에 거기에는 창조자나 절대자가 개입할 여지가 없다.

창조자의 개념이 존재하면 그 피조물인 영혼이 존재하는데, 원인과 결과의 진리에 의해서 일어나는 소리의 들림이나 불의 일으킴, 눈으로 보는 것 등은 과학적이고 자연적인 현상이므로 신이 개입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도 영혼도 모두 무관한 것이다.

 

필요되는 원인에 의해 나타나는 결과

사물의 존재나 어떤 현상이 나타나야 하는 데는 거기에 필요되는 적합한 원인이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인식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있어야할 원인이 없이 어떤 사물이나 현상이 결과만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은 결과나 존재 자체가 이미 원인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은 모든 자연적 현상이나 어떤 사물의 존재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모든 현상이 원인과 결과에 의한 나타남이라 믿으려 하지 않거나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로 수행하면 수행에 진전이 없고 따라서 지혜도 생겨나지 않으며, 침체에 빠졌을 때 어떤 절대자의 구원을 바라거나 도움을 바라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사실이 아닌 원인을 꾸며 만들어 놓고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믿으려 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적인 것이 아니요 진실이 아니며 꾸며진 원인이었기에 진실로 아무런 결과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자신을 위해서 참으로 위험하며 자신을 어리석게 만드는 것이요, 원인과 결과의 진리에 반대하려는 잠재의식적 행동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고방식을 위스마해뚜까 딛히(Vismahetukaditthi) 즉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견해라는 뜻이다.

 

非물질(Nama)과 물질(Rupa)과의 관계는 하나의 실증적인 원인과 결과의 논리이다. 그 예로서 눈의 기능이 분명하고 인식작용을 하며 물체가 존재해 있는데도 그 물체를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그 물체가 너무 어두운 곳에 있을 때이다. 여기에 밝은 빛을 준비하여 빛이 그 물체를 분명히 비추고 있을 때 방안의 모든 물체를 모두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또 한 가지 필요되는 조건이 있다.

 

그 물체들을 분명히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관심이다. 그 물체에 분명히 관심을 기울여 살폈을 때 이 상태가 관심집중이며 비로소 어떤 물건인가를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조건이 갖추어지고 그 조건이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며 조화를 이루었을 때 방안에 존재해 있는 모든 물건들을 눈으로 완전히 보고 식별하게 된다.

 

즉 위의 네 가지 조건인 눈과 눈의 인식능력, 물체, 빛, 그리고 관심 등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했을 때 물체를 확실히 본다는 공식이 성립된다. 이런 사실들을 바로 알면 눈으로 물체를 본다는 원인과 결과의 사실에 대하여 이해가 되리라 믿는다. 따라서 모든 물체를 보고 인식하는데 있어서 수만 수천의 절대자나 창조신이 위대한 힘이나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위의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상태에서는 눈으로 하여금 물체를 보지 못하게 할 수 없으며, 반대로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에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게도 못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비추어 보아서 자연히 창조신이나 절대자의 존재와 그 힘이 우리에게 사실적으로 미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에 의해서 움직이고 생각하며 물체를 붙잡고 놓아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원인과 결과의 반복이며 진행과정이다. 자신이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지신의 앞길을 스스로 개척 내지 이끌어 가는 것만이 철저히 독립된 개체의 삶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함을 분명히 알았을 때, 모든 외형적 조건이나 노예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위빠싸나 수행인은 마음에서나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하나라도 놓침없이 관찰하여 그 자연적 성품을 분명히 봄으로서 모든 사견에서 벗어나고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인이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수행의 목표며 이 목표가 반드시 금생에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물질(Rupa)이 물질에의 조건(물질과 물질의 관계)

몸(Rupa)이 기후(Rupa)의 영향을 받고 기후가 건강을 유지하는데 큰 조건이 됨은 구태여 밝힐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후가 어떻게 해서 물질그룹에 들며, 이 육체라는 물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가 경전상의 말씀을 통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기후가 춥고 건조할 때에는 피부가 긴장되고 거칠어지며 입이 마르고 입술이 조여들며 갈라져 트게 된다. 그러나 아주 추우면 몸의 행동이 불편하고 활동이 제한되어 혈액순환이 긴장 축소되고 따라서 많은 부분의 신경이 마비되기도 하며 동상에 걸려 몸의 일부를 절단해야 하는 경우까지 발생하게 된다. 또한 활동부족으로 갖가지 질병을 얻게 되고 더욱 추우면 혈액이 응고되어 죽음까지 당하게 된다. 이것이 기후(Rupa)가 인간의 몸(Rupa)에 미치는 영향이다. 기후를 팔리어로는 우뚜(Utu)라고 하는데 모든 생명을 자양시키고 생물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로 형체는 없으나 물질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더운 기후에는 피부가 확장되고 기름기가 넘쳐 전신에 윤기가 나고 체내의 수분이 땀으로 계속 분비되어 수분이 모자라 갈증이 나고 피곤하여 기운이 없게 된다. 기후가 몹시 더울 때는 그 또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높은 기온으로 인하여 호흡이 빨라지게 되고 맥박의 진동도 빨라지게 되므로 신체에 필요한 공기가 가속되는 호흡에 공급이 되지 못하면 잠시 호흡이 중단되는 경우도 있고, 이 상태에서 다시 호흡이 회복되지 못하면 생명이 끝나버리는 비극이 초래된다. 이는 더운 기후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며, 기후인 물질(Rupa)이 인간물질(Rupa)에 조건을 갖게 하여 갖가지 고통의 결과가 나타난다.

 

비단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모든 물질에도 기후의 영향은 매우 크다. 예로서 옷감의 염색체의 바램, 나무와 목재 등이 기후의 영향으로 부패되고 삭아지는 것, 쇠의 녹이 슬어 약해지고 부서지는 것 등 모두가 물질이 물질에 영향을 미치어 변화 내지는 파괴되는 것을 의미하며 제행무상과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진리를 잘 나타내 보이는 현실이며 증명시키는 결과이다.

 

음식(Rupa)이 육체(Rupa)에 미치는 영향

음식(Rupa)이 인간의 몸(Rupa)에 미치는 영향 혹은 조건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음식을 아하라(Ahara)라고 하며, 음식물에 영향을 받는 물질, 즉 생명체의 육신을 아하라 자루빠(Aharajarupa)라고 하는데, 인간의 위장이 비어있을 때는 장내의 더운 기운이 집중되어 고통스러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을 일반적으로 배고프다 라고 한다.

 

이 때에는 기운이 없고 정신이 희미하며 전체적으로 신선함을 느낄 수 없고 생각이 건전히 돌아가지 않으므로 배고픔을 충족시키기 위한 갖가지 욕망이 가득하게 되고 배고픔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관해서 참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워져 자제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열을 받아 뜨겁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 다른 일에 대해서 신경을 쓰고 진심을 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음식의 영향을 받는 몸을 아하라자루빠(Aharajarupa)라고 한다.

 

매일 섭취하는 음식이 영양분을 골고루 갖추지 못했고 먹는 양이 적어서 배고픔이 잦으면 몸에 고통과 여러 가지 형태의 질병을 얻게 되는데, 이는 위장내의 더운 기운의 영향이며 동시에 체내에서 부족한 영양소로 인하여 기능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때 위염이 가장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것이며 몸이 야위고 약해지며 심하면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일체의 모든 질병과 고통이 열을 받아 나타나는 현상을 깜마자때조(Kammajatejo)라고 한다. 식사시간에 섭취된 음식은 위장 내에 들어가면 곧바로 더운 기운이 몰리게 되어 뜨겁게 만들므로 이미 익혀진 음식을 다시 익히듯 하여 음식을 용해 분해시키는 것으로 사실상 불로 태운 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각기 함유하고 있는 영양분을 뽑아내어 필요되는 곳에 공급하게 되고 찌꺼기는 분비물로 변하여 대장에 넘겨지게 된다.

 

사실상 위장에 음식이 들어가게 되면 30~1시간 내에 태워져 빠져나가게 되고 위장은 비어 있는 상태에 있다가 음식이 다시 들어올 시간이 되면 더운 기운이 다시 모이기 시작한다. 이때 제 시간에 음식을 취하지 못할 것 같으면 이 더운 기운으로 음식을 태워야 할 터인데 태워야 할 음식이 없으니 위장이 타는 것처럼 속이 쓰리다거나 배가 고프다거나 통증이 있다고 표현하게 된다.

 

음식이 위장에 들어가면 더운 기운이 모여 태우듯 음식을 삭이는 동안 소화액이 나와서 장내의 더운 기운을 식혀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음식이 없으면 그 위액이 충분치 못하여 위가 따갑고 쓰리고 아프며, 이러한 상태가 자주 있게 되면 위궤양이나 위염과 같은 병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질병은 음식을 정기적으로 적당량을 시간에 맞추어 먹지 못하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또 음식을 먹는 중에나 먹고 난 다음 땀을 흘리거나 더움을 느끼는 이유는 곧 깜마자때조(깜마자-기능, 때조-더운 기능)의 역할 때문인 것이다. 음식(Rupa)이 몸(Rupa)에 조건을 주고 영향을 미치게 하고 유지케 하는 것을 아하라자루빠라고 한다.

 

부처님의 포교와 은둔의 생활

부처님께서 일반사회의 중생에 접근하여 설교하시고 깨달음의 길을 지도하심은 명예와 권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들에게 바른 길을 보이시며 인도하시고자 함이었으며, 깨달음에 이르도록 보살피려 하신 것이니 이는 철저한 자비심에 바탕을 두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청법 대중에게 언제나 계. 정. 혜와 육바라밀, 사성제, 팔정도, 위빠싸나 수행에 대한 것, 생로병사의 고통에 대한 것 등의 설법을 통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법의 눈을 뜨게 하시고, 사원에 돌아오시면 조용히 선정에 드시거나 아니면 숲속을 거니시며 홀로 계셨다.

 

결코 그 사회의 유명한 거부, 장자나 국왕이나 재상, 장군 등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신 바가 없으신 것은 다른 정신적 지도자와의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스승의 위치에서 국왕이나 거부, 장자, 고위관리, 저명인사와의 관계가 맺어지면 이것을 기회로 자신의 명예를 내세우려 하고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싶어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어느 누구와도 절대로 개별적 관계를 특별히 맺으신 바 없으셨다.

 

다만 그들에게 필요 되면 부처님께서 찾아가시어 설법과 도움 되는 말씀을 해 주시고 일이 끝나시면 즉시 사원에 돌아오시어 조용하고 견고한 삼매 속에 지내시는 것으로 잠시라도 수행의 본분을 망각함이 없으신 참으로 특별한 분으로서 다른 어떤 위대한 스승이나 종교 성자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부처님의 위대함과 특별함을 느낄 수 있으니 마땅히 배워서 부처님과 같이는 행동할 수 없더라도 가까이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하며, 수행인답게 살아가면서 자신의 주변과 여러 이웃들에게도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하신 생활은 완전히 본보기의 최고 수준이시었다. 많은 대중들이 모이는 데는 언제나 부처님이 제일 앞에 서시어 비구 대중들을 인도하셨지 뒤에서 경책하시거나 채찍으로 다스린 바가 없으셨다.

 

부처님의 이러한 정신이 바탕이 되어 지금도 비구들은 나이 많은 장로 비구들이 모든 행사에 우두머리가 되며 앞서 실천해감으로 뒤에 젊은이들이 따라오며 배우는 자율적 지도체계가 갖추어져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며 수행과 포교가 항상 겸해져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서유지가 최고 어른을 정점으로부터 솔선수범이 되니 어른은 아랫사람들에게 큰소리로 나무라거나 지시할 것이 적게 되고 모든 것을 본보기적 실천으로 교육을 시키니 아랫사람들은 언제나 겸손하고 조용한 마음과 행동으로 웃어른들을 따라 배우며 몸으로 수행생활을 익히는 아름다운 풍속이 오직 승가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한다면 완전한 자율적 민주주의의 집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훌륭한 참선 지도법사가 되려면

수행인이 수행을 마치고 수행의 결과를 회향하기 위해서 깨달음의 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도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가르침과 더불어 여러 가지 활동이 뒤따르게 된다. 비록 수행을 마쳤다 하더라도 누구나가 부처님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부처님께서 생활하셨던 발자취를 따라가도록 노력하면서 자신을 언제나 갈고 닦으며 방일하거나 교만하지 않고 독선에 빠지는 일없이 중생교화의 임무를 수행하되, 그것에 집착하거나 자신의 명예를 높이고 영화를 도모하는 도구로 삼지 않으며 참으로 자비심을 내어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행복과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한 사명감으로 돌아가야 하며 시중의 무리 속에 동화되거나 휘말려 들어 자신을 잃어버리고 지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좌선지도 스승으로서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어느 한 제자를 편애하거나 지나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매우 위험스러운 일로서 많은 다른 제자들에게 불안과 괴로움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는 언제나 법에 관한 범위 내에서 원만한 관계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나치게 가까우면 존경심을 잃게 되고 법으로 인한 고결한 감정이 아닐 경우 부정적 사고(否定的 思考)와 불신감(不信感)을 갖게 되는 것이다.

 

원만하고 평정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스승으로서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이며 교화를 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화를 당하기도 하며 적을 만드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항상 자비심과 지혜로서 법도에 맞게 생활하며, 거리를 두고 관계을 맺어야 하며 가르침의 목적 이외에는 가급적 관계를 깊이 있게 두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행인의 자기 점검

위빠싸나를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의 수행 진행과정을 스스로 점검 확인 할 수 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현상, 육체적. 감각적 현상 관찰의 수행을 확실하고 꾸준하게 지어가는 사람은, 확실히 자신의 심리적 변화와 사고적 진행과정을 보게 되며 동시에 육체적 행동은 조용해지고 보다 더 침착하며 몸의 움직임은 마음의 명령에 의해서 일어나며 한 동작은 하나의 마음에 의한 동작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이 수행을 지어가면서도 자신의 수행 자체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그 진척 정도를 알 수 없어 그저 막연히 깨침이 오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은 불합리하며 비논리적인 것이다.

 

이제 새로 배우는 자가 먼저 수행에 온 경험자에게 수행과정과 진행상황에 대하여 질문을 받았을 때 먼저 수행한 자는 자기 자신의 수행에 대한 체험이 없기 때문에 일종의 도전을 당하는 듯 방위태세로서 강압적이거나 혹은 위압적인 언어와 태도를 보인다거나 아니면 극히 애매모호한 회피적 언어를 사용하는 태도를 보인다든가 아니면 극히 애매모호한 회피적 언어를 사용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수행의 가르침을 통하여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만약에 위와 같음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었다면 중생들이 얼마나 방황하고 혼돈에 빠지겠는가? 그러나 다행히도 부처님의 가르치심에 의한 수행법은 매우 명확하고 수행자는 자신의 수행체험을 분명히 묘사하고 설명할 수 있어 새로 배우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지침을 내릴 수 있고 인도해 주며 격려해 줄 수 있다. 다만 앞서 간다는 것과 뒤를 따라 온다는 차이가 있을 뿐 완전히 서로간의 수행의 길이 다름으로 인한 부정적이거나 반대적 입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위빠싸나 수행은 다음과 같은 열여덟 가지의 자기 점검과 열여섯 가지의 진행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지침이 있어 자신을 정확히 점검 판단한다.

 

열여덟 가지의 위대한 자기 점검

1.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관찰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이 잠시도 고정되고 안정되어 있지 않음을 깨닫고, 그 현상의 참다운 모습을 자신의 육안으로 분명히 보았을 때, 아닛짜누빠사나(Anic-canu passana) 즉 제행무상의 사실을 개발하게 됨으로서 닛짜산냐(Nic-casanna) 영원성의 관념에서 벗어나며 영원성의 관념적 존재를 거부하게 되는 지혜.

 

2. 자신의 몸과 마음이 변화되고 있는 현상관찰을 면밀하게 지어가는 과정에서 육체적, 정신적, 감각적으로 갖가지 고통이 너무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자신의 깊은 내적 현상관찰을 통하여 보게 되며 그 모든 고통이 잠시도 쉬임 없음을 깨달았을 때 둑카누빠사나(Dukkhanu-pass-ana)라고 하며 모든 고통이 존재하는 진리를 분명히 깊은 삼매를 통하여 보고 개발해갈 때 환상적인 행복감과 즐거움이라는 집착에서 벗어났음을 스스로 알게 되며 자유로움 즉 집착과 모든 둑카로부터 벗어났음을 깨닫는 것.

 

3. 자아(自我)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리(Anaattanu passana)를,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신의 마음의 변화하는 현상관찰을 통하여 개발하고 깨달았을 때 아(我)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며 그 존재를 거부하게 된다. (즉 Atta sanna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관념)

 

4. 마음의 끊임없이 변화되고 일어나고 사라지는 진행과정의 연속임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았을 때 자신의 마음에 대하여 싫음 내지 혐오감을 갖게 한다. (Nibbidanu passana 님비다누빠사나) 이와 같은 마음의 현상을 점검했을 때 즐거움 혹은 좋아함(N무야 sanna 난디산냐)에서 벗어나고 그것을 거부하며 집착하여 추구하지 않게 됨을 수행자 자신이 알게 된다.

 

5. 수행을 통하여 욕망이 일어나지 않음 (Viraganu passana)을 개발하여 나갈 때 욕망. 갈망(Raga sanna)을 거부하고 존재함을 용납하지 않게 된다. 모든 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자연의 원칙에 따라 강한 욕망. 갈망도 오래감이 없이 곧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이며 나의 욕망이 아니라 육문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6. 적멸의 현상(Nirodhanu passana)을 개발하였을 때 모든 현상은 하나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사무다야 Samudaya)에서 벗어나게 되며, 하나에서 시작되었다라든가 근원의 논리를 주장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7.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놓아버림(Patinissagganu passana)을 개발함으로서 집착. 얽매임(Adana)의 관념에서 벗어나며 그와 같은 현상을 거부하게 된다.

 

8. 모든 현상은 소멸(Khayanu passana) 한다는 것을 식별 할 수 있는 지혜를 개발시켜갈 때 수행인은 밀밀히 접착되고 존재(Ghanasanna)하는 관념에서 벗어나고 그러한 고정된 관념을 거부하게 된다.

 

9. 모든 생명들은 태어나서부터 계속 늙어가고(VAYANUPASSANA) 있음을 식별할 수 있을 때 수행인은 늙지 않으려는 관념(Ayuhana)에서 벗어나며 영생이라는 관념을 거부하게 된다.

 

10. 모든 현상은 항상 변화되고(Viparinamanu passana) 있음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음을 개발하였을 때 수행인은 고정(Dhuva-sanna)에서 벗어나며 고정관념을 거부하게 된다.

 

11. 마음의 모든 현상에는 어떠한 흔적이나 싸인이(Animittanupassana) 존재하지 않음을 식별하는 지혜를 개발하였을 때 수행인은 마음이 흔적 혹은 싸인이 있음(Nimitta)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고 그것의 존재를 거부하게 된다.

 

12. 마음의 묶임이 없음 (Appanihitanu passana)을 식별하여 개발하였을 때 수행인은 마음의 묶임(Pani야)에서 벗어나며 그 묶임을 거부하게 된다.

 

13. 모든 현상은 비어있음(Sunnatanu passana)을 식별하여 개발하였을 때 수행인은 자아믿음(Abhinvesa)을 거부하고 자아의 존재 믿음을 부정하게 된다.

 

14. 수행을 통한 내적현상 관찰 상태에서 수준 높은 지혜 (Adhipanna d-hammavi passana)를 개발함으로서 자신의 내부에 존재해 있다고 믿는 핵심 영혼(Saradanabhininesa)에 대하여 부정하고 거부하게 된다.

 

15. 모든 존재와 현상의 자연적이고 진실한 모습(Yathabhutananadas-sana)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개발하였을 때 어떠한 특정 현상에 몰입. 심취(Sammohabinivesa) 집착하는 것을 거부한다.

 

16. 수행인이 재난. 고난.(Adinavanu passana)이 현존해 있음을 분명히 식별할 수 있을 때 집착으로 인도되는 믿음(Alayab-hinivesa)을 거부하고 부정하게 된다.

 

17. 수행인이 자신의 지어가는 수행을 반성. 숙고. 사려가 깊게(Pati-sankhanu passana) 식별의 능력을 개발하였을 때 수행인은 반성함이 없고 사려가 깊지 못함(Appatisankha)을 거부한다.

 

18. 수행인은 태어나고 죽음에 이르는 수레바퀴의 회전(Vivattanu passana)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음을 식별할 수 있을 때 그는 번뇌로 인하여 태어나고 죽음에 이르는 수레바퀴의 회전으로 향하는 경향(Samyo ghabhinivesa)을 거부하게 된다.

 

열여섯 가지의 위대한 내관적 지혜

1. 몸과 마음의 경험적. 분석적 지혜(Nama-rupa-pariccheda-nana)

마음을 청정히 하는데는 오직 계속적으로 몸이나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관찰을 통해서만 몸과 마음의 자연적 현상을 알 수 있다. 예로서 숨을 들이 쉴 때 가슴이나 아랫배의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진행과정이며 숨을 내쉴 때 가슴이나 아랫배가 꺼지는 것은 또 다른 몸의 사라지는 현상이며 앉고 일어서는 현상도 각기 다른 독립된 현상의 하나인 것이다. 이와 같은 각기 동작을 관찰하여 아는 것은 또 다른 현상으로서 그것을 마음의 동작이라 한다.

 

몸의 이러한 변화현상을 보는 것과 아는 것 그리고 현상 그 자체는 각기 별개의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 몸의 일어남을 마음이 아는 것은 하나의 진행과정이며 몸의 사라짐을 마음이 아는 것 역시 또 다른 진행과정인 것이다.

 

이와 같이 관찰하여 몸의 모든 동작을 마음이 알게 하는 것과 모든 것이 각기 다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생각의 변화, 반사적인 사고방식,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 등을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보고 인식하게 되는 것으로 이것을 자기 자신 몸과 마음의 진실한 모습이라 하면 이를 몸과 마음의 대한 분석적 지혜라 한다.

이와 같이 열심히 관찰하여 관찰하는 마음이 단련되고 성숙되면 호흡이 순간에 몸에 일어나는 현상이 있게 되고 이 현상을 알게 되는 마음이라는 기능이 있을 뿐이며 숨을 내쉴 때 역시 사라지는 현상과 그것을 알게 되는 마음이라는 기능이 있을 뿐이며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진행과정에 남녀, 너나가 분리되지 못하며 다만 숨을 쉬는 몸의 기능에 그것을 알고 있는 마음의 두 기능뿐인 것을 점검 확인한다.

이것을 청정한 견해 혹은 바른 견해라 한다.

 

2. 원인과 결과를 식별하는 지혜(Paccaya-parigaha-nana)

청정한 견해가 성숙되어감에 따라 몸의 동작에는 반드시 마음의 명령에 의해서만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식별하는가? 팔을 펴겠다고 생각이 먼저 있고 그 생각의 명령에 따라 사실상 몸의 팔이 펴지는 것이 단적인 증거. 예로서 어떤 물체가 존재하고 눈이 그것을 보고서 판단하였을 때 비로소 그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난다. 이는 곧 마음은 조건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깨닫게 한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을 곧 조건에 의해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식별하게 되는 것이다.

 

수행인의 수행이 점차 성숙해지면 다만 몸과 마음의 상호 의존된 조건 속의 진행과정만이 존재할 뿐 사실상 팔을 구부리고 펴는데 있어서나 어떤 육체적 통증을 경험할 때 그것이 나의 통증이 아니요, 내가 구부리고 펴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움직임, 고통을 마음이 인식하고 알아차릴 뿐이지 내가 아프고 내가 인식하는 것이 아닌 단순히 변화되고 조건 속에 나타나는 마음의 명령에 따라 몸이 움직인다는 것 이외에 그 어느 절대자도 이 상황에서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고 이를 식별하는 지혜.

 

3. 현상의 바른 이해에 대한 지혜(Sammasana-nana)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이거나 모든 현상과 움직임에는 처음 시작과 중간, 끝맺음이 있는 것이다. 어떠한 현상이 일어날 때 그 시작과 중간, 끝맺음이 완성되었을 때 비로소 새로운 현상이 시작, 중간, 끝맺음의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다.

 

예로서 통증이 몸에 나타날 때 하나의 통증이 사라진 다음에 새로운 통증이 나타난다든가 걷는데 비유한다면 오른쪽 발이 완전히 들어 옮겨져 땅에 닿았을 때 비로소 왼쪽 발이 움직일 수 있는 것과 같다. 마음의 현상으로 슬픈 생각이 일어났을 때 슬픈 생각을 관찰하면 그 슬픈 생각이 사라진 다음에 또 다른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여러 종류의 통증이나 마음의 느낌 등을 관찰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그 현상의 한계를 분명히 눈으로 보고 느꼈을 때 모든 현상은 계속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의 연속임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4.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의 지혜(Udayavaya-nana)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관찰이 형상되어 갈 때 오직 지금 현재의 몸과 마음의 진행되는 과정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관찰로 수행자의 마음은 매우 광명이 나는 듯 밝고 명확하며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이 기쁨이 수행자 자신을 속이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눈으로 보았듯 밝은 광명과 환희는 곧 자신이 깨달음을 성취하였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즉 ‘아! 나는 이제 수행의 모든 일을 해 마쳤다. 나는 이제 으뜸가는 깨달음을 성취하였다’라는 큰 잘못을 범하게 된다. 그러나 수행자의 위의 사실에 대해 깨달음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서 보게 되면 그에게도 분명히 자신의 몸과 마음에 일어나고 사라진 현상을 매우 명확하게 본 사람이 되어 도가 아닌 것을 도(Magga)로 착각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도와 도의 아님을 분별하는 안목을 갖게 된다.

 

5. 사라짐의 지혜(Bhanga-nana)

몸과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각기 부분적으로 보아서 이제 방금 일어난 것은 즉시 사라지는 현상임을 아는 것으로 이의 현상관찰이 성숙되어짐에 따라 더욱 예리해지고 강하며 빠른 것을 보게 된다. 무엇이나 일어났으면 사라지는 것으로 잠시도 멈춤이 없이 계속되는 현상으로 일어나서 사라지고 흩어지고 다시 다른 형태로 일어났다 즉시 사라지는 것.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항상 흐르고 변화되고 사라지며 없어진다. 그것만큼 또 생겨나되 계속하여 다시 사라지는 것. 마치 억수로 쏟아지는 빗속에 빗물에 의해서 생겨나는 물거품이 사라지고 생겨나되 같은 것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것은 사라지고 새 것이 생겨나고 또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것으로 자신의 마음과 몸의 모든 현상도 이와 같이 분명하게 일어난 것은 반드시 사라져 버림이 하나의 쌍으로 계속되어지고 인간의 여섯 감각 기관을 통하여 나타나며 여섯 인식기능에 의해서 인식되어 다시 사라진 현상을 보는 지혜.

 

6. 두려움의 인식에 대한 지혜(Bhayatupatthana-nana)

사라짐에 대한 지혜가 성숙되어갈 때 주관과 객관의 모든 것은 곧 일어났으면 사라지는 현상임을 깨달았을 때 그것은 참으로 영원성이 없고 좋아할 수 없으며 차라리 두려운 존재로서 느껴진다. 모든 조건지어진 것들은 이와 같이 일어나고 사라짐의 연속임을 두려움으로 보았을 때 과거와 미래도 이처럼 계속 일어나고 사라짐의 연속임을 깨닫게 되고 두려움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은 지혜를 두려움의 인식에 대한 지혜라 한다.

 

7. 고통(Dukka)의 지혜(고통 있음의 지혜/Adinavanu-nana)

모든 현상의 오직 일어나고 사라짐에 대한 관찰은 곧 아무것도 영원함이 없음을 깨닫게 하고 그 깨달음은 또한 큰 공포감을 갖게 해주며 이 공포감이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끊임없이 관찰할 때 수행인에게는 고통의 존재(둑카)의 명백함에 대한 지혜가 나타나게 되고 이 둑카로 인한 생의 존재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어 더 이상 태어남을 원하지 않게 되고 생에 대한 애착과 집착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마음을 갖게 해주는 것으로 이를 둑카의 지혜라 한다.

 

8. 혐오감이 있음을 깨닫는 지혜(Nibbindanu-nana)

모든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 속에 몸과 마음은 둑카의 연속이며 이 둑카속에서 어떠한 기쁨도 찾을 수 없으며 다만 그 사실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된다. 이 상황에서 마음은 만족함에 이르지 못하고 더욱 열심히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관찰에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수행이 만족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에도 역시 혐오감 혹은 인생에 대한 싫증을 갖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닙바나를 향한 강한 열망을 일으키게 되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관찰에 의한 지속적인 마음의 집중력만이 마음은 고요해지고 평화로워 행복감을 갖게 해주는 것임을 아는 지혜.

 

9. 해탈을 이루려는 마음의 지혜(Muncitukamayata-nana)

모든 현상관찰에 대한 지혜가 성숙되어감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의 현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즉 해탈에 이르고자 하는 욕망을 일으키게 되고 이에 관련된 마음의 상태를 해탈을 이루려는 지혜라 한다. 이때에 몸에서도 갖가지 고통스러운 현상이 나타나게 되고 이 고통 속에 오래도록 앉아 있고 싶지 않아 자세를 자주 바꾸게 되며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게 되며 인생 자체가 너무도 고통스러워 어서 속히 중생의 윤회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며 모든 태어나는 형상에 애착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 모양으로부터 자유로운 해탈을 이루고자 한다. 그리고 다시는 태어남을 원하지 않는 지혜.

 

10. 다시 살펴보는 지혜(Patisankha-nana)

어서 속히 해탈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더욱 강한 노력을 통해 다시 살펴보고 결심을 더욱 강하게 굳히는 지혜로서 다시 한번 더 살펴보고 다시 한번 더 관찰하며 제행의 무상과 일체개고 제법무아를 다시 점검해보는 지혜를 의미한다. 이들 세 가지 특성 가운데서도 특히 둑카(고통)에 대한 특성을 다시 한번 회고해보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통증과 괴로움을 예리하고 심각하게 아픈 현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어떤 때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견디기 어려운 지경까지 가는 질병 속을 헤매이게도 된다. 이때에도 자연히 불안 초조해지고 일정기간을 앉아서나 어떤 자세로도 견디기 어렵게 한다. 이때에 통증과 괴로움의 현상을 정확하고 분명히 계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참고 견디면 갑자기 그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은 사라지게 된다. 이와 같이 참고 견디면서 고통의 현상을 자세히 관찰할 때 이를 극복하게 되는 것이며 초조와 불안을 극복하게 된다.

 

이와 같이 세 가지 특성을 관찰을 통하여 빠르게 변화되는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을 다시 살펴보는 지혜라고 한다.

 

11. 형태, 구성에 관한 평등의 지혜(Sankharupekkha-nana)

수행자가 자신의 수행에 대하여 다시 살펴보는 지혜가 성숙해지면 몸과 마음에 대한 두 기능의 관찰이 아주 자연스럽게 계속적으로 이루어져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것을 스스로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구성에 관한 평등의 지혜라고도 한다.

 

이러한 경지에서 호흡에 대한 관찰이 특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애써 관찰하려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마치 소가 끄는 수레가 스스로 따라가듯 한 순간의 호흡이라도 마음의 관찰이 함께 하게 되면서 어떠한 호흡이라도 그것이 가늘고 섬세하더라도 놓침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내적인 변화에 대한 지혜가 열리고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내부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어떠한 구성과 형태라 하더라도 그것이 곧 사라지는 것을 분명히 보았기 때문이며 사라진 것은 다른 형태로 구성되며 다시 나타남을 보았기 때문이다.

 

수행자에게 어떠한 감정적 슬픔, 괴로움이 나타난다 하여도 그것이 수행인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게 되는 것은 어떠한 것이라도 일어난 것은 곧 사라지는 진리를 분명히 체험했기 때문에 정신적, 심리적으로 사실상 어떠한 고통이나 슬픔 등이 존재하지 않은 것과 같은 상태가 되므로 마음으로 육체적 형태나 조건에 따라 차이를 갖지 않게 된다. 청정도론(붇다고사 마하레라 저술)에 의하면 “일어남에 대한 두려움과 기쁨, 사라짐에 대한 슬픔과 불안을 모두 던져버린 자는 어떠한 심리적, 육체적 형태나 구성에 있어서 개입되지 않으며 중립적이 되기 때문에 평등하고 평화롭다”라고 표현하였다.

 

12. 적응 내관의 지혜(Anuroma-nana)

적응 혹은 내관의 지혜는 마음과 몸의 관계 내지 현상 관찰을 통하여 자연적 성품을 보게 되며 고통의 존재, 고통(둑카 Dukkha)의 원인, 고통의 소멸, 고통의 소멸로 인도하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을 깨닫게 하여 완전한 지혜가 나게 한다. 적응 내관의 지혜는 앞선 11번보다도 훨씬 깊이 있고 강한 것으로 닙바나 담마를 경험하게 해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러한 법의 힘 때문에 중생 모두의 위치에서 물러섬이 없는 법에 대한 확신의 경계에 들어가게 해준다.

 

법에 대한 확신은 신심을 더욱 강하게 하며 내적 지혜가 일어나 일체의 모든 존재는 그것들이 생명이 있거나 없거나 일어나면 사라지는 진리에 있어서 하등의 차별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렇기 때문에 이 부분을 집착을 떠난 갈애와 욕망을 떠난 지혜라고 하며(아땀마야따- 욕망의 반대, 갈애의 사라짐) 세간의 얽매임에서 벗어나 닙바나의 길에 이른 상태라고도 한다.(웃하나가미니-위빠싸나 내관으로부터 향상 하여 간다)

 

13. 청정 지혜와 견해의 향상 지혜(Gottarabhu-nana)

이 길은 성스러운 도(道) 즉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에 이르는 네가지 성인의 길이기도 하다. 여기 네 갈래의 성인의 길은 앞서 진행된 1-12번까지를 물질과 비물질, 몸과 마음의 현상 관계를 깨닫는 세간적 지혜라 하며 13번부터는 닙바나가 수행의 목적이며 세간을 초월한 지혜이며 위치이기에 출세간의 법이라고도 한다. 수행인의 수행 결과가 이 위치에만 이른다 하여도 더 이상 혼미와 끝없는 윤회 속의 방황은 진행되지 않게 되며 금생 내지는 다음 몇 생에서 깨달음을 성취하게 되는 확정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혜는 아직 완전한 번뇌의 타파라 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완성시켰다고 하지 않는다.

 

14. 도(道)의 지혜(Magga-nana)

이 도의 지혜 또한 도심(道心) magga-citta)이라고도 하며 이는 13번(고따라부 청정 지혜, 견해의 향상)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수행인의 목표도 역시 13번처럼 닙바나가 목적이되 여기에서는 번뇌를 완전히 다스려 더 이상 번뇌의 영향을 받지 않되 육근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감으로서 마음과 대상은 닙바나며 곧 세간을 초월하는(Lokkuttara) 경지이다.

 

네 가지 도심이 갖추어지며 첫 번째 도심이 수다원 도를 이루게 하고 이는 상당히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진다. 그렇지만 이 한순간적 일지라도 그 힘이 대단하여 생노병사의 윤회를 일곱 번 이상 받도록 하지 않는다. 이러한 힘 때문에 이 지혜를 참정견(Sammaditthi)이라고 부른다. 수행인의 도심이 처음 일어날 때 수다원 도의 성취자라 하며 계속 노력하면 첫 번째 도심의 성취자를 부처성자(Ariya pugghala)라고 부른다. 또한 세간을 초월하는 선(Lokkuttara-kusala)이라고도 한다.

 

15. 과(果)의 지혜(Phala-nana)

도심의 지혜에서 닙바나가 목적이 되면서 번뇌를 더욱 강하게 다스려 과심(果心 Phala-citta)이 일어나고 수행의 깊이가 더욱 심오해 짐을 느끼게 된다.

 

도심의 결과로 얻어진 과심을 초세간적 결과라고도 한다. 여기에서 수다원과 라고도 하며 수행의 입지가 확고부동하여 어떠한 외부의 압력이나 유혹에도 빠짐이 없고 스스로도 물러섬이 없게 되는 제1단계의 성자(聖者)라고 한다.

 

이 확고한 입지는 생사윤회의 흐름 속에서 일곱 번 이상 넘어가지 않으며 금생 내지 다음 생이라도 해탈을 성취할 수 있게 되며 법을 가르치는 스승으로서도 체험적이기에 배우는 자에게도 똑같은 결과를 줄 수 있다.

 

16. 회광반조의 지혜(Paccavekkhana-nana)

여기 지혜에서는 앞서 해온 모든 수행에 관한 것과 함께 다섯 가지에 대한 회상을 하는 것이다.

 

1) 도의 지혜(14번 째)

2) 과의 지혜(15번 째)

3) 닙바나에 대한 것(자신의 체험에 대한 재점검)

4) 모든 번뇌가 다스려졌던 것

5) 번뇌의 일어나고 사라짐

 

위의 지혜는 과의 지혜에 의해서 이루어지며 마음이 세간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닙바나를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나 이 지혜에 이르러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를 성취했을 경우 사카 혹은 아리야(Sakha or Ariya-puggala)라고 하고 성자(聖者)라고도 부른다.

 

수행인의 회광반조 지혜는 14번과 15번과 다소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14번과 15번의 도와 과는 닙바나가 목적이요 대상이며 현재 진행이나 16번 회광반조는 현재가 아니라 지난 것의 반조이기 때문이며 시간적으로 과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세간적인 데서 다시 세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수행인에게 다시 태어나게 하는 몇 가지 매인 것

 

1) 자아(自我)에 대한 삿된 견해. 즉 ‘나’라는 것은 영원하게 존재한다는 것

2)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의심

3) 종교의식에 대한 집착, 즉 종교의식을 통하여 죄를 용서받고 신의 은총을 입는다는 것

4) 감각적 쾌락의 집착

5) 증오, 악심, 원한심

6) 물질적 존재에 대한 욕망(色界)

7) 非물질적 존재에 대한 욕망(無色界)

8) 교만, 자만

9) 초조, 불안

10) 무명 무지(無名,無知) 즉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무지와 인과응보의 존재에 대한 무지 등.

 

가) 수다원과를 이룰 때 처음 1,2,3번을 완전히 다스려 제거됨. 수행인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자세히 관찰할 때 이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음을 확실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며 부처님의 가르치심은 매우 현실적으로서 누구나 조사하여 확인할 수 있고 스승과 제자 관계도 수평적이지 수직적인 것이 아니며 결과는 즉시 나타남. 수행의 진행과정이나 성격상 종교의식이 관련되지 않으며 의식을 통하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진리를 본다든지 제행의 무상이나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진리를 볼 수 있거나 깨달을 수 없음을 확실히 알기 때문이며 이 수준에서 수행을 중지한다 해도 일곱 번 이상의 생사윤회는 받지 않으며 태어날 적마다 네 군데 낮은 곳(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에는 가지 않으며 천상과 인간계에서 왕래하다가 다시 수행법을 만나서 수행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나) 사다함과를 이루게 되면 4번과 5번을 약하게 만든다.

즉 모든 감각적 고통이나 즐거움도 한순간의 작용에 불과함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마음을 더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며 증오나 원한심도 곧 사라지게 하여 작용을 진행시키지 않는다.

 

다) 아나함과의 수행자로 4번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1,2,3,4,5) 그리고 이 사바세계에 다시 태어남이 없으며 생명이 다해서 천상에 태어나면서 빠리닙바나를 성취하여 생사윤회를 완전히 끊어 버린다.

 

라) 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은 위의 열 가지 모두를 완전히 파괴하여 더 이상 어떠한 외부적 영향을 받음 없으며 금생에서 완전히 빠리닙바나를 성취하게 된다. 아라한은 생명이 남아있는 동안 수행과 포교로서 자신의 수행결과를 여러 중생과 나누며 다른 이들을 닙바나의 길에 이르도록 인도한다.

 

불교의 깨달음은 곧 자기 인격의 완성이며 동시에 사회에 대한 기여와 헌신의 회상급에 속한다. 자아에 대한 관념이나 생에 대한 애착, 미련, 집착을 모두 떠난 무소유, 무집착과 절대 평등의 체험적 진리의 결과이기에 진정 헌신적 봉사와 사랑을 사회에 베풀게 된다.

 

자신의 인격이 완성되지 못하고 소유와 집착에 얽매인 사람들이 얼마만큼 진실하게 자기희생과 봉사, 사랑을 사회에 베풀 수 있겠는가!

 

위와 같은 열여덟 가지 내적 현상관찰과 열여섯 가지의 위대한 내관적 지혜를 개발하면서 자기 수행의 체크 포인트로 삼아 나갈 때 잘못된 길을 가지 못하고 잘못된 판단 아래 스스로를 함정에 밀어 넣거나 착각하여 중도에 멈추어 완전한 깨달음을 지연시키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수행인은 자신의 수행에 대해서만은 순수하고 솔직해야만 자기에게 이익됨이 있고 비로소 남을 돕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수행의 방향을 잡지 못했으며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남을 지도한다고 섣불리 나서며 새로 배우려는 수행자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 할 것인가. 봉사는 봉사를 끌고 웅덩이로 빠질 수 있으며 눈을 뜬 사람은 봉사를 따라가지 않는다. 불교의 수행은 무명에 가린 봉사와 같은 위치에서 지혜로 눈을 떠 밝은 빛을 본 사람이기에 다른 사람들을 밝고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의 진정한 자비는 모든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실상을 바로 깨닫고 힘써 노력하여 태어남과 죽음의 수레바퀴에서 속히 벗어나게 하는데 근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속히 위빠싸나 수행을 열심히 하며 스스로 무엇이 태어남이며 무엇이 죽음인가? 를 깨닫고 다시는 그와 같은 엄청난 불행의 수레바퀴 톱니에 물림이 없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위빠싸나 수행은 관념적 사고의 유추가 아니라 실상의 원인과 결과의 분석이며, 그 원인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버리는 참으로 각자의, 즉 깨달음의 길인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방황하여 윤회의 수레바퀴에 맞물려 버리면 그때는 언제 다시 풀려나게 되려는가 기약을 할 수가 없는 엄청난 세월 속을 표류하게 될 것이므로, 뜻을 세운 수행자들은 참으로 경각심을 가지고 금생에 이 엄청난 문제를 해결하도록 자신을 가다듬고 생사해탈의 대자유를 성취해야 할 것이다.

 

 

♣거해스님의 깨달음의 길의 옮기기를 마치며...

거해스님을 친견한 적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지만 이 글을 옮기면서 스님의 자상함을 언제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쉬운 예를 들며 이해를 도우려 하신 노력과 어려운 문법과 한자를 쓰지 않으시고 보편적으로 어느 누구든지 읽어 이해를 쉽게 하시려고 한 넓은 자비의 마음이 옮기면서 꼭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 듯 했습니다.

언제 인연이 되면 꼭 한번 친견을 할 수 있기를 갈망합니다.

 

이 글을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독수리 타법에다가 본인의 게으름에 많은 갑갑함을 느꼈을 겁니다.

사죄를 드립니다.

 

이 글을 대하는 모든 이들이 안락하고 행복하고 평화로우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춥고 차디찬 길거리에서 고통받으며 헐벗고 굶주리고 있는 많은 노숙자들이 그 고통에서 벗어 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원일 합장

 

 

[참고 글]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보았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만나려 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붓다라고 부른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안다고 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염(念)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寺와 僧을 통해서만 만나려 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기도와 염불과 염주속에서만 찾으려 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친견하고 싶어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고통과 절망속에서만 찾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마음속에서 찾으려 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의미 부여하려 애쓴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사물에서 찾으려 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美體에서 찾으려 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꿈꾼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유신론화 한다.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날마다 붓다를 피해서만 간다.

 

중도(中道)

(아잔차 스님의 "고요한 숲속의 연못" 中에서...)

한편으로 욕망과 탐닉, 또 한편으론 공포와 혐오를 따르는 것은 어느 쪽도 부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다만 즐거움을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알아차리라는 것이다.

성냄과 공포와 불만은 수행자가 따르는 길이 아니라 세속인의 길이다. 마음을 평정시킨 사람은 한편으로 집착을 놓고 또 한편 공포와 혐오를 버려 바른 수행 길, 중도를 택한다.

수행의 길을 택한 사람은 마땅히 중도(中道)를 따라야 한다.

"쾌락이나 고통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으련다. 그 따위 것들은 다 내어버리겠다"는 결심으로.

물론 처음엔 힘들다.

 

그것은 마치 양쪽 발길에 채이는 것과 같다. 마치 소방울이나 시계추처럼 앞뒤로 얻어맞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처음 법의 바퀴를 굴릴 때부터 바로 이와 같은 양쪽 극단에 관해 설하셨다. 왜냐하면 집착이 발붙일 곳은 이 두 극단이기 때문이다. 행복해 지고 싶은 갈망이 발길질을 하면 또 한쪽에서 고통과 불만이 걷어찬다. 언제나 양쪽이 우리를 공격한다. 그러나 그대가 중도를 걷게 되면 양쪽을 다 놓아 버릴 수 있다.

이 같은 양극단을 따르게 되면 인내심이나 자제력이라곤 찾아 볼 수 없게 되어 그저 화가 나면 휘두르고 마음에 끌리면 움켜쥐려 들게 된다.

그렇지 아니한가?

 

도대체 이런 올가미에 갇혀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는가? 이 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라. 사람은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되면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는 즉시 그 뒤를 쫓아간다. 그러나 실상 그 마음은 고(苦)를 구하는 쪽으로 사람을 끌고 가고 있을 뿐이다. 욕망에 끄달리는 이 마음은 참으로 영리하다.

다음으로 그대가 끌려가는 곳은 어느 쪽일까?

 

극단을 놓는 수행을 잠시도 쉬지 말라고 부처님은 가르치신다. 이것이 팔정도를 올바로 수행하는 길이며 태어남(生)과 익어감(有)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다. 이 길을 걸으면 즐거움(樂)도 없고 고통(苦)도 없으며,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다.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갈애에 넘쳐 즐거움을 추구하다가 구도자가 밟아야 할 길, 여래께서 밝히신 이 팔정도를 놓치고 중도(中道)를 지나쳐 버리다니! 태어남(生)과 익어감(有), 행복과 고통, 선과 악에 끄달리는 사람, 곧 중도를 걷지 않는 사람은 현자(賢者)가 될 수 없고, 자유(解脫)를 얻을 수 없다.

 

이 팔정도는 틀림없는 길이고, 들뜸과 슬픔을 극복한, 평온과 순수지의 길이다. 만약 그대의 마음이 이와 같다면, 더 이상 남에게 공부 길을 묻지 않아도 된다.

 

정신과 마음이 모든 것에서 홀가분하게 떨어져 나오면 그 마음은 평상심(平常心)에 머물게 된다. 가지각색 생각과 느낌들로 인해 평상심을 놓치고 흔들릴 때, 생각의 틀짓기가 시작되고 그 틀 속에 망상이 생겨난다. 이 같은 진행과정을 보는 법을 배우라. 마음이 평상심을 벗어나 흔들리게 되면, 올바른 수행길을 벗어나, 쾌락과 탐닉과 증오라는 어느 한 쪽 극단으로 넘어가 더 많은 생각의 틀을 짓게 된다.

 

선이든 악이든 하나같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것들이다. 설사 그대가 끊임없이 마음 지켜보는 일을 평생 화두로 삼는다 해도 결코 싫증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출처 : 담마푸자나
글쓴이 : 담마푸자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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