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식사상
목차
유식사상 - 1. 唯識의 의미
유식사상 - 2. 唯識無境의 논증
유식사상 - 3. 인식의 구조 - ⑴ 주관과 객관
유식사상 - 3. 인식의 구조 - ⑵ 識一元論
유식사상 - 3. 인식의 구조 - ⑶ 식의 四分說
유식사상 - 3. 인식의 구조 - ⑷ 8識
유식사상 - 3. 인식의 구조 - ⑸ 阿賴耶識緣起
유식사상 - 4. 아뢰야식 - ⑴ 아뢰야식의 의미
유식사상 - 4. 아뢰야식 - ⑵ 종자의 기능
유식사상 - 4. 아뢰야식 - ⑶ 아뢰야식의 대상
유식사상 - 4. 아뢰야식 - ⑷ 아뢰야식에 언제나 동반하는 다섯 가지 심작용
유식사상 - 4. 아뢰야식 - ⑸ 無覆無記인 아뢰야식
유식사상 - 4. 아뢰야식 - ⑹ 아뢰야식의 相續
유식사상 - 4. 아뢰야식 - ⑺ 아뢰야식의 소멸
유식사상 - 5. 말라식 - ⑴ 자아의식
유시사상 - 5. 말라식 - ⑵ 四煩惱
유식사상 - 5. 말라식 - ⑶ 말라식에 동반하는 심작용
유식사상 - 5. 말라식 - ⑷ 말라식의 소멸
유식사상 - 6. 了別識 - ⑴ 六識
유식사상 - 6. 了別識 - ⑵ 마음의 가치적 분류
유식사상 - 6. 了別識 - ⑶ 육식에 동반하는 심작용
유식사상 - 6. 了別識 - ⑷ 육식의 感受作用
유식사상 - 7. 유식학의 목적
유식사상
1. 唯識의 의미
부산대/김태완
唯識은 싼쓰끄리뜨어로 vij apti-m tra이다. 이 용어가 가장 먼저 사용된 곳은 『解深密經』'分別瑜伽品'인데,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미륵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毘鉢舍那三摩地 중에서의 影像은 이 마음과 같은 것입니까? 다른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 둘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영상은 오직 識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식의 대상(所緣)은 오직 식이 顯現한 것이다.1) 毘鉢舍那(vipasyana, 觀)는 요가(yoga) 실천법의 한 종류이다. 이처럼 요가 실천의 체험을 묘사하는 가운데 唯識(vij apti-m tra)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타난다. 이로써 본다면, "요가를 닦는 마음 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影像은 다만 識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체험이 바로 唯識說을 형성한 배경이 됨을 알 수 있다. 유식설을 받드는 사람들은 '요가를 실천하는 사람'(yogacara, 瑜伽師)라고 불리었다. 또 그들 학파를 瑜伽行派라고 한다. 요가는 믿음(信), 의욕(欲), 精進, 方便의 4가지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가운데 방편에 또 4가지가 있는데, 그 맨 끝이 奢摩他(samatha, 止)와 毘鉢舍那(vipasyana, 觀)라는 수행법이다. "요가를 닦는 마음 속에 나타나는 갖가지 影像은 다만 識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자각은 毘鉢舍那 觀法을 실천하는 가운데 직접 체험한 것이었다.
唯識은갖추어 말하면 唯識無境이다. 오직 識의 존재만을 인정하고 대상(境)의 존재는 부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境은 싼쓰끄리뜨어로 artha 또는 visaya로서 마음을 벗어나 외부에 존재하는 인식대상을 의미한다. 識은 vijnapti로서 우리의 마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유식무경이란 말은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 뿐이고 마음 밖에 대상으로서의 사물은 그 존재를 부정하는 唯心論이다.
불교는본래 유심론적인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초기에는 자기의 마음을 변화시킴으로써 자기존재가 변혁된다고 하는 정도로서, 말하자면 실천적인 유심론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기 자신과 대상에 대한 집착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는 관점에서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와 외부세계가 모두 空하다고 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론적인 관점에서는 자기 존재를 구성하는 五蘊과 외부세계의 존재를 인정했다고 보여진다. 部派佛敎 특히 說一切有部의 아비달마사상은 '삼세실유 법체항유'라는 말로 대표되듯이,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기본적인 요소(法)는 실재한다'는 입장이다. 이 입장에서는 自我를 여러 요소들의 인연에 따른 구성물이라고 보고서 단일하고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자아의 실재를 부정하지만, 자아와 사물의 구성요소인 법의 존재는 인정하고 있으므로 마음 바깥에 대상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般若經에 입각한 中觀學派는 아비달마의 이러한 法實在論에 반대하여 法無自性說을 주창하고, 緣起法 → 無自性 → 空의 논리를 확립했다.
유식사상도기본적으로는 中觀派와 같은 선상에 있다. 유식사상은 緣起法 곧 현상적인 존재를 '활동적인 식'과 '식에 의해 개념적으로 인식된 것'의 두 가지로 분류하고, 후자를 부정함으로써 法無自性 즉 法無我를 논증하고자 한다. '활동적인 식'은 갖가지 대상을 구체적으로 감각·지각·사고하는 마음작용 즉 식이다. '식에 의해 개념적으로 인식된 것'이란 외계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인식대상이다. 바로 이 인식대상인 법의 존재를 부정함으로써 法無我를 주장한 점이 유식사상에서 無我說의 특색이다.
『瑜伽論』제46권 '本地分菩薩地'에서는 法無我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法無我性이란 언어로 표현하는 모든 사물에 대해서 言說自性의 法이 존재하지 않음을 말한다.2) 법무아로서 부정되는 것은 언설자성의 법이다. 언어를 본성으로 하는 사물이다. 언어에 의해 인식된 사물이다. 사물은 말을 부여받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으로 변화한다. 인식작용에서 지각표상을 언어로 인식하는 것은 동시에 지각표상을 마음 밖에 있는 것이라고 추상화하여 외적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식사상은 이런 언어에 의한 관념의 추상화 내지는 外化의 허망성을 강하게 주장한다. 어디까지나 존재하는 것은 관념·언어 뿐이며 그에 상응하는 외적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유식사상이 우선적으로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은 '인식대상'이며, '식에 의해 개념적으로 인식된 것'이며, '언어를 본성으로 하는 사물'이다. 술어로 표현 하면 '言說自性의 法'이며 ' 計所執自性의 法'이며 '唯識無境에서의 境'이다. 이때 대상(境)이란 표상(관념)과 언어가 결합하여 그 표상이 사물로서 外在化된 것이다.
外境즉 외부의 사물은 구체적으로는 6식의 인식 대상인 빛깔과 형태(色)·소리(聲)·냄새(香)·맛(味)·촉감(觸)·法의 6가지이다. 이 6가지를 외경(artha)이라는 한 단어 속에 총괄하고, 그 비존재성을 강조한 것이 世親의 『唯識二十論』이다. 그는 존재를 識(vijnapti)과 外境(artha)으로 이분화 하고, 전자의 존재성과 후자의 비존재성을 여러 관점에서 논증한다. 그런데 유식무경이라는 표현이 처음 사용되고 있는 곳은 無著의 『攝大乘論』이라고 인정된다. 거기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이들 모든 식은 대상이 없으므로 唯識이다.3)
결국 대상은 아무것도 존재하는 것이 없고, 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때 識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阿賴耶識 또는 8가지의 식(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末那識·阿賴耶識)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아뢰야식 또는 8가지 식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존재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이다. 아뢰야식이라는 용어로써 우리의 근원적인 마음을 나타내고자 한 최초의 경전은 『大乘阿毘達磨經』과 『解深密經』이다. 그런데 『해심밀경』에서 보면, 아뢰야식 내지 모든 식의 존재는 궁극적으로는 부정되어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식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익과 안락을 얻도록 世俗諦의 영역에서 心意識을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의 세계 즉 勝義諦의 영역에서는 식의 존재성도 부정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유식사상은 본질적으로 般若空 사상을 계승함과 동시에 非有非無의 中道의 입장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부정되므로 心意識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임시로 세워지는(假說) 것이다. 심의식 이외에 존재하는 것은 없다. 우리는 심의식을 점차 질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진리에 접근하고, 궁극적으로는 진리 그 자체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유일한 수단 방편인 심의식의 본질을 밝히고, 그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가 '계층적인 심의식의 구조론'이며, 그 바탕이 되는 '아뢰야식설'이다. 궁극적으로는 심의식의 존재가 부정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수행의 최종 결과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수행의 과정에서는 먼저 심의식이 존재한다는 입장에 서서 그 현실적인 진상의 해명을 게을리해서는 않된다.
이런면에서 본다면 유가행파의 존재관은 기본적으로 상대적이다. 중광학파는 '일체법은 모두 자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가행파는 중관학파의 존재론에 반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물론 모든 법의 자성은 없다. 그러나 일체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다.
4)
유식사상에서는 일체가 결정적으로 존재한다거나 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모두가 극단적인 견해라고 배격한다. 그리하여 있는 것도 아니고 업ㅅ는 것도 아닌(非有非無) 中道를 취한다. 이러한 중도(madhyama pratipad)야 말로 유나 무의 극단적인 견해를 떠나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이 유나 무의 개념을 떠난 사실 그 자체를 眞如, 勝義, 法性, 또는 離言自性 등으로 부른다. 또 이러한 유무를 초월한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도달하는 길을 離言中道라고도 한다. 그것은 언어로는 표현되지 않는 초논리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유가행파에서는 이러한 논리를 초월한 체험의 세계를 임시방편의 假說을 세워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한 방편설 가운데 하나가 三自性說과 三性對望의 중도설이다. 그 기본적인 논리는 다음의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依他起自性(虛妄分別) 計所執自性(인식대상)의 無
......................................圓成實自性(無分別知)의有
②변계소집자성의 무
의타기자성과 원성실자성의 유
③변계소집자성의 무
의타기자성의 유
여기서 의타기자성은 唯識無境이라고 할 때의 識(vijnapti)이다. 허망분별(abhuta-parikalpa)이라고도 한다. 어느경우에나 有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유가행파는 왜 식에 존재성을 부여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언어에 의한 개념적인 사고가 행해지는 것을 중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변계소집자성이란마음 속에 일어나는 관념에 언어가 부여되고, 그 언어에 대응하여 마음 밖에서 실재한다고 하는 사물이다. 이러한 마음 밖의 사물은 그 존재성이 부정된다.
유식사상에서는사물이 생성되는 원동력으로서 크게 인연과 분별 두 가지를 든다. 인연에 의하여 생긴 것을 의타기자성이라고 부르고, 분별에 의해 생긴 것을 변계소집자성이라고 한다. 변계소집자성은 의타기자성을 근거로 하고, 분별이라는 내적인 동인에 의하여 생긴다. 변계소집자성이나 의타기자성이나 모두 식이다. 따라서 허망분별의 식인 의타기자성은 우리의 경험인 식으로서 늘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 밖에 식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존재한다고 하는 변계소집자성은 그 존재성이 부정된다. 『成唯識論』에 변계소집자성을 外境, 의타기자성을 內識이라하여, 중도의 이치를 다음처럼 설하고 있다. 외계 사물(외경)은 마음을 따라 시설 된 것이므로, 식처럼 유가 아니다. 식(내식)은 반드시 인연에 의해 생기므로 외계 사물처럼 무가 아니다. 그러므로 유와 무의 두 집착을 떠난다.5)
그런데 우리의 식은 늘 대상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참으로는 그러한 대상은 없고 다만 식뿐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인식은 허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인식을 허망분별이라고 한다. 인식이란 본래 인식주관과 그 대상인 객관의 접촉에 의하여 발생하는 논리적인 구조를 가지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대상인 객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상을 인식한다는 인식행위 자체는 주관의 독자적인 작용일 뿐이다. 이럴 때 인식주관은 없는 객관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므로 인식주관 자체도 진실되지 못하고 허망한 분별에 빠져 있는 것이다. 인식주관 자신이 자신의 이러한 허망한 작용성을 깨달을 때에야 비로소 외계 대상의 비존재를 알고 또 주관 자신의 허망성도 알게 되어서 참된 지혜 즉 무분별지를 얻게 된다. 이러한 무분별지를 얻은 상태를 원성실자성을 본다고 하고, 진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원성실자성이란 식의 허망분별을 간파해서 무분별지를 얻을 수 있는 깨끗한 본성이다. 이러한 본성은 나중에 불성사상과 여래장사상으로 연결된다.
2. 唯識無境의 논증
유식무경의 논증으로서 널리 알려진 것은 사지이다. 즉 다음의 4가지 지혜를 성취한 보살은 유식무경의 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외부의 사물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론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① 相違識相智 --- 같은 사물에 대해서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이 다르면, 그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인식된다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같은 물에 대해서도 餓鬼는 고름이나 피가 가득한 강으로 보고, 물고기는 살아가는 장소로 보며, 또 天人은 보석으로 장식한 땅으로 인식하며, 인간은 깨끗한 물 또는 파도로 보는 등 제각기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약 외적인 사물이 실재한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② 無所緣識現可得智 --- 실재하지 않는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인식이
현실적으로 있음을 아는 지혜이다. 예를 들면 과거나 미래의 일, 꿈 속의 대상, 물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 등은 어느 것도 실재하지 않는데 그것을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③ 應離功用無顚倒智 --- 功用 즉 수행을 하지 않고서도 오류가 없는
無顚倒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잘못임을 아는 지혜이다.
만약 인식대상이 인식되는 것처럼 실재한다면 범부도 진실을 인식하게 되고, 노력 정진하지 않고도 자연히 해탈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④ 隨三智轉智 --- 다음 세가지 지혜를 따라 인식대상이 갖가지 존재로
바뀌는 것을 아는 지혜이다.
ⓐ 自在者의 지혜를 따라 바끤다.
즉 마음에 자재함을 얻은 보살은 하고자 하는 대로,
예를 들면 땅을 물로 변화시킬 수 있다.
ⓑ 관찰자의 지혜를 따라 바뀐다.
止觀을 닦은 요가 수행자가 부처님의 교법을 관찰해서 사색할 때,
대상은 사색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으로 나타난다.
ⓒ 無分別知를 따라 바뀐다.
무분별지가 일어날 때에는 어떤 인식대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만약 인식대상이 독립적이고 자존하는 것으로 실재한다면 ⓐⓑⓒ와 같은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들 세 가지 일은 일으나므로 인식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
3. 인식의 구조
(1) 주관과 객관
인식은 객관과 주관의 이원적인 대립 위에서 성립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불교에서는 대체적으로 마음 곧 주관의 작용을 중시하면서도 인식이 성립하는 제 1 조건으로서 인식대상의 존재를 든다. 이런 견해가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식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유식사상의 '境識俱泯'의 논리를 성립시켰다고 할 것이다. 불교에서 주관과 객관에 상당하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는 다양하다. 그것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주관 > | < 객관 > |
心意識(citta-mano-vijnana) | 境(artha) |
心心所(citta-caitta) | 境(visaya) |
識(vijnana) | 所行(gocara) |
能緣(alambaka) | 所緣(alambana) |
行相(akara) | |
分別(vikalpa) | 所分別(vikalpita) |
能遍計(parikalpa) | 所遍計(parakalpita) |
能取(grahaka) | 所取(grahya) |
⑵ 識一元論
유가행파는 인식대상이 마음 밖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것을 부정하고,인식현상의 실재만을 인정하므로 식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주관과 객관은 모두 동질의 마음 곧 식이다. 주관인 마음이 객관이 된 마음을 대상으로하여 직접 인식한다. 그러나 이 경우 그 객관이 된 마음은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의 모사도 표상도 아니다. 인식의 대상은 식 자체 마음 자체이다라는 주장은 解深密經 分別瑜伽品과 分別瑜伽論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⑶ 식의 四分說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라면, 보는 마음과 보여지는 마음 곧 주관인 마음과 객관인 마음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마음이 주관과 객관으로 이분화되어야 한다. 이런 논리에 따라서 성립한 것이 見分과 相分의 二分說, 여기에 自證分을 더한 三分說, 여기에 또 證自證分을 더한 四分說이다. 이분설을 주장한 이는 無著이며, 삼분설을 주장한 이는 陳那이며, 사분설을 주장한 이는 護法인데, 여기서는 가장 완비된 형태인 호법의 사분설을 살펴보자.호법은 인식을 4부분으로 나누고, 그들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하나의 인식이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그들 4부분을 도시하면 다음과 같다.
'相分'은 識 가운데 사물의 形相(nimitta)을 띈, 말하자면 인식되는 부분으로서 보통 所緣(alambana)이라고 한다.
'相'에 해당하는 싼쓰끄리뜨어nimitta는 원래 사물의 형상과 원인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인식론적으로 보면 어떤 사물의 형상이 눈 앞에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는 지각작용이나 언어작용이 생긴다고 할 수 있다. 곧 객관인 사물의 형상은 주관의 인식작용이나 언어작용을 야기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유가행파는 형상과 원인의 두 가지 뜻을 갖는 nimita를 인식대상의 호칭으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證自證分'은 자증분을 확인하는 부분이다. 견분과 상분의 작용을 확인하는 자증분이 있는 만큼, 그 자증분의 작용을 확인하는 또 하나의 마음작용이요청됨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증자증분을 확인하는 또 다른 마음작용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의 작용을 확인하는 마음작용은 무한소급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증자증분의 작용의 확인은 자증분이 한다고
하는 자증분과 증자증분의 상호확인을 설정하므로써 무한소급에 빠지는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이러한 四分은 眼識에서 아뢰야식까지의 8식 모두에 존재한다. 그러나 사분은 인식의 작용을 개념적으로 4가지로 분리하여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 그 4가지 마음작용의 실체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⑶ 8식
아비달마사상까지는 識에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의 六識을 들었다. 유가행파는 육식 속에 이들 식을 일으키는 근원적인 식으로서 아뢰야식을 발견했다. 이어서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말라식을 상정하여 최종적으로 여덟 가지 식의 존재를 주창하기에 이르렀다. 八識은 아래처럼 세개의 계층으로 나누어진다.
① 六識 :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 ② 七識 : 末那識 ③ 八識 : 阿賴耶識 육식은 感覺知覺과 개념적 認識을 말한다. 육식 가운데 안식에서 신식까지의 다섯을 前五識이라고 한다. 이 다섯 가지는 순수한 감각지각이다. 여섯 번째의 의식은 싼쓰끄리뜨어로 manovijnana인데, 전오식과 명확히 구별되는 심리작용이다.
⑸ 阿賴耶識緣起
경험세계의 내용은 모두 아뢰야식의 습기에 잠재형태로서 내재되어 있다. 아뢰야식은 이처럼 모든 존재(一切諸法)를 일으키는 可能力 즉 種子를 가지고 있으므로 일명 一切種子識(sarvabijakam-vijnanam)이라고도 한다. 어떤 하나의 습기 곧 종자는 과거의 어떤 행위(業)에 의해 세겨진 印象(vasana, 習氣) 또는 이식된 종자(bija)이다. 그것을 이식한 과거의 행위는 종자가 싹이 튼 것이며, 그 종자는 또한 그 이전의 어떤 행위에 의해 이식된 것이다. 이처럼 인과의 사슬은 끝없이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아뢰야식은 언제부터 존재했으며 무엇이 아뢰야식이 존재하게 된 근본 원인인가'라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유가행파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시간적으로는 '無始以來의 熏習', 존재의 근본 원인으로는 '無明'으로써 답한다. '무시이래의 훈습'은 無始(anadi) 곧 시작이 없는 영원한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종자를 아뢰야식에 훈습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아뢰야식을 근원체로하는 마음의 활동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존재해왔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그 활동의 근본 원인을 '無明'(avidya)에서 찾았다. 無明은 어리석음이다. 유식학적으로 말하면 존재의 궁극적인 진실인 眞如(tathata)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와 우주가 전개하는 즉 식이 활동하고 변화하는 근본 원인은 무명이라고 하겠다. 무명을 근본 원인으로 해서 식은 끊임없이 유기적인 순환운동을 계속해 간다. 왜냐하면 현실의 행위가 즉시 그 인상을 아뢰야식에 머물게 하고, 그 인상은 천천히 성숙해서 새로운 다음 행위를 일으키고, 새로운 행위는 또한 그 인상을 바로 아뢰야식에 새기기 때문이다. 즉 '현실의 행위'와 '그 인상'이 서로 인과를 생성하는 관계 위에서 자기와 우주는 존재해 간다. '현실의 행위'와 '그 인상'이라고 할 때, '그 인상'은 종자(bija) 또는 습기(vasana)라고 한다. '현실의 행위'는 현실의 경험적으로서 바로 業(karma)인데, 유식학적으로 말하면 구체적으로 활동하는 모든 식 곧 轉識이다. 이것은 우리의 현실적이고 경험적인 모든 인식활동이다. 유가행파는 인식활동의 본질을 언어에 의한 개념적인 사고로 생각하고, ' 論을 즐기는 것' '名言' '言說'이라고 부른다. 護法은 그것을 現行識으로 총칭 다. 現行(samudacara)은 현실적으로 활동한다는 뜻이다. 마음의 역학적인 구조를 도표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종자로부터 현행식이 발생하는 과정을 '種子生現行'이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等流習氣 곧 名言種子로부터 말라식과 육식이 발생한다. 발생한 현행식의 활동이 다양한 경험세계이다. 현행식의 활동은 찰라찰라마다 발생하고 사라진다. 그것이 활동한 순간 그 작용은 아뢰야식에 종자를 훈습시킨다. 이 과정을 '現行熏種子'라고 한다. 자세히 말하면 말라식과 육식(善·惡·無記)이 등류습기를, 육식 가운데 선과 악의 마음이 異熟習氣를 각각 훈습한다. 훈습된 종자는 아뢰야식 안에서 생장 발달하여 새로운 현행을 일으키는 힘을 갖게 된다. 이 과정을 '種子生種子'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마음 활동은 (현재적인) 종자생현행·현행훈종자· (잠재적인) 종자생종자라는 3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유기적인 순환운동이다. 또 종자생현행과 현행훈종자의 두 과정은 동일한 찰라에 이루어진다. 이것을 옛부터 '三法展轉因果同時'라고 한다. 三法은 種子 → 現行 → 種子를 말한다. 因果同時의 견해는 불교 고유의 刹那生滅說에 근거한다. 찰라생멸설은 어떤 행위(業) - 유식학적으로는 어떤 인식(識) - 는 한 찰라에 생멸한다는 견해이다. 즉 어떤 하나의 인식은 발생과 동시에 종자를 아뢰야식에 심고, 다음 찰라에는 그 인식은 이미 멸하고 없다. 이에 대해 종자생종자의 과정은 '因果異時'라고 한다. 종자도 결국 찰라생멸의 존재에 불과하다. 찰라에 생멸하며 다음 순간 새로운 종자를 발생시킨다. 결국 종자는 차례차례로 異時的으로 새로운 자기를 발생시켜간다. 또 하나의 과정 곧 아뢰야식에서 衆同分이 발생하는 과정이 있다. 이것은 어떤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태어나서 변화하는 과정이다. 자세히 말하면, 명언종자 속의 이숙무기종자가 인연이 되고, 업종자가 증상연이 되어서 다음 세상의 아뢰야식을 형성한다. 이와 같이 일체법이 아뢰야식에서 생기고, 발생한 일체법은 종자를 아뢰야식에 이식시킨다는 현상생성관을 '阿賴耶識緣起'라고 부른다.
그것은 오식과 함께 작용하여 감각을 명료하게 하고, 지각을 일으킨다. 또한 오식과는 독립적으로 언어를 사용한 개념적인 사고를 하기도 한다. 의식은 보통 '分別'(vikalpa)이라고 하며, 사물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잘못된 인식으로서 부정된다. 제7식인 말라식은 아뢰야식을 자아로 잘못 생각하는 自我意識이다. 末那는 manas의 음역이므로, 말라식을 싼쓰끄리뜨어로 還譯하면 제6의식과 마찬가지로 manovijnana가 되는데, 제6의식과 구별하기 위해 세친은 mano nama vijnanam(末那로 불리우는 식) 이라고 표현했다. 我癡·我見·我慢·我愛 등의 四煩惱를 항상 수반하므로 染汚識(klistam manah)이라고도 한다. 제8식인 아뢰야식은 발생면에서도 존재면에서도 근원적인 식이다. 다른 7가지 식을 일으키므로 발생적으로 근원이고, 경험적인 의식영역에 나타나지 않는 심층심리이면서 앞의 7가지 식의 존재를 받쳐주고 있으니 존재면으로 근원적인 식이다. 싼쓰끄리뜨어로는 alaya-vijnana이며, 阿賴耶는 alaya의 음역이다. 阿梨耶로 음역하는 경우도 있다. 의역해서 藏識·宅識이라고 한다. 8식 가운데 아뢰야식을 제외한 7식은 아뢰야식으로부터 轉變(pravartate)하여 생겨나는 것이므로 묶어서 轉識(pravartti-vijnana)이라고 한다. 6식은 꿈 안꾸는 깊은 잠이나 졸도하여 의식이 없는 상태 등에서는 없으므로 있었다 없어졌다하지만, 아뢰야식과 말라식은 깨어있을 때에도 잠자고 있을 때에도 늘 활동한다.
4. 아뢰야식
⑴ 아뢰야식의 의미
阿賴耶는 alaya의 音寫이다. alaya에는 저장하는 곳(藏)이라는 의미와 집착의 대상이라는 의미의 두 의미가 있다. 아뢰야식 속에 모든 과거 행위의 영향이 종자의 형태로 저장되어 있으므로 저장하는 곳이라는 의미가 되며, 제7식인 마라식이 아뢰야식을 自我라고 집착하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된다. 한편 아뢰야식 속에 모든 종자가 들어 있기 때문에 아뢰야식을 '모든 종자를 가진 것(sarva-bijaka) ' 즉 '一切種子識'이라고도 부른다.
⑵ 종자의 기능
종자(bija)란 본래는 식물의 씨앗을 의미하는데, 아뢰야식 속의 '특수한 심적인 힘'(功能差別)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특수한 심적인 힘이란 과거의 業에 의해 아뢰야식에 훈습된 氣分 내지 印象인 習氣를 말하며, 이 습기가 바로 현재와 미래의 모든 현상을 산출하는 가능력 내지 잠재력으로서의 種子이다. 이 종자는 크게 현재의 제현상을 산출하는 종자인 名言種子 혹은 等流習氣와 미래세의 자기를 형성하는 종자인 業種子 혹은 異熟習氣로 나누어 진다. 현재의 제현상을 산출하는 종자를 '명언종자'라고 하는 이유는, 우리의 심적 활동의 본질을 名言 즉 언어를 써서 행하는 개념적 사고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을 포함한 제1식에서 제8식까지의 우리의 모든 심적 활동은, 아뢰야식 속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 즉 습기가 직접원인(因)이 되고, 그것에 간접원인(緣)이 작용하여 생겨난다. 이와 같이 생겨난 심적 활동(業)은 곧 아뢰야식 속에 그 영향을 習氣로 남기고, 그렇게 남겨진 습기는 바로 미래나 현재 행위의 種子가 된다. 이와 같이 모든 識 즉 현상이 심층적 심활동과 표층적 심활동의 상호 인과관계위에서 성립하는 것을 아뢰야식 연기라고 하는데, 아뢰야식 연기는 이미 살펴보았다.
⑶ 아뢰야식의 대상
아뢰야식은 심층심리이기 때문에 일상의식으로는 그 활동을 지각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識인 이상, 주관(akara, 行相, 見分)과 객관(alambana, 所緣, 相分)의 이원적 대립 위에서 어떤 인식작용을 하고 있다.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은 내적으로는 '유지되는 것'(upadana, upatta, 執受)이고, 외적으로는 '장소'(sthana, 處, 器世間)이다. '유지되는 것'에는 육체와 종자가 있다. 감각기관을 불교에서는 根(indriya)이라고 하며, 그런 기관을 가진 육체를 '근을 갖는 신체' 즉 '有根身'이라 부른다. 다시 말해, 지각력과 사고력을 가진 생명체의 신체를 유근신이라 하는 것인데, 인간으로 말하면 '육체'라 불리는 것이다. 이 육체는 마음에 의해 그 기능이 유지된다는 관점에서 육체를 '유지하는 것' 즉 '執受'라 부른다. 유지하는 마음으로서는 초기불교 이래 眼識 내지 意識의 6식이 인정되어 왔는데, 유가행유식파에서는 부단히 활동하는 아뢰야식이야말로 생명의 근원적 維持體라는 것을 발견했다. 아뢰야식은 육체를 형성해냄과 동시에 형성해낸 육체에 내재하여 그것을 생리적으로 유지하면서 한편으로는 그것을 계속하여 인식하고 있다. 또 하나 아뢰야식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 종자이다. 종자는 육체와 달리 아뢰야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뢰야식 속에 내장되어지는 행위의 습기이다. 하지만 아뢰야식과 종자와의 관계를 본다면, 아뢰야식은 종자를 담는 그릇일 뿐으로서 종자가 없다면 아뢰야식도 없게 되는 不一不二의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을 본체라하고 종자를 그 작용이라고 한다. '장소'란 우리가 그 안에서 서식하는 자연계를 말한다. 이것을 하나의 그릇에 비유하여 器世間이라고도 부른다. 외계인 자연계도 물론 식으로서 근본식인 아뢰야식의 종자에 의하여 창조되며, 동시에 아뢰야식의 인식대상이 된다.
⑷ 아뢰야식에 언제나 동반하는 다섯 가지 심작용
아뢰야식에는 다음의 다섯 가지 심작용(五遍行心所)가 언제나 동반한다.
① 觸(sparsa) : 감각기관(根)과 인식대상(境)과 인식주체(識)의 3자가 결합할 때에 최초로 생하는 미세한 심작용이다. 즉 인식대상으로부터의 자극에 의해 감각기관에 변화가 생기고, 그 결과 苦, 樂이라는 감수작용이 일으나는데, 구체적으로 苦樂의 감정이 생기기 이전에 감각기관의 변화에 감촉되어 그 변화를 인지하는 마음의 작용이다.
② 作意(manaskara) : 마음을 구체적으로 활동시키고 마음을 어느 일정한 대상으로 향하게 하는 작용이다.
③ 受(vedana) : 불쾌한 대상을 괴롭다(苦)고 감수하는 작용과 즐거운 대상을 즐겁다(樂)고 감수하는 작용과 불쾌하지도 즐겁지도 않은 대상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不苦不樂)고 감수하는 작용을 말한다. 苦와 樂의 감수작용으로부터 집착이 일으난다. 왜냐하면 불쾌한 대상으로부터는 달아나고 싶고, 즐거운 대상에 대해서는 그것을 언제까지나 유지해 두고자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뢰야식에 동반하는 受는 不苦不樂인 것 즉 捨(upeksa)이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의 인식작용(行相)과 인식대상(所緣)은 지각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것이기 때문이다.
④ 想(samjna) : '이것은 청색이며 황색이 아니다'라는 등의 대상의 특수성 내지 특질을 인지하는 지각작용이다. 바꿔 말하면 감각기관을 통해 얻어진 감각적 소재를 통합하여 하나의 상으로 구체화시키는 작용이다. 대상이 무엇인가를 인지하는 데에는 언어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 상이라는 심작용을 통하여 말이 시작된다. 앞의 수가 정적인 심리작용의 근본이라면, 이 상은 지적인 심리작용의 근본이다. 불교에서는 이 두 가지의 심작용을 특별히 기피한다. 왜냐하면 受가 근본원인이 되어 情的으로 속박되고, 想이 근본원인이 되어 知的으로 속박되어, 윤회를 계속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⑤ 思(cetana) : 구체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의지작용을 말한다. 이 의지작용을 통하여 행위가 선 혹은 악이 된다. 이상의 오편행심소는 아뢰야식과 마찬가지로 다음의 성질을 갖는다.
① 異熟識이다. ② 인식작용(行相)과 인식대상(所緣)은 지각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하다. ③ 어느 하나의 心所는 그 자신 이외의 네 가지 심소 및 아뢰야식과 언제나 함께 작용한다. ④ 번뇌에 덮혀 있지 않으며(無覆),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별되지 않는다(無記).
⑸ 無覆無記인 아뢰야식
아뢰야식은 번뇌에 덮혀 있지 않으며(無覆), 선과 악의 어느 것으로도 기별되지 않는다(無記). 아뢰야식이 無覆(anivrta)라고 하는 것은, 아뢰야식과 함께 작용하는 것은 앞에서 본 五遍行心所뿐인데, 이 다섯 가지 심소는 더러운 마음(煩惱)이 아니기 때문에, 아뢰야식이 더러움으로 덮여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더러움으로 덮여진 것(有覆)은 '해탈에 이르기 위한 성스러운 수행(聖道)'을 방해 하지만, 아뢰야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아뢰야식이 無記(avyakrta)라고 하는 것은, 아뢰야식은 과거의 선한 행위 혹은 악한 행위를 원인으로 해서 今世에 형성된 것으로 그 형성의 원인이 된 선업 혹은 악업은 그 영향력을 모두 소비하여 현세의 아뢰야식에는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뢰야식 그 자체는 함께 작용하는 五遍行心所와 함께 선도 악도 아닌 無記이다. 선업 혹은 악업만이 내세를 결정하는(異熟識을 낳는) 종자를 형성하므로, 아뢰야식 및 함께 작용하는 오편행심소는 선도 악도 아니므로 내세를 결정하는 힘을 갖는 이숙식의 종자를 낳지는 않는다. 8식 가운데 이숙식의 종자를 낳는 것은 6식 까지의 경험세계 내의 善惡業이다
(6)아뢰야식의 상속
아뢰야식은 고정적 실체적인 것이 아니라, 매 찰라마다 멸하고 생하며 相續(samtana, samtati)해가는 찰라멸적인 것이다.
⑺ 아뢰야식의 소멸
아뢰야식이 아뢰야식으로서 계속 활동하고 있는 한 우리는 생사를 반복하면서 계속 윤회해 간다. 따라서 윤회에서 벗어나 해탈하고자 하면 아뢰야식은 수행과정을 통해 멸해져야 한다. 아뢰야식은 아라한위에서 소멸된다. 阿羅漢(arhat)이란 소승에서 설하는 최고 성자의 위치이다. 이 위에서는 더이상 배워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된 배움이 완성되는 자리이기 때문에 '無學'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유식설은 대승이므로, 『성유식론』에 의하면 이 경우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은 성문·독각·보살의 3승을 모두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아라한위에서 아뢰야식이 소멸한다(vyavrtti, 捨)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아뢰야식 속의 잠재적인 악(dausthulya, 序重)이 모두 끊어지는 것을 말한다. '잠재적인 악'이란 번뇌를 일으키는 종자를 가리킨다. 아라한이 되면 그러한 종자가 사라지는데 이것을 두고 아뢰야식이 소멸한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뢰야식이 소멸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존재가 허무로 돌아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것은 단지 마음으로부터 더러움(煩惱)을 생하게 하는 잠재력이 완전히 제거되어 아뢰야식이 이미 아뢰야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러움으로 가득찬 마음(識)이 청정한 마음(智)으로 변한 것이다. 이것을 轉識得智라한다. 아뢰야식에서 더러움을 제거하여 無垢의 상태로 닦아내는 것, 이것이 유가행유식파에서 지향하는 궁극의 목표이다.
5. 말라식 - 자아의식
말라식은 아뢰야식이 전변하여 생하지만, 자기를 산출한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한다. 즉 이 식은 자신의 근원인 아뢰야식을 인식대상으로 삼아 그것을 자아라고 그릇되게 집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라식의 작용은 미세하여 의식의 영역에 나타나지 않으므로 표면식(6식)은 그러한 집착을 의식하고 있지는 않다. 말라식은 표면식에 나타나지는 않으나 표면식이 활동할 때나 멈출 때나 언제나 활동하는 심층심리인 것이다. 말라식은 思量을 본성으로 한다. 사량의 원어 manas는 보통 '意'로 한역 된다. 그러나 세친은 말라식을 '思量이라 불리는 식'(mano-nama-vijnanam)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말라식을 mano-vijnana라고 할 경우 意識과 구별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량은 단순히 '생각하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것은 생사윤회하는 한 언제나 그리고 깊이 아뢰야식을 자기라고 간주하면서 계속하여 집착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항상 활동하고 있는 확고하고 철저한 자아의식이다. 우리가 개념적으로 자기라고 인식하는 작용은 그런 심층적 자아집착심의 반영이다.
⑵ 四煩惱
아뢰야식은 無覆無記이지만, 말라식은 有覆無記(nivrtayyakrta)이다. 즉 선이나 악으로 기별되지는 않지만, 더러움(煩惱)으로 덮혀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여, 말라식은 심층에서 작용하는 미세한 작용이기 때문에 미래세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선업이나 악업아니다. 그래서 선으로도 악으로도 기별하지 않는(無記) 것이다. 그러나 말라식은 항상 함께 작용하는 번뇌 즉 자아의식에 의하여 더럽혀져 있어서(有覆) 해탈로 향하는 수행이 방해를 받는다. 말라식과 늘 같이 있어서 말라식의 본질이 되어있는 번뇌에는 4가지가 있다. 이러한 四煩惱 역시 有覆無記인데, 그 4가지는 다음과 같다.
① 我癡(atma-moha) : 自我가 없다는 無我의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는 無明이라고 하여 四諦의 이치와 緣起의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으로서 생사윤회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말라식이 무아의 이치를 알지 못하고 아뢰야식을 자아라고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② 我見(atma-drsti) : 我癡로 인하여 자아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순간 순간 생멸하며 상속해가는 아뢰야식을 변치않는 존재인 자아라고 잘못 집착하는 것이다.
③ 我慢(atma-mana) : 자아가 존재한다는 我見으로 인하여, '나는 -이다'라고 교만해 하는 심작용.
④ 我愛(atma-sneha) : 자아가 있다고 보고 그것에 애착하는 것이다. 말라식은 언제나 이들 4가지 번뇌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染汚意(klistammanah)라고도 한다.
6. 了別識
⑴ 六識
아뢰야식의 轉變에 의하여 생기는 아뢰야식과 말라식은 심층심리로서 우리가 평소에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만,
6식은 표층심리로서 우리가 깨어있을 때 즉 의식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늘 경험하고 있는 식이다. 인식론적으로 본 육식과 그 대상은 다음과 같다.
......<식>..................... <대상>
眼識(제1식)------- 빛깔, 형태(色)
耳識(제2식)------- 소리(聲)
鼻識(제3식)------- 냄새(香)
舌識(제4식)------- 맛(味)
身識(제5식)------- 감촉(觸)
意識(제6식)------- 모든 존재(一切法)
제1식에서 제5식까지는 감각지각으로서 각각의 지각대상이 따로 있다. 그러나 제6의식은 모든 존재를 인식대상으로 한다. 즉 眼識 내지 身識의 대상은 물론이고 과거나 미래의 일도 인식대상으로 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의식은 감각작용을 살림과 동시에 감각에 의해 얻어진 소재에 기초하여, 그것이 무엇인가를 개념을 가지고 인식하는 작용도 한다. 또 과거를 기억해내고 미래를 상상하는 일도 의식의 작용이다.
⑵ 마음의 가치적 분류
마음을 가치적으로 분류하면 善, 不善(惡), 선도 불선도 아닌 것(無記)의 세 가지로 나누는데, 6식은 어느 것으로도 될 수 있다. 즉 육식이 선의 심작용(信·慙·愧·無貪·無瞋·無癡·勤·輕安·不放逸·行捨·不害)과 함께 작용할 때에는 선이며, 불선의 심작용(無慙·無愧·瞋·忿·恨·覆·惱·嫉·?·害)과 함께 작용할 때에는 불선이며, 선의 심작용이나 불선의 심작용 어느 것도 수반하지 않을 때에는 선, 불선 어느 것도 아닌 무기이다. 이와 같이 6식의 선악은 그것에 동반하여 작용하는 심작용의 성질에 의존한다.
⑶ 육식에 동반하는 심작용
6식에 동반하는 심작용(心所)은 『성유식론』에 따르면 다음의 여섯 종류로 분류된다.
① 遍行의 心所 : 앞에 이미 나온 觸·作意·受·想·思 등의 5遍行心所로서, 이들 다섯은 아뢰야식, 말라식, 6식의 어느 것에나 항상 동반하여 작용한다.
② 別境(niyata)의 심소 : 모든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심작용이다. 별경의 심소는 欲(chanda, 요구하는 대상에 대해 원하는 마음)·勝解(adhimoksa, 뛰어난 이해력)·念(smrti, 잊지 않는 기억력)·定(samadhi, 하나의 대상에 마음을 집중함)·慧(prajna, 대상의 自相과 共相을 구별하여 의심이 없음) 등 다섯 가지이다. 이 다섯 가지는 불교 수행에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마음이다.
③ 善의 심소 : 11종의 선한 심작용이다. 信(sraddha)·慙(hri)·愧(apatrapya)·無貪(alobha)·無瞋(advesa)·無癡(amoha)·勤(virya)·輕安(prasrabdhi)·不放逸(sapramadika)·行捨(upeksa)·不殺生(ahimsa)
④ 煩惱의 심소 : 6종의 근본번뇌이다. 貪(raga)·瞋(pratigha)·癡(moha)·慢(mana)·見(drsti)·疑(vicikitsa)
⑤ 隨煩惱의 심소 : 20종의 부수적인 번뇌이다. 忿(krodha)·恨(upanaha)·覆(mraksa)·惱(pradasa)·嫉(irsya)·?(matsarya)·?(maya)·諂(sathya)· (mada)·害(vihimsa)·無慙(ahrikya)·無愧(anapatrapya)·昏沈(styana)·掉擧(auddhatya)·不信(asraddhya)·懈怠(kausidya)·放逸(pramada)·失念(mrsita)·散亂(viksepa)·不正知(asamprajanya)
⑥ 不定의 심소 : 어느 때는 선, 어느 때는 불선이 되어, 선과 불선이 정해져 있지 아니한 4종의 마음작용이다. 悔(kaukrtya)·眠(middha)·尋(vitarka)·伺(vicara)
⑷ 육식의 感수작용
감수작용에는 樂의 감수와 苦의 감수와 不苦不樂(捨)의 감수 등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안식에서 의식까지의 육식은 이 세 가지 감수작용 모두를 동반하지만, 아뢰야식과 말라식은 불고불락 즉 捨의 감수만 동반한다.
7. 유식학의 목적
유식사상은 철학이면서 동시에 종교이다. 학파의 명칭이 瑜伽行이듯이 요가(yoga, 瑜伽)의 실천을 통해서 자기를 변혁하고, 미혹의 세계를 벗어나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유식학설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하나의 방편으로서 假說된 것이다. 유식학의 이런 목적은 다음과 같은 『成唯識論』의 머리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논을 짓는 목적은 我法二空에 미혹한 사람으로 하여금 바른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두 가지 장애를 소멸하고자 한다. 我法에 집착하는 데서 두 가지 장애가 생겨난다. 두 가지 空을 깨달으면 장애도 따라서 소멸한다. 장애를 소멸하는 것은 두 가지 수승한 성과를 얻기 위함이다. 윤회의 삶을 계속하게 하는 煩惱障을 소멸함으로써 참다운 解脫을 證得한다. 지혜를 막는 所知障을 소멸함으로써 大菩提를 얻는다. 또한 我法에 집착하여 유식의 이치에 어두운 사람에게 두 가지 공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유식의 이치에서 진리 그대로 알게되기 때문이다. 유식의 이치에 어두운 사람이 있다. 외적인 사물이 識처럼 無가 아니라고 집착한다. 모든 식은 작용은 달라도 본체는 같다고 집착한다. 마음을 떠나서 다른 심리작용은 없다고 집착한다. 이런 여러 가지 집착을 막고, 유식의 심오한 이치에서 진리 그대로 즉 眞如를 알게 하고자 이 논을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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