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과 정토
신심(信心)이란 믿는 마음이고 정토(淨土)란 좋은 곳이다. 신라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극락정토(極樂淨土), 도솔정토(兜率淨土)등을 믿어왔다.
극락정토는 아미타불이 계신 곳인데, 이곳은 죽음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무량수 무량광의 세계이다. 도솔정토는 미륵정토인데 도솔이라는 말을 지족(知足)이라고 번역한다. 그래서 만족이 있는 곳이다.
그래서 미륵신앙이란 만족한 세계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고, 미타신앙이란 죽음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고통이 없는 곳에 나기를 염원하는 신앙이다.
신심이라고 하면 불성을 믿고 인과를 믿는 것이다. 불성은 둘이 없는 세계라 하여 무이지상이라고도 한다. 인과라고 하는 것은 나고 죽는 생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윤회라고 한다. 불성은 둘이 없는 세계이므로 무아(無我)이다.
쉽게 말하자면 불성과 인과이지만 학술적으로 말하자면 무아와 윤회이다. 윤회와 인과는 같은 말이고 불성과 인과는 같은 말이다.
인도종교에서는 자아로 윤회한다고 가르친다. 자아라는 것이 있고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는 무아윤회(無我輪廻)이다.
생각으로 이해하고자 하면 ‘나라는 자아가 없이 어떻게 윤회하겠는가, 윤회의 주체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학문상으로 굉장히 어려운 문제에 속한다.
윤회를 하려면 자아가 있어야 하고, 자아가 없는 무아라면 윤회도 없어야 하는데, 왜 불교에서는 무아를 이야기 하면서도 윤회를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일전에 30여년동안 무수히 많은 법문을 들어왔던 불자로부터도 이 문제에 대한 고민을 들은 적이 있다.
생각으로 이해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점이 있다. 이것을 이야기 한 것이 우리나라에서 배우는 금강경, 기신론, 원각경, 능엄경 등의 경전이다. 금강경과 반야심경에서는 무아를 가르치고, 기신론, 원각경, 능엄경에서는 윤회를 가르친다.
금강경에서 ‘여시멸도무량무수무변중생(如是滅度無量無數無邊衆生) 실무중생득멸도자(實無衆生得滅度者)- 일체중생을 다 열반에 들게 했어도 진실로 열반을 얻은 중생은 하나도 없다.’고 하였다.
왜 일체중생을 다 제도 하였는데 제도받은 중생이 없다고 한 것일까? 그것은 본래가 무아였기 때문이다.
중생중생자(衆生衆生者) 여래설비중생(如來說非衆生) 시명중생(是名衆生)이라는 말도 있다.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이 아니다. 이름이 중생일 뿐이라는 뜻이다.
반야바라밀로 보면 태어난 중생이 모두 안태어난 불성이다. 그것이 무아에 대한 믿음이다.
제상비상(諸相非相)이라는 말도 있다. 모든 형상이 상이 아니다. 즉 무아를 말하는 것이다. 상이 상이 아니므로 깨뜨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이고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그리고 금강경의 뒤쪽으로 가면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즉, 색으로 찾는다던지 소리로 찾는 것은 잘못 찾은 것이라는 말이다. 마지막에는 일체무위법(一體有爲法)을 말하고 있는데,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꿈과 같고, 헛개비와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은 것인데 이것이 다 생겨났지만 생겨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이다.
모두 경전에 있는 것이지만 신심을 깊이 가지지 못한 것에 원인이 있다.
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해서 기신론이 있는데, 그 기신론 이전에 유식학이 발달되었다. 유식학은 중생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왜 중생으로 보이느냐? 그것은 너의 생각에 의해서 보이는 것이다.’
본래는 무아인데, 자꾸 나라는 것이 보이는 것은 생각에 의해서 보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비유를 하자면, 같이 사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의 물건이 하나 없어지자 같이 사는 사람이 가지고 갔을 것이라 생각하게 되고, 그렇게 생각하자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이상하고 의심스럽게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 물건을 다른 곳에서 찾게 되자 그 사람의 행동이 하나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둑이라서 도둑이 아니라 도둑으로 보니까 도둑으로 보이는 것이다.
윤회가 있어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니까 보인다는 것이 일체유식(一切唯識)이다. 생사와 윤회라고 하는 것은 마치 허공의 꽃(空花)과 같다고 하였다. 맑은 하늘에 꽃이 왜 피는가. 나에게 눈병이 있어서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잘못 보는 것이 무명, 망견이다.
윤회가 없는 데에서 윤회를 한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기신론, 원각경, 능엄경이다.
그런데 망견이 한번 생기면 망견은 허망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만들어 낸다. 이것을 체공성사(體空成事)라 한다. 망견에는 본체가 없는데 고통의 일을 자꾸 꾸며서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렇게 망견에 의해서 윤회가 있는 것이지 본래 반야바라밀에는 윤회가 없다. 그래서 망견이 사라질 때 까지는 윤회의 고통을 받는 것이다.
이것을 원각경에서는 ‘주행안(舟行岸)- 산은 멀쩡히 있는데, 배를 타고 달리다 보면 산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것이 망견이다.
또 다른 예로. 이곳이 나의 집인데, 어느 순간 착각을 해서 남의 집으로 알게 된다면 이것이 망견이고, 무명이고, 윤회이다. 나의 집이 아니라고 잘못 아는 허망한 소견은 본체가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체공이지만 성사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집이 아니라고 판단하게 되면 그 순간 자신의 집을 찾게 되는 고통이 생긴다. 이것이 윤회인데 바로 무아에서 윤회를 하는 것이다.
길을 가던 사람이 동쪽으로 가고 있으면서 순간 서쪽이라 생각하여 동족을 찾게 되는 것을 환동작서(換東作西)라고 하며, 또 길가던 나그네가 고목나무를 보고 귀신으로 착각해서 질겁을 하는 등 모두 같은 뜻의 말이다.
이것을 윤회라 하고 그렇게 허망한 것이 윤회이다. 그런 허망한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그대로가 불생불멸이고 그대로가 색즉시공 공즉시색인데 다만 중생이 허망하게 생사, 생멸 둘로 보며, 불생불멸을 생멸로 보고 또 하나의 죽음이 없는 곳을 찾고 있는 것이 중생의 망견이고 망업이다.
망견이 생기면 망업이 반드시 일어나고 망업이 생기면 업에 대한 보답이 있어서 업보가 따르게 된다. 이것을 혹업고(惑業苦) 삼장(三障)이라 하는 것이다. 혹장(惑障)은 불생불멸을 생사윤회로 잘못 보는 것이고, 업장(業障)은 죽음이 없는 세계를 찾는 것이며, 고장(苦障)은 그런 세계를 찾는 과정에서 온갖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물을 보자면, 물이 인연을 만나는 데로 차도 되고, 승늉이 되고, 국이 되고, 폭포나 강, 바다 등으로 달라진다. 그러나 물은 항상 물이다. 이것이 불생불멸이고 무아이다. 얼음이 생겼지만 물로 봤을 때는 물일뿐이다.
생겼지만 안 생긴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도 아이도 되고 어른도 되지만 우리의 불성은 아이일 때도 불성이고 어른일 때도 불성이고, 살아있을 때도 불성이고 죽어있을 때도 불성이고, 그냥 그대로 불생불멸이고 무량수이다. 바로 그것이 도솔정토이며 이것이 무아와 윤회이다.
항상 무아인데, 항상 윤회를 한다. 윤회를 하지만 역시 무아이다. 이것이 인과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지만 불성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불구부증(不垢不淨)이다. 인과를 떠나서 불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불성을 떠나서 인과윤회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신심이다.
인과윤회로 보면 나서 자라고 죽고 하지만 불성으로 보면 항상 무량수요 죽음이 없고 고통이 없고 어두움이 없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불성에 대한 신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재 자신이 받고 있는 것에 대하여 원망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인과를 믿지 않아서이다.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는 것을 믿게 되면 누구를 원망하고 괴로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통을 느낄 때는 원을 세워서 더 좋게 만들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옳다.
정토사회를 잘 만들어서 정토세계에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좋은 인연을 많이 닦아야 한다. 정토는 죽음이 없고, 두려움이 없고, 고통이 없고, 만족이 있는 곳이다.
금강경 육조해(六祖解)에 보면 정토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첫 번째 정토는 세간정토 (世間淨土)이다. 세상에 있는 정토를 말하는데, 바로 절을 지어서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또 경을 잘 출판해서 보급하는 것도 세간정토이다. 두 번째는 신행정토(身行淨土)이다. 몸이 좋은 말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하는 것이다. 말이 복이 되기도 하고 죄가 되기도 한다.
또 행동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사는데 공경을 실행하는 것이 몸의 정토라고 하였다. 세 번째는 심행정토(心行淨土)이다. 마음으로 늘 지혜를 실천해서 눈으로 현상을 보되 알기는 알되 집착은 하지 않는다는 청정심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 없이 보면 그것이 눈의 정토이며, 귀로 소리를 듣되 좋아하고 실어하는 집착을 내지 아니하면 귀의 정토이다. 안,이,비,설,신,의에서 모든 의식이 나오는데 집착함으로서 고통이 오니까 집착함이 없이 기억하고 행동하면 그대로 정토인 것이다.
불교 잘 믿어서 마음수양 잘하고 공경하는 예절을 잘 실행하고 좋은 경전 많이 출판하고 좋은 절 많이 지으면 그대로 정토인 것이다.
그 가운데에 틀림없이 무아요 불성인데, 내가 한 것을 내가 받는다. 인과요 윤회다. 모두 틀림없는 것임을 신심과 지혜로 들어가면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인데, 생각과 의심으로 따지면 늘 걸리는 것이다. 그것은 잘못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마음에 의해서 보이는 것인데, 마음에 의해서 보이는 것인 줄 모르고 밖에서만 찾는 것을 미혹이라고 한다.
능엄경에 보면 아난의 미혹과 부루나의 미혹이 나오는데, 아난의 미혹은 부처님을 볼 때는 부처님을 좋아하고, 마등가라는 여인을 볼 때는 여인을 좋아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좋아서 출가했으면 끝까지 부처님을 좋아해야 될텐데, 여인도 따라가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보이는 데로 집착하는 사람이 많다. 완전하게 보지 못하고 자기의 허망한 소견으로 좋게 보았는데, 좋게 보는 순간 취하려 하니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부루나는 산하대지 우주만물이 왜 생겼느냐고 물었다. 산하대지 우주만물도 자신의 망견으로 보이는 것이다.
아난이나 부루나는 보여지는 대상만 중요시 여겼을 뿐 보고있는 자신의 견해를 무시했던 것이다. 이것이 미혹이다.
대상이 대상으로 존재하려면 보아야 하는데, 보는 나의 견해를 항상 저버리는 것이다. 그 보는 견해를 돌이켜보아야 한다. 반조, 반문을 통해서 심념정토, 마음이 깨끗해지는 문이 열린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항상 정토에 있고, 몸이 예절을 잘 실천하고 공경스러운 태도를 지으면 이 몸이 고통이 없는 정토가 되고, 이 세계에 좋은 절을 짓고 좋은 경전을 많이 출판해서 자꾸 보급을 시키면 그것이 세계의 정토이다. 신심으로 무아와 윤회를 믿고 정토를 잘 건설하는 것이 불자의 삶이다.
종범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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