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심과 보리심 (제258회)
종범스님 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
오늘법문은 무명심과 보리심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無明心(무명심)은 衆生心(중생심)임.
菩提心(보리심)은 諸佛心(제불심 - 모든 부처님의 마음)임.
한마디로 말해서 중생심과 보리심은 어떤 마음일까?
간단히 말하면 중생심은 顚倒夢想(전도몽상), 즉 뒤바뀐 꿈꾸는 생각.
모든 부처님의 마음은 不變隨緣(불변수연) 변함이 없다. 인연을 따른다.
무명이라는 것은 ‘明’자가 들어가며, 중생심이라는 것은 覺(각)자를 붙임.
근데 앞에 ‘不’자를 붙임. 완전히 모르는게 아님 중생심이라는 것은,
완전히 못 깨달은 게 아니에요. 알긴 아는데 잘못 아는 것임.
그래서 ‘무명’이라 함.
그래서 이걸 논서 같은데서 애기하길
집안에 자식이 하나 있는데 맨 날 말썽을 피워요.
그래서 ‘저 놈은 자식 없는거와 마찬가지다.’이렇게 이런 이름을
붙인거와 같다 함. 엉뚱한 짓을 계속 하니까.
게 이게 하나도 모르면 괜찮은데, 모르는게 아니고요. 알아요.
그래서 불각이다. 무명이다. 이렇게 이야기함.
그러면 그 내용이 어떤건가?
반야심경에서의 受相行識(수상행식)이 전부 무명임.
惑業苦(혹업고), 12연기가 혹업고인데, 중생세계가 늘 되풀이 되는 것을
12연기로 가르치고 있음. 12가지 과정의 인연법.
그것을 줄여서 보면, 번뇌(혹), 죄업(업), 고통(고)이 있음.
이게 전부 무명임.
번뇌가 貪瞋癡(탐진치)인데 이것이 무명임.
설명을 어덯게 하냐하면,
어떤 왕이 행차를 하면 뒤에 따라가는 수행원이 굉장히 많음.
‘무명’은 왕이고 뒤에 따라가는 번뇌, 고통 죄업은 전부 그 수행원임.
그 수행원이 따로 의지를, 행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왕명으로 있는 것임. 왕명 하나 없어지면 그냥 다 없어짐.
그래서 왕이 하나 없어지면 다 없어짐.
왕이 하나 생기면 많고 적고는 의미가 없어요.
얼마든지 많을 수가 있고 적을 수도 있음. 이걸 무명이라 함.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게 다 무명임.
무명 떠나서 四相(사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님.
기신론에서는 九相次第(구상차제)로 제일 처음 업상 한 분별심이 생기는데
하나의 분별심, 거기서부터 갈라져 나오는 과정을 9가지로 설명함.
무명이 한단계, 두단계 ..... 계속 발전해서 구상차제로 펼쳐짐.
이런게 무명임.
무명이라는 것을 여러 경전에서 설명을 하는데, 한국불교에는
기본적인 경전이 사교, 대교가 있음.
四敎(사교) : 금강경, 기신론, 원각경, 능엄경.
사교는 대승불교의 기본원리를 알게끔 되있음.
大敎(대교) : 화엄경, 법화경, 전등록(선종 4서), 선문염송(선종서)
대교는 옛날 10, 11년을 공부했음. 요즘 4년 공부함.
그래서 요즘에는 화엄경 볼 시간 밖에 없음.
근데 대승불교 기본을 말할 때, 반야, 기신, 원각, 능엄.
이 ‘사교’를 쪽 보면 불교 기본을 환하게 알 수 있음.
그럼 거기에는 ‘무명(중생마음)’과 ‘보리(부처님 마음)’가 자세하게 설명되어있음.
근데 반야경은 기본을 말하는 경전임.
기신론부터는 기본에서 어덯게 중생의 세계가 펼쳐지고
어덯게 하면 닦아서 돌아가는지를 자세히 말한게 기신론임.
기신론에서 ‘무명’ 설명을 기본적으로 제일 정확히 함.
기신론에서 뭐라고 설명을 했는가 하면
一切衆生(일체중생) 不名爲覺(불명위각)
일체 중생이 깨달았다 이름하지 못하는(깨닫지 못했다 하는) 것은
以從本以來(이종본이래) 念念相續(염염상속)
근본으로부터 오면서, 무명은 특징이 염염상속에 있음.
생각 생각이 계속 이어져 나가요. 고게 무명임.
그래서 한 순간도 생각을 떠나 본 일이 없어요. 우리 경험이.
未曾離念(미증리념) 故說無始無明(고설무시무명)
일찍이 생각을 여의지 아니했다.(무명, 중생심 임.)
그러므로 언제 시작됬는지 모르기 때문에
시작 없이 펼쳐지는 무시무명임.
,무명, 이라는 것은 특징이 ‘염염상속’에 있음.
생각 생각이 계속 이어져 나가요.
그래서 한 순간도 생각을 떠나본 일이 없어요. 경험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시작 없이 펼쳐지는 무시무명이에요.
간단함. 염염상속이 무명임.
그래서 중생은 생각을 떠나서 있을 수 없음. 항상 생각이 이어짐.
낮(밤)에는 낮(밤)에 대로, 잠이 푹 들면 꿈도 꾸고요,
그럼 꿈을 안 꾸었을 때에는 어찌되느냐?
그 밑바닥에 8식(아뢰야식)인 藏識(장식 - 저장식)이 있는데 거기서 다
저장되어가지고 이어져나감. 이게 이제 ‘염염상속’입니다. 게 무명이고.
무명은 항상 起念(기념), 생각을 일으킴. 생각을 안 일으키면 무명이 아님.
見諸境界(견제경계)라, 모든 경계를 항상 본다.
이래가지고 늘 저 대상(경계)를 항상 살펴요.
일체중생의 속성이 언제든지 마음을 대상에다 두는 것이 특징임.
강아지, 고양이, 소, 말 등도 그러함. 사람도 다를게 없어요.
저게 좋을까? 나쁠까? ..... 이게 어떨까? 저 사람이 나를 해칠까? 안 해칠까?
항상 ‘견제경계’를 함. 그래서 무명이라 함.{故說無明(고설무명)}이라.
그러고 若心起見(약심기견),
만약 마음이 견해를 일으키면(마음이 그쪽으로 쏠려있기 때문에)
卽有不見之相(즉유불견지상)
보지 못하는 것이(데가) 있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보고 한쪽으로는 못보고, 이게 무명임.
뭘 봤다 하면 저건 보는데, 다른건 전혀 못 봄.
근데 이 菩提(보리)는 그렇지 않음.
보는게 없는 동시에 보지 못하는게 없음.
이걸 圓照(원조)라 함. 두루 다 봄. 부처님 마음임.
한마디로 이 무명은 분별인데요, 항상 나누어요.
나누어서 뭘 하느냐? 緣境(연경 - 경계를 반연)을 해요.
분별연경이라. 그래서 좋다, 나쁘다. 분별해 놓고,
좋은거는 가질려하고, 나쁜거는 버릴려하는 요게 무명입니다.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설명하였음.
‘원각경’ 문수장에서는 제일 처음에는 ‘무명’은 하는 일이 뭐냐?
一切衆生 妄認四大 爲自身相 (일체중생 망인사대 위자신상)
일체중생이 사대(자기 몸인 지수화풍)를 딱 봐가지고 자기 몸으로 생각함.
이게 무명임. 이게 내 몸 같죠. 틀림없이 내 몸 같애.
근데 사람이 공부를 깊게 하려면, 한번 되게 아파봐야 함. 그럼 이게 내 몸이
아님을 그때 알게 됨. 이게 생길 때도 나도 모르게 생긴 것임.
죽을 때도 나도 모르게 죽음.
이게 전부 인연 소산물임.(이게 내가 살기를 바라건 죽기를 바라건 상관없이)
전염병이 돈다든지, 산이 무너진다든지, 홍수가 난다든지 하면
내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인연에 의해서 사라져 감(가버림).
생길 때 내 뜻에 의해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 달라,
주문생산한 것이 절대아님. 그냥 공장주 의지대로 됨.
이게 인연법임.
인연의 소산이지 자기가 생각하고 해서 된게 아님.
근데, 이 무명은 이 몸은 내 몸이고, 몸 아닌 것은 내 몸이 아니다.
이렇게 딱 분별해서 집착함.
그리고 무명은 밖으로 대상을 생각하는 그 반연심을 자기 본마음으로 알아요.
그러니까 생각을 자기 마음으로 알아요.
이 생각이라는 것도 몸과 같이 전부 인연에 의해서 생겼다가
인연에 의해서 사라지는 것임.
‘내 마음 나도 몰라’ 그게 정답임.
내 마음이 어째서 생겼느냐?
저 사람이 있을 때는 사람으로 보고, 나무가 있을 때는 나무로 보고,
이게 전부 인연으로 생겼다가요, 또 혼자 가만히 있어도
전부 대상을 인식하는 것 밖에 없음. 생각은.
과거에 봤던 것, 들었던 것, 먹었던 것
이 대상을 떠나서는 생각이 없음. 이걸 반연심이라 함.
그래서 요게 ‘무명’이 하는 일임.
인연에 의해서 생긴 이 몸뚱이를 자기로 딱 분별해서 집착하고
대상을 떠나서는 있지도 아니하는 그 경계를 쫒아가는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안다. 그래서 이것은 뭐와 같으냐?
이걸 病目空花(병목공화)와 같다고 함.
밖에, 허공에 꽃이 막 보였는데, 그 허공 꽃이 왜 보이냐 이거에요.
허공에 꽃이 있어서 보이냐?
눈병이 나서 보인다. 이거지요.
그래서 허공 꽃이 생긴 고향은 눈병이에요.
그럼 이 몸을 왜 내 걸로 보냐.
고게 무명 때문에 내 걸로 보이는 거지 내꺼기 때문에 내꺼로 보는건 아니다.
그래서 그걸 병목공화라 함.
그럼 공화가 보이는데 허공 꽃을 가서 없애면 되겠냐?
허공 꽃을 가서 따오면 되겠냐? 그래서
허공 꽃을 없애는 것을 滅相修行(멸상수행 - 상을 소멸하는 수행)이라함.
허공 꽃을 따오는 것을 取相輪廻(취상윤회)라 함. 즉 상을 취하는 윤회라 함.
그래서 허공 꽃이 보이는데 허공 꽃을 자꾸 가서 따면
상을 자꾸 집착을 해가지고 생사윤회하는 중생세계가 되고요.
저 허공 꽃을 하나하나 가서 없애요. 가서
닦고, 부수고, 마르게 하고,
그럼 상을 자꾸 소멸해서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것을 멸상수행이라함.
그러고 이 대승불교라 하는 것은
저 허공 꽃을 따지도 않고, 없애지도 않고, 뭘 하는가?
눈병만 고쳐버리면 끝나버려요.
그래서 공을 말하는데 공은 不生不滅(불생불멸)이거든요.
멸상공이 아니라 즉색공이다.
색에 부딛친 그대로 공이에요.(즉색공)
멸상공은 색을 다 소멸시켜야 공이 나오잖아요. 그거 아니에요.
즉색공, 색에 다다른 그대로 공이다. 이거에요.
요게 대승불교에요.
그래가지고 이 자기 눈병에 의해서 나왔는데,
그거를 모르고 가서 자꾸 반연해서 집착을 하니까
이걸 뭐라 하면, ‘내가 내 물건을 훔치고 있다.’ 이게 전도몽상이에요.
또 내가 내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다. 이게 전도몽상이에요.
자기 집인데, 자기가 정신이 깜빡해서 이 집이 내 집이 아니라고 알았어요.
그러고 나서 보니까, 물건이 좋은게 상당히 많아요.
그래서 이거 얼마냐 이거 얼마냐 물어보고, 얼마라니까,
아 저거 내가 사야겠다고, 그거 사기위해서 온갖 돈을 품삯 받은거 다,
그걸 사는 그런 상태가
자기 한 생각에서 나온 그런 차별상을 계속 자기가 집착하고 반연해서
그걸 얻어가지고 만족을 얻을려 한다.
그래서 그걸 전도몽상이라고 함.
그래서 無明(무명)은 생각을 일으켜서 집착을 하지 아니하면
무명이 아닙니다. 그건.
항상 분별해서 집착하는거, 또 항상 이 견해를 일으키는 거에요.
이래가지고 무명을 한마디로 말하면, 전도몽상인데,
전도몽상은 다른게 아니라,
虛空作片(허공작편)이라. 허공을 조각조각 내려고 하는 거와 같음.
家裏作客(가리작객)이라. 자기 집 안에서 나그네가 되는 거다.
전부 헛수고 하면서 사는게 중생임.
그러면 보리는 뭐냐? 보리는 부처님 마음인데,
보리를 번역을 할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를 번역을 하는거그던요.
보리는 1)大覺(대각)이다. 크게 깨달은 거다.
2)正覺(정각) 이다, 3)妙悟(묘오)다,(묘하게 깨달은 거다.)
4)善覺(선각)이다.(60화엄에서). 원각경에서는 5)圓覺(원각)이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잘 말한게 화엄경입니다.
화엄경 딱 펼치면 어디서부터 나오느냐면
始成正覺(시성정각)이라.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었다. 에서부터 나옴.
그럼 거기서 탁 펼쳐지는게 그게 이게 ‘무명’에서
처음으로 인제 부처님이 된 ‘시성정각’심을 설명하는 거그던요.
처음으로 정각을 이룬 그 마음을 쫙 설명하는데, 이거는요. 꼭 저,
연극을 할 때, 무대를 딱 가렸다가, 뒤에서 배우들이 딱 준비하고
있다가 처음에 막을 쫙 여는 그런 기분이에요.
그럼 쫙 펼쳐지는게 금강지(金剛地)입니다.
금강으로 땅이 되고, 금강으로부터 쫙 나오고요.
그러고 그 다음에 普光明(보광명)이에요.
또 大光明(대광명) 이게 전부 화엄의 시성정각심을 표현한 말임.
‘금강’이라는 건 순금, 거기에 아무것도 낀게 없어요. 순금.
그 깨달음 본래마음 하나밖에 없는거에요.
보광, 대광이에요.
그러고 大寂光(대적광)이라고도 씁니다.
크게 고요한 광명임. 이게 형상이 없어요. 이 보리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海印三昧(해인삼매)다. 이게 전부 시성정각심이에요.
‘해인’은 바다에 온갖 그림자가 다 있거든요.
게 부처님 마음에 없는게 없어요.
그래가지고 이걸 설명할 때,
妙悟皆滿(묘오개만)하니, 묘한 깨달음이 다 충만하니, 어덯더냐?
二行永絶(이행영절)이라.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다.
‘이행’은 좋다 나쁘다, 나다 너다, 분별이거든요.
이 무명 분별이 ‘영절’해 버렸어요. 이 ‘이행’이 무명입니다.
꼭 두가지로해요. 분별이란, 좋다 나쁘다, 너냐 나냐?
미우냐, 안 미우냐? 죽느냐 사느냐, 만날 ‘이행’속에서 헤메는게
중생이에요. 그런데 묘한 깨달음을 얻으니까 ‘이행’이 영절했어요.
그걸 ‘대각’, ‘해인삼매’라 그럽니다.
그러고 所行無碍(소행무애)해요. 행하는바가 아무 장애가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相(상)이 공함을 알았기 때문에 그래요.
卽色空(즉색공)을 알았기 때문에, ‘색에 다달아서 바로 공이다.‘
이걸 알았기 때문에 ‘걸린다.’하는 것은 ‘상’에 걸리는 것임.
근데 무상법을 통달했다. 상없는 법을 통달했기 때문에
소행이 무애일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온갖 것을 다 보고 관찰하고 하거든요.
이런 것을 ‘대각이 원조’라 ‘해인삼매’라 ‘보광명’이라. 이렇게 애기함.
이거는 아무리 여러군데 ...해도 본래 제자리에 있다.
그래서 이것을 摩尼珠(마니주)에다 비교하거든요.
마니주 이 구슬이 하나 있는데, 아무 색깔이 없어요. 불변이에요.
불변인데, 이게 붉은 것을 갖다 대면 붉게 비추어지고 검은 것을 갖다 대면
검게 비추어지고. 이게 수연이에요. 이걸 불변수연이라 그럽니다.
이 구슬하나는 무색 청정입니다.
근데 사람(물건) 갖다 비추면(대면) 사람(물건) 모양을 비추고요.
비추는 대로 비추어줘요. 이걸 수연이라 함.
이런 것이 인제 부처님 마음 圓照(원조)다 이거지요.
그래 부처님 마음은 이렇고, 중생심은 이렇다.
제가 이런 소리하는 것은 깨달으라고 하는겁니다.
말 듣고 말라는게 아니라.
그래서 오도문답(도를 깨닫는 문답이다)이라함.
그럼 오도문답을 어덯게 하느냐?
來賓曰(내빈왈) 손님이 말하기를
大衆不少(대중불소) 幾人悟道(기인오도)
대중이 적지 않게 많은데 몇 사람이 도를 깨달았느냐?
아, 요새 그런거 묻는 사람 많아요.
100명중에 몇 사람이 도인이냐?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고요.
10년을 수도를 하면 몇 사람이 도인되느냐? 뭐 이 숫자적으로 관심
갖는 분이 많음. 근데 도는 몇 사람이 깨달았다 했을거 같아요?
主人曰(주인왈)
龍蛇雲集(용사운집) 不見迷悟(불견미오)라.
용사가 다 모였는데(대중 속에는 용도 있고 뱀도 있음)
근데 누가 迷(미)했는지 누가 깨달았는지 볼 수가 없어요.
그 묘합니다. 이게.
이게 설명을 붙이면요.
이 無明(무명)과 菩提(보리)가 서로 떨어져 있지를 않아요.
水相風相(수상풍상 - 물하고 바람)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아요.
게 파도가 되는 거에요.
그래서 무명을 떠나서 보리가 따로 있고,
보리를 떠나서 무명이 따로 있는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사람을 볼 때 저 사람이 깨친 사람인가, 아닌가?
그 깨치고 안 깨치고가 서로 떨어진 사이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게 도를 아는 사람은 ‘불견미오’라.
미오를 볼 수가 없다. 근데 ‘용사’가 ‘운집’한건 사실이다.
來賓曰(내빈왈) 如何方便(여하방편)이라야 易得悟道(이득오도)
빈이 묻길, 어떤 방편으로 닦아야 쉽게 오도를 얻을 수 있느냐?
主人曰(주인왈) 無念端坐(무념단좌) 春草自靑(춘초자청)
주인이 답하길, 망념 없이 단정히 앉아있음에, 봄풀이 스스로 푸르다.
내빈왈(내빈왈) 衆生無數(중생무수)한데 云何度盡(운하도진)
중생이 숫자가 없이 많은데, 어덯게 중생제도를 다하겠느냐?
그 衆生無邊誓願度(중생무변서원도) 이러잖아요.
전부가 중생인데 서원코 제도하겠습니다.
전부가 중생인데 언제 그 중생을 제도할래 그 소리임.
그럼 답을 가지고 계세요? ㅎ~ 여기에 묘법이 있는 것임. 대답을
主人曰(주인왈) 慧眼觀時地獄空(혜안광시지옥공)이요
혜안으로 볼 때 지옥이 없다.
衆生成佛(중생성불)이 刹那中(찰나중)이라.
중생성불이 찰나가운데 이루어진다.
이게 대승불교입니다. 이런 법이 妙法(묘법)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축원할 때도,
三障(삼장)을 頓除(돈제)하고
혹장, 업장, 고장 삼장을 일시에 제거하는게 삼장돈제 임.
頓亡生死(돈망생사)하고, 생사를 몰록 잊고
頓悟無生(돈오무생)이라.
생사 없는 불생불멸을 바로 깨닫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축원을 합니다. 이게 한국불교고 대승불교입니다.
그러고 ‘千手經(천수경)’에도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라.
죄는 자성이 없어서 마음에서 나온다. 했음.
그러고 百劫積集罪(백겁적집죄)를 一念頓湯除(일념돈탕제)
백겁적집죄를 일념에 소멸하는게 이게 대승불교임.
그래서 그런 이치가 화엄경 범행품에 보면
初發心時便正覺(초발심시변정각)이라 그랬음. 그게 대승불교고요.
증도가에 보면 一超卽入如來地(일초즉입여래지)라 했음.
이게 인제 깨달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되는)게 이 법입니다.
멸상수행이 아니라 悟道修行{오도수행(깨달음을 통해서 성불하는 것)}임.
저 허공 꽃을 가서 낱낱이 걸래로 닦는게 아니라 눈병 하나 고치면
허공 꽃은 없다. 이게 ‘일초직입여래지’이고, ‘초발심시변정각’이거든.
그럼, 이상하면 그걸 문제시해야 돼. 도데체 이게 무슨 이치인가?
그걸 문제로 삼으면 그게 눈이 열리는데, 그냥 듣고 말면 안 열려요.
그래서 원각경 보현장에 그런 말씀이 있음.
知幻卽離(지환즉리)라.
환인줄 알면 곧 열린다. 환인줄 알면 바로 열리는 거에요.
아 저게 왔다 갔다 하는 헛깨비라는 것을 알면,
다시는 그걸 도망가지도 않고, 쫒아가지도 않고 그냥 앉은 자리에서 여여버려요.
이게 ‘지환즉리’임.
하~ 이거 참, 금방 성불한거 같네. 그냥. 하~ 참! 대단해요!
不作方便(부작방편)이요.
그것 여의는 방편 지을게 없어요.
離幻卽覺(이환즉각)이라. 환을 여의면 즉 깨달음이요.
亦無漸次(역무점차)라 또한 점차가 없다.
이게 돈망생사, 돈오무생하는 이치임.
환인줄 알면 바로 열리는 거에요. 점차가 없어요.
또 환을 여의면 곧 깨닫는 거에요. 또한 점차가 없어요.
방편도 없고, 점차도 없고. 이런거그던요.
그래서 이걸 비유로 말하면,
꿈에 온 몸이 부스럼이 난걸 봤는데(몽견신창 夢見身瘡)에
(꿈에 부스럼 난걸 어덯게 하면 고치죠?)
깨기만 하면 몰록 치유가 된다.(각즉돈유 覺卽頓癒)
이거와 똑같은 거에요. 거기에 방편도 점차도 없는거에요.
그 이치가 대승불교는 見性(견성)이 중심이지 ‘멸상’이 중심이 아니다.
견성, 그 생사 없는 그 자리를 딱 보는게 이게 견성인데,
‘견성이 성불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업장 하나하나를 소멸할려고 하는게 아니에요.
그래서 고 가르침, 특징이 달라요.
이렇게 돼서 ‘중생성불이 찰나중’이다. 이래놓고
又曰 咄 (우왈 돌).
또 말하기를, 돌!(안타깝다.). 뭐냐?
心外分別 顚倒夢想(심외분별 전도몽상)
마음밖에 분별하는 것이 전도몽상(2번)이니
更莫起見 返照自心(갱막기견 반조자심)
다시 견해를 일으키지 말고, 자기 마음을 돌이켜보라.
‘반조자심’하는게 이게 참 중요합니다.
무명이 뭐고, 보리가 뭐고 다 말을 해도 ‘자심반조’를 하지 아니하면
이게 ‘설식기부’라. 밥을 말하는 배고푼 사람과 같다. 이거에요.
자기가 밥만 설명하고 안 먹으면 배고푸거든요.
그러니까 이거, ‘반조자심’하라.
그 반조자심을 어덯게 해야 되는가?
日常日用中 見聞言思動 是箇甚麽(일상일용중 견문언사동 시개삼마)
일상생활 가운데,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거,
이것이 무엇인고?(2번) 하면
어느 순간에 생각의 구멍이 뻥 뚫리면서 卽色空(즉색공)을 알게 되요.
색이 곧 공임을 알게 되요.
그러면 그게 진공대도량으로 떡 돌아가서
대적광, 대 삼매의 경지를 증득하게 되는거에요.
오늘 법문은 이걸로 마칩니다. _()_
'종범스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나는 누구인가? (0) | 2017.12.31 |
---|---|
[스크랩] 安寧(안녕), 健康(건강). (0) | 2017.12.31 |
육조단경 강의록 - 종범스님 (0) | 2017.12.24 |
[스크랩] 여래사 법회: 공부와 수행 (종범스님) (0) | 2017.12.24 |
[스크랩] 신심과 정토 (0) | 2017.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