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성스님

[스크랩] 필독!-계정혜 체계 벗어난 수행법으론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

수선님 2019. 1. 27. 13:01

“계정혜 체계 벗어난 수행법으론 깨달음과 열반을 성취할 수 없다”

11-10-09 13:22 ▣미디어붓다 이학종기자 urubella@naver.com

 

 

마성스님, ‘한국불교수행법 크게 잘못돼 있다’ 지적

<불교평론>에 기고…간화선 수행자들 태도도 비판

 

 

“간화선 수행에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노출되고 있다. 그 근본 원인은 한국불교의 수행법이 계·정·혜 삼학의 체계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수행은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른바 지계(持戒)·선정(禪定)·지혜(智慧)가 그것이다. 지계 없이 선정을 이룰 수 없고, 선정 없이 지혜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한국불교의 수행법,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도발적 주제의 논문이 발표돼 잔잔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발표자는 마성 스님(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사진)이다.

 

마성 스님은 <불교평론>제48호(2011년 가을호)에 발표한 논문에서 “한국불교가 다문화 사회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제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수행의 종교로서 본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구체적으로 한국불교의 수행법의 문제점과 그 원인, 개선 방안에 대한 논의를 시도했다.

 

마성 스님은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는 간화선(看話禪) 수행에 대해 살펴보고, 간화선 수행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남방불교의 위빠사나(Vipassanā) 수행에 대해서도 검토했다.

 

마성 스님은 간화선 수행의 문제점에 대해 “지금까지 조계종에서는 간화선이야말로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표방하고 있고 교육원 불학연구소에서 펴낸 <간화선>에서 ‘간화선은 조사선의 핵심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수행법이다. 즉 간화선은 조사선이 강조하는 견성 체험을 그대로 이어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사 스님들께서 마음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바로 보였던 말길이 끊어진 말씀을 화두라는 형태로 잘 정형화해서 이 화두를 통해 지금 이 자리에서 마음을 깨치게 하는 탁월한 수행법이다’라고 기술했으면서도 새삼스럽게 ‘수행결사’를 제안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처럼 훌륭한 간화선을 통해 수행한 스님들은 얼마나 많이 깨달음을 이루었는가? 라고 물은 마성 스님은 한 언론에 보도된 도법 스님의 발언을 문제 제기의 근거로 들었다.

 

 

“(조계)종단 출가 수행자가 비구·비구니를 포함하여 대략 1만 2천 명이라고 한다. 50여 년 전체를 합치면 연인원 50여만 명이 수행에 진력해온 셈이다. ……그동안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함께 살기도 하고 쟁쟁한 소문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면 깨달았다고 큰소리쳤던 사람이 이상하게 된 경우가 의외로 많다. 실제 괜찮게 된 경우는 50만 명 중에 20여 명 정도를 넘지 않는다. 그 20여 명도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대중이 반신반의하는 것을 보면 깨달은 도인이 기대했던 것처럼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볼 때 수행하여 이루어낸 결과가 너무 초라하고 허망하다.”

 

 

마성 스님은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할 뿐, 간화선 수행법 자체의 문제점이 아니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면서 “그것은 한국불교가 실천적 수행에 관한 한 다른 불교국가에 비해 뛰어난 전통을 갖고 있다는 자기도취적 입장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라고 꼬집었다. 마성 스님은 “특히 초기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간화선 수행법 자체는 물론 간화선 수행자들의 태도에서도 문제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마성 스님은 이 문제의 원인에 대해 권탄준 교수(금강대)의 분석을 인용했다.    

“권탄준은 현재 한국불교계의 수행과 관련된 문제점을 여덟 가지로 지적했다. 이른바

 

 

①수행에 대한 의식 결여,

②유심(唯心)사상에 대한 그릇된 이해,

③사회 구원을 위한 수행에 대한 의식 결여,

④모호한 성불론,

⑤지계(持戒) 생활에 대한 의식 결여,

⑥생활과 수행의 불일치,

⑦기복 신앙 차원의 수행,

⑧체계적인 수행 교육의 부재 등이다.”  

 

 

마성 스님은 이어 권 교수의 8가지 문제점 등 지금까지 지적된 원인들을 크게 세 가지로 압축하여 분석했다.

 

 

첫째 간화선 수행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

둘째 간화선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는 것,

셋째 간화선 수행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顚倒)되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마성 스님은 간화선 수행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게 된 그 근본적인 원인은 한마디로 한국불교의 수행법은 계(戒)·정(定)·혜(慧) 삼학(三學)의 체계로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간화선 수행자의 생활과 수행이 둘로 구분됨으로써 ‘깨달음의 사회화’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선방의 수좌는 사회문제에 초연해야 한다는 잘못된 인식이 팽배해 있고,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문제와 중생의 삶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이라고 마성 스님은 지적한다.

 

간화선 수행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져 있다는 지적도 뼈아프다.

“불교에서 깨달음 문제만큼 많은 오해와 시비가 교차하는 것도 없다”고 전제한 마성 스님은 대표적인 몇 가지 오해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첫째, 깨달음을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신비한 무엇 또는 고도한 관념적 철학체계로 이해하는 경향,

둘째, 이런 깨달음을 위해 매우 오랫동안 특별한 수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향,

셋째,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생물학적 생사문제나 도덕적 인과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는 것 등이다.

 

 

마성 스님은 “이처럼 선수행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깨달음을 신비적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깨닫기만 하면 당장 도인(道人)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깨달음 지상주의’가 한국 선종의 현주소라는 것이다. 마성 스님은 “깨달음에 대한 신비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깨닫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한순간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으나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간화선은 수행의 목적과 수단이 전도(顚倒)되었다. 깨달음은 수단이고 열반은 목적이다. 그런데 한국불교에서는 수단이어야 할 깨달음을 목적으로 여기고, 목적인 열반을 수단으로 잘못 인식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깨달음은 열반에 이르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깨달음이 곧 열반이고, 열반이 곧 깨달음이라고 잘못 알게 되었던 것이다."

 

마성 스님은 “이와 같이 목표가 잘못 설정되었기 때문에 바른 수행법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현상이 생기게 되었던 것”이라며 “불교의 궁극적 목표는 ‘깨달음’이 아니라 ‘열반’의 증득에 있다는 평범한 사실에 대한 이해부족, 즉 깨달음에 대한 오해로 말미암아 한국불교는 잘못된 수행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이것이 한국불교의 수행법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간화선 위빠사나가 계정혜 체계가 아니면 문제

 

마성 스님은 불교수행의 특징을 ‘중도적 수행론에 근거한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생활’이라고 정의하고, 붓다 당시 인도의 종교와 철학의 특징을 비교했을 때, 불교는 중도적 수행론에 해당된다고 설명했다. 붓다는 최초의 설법에서 불교수행의 핵심은 중도(Majjhimā-paṭipadā)라고 선언했으며, 지나친 쾌락주의와 고행주의는 수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또한 붓다는 일생 동안 중도적 삶을 몸소 실천했다는 점을 들었다.

 

“경전에 의하면 중도는 곧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한다”고 밝힌 마성 스님은 “따라서 팔정도가 불교수행의 근간이며 따라서 불교수행의 핵심은 계·정·혜 삼학”이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초기불교에서부터 대승불교에 이르기까지 불교 고유의 전통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간화선 수행이나 남방의 위빠사나 수행은 계·정·혜 삼학의 체계로 되어 있지 않으며,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비판했다.

 

팔정도를 삼학으로 나누어 보면, 정어·정업·정명은 계학에 해당되고, 정정진·정념·정정은 정학에 해당되며, 정견·정사유는 혜학에 해당된다고 설명한 마성 스님은 “계·정·혜는 상섭(相攝, saṅgaha, Sk. saṁgrha)의 관계에 있다. 즉 계 가운데 정·혜가 포함되어 있고, 정 가운데 계·혜가 포함되어 있으며, 혜는 계와 정의 도움을 받아 비로소 완전하게 된다. 그러므로 삼학을 뚜렷이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마음은 계·정·혜 세 가지를 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마성 스님은 위빠사나 수행의 문제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간화선 수행법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과 함께 그 대안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위빠사나 수행법이 국내에 도입되었으나, 위빠사나 수행법도 붓다가 가르친 초기불교의 수행법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한국불자들은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마성 스님은 동국대 황순일 교수가 구스타프 하우트만(Gustaaf Houtman)의 글을 인용하여 발표한 논문의 일부를 근거로 예시했다.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민족적인 자긍심을 회복하려는 의도가 식민지 미얀마에서 명상수행이 대중화되는 계기를 만든 것이었다.” 또한 “미얀마 군부는 국내에서 군부의 입김이 강해지자 미얀마의 국민들에게 위빠사나 수행을 권유하여 나와 주변과 세계가 무상하며 공하고 자아가 아니란 것(無我)을 끊임없이 알아차릴 것을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국민이 세속적 정치적 문제에 무관심해지도록 유도하였고 심지어는 교도소에서까지도 위빠사나 수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위빠사나 수행의 가장 큰 단점은 사마타 수행(samatha, 止)의 중요성을 의도적으로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한 마성 스님은 “어떤 학자는 위빠사나 수행만으로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이때의 위빠사나는 선정을 머금고 있는 통찰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찰나삼매(刹那三昧)라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법이 이처럼 초기불교의 수행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미얀마의 정치적 여러 배경에서 태어난 변형된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이러한 전후 사정도 모른 채 무비판적으로 위빠사나 수행을 받아들여 열광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초기불교 수행법은 사마타와 위빠사나의 균형으로 이루어져

 

“초기불교에서는 어떠한 수행법이라도 모두 기본적으로 삼학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강조한 마성 스님은 “초기불교의 대표적인 수행법으로 알려져 있는 사념처관(四念處觀: 身·受·心·法)도 크게 사마타 수행(samatha, 止)과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 觀)의 둘로 이루어져 있다. 사마타 수행은 ‘평온 수행(Peace meditation)’이라고 하고, 위빠사나 수행은 ‘통찰 수행(Insight meditation)’이라고 하는데, 지관(止觀)으로 한역된다. 역대로 수행은 지관겸수(止觀兼修 곧 정혜쌍수)야말로 진정한 수행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이 초기불교의 수행은 모두 지(止)와 관(觀)의 수행을 통해 성자의 네 가지 계위(階位), 즉 예류과·일래과·불환과·아라한과에 오르게 된다”고 설명했다.

 

“분명한 사실은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ā, 觀)가 둘이 아니라는 점이며, 이 평범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전제한 마성 스님은 “이런 측면에서 보면 상좌부의 스님들이 위빠사나 수행에 집착하는 것이나 한국의 선객들이 간화선에 집착하는 것이나 똑같다.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수행법이야말로 최상의 수행법이라는 과도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자신의 수행법에 확신을 갖고 수행에 전념하는 것은 수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매우 훌륭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러한 자부심이 지나쳐 다른 수행법을 아주 낮은 근기의 사람들이 행하는 수행법이라고 비하하거나 잘못된 수행법이라고 폄하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다.

 

마성 스님은 한국불교의 수행풍토와 관련, 특히 간화선만이 최상의 수행법이라는 집착은 큰 문제라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대승적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했다.

 

“어느 한 수행법이야말로 최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또 다른 도그마에 빠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근기와 수준에 따라 선택의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불교의 폭을 넓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것이 최상의 수행법은 아닐까?”

 

 

 

 

 

 

 

 

 

*마성 스님은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원 겸임교수. 스리랑카 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를 졸업, 동 대학원에서 철학석사(M.Phil.) 학위를 받았다. 태국 Mahachula-longkornrajavidyalaya University 박사과정 재학 중이며 팔리문헌연구소장이다. 저서로는 <마음비움에 대한 사색>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마성스님 - 팔리문헌연구소장 

 

근본불교대학

http://cafe.daum.net/wonbulsatemple

 

 

출처 : 마음의 호숫가에서
글쓴이 : Wondam:원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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