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제의 아름다운 미덕을..
얼마 전에 제가 사는 오두막 방을 뜯어 고쳤습니다.
방을 고친 지 오래됐고 또 서툴게 고쳐서
그동안 불이 잘 안 들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굴뚝으로 나가는 연기 보다 아궁이로 나오는 연기가
더 많을 정도였고 방바닥에도 많은 틈이 생겨서 새로 고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굴뚝과 아궁이의 위치를 정반대로 바꿨더니 불이 제대로 듭니다.
그 뒤 도배를 했는데 20일이 넘도록 가구 등을 일체 들여놓지 않은 빈방에서
방석 하나만 깐 채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텅 빈 공간이 좋아서
아직 그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빈방으로 놓아둘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구를 들여놓겠지만 될 수 있으면
그 기간을 연장해서 빈방인 채로 더 있고 싶습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혼자서 빈방에 남게 됩니다.
살만큼 살다가 몸이 굳어지면 빈방에 홀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곳이 관속이든 무덤 속이든 홀로 빈 공간에 남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부장품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미리부터 빈방에 홀로 있는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을 가져 보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이다음에 홀로 있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사람은 여럿이 어울려 살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홀로 있는 것입니다.
가족끼리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써 공동체 안에 살더라도 홀로 있는 것입니다.
홀로 있음으로써 이웃과의 관계가 새삼스럽게 보입니다.
늘 얽혀 있으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도 안 되고
이웃과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텅 빈 데서 오는 충만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새로 이사할 집에서 아직 가구를 들여놓지 않고 빈방에 앉아보십시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저것 걸리적거릴 게 없기 때문에 신경 쓸 데가 없습니다.
물론 늘 그렇게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때로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라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과 같은 어려운 시기는 우리가 처음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누군가가 겪어왔던 일들입니다.
그것이 갑자기 우리 앞에 닥쳐왔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당황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어려움이 닥쳐올수록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안으로 삶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토인비가 지적한 것처럼 끝없는 도전 속에서
그에 대처하는 응전應戰으로 발전해 온 것입니다.
현재의 경제 위기도 그런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일깨우라는 표식일 수 있습니다.
세월은 한결같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늘 변합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 어려운 일도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된다면
개인이고 사회이고 생기를 잃고 타락해 갑니다.
우리 시대의 이와 같은 어려움은 이 우주가 우리에게 안겨준
메시지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버릴 것 안 버릴 것 가리지 않고 막 버리면서
아깝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미국식 산업구조를 성장모델로 삼아왔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벽에 부딪힌 것입니다.
선진국 대열에 끼었다고 해서 OECD에 가입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로비를 해가면서 가입했습니다.
이때 일부에서는 우리의 경제가 OECD에 가입할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이르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에서는 '신한국, 신경제'를 세계시장에 과시하기 위해
무리를 해가면서 OECD에 가입했습니다.
그 결과 금융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교활한 외국자본이
마음 놓고 들어와 우리의 금융시장을 완전히 교란시킨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탐욕의 시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이 채울까 혈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 차지하고 채우고 앞서며
이기는 것만 가지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가졌던 것을 줄 수도 있어야 하고,
차지했던 것을 내 놓을 수도 있어야 하며
채웠던 것을 텅 비울 수도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앞서면 어떻게 됩니까. 뒤쳐지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이기기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때로는 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을 조화롭게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이루어진 이 지구촌에서 100살도 못사는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늘 공허한 상태입니다.
자원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와서 얼마나 많은 자원을 탕진하고 허물고 소비합니까.
오늘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경제 뿐만은 아닙니다.
인간존재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저 입만 벌리면 경제, 경제 하는데 그것은 한 부분입니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보다 훨씬 적게 가졌으면서도 잘 살아왔습니다.
착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며 알뜰살뜰하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많은 것, 큰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그걸 잘 활용할 줄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새롭게 자기 삶을 정립해야 합니다.
오늘의 어려움에 우리가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기가 죽으면 다른 일도 안 됩니다. 전 생애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닥친
이와 같은 시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IMF사태 이전처럼 살아갔더라면
우리는 어디까지 타락했겠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남의 빚더미 위에 앉아서 마치 선진국 대열에 낀 것처럼 착각하지 않았습니까.
국내외로 다니면서 그렇게 낭비하고 과소비를 하고
추태를 연출했는데 이제 이런 계기를 통해서 뭔가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모진 마음을 먹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 풀립니다.
남을 미워했던 사람도 그 미움이 자기 자신을 괴롭히니까
스스로 그 마음을 버리게 됩니다.
이 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고 가야 침몰하지 않습니다.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침몰한 잠수정 신세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뉴스를 듣고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영감靈感을 얻었습니다.
사람을 살상하는 잠수정이 꽁치 그물에 걸려서 꼼짝 못했습니다.
꽁치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그런 무기들조차 전혀 예상치 않았던 꽁치그물에 걸려 침몰한 것입니다.
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면 그렇게 침몰하고 맙니다.
넘치는 물량에만 현혹되어서
우리는 그 동안 절제의 미덕을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우리 할머니·할아버지, 어머니·아버지 시대에는
조그만 것을 가지고도 절제를 했습니다. 넘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때에 와서 절제의 미덕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난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볼 때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해야 할 맑은 가난입니다.
그것은 빈곤이 아니라 절제된 아름다움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부자로 살기보다 가난하게 살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가난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선진국 국민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이겨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당연한 일인데 그동안 너무 흥청망청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치러야 할 값도 치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많고 큰 것만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는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우리 조상들은 가난 속에서도 도락道樂과 풍류風流를 잃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가난을 풍류로까지 승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옛 시조에 보면 가난을 풍류로 승화시킨 노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꼭 돈을 들여야만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풍류의 무한한 소재인 자연이 있습니다.
산과 바다가 있고 강이 있습니다. 달과 별과 구름이 있습니다.
나무와 꽃과 맑은 바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가슴만 활짝 열면 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 법정 스님-
출처 : 산사의 풍경소리
글쓴이 : 마음고요(寂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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