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에 나타난 空思想
김선근*
*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교수
Ⅰ. 머리말
Ⅱ. 법화경의 구성과 성립사
Ⅲ. 법화경에 나타난 空思想의 背景
Ⅳ. 法華經에 나타난 空思想
Ⅴ. 맺음말
요약문
공의 사상은 원시불교의 ‘제행무상’이나 ‘제법무아’라는 관념을 받아들인 사상이다. 空思想은『아함경』이나 아비다르마 불교에도 있지만 이 空思想을 더욱 심화시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은 空이라 하고, 법이 空함과 법에 자성이 없음을 분명히 했던 것은『금강경』이다.
『법화경』에 나타난 空사상은『반야경』의 空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제 14 「안락행품」, 제 16 「여래수량품」, 제 4 「신해품」, 제 5 「약초유품」 그리고 제 10 「법사품」에 나타나 있다. 제 10 「법사품」을 제외한 모든 品들은『반야경』의 空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법사품」에서는 법사(dharma-bhaṇaka)를 ‘如來使, Tathāgata-dūta’로 부르고 보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살이 호지할 ‘홍경삼궤(弘經三軌)’를 제시하고 있다.
‘홍경삼궤’란 법사가 여래의 방(室)에 들어가 여래의 옷(衣)을 입고, 여래의 자리(座)에 앉아 두려워 말고 법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방(室)ㆍ옷(衣)ㆍ자리(座) 등은 자비(慈悲)ㆍ인욕(忍辱)ㆍ공성(空性) 등을 가리킨다. 『법화경』에 나타난 空思想의 극치는 ‘홍경삼궤(弘經三軌)’를 존중하여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주창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홍경삼궤’의 주장으로 인해 경전의 受持ㆍ讀ㆍ誦ㆍ解說ㆍ書寫를 권장하는 풍조가 생겼다.
『법화경』의 제 2 「방편품」에서는 空을 우주의 통일적인 진리로서의 ‘일승묘법’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이 사상은 뒤이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생겨나는 단초가 된다.
『법화경』에 나타난 空사상을 체계화하여 연기(緣起)나 중도(中道)ㆍ이제(二諦) 등을 空의 입장에서 조직했던 이가 용수(龍樹, A.D.150-250)이다. 그리고 이 계통이 중관학파로 발전한 것이다.
[주제어: 空, 無我, 菩薩摩訶薩, 金剛經, 無相, 法華經, 一乘]
Ⅰ. 머리말
B.C. 1세기경 인도에서 일종의 ‘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운동이 불교에서 일어났다. 대승불교의 흥기가 바로 그것이다. 대승불교운동을 추진하던 지도자들은 기존의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폄칭하고 자신들을 ‘큰 수레’, 즉 ‘대승불교’라고 불렀다.
개혁은 불교의 근본진리관인 ‘공(空)’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소승불교도들은 ‘공’을 허무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현실생활의 영위에 방관자적인 태도를 취하여 무감동ㆍ무감각 상태에 있었다. 대승불교도들은 공에 대한 소승불교도의 그러한 사고방식 내지는 태도를 바로잡기 위해 개혁의 횃불을 들고 ‘공’의 원리적인 해명에 힘썼다. 그 성과가 경전으로 성립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반야경』이다.
『반야경』의 공관(空觀)은 직접적으로는 종래의 불교부파 중 가장 강력하였던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법실유론(法實有論)’에 대한 비판으로서, 공은 연기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연기(緣起)’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존재를 막론하고 독립ㆍ고정된 실체(我)를 소유하고 있지 않다는, 결국 ‘무아(無我)’라고 하는 말이다. 여기에서 ‘공(空)’이라고 하는 관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존재하는 것의 실상(實相)은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진리는 공이라고 한다. ‘공’이란 유(有)이든 무(無)이든 일체의 고정관념의 부정을 의미한다. 영원히 실재하고 있다는 생각(有ㆍ生)을 초월하는 것과 동시에 실재하지 않는다(無ㆍ滅)라는 사고방식도 초월할 때 공이라는 개념이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 무집착은 불(佛)도 포함하여 모든 개념설정을 부정한다. 이와 같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諸法實相)을 아는 것이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이다.
그래서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의해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이타행에 매진한다.
『법화경』은 ‘공’을 다시 적극적으로 표현해서 일승의 묘법(saddharma)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주의 통일적인 원리이다. 『법화경』에서는
부처님의 여러 교설들은 결국 모든 중생의 교화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그 이외의 제2, 제3의 길은 없다(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1)는 일불승(一佛乘)에 귀결한다는 포용적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이것을 하나의 소재로 하여 뒤이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여래장(如來藏
) 사상이 생겨난다. 그래서 『법화경』은 제경(諸經) 가운데서 제일이라고 한다.2)
1) T 9, p.8a. ; WR(1958), p.43. ; ekaṃ hi yānaṃ dvitiyaṃ na vidyate tṛtiyaṃ hinaîvâsti kadā-ci loke//
2) 我所說諸經 而於此經中 法華最第一. ; T 9, p.31b.
필자는 본고에서 『法華經』에 나타난 空思想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그 내용이 무엇이고, 어떻게 실천되었는가를 고찰함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법화경』이라고 하면 구마라집의 한역본이다.
그래서 논자는 많이 알려진 구마라집의 한역본을 가장 정밀한 판본으로 보고, 이 역본이 실려있는
『大正新修大藏經』을 이용하여 이 논문을 진행시키고자
한다. 논지 전개에 있어 논자는 구마라집 텍스트를 주축으로 하되 Wogihara, W. & C, Tsuchida(1958)의 『梵文法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sūtram』을 대본으로 참고하여 연구하기로 한다.
Ⅱ. 법화경의 구성과 성립사
법화경은 대승불교를 대표하는 경전으로서
초기불교와 부파불교 그리고 초기 대승불교로 이어지는 사상체계를 결론지은 초대승사상(超大乘思想)이다. 『법화경』은 일찍부터 인도에서 성립된 이래 서역, 중국, 한국, 일본에까지 전승되어 크게 유행하였다. 이 『법화경』은 선가(禪家)에서도 선종 제6조 혜능(慧能, 638-713)과의 에피소드로 『전등록(傳燈錄)』에 전하고 있다(心迷法華轉 心悟轉法華). 이것은 『법화경』이 동아시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법화경』의 원명(原名)은 산스끄리뜨어로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 이다. 이것을 중국어로 번역할 때 서진(西晉)의 축법호(竺法護, 231-308)는 ‘saddharma’를 ‘정법(正法)’이라는 의미로 번역(286)했고, 후진(後秦)의 구마라집(鳩摩羅什, 343-413)은 ‘묘법(妙法)’이라고 번역(406)했다. 또 ‘puṇḍarīka’는 ‘백련화(白蓮華)’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흰 연꽃은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법화경』의 원제(原題)에 대하여 축법호는 『정법화경(正法華經)』으로,
구마라집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으로
번역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통용되고 있는『법화경』은 구마라집이 번역한 『묘법연화경』이다. 또 다른 하나는 훨씬 나중인 601년에 사나굴다(闍那堀多)와 달마급다(達摩笈多)가 공역한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이다. 중국에 전해진『법화경』은 여섯 번이나 한역되었으나 이 가운데 오늘날까지 전해진 것은 위에서 기술한 세 종류가 현존하고 있다.
『법화경』의 원전은 범본인데, 이 원전을 필사한 것이 사본이다. 『법화경』원전이 인도 밖으로 널리 유포된 것은 그 사본이 인도 주변의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견된 사실로 확인된다. 사본의 형태와 유포지역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법화 신앙이 널리 유행하여 ‘법화 문화’를 형성하였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법화경』의 사본들은 발견된 지역에 따라 크게 3종으로 전해지고 있다. 즉 ①네팔 본, ②중앙아시아 본 또는 서역 본, ③길기트 본, 또 카슈미르 본이다.
이 중에서 네팔 본만이 완본(完本)으로 전하고 있다. 나머지 2본은 단편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네팔 본을 중심으로 압축해서 출판 경과를 알아본다. 네팔 본은 서사본이 영국, 프랑스, 인도, 일본 등 도서관에 약 20여 본이 전하고 있다. 이 범본사본은 성립연대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네팔 본에 한하더라도 그 원초 형태를 결정하기가 불가능한 정도다. 그리고 범본에는 불교 범어에 문제가 있어서 언어학적 연구가 상당히 필요하다.
19세기 전반에 영국의 네팔 주재 공사였던 호지슨(B. H. Hodgson,1800-1894)이 산스끄리뜨 불전의 사본을 수집한 이래, 현재까지 많은 사본이 발견되었는데, 『법화경』(saddharma-puṇḍarīka-sūtra)도 그 중의 하나다. 1880년대 초기에 막스 뮬러(Max Müller)에게서 산스끄리뜨어를 연수한 일본의 난조문유(南條文雄, 1849-1927)가 런던의 왕립아시아 협회에 소장된 사본을 서사한 후, 케임브리지 대학에 소장된 2종, 왓터스(Watters)가 입수한 사본, 가와구치 에카이(河口慧海)가 입수한 여러 사본을 대조하여 『법화경』의 산스끄리뜨 원전을 교정했다.
이 원고가 케른(H. Kern)에게 위탁되었다. 케른은 당시 러시아의 카슈가르 총영사였던 페트로프스키(N. F. Petrowski)가 입수한 것으로 코탄에서 출토된 사본을 올덴부르크(S. F. Oldenburg)의 호의로 차용하고, 중앙아시아에서 전수된 이 사본의 다른 내용을 주기(注記)하여 출판한 것이 아래의 ①이다.
① Saddharma-puṇḍarīka, ed. by H. Kern and B. Nanjio, St. Petersbourg, 1908-1912. 이 범본은 최초의 출판본으로서, 『법화경』 원전을 연구할 때 인용하는 원전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 판본에 의해 번역된 것이 네덜란드의 케른(H. Kern)의 영어번역인 ②이다.
② The Sad-dharma-puṇḍarīka or the Lotus of the True Law, tr.by H. Kern, Oxford, 1909(Sacred Books of the East, Vol.XXL).
③ 프랑스의 보르노프(Eugene Burnouf, 1801-1852)는 호지슨(B. H.Hodgson, 1800-1894)의 사본에 기초하여 불어로 번역한 것을 그의 사후에 제자인 몰에 의하여 『Le Lotus de la Bonne Loi』라는 제목으로 1925년에 출판하였다.
④ 1934-1935년에 출판된 우기하라(荻原雲來)와 츠치다(土田勝彌)의 교정본이다. 이것은 하구본(河口本)이 입수한 판본과 티벳(Tibet)어 번역과 한역(漢譯)을 참조하여 케른과 난조의 범본을 교정한 것이다;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m: Romaniged and Revised Text of theBibliotheca, Buddhica Publication by consulting A Skt. MS & Tibetan and Chinese translations by Prof. U. Wogihara and Tsuchida, Tokyo, 1934-1935.
⑤ 둣트(Dutt)가 1953년에 Calcutta에서 출판한 것도 있다. 이상과 같이 네팔에서 발견된 산스끄리뜨 원전(原典)은 세 가지 간본(刊本), 즉 KernㆍNanji 본과 WogiharaㆍTsuchida 본, 그리고 Dutt 본이 있다.
인도불교 연구에는 대부분의 경우 완벽한 자료를 얻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러므로 한역 『묘법법화경』연구를 위한 보조자료로서 범본을 활용하는 것이 동아시아의『법화경』이해에 도움은 될 것이다. 그러나 범본과 한역본의 무리한 문헌적 비교연구는 한역불전(漢譯佛典)의 독립성을 부정하게 될 수도 있다. 범본이라고 하더라도 1천년 동안 사본으로 전승되고 증광되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범본에만 의존하는 것은 올바른 연구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연구자는 범본이거나 한역본이거나 불교의 사상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불교사상사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부파불교 계통의 불교는 법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적인 정통불교이고, 대승불교는 깨달음의 체현을 통한 실천적인 행법을 중심으로 한 개혁불교이다. 대승불교는 이론에 대한 지적이해(知的理解)라 하기보다 진리를 스스로 직관하는 실천적인 지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법화경』을 결집한 대승불교 교단은 인도의 불탑신자단의 한 부류에 속하는 가나(gaṇa, 승가 또는 단체)였다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근대에 이르러 원전을 문헌학적으로 연구하여 해석하는 과정에서 『법화경』은 세 단계의 형성 과정을 거치면서 현재 남아있는 모습으로 고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화경』을 형성한 세 단계의 내용이 학자들 사이에서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약왕보살본사품」 이후의 내용은 맨 마지막에 형성되었고 그 시기를 A.D. 150년 경으로 보는 데에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법화경』은 원래 27장이었는데,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에 의해서 「제바달다품」이 제 11 「견보탑품」 다음에 첨가되어 현재와 같은 28장이 되었다. 따라서 제 12 「권지품」 이하는 1장씩 뒤로 밀리게 되었다.
천태지의 이전까지는 「제바달다」장이 없이 7권 27장이고, 천태 이후부터 7권 28장이 되었다.
근대적인 원전연구방법론자들은『법화경』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제 1류; 제 2 「방편품」부터 제 9 「수학무학인기품」까지, A.D. 50년 경 성립. 『법화경』을 처음에 형성한 내용이 여기에 있다. 그 까닭은 석가의 설법대상이 2승(소승)의 하나인 성문들인 데 비하여, 「법사품」이하에서는 보살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제 2류; 제 10 「법사품」부터 제 21(22) 「촉루품」까지, A.D. 100년 경 성립. 동시에 이 둘을 체계화하기 위해 제 1 「서품」을 만들어 마지막으로 끼워넣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법사품」 이전에는 개인의 성불에 대한 보증(수기)이 설해지고 있는데 대하여, 「법사품」부터는 사회포교의 사명부여(咐囑ㆍ囑累)가 강조되어 있다는 점이다. 수기(授記, vyākaraṇa)란 주로 소승인 성문이 일승묘법에서 자각하여 기사회생하며, 미래에 똑같이 불타가 된다는 것을 확인ㆍ증명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미래의 성불에 대한 부처의 증명, 또는 예언을 의미한다.
부촉(niksepa)이나 촉루(parindana)는 부처의 뒤를 이어서 사회포교 내지 진리의 현실적인 실천에 전념하라는 사명을 부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대승인 보살에 관계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다시 살펴야 할 것은 제 21(제 22) 「촉루품」의 위치이다.
「촉루품」의 제명(題名)은 법의 부탁ㆍ사명ㆍ부여에 대한 장(章)이다. 이 「촉루품」은 현존하는『법화경』 원전이나 구마라집 역본 이외의 책에서는 마지막에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라집 역본에서는 제 20(제 21) 「여래신력품」의 다음에 자리잡고 있다. 그 제목의 이름이나 내용을 검토해 볼 때 「여래신력품」 다음에 오는 것이 합당하며, 그런 의미에서 라집본이 가장 타당하다고 평가된다.
제 9 「수학무학인기품」와 제 10 「법사품」사이에 하나의 선을 긋는 데에 대해서는 「법사품」 이전에는 사리탑으로서의 스뚜빠(stūpa)가 설해진 데 대하여, 이후에서는 경탑(經塔)으로서의 쨔이뜨야(caitya)가 강조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관념과 사색에 빠져서 니힐리즘, 즉 불교에서 말하는 허무공견에 빠져 있던 소승불교도의 승원(僧院)주의에 대한 비판임과 동시에, 재가신자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석존의 유골(śarīra) 숭배 내지는 사리탑 숭배로 드러난 민간신앙적ㆍ즉물적인 세속주의에 대한 반성이다. 쨔이뜨야는 비판과 반성을 통해서 양자를 지양하고, 대승보살도의 진정한 정신을 확립하려고 했던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교법의 현실적 실천이라고 하는 보살행 속에서 살아 숨쉬는 부처를 보려고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상에서 결론을 맺는다면 후세에 삽입된 제 12 「제바달다품」를 제외하고 제 10 「법사품」부터 제 21(제 22) 「촉루품」까지는 보살정신의 고양, 보살운동의 추진을 핵심으로 삼는 하나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취지 아래서 이 부분이 작성되고, 「법사품」 이전의 부분에서 증광되었다고 생각된다. 더욱이 제 22장 이하는 그 후 서기 150년경까지 개별적으로 작성, 부가되었다.3)
3) 田村芳郞, 梅原猛(1989) pp.59-60.
제 3류; 제 22(23) 「약왕보살본사품」부터 제 27(28) 「보현보살권발품」까지 A.D. 150년 경 성립. 제 2류 성립 후, 일반에서 유통되던 사상이나 신앙을 순차로 도입하여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마지막 시기를 서기 150년 경으로 간주한 것은, 서기 200년 전후에 생존한 나가르주나(Nāgārjuna, 龍樹, 150-250)가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 『법화경』의 마지막 장(章)까지 인용하고 있는 논거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천태지의는 『법화경』 28품을 적문(迹門)과 본문(本門)으로 나누고, 전반의 14품을 적문이라고 하고, 후반의 14품을 본문이라 하였다. 지의의 해석에서는 전반과 후반을 다시 서분(序分;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과 정종분(正宗分; 본론에 해당하는 부분)과 유통분(流通分; 경의 공덕을 설한 부분)으로 각각 나눈다. 전반의 적문에서는 제 1 「서품」과 제 2 「방편품」의 일부를 서분으로, 제 2 「방편품」부터 제 9 「수학무학인기품」까지를 정종분으로, 제 10 「법사품」에서 제 14 「안락행품」까지를 유통분으로 분류했다.
본문의 분류는 제 15 「종지용출품」를 서분으로, 제 16 「여래수량품」에서 제 17 「분별공덕품」까지를 정종분으로, 제 18 「수희공덕품」에서 제 28 「보현보살권발품」까지를 유통분으로 분류하였다.
전반의 적문에서는 제 2 「방편품」를 중심으로 해서 우주의 무한ㆍ절대인 통일적 진리(一乘妙法)가 밝혀져 있다. 그리하여 미시적인 세계로부터 거시적인 세계까지 혼연일체가 되었다. 말하자면 우주의 실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통일적인 세계가 수립되어 있다. 또 여러 존재가 평등하게 포함되고(一乘平等), 소생되는 것이 설해지고 있다.
천태지의는 「방편품」에서 ‘開三顯一’을 정종분으로 해석했다. ‘개삼현일’이란 삼승(三乘)을 열어서 일승(一乘)을 현현한다는 뜻이다(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종래의 이러한 삼승(三乘)은 일반적으로 별개의 가르침으로 간주하고 있으나, 그것은 피상(皮相)의 견해일 따름이며 어느 것이나 모두 부처가 중생을 인도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설(說)한 것이며 진실로는 일승법(一乘法)만이 있을 뿐이다.
후반의 본문에서는 제 16 「여래수량품」을 중심으로, 현실의 석존이 먼 옛날에 성불하였고(久遠實成), 본래 영원한 부처(久遠本佛)라고 서술되어 있다. 본문에서는 ‘개근현원(開近顯遠)’이라고 하였는데, 가까운 것을 열어 먼 것을 현현한다는 것은 역사적 석가모니불을 통해 구원(久遠)의 부처를 나타낸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불신상주관(佛身常主觀)이 재창되고 있다. 불(佛)의 본성(本性)에 관하여 이와같은 사색을 계기로 그 후 불신론(佛身論)이 급속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법화경』의 사상은『열반경』의 ‘실유불성(悉有佛性)’사상으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법화경』에 의해서 불성(佛性)을 보고, 불성에 의해서 일체 중생이 성불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다.
전반과 후반을 관련시켜 고찰하면 우주의 통일적 진리로서의 일승의 묘법은 단순한 자연의 이법이 아니고, 우리들의 인생, 생활에 작용하는 생명적ㆍ인격적 활동체라는 것, 즉 우주의 통일적인 진리가 있는 곳, 그곳에 영원한 인격적ㆍ생명적인 활동, 결국 ‘구원본불(久遠本佛)’이 드러 난다고 하는 것이다. 혹은 ‘구원본불’은 일승묘법의 살아있는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의 적문과 본문은 이 양자가 서로 상응할 때 법화정신(法華精神)을 완성시킨다는 것이 천태지의의 해석이다.
Ⅲ. 법화경에 나타난 空思想의 背景
사람은 태어나는 것과 동시에 장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보다 훌륭한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라고 교육되고 육성되어 왔으며, 또 자각해 왔다. 따라서 사람은 사회의 발전과 평화를 염원하면서 제각기 자기 분야에 어울리는 사회적 실천을 행하는 동시에, 스스로도 그런 실천을 통해서 인간적, 인격적 존재로서 바르게 자기를 창조하고, 인간성을 연마해 가야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부여된 사명이다.
이런 과제를 놓고 이미 과거의 오랜 기간을 통해, 양의 동서를 가릴 것 없이 많은 철인들이 대결해 왔었다. 여기서는 인류의 긴 역사 위에 주어진 최대의 유산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이것을 구하여, 밝혀 보려고 한다.
사람은 삶을 받고 나온 맨 처음의 걸음 이래, 남과 격리되어 전혀 다른 자기만의 모습을 발견하지는 못한다. 이 사실을 이미 ‘사람’이라는 단어가 말해주고 있다. ‘사람’이라는 단어가 자기를 의미하는 동시에 남을 의미한다는 것은 사람 자체가 자기와 남과의 관계 위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의지하여 성립하고 있으므로, 주체적인 것도, 객체적인 것도 실체(實體)와 같이 언제나 불변하는 것으로 포착할 수는 없다. 즉, ‘나’ 또는 ‘나의 것’과 같이 고집될 것은 없는 것이다.
이 “서로 의지해서 거기에 어떤 것이 나타나 있는 것”을 불교의 술어로는 연기(緣起)라고 한다. 산스끄리뜨어로서는 쁘라띠땨 사무뜨빠다(pratītya-samutpāda)라는 말을 번역한 것으로, ‘의지해(dependent) 일어 나는 것(origination)’이라는 뜻이며, 일어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로부터,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의지해 일어나 있는 것’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이 연기를 하나의 틀(型)로서 제시한 것은,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으며,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은 없으며,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도 멸한다.”4)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것이라 하는 것은 연(緣)을 말한 것이어서 즉 조건을 가리키며, 저것이란 존재를 말함이다.
따라서 이 틀은 여기에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저기에 응한 조건이 있어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 또 그런 조건 자체도 처음부터 고정해 있는 것이 아니고,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된다.
즉,
연기라는 것은 ‘인연생기(因緣生起)’라는 의미로서 모든 것은 서로 인(因)이 되고 서로 연(緣)이 되어 생기(生起)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는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도움으로써 성립, 유지된다. 이 특질(dhātu)은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든 안 하든 법으로 획정되어 있다.”5)고 한다.
4) 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 ; 雜阿含經(T 2) p.67a.
5) 若佛出世 若未出世 此法常住. ; 雜阿含經(T 2) p.84b.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님이 깨달았다고 하는 ‘연기’의 교설은 우리의 고통스러운 존재양상을 미혹으로 파악하고, 그 미혹의 존재를 초래하는 근본적인 조건을 멸함으로써 미혹을 초극하는 길을 제시한다. 결국 연기
의 교설은 현실에 있어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삶을 노(老)ㆍ병(病)ㆍ사(死) 등의 연기의 지분(支分) 즉 ‘법’으로써 밝힌 것으로, 인생의 진리이다.
연기의 도리에 의한 인간존재의 본연의 모습을 법의 입장에서 밝힌것이 ‘십이연기설’이다. 십이연기설은 연기관으로서는 완비된 체계이다.
십이연기설에 있어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점은,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하면 생사의 과정을 통하여 어떤 불변의 자아가 있음으로 해서 그 과정을 통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만 조건적으로 생기하는 제법의 연속으로서의 인간존재라는 현상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미래의 생(生)으로 다시 태어남에 있어서 전후 양 존재의 관계는 같은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니라고 한다.
예를 들어, 불이 한 연료(五蘊이라는)를 다 태우면 다른 연료로 옮겨가나 그 옮겨진 불은 앞의 불과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는 것이다. 같다고 생각하면 무아설에 배반되는 상주론(śāsvatavāda)에 빠지고, 다르다고 하면 인격의 연속성을 무시하기 때문에 도덕적 인과율과 책임을 부정하는 단멸론(ucchedavāda)에 빠지게 된다고 하여 부처님은 이 두 견해를 배척하고 자신의 입장을 중도적인 것으로 규정한 것이다. 부처님 당시의 우빠니사드적인 인간관이나 유물론적인 인간관, 또는 숙명(niyati)에 의한 결정론이나 우연에 의한 무결정론을 모두 배척하고 부처님은 연기론에 입각한 인간관을 설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은 연기관을 중시하여 말하기를 “연기를 본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본 자는 연기를 본다.”6)고까지 말한 것이다.7) 그래서 칼 야스퍼스는 “불교의 교리는 연기설에 근거를 둔 힌두 철학의 완성같이 보인다.”8)고 주장했다.
6) 中阿含經(T 1) p.467a.
7) 길희성(1984) pp.55-56.
8) Karl Jaspers(1962) p.33.
연기설은 결국 나라고 하는 존재에 있어서의 주체적인 것과 객체적인 것은, 그 어느 것이나 조건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고, 그 어느 것도 실체적(實體的)으로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는 여기에서 주체적이니 객체적이니 말한 것도, 사실은 그런 주객의 고정한 모습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모든 실체적 존재가 부정되는데, 이것을 불교에서는 무아(無我,anātman)라고도 공(空, śūnyatā)이라고도 불러왔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생겨나고 없어지고 하여, 항상 변화해 마지않는 현실의 모습을 알려 준 것으로서, 무엇 하나라도 이것이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이런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애증(愛憎)의 고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입멸 후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서 그의 법과 율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과 전승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처님의 생존시에는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여러 의구심과 논란이 일어나도 그의 개인적인 높은 인격과 카리스마에 의하여 교단이 통일과 화합을 유지할 수 있었다. 부처님이 입멸한 후 교단은 그에 비견할 만한 정신적 지도자도 없었고, 교단의 통일을 유지할 만한 어떤 교권적 제도를 가지지 않았다. 따라서 불교는 지리적 양적 성장에 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서로 다른 전통을 전수하게 되었다. 또 교단의 권위주의도 싹트고, 경전 내용의 해석에도 이설(異說)이 제기되어, 일단 교단도 학설을 달리하는 학파에 의해 분열(B.C.350~B.C.1)되기에 이르렀다,
제일 처음의 공식적인 교단분열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는 것을 표방하는 소수파의 장로들을 중심으로 한 상좌부(Sthaviravāda)와 교리와 교단의 규율에 있어서 신축성을 허용하는 진보적인 대중부(Mahāsaṃghika)와의 분열이었다.9) 승가는 화합을 중히 여기는 출가 구도자의 모임이지만 승가도 인간사회인 만큼 때로는 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이런 교단의 분열은 아마도 아쇼까(B.C.268~232)왕의 불교 지원에 힘입어 불교가 융성함에 따라 더욱더 세분되어 급기야 상좌부와 대중부 근본2부를 중심으로 18개의 부파가 파생하게 된 것이다.10)
9) E.J.Thomas(1951) pp.27-41.
10) E.J.Thomas(1951) pp.27-41.
상좌부는 불타의 전통을 가장 충실히 전수한다고 자부했지만, 상좌부는 일찍부터 인도의 본토에서는 그 맥이 끊어졌고 단지 스리랑카에서 그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인도 본토에서 소승불교를 대표하고 사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한 부파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 Sarvāstivāda)였다.
설일체유부가 상좌부로부터 언제 파생되어 나갔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아쇼까 왕의 때에는 이미 하나의 독립된 분파로서 마투라 지방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불멸 300년 경에 설일체유부에서 갈라진 학파인 독자부(犢子部, Vātsīputrīya)는 베나레스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음이 7세기 전반에 현장(622∼664)이 쓴 『대당서역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학파들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의 근본정신에서 벗어나는 학설을 주장하는 학파로 나타났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무아(無我)의 사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불교의 가장 중심을 이루는 것이었다.
설일체유부에서는 연기의 이치를 설하면서 제법의 실체(實體, svabhāva)와 현상(現相, lakṣana)을 구별하여 제법의 현상은 순간적으로 변하나 실체는 영원한 것으로 간주하는 일종의 다원적이고 실재론적인 사상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제법의 무아와 무상을 강조하는 원시불교의 현상주의적인 철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또한 독자부에서는 사람에게는 뿌드갈라(Pudgala)라는 윤회나 기억의 주체가 되는 것이 있는데, 마음의 작용이나 물질적인 여러 가지 존재요소는 원래부터 있는 것이라 하여, 항상 변하지 않는 실체적인 나를 인정하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고찰한 설일체유부와 독자부의 이론들은 원시불교의 근본적인 세계관인 무아의 사상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집착을 버리기 위해 출가하여 속세를 떠났던 승려들이, 도리어 그 집착을 허용하는 이론을 지니게 된 것이 된다. 이런 교단의 여러 파는 왕후ㆍ장자들의 지원 아래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의 기반을 갖고, 사원에서 자기 깨달음을 위해 수도할 뿐 일반 민중을 제도할 생각을 망각해버린 사조였다.
이러한 교단적 상황에 대한 재가자들의 종교적 각성에서 일체중생을 제도할 것을 목표로 삼는 새로운 대중적 불교를 제창하고 B.C. 1세기경에 일어난 것이 대승불교이다. 대승불교자들은 자신의 이익뿐만 아니라 생사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는 이타행을 강조하는 행동주의적인 불교를 제창하고 나왔다. 이러한 대승의 이상을 가장 잘 표현해 주는 것이 보살(菩薩, Bodhisattva)의 개념이다.
보살이란 상세하게는 ‘보디삿뜨와 마하삿뜨와(Bodhisattva Mahāsattva)’ 라고 한다. ‘보살’이라는 말은 보리살타(菩提薩陀, Bodhisattva)의 약어이며 ‘보리살타’라는 말은 범어로서 보리(Bodhi, 覺)를 추구하는 有情(sattva),
혹은 ‘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자’라는 뜻이다.
‘마하삿뜨와(Mahāsattva)’란 위대한 사람(大士ㆍ摩訶薩)이라는 의미이며, 불타가 되겠다는 커다란 서원을 세우고 고된 수행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보살에게는 자기가 불타가 될 수 있는 소질(佛性)을 갖추고 있다는 신념이 없으면 안된다. 이 점이 소승과 다른 대승의 독자적인 입장이다.
소승불교에서는 보살이란 어디까지나 석가모니 佛과 같이 특별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위였고 佛이든 보살이든 다 범부중생들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이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승불교도들은 바로 이러한 보살의 이상을 보편화하여 누구든지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다름 아닌 석가모니불이 이룩했던 것과 같은 성불 그 자체였던 것이다. 이 자기인식의 상위가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대승불교를 받드는 사람은 출가ㆍ재가의 구별 없이, 이 자각을 철저히 지녀 모든 중생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해서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자비 구제의 이념이 대승을 추진한 핵심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모든 사람이 손쉽게 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므로, 저절로 이미 깨달음을 얻은 부처나, 깨달음을 구하려 애쓰는 보살들의 힘을 빌어서 이것을 실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오늘 우리가 그 이름을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많은 부처나 보살의 존재를 생각하며, 이를 인정하게 되었으나, 그것들은 한 결같이 역사적 인물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미지를 확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깨달음을 보편화함에 따라 三世, 十方에 걸친 많은 붓다를 상정하고, 그 각각에 중생구제의 힘을 위탁하였다. 그래서 역사적인 육신의 석가모니는 초월적 붓다의 化現(化身)에 지나지 않는다.
초월적인 붓다는 법(法, 진리)을 體로 하는 것(dharmakāya, 法身)으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이 이미 세상에 없는 석가에게서 시간, 공간의 제약을 넘은 생명을 발견함으로써, 그것을 부처라 파악하고, 보살이라고 파악 새 자비의 생명을 창조한 것이었다.
이 신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런 부처와 보살의 존재를 믿고, 그 힘을 빌려 보살로서의 행에 힘쓸 것을 기원하게 되어, 그런 속에서 북돋워져 왔던 많은 사색과 신앙을 풍성한 창조적 표현으로 기록해 나간 결과, 그들의 대승경전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그런 경전 중에는『법화경』이나 『무량수경』도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의 입장에서 보살사상을 일반화한 것이『반야경』이었다. 그 때문에 대승은 ‘보살마하살승(菩薩摩訶薩乘)’으로 불리고 있었다.11)
『반야경』은 ‘보살마하살’의 존재방식으로서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음’ 을 강조한다.12) 이 무집착은 佛도 포함하여 모든 개념설정을 부정한다.
그 근저에 있는 것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法)은 모두 그러한 고정된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空), 그 실체는 不可知(不可得, 無所得)라는 견해이다. 이와 같이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眞如, 諸法의 實相, 法性)을 아는 것이 ‘반야바라밀(prajñāpāramitā)’이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의해 깨달음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이타행에 매진한다.
11) 摩訶般若波羅蜜經(T 8) p.247b.
12) T 8, p.427c.
『반야경』에는 장ㆍ단의 여러 종류가 있으나, 주요 사상은 空思想으로서 제법(諸法)은 자성(自性, svabhāva)이 없이 空하며 이것이 諸法의 實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소승불교, 특히 설일체유부에서 法을 實體視하는 경향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으로서 대승불교 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다. 空은 연기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다. 반야바라밀의 반야(prajñā)는 ‘慧’라고 번역되는데, 그것은 空의 지혜, 집착이 없는 지혜이며, 전체를 직관하는 지혜이다. 諸法이 空함을 깨닫는 것이 반야, 즉 지혜(prajñā)이며, 이러한 지혜에 입각하여 보살은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이다.
대승경전으로서 가장 일찍 나타난『반야경』도 모두 한때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연대는 經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대략 기원 1세기 중엽에는 원시적 형태의 經이 나타났고, 그 후 점차로 늘어가서 여러 가지 형태의『반야경』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통설이다.
이 중에서 가장 초기에 성립된 것은 소품반야(小品般若)계통의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이며, 이를 받아 대품반야(大品般若)계통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이 생겼고, 그리고 그 다음에 『대반야경』 600권이 이루어졌
다고 한다. 『금강반야바라밀다경, Vajracchedikā-prajñāna-pāramitā-sūtra』 도 일찍 성립된 경전이어서, 기원 2세기 후반에 된 것이라고 한다.13)
그래서 필자는 먼저 空의 의의에 대해 고찰한 후, 『금강경』에 나타난 空思想을 압축 일별함으로써 사상사적인 관점에서 『법화경』에 나타난 空思想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空(śūnya)은 어의적으로는 어느 곳 A에 어떤 것 B가 없다는 것으로서, 교의적으로 우리가 외적ㆍ내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bhāva=dharma, 法)에 그 고유 불변의 實體(svabhāva, 自己存在)가 없다(無自性)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존재의 진실된 존재방식, 즉 緣起를 나타내는 것으로 존재의 부정은 아니다. 그리고 실천론적으로는 우리가 실유로 생각하여 집착하는 ‘나, 나의 것’의 관념의 제거, 결국 無我의 주장과 동일하다. 나, 나의 것의 空이 관조될 때 열반에 들어가지만, 그것은 또한 언어표현을 끊은 세계, 오직 체득되어야 할 세계이다.
그러나 열반도 또한 空임에는 예외가 없다. 그리하여 空에는 언어표현을 끊는다는 의미가 부가된다. 소위 희론적멸(戱論寂滅)이 그것이다. 그 것은 또한 일체의 개념규정의 부정, 배제라고 할 수 있다.14)
이러한 공의 사상은 원시불교의 ‘제행무상’15)이나 ‘제법무아’16)라는 관념을 받아들인 사상이다. 空思想은『아함경』17)이나 아비다르마 불교18)에도 있지만 이 空思想을 더욱 심화시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은 空이라 하고, 법이 空함과 법에 자성이 없음을 분명히 했던 것은『금강경』이다.
13) 『금강경』의 내용 구조 개요는 김선근의 “『금강경』의 교학적 위상과 조계종”,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승가교육 제7집, pp.34-40을 참조하였다.
14) 高崎直道(1988) p.92.
15) Dhammapada, 277.
16) Dhammapada, 279.
17) T 2, p.745c.
18) 阿毘達磨大毘婆沙論(T 27) p.540a.
『금강경』은 그 교리적 표현이나 경의 형식이 소박하고 ‘空’이라는 술어를 쓰고 있지 않으면서도 空思想을 설명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문을 들면 다음과 같다.
"무릇 있는바 상(相)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라(諸行無常).
만약 모든 상(相)을 상이 아님(非相)을 직관한다면(諸法無我),
곧 여래(如來)를 보는 것이니라(涅槃寂靜).19)"
19)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如理實見分(T 8), p.749a. ; Conze(1958)
p.30. ; yāvat subhūte lakṣaṅa-saṃpat tāvan mṛṣā, yāvad alakṣaṅa-saṃpat tāvan namṛṣeti hi lakṣaṅa-alakṣaṅatas Tathāgato drāṣṭavyaḥ//
이 사구게는 『금강경』의 제일 사구게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화합에 의한 것이므로 영원한 실체가 없는 허망한 것이라는 말이다(제행무상).
그러므로 모든 상이 영원한 실체가 아님(비상)을 깨달으면 (제법무아) 그 즉시 부처님이 된다는 것이다(열반적정). 이 사구게의 가르침은 초기불교의 특징적 가르침인 三法印을 철저히 계승하여 나타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불타는 이 사구게를 설하여, 인연으로부터 생긴 모든 법은 모두 幻化와 같이 허망한 것이므로 相이 아닌 것으로 직관하면 거기서 法身如來를 체득한다 하여 法空思想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와 같이『금강경』은 초기불교의 핵심본질인 삼법인을 정확하고도 창조적으로 계승 심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법(理法)을 체득하는 것이 無上正等正覺이다. 그 이외에 어떠한 무상정등정각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진실한 이법도 집착해서는 안되며, 이법이 아닌 것을 집착해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이 취지에 의해 부처님은 항상 “그대들 비구들아, 내 가르침을 뗏목의 비유와 같은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은 이법조차도 버릴 것이다. 하물며 현상에 태어나는 법(非法)같은 것에 있어서랴”라고 말씀하셨다.20)"
20) “是故 不應取法 不應取非法. 以是義故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
捨 何況比法.” T 8, p.749b. ; Conze(1958) p.32. ; tat kasya hetoḥ? na khalu punaḥ Subhūte bodhisattvena mahāsattvena dharma udgrahītavyo na-adharmaḥ. tasmādiyaṃ Tathāgatena sandhāya vāg bhāṣitā: kolopamaṃ dharma-paryāyam ājānadbhir dharmā eva prahātavyāḥ prāg eva-adharmā iti//
이와 같이 空의 인식은 집착과 대립을 초월하기 위해 설해진 가르침 자체도 집착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천은 이러한 空觀에 기초를 둔 것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모든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 Bodhisattva-mahāsattva)은 마땅히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색(色)에 머물어서 마음을 내지 말며,
마땅히 소리(聲)와 냄새(香)와 맛(味)과 느낌(觸)과 법(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집착을 떠나 그 마음을 일으켜야한다.21)"
21) “諸菩薩摩詞薩 應如是生淸靜心
不應住色生心
不應ㆍ住聲ㆍ香ㆍ味ㆍ觸ㆍ法生心ㆍ
應無所住 而生其心” 莊嚴淨土分(T 8)
p.749c. ; Conze(1958) pp.35-36. ; tasmāt tarhi Subhūte bodhisattvena mahāsattvenaivam apraṣṭhitaṃ cittam utpādayitavyaṃ yan na kvacit-pratiṣṭhitaṃ cittam utpādayitavyaṃ, na rūpapratiṣṭhitaṃ cittam utpādayitavyaṃ na śabda-gandha-rasa spraṣṭavya-dharma-pratiṣṭhitaṃ cittam utpādayitavyam//
간단히 말하면,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이 되지만,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집착을 버릴 수 있을까. 『금강경』에서는 ‘보살마하살’의 마음을 실천하는 길이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과 수자 상(壽者 相)이 있다고 한다면 곧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니라.22)
22) “須菩提若菩薩 有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 卽非菩薩.” 大乘正宗分(T 8)
p.749a. ; Conze(1958) p.29. ; na sa Subhūte bodhisattvo vaktavyo yasya-ātma-sāmjñā pravarteta, sattva-saṃjñā vā jīva-saṃjñā vā pudgala-saṃjñā vā pravarteta//
㉡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無我法(nirātmāno dharmā)에 통달한 자이면, 여래는 이 사람을 참된 菩薩摩訶薩(Bodhisattva-mahāsattva)이라 말하느니라.23)'
23) “須菩提 若菩薩 通達無我法者 如來說 名眞是菩薩.” 究竟無我分(T 8) p.751b. ; Conze(1958) p.50. ; yaḥ Subhūte bodhisattvo nirātmāno dharmā nirātmāno dharmā ity adhimucyate, sa Tathāgatena-arhatā samyaksambhuddhena bodhisattvo mahāsattva ity ākhyātaḥ//
대승불교의 윤리적 이상은 보살이며, 이는 소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인 阿羅漢(arhat)과 구별된다. 소승의 대표적 部派인 說一切有部(Saravāstivāda)는 ‘我空法有’ 의 입장을 취하여, 즉 사람은 空하나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은 항구적으로 존속한다는 ‘三世實有 法體恒有’를 주장하였다.
위의 본문 ㉠은 대승불교운동가들이 대승운동을 전개할 당시, 인도의 모든 사상, 즉 正統派(āstika)나 非正統派(nāstika)의 實在論的 견해를 논파하여 正論을 세우기 위해 四相을 부정하고, 諸法은 自性(svabhāva)이 없이 空하며 이것이 諸法의 실상이라는 것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금강경』은 보살됨의 조건이 無相의 실천이라고 규정하였던 것이다.
또한 ㉡은 『금강경』의 이상적 인간상인 보살마하살(Bodhisattva-mahāsattva)의 정의는 무아법(nirātmāno dharmā)에 통달한 사람이라고 설하고 있다.
즉 ‘보살마하살’이란 無我(anātman)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한다. 『금강경』은 초기불교의 이상적 인간인 無我를 無相으로 재해석하여 當代의 인도 모든 사상의 短見들을 타파하면서 회통한 새로운 菩薩乘(Bodhisattva-yāna)
운동의 宗旨를 내걸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금강경』에서는 ‘無我法’ 의 통달 여부가 집착을 초월하는 기준이 된다.
이에 대해 「妙行無住分」 第 4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수보리야! 보살이 상(相)에 머물지 않고 행하는 보시의 복덕도 또한 이와 같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다만 마땅히 가르친 바와 같이 머물지니라.24)"
24) “須菩提 菩薩無住相布施福德亦復如是不可思量. 須菩提 菩薩但應如所敎住.” 妙行無住分(T 8) p.749a. ; Conze(1958) p.30. ; evaṃ hi Subhūte bodhisattvena mahāsattvena dānaṃ dātavyaṃ yathā na nimitta-saṃjñayām api pratitiṣṭhet//
이와 같은 실천적인 인식(認識)을 지혜의 완성(prājñāpāramitā)이라고 한다. 지혜의 완성은 수행의 목표요, 결과로서는 불타의 계위다. 지혜의 완성은 존재론적으로는 우주에 가득 차고 영원한 진리로서의 불타의 법신, 사물의 본성(法性), 깨달음의 세계(法界)이다. 지혜의 완성은 인식론적으로는 사물의 진상(眞相)이고, 공성(空性)이며, 청정, 이탈(離脫)이라고 달리 말해졌다.25)
따라서 『금강경』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Anuttara-samyak-saṃbodhi)의 인식은 四相의 부정으로, 실천적 윤리는 無住相布施로 나타났다고 볼 수있다. 『금강경』의 원리적인 空思想을 강력하게 실천하여 그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갈무리한 경전이 『법화경』이다. 그럼 다음 장에서 『법화경』에 나타난 空思想을 고찰하도록 한다.
25) 梶山雄一(1979) p.195.
Ⅳ. 『法華經』에 나타난 空思想
법(法)이 空함과 같이 법에 자성(自性)이 없음을 분명히 했던 것은『금강경』이다. 법을 무자성(無自性)이라고 보는 지(智)가 주체적으로는 ‘空智’ 로 되는 것이다. 이 空에 바탕을 둘 때 보살의 3아승지겁이라는 긴 수행도 수행으로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만일 3아승지겁의 수행을 실체적으로 파악한다면 이 수행은 일상적인 수행으로서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이다. 空에 기초를 두지 않는다면 어리석음으로부터 깨달음으로 전환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된다.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은 ‘보살불교’이다. 보살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무엇보다도 ‘空’사상이다.
이러한 空사상과 보살이라는 관념이 결합함으로써 하나의 절대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경지를 ?법화경?의 제 14 「안락행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또 보살마하살은 이 일체법이 공(空)한 것을 실상(實相)과 같이 관찰하여 뒤바뀌지도 말고 흔들리지도 말고 물러나지도 말지니라.
마치 허공과 같아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니, 모든 말의 길이 끊어져 생기지도 않고 나오지(出)도 않고 일어나지도 아니하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소유도 헤아림도 끝도 없으며,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건만,
다만 인연에 의해서 있는 것이며 전도(顚倒)된 생각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라.26)
26) “復次菩薩摩訶薩 觀一切法空. 如實相. 不顚倒 不動不退不轉
如虛空 無所有性. 一切語言道斷. 不生不出不起.
無名無相 實無所有. 無量無邊 無碍無障.
但以因緣有. 從顚倒生故.”
T 9, p.37b. ; WR(1958) p.237. ; punar aparaṃ Mañjuśrīr bodhisattvo mahāsattvaḥ sarva-dharmañ śūnyān vyavalokayati/ yathāvat pratiṣṭhitān dharmān aviparītasthāyino yathā-bhūta-sthitān acalān akampyān avivartyān aparivartān sadā yathā-bhūta-sthitān ākāśa-svabhāvān nirukti-vyavahāra-vivarjitān ajātān abhūtān anasaṃbhūtān asaṃskṛtān asaṃtānān asattā’bhilāpa-pravyāhṛtān asaṃga-sthānasthitān saṃjñā-viparyāsa-prādurbhūtān//
위의 예에서 『법화경』에 나타난 공사상이『반야경』의 空思想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 16 「여량수량품」에서는 생신불(生身佛)인 적불(迹佛)을 통하여 법신불(法身佛)인 본불(本佛)을 인식케한다. 「여래수량품」은 개적현본(開迹顯本)의 가르침이며, 석가불이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불타임을 보임으로써 「방편품」에서 밝힌 ‘불성상주(佛性常住)’를 실증하고 있다.27)
이와 같이 「여래수량품」에서는 여래의 본불(本佛)과 적불(迹佛), 즉 근본불과 제불의 응현(應現)을 뒷받침하는 空思想을 나타내고 있다. 여래가 모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설한 경전은 석가모니부처님 자신의 과거 인연(已身)과 다른 부처님의 과거인연(他身)을 설하고, 석존의 분신(分身)을 보이기도 하고 다른 제불이 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이 교설은 모두 진실하여 허망한 것이 아니라고 설하고 있다.28) 이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27) “然 我實成佛已來 久遠若斯. 但以方便 敎化衆生. 令入佛道 作如是說.” T 9, p.42c. ;
WR(1958), p.270. ; yat khalu punaḥ kula-putrās tathāgata evaṃ cirâbhisaṃbuddhaevaṃ vyāharaty acirâbhisaṃbuddho ’ham asmîti nânyatra sattvānāṃ paripācanârtham avatāraṇârtham ete dharma-paryāyā bhāṣitāḥ/ sarve ca te kula-putrā dharmaparyāyās tathāgatena sattvānāṃ vinayârthāya bhaṣitāḥ//
28) T 9, p.42c. ; WR(1958) pp.270-271.
"여래는 삼계의 모습을 참답게 있는 그대로 알고 보신다.
생사도 없고 물러나거나 나옴도 없으며, 또한 재세나 멸도하는 이도 없으며 진실도 아니며 허망도 아니며,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아시니, 중생이 삼계를 보는 것과 여래가 삼계를 보는 것이 다르니라.29)"
29) “如來 如實知見三界之相.
無有生死 若退若出. 亦無在世 及滅度者. 非實非虛
非如非異. 不如三界 見於三界.”
T 9, p.42c. ; WR(1958), p.271. ; dṛṣṭaṃ hi tathāgatena traidhātukaṃ yathā-bhūtaṃ na jāyate na mriyate na cyavate nôpapadyate na saṃsarati na parinirvāti na bhūtaṃ nâbhūtaṃ na santaṃ nâsantaṃ na tathā nânyathā na vitathā nâvitathā/ na thatā traidhātukaṃ tathāgatena dṛṣṭaṃ yathā bāla-pṛthag-janāḥ paśyanti//
이 제 16 「여래수량품」의 여래는 생사(生死)와 재세(在世)ㆍ멸도(滅度)를 초월한 절대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영원한 존재인 본불(法身佛)을 알도록 인도한 것은 적불 즉 역사적인 석가모니부처님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적불로 응현(應現)하였기 때문이 본불이 존재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래수량품」제 16에서 전개되고 있는 부처님의 영원성과 그 생명을 받은 보살들이 사람을 구제하고자하는 영원한 실천사상의 전주곡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을 단지 여래의 영원성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사상으로만 보지 말고 보살행의 창도(唱導)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법화경』사상의 핵심은 ‘보살’의 실천이다. 『법화경』에서 강조하는 보살정신은 초기 대승불교의 『반야경』에 나타난 보살도(菩薩道)를 첨예하게 묘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적 근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空’이 그 기저를 이루고 있다.
제 4 「신해품」에는 성문이 자기의 깨달음을 나타낼 때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空), 형상이 없으며(無相), 지을 것이 없음(無作)을 생각(念)한다”30)고 하였다.
30) “但念空無相無作.” T 9, p.16b. ; WR(1958) p.96. ; tato vayaṃ bhagavan bhagavato dharmaṃ deśyamānasya śūnyatā-nimittâpraṇihitaṃ sarvam āviṣkurmo//
제 5 「약초유품」에서는 “‘여래는 하나의 모양이나 한 맛인 법’을 설명할 때 ‘마침내는 공(空)으로 돌아간다’”31)고 설하고 있다. “모든 것은 空이며, 실체가 없다고 아는 사람은 바른 깨달음을 얻으신 세존들의 깨달음을 진실로 아는 것이다”32)라고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법의 공(空)함 얻어 듣고 마음으로 크게 환희한다”33)라고 하고 있다.
31) “如來知是一相一味之法. 所謂解脫相 離相滅相. 究竟涅槃 常寂滅相. 終歸於空.”
T 9,p.19c. ; WR(1958), p.116. ; so 'haṃ Kāśyapaîka-rasa-dharmaṃ viditvā yad uta vimukti-rasaṃ nirvṛti-rasaṃ nirvāṇa-paryavasānaṃ nitya-parinirvṛtam eka-bhūmikam ākāśa-gatikam adhimuktiṃ sattvānām anurakṣamāṇo na sahasaîva sarvajña-jñānaṃ saṃprakāśayām//
32) WR(1958), p.128. ; yas to śūnyān vijānāti dharmān ātma-vivarjitān/ saṃbuddhānāṃ bhagavatāṃ bodhiṃ jānāti tattvataḥ//
33) “聞諸法空 心大歡喜.” T 9, p.20b. ; WR(1958), p.122. ; ya ṛddhimantaś ca tu dhyānadhyāyino ye śūnyatāṃ śrutva janenti prītim.
『법화경』에서 보살행(菩薩行)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는 장, 즉 「법사품(法師品)」 제 10에서 사명관(使命觀)을 주창하고 있다.『법화경』의 「법사품(法師品)」에서는『법화경』을 널리 전교하는 일을 담당한 자로서 설법사
(dharma-bhāṇaka)의 가치에 대하여 설하고 있다. 이 품의 맨 앞에서 이 경전의 한 게(偈)라도 듣고, 한 생각을 일으켜 일념으로 따라 기뻐하는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褥多羅三邈三菩提, anuttara-samyak-saṃbodhi)
에 이를 것이라고 수기(授記, vyākaraṇa)하고, 34) 이 수기를 받을만한 자를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다.
34) T 9, p.30c. ; WR(1958) p.196.
1) 이 『묘법연화경』의 한 게송이라도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고,해설(解說)하고, 서사(書寫)하고, 서사하여 기억하고, 언제나 생각해내는사람들.
2) 이 경전에 따라 여래에 대한 존경심을 일으키고, 교계자(敎誡者)에 대하여 존경하고, 숭배하고, 공양하는 사람들.
3) 꽃ㆍ향목ㆍ향수ㆍ화만(華鬘, kusumamālā)ㆍ향유ㆍ향분(香紛)ㆍ의복ㆍ산개(傘蓋)ㆍ기(旗)ㆍ당번(幢幡)ㆍ음악 등으로써 또 계수(稽首: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함)ㆍ합장으로써 경전을 공양하는 사람들.35)
35) T 9, p.30c. ; WR(1958) pp.196-197.
위와 같은 식으로 미래에 정각을 얻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자의 조건을 기술하고 있다. 이 품에서는 『법화경』을 설하는 법사를 보살이라고 하면서, 법사를 따르는 자와 따르지 않는 자의 복과 죄를 설명하고 있다. 즉 재가자든 출가자든 법사에 대하여 비록 한마디라도 증오하는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깊은 죄업을 얻게 되며, 36) 이 법문을 베껴 써서 경전으로 삼아 어깨에 메는 자는 여래를 어깨에 짊어지는 자이니, 그가 가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모든 신들과 사람들이 꽃과 향과 영락과 가루향……인간 중에 가장 높은 공양을 하며, 찬탄하여 받들어야 할 것이니라.37)
‘여래의 사자(使者)’ 사상은 제 10의 「법사품」에 나타나 있다.38) 그 내용에 따르면 불(佛)의 사도(使徒)란 보살을 가리키며 이는 ‘여래사(如來使, Tathāgata-dūta)라 부른다.
이어서 이 품(品)의 중심사상인 경전을 ‘널리 알리는 방법(弘經三軌)’ 을 제시한다.
즉 여래가 열반한 뒤에 사부대중을 위하여 이 법문을 설하려면 그는 여래의 방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이 법문을 사부대중에게 설해야 할 것이라고 한다.39)
여기에서 말하는 여래의 방이란 일체 중생 가운데 대자대비한 마음이요, 여래의 옷이란 부드럽고 온화하고 욕됨을 참는 인욕의 마음이고, 여래의 자리란 일체법공(一切法空) 즉 법공(法空)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40)
36) T 9, p.31a. ; WR(1958) p.198.
37) T 9, p.31a. ; WR(1958) p.198.
38) “則如來使 如來所遣 行如來事.” T 9, p.30c. ; WR(1958), p.198. ; tathāgata-dūtaḥ sa Bhaiṣajyarāja kula-putro vā kula-duhitā vā veditavyaḥ/ tathāgata-kṛtya-karas tathāgata-saṃpretṣitaḥ sa Bhaiṣajyarāja kula-putro vā kula-duhitā vā saṃjñātavyo//
39) “如來滅後. 欲爲四衆 說是法華經者. 云何應說. 是善男子 善女人. 入如來室. 著如來衣. 坐如來座. 爾乃應爲四衆廣說斯經.” T 9, p.31c. ; WR(1958), p.203. ; yaḥ kaś-cid Bhaiṣajyarāja bodhisattvo mahāsattvas tathāgatasya parinirvṛtasya paścime kāle paścime samaya imaṃ dharma-paryāyaṃ catasṛṇāṃ parṣadāṃ saṃprakāśyet tena Bhaiṣjyarāja bodhisattvena mahāsattvena tathāgata-layanaṃ praviśya tathāgatacīvaraṃ prāvṛtya tathāgatasy’ āsane niṣadyâyaṃ dharma-paryāyaś catasṛṇāṃ parṣadāṃ saṃprakāśayitavyaḥ//
40) “如來室者. 一切衆生中 大慈悲心是. 如來衣者. 柔和忍辱心是. 如來座者. 一切法空是.” T 9, p.31c.; WR(1958) p.203. ; katamac ca Bhaiṣajyarāja tathāgata-layanam/ sarva-sattva-maitrī-vihāraḥ khalu punar Bhaiṣajyarāja tathāgata-layanaṃ/ tatra tena kula-putreṇa praveṣṭavyam/ katamac ca Bhaiṣajyarāja tathāgata-civaram/ mahā-kṣānti-sauratyaṃ khalu punar Bhaiṣajyarāja tathāgata-civaraṃ/ tat tena kula-putreṇa vā kula-duhitrā vā prāvaritavyam/ katamac ca Bhaiṣajyarāja tathāgatasya dharm’āsanam/ sarva-dharma-śūnyatā-praveśaḥ khalu punar Bhaiṣajyarāja tathāgatasya dharm’āsanaṃ//
소승불교 특히 상좌부에서 설법사(bhāṇka)는 성전 암송가로서 음악가의 일종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대승경전에 이르러 설법사는 보살이라고 칭하고 정법(正法)의 담당자로 했던 것이다. 대승경전이 정법을 호지(護持)하는 자를 법사(dharma-bhāṇaka)라고 부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법자(持法者), 法의 해설자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은 그들이 스스로 교법의 정통적인 전수자라고 나섰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 정법(正法)의 호지와 설법에 의해 경전을 유포한 것이 법공양 혹은 법보시로서의 가치를 부여받고, 종교적 실천이라는 의미에서 보살도로 받아들여졌던 점일 것이다.
이와 같이 『법화경』의 「법사품」에서는 법사를 보살을 가리키며 ‘如來使, Tathāgata-dūta’로서 홍경삼궤(弘經三軌)를 실천한다.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법화경』은 『반야경』의 원리적인 공을 강력하게 실천하여 그것을 적극적인으로 표현하여 갈무리한 경전이다. 『반야경』이 아직도 대승의 이상을 소승에 대립시켜 논하고 있는 반면에,『법화경』은 이러한 대립적 견해를 초월하여 부처님의 여러 교설들은 결국 모두 중생의 교화를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고, 그 이외의 제 2, 제 3의 길은 없다(唯有一乘法無二亦無三)는 일불승(一佛乘)에 귀결한다는 포용적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우주의 통일적인 진리로서의 ‘일승묘법(一乘妙法)’은 『법화경』에 있어서 공(空)인 진리의 적극적인 표현이다. 『법화경』은 ‘공’을 다시 적극적으로 표현해서 일승의 ‘묘법(saddharma)’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주의 통일적인 진리이다. 모든 존재는 개별적이 아니며, 서로 관계하면서 존재한다. 둘이 아닌 일체인 진리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이 둘이 아니고 일체인 진리를 『법화경』은 일승의 묘법, 즉 우주의 통일적인 진리로 표시한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일승의 묘법에 의해서 유지되고 포함되며, 전체가 하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승은『법화경』에서는 총합ㆍ통일성을 의미한다. 여래는 모든 중생을 자신의 아들과 같이 보기 때문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언제나 존재한다(久遠實成). 입멸(入滅)을 보이는 것도 중생을 격려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법화경』의 일승사상은 모든 중생을 불(佛)과 동일한 깨달음으로 인도함을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여래는 하나의 큰 인연(一大事因緣)으로 중생들에게 불지견(佛知見, 佛性)을 열어(開) 보이고(示) 깨달아(悟) 들어가게(入) 하기 위하여(開示悟入) 이 세상에 출현하였다.41)"
41) “諸佛世尊. 唯以一大事因緣 故出現於世......欲令衆生開佛知見 使得淸淨 故出現於世. 欲示衆生佛之知見 故出現於世. 欲令衆生悟佛知見 故出現於世. 欲令衆生入佛知見道 故出現於世.” 方便品 第二(T 9) p.7a. ; WR(1958) p.37.
여래가 중생을 교화시킬 때는 평등하고 고르게 법을 다음과 같이 베푼다고 설하고 있다.
"태양과 달빛은 세상을 비추는데, 선하거나 악하거나, 높은 데 있거나 낮은 곳에 있거나, 향기가 있거나 악취가 나거나 평등하게 모든 것을 골고루 비춘다. 불평등하게 비추는 일은 없다.42)"
42) “譬如日月光明照於世間. 若作善若作不善, 若高處住, 若下處住, 若香若臭. 諸處平等光照無偏”
藥草喩品 第五(T 9) 不在 ; WR(1958) p.123.
"모든 것 내가 보니 평등하고 고루하여 이것이라 저것이라 애착이나 증오하는 마음 없고 탐착하는 생각이나 걸림 또한 없음이라. 일체중생위하여 평등하게 설법하며 한 사람을 위하듯이 여러 중생 마찬가지.43)"
43) “我觀一切 普皆平等 無有彼此 愛憎之心 我無貪著 亦無限礙 恒爲一切 平等說法 如爲一人 衆多亦然.” 藥草喩品 第五(T 9) p.20a. ; WR(1958) p.119.
上記한 『법화경』의 가르침은 『금강경』第二十三 「淨心行善分」의 “復次須菩提 是法 平等 無有高下 是名 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44)의 가르침을 연상케 한다.
이것은 대승불교 흥기(興起) 당시 정통학파(āstika)의 주류인 베단따(Vedānta) 철학이나 부파불교 有部家의 자신들만의 涅槃寂靜을 추구하는 思潮를 破邪顯正하려는 대승불교 운동가들의 이상이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베단따 철학은 우주의 궁극적이고 통일적인 원리를 탐구하는 우빠니샤드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발전시킨 철학체계이다. ‘智(jñāna)’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우빠니샤드는 이른바 天啓書(śruti)라 하여 수드라 계급을 포함한 불가촉천민들은 배울 수 없는 경전으로 규정되었고, 이들로 하여금 해탈에 이르는 길에 접근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봉쇄하였다.45)
한편 부파불교는 자신들만의 涅槃을 추구하는 自利의 道(marga)이었다.
그래서 『금강경』은 그 당시 이러한 사조의 경향에 반발하여 인도의 모든 인종ㆍ종파ㆍ남녀ㆍ카스트 등의 차이를 넘어 일체중생이 모두 함께 성불(해탈)하는 혁명적인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46) 『금강경』의 이런 이상을 잘
구현한 것이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이다.
44) 淨心行善分 第二十三(T 8) p.751c. ; Conze(1958) p.54. ; api tu khalu punaḥ Subhūte samaḥ sa dharmo na tatra kiṃcid viṣmam. tenocyate’nuttara samyaksambodhir iti. nirātmatvena niḥsattvatvena nirjīvatvena niṣpudgalatvena samā sānuttarā samyaksaṃbodhiḥ sarvaiḥ kuśalair dharmair abhisambudhyate//
45) Brahma-sūtra, I.3.34.
46) 大乘正宗分(T 8) p.749a.
그리하여 대승불교가들은 ‘회삼귀일’ 사상을 보편화ㆍ대중화하기 위하여 경전의 受持ㆍ讀誦ㆍ書寫를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너희들은 여래가 열반한 뒤에 이 『법화경』을 일심으로 받아가지고 읽고 외우며 해설하고 옮겨 쓰고 설한 대로 행하라. ……왜냐하면 이곳은 곧 도량이니 여러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위없이 높고 바른 깨달음을 얻으셨고……, 여러 부처님께서 다 여기에서 열반에 드시기 때문이니라.47)"
47) “是故汝等於如來滅後. 應一心受持讀誦解說書寫如說修行. 所在國土. 若有受持讀誦解說書寫如說修行. 若經卷所住之處. 若於園中. 若於林中. 若於樹下. 若於僧坊. 若白衣舍. 若在殿堂. 若山谷曠野. 是中皆應起塔供養. 所以者何. 當知是處卽是道場. 諸佛於此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諸佛於此轉于法輪. 諸佛於此而般涅槃.”
妙法蓮華經(T 9) 6, p.52a.; 생략
「여래신력품」에서는 “그러므로 지혜 있는 사람들은 이런 공덕 이런 이익 듣고 보아 내가 열반 보인 뒤에 ?법화경?을 받들어서 가질지니 이런 사람 성불하기 결정코 의심 없다”고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법화경』에서는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사경을 하는 것이 당위라고 주장한다. 사경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하는 것이고(聞慧, śravaṇa), 항상 그 가르침에 대해서 음미하는 것이며(思慧,manana), 부처님의 마음과 계합하는 명상(修慧, nididhyāśana)이다. 우리가 무아의 일념으로 사경을 하면 자아에 그릇된 지식(mittyā dṛṣṭi)이 사라져서 자아는 욕망과 충동의 지배를 받지 않게 되고 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진흙 밭에 피어나는 맑은 연꽃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48)
48) Gītā, V, 10. ; brahmaṇy ādhāya karmāṇi saṅgaṃ tyaktvā karoti yah/ lipyate na sa pāpena padmapattram ivā 'mbhasā//
사경은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수행이다. 누구나 사경을 무아의 일념으로 정성스럽게 봉행하면 자성불(自性佛)의 자명성(自明性, svayaṃprakāśa)이 태양빛보다 더 밝게 빛나 드러나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세와 내세의 삶에서 행복해지고 보람된 인생을 살게 되어 구경엔 성불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경을 하는 것은 ‘자각(自覺)’의 길이요, 다른 사람을 사경하게 하면 ‘각타(覺他)’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사경운동은 대승보살도와 같이 ‘자각각타각행궁만(自覺覺他覺行窮滿)’의 길이다.
실로 이상과 같은 대승의 종교적 운동은 종래의 불교에 비하면 훨씬 더 종교적으로 다채롭고 풍부하다. 사실 이것은 소승불교시대에 국왕이나 부호들만이 할 수 있는 사탑의 건립이나 장원(莊園)의 기진과 같은 것에 비하면 경제력이 없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수행이다. 물론 사경운동은『금강경』의 「지경공덕분」에 발원하여49) 『화엄경』의 「보현행원품」50)에서 보편화되어『법화경』에서 만개되었다.51)
49)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勝彼. 何況書寫 受持讀誦 爲人解說. 須菩提 以要言之 是經有不可思議 不可稱量無邊功德. ; 金剛般若波羅蜜經(T 8) p.750c.
50) 言常隨佛學者. 如此娑婆世界. 毘盧遮那如來. 從初發心. 精進不退. 以不可說不可說身命而爲布施. 剝皮爲紙. 折骨爲筆. 刺血爲墨. 書寫經典. 積如須彌. 爲重法故. 不惜身命. 何況王位. 城邑聚落. 宮殿園林. 一切所有. ; 大方廣佛華嚴經(T 10) p.845c.
51) 김선근(2007b) pp.40-44.
Ⅴ. 맺음말
이상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공의 사상은 원시불교의 ‘제행무상’52)이나 ‘제법무아’53)라는 관념을 받아들인 사상이다. 空思想은『아함경』54)이나 아비다르마 불교55)에도 있지만 이 空思想을 더욱 심화시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은 空이라 하고, 법이 空함과 법에 자성이 없음을 분명히 했던 것은『금강경』이다.
『법화경』에 나타난 空사상은『반야경』의 空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제 14 「안락행품」, 제 16 「여래수량품」, 제 4 「신해품」, 제 5 「약초유품」 그리고 제 10 「법사품」에 나타나 있다.
제 10 「법사품」을 제외한 모든 品들은『반야경』의 空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법사품」에서는 법사(dharma-bhaṇaka)를 ‘如來使, Tathāgata-dūta’로 부르고 보살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살56)이 호지할 ‘홍경삼궤(弘經三軌)’를 제시하고 있다.
52) Dhammapada, 277.
53) Dhammapada, 279.
54) 苦者無我無我者空. ; 增一阿含經(T 2) p.745c.
55) 阿毘達磨大毘婆沙論(T 27) p.540a.
‘홍경삼궤’란 법사가 여래의 방(室)에 들어가 여래의 옷(衣)을 입고, 여래의 자리(座)에 앉아 두려워 말고 법을 설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방(室)ㆍ옷(衣)ㆍ자리(座) 등은 자비(慈悲)ㆍ인욕(忍辱)ㆍ공성(空性) 등을
가리킨다.57) 『법화경』에 나타난 空思想의 극치는 ‘홍경삼궤(弘經三軌)’를 존중하여 신앙의 중요한 요소로 주창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홍경삼궤’의 주장으로 인해 경전의 受持ㆍ讀誦ㆍ解說ㆍ書寫를 권장하는 풍조가 생겼다.
『법화경』의 제 2 「방편품」에서는 空을 우주의 통일적인 진리로서의 ‘일승묘법’으로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이 사상은 뒤이어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實有佛性)’의 여래장(如來藏) 사상이 생겨나는 단초가 된다.
『법화경』에 나타난 空사상을 체계화하여 연기(緣起)나 중도(中道)ㆍ이제(二諦) 등을 空의 입장에서 조직했던 이가 용수(龍樹, A.D.150-250)이다.58) 그리고 이 계통이 중관학파로 발전한 것이다.
56) 菩薩不見生死涅槃異. 由般若不住生死. 由慈悲不住涅槃. ; 攝大乘論釋論(T 31) p.247b.
57) “如來室者. 一切衆生中 大慈悲心是. 如來衣者. 柔和忍辱心是. 如來座者. 一切法空是.” T 9, p.31c. ; WR(1958), p.203. ; katamac ca Bhaiṣajyarāja tathāgata-layanam/ sarva-sattva-maitrī-vihāraḥ khalu punar Bhaiṣajyarāja tathāgata-layanaṃ/tatra tena kula-putreṇa praveṣṭavyam/katamac ca Bhaiṣajyarāja tathāgata-civaram/ mahā-kṣānti-sauratyaṃ khalu punar Bhaiṣajyarāja tathāgata-civaraṃ/tat tena kula-putreṇa vā kula-duhitrā vā prāvaritavyam/katamac ca Bhaiṣajyarāja tathāgatasya dharm’āsanam/ sarva-dharma-śūnyatā-praveśaḥ khalu punar Bhaiṣajyarāja tathāgatasya dharm’āsanaṃ//
58) “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中論(T 30) p.33b. ; Inada(1970) p.148.;
yaḥ pratītyasamutpādaḥ śūnyatāṃ tāṃ pracakṣmahe/sā prajñaptirupādāya pratipatsaiva madhyamā//
■ 참고문헌
AN: Aṅguttara-nikā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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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Concept of Śūnyatā Presented in the Saddharma-puṇḍarīka-sūtra
Kim, Sun-Keun
The two key words which occur on almost each page of the Mahāyāna writings are Bodhisttva and emptiness. What then means first of all Bodhisattva? Buddha is the one who is enlightened. Bodhisattva means literally an Enlightenment-Being. He is a Buddha-to-be, one who wishes to become a Buddha. The Bodhisattva in this sense strives for reaching the perfect Enlightenment not only for himself, but also for other sentient beings with the skill in means, through which the latent seeds of enlightenment in others can be brought out and mature. The following ist the famous passage from the Diamond Sūtra illustrating this point:
"Here, O Subhuti, a Bodhisattva should think thus: “As many beings as there are in the universe of beings - be they egg - born, as born from a womb, or moisture-born, or miraculously born ; be they with born, or without ; be they with perception, without perception, or with neither perception nor no-perception - as far as any conceivable universe of beings is conceived; all these should be led by me into Nirvāṇa, into that realm of Nirvāṇa which leaves nothing behind. And yet, although innumerable beings have thus been led to Nirvāṇa, no being at all has born led to Nirvāṇa. And why? If in a Bodhisattva the perception of a ‘being’ should take place, he would not be called an ‘enlightenment-bing’.”
Bodhisattva is a being having the two contradictory forces of wisdom and compassion. In wisdom, he sees no sentient beings at all; in compassion, he is full of firm resolve to save them. The ability to combine these contradictory forces makes him to stay in this world and to practice Bodhisattva-Path, thereby saving himself and others.
Bodhisattva, the Sūtra tells us, should cultivate these two things, with the thought: “I will never abandon all sentient beings notwithstanding the fact that all things are empty.” We must now make an effort to understand this important idea of Emptiness. Here the meaning of the sanskrit word śūnyatā deserves to be interpreted as a synonym of Non-Self. For Buddhists, emptiness is a term for the absence of self, or for self-effacement.
Emptiness is that which stands right in the middle between two extremes: affirmation and negation, existence and non-existence, eternity and annihilation. Tathāgatas teach the Dharma of the middle to be free from both extremes. This Dharma is now called emptiness. The following famous passage from the Diamond Sūtra illustrates this point well:
The lord said: “Wherever there is possession of marks, there is fraud, there is fraud, wherever there is no-possession of no-marks there is no fraud. Hence the Tathāgata is to be seen from no-marks as marks.”
From the other point of view, the emptiness is called Suchness (tathatā), because the emptiness is realized, when the real nature of the thing is seen, without superimposing any ideas upon it.
At the level of the world of conventional Truth, the Lotus Sūtra appears to accept the Madhyamaka doctrine of emptiness. A world where spiritual progress is paramount, truth very often depends upon context. Here is a very famous passage from the XIV chapter (安樂行品) of the Lotus Sūtra to illustrate this point :
"Further, a Bodhisattva Mahāsattva looks upon all phenomena as emptiness. He sees them duly established, remaining unaltered, as they are in reality, not liable to be disturbed, not to be moved backward, unchangeable. It is existing in the highest sense of the word, having the nature of space, escaping explanation and expression by means of common speech, not born, composed and simple, aggregated and isolated, not expressible in words, formless, really without existence, innumerable infinite, independently established, unrestrained, only existing by causes, and manifesting themselves owing to a perversion of perception."
The IV chapter(adhimukti-parivarta, 信解品) of the Sūtra reads:
“All is emptiness, non-form, and non-action.”
The V chapter(Oṣadhī-parivarta, 藥草喩品) of the Sūtra also speaks:
"But the Thus Come one(如來) knows that this is the Law of one form, one flavour, namely, the form of emancipation, the form of separation, the form of extinction, the form of ultimate nirvāṇa, of constant tranquility and extinction, which in the end finds its destination in emptiness(終歸於空)."
The feature of laudatory self-reference, a characteristic of early Mahāyāna Sūtras, is very much to the fore in the Lotus Sūtra. If a person hears just one verse of the Sūtra and rejoices in it for even a moment, the Buddha predicts that person to realize the Perfect Buddhahood. The Sūtra should be not only recited and promulgated, but it needs to be worshipped, as if it were the Buddha himself, with “sundry-offerings of flower perfume, necklaces, powdered incense, perfumed paste, burnt incense, silk canopies and banners, garments or music.” Those who preach the Sūtra will themselves see the Buddha - the Lotus Sūtra enjoins active missionary work in promulgating the Sūtra and its teaching as follows:
"After entering the abode of the Tathāgata, putting on his robe and sitting down on my seat, the preacher should, undaunted, expound this sūtra. The strength of charity is my abode. The apparel of forbearance is my robe. And emptiness is my seat. Let the preacher take his stand on this and preach."
Therefore, the principal message of the first half of the Lotus Sūtra is: the Buddha’s skill in means, the doctrine of the one Vehicle, and the complete joy of the Buddha’s disciples in finding that they will, indeed they must, attain Perfect Buddhahood.
The teaching of skill in means (or skilful means) is a crucial ancillary of one among the other principal doctrines of the Lotus Sūtra, that of the one Vehicle (ekayāna). The Buddha has employed his skill - in means and devices (upāya/ upāyakauśalya) in order to adapt his teaching to the level of his hearers. The concept of skill in means extends to the core of Mahāyana spirituality, and is one of the central teachings of the Lotus Sūtra. Due to the issues around this concept, it has enabled the success of the Lotus Sūtra in East Asian countries.
Broadly speaking, the teaching of skill in means demonstrates the Buddha’s compassionate to adapt his teaching to the level of his hearers. The teaching, however, should be regarded as the ladders, or, to use an age-old Buddhist image, as a raft being employed to cross a river. There is no need to keep up with carrying the raft even though the journey has been already done. When used, such a teaching transcends itself.
According to Nāgārjuna in his Mūlamadhyamakakārika XXIV, 18, it is dependent origination (pratītyasamutpāda) that we call the emptiness (śūnyatā). We might gloss this by saying that it is because entities originate in dependence on causes and conditions that they are empty. Here, emptiness is identified with the lack of inherent existence (niḥsvabhāva).
In China, particularly in the Tien-t'ai tradition, the teaching of the Lotus Sūtra was linked with that of the Mahāparinirvāṇa Sūtra, which advocates the tathāgatagarbha doctrine, and also with that of the Awakening of Faith in Mahāyāna.
Key words: Śūnyatā, anātman (doctrine of Non-self), Bodhisattva, Vajracchedikā Sūtra (The Diamond Sūtra), animitta, skill in means, Saddharmapuṇḍarika Sūtra (The Lotus Sūtra), ekayāna (One Vehicle).
접 수 일: 2009년 07월 15일
심사수정일: 2009년 07월 16일-08월 10일
게재확정일: 2009년 08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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