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스크랩] 당대 선자들의 機緣 문답과 깨달음*

수선님 2019. 2. 10.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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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선자들의 機緣 문답과 깨달음*


강 문 선
(동국대학교 불교학부 교수)


Ⅰ. 서 언
Ⅱ. 마조계 선자
  1.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부처(卽心是佛)
  2. ‘이게 뭐지(是什摩)’
  3.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Ⅲ. 석두계 선자
  1. ‘바로 이놈(只這箇漢)‘
  2.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非思量)
Ⅳ. 결 어



<논문 요약>


본 논문은 ‘깨달음’을 지향하는 중국 당대 혜능 문하의 마조·석두계 선자들의 문답을 통해 그들의 깨달음을 고찰하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선의 원상(原像)과 또한 각 선자들의 ‘깨달음’의 표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선종사서의 최고(最古)문헌격인 당말 오대에 편집된 ?조당집?과 송대의 선적인 ?경덕전등록?을 중심으로 고찰 해 보았다.


이러한 양 선계의 선법의 전개를 살펴보면, 그들은 ‘즉심시불’의 이념을 축으로 하여 결국 양 측은 반야 공관적 선으로 귀착해 감을 살필 수 있었다. 우선 출발은 마조와 석두는 대립적 선의 성향을 가진다.

마조는 ‘작용이 바로 본래성’이라고 하지만 석두는 ‘작용을 제각한 마음’ 이 본래성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의심하는 선자들에게는 그들은 선자를 곧 바로 불러(=是什摩) 깨치게 하였다. 그러나 각 계통은 변동이 일어난다. 마조계는 ‘즉심시불’를 정면 부정하는 ‘비시비불’ ‘부시물’의 선을 보이고 석두계는 ‘바로 이 놈(本來性)’에서 ‘비사량’ ‘방하(放下)’의 선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 모든 선은 궁극에는 ‘일상에서 부처를 보는 것’이었다. 당대의 선장은 이처럼 문답으로 깨치게 하거나 접근하게 했으며 깨달음을 설명하지 않았다. 당대 선자들의 문답은 결국 깨침의 기연이 되었다.


주제어: 즉심시불, 부시물, 비심비불, 비사량, 조당집.



Ⅰ. 서 언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종지로 하는 선종이 하나의 실체적인 세력으로 중국사의 표면에 등장한 것은 초당말에서 성당기(712-781)에 걸쳐서이다. ‘동산법문’을 자칭하는 대통 신수와 그 문하의 보적·의복 등이 측천무후, 중종, 예종, 현종의 귀의를 받고 장안, 낙양의 종교계에 군림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러나 현종의 개원(開元)년간이 끝날 즈음, 무명의 승이었던 하택 신회가 보적 비판운동을 개시하고 공개법회를 열어 신수계는 홍인의 적류(嫡流)가 아니고 소주의 혜능이 달마선의 제육조이며 신수, 보적의 일문은 ‘점오’를 설하고 ‘돈오’를 설하는 혜능의 법문이 정통의 ‘남종’이라고 한 것이다. 신회는 그 후 쇠잔하게 사라지지만 만년에 발발(勃發)한 ‘안사의 난’을 계기로 각지에서 선종의 새로운 여러 파가 다투듯 일어났다. 중원에는 북종계가 이어져 가고 사천에는 정중무상의 정중종과 보당사의 무주의 보당종, 사천에서 낙양으로 진출한 하택종이 나타나고, 강남에는 우주법융을 조(祖)로 한 우두종이 등장했다.
난(亂)에 의해 정치 문화의 중심이 각지로 분산하고 신회운동에 의해 달마선의 계보의식이 상대화된 것, 등이 내외양면의 다원화의 추세가 그 배경이었다. 각지에서 흥기한 그러한 모든 종파 가운데서 중당기,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것이 홍주종, 즉 강서의 마조도일의 일파였다.


금일에 이르기까지 선종의 전통은 사실상 그 기점이 마조선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황발굴의 문헌에서 나타나듯 초기선종의 등사나어록은 있어도 마조이후의 선계의 어록이나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으며1) 또한 마조이후 선록에는 초기선종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시 마조계는 중국선종의 초기와 마조이후를 분명 획을 긋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중기선(750-1000년경)에 해당되는 당대 선은 육조 혜능의 남종선이 남악계와 청원계의 이대(二大)계보로 나누어져 발전한 역사로서 차례로 이어져 가고 다시 이 두 계보는 오가(五家)로 형성해 나가며 이러한 계보는 다시 송대선(950-1300년경)으로 이어져 칠종(七宗)이 된다.2)

이러한 선종계보의 선자들은 그 계보는 다르지만 어디까지나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이고 이를 위하여 선자들은 서로의 일문일답의 형태를 갖춘 ‘문답’으로서 접화하고 접근하였음을 살필 수 있다.


본 논문의 목적은 이러한 ‘깨달음’을 지향하는 당대의 선자들의 기연문답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그들의 선법의 특질과 변화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는 당대의 선의 원상(原像)을 살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각 선자들의 ‘깨달음’의 표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선종사서의 최고(最古)문헌격인 당말오대에 편집된 ?조당집?(952)과 송대의 선적인 ?경덕전등록?(1004)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20세기초두에 돈황문헌이 출토되고 그 속에서 미지의 선종문헌이 다수 발견된다. 그 내용으로 보면 초기선종의 등사나 어록만이 전해질 뿐이고 마조이후의 선의 자취는 발견할 수 없다. 傳世자료에는 마조이후의 선종에 의해 재 구성된 전승이 기록되고 반면에 초기선종의 것은 다소 희미하게 전해짐을 기록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대표적으로 당오대 福建의 설봉의존의 법손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 편집된 禪宗史書『조당집』(952)에서다.
2) John R. McRae, 『虛構ゆえの眞實-新中國禪宗史-』, 東京:大藏出版, 2112) p.27
중국선의 발전단계를 원시선(500-700년경)-보리달마와 혜가, 초기선(600-900년경)-홍인~남북종, 중기선(759-1000년경)-마조 석두 이후, 송대선(950-1300년경)-대혜, 굉지 등 五家의 시대로 분류하였음을 참고.



Ⅱ. 마조계 선자


보리 달마가 중국에 처음 온 것은 6세기 초이지만 그 목적은 깨달음의 체험을 전하기 위해서다. 달마가 왔을 때 당시 불교자들은 철학적 의론에 빠져 있거나 또는 의식에 묻혀있거나 또는 좌선만으로 지혜의 섬광을 잃고 있었던 때였다. 이러한 곳에 보리 달마가 와서 심인(心印)을 단전(單傳)한 것이다.

소위 심인은 깨달음을 열다, 즉 스스로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것이며 진실의 자기를 안다는 의미다.

『육조단경』에서 말하는 ‘견성’이다. 달마의 이러한 메시지는 육조 혜능에 이르러 그 진의가 발양되지만 이를 중국선의 본질로 된 것은 마조를 비롯한 석두, 앙산, 백장, 황벽, 덕산, 임제, 등의 당초에서 중기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그들이 세상에 나타나면서 부터다.

이들의 활동상태를 관찰하면 선을 수행한다는 것은 좌선관법으로 소위 삼매에 드는 것이 아닌 자신의 본래성을 철견(徹見)하는 일이며 선자들은 이러한 철견의 소식을 선문답으로서 알고 또한 종지의 대본(大本)을 깨달게 하려고 하였다.



1.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부처(卽心是佛)


중당이후 선자들의 활약은 선종을 번성시키지만 그 촉발의 중심은 마조 도일(709-788)이었다. 마조계통의 선은 우선 달마의 상승일심의 법인 “마음이 부처임을 믿고” “즉심시불”임을 아는 것이며, 이는 일상에서 일어난 행위나 영위 모두가 작불(作佛)이라는 사상이다. 마조는 이를 ‘평상심이 도’라고 하고 문하에서는 이를 ‘평상(平常)·무사(無事)’라고 했다.
이러한 이유는 ‘마음(본성)은 부처’이고 ‘법성삼매’가운데 있으며 그런 까닭에 일상작용이 바로 법성의 행위‘이기 때문이며,3) 평소 “그저 때에 따라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성인의 태를 기르면서 인연 따라 잘 지내면될 뿐, 다시 무슨 일이 있으랴”라고 하였다.4) 마조는,


"일체법은 모두 불법이며 제법 역시 해탈이다. 해탈은 진여이며 제법은 진여를 벗어나지 않는다. 행주좌와 모두 이 부사의한 작용이며 시절을 기다릴 것이 없다.5)"


라고 하였다. 행주좌와가 그대로 해탈의 작용이지 따로 도를 구할 일이 없음을 강조한 것이며 바로 이것이 마조의 핵심사상이다. 마조는 이를 문답으로서 선자가 직접 깨우치도록 한다.


3) 入失義高 編, 『馬祖の語錄』,京都:禪文化硏究所, 1984, p.24,

“一切衆生 從無量劫來 不出法性三昧 長在法性三昧中 着衣喫飯 言談祇對. 六根運用 一切施爲盡是法性.”
4) 위의 책, p.21, “乃可隨時着衣喫飯 長養聖胎 任運過時.”
5) 위의 책, p.39,

 “一切法皆是佛法 諸法卽是解脫. 解脫者卽是眞如 諸法不出於眞如. 行住坐臥悉是不思議用 不待時節.”



"어느 승이 마조에게 물었다. “조사가 서래한 뜻이 무엇입니까?”

“가까이 오라.”
승이 가까이 가니 마조가 귀를 잡아당기며 “육이부동모(六耳不同謨)”라고 했다.6)"

6) 『경덕전등록』권6 늑담법회장(대정장51, p.248a),

 “洪州泐潭法會禪師問馬祖 如何是西來祖師意

祖曰 低聲近前來

師便近前 祖打一摑云 六耳不同謀”


‘조사서래의’는 뜻으로 풀자면 조사가 서쪽에서 온 의미이지만 여기서는 최후의 안심을 묻는 것이다. 마조는 승을 가까이 오게 하여 “육이(六耳) 즉 세 사람이 모이면 밀모(密謀)도 누설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말하자면 이미 모든 것이 적나나 하게 드러나 있는데 그것을 알지 못하니 바보 같은 놈! 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었다. 이대로가 안심인데 또 다시 안심이 무엇이냐고 묻는 승이 딱하다는 의미가 마조의 행동에 묻어 있는 것
이다. 이 같은 뜻은 마조계 조주 종심(778-897)에서 적절이 보인다.


"어느 승이 조주를 찾아와 선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조주는 “그대, 조반을 먹었는가?” “조반은 마쳤습니다.”

이어 조주는 “그렇다면 그대의 발우는 씻었는가?”라고 말했다.7)"

7) 『경덕전등록』 권10 조주종심장(대정장51, p.277c),

“僧問 學人迷昧乞師指示 師
云 喫粥也未 僧云 喫粥也

師云 鉢去 其僧忽然省悟”


‘즉심시불’의 선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달리 다른 것에서 찾을 일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일상의 작용이 부처의 행임을 의심하거나 비하하는 교학자도 있었던 것 같다.

『조당집』권15, 분주무업장에 의하면, 무업(760-821)이 마조에게 참했을 때 마조의 대응은 다음과 같다.


"홍주의 마대사가 선문의 상수임을 듣고 특별히 와서 인사했다. 무업은 몸이 육척을 넘고 훤출한 모습이 산과 같았다. 마대사는 슬쩍 보고 그가 평범하지 않다고 여기고 말했다.

“당당한 불전(佛殿)이긴 하지만 그 속에 부처는 없군”

무업은 예배하여 말하기를 “삼승의 가르침은 대강 궁구했습니다만 선문에서 설하는 ‘즉심시불’의 취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가르침을 부탁드립니다.”

 “모르겠다고 하는 마음이 바로 그것이지 달리 다른 것이 없다. 알지 못하는 것이 미혹함이고 아는 것이 깨달음, 미혹하면 중생, 깨달으면 부처다. 도는 중생을 떠나있지 않다. 중생 말고 달리 부처가 있겠는가? 이는 손이 주먹이고 주먹이 손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야. 무업은 언하에 대오하고 눈물을 흘렸다.8)"

8) 入失義高 編, 앞의 책, p.142,

“聞洪州馬大師禪門上首 特往瞻禮. ...(中略),,不離衆生別更有佛也. 亦如手作拳 拳作手也 師言下豁然大悟 涕淚悲泣...”


여기서의 마조의 말은 꽤 설명적이지만 부처의 마음과 등치(等値)되는 특별한 마음이 어딘가에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마음이 바로 부처임을 말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제자 대주 혜해의 문답에서도 동일한 의미로 나타난다.


"어느 행자가 묻기를 “즉심즉불이라고 하지만 어떤 마음이 부처인가요?”

대주는 “부처가 아니라고 의심하고 있는 그 마음을 보여라!”9)"

9)『조당집』권14 대주장(고려대장경47, p.321c),

“有行者問 卽心卽佛 那个是佛.

師云汝疑那个不是. 指出看.”


‘심시불’을 알지 못하는 행자에게 대주는 곧바로 이환(移換)시켜 알게한 것이다.



2. ‘이게 뭐지(是什摩)’


『조당집』권14 마조장에는 마조와 무업의 또 다른 인연을 다음과 같은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분주화상은 좌주로 있을 때 42권 경론을 강했다. 마조에게 와서 물었다.

“ 삼승십이분경은 제가 대략 알고 있습니다만 선종의 본지는 어떤 것입니까?”

마조는 주변을 둘러보고 말하기를,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 지금은 잠시 나가 있게”
무업이 문지방을 막 넘는데 아직 한 쪽 발은 걸쳐 있을 즈음, 마조가 돌연히 불렀다. “좌주여!”라고.

무업이 획 돌아보고 ‘예’라고 대답했다.

마조는 곧바로 물었다. “이게 뭐지?(是什摩)”.

무업은 그 순간 자신을 돌아보았다. 마조에게 예배하고 일어나면서 “저는 42종 경론을 강의를 하여 저를 이겨 낼 자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오늘 제가 스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자칫 일생을 헛되게 보냈을 것입니다.10)"

10) 入失義高 編, 위의 책, p.71, “汾州和尙爲座主時 講四十二本經論 來問師. ..(中略)..汾州出門 脚纔跨門閬 師召座主 汾州回頭應喏 師云 是什摩 汾州當時便省遂禮拜, …”


앞의 무업장에는 설명조로 ‘모르겠다는 마음이 부처’라고 하였고 마조장에는 달리 대응한 것이다. 선문의 제일의는 말로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 타자와 함께 공유할 것도 아닌 것이다. 때문에 마조는 먼저 ‘조용히 물러가 있게’ 라고 하여 두리번대는 무업의 마음을 잠재우고, 무업이 문을 막나서려는 찰나에 불렀다.

돌아보면서(回頭) 바로 “예”라고 응답한 것, 무업이 묻는 선문의 본지가 여기에 있음을 깨치게 한 것이다. 무업은 여기서 깨달았다고 하지만 무엇을 깨달았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다.

여하간 『조당집』에는 장(章)을 달리 하여 ‘즉심시불’을 깨우치는 방법이 다르게 나타났다. 이처럼 마조는 ‘즉심시불’이라는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학인 스스로 실감하고 체인되게 하는 것이 마조선의 특색이었다.


이러한 접화의 예는 마조계의 어록 속에 빈번하게 나타난다. ?조당집?권18 조주장에,


"승이 물었다, “무엇이 조사서래의인가요?” 조주는 “뜰 앞의 잣나무”.

승이 말하기를 “화상, 경계를 저에게 말하지 마시오”. 스님은 “나는 경계를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 아니야”.

승이 “무엇이 조사서래의인가요?” 스님은 “뜰 앞의 잣나무”11)

11) 『조당집』권18 조주종심장(고려대장경45, p.344a),

“問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亭前栢樹子

僧云和尙莫將境示人 師云我不將境示人

僧云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亭前栢樹子”


승이 조사서래의를 물었을 때 조주는 ‘뜰에 보이는 나무’를 말했다.
승은 조주의 본분사를 보여 달라는 것인데 조주는 ‘정전백수자’라고 한것이다. 즉 목전에 있는 나무를 보는 ‘그것’이 조사서래의라고 한 것이다. 조주는 승에게 ‘작용이 바로 본래성’을 깨우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일상행위가 그대로 도라는 마조의 ‘평상심시도’는 마조의 제자들에게서는 또한 ‘무사(無事)’라는 말로 대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대주 혜해의 설법에서 나타난다.


"자신의 마음을 자세히 관찰하면 일체 삼보가 언제나 목전에 나타나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려(思慮)하지 말라, 찾으려고도 하지 말라. 자신의 마음은 본래 청정한 것이다.

…… 현상을 좇아 의식이 움직이거나 모습에 좇아 관념을 일으키는 일이 없으면 자연 무사가 된다.12)'

12) 『경덕전등록』권28 월주대주혜해화상어(대정장51, p.578c),

“但自仔細觀察自心一體三寶常自現前 無可疑慮. 莫尋思 莫求覓. 心性本來淸淨.

...若不隨聲色動念 不逐相貌生解 自然無事去.”


자신의 본성은 본래 청정심이며 거기에는 모든 것이 구족되어 있다. 때문에 자신의 밖에서 부처를 구하려고 쫓아다닌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며, 이를 쉴 때 자신의 본래의 자리 즉 무사인이라는 것이다.

 ‘의려(疑慮)’ ‘심사(尋思)’ ‘구멱(求覓)’ 등은 도를 추구하려는 행위인데 무사란 그것이 없다는 것이다. 다만 본래 있는 그대로 ‘평상’의 상태 이것을 무사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황벽은 『전심법요』에서 간결하게 설명한다.


"소위 박학이라 해도, 어떤 것도 구하지 않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 도인은 무사인이다. 거기에는 이래저래 돌리는 마음도 없고 설명해야 할 도리도 없다. 무사다.13)"

13) 入失義高 編, 『傳心法要·宛陵錄』, p.76,

“上堂云 百種多知不如無求最第一也  道人是無事人 實無許多般心 亦無道理可說 無事”


마조의 기본이념인 ‘즉심시불’은 ‘작용즉성’ ‘평상무사’로서 나타나며 스스로의 행위는 그대로 불행(佛行)이며 부처를 구한다는 작위적 노력을 일체 그만두는 것이 ‘무사’라고 황벽은 정설(定說)한 것이다.



3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


당시 이러한 마조계의 선이 교조화하고 절대시하려는 입장에 대해 수정이나 비판이 일어난다. 마조문하 대매 법상(752-839)은 마조에게 “여하시불”이라고 묻고 조(祖)는 “즉심시불”이라고 답한 것에서부터 선도(禪道)에 든 선자다. 조는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가보고 오라고 시자에게 이른다. 그는 대매산에 들어가 법상에게,


“화상은 마조스님 회상에서 어떤 것을 보고 그 산에서 물러났습니까?”

“마대사는 ‘즉심시불’이라고 말씀해서 그때부터 여기에 있소.”

 “마대사의 불법은 요즈음 다릅니다.”

“그래요, 어떻게?” “마대사는 요즘 ‘즉심시불’이라고 하지 않고 ‘비심비불’이라고 설하십니다.”

법상은 듣고 단호하게 말했다.

“마노장은 언제까지나 사람들을 어지럽힐 작정인가. 나는 사람들이 뭐라 해도 ‘즉심시불’로 일관 할 걸세”.

보고 받은 마조는 “매실이 익은군.”라고 했다.14)

14) 『경덕전등록』권7 대매법상장(대정장51, p.254c),

“和尚見馬師得箇什麼便住此 山.....,師云 遮老漢惑亂人未有了日 任汝非心非佛 我只管即心即佛 其僧迴舉似馬祖 祖云 大衆 梅子熟也”


마조의 ‘즉심시불’이 『전등록』에서의 마조문하에서는 ‘비심비불’로 바뀌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답의 마지막, 대매가 입적할 때 문도들에게 말했다. “오는 자, 막지 않고 가는 자, 좇지 않는다.”라고.15)

대매의 선은 이미 ‘즉심시불’이 되었든 ‘비심비불’이 되었든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운 경지에 있는 것이다. 이 일을 앞에 문답에서 “즉심시불로 일관‘한다는 말로 보인 것이다. 이러한 마조선의 변화는 송대 선적인 『전등록』 권6 마조장에는 마조설로 나타난다.


"승은 “화상께서는 왜 ‘즉심즉불’을 설하십니까?” 마조는 “우는 아이를 그치기 하기위해”.

“그럼 그친다면 어떻게 하십니까?”. “비심비불”.

“이 두 종류의 사람을 제외한 사람이 오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그에게 어떤 물건도 아니라고하지(不是物).”

“바로 그런 사람이 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놈에게 대도를 체득하라고 하지”.16)"

16) 入失義高 編, 『馬祖の語錄』, p.92,

 “僧問 和尙爲什摩說卽心卽佛? 師云 爲止小兒啼

僧云 啼止是如何? 師云 非心非佛

僧云 啼此二種人來 如何指示?‘ 師云向伊道不是物

僧云 忽遇其中人來時如何? 師云 且敎伊體會大道”


‘즉심즉불’ ‘비심비불’ ‘부시물’이 세단계로 배열되고 그것을 넘어선 데에 마조선의 참된 ‘대도’가 있다고 하는 논법이다. 이 기록이 보이는 것은 현존자료에서는 『전등록』권6 마조장이후의 일이며 당말오대의 『조당집』(952), 『종경록』, 『경덕전등록』권28에는 마조입으로 발언하고 기록된 것은 없다.

마조 소설(所說)로서 간접적으로 기재한 이 어구는 무엇을 말할까? 마조의 설이든 문하의 설이든 간에 점차 평판한 구호에 떨어지기 쉬운, 안이한 현실긍정에 이끌리기 쉬운 ‘즉심즉불’ ‘평상 무사’에 대한 생명력을 갖추기 위해, 또한 부단한 자기부정과 반전으로 다시 마조의 선의 진정성을 보이려는 이면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본다. 더구나 ‘어떤 물건도 아니다’라는 뜻의 ‘부시물’이 더한 것은 교조화된 ‘즉심즉불’을 부정하여 ’비심비불‘로 이환시키다가 이것마저 철저히 부정해 버리려는 의도가 ’부시물‘로 처리되었다고 보며 이는 마조사상의 부작용을 교정하기 위한 나중에 가탁된 것이 아닐까라는 상상(想像)도 지울 수 없다.

『조당집』동사여회장(東寺如會章)에는 남전이 마조하의 동문인 동사를 방문했을 때의 문답이 있다.


"동사가 남전에게 묻는다. “요즈음 어느 승당에 있었는가”

남전은 “강서에서 왔습니다.”

스님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대사의 초상을 가지고 왔는가?”,

남전은 말하기를 “다만 이것이 이것입니다(只這箇是).”

스님은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 뒷모습(背後底)은 어떤 것인가?”17)"

17)『경덕전등록』권7 동사여회장(대정장51, p.255b), “師問南泉 近離什摩處來 云江西.

師云 將得馬師眞來不 泉云 只這箇是 師云 背後底”


남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 ‘즉심즉불’의 입장에서 말하고 ‘심부시물’ 의 입장에 선 동사 여회(744-823)는 이를 비판한 것이다. 이처럼 마조계는 그 문하에 ‘즉심시불’의 신봉과 이에 대한 반동이라고 볼 수 있는 사조(思潮)가 생겨 서로 맞서는 형태가 되 버린듯 한 시기를 만난다. 이러한 의미는 『조당집』권14 장경장(章敬章)에서 볼 수 있다.


"어느 승이 석장을 가지고 왔다. 장경 주변을 세 번 돌기를 마친 후 석장을 쿵하고 세우고 섰다.

장경은 “그래, 그래(是)”라고 했다. 승은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 이 승은 다시 남전에게 가서 세 번 돌고 석장을 흔들어 세웠다. 남전은, “아니야, 아니야. 바람만 일으킬 뿐 마침내 무너져 돌아가지”.

승은 “장경화상은 저에게 ‘그래’라고 했는데 화상은 무엇 때문에 아니다라고 하시오?” 남전은 “장경은 바로 그것으로 좋지만 그대는 그것으로 틀린 것이다.”18)"

18)『경덕전등록』권7 장경회휘장(대정장51, p.252c), “有僧持錫到 遶師三匝 振錫而立.

師云 是是. 其僧無對.

… 此僧又到南泉 遶師三匝 振錫而立....

(中略)..南泉則是 汝則不是”


승은 자신의 있는 그대로를 당당히 보여 절대 부족함이 없는 자신을 보인 것이다. 이에 대해 장경은 긍정하지만 남전은 부정했다. 마지막 남전의 말로 보면 그것은 장경이 아닌 승 자신의 문제라고 하는 것이 되지만, 그것은 장경에게의 직접적인 비판을 꺼리는 것이고 이 ‘그래(是)’, ‘아니야(不是)’의 대비도 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를 있는 그대로의 긍정이라는 입장과 그것에의 반대라고 하는 두 대립- 앞에서의 남전과 동사의 문답에서 말하면 ‘지저개시(只這箇是)’과 ‘배후저(背後底)’의 대립-을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마조선의 핵심은 ‘즉심시불’이지만 그 문하는 이를 더욱 선명히 명백히 드러내기 위해 이면에 이 같은 절대 부정하는 양면성을 갖추어 마조선의 원상(原像)을 보였다. 그 후 중국선종의 사상사도 이 양면의 사이를 다양한 형태로 계속 왕복한다. “중국선은 실질적으로 마조에서 시작 한다”는 이 말은19) 마조의 가르침이 중국선적 사유의 기점이 된다는 점에서만 그치지 않고, 문하에서 그것은 계승되고 반전하는 대립이 그 후 선의 사상사의 운동원리를 결정짓는다는 점까지 포함되어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19) 入失義高, 『馬祖の語錄』序



Ⅲ. 석두계 선자


전통적인 선종사서인 등사류를 보면 육조혜능 이하의 모든 선자들은 남악계와 청원계로 나누고 남악하에 마조 도일, 청원하에 석두 희천의 문류(門流)로 하여 선자들이 배출됨은 주지의 구성이다. 그러나 이 같은 계보는 만당(晩唐)오대의 사람들에 의해 뒤에서 거슬러 올라가 정리한 것이라는 것은 오늘날의 상식이다.20)

역사적 경위야 어떻든 간에 청원-석두계라고 하는 법통을 세운 사람들이 스스로를 마조계와 분리하는 사상적 근거는 무엇일까라는 것이다. 그 분기점을 어떻게 발견되어야 하는 것일까.
선종사를 남악-마조계와 청원-석두계로 나누는 구성은 현존등사의 범위에서는 『조당집』에서 비롯되며 『조당집』자체가 석두의 계류에 속한 사람들이 편찬에 중심이 되었음을 살펴 볼 때, 마조계선과 대립된 양상이라고 하는 석두계선의 특색은 이 문헌을 중심으로 고찰해야 할 것이다.


20) 중당기의 사료가 되는 규봉종밀의 저작, 『원각경대소초』나 『중화전심시선문사자승습도』에는 당시 선종의 모든 종파가 망라되어 있지만 청원-석두계통은 전혀 포함되지 않고, 겨우 『선원제전집도서』에 우두선의 동류의 선자로서 ‘석두’의 이름만을 언급할 뿐이다.



1. ‘바로 이놈(只這箇漢)’


석두 희천(700-790)의 기본이념 역시 마조 교단이 표방하는 ‘즉심시불’ 과 다르지 않지만21) 일상영위가 본래성이라는 ‘작용즉성’의 입장과는 달리한다. 이는 다음의 문답에서 나타난다.

21)『경덕전등록』권14 석두희천장,(대정장51, p.309b), “吾之法門 先佛傳授 ..(중략)..心佛衆生 菩提煩惱名異體一”


"석두스님이 대전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그대 마음인가?” 말하기를, “말하는 것, 이것이 마음입니다.”하니 곧바로 소리(喝)를 치셨다.

며칠 지나 대전이 다시 묻기를 “어제는 이것이 마음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이를 제외한 어떤 것이 마음입니까?”라고. 스님은 “양미동목을 제각한 마음을 가져 오너라.”, “가져올 마음이 없습니다.”하니, 스님은 “그대는 지난번에는 마음이 있다 했는데 지금은 왜없다고 하는가?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가” 대전은 언하에 깨쳤다.22)"

22) 『경덕전등록』권14 대전화상(대정장51, pp.312c~313a),

“石頭問師曰 那箇是汝心. 師曰言語者是. 便被喝出

...(中略)..石頭曰 除却揚眉動目將心來 師曰 無心加將來 石頭曰 元來有心何言無心 無心盡同謗 師言下大悟.”


당시 선계는 대개 ‘즉심시불’에 물들여 있고 대전 보통(732-824) 역시 그렇게 알고 석두에게 말했을 때, 석두는 아주 색다른 세계를 보인 것이다. 즉 ‘작용즉성’이 아니라 ‘작용이 일어나지만 그것에 즉(卽)하지 않는 마음’이 바로 본성임을 제시한 것이다. ?금강경?의 ‘즉비(卽非)’의 마음인 것이다. 석두의 이러한 세계는, 그가 일찍이 남악 회양(677-744)에게 물었던 내용과 일치한다.

“모든 성자도 그리워하지 않고 자신의 영(靈)마저도 중요시 하지 않을 때 어떤 것입니까?”23) 말하자면 작용이 그대로 본성이라는 것에 고착한 선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든 질문이다.

양미동목의 분별이 일어나기 전의 면목을 여실히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진정 본성을 깨친 것이라는 것이 석두의 선이다. 어찌 보면 마조의 후대 제자들이 말하는 ‘비심비불’ ‘부시물’을 석두는 처음부터 그의 선의 세계에 들어 온 선자들에게 깨치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설 영묵(747-818)은 마조에서 석두로 떠나온 선자다. 마조문하의 제자들이 다투어 대오를 체득하는데 본인은 전연 소식이 없었다. 마조에게 아쉬움을 말하니 마조는 곧바로 석두에게 보낸다. 오설의 마음은 어정쩡했다. 당시 쟁쟁한 마조문하를 떠나 산골짝 석두에게 가다니! 그러나 스승이 보내니 갈 수밖에 없고 내심으로 석두쪽에서 딱 맞는 말을 듣는다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바로 나올 것이라고 작정하고 갔다.


"석두, “어디서 왔는가?” 오설은 “강서에서 왔습니다.” “수업은 어디서 했는가?”

오설은 대답도 하지 않고 시쿵덩 하여 막 문을 나가려는 순간, 석두는 바로 “돌(咄, 어이!)”라고 큰 소리로 불렀다. 석두를 향해 돌아보니 (석두는) 바로 손날을 세워 말하기를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다름 아닌 바로 이놈(只這箇漢).머리는 돌려 무엇 하려고. 오설은 활연 대오했다.24)

24) 入失義高 編, 앞의 책 pp.158~159,

 “石頭云 什摩處來 師不在意 對云 江西來  石頭云 受業在什摩處

師不祗對 便拂袖而出 ..(中略).. 纔過門時 石頭便咄 ...轉頭看石頭. 便則掌云 從生至死 只這箇漢 更轉頭腦作什摩 師豁然大悟”


오설이 석두에게 오기 전, 마조문하 백장이 ‘작용이 그대로 본성’임을 깨친 것을 보고 자신에게 대오의 체험이 일어나지 않는 것 만에 분개하고 석두에게 와서야 활연 대오 한 것이다. 말하자면 생사로 전회(轉回)하는 본성
이 아니라 생사가운데 본성을 보는 것이 참된 본성임을 깨우친 것이다.


23) 『조당집』권4 석두장(고려대장경45, p.257c), “不慕諸聖不重己靈時如何”



2.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非思量)


석두의 사법제자인 약산 유엄(745-828)은 석두의 ‘바로 이 놈’을 실지로 드러내 보이는 대표적인 선자다.


"어느 날, 약산이 앉아 있을 때 어느 승이 물었다.

“골똘히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생각하는 것 없이 생각한다.”

 “생각이 없음인데 또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입니까?” “생각하는 것이 아닌 생각일 뿐.”25)"

25) 『경덕전등록』권14 약산장 (대정장51, p.311c),

 “師坐次有僧問 兀兀地思量什摩

師曰 思量箇不思量底

曰不思量底如何思量 師曰 非思量”


소위 비사량의 사량이 약산의 선이다. 사량이라는 정식(情識)이 끊어진 비사량이며 이 비사량처를 약산은 “천성(千聖)도 알지 못 한다”고 했다.26) 석두·약산의 선은 정과 혜를 분리한 계제(階梯)의 선도 쌍수(雙手)도 아닌 마조계의 ‘비심비불’ ‘부시물’를 함의한 선이다.27) 이러한 비사량의 선은 그의 상당법문에서도 보였다.


26) 위의 책 (대정장51, p.311b), “曰千聖亦不識”
27) 졸논, 「선종에서의 좌선관 변천」, 한국불교학64집, 2012, p.195.



"약산은 원주의 청에 의해 상당(上堂)했다. ‘문답’은 여기서 행해진다.

약산이 상당한 데는 무엇인가의 문답과 선적 설법이 있을 것으로 믿고 대중은 당중(堂中)에 모여들었다. 약산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곧바로 단에서 내려와 자신의 거처로 가버렸다. 그리고 입구를 탁 닫았다. 원주는 놀라 화상 뒤를 따라갔다.

원주는 “일부러 상당해 주셨는데 어째서 곧바로 거처로 가셨습니까?” (약산은) 양구(良久)하고 말했다.

“원주, 경을 설하는 것은 경사가 하고 논은 논사가 있고 율에도 율사가 있지 않는가. 그러한데 어째서 이 노승을 괴이하게 생각하는가.”28)

28) 앞의 책, (대정장51,p.311c), “一日院主請師上堂 大衆才集 師良久 便歸方丈閉門 院主逐後曰

和尚許某甲上堂 為什麼却歸方丈

師曰 院主 經有經師 論有論師 律有律師 又爭怪得老僧”


약산의 ‘양구’에는 선 독자적인 의미가 있다. 이는 바로 비사량의 사량을 보인 것이다. 양구는 선록(禪錄)에 자주 보이지만 글자의 뜻은 ‘잠시 묵묵히 있는 것’이다. 약산의 양구는 문답조차 끊어 진 자리, 유마의 ‘묵연(黙然)’을 보인 것이다. 양미동목을 제거한 ‘지저개한(只這箇漢), 천성도 알지 못하는 그 자리를 양구로 보였다. 여기에 석두계의 선의 특색이 있다고 본다. 약산의 선에는 마조선을 긍정한 부분도 보인다.


『조당집』권4 약산 유엄장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운암 담성(780-841)과 도오 원지(769-835)는 사가(私家)에서는 형제이지만 동생 운암이 먼저 마조계로 출가하였고 형인 도오는 석두계로 나중에 출가한다. 도오는 출가사형이 된 운암에게 석두계쪽으로 와서 공부할 것을 종용하고 백장회해는 운암에게 약산에게 쓴 편지를 주어 가는 것을 배려한다. 운암을 본 약산은,


“해(海)사형은 요즈음 어떤 법을 설하시는가?” 운암은 “삼구(三句)를 넘어선데서 깨달아라”, “육구(六句)를 넘어선 데서 회득하라고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약산은 낙담 분개하면서 “그것으로는 삼천리 밖이야, 반갑기는 한데 연관될게 없네. 그런데 다시 다른 언구는 있는가?”, “어느 때 설법이 끝나 대중이 막 내려가려고 하는 차, 백장노스님이 제군들! 하고 크게 부르는 바람에 대중은 무심코 돌아보니 노스님은, ‘이게 뭐지!’ 하셨습니다.” 약산은 “왜 빨리 말하지 않았는가. 해사형은 아직 건재하시구먼. 그대들 때문에 백장을 잘 알게 되었다.”29)

29) 『조당집』권4 약산유엄장(고려대장경45,p.261a), “藥山問 海兄尋常說什摩法? 對曰 三句外省去.

 ..(中略)..藥山曰 何不早道? 海兄猶在! 因汝識得百丈矣”


요컨대 백장은 ‘사구백비를 끊고’라고 하는 것 같이 모든 형식의 언어 논리를 넘어선 곳을 깨달아야 한다고 하지만 약산은, 그러한 설법은 백장답지 않는 쓸데없는 한갈등(閑葛藤)이라고 배척하고 등 뒤에서 홀연히 불러 ‘머리를 돌려(廻首)’볼 때 바로 ‘이게 뭐지(是什摩)’라고 하였다는 것을 듣고 나서 일전(一轉)하여 그것이 바로 백장이라고 소리친 것이다.
석두의 법을 이은 약산이고 마조계와는 다른 선을 거양하지만 마조계선의 방법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때로는 그것을 활용해 보이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예는 다음과 같은 문답에서 잘 나타난다.

?조당집?권14 마조의 제자 자옥 도통(紫玉道通)에게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다. 상대는 양주자사인 우적(于迪)상공이다.


"묻기를 “무엇이 부처입니까?” 자옥은 “우적!”하고 불렀다. 상공은 바로 “예” 하였다. 스님은 “그 외 다른 데서 구하지 말라.” 상공은 바로 깨닫고 예를 올리고 스승으로 삼았다.30)"

30) 『조당집』권14 자옥도통장(고려대장경45, p.322c), “問如何是佛 師喚千迪 相公應喏 師云更莫別求 相公言下大悟 便禮爲師”


그렇지만 이어서 이에 대한 후일담이 붙어 있다.


"어떤 승이 이 이야기를 약산에게 전하니 “그 놈을 박살을 내야 돼!” 승은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화상이라면 그 자리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약산은 곧 바로 “뭐야(是什摩)”라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이처럼 약산에 관한 기록에서, ‘회수(廻首)’ ‘응야(應喏)’ ‘뭐야(是什摩)’ 라고 묻는 것은 이 방법이 당시 선종계는 마조선이지만 석두계까지 널리 인정되고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약산을 사법한 운암담성(780?-841)은 이 같은 약산의 선을 계승 발전시킨다.


"운암이 마당을 쓸고 있을 때 寺主가 말했다. “왜 그렇게 애를 쓰십니까?” 운암 말하기를 “한 사람(一人)은 애쓰지 않아요.” 사주는 “어디에 두 번째 달이 있습니까?” 운암은 빗자루를 세우며 말한다. “이것은 몇 번째 달인가?” 사주는 아무 말도 못했다.31)"

31) 『조당집』권5 운암화상장(고려대장경45, p.266b), “師掃地次 叫寺主問師..(中略)..師竪起掃箒云 這箇是第機月 寺主無對”


운암은 비를 세운 나는 진짜 달인가, 두 번째의 달인가를 묻는 것이다. 애쓰지 않는 사람과 비로 쓸고 있는 나를 분별해서 묻는 사주에게 운암은 분별을 넘어선 분별을 빗자루를 세워 보인 것이다. 일인과 두 번째 달의 분별은 보이겠지만 무분별의 분별은 보이지 않고 다만 선자 자신만이 알 뿐이다. 이를 운암은 사주에게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은 애쓰지 않아요.”라고 말해 준 것이다. 이러한 문답의 의미는 다시 운암과 도오의 문답에서도 나타난다.


"운암이 차를 다리고 있을 때 도오가 왔다.

“무엇을 하고 있어요?” “차를 다려요.”

“누가 마시려구요?” “한 사람, 차를 원하는 분이 있어서요.”

“그렇다면 왜 그(伊)를 시키지 않구요.” “다행이 내(甲)가 있으니까요.”32)"

32) 『경덕전등록』권14 약산장(대정장51, p.315a), “師煎茶次道吾問 煎與阿誰 師曰有一人要 曰何不教伊自煎 師曰 幸有某甲在”


비로 쓸고 있는 갑과 차를 다리는 갑은 동일한 현실태다. 그러나 현실태를 그대로 본래성 즉 ‘애쓰지 않는 그’ ‘차를 원하는 분’으로 보지 않으면서 본래성의 현재(顯在)를 중요시하는 것이 운암의 선이다.33)

다시 말해서 ‘즉심즉불’의 기본이념은 그대로 두고 이 이념을 체득하고 체화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이다. 운암이 천화할 때 제자 동산양개(807-869)에게의 유게(遺偈)도 ‘다만 이놈이 이것(只這箇漢是)’ ‘다만 이것이 이것(祇這是)’으로 본래성의 현현(顯現)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33) 졸론, 「당대선에서 송대선으로의 유동적 연변의 과정」, 『불교학보』59집,2011, p.18.



"운암이 시적(示寂)을 보일 때, 동산은 물었다.

“백년 후 어떤 사람이 스님의 초상을 물으면 어떻게 대처할까요.”

운암은 잠시 있다가 “다만 이놈이 이것”이라고 했다.

동산은 가만히 생각했다. 운암 말하기를 “사리여, 이 일을 깨달으려면 아주 세심해야 하네.”

…… 운암이 천화한 후 3년 상을 지내기 위해 위산으로 가고자 담주에 이르러 큰 계곡을 지나는데, 사형이 먼저 앞에 가고 동산이 언덕에 아직 이르기 전일 때, 물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앞 일(祇這是)을 크게 깨쳤다. 안색이 변하고 껄껄거리고 웃었다.34)

34) 『조당집』 권5 운암화상장(고려대장경45, pp.265c~266a),

 “師臨遷化時 洞山問. …… 師伯先過洞山離這岸未到彼岸時 臨水覩影大省前事顔色變異呵呵.”


이 문답으로 보면, 동산의 깨달음은 운암과의 문답이 기연(機緣)이 되었다. 마조의 ‘즉심시불’의 이념은 인정되지만 이에 대한 깨침(承當)은 ‘초상=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체득하는 것이다. ‘심시불’의 원상은 일상의 영위에서가 아닌 영위로 인해 드러난 ‘그것’이다. 이를 동산은 ‘과수게(過水偈)’에서 “그는 지금 바로 나, 나는 지금 그가 아니네(渠今正是我我今不是渠)”라고 했다.35) 운암의 ‘지저개한시(只這箇漢是)’를 깨달은 노래다.

석두계 3대가 되는 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이라는 선자가 있었다. 화상의 처소에 어느 승이 와서 물었다.


"“나타(那吒)태자는 뼈를 잘라 아버지에게 드리고 살을 잘라 어머니에게 드렸다고 하지만 대 체 나타태자의 본래몸(本來身)은 무엇입니까? 이 말에 투자화상은 손에 쥐고 있던 주장자를 내려놓았다(放下).36)"


나타태자는 전설에 의하면 호법선신이고 그는 부모로부터 받은 골절을 다시 되돌려 주고 자신의 본래몸을 드러내어 부모를 위해 설법했다고 한다. 인간의 몸은 부모에게 돌려주고 나면 몸은 없어지고 어떤 혼이나 영체가 있다고 하지만 나타태자의 본래몸은 무엇인가? 그는 이를 어떻게 드러낼까? 이것이 승의 의심되는 바다. 이에 대한 화상의 답은 손에 쥔 주장자를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나타태자의 ‘본래신’이 그대로 드러나 수많은 설법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답은 더 이상 진전이 없는 것은 투자가 주장자로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이다.37) 투자의 주장자의 방하(放下)는, 본래몸은 유·무에 걸리지 않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즉 본래 몸이 공한데 주고받고 하는 것은 방편일 뿐 태자에게는 하등 걸릴 것이 없는 것이다. 투자는 이러한 문답을 통해 ‘비사량’을 ‘주장자의 방하’로 보였다.


35) 위의 책, p.266a.
36) 『경덕전등록』권15 투자대동장(대정장51, p.319c), “問那吒太子析骨還父析肉還母 如何是那吒本來身 師放下手中杖子”
37) 鈴木大拙, 『禪問答と悟り』,『鈴木大拙禪選集』2, 春秋社, 1982, pp.7~8.



Ⅳ. 결 어


당대 선자들의 문답은 깨달음이며 그 길이었다. 문답은 도를 보이고 ‘즉심시불’을 꿰뚫어 보도록 유인하고 접근하고 접화하는 역할을 했다.
‘문답’의 성격은 모두 비논리의 논리이고 또한 ‘즉비(卽非)’의 논리성을 갖추었다. 『조당집』은 이러한 문답의 수집과 구성으로 육조의 문하 마조계와 석두계의 선의 원상을 드러냈다.


본 논문에서는 이 문헌을 중심으로 지면관계상 마조와 석두를 포함한 양 선계의 2, 3대 선자 약간 명을 한정하여 양 계의 선의 특색을 그들의 문답을 통하여 비교해 보았다. 결과 다음과 같은 내용을 살펴보았다.


첫째, 마조와 석두의 기본 이념은 보리달마의 선지(禪旨)인 ‘차심시불’이다.


둘째, 그들은 대립적인 선의 성향을 가진다. 마조는 ‘작용이 바로 본래성’이라고 하며 석두는 ‘양미동목을 제각한 마음’을 구하는 것이다.


셋째, 마조계는 마조의 ‘즉심시불’의 선을 ‘비심비불’ ‘부시물’의 선으로, 또한 석두계는 석두의 ‘지저개한’의 선을 ‘비사량’ ‘방하’의 선으로 변동된다.


그러나 양 선계 모두 궁극에는 ‘일상에서 부처를 보는 것’이었다.
당대 선자들은 ‘즉심시불’의 이념을 축으로 하여 반야 공관적 선으로 귀착해 감을 살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양 계의 선은 입장을 달리했다. 또한 선자들은 일상의 평범한 이야기로서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여하시불(如何是佛)’을 논하고 깨달음을 표상했다. 그들의 문답은 결국 깨침의 기연이 되었으며 이는 중국선의 특색이라고 본다.38)



☯ 논문접수일: 2013.7.25 / 심사개시일: 2013.8.5 / 논문확정일: 2013.9.2



<참고 문헌>

『조당집』(고려대장경45)
『경덕전등록』(대정장51)
김월운 역, 『조당집』 1, 2 동국역경원, 2008.
『講座 禪』第三卷, 筑摩書房, 1967.
鈴木大拙, 『禪問答と悟り』, 鈴木大拙禪選集 新裝版第2卷, 1982.
入失義高, 『馬祖の語錄』, 禪文化硏究所, 1984.
鈴木哲雄, 『唐五代の禪宗』, 大東出版社, 1984.
柳田聖山, 『禪文獻の硏究』, 柳田聖山集 第2卷, 法藏館, 2001.
柳田聖山, 『唐代の禪宗』, 大東出版社, 2004.
小川 隆, 『語錄のこどば』 唐代の禪, 禪文化硏究所, 2007.
湏山長治, 『禪語錄を読む』, 角川學藝出版, 2010.



Abstract

Opportune Chan Dialogues and Enlightenment of Chan Practitioners in the Tang China


/ kang, mun-sun(Professor, Dongguk Univ.)


The purpose of this article is to investigate cases of Chan enlightenment by analyzing dialogues exchanged between disciples of Mazu and Shitou of the Huineng lineage during Tang China. This investigation will allow us to grasp how the original form of Tang Chan and practitioners’ enlightenment were expressed. To reach this purpose I examine such texts as the Zutang ji 祖堂集 published in 1245, and the Jingdae chuandeng lu 景德傳燈錄 compiled in 1004.

To examine developmental aspects of both Mazu and Shitou lineages, I conclude that both arrive at the Chan emphasizing emptiness of prajñā with an ideological axis of “mind is in itself the Buddha 卽心卽佛.” Mazu and Shitou first of all reveal characteristics of conflicting tendencies: the former asserts ‘the function is in itself the original nature,’ whereas the latter, ‘the mind excluding its function is the original nature.’ And Shitou also used a method of unexpectedly calling back, to arouse a sudden enlightenment, when his disciple was doubtful about his teaching.

However, there occurred some changes in terms of teaching among each of the lineages. In the Mazu lineage “no mind no Buddha 非心非佛” or “not this thing 不是物” emerged while categorically negating “the mind is in itself the Buddha.” And in the Shitou lineage the Chan emphasizing “non-discrimination” or “casting off 放下” appeared from “this very thing (the original nature).” Nevertheless, all these forms of Chan ultimately aim at “seeing the Buddha in everyday life.” Like this, superb Chan masters in the Tang era did not try to expound Chan but guided their students into enlightenment by using dialogues. Viewed in this light, these dialogues between Chan practitioners acted as opportunities for enlightenment.



Key words: the mind is the Buddha(卽心是佛), no mind no Buddha(非心非佛), not this thing(不是物), non-discrimination, the Zutang ji(祖堂集).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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