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스리랑카 불교

수선님 2019. 3. 3. 12:27

스리랑카 불교의 역사와 현황

 


 

인도대륙의 남단 인도양 위에 떠 있는 스리랑카는 예로부터 ‘동양의 진주’, ‘보석의 섬’으로 불리었다.

일반적으로 싱할라, 실론으로 더 널리 알려진 이 나라는 기원전 3세기경에 상좌부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오늘날까지 가장 확실하게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오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부처님은 생존했을 당시 스리랑카를 세 차례 방문했으며, 켈레니아에서 설법했다고 한다.

이곳에는 사원이 세워져 있으며, 부처님이 앉았다는 황금의자는 대탑(大塔)에 봉안되어져 지금까지 참배객들에 의해 예배되고 있다.

 

 

그러나 사가(史家)들에 의해 기록된 스리랑카 불교사는 불멸(佛滅) 265년(기원전 265년) 아쇼카왕이 그의 아들 마힌다장로를 파견한 것으로 시작된다.

마힌다스님은 4명의 비구와 사미인 수마나를 데리고 스리랑카로 건너와 수도인 아누라다푸라에서 동쪽 12㎞ 떨어진 마시카산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사냥 나온 국왕 데바냥피야 티사를 만나 설법교화(說法敎化)했다.

마힌다에게 교화된 티사는 불교포교를 위한 편의를 제공해 주었으며, 대정사(大精舍) 티사 아라마를 봉정(奉呈)했다.

이것은 후에 ‘마하 비하라’ 라 불리는 상좌부의 근거지가 된다.

 

 

마힌다가 동행해 온 사미 수마나는 신통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마힌다는 수마나를 시켜 인도에서 불사리(佛舍利)발우(鉢盂)를 가져오게 하여, 그것을 봉납한 아마라탑을 건립했다.

또 마힌다의 여동생 상가미타가 얼마 후 스리랑카에 도착했다.

그들은 부처님 성도지인 붓다가야에서 보리수(菩提樹) 가지를 잘라다 아누라다푸라의 마하보디사원에 옮겨 심었다.

이 나무는 지금도 살아남아 있어서 부처님의 상징으로, 숭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것이 현재 스리랑카불교의 핵심대상이 되고 있는 보리수불탑(다가바)이다.

 

 

32세에 스리랑카로 건너와 불법을 전한 마힌다장로는 80세에 열반했다.

그러나 많은 국왕과 귀족의 귀의를 받아 불교의 뿌리는 스리랑카에 튼튼하게 심어져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티사왕에 의해 불교를 도입한 스리랑카는 100년쯤 뒤에 세계불교사에서 유례없는 성전(聖戰)을 경험한다.

힌두교를 신봉하는 남인도의 타밀인이 침입해, 불교를 믿는 싱할라인을 지배하려 하자 두타가마니왕(재위: 기원전 161~137년)이 출현하여 양 세력 간의 분쟁을 평정했다.

그는 ‘나의 싸움은 왕국의 지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불타교법을 수립하기 위해서다’ 라고 단언했다.

국왕이 불교도가 되어 불교를 보호한 예가 많으나, 불타의 가르침을 수호하기 위해 전쟁까지 한 일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러나 두타가마니왕이 죽은 후, 정국은 다시 혼미를 거듭했다.

기원 1세기경 바타가마니 아바야왕은 싱할라 세력을 결집하여 왕위에 올라 혼란을 평정했다.

아바야왕은 불교를 보호하여 자기와 친근한 마하티샤장로를 위하여 마바야기리(無畏山)에 사원을 세워 주었다.

그러나 활동적인 마하티샤장로는 지계(持戒)를 엄격히 고수하던 비구들로부터 ‘재가인들과 교제한 죄’로 문책당하여 교단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의 제자 500명은 이 조치에 승복치 않고, 사원을 떠나 무외산사로 옮겼다.

이로써 교단은 둘로 분파됐다.

 

 

때마침 남인도에서 독자부(犢子部)에 속하는 담마루치장로가 제자들과 함께 스리랑카에 와서 무외산사에 초빙됐다.

왕은 이들에게 호의적이었지만, 보수적인 대사파(大寺派)는 이들을 이단시했다.

이리하여 스리랑카 교단은 대사파(大寺派)무외산사파(無畏山寺派)로 분립되어 12세기까지 끊임없이 대립을 계속했다.

 

 

이러한 분파는 정법을 전지하고자 하는 대사파 비구들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첫째로 성전을 베껴서 보다 확실한 정법의 근거로 삼으려 했다.

둘째는 불교의 근본이 ‘학(學)’인가, ‘행(行)’인가 하는 문제가 교단 내부에서 제기됐다.

격렬한 논쟁 끝에 분소의파(糞掃衣派) 비구들은 수행 쪽을 택했고, 법설파(法說派) 비구들은 학문 쪽을 택해 2개의 생활양식으로 갈라졌다.

현재 스리랑카에 남아있는 ‘숲 속의 비구’는 전자의 흐름을 따르는 수행자들이다.

 

 

3세기가 되면서 스리랑카에도 대승불교가 전파된다.

스리랑카에서는 이를 방광부(方廣部)라고 부르는데, 공(空)사상을 강조하고 무외산사를 근거지로 했다.

무외산사는 새로운 사상체계의 도입으로 힘을 얻어 대사파와 정면으로 대결했다.

대립이 격화되자 당시 왕인 보하리카티샤는 방광부를 이단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고타 아바야왕(재위: 253~266) 시대가 되자 다시 대승을 불설(佛說)로 주장하는 비구가 생겼다.

왕은 무외산사파 방광부 계통 비구들을 인도로 추방하고 대승서적을 모두 찢어버렸다.

 

 

마하세나왕(재위: 276~303)의 치세(治世)가 되자, 이번에는 대사파에 압력을 가해 9년간 절이 비게 되고, 방광부도 다시 부활했다.

그러나 왕비와 대신의 설득으로 대사파는 다시 보호를 받게 되고 방광부는 또다시 압박받는 악순환을 거듭했다.

마하세나왕의 뒤를 이은 시리 메가반나왕(재위: 303~331)은 아버지와는 달리 무외산사파와 대사파를 똑같이 정중하게 대했다.

 

 

메가반나왕 시대에는 스리랑카불교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 생겼다.

부처님의 치아(佛齒)가 인도에서 모셔온 것이다.

불치는 왕의 즉위 9년째 되던 해 칼링가국의 왕녀인 헤마말라가 그의 남편 단타 쿠말라에 의해 가져오게 한 것인데, 왕은 이것을 달마차카당(堂)에 안치하고 매년 무외산사에서 성대한 불치제(佛齒祭)를 열었다.

현재 불치는 캔디의 불치사(佛齒寺)에 봉안돼 있으며, 역대의 왕과 귀족들이 기증한 보석들로 장식돼 있다.

 

 

한편 이 시대에는 대주석가(大註釋家)로 유명한 붓다고사가 스리랑카에 와 있었다.

붓다고사는 종래의 주석서가 싱할라어로 전승되던 것을 누구나 알기 쉽게 팔리어로 번역했다.

그는 또 《청정도론(淸淨道論)》이라는 불교교리의 백과사전적 저서도 남겼다.

 

 

5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동안 스리랑카불교는 왕이 바뀜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지만, 대부분은 불교를 보호했기 때문에 순조로운 발전을 거듭했다.

7세기경에는 남인도 출신의 바즈라보디(金剛智)가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스리랑카에 와서 무외산사에 머물면서 밀교를 전했다.

스리랑카밀교는 8~9세기까지 매우 성행했던 흔적이 남아있다.

 

 

9세기 중엽 남인도 치요라왕조는 스리랑카를 침입해 사원을 파괴하고 불교를 박해했다.

이러한 수난시대에 비자야 바후 1세(재위: 1055~1100)가 등장하여 치요라군(軍)을 격파하고 불교부흥에 전력을 다했다.

그러나 스리랑카불교는 계속된 전란으로 괴멸직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득도식(得度式)을 비롯한 교단의 의식을 행하는 데 필요한 비구가 모이지 못할 정도였다.

 

 

왕은 미얀마 아노야타왕에게 사신을 보내 미얀마승단의 비구가 와서 계를 설해줄 것과 성전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아노야타왕은 스리랑카에서 불교를 전래받았기 때문에 이를 쾌히 승낙, 장로를 파견하고 많은 성전을 보내주었다.

이렇게 하여 상좌부의 법통은 다시 계승되었고 대사와 무외산사가 부활하여 불교는 재흥됐다.

 

 

비자야 바후가 사망하자, 스리랑카는 지방호족들의 발호로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이 혼란을 수습한 사람은 역사상 최대의 영군(英君)으로 불리는 파락카마 바후 1세(재위: 1153~1186)다.

왕의 치적 가운데 불교에 대하여 취한 주목할 만한 업적은 교단의 개혁이다.

 

 

전왕(前王)이 모처럼 애를 써서 미얀마로부터 상좌부 법통을 역수입했지만, 100년 후 이 시대에는 사설(邪說)과 이단이 횡행하고 비구들은 타락해 있었다.

비구 중에는 처자를 거느린 사람도 있었다.

 

 

왕은 나라 안의 모든 종파를, 대사파를 중심으로 하는 1파로 통합했다.

상좌부 전통을 인정치 않는 비구는 추방했고, 처자가 있는 비구는 환속시켰다.

많은 사원이 수리되고, 새로운 사원이 건립됐다.

1천 명의 비구를 모아 불전(佛典)도 새로 결집했다.

특히 이후의 스리랑카불교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카티카바다(승단규약)’ 도 이때 공포됐다.

이것은 율장(律藏)과 함께 승가 본연의 자세를 규정한 법률로써 후대에 이르러서도 여기에 기본을 두고 작성한 승단규약은 흐트러지는 승가의 형태를 바로잡는 역할을 했다.

현대로 이어지는 스리랑카 남방 상좌부는 이때에 그 기초가 확립된 것이다.

 

 

13세기 후반의 비자야 바후 4세는 왕으로서나, 불교도로서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이로 인하여 그는 불교도들로부터 ‘보살’이라 불려졌다.

그는 또 자신이 직접 개최한 구족계(具足戒) 의식에서 덕망 높은 비구에게는 마하사민(大主), 물라테라(根本長老), 파리비라테라(學院長老) 등과 같은 존호를 수여했다.

다음 대인 부바네카 바후 1세는 스스로 삼장(三藏)에 정통하여 비구와 장로에게 법을 설하였으며, 그것을 잘 배운 비구에게는 장로(長老)로서의 지위와 특전을 베풀기도 했다.

 

 

데바낭피야 티사왕에 의해 불교가 도입된 이래 스리랑카 교단은 왕실주도형으로 발전되었다.

그러한 경향은 파락카마 바후 3세(재위: 1287~1293)에 이르러 포론나르와 왕정(王政)이 종지부를 찍은 후에도, 그리고 16세기 이후 유럽세력이 이 섬에 들어오는 근세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스리랑카불교는 확실히 민중 속에 파고들어가 그들에게 삶의 의의와 생활윤리, 공덕관념에 근거한 선행 등을 가르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이것을 교단사(敎團史)의 측면에서 보면 항상 왕권과 밀접한 관련 이래서 이루어진 것이다.

 

 

남방 상좌부 불교의 종주국이라 할 수 있는 스리랑카는 11세기에 미얀마, 13세기에는 태국, 그리고 14세기에는 캄보디아로 각각 불교를 전파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포르투갈의 침공을 받아 불교는 배척을 당했다.

그 뒤를 이어 이 섬은 네덜란드가 지배(1655~1799)하게 되는데, 이때 다시 승단의 법통이 끊어졌다.

 

 

17세기 초 스리랑카왕 비말라 담마 수리야 2세미얀마에서 비구를 초빙해 법통을 이었으며, 17세기 후반에는 태국으로부터 다시 전법(傳法)을 받았다.

현재 태국에 의해 부활된 씨암파, 미얀마에 의해 부활된 아마라푸라파라마니야파가 있으나, 씨암파가 가장 우세한 승단이다.

 

 

상좌부 불교의 전통을 가장 잘 계승하고 있는 스리랑카는 인구 1천 500만 명 가운데 67.4%가 불교도이다.

이에 비해 힌두교는 17.6%, 기독교 7.8%, 회교도 7.1%, 기타 0.1%이다.

이 가운데 불교도는 대부분이 싱할라인이며, 힌두교는 남인도의 타밀계 인종에 한정되어 있다.

헌법에서는 ‘세속국가’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불교에 최우선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섬 전체는 불교적 세계관이 지배한다고 보아야 한다.

 

 

스리랑카에서 사찰은 완전히 독립되어 있으며, 중앙의 행정부서는 없다.

승정(僧正)은 명예직이며 상징적이다.

승정의 임무는 수계식을 주도하고 합동행사나 중요업무에 대한 회의를 소집하여 주재하는 것이 전부다.

사찰 재정은 신도회에 의해 관리된다.

사찰의 헌금함은 승려와 신도, 은행 측의 3자 입회하에 개봉되는데, 은행에 예금된 돈은 필요할 때 신도회에서 인출하고, 모자라면 신도회에서 모금하여 충당한다.

승려에게 금전을 보시하는 일은 없다.

공양은 신도회 주관으로 차례표를 만들어 대중공양을 올린다.

대중공양을 올리는 날은 그 집안의 경삿날이다.

집안 식구는 물론 친척까지 동원된다.

 

 

스님들에 대한 공경이 철저한 만큼 파계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여자가 스님의 방에 들어가는 일은 절대 없으며, 용무가 있으면 밖에서(대중이 보이는 곳) 대화한다.

스님이 여자와 어울려 웃는 일은 없다.

 

 

스리랑카 스님들은 보통 12세쯤 되었을 때, 동진출가(童眞出家)한다.

양가의 자제로서 장남이나 외아들이 아닌 건강한 어린이만 선택되며, 이들은 어려서부터 전통적인 사원교육제도인 ‘피레베나’에서 교리ㆍ수행ㆍ일반교양ㆍ불경 등을 배운다.

이 학교에서는 세속의 신도도 교육을 받는다.

 

 

스리랑카에서의 불교의식은 대체로 밤에 행해진다.

신도들은 밤에 사찰을 찾아와 설법을 듣는다.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은 대개 이며, 낮에 꽃을 채집해 깨끗이 씻어 바구니에 담아와 공양한다.

 

 

중요한 불교의식으로는 포야데이(蒲月祭)페라헤라(行列祭), 보리수공양 등이 있다.

포야데이는 매월 음력 보름날 하는 행사로 금욕ㆍ참회의 날이다.

모든 신도는 이날 육식을 금하며 흰옷을 입고 독경과 정진ㆍ설법을 듣는다.

페라헤라는 유명한 불치(佛齒)를 코끼리의 등에 올려놓고 벌이는 순행제(巡行祭)로 이 나라에서 가장 큰 민속행사의 하나다.

이 행사는 불치가 처음 들어온 4세기 경부터 있어 왔다고 한다.

또 보리수공양은 성수(聖樹)가 있는 마하보디사(舍)에서 행해지는 의식으로 신도들은 나무 주위를 7번 돌며 물을 뿌린다.

 

 

스리랑카 스님들의 사회활동은 철저한 자비행의 실천이다.

불교계에서 운영하는 유아원과 일요학교는 영세민을 위한 것이고, 고아라든가 지체부자유자를 보호하는 곳도 불교단체이다.

막사이사이상을 받은 사회사업가 아리야라트내 씨도 독실한 불교신자다.

스리랑카불교는 완전히 민중의 생활 속에 파고들어가 있다.

집집마다, 사무실과 버스에도 불상(佛像)이 모셔져 있으며, 아침 5시 반 국영방송국의 예불방송에 맞춰 예불을 시작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

 

 

 

 

 

 

 

 

슬기롭고 온화하게 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sweetie65/6239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