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열반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 염불(念佛)인데, 염불(念佛)을 할 때, 이 세상에 오시는 부처님, 이것을 강생불(降生佛), 하생불(下生佛)이라고 한다. 강생(降生)하신 부처님, 또 도를 이루신 부처님(成道佛)이라. 부처님이 도를 이루신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또 설법하신 부처님,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리고 열반(涅槃)하신 부처님, 이렇게 부처님을 항상 생각할 때, 불생가비라(佛生迦毘羅) 가비라 국에서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또 성도마갈타(成道摩竭陀) 마갈타 국에서 도를 이루시고, 설법바라나(說法波羅奈) 베나래스 녹야원 바라나에서 설법을 하시고, 입멸구시라(入滅拘尸羅) 구시라 성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것을 매일 같이 외운다. 이것이 염불(念佛)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팔상(八相)으로 성도(成道)를 하셨다. 부처님의 행적을 여덟 가지로 구분해서 이해를 하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네 가지를 이렇게 항상 생각을 한다.
강생(降生)하시고, 성도(成道)하시고, 설법(說法)하시고, 열반(涅槃)하시고, 팔상(八相) 중에서도 이 네 가지 사상(四相)을 항상 염송(念誦)을 하면서 생각을 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네 가지 중에서도 일년(一年) 불교 행사(行事)를 쭉 보면 강생(降生)하신 부처님을 맞이하는 경우가 제일 행사가 크고, 사월 초파일 행사가 제일 크다.
그 다음에 성도(成道)하신 부처님을 또 맞이하는 경우가 많고, 설법은 항상 하는 것이니까. 특별히 기념이 않되고 이 성도절(成道節)이나 부처님의 강생절(降生節)에 비해서 열반절 행사가 조금 규모가 적은 것도 사실이고, 별로 크게 중요시 않된 것도 사실이다.
60년대부터 큰 절에 쭉 있어 봤는데, 열반절 행사는 큰 절에서도 별로 없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아주 중요한 것이 있다.
그리고 부처님 상호(相好)를 보면, 태어나시는 부처님은 서있는 모습으로 오른 팔과 손은 위로 하고 왼팔과 손은 아래로 하고 있다. 이것은 강생불(降生佛)이다.
그 다음 양손을 가슴까지 올려 엄지와 장지 끝을 서로 맞댄 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펴진 마지막 두 손가락 끝을 오른쪽 손목에 대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형태이다.
어떤 부처님일까요? 설법불(說法佛) 전법륜인(轉法輪印), 길상인(吉祥印)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많지 않으나 안압지 출토 금동삼존판불상의 본존불 등에서 볼 수 있다.
애들은 부처님이 점친다고 하고, 돈이 제일이라고 그러는데, 엄지 손 가락으로 세 번째 손가락 장지를 잡은 것은 설법인(說法印)이다.
무엇인가? 인욕(忍辱) 참는 것인데, 부처님 법으로 보면 백번을 이기는 것보다 한 번 참는 것이 더 행복하다. 이게 법이다.
백번을 이기는 것보다 한 번 참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그러니까. 인욕(忍辱) 참는 것인데,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세 번째 아닌가? 이런 인욕(忍辱) 설법을 하고 계신다.
그리고 양쪽 손을 가슴 앞에서 모으는 것도 설법(說法)하는 형상(形相)의 수인(手印)이다.
또 손바닥을 편 채로 왼손은 배꼽 아래에 두고, 그 위에 오른손을 포개서 두 엄지손가락을 맞대고 있는 모양이다. 두 손을 모아서 단전 앞으로 다가 오는 것은 사유인(思惟印), 법계정인(法界定印)이다.
부처님이 선정(禪定)에 드신 선정인(禪定印)을 뜻한다.
또 무릎으로 손바닥을 턱 내려서 아래로 누르는 것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고 해서 왼손은 손바닥을 펴거나 엄지와 중지를 맞닿게 하여 결가부좌한 오른쪽 발위와 배꼽 앞부분에 놓고 오른손은 땅으로 드리우면서 손바닥을 안으로 향하여 다섯 손가락을 펴는 결인(結印)이다.
이 수인(手印)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서 성도(成道)하실 때 모든 마군(魔群)들을 항복(降伏)시키고 지신(地神)으로 하여금 증명(證明)하게 한데서 유래한다.
부처님 형상을 보면 항마(降魔)해서 성불(成佛)하시고, 삼매(三昧)에 드시고, 설법(說法)하시는 이런 부처님이 많이 있다.
그런데 열반불(涅槃佛)은 어떤 형상이지요? 누워있는 분이 열반불(涅槃佛)인데 열반불(涅槃佛)은 설법(說法)을 한다든지, 선정(禪定)이나 사유(思惟)를 한다든지, 아래로 손바닥을 내려서 항마(降魔)를 한다든지 이런 것보다 숫자가 적다.
열반불(涅槃佛)은 거의 없다. 그러면 왜 그런가? 열반(涅槃) 아주 중요한데 열반(涅槃)을 어떻게 봐서 그런가? 우선 이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열반(涅槃)은 ‘적정(寂靜)고요하고 고요한 것이다’
또 열반(涅槃)은 멸도(滅度) 멸(滅)이라고 하는 것은 적멸(寂滅), 고요하다는 말인데, 도(度)라고 하는 것은 들어간다는 소리다.
적멸(寂滅)의 세계로 들어간다. 도(度)자는 도(道)와 똑 같다. 건너간다는 것이다.
멸도(滅度)라고 하면 적멸(寂滅)의 세계로 간다. 우리가 입적(入寂) 고요한 세계에 들었다는 말과 같다. 또, 열반(涅槃)을 원적(圓寂)이라고도 쓴다. 원(圓)이라고 하는 것은 원만구족(圓滿具足)하다.
원만(圓滿)하고 다 갖추어 졌다고 해서 원(圓)자이고, 적(寂)이라고 하는 것은 무장무애(無障無碍)하다. 아무런 장애(無碍)가 없다고 하여 적(寂)이라고 한다.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무장무애(無障無碍)한 세계가 원적(圓寂)이라고 하는데, 그 원적(圓寂)의 세계가 바로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신다고 하는 것은 원적(圓寂)의 세계에 들어가시는 것이고, 적정(寂靜)의 세계에 드시는 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그러면 부처님의 일생을 통해서 사월 초파일날 탄생을 하셔서 이월 보름날 열반을 하시는 그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사월 초파일날 탄생 하시는 것은 부처님이 중생에게 해탈(解脫)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가장 중요하게 수행하신 것은 해탈(解脫)인데, 생노병사(生老病死) 우비고뇌(憂悲苦惱) 근심걱정(勤愁啒卹)으로부터 다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부처님이다.
그러면 왜 열반(涅槃)에 드시는가? 열반(涅槃)에 드시는 것은 첫째는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을, 생사(生死)가 어떻다는 것을 더 확실하게 보여 주는데 그 의미가 있다.
첫 번째 의미는 무상(無相)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 모든 존재하는 것, 그 어떤 것이든지, 존재하는 것은 다 없어진다. 그래서 첫 번째 의미는 무상(無相)한 것, 부질없는 것, 덧없는 것을 보여 주시는 데 첫 번째 의미가 있다.
이것을 무상열반(無相涅槃) 무상(無相)을 보여 주신다고 한다. 그러면 중생들이 볼 때, 모든 가르침을 부처님을 의지해서 배우고 부처님을 의지하여 닦았는데,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이것이 과제(課題)이다. 그리고 불교의 발달 사상에 있어서 부처님이 돌아가신다는 것을 굉장히 충격적(衝擊的)으로 받아 드렸다.
불교 교단이 형성이 되어서 오로지 부처님께 귀의해서 교단이 유지되었는데,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신다니, 이게 굉장히 큰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 문제를 열반(涅槃) 하시기 전에도 여러 번 물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것에 대한 대답이 “그대의 말은 맞다.”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하느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계율(戒律)이나 경전(經典)에 의지해서 닦으면 된다.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열반(涅槃)함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계율(戒律)이나 경전(經典)이 없고, 다른 것이 없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심으로 말미암아 경전(經典)과 율장(律藏)이 그 부처님과 똑같은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게 새로운 불교의 역사가 바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래서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것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첫 번째 부처님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모든 것은 무상(無相)하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열반(涅槃)을 보고 슬퍼한다든지, 당황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또 모든 것은 무상(無相)하니까. 방일(放逸) 방종(放縱)과 안일(安逸)하게 지내지 말라. 그러면 방종(放縱)과 안일(安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상(無相)한 것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다.
사람도 무상(無相)하고, 재산도 무상(無相)하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다 무상(無相)한데, 방일(放逸)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 사람에 의지해서 만족하고, 물질에 의지해서 만족하는 것이 중생이다.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우선 나(我)지요? 나(我)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건강(健剛)한 나(我)인데, 이 건강(健剛)이 언제 어떻게 무너질지 모른다. 방종(放縱)과 안일(安逸)이라고 하는 것은 이 건강(健剛)한 나 자신 여기에 그냥 만족을 하는 것이다.
젊으면 젊은 그 자신에게 만족하는데, 그 젊음은 언제 지나가고 노인의 건강이라고 하는 것은 더군다나 참 믿을 것이 못된다.
노인의 건강은 절대 믿어서는 않된다. 아픈데 없으면 거기에 그냥 의지해 버린다.
그리고 매일 태어나서 사는 것만 생각하지, 죽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매날 태어나면 좋은 곳에 태어나서 잘 사는 것만 생각하지, 생사윤회(生死輪回)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해탈(解脫)을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방일(放逸)이다.
사람과 물질에만 의존하는 것이 방일(放逸)이고, 해탈(解脫)을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방일(放逸)이다.
그러니까. 열반(涅槃)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첫째, 모든 것은 무상(無相)하다는 무상(無相) 법문이고, 둘째는 방일(放逸)하게 지내지 말라는 방일(放逸) 법문이다.
생명(生命)과 재산(財産)을 철석(鐵石)같이 믿고 해탈(解脫)을 구하지 않으면 그게 어리석어서 생사고뇌(生死苦惱)와 생사윤회(生死輪回)를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이 부처님의 법문(法問)이다.
그러면 이렇게 무상(無相)한 법문(法問)만 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열반경(涅槃經)을 보면 대승열반경(大乘涅槃經)이 있는데, 40권으로 된 열반경(涅槃經)이 있고, 36권으로 된 열반경(涅槃經)이 있는데 이게 마찬가지고, 초기 열반경(涅槃經)이 여러 권 있는 가운데 상중하 삼권으로 된 열반경(涅槃經)이 있다.
초기 열반경(涅槃經)에 부처님 하신 법문 가운데 이런 법문이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이라. 제법은 변하여 무상하니
시생멸법(是生滅法) 이것이 생멸법이다.
생멸멸이(生滅滅已) 하면, 생멸이 멸하여 다하면
적멸위락(寂滅爲樂) 적멸이 즐거움이 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제행(諸行)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제법의 생멸현상, 모든 제법과 만법이 생겼다 없어지고, 생겼다 없어지는 이 생멸현상(生滅現想)이 행할 행(行)자를 써서 무상(無常)하다는 것이다. 생기면 사라지고 생기면 사라지는 모든 것은 생멸법(生滅法)이다.
시생멸법(是生滅法)하면, 생멸(生滅)이 소멸(消滅)하여 다하면 적멸(寂滅)이 위락(爲樂)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열반(涅槃)이다. 생멸(生滅)이라고 하는 것은 생기면 사라지고 생기면 사라지는 이것이 생멸(生滅)이다.
그러면 적멸(寂滅)이라고 하는 것은 생멸(生滅)이 소멸(消滅)하여 다 할 것 같으면 그 다음에 무엇이 있는가? 적멸(寂滅)이 위락(爲樂)이라.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고 하셨다. 이것을 적멸열반(寂滅涅槃)이라고 한다.
부처님이 누워 계신다고 하는 것은 적멸(寂滅)의 세계를 보였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적멸(寂滅)은 무엇인가?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이 다른 것은 다 체험을 했는데, 적멸(寂滅)은 체험하지 못했다.
본 것도 많고, 들은 것도 많은데, 본 것은 있지만 사라졌다. 들은 것도 있지만 사라지고 없다. 느낀 것이 있지만 사라지고 그래서 생겼다.
없어지고 생겼다 없어지고, 만났다. 헤어지고, 만났다. 헤어지는 이런 생멸(生滅)은 아는데, 적멸(寂滅),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은 것,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것은 못 느껴 본 것이다.
적멸(寂滅)이라고 하는 것은 생멸(生滅)이 다 한 것이 적멸(寂滅)이다. 생멸(生滅)이 다 한 것이 적멸(寂滅)이지, 살았다. 죽는 것은 적멸(寂滅)이 아니다. 죽는 것도 생멸(生滅)이다.
그래서 이 적멸(寂滅)이라고 하는 것은 생멸(生滅)이 다 한 그것이 적멸(寂滅)이라고 한다.
그러면 생멸(生滅)이 다 한 그곳에는 무엇이 있는가?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시는 열반락(涅槃樂)이고, 적멸락(寂滅樂)이라고 한다.
그런데 중생들이 느끼는 즐거움은 생멸락(生滅樂)인데, 이 생멸락(生滅樂)은 세간락(世間樂)이라고 한다.
세간에도 즐거움은 있다. 그것은 만나는 즐거움, 태어나는 즐거움, 좋은 것을 갖는 즐거움이 있다. 이런 세간락(世間樂)에만 집착(執着)을 하니까. 그 세간락(世間樂)을 구하다가 다시 고통(苦痛)이 온다.
물고기가 낚시밥 물다가 절단(絶斷) 나는 것이다. 이것이 세간락(世間樂)이다. 저 동물의 왕국을 보면 동물들이 각자 먹이를 구하려고 사냥하러 나간다. 다 다른 것을 사냥하기 위해서 간다.
그런데 나가다 보면 도리어 제 몸이 밥이 되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 인간도 똑 같습니다.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데, 구하다가 고통(苦痛)을 받는다. 그 물고기가 낚시밥을 물지 않으면 제 몸이 상할 일이 없다. 그런데 꼭 낚시밥을 물어서 제 몸이 다 날아간다.
이게 세간락(世間樂)이다. 세간(世間)에서는 즐거움을 탐하다가 제 몸에 괴로움이 오는 것이다. 그런 락(樂)말고 나지도 죽지도 않는 거기에 락(樂)이 있는데 그게 적멸락(寂滅樂)이다.
그래서 우리 중생이 생멸(生滅)만 알았지, 지금까지 적멸(寂滅)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마치 지금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눈을 못떠서 아무것도 본것이 없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신 것은 첫째 적멸(寂滅)의 세계, 이것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첫 번째 인생무상(人生無常)함 것을 보인 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보이신 것이다.
생노병사(生老病死)라고 하는 것이 다 이렇게 무상(無常)한 것이어서 오래 머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신 것이고, 그 다음 생노병사(生老病死)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가 있다.
이것을 보여 주셨는데, 그 불생불멸(不生不滅)이 적멸(寂滅)이다.
그래서 턱 누우시는 것은 생노병사(生老病死)에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세계를 보여 주신 것이다.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이게 다 허망(虛妄)하다는 것은 무상(無常)을 보이신 열반(涅槃)이고, 적멸(寂滅)을 보이신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보이셨다.
이것이 부처님의 열반(涅槃)이다. 이것을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부처님의 열반(涅槃)을 어떻게 말씀을 하셨는가? 부처님의 열반(涅槃)은 진여(眞如)의 세계, 진여열반(眞如涅槃), 전혀 변함이 없는 참 그대로의 세계 그 진여열반(眞如涅槃)이 부처님의 열반(涅槃)이라고 말씀하였다.
또 법계열반(法界涅槃), 온 우주 법계의 그 변함없는 세계가 그게 부처님의 열반(涅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다음은 허공열반(虛空涅槃), 그 허공(虛空)과 같은 그 고요함이 바로 부처님의 열반(涅槃)이라고 하였다.
다른 말로는 법성열반(法性涅槃) 법(法)에는 성(性)이 있는데, 본성(本性) 그게 법성(法性)이다. 법성(法性) 그 자체가 부처님의 열반(涅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부처님이 어째서 태어나시기도 하고 돌아가시기도 하는가? 그래서 그것은 다 교화하는 내용이 부처님이 오고 가시는 팔상의 모습인데, 이것을 교화불(敎化佛)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것은 중생들에게 환희심(歡喜心)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오셨고, 열반(涅槃) 법문이 조금 어렵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환희심(歡喜心)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열반(涅槃)에 드시는 것은 연모심(戀慕心)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열반(涅槃)에 드신다고 하였다.
환희심(歡喜心) 연모심(戀慕心), 그러니까. 부처님이 맞아요. 오래 함께 머물러 있으면 연모심(戀慕心)을 일으키지 않는다.
어느 정도 인연이 푹 익으면 떠나는 그것이 부처님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십불(十佛)로 교화(敎化)를 하시는데, 그 여래십불(如來十佛) 가운데에 반드시 열반불(涅槃佛)이 있다.
성정각불(成正覺佛), 정각(正覺)을 이루는 부처님도 있고 삼매불(三昧佛)도 있고, 심불(心佛)도 있고, 여러 가지 있는데, 그 중에는 열반불(涅槃佛)이 있다.
열반(涅槃)에 드셔야만이 중생들이 그 부처님을 생각하고 연모하는 마음이 깊어진다. 이렇게 화엄경(華嚴經)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는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실제로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해서 오시는 것인가? 그게 아니고, 가신다고 해서 가시는 것인가? 그게 아니다. 그러면 무엇과 같은가? 태양에다가 비유를 했는데, 다음과 같다.
해가 턱 밝아 있다고 한다. 밝아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그릇에다가 물을 떡 떠서 놓으면 그 그릇 속에 햇볕의 그림자가 다 비쳐지지요?
또 그릇이 깨지고 물이 없어지면 햇볕의 그림자가 없어지지요? 이것과 같다.
이제 중생들이 부처님을 생각하는 신심(信心)이 가득하면 그 신심(信心)에 의해서 부처님을 턱 보다가 신심(信心)이 얕아지면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마치 물이 그릇에 있으면 물속에 햇빛 그림자가 보이다가 그릇 깨지고 물이 없어지면 햇빛 그림자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해가 오고, 간 것이 아니라 물이 있으면 해를 보고 물이 없으면 해를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이 부처님이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중생들의 신심(信心)이 깊어지면 부처님을 보고 신심(信心)이 부족하면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여래라고 하는 분은 실제로 법성(法性)이요. 진여(眞如)이기 때문에 오고 가는 것이 아닌데, 중생들이 신심(信心)에 의해서 오는 모습을 보고,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부처님의 세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화엄경(華嚴經) 여래출현품(如來出現品)에서는 말씀을 하시는 열반(涅槃) 법문(法問)이다.
그리고 열반경(涅槃經)에서 열반(涅槃)의 세계를 이야기 하는데, 부처님이 열반(涅槃)에 드신 것은 이 생멸세계(生滅世界)에서 적멸락(寂滅樂)을 보이신 것인데, 생멸(生滅)이 멸이(滅已)하면, 생멸(生滅)이 소멸(消滅)해서 끝이 나면 그 다음에 무엇이 있을까?
적멸(寂滅)이 위락(爲樂)이라. 적멸(寂滅)이 즐거움이 된다. 이 적멸락(寂滅樂), 적멸락(寂滅樂)을 보이신 것인데, 이 적멸락(寂滅樂)이 무엇인가? 그 적멸락(寂滅樂)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다. 이것이 대승불교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생멸(生滅)이 멸이(滅已)하면, 생멸(生滅)이 소멸(消滅)해서 끝이 다하면 적멸(寂滅)이 위락(爲樂)이라. 열반(涅槃)에 든다. 이 말만 했지 그 열반락(涅槃樂)이 어떤 것이라고 하는 말씀을 안했다. 그게 초기불교(初期佛敎)다.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런데 대승불교(大乘佛敎)에서는 그 적멸(寂滅)의 낙(樂)을 설명하는 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 그 적멸락(寂滅樂)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말이다.
부처님의 적멸락(寂滅樂)은 이 세간락(世間樂)처럼 생겼다가 없어지고, 생겼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날 때는 흥분되다가 못 만나면 또 좋지 않고 헤어질 때는 슬프고 그런 것이 아니다. 음식도 먹을 때는 좋다가 먹고 나서는 좋지 않고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세간락(世間樂)이다.
이 적멸락(寂滅樂)은 상락(常樂) 항상 즐거운 것이다.
또 이제 세간(世間)에서는 나(我)라는 것이 태어나기도 하고 나(我)라는 것이 없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을 세아세정(世我世淨)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나(我)라는 것은 태어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나(我)잖아요. 그런데 이 여래(如來)의 진실아(眞實我) 진실(眞實)한 자아(自我)는 진여아(眞如我)이고 법성아(法性我)이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있는 자아(自我)이다.
생겼다가 없어지는 내(我)가 아니다. 그것은 세아(世我)라고 한다. 법성아(法性我), 진여아(眞如我), 진실아(眞實我) 이것이 아정(我淨)이다. 그리고 세간(世間)에서 깨끗한 것은 먼지를 닦아서 깨끗하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다.
아예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없는 법성(法性)의 깨끗함, 진실(眞實)한 깨끗함, 적멸(寂滅)의 깨끗함이다. 이게 적멸아정(寂滅我淨)이다. 그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열반(涅槃)이다. 그게 깨달음이고, 그게 해탈(解脫)이다.
그래서 열반경(涅槃經)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아자즉시(我者卽是) 여래장아(如來藏我)“아자(我者)는 즉시 여래장(如來藏)이다.” 나(我)는 곧 여래장(如來藏)의 뜻이다. 나(我)라는 것은 곧 여래장이다.
일체중생(一切衆生) 실유불성(悉有佛性)이다. 일체중생(一切衆生)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
불성(佛性)이 무엇인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다. 불성(佛性)이 바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는 것이다. 그게 나(我)라는 것입니다.
상락아정(常樂我淨) 그게 나(我)지, 부모가 물려주면 생겼다가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는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멸법(生滅法)이라고 한다.
그것은 무상(無相)한 것이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이 없이 어느 때부터 항상 번뇌에 덮였기 때문에 중생이 보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 그게 난(我)데, 이 생멸상(生滅相)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기고 없어지는 생멸상(生滅相)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그 불생불멸(不生不滅),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보지 못할 뿐이다.
그것이 열반(涅槃)이다. 그 불생불멸(不生不滅), 상락아정(常樂我淨) 그것이 참 나(我) 상락아정(常樂我淨)인데, 중생들은 생노병사(生老病死) 흥망성쇠(興亡盛衰)에 집착을 하니까. 그것을 스스로 등져서 모른다고 한다.
해(日)가 있는데 이것을 등지면 어둡듯이 그 불생불멸(不生不滅),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스스로 등져서 모른다. 이것을 가르친 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이다.
그래서 이것을 열반경(涅槃經) 여래성품(如來性品)에서는 빈사복장(貧舍福藏)이라고 설명을 했다.
가난한 집 마당 밑에 금은보화(金銀寶貨)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나 그 집에서는 모른다.
그런데 그것을 아는 사람이 “당신의 집 마당 속에는 금은보화(金銀寶貨) 이것을 진금장(眞金藏)이라고 표현 했는데, 진금(眞金)의 저장고(貯藏庫)가 꽉 차있다. 그것을 파 보아라”
그래서 진짜 파보니까. 나왔다. 자기 집 마당 속에 진금(眞金)이 가득한데, 모르는 것이다. 중생이 꼭 그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을 진금(眞金)이 여기 있다고 가르친 분이 부처님이고,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파라고 해서 파서 금은보화(金銀寶貨)를 얻은 것은 중생이라는 것이다.
그 불생불멸(不生不滅), 상락아정(常樂我淨)이 그냥 있는데, 중생은 이 흥망성쇠(興亡盛衰) 희노애락(喜怒哀樂)에 꽉 집착을 해서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열반(涅槃)은 그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세계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열반(涅槃)에 들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열반(涅槃)은 법계(法界) 법성신(法性身), 이 법계(法界)에는 법성(法性)이 있는데, 그 법계(法界) 법성(法性)의 몸이 우리 본래의 몸인데, 그 법계(法界) 법성(法性)의 몸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이 그대로 있는 것, 그것을 깊이깊이 아는 그것이 열반(涅槃)이다.
그래서 열반(涅槃)은 증득(證得)이라고 한다. 무엇을 증득(證得)하는가? 우리 본래의 몸, 이것은 부모가 물려준 생멸신(生滅身)이고, 생멸(生滅) 이전에 법성신(法性身), 적멸신(寂滅身)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분들이 소감을 이야기 하기를 법문(法問)할 때 한자(漢字)를 너무 많이 쓴다고 한다. 그래서 한자(漢字)를 줄이려고 하는데, 한자(漢字)를 않쓰고 말하면 양이 않찬다. 그것도 큰 업장이다.
이것은 부모가 물여준 생멸신(生滅身)이다. 그런데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적멸신(寂滅身)이 있다는 말씀이다. 그것을 법성신(法性身)이라고 한다.
천수경(千手經)에 원아조동 법성신(願我早同 法性身)이라고 그 말씀이 있다. 그 법성신(法性身)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이 그대로 차 있다.
부모가 물여준 생멸신(生滅身)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생노병사(生老病死)가 끊이지를 않는다. 이 좋은 몸을 물려주었는데, 살다가 보면 생노병사(生老病死)가 그냥 있는 것이다. 생노병사(生老病死)가 없는 몸은 없다.
그런데 불생불멸(不生不滅)의 법성신(法性身)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이 그대로 있다. 그러면 열반(涅槃)은 무엇인가? 이 생노병사(生老病死)의 생멸신(生滅身)에서 그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법성신(法性身)을 딱 깨달아 얻는 그것이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그래서 열반(涅槃)은 증득(證得)이라고 하고, 요지(了知)다. 요달(了達)해서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신 것이 바로 열반(涅槃)이라는 말씀이다.
이 몸을 보이지 않는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에게 연모(戀慕)하는 마음을 더 내게 하기 위해서 가시는 것이지, 부처님의 진정(眞情)한 열반(涅槃)은 도(道)를 이루신 그것이 정말로 열반(涅槃)이라는 것이다.
이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것을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생멸(生滅)이라고 하는 것은 다 무상(無相)하다고 말씀하시고, 무상(無相)을 보인 것이 열반(涅槃)이다. 이것이 무상(無相) 열반(涅槃)이다.
둘째, 적멸(寂滅)을 보이신 것이 열반(涅槃)이다. 생노병사(生老病死)는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이고, 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을 증득(證得)하게 되면 거기에 적멸락(寂滅樂)이 있는데, 그 적멸락(寂滅樂)은 다른 것이 아니고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는 생노병사(生老病死)에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얻는 그것이 불교(佛敎)이다. 그리고 적멸락(寂滅樂)을 말하는 것이 불교(佛敎)이다. 세간락(世間樂)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중생이 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적멸락(寂滅樂)을 못 얻는가?
왜 못 얻는다고 했습니까? 이 희노애락(喜怒哀樂)의 세간락(世間樂)에 너무 매달리기 때문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적멸락(寂滅樂)을 못 얻는다.
그래서 어떻게든지 즐거울려고 하다가 괴롭고, 얻으려고 하다가 잃고, 잘될려고 하다가 실패하는 그것이 중생이다.
동물들을 보면 꼭 사냥하러 나갔다가 사냥을 당한다. 이와 똑같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런다.
“고생도 팔자라고” 그러나 팔자가 아니다. 고생하는 팔자는 없다. 그러면 무엇인가? 어리석어서 그렇다.
어리석어서 고생하지 팔자가 사나워서 고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 팔자라고 하는 것은 없다. 팔자는 똑같다. 그러면 왜 다른가? 내가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지, 팔자가 무슨 슬픈 팔자가 있고 기쁠 팔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죄(罪) 가운데 가장 무서운 죄(罪)가 어리석은 죄(罪)이다. 어리석은 그것이 모든 고통(苦痛)을 만들어 내고 그 한량(限量)없는 장애(障碍)를 어리석은 것이 만들어 낸다. 절대 “내 팔자야” 그런 말하지 마세요.
팔자는 없다. 어리석어서 그렇다. 상락아정(常樂我淨)이 앞앞이 다 있는데, 우리가 희노애락(喜怒哀樂)에 너무 매달려 있으니까.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딱 등지고 모른다.
그래서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열반(涅槃)이다.
부처님의 열반(涅槃)은 무상(無相)을 떡 보였다. 이 무상(無相)한 것만 믿어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무상(無相)한 것 하나만 믿어도 사람은 오만할 수 없고 자만할 수 없다.
그런데 아무리 태어났다. 죽었다. 태어났다. 죽었다 해도 불생불멸(不生不滅) 적멸(寂滅)의 세계가 있다.
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는 그것은 견해(見解)가 아니다. 이것을 열쇠(鍉鍵)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이라고 어떻게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손가락이다.
손가락이기 때문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고 하는 손가락을 통해서 딱 달을 보는 것이다.
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을 해석을 하려고 하면 이것은 또 소용없다. 딱 손가락이기 때문에 자기가 딱 보는 것이고 체험을 한다.
이것은 열쇠(鍉鍵)이기 때문에 열쇠(鍉鍵)는 아무리 들여다봐야 않된다. 딱 열고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은 내가 딱 체험하는 것이지, 해석(解釋)이 아니다. 이것은 소용(所用)없다.
예를 들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은 음식이라고 한다. 음식을 갖다주면 아무리 이것을 보고 겉모양만 보고 느껴봐야 소용없다. 음식은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먹어야 된다. 이게 아주 중요하다.
그리고 어떤 큰 스님은 설명하시기를 “부처님의 법문은 견해(見解)가 아니고 깨우침인데, 깨우침이라고 하는 것은 성냥과 같다고 하셨다”
성냥이라고 하는 것은 성냥만 그것만 가지고는 소용이 없다. 그러면 그게 성냥이 아니고 무엇을 준 것인가? 불(火)을 준 것이다.
불(火)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탁 켜야 된다. 그래서 이런 상락아정(常樂我淨)이니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니 라고 하는 성냥개비를 지금 준 것이다. 그러면 성냥을 아무리 보고 있어 보아야 그것은 불(火)이 아니다.
또 음식을 아무리 보고 있어 보아야 그것은 생명이 아니다. 음식은 먹어야 되고 성냥은 켜야 불(火)이 된다. 손가락 아무리 쳐다보고 있어 보아야 그것은 달(月)이 아니다.
그래서 고려시대(高麗時代)에 보조(普照)스님 같은 분도 이런 법문을 턱 듣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혜(智慧)가 있는 사람이라면 보배(寶貝)가 여기 있다. 이것을 알았으면 그 보배(寶貝)를 얻어야지, 그냥 보배(寶貝)를 거기서 얻지 않고 다시 돌아와서 만날 그 가난함을 걱정할 수가 있겠는가?”
“보배(寶貝)가 있는 곳을 알면서도 구하지 않고 끊임없이 힘들고, 가난함만을 원망(怨望)하는 것을 어찌 지혜로운(智慧) 사람이라 하겠는가? 보배(寶貝)를 얻으려면 가죽 주머니를 버려야 한다.”
보배(寶貝)를 얻으려면 방하피낭(放下皮囊) “가죽 주머니를 버려라.”고 하였다. 이게 보조(普照)스님 수심결(修心訣) 제일 마지막 법문이다.
피낭(皮囊)이라고 하는 것은 가죽 주머니라는 소리인데, 가죽 주머니를 버려라. 그러면 가죽 주머니가 무엇인가?
가죽 주머니는 온갖 사량분별(思量分別)의 망상(妄相)이다. 이것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심신심(至心信心) 지극한 마음의 신심(信心)을 가지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얻을 수 있다.
이 지심신심(至心信心)이 없으니까. 않되는 것이다. 열반절(涅槃節)을 맞이해서 부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것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인데, 우리가 못 얻는 것은 왜 그런가?
지심신심(至心信心) 지극한 신심이 부족해서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의 열반(涅槃)에 대한 더 지극한 신심을 갖는 그것이 아주 중요하는 것이다. 성불하십시오.
종범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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