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꿈과 현실에 관한 소고

수선님 2019. 3. 24. 12:09

 

어떤 사람이 꿈에 어떤 사람을 만나서 다정하게 기쁨도 나누고, 음식도 먹고, 술도 마시고, 많은 이야기를 하고 돌아왔다. 깨고 보니 꿈이었다. 그래서 하도 그 꿈의 기억이 즐거워서 그 친구에게 가서 물어 보았다.

[내가 어제 너와 다정하게 정을 나누었는데, 그걸 알았니?] 그러니까. 그 꿈에 만났던 친구가 [나는 네가 꿈을 꾸었던 사실을 전혀 몰랐다] 고 했다. 당연히 모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네가 그런 꿈을 꾸었는지, 어떤지, 즐거웠는지, 괴로웠는지 전혀 모른다]라고 말을 한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뻔히 아는 사실이겠지만 [매우 충격을 받았다. 나는 그렇게 즐거웠고, 중요했던 순간이었는데, 꿈에 보았던 당사자는 전혀 모른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라는 생각에 그만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그 다음에 생각을 하니까. 그 꿈을 꾸는 순간은 자기가 어느 방에 누워 있었는지, 어느 잠자리에 누워 있었는지, 어느 공간에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아주 중요한데, 하나는 꿈에서 볼 수 있는 모든 내용, 몽경(夢境), 꿈의 경계, 또는 꿈의 세계, 그것이 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 그 꿈을 꾸는 순간에는 자신이 사람을 만나거나 어디를 가거나 무엇을 하거나 그것은 꿈이지, 참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 또 하나는 자기가 어느 잠자리에 누워 있었는데, 그 잠자리에 누워 있는 자기를 또, 전혀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상상아(狀上我), 침상 위의 나다] 라고 한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자기 자신을 전혀 모르고, 꿈에서 보이는 그 세계는 꿈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지, 이 세상의 그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모른다. 이것이 꿈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몽식(夢識), 꿈에서 느끼는 인식이라고 한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꿈속에서 영화롭기도 하고, 치욕스럽기도 하고, 오래도 살고, 또 단명해서 빨리 죽기도 하고, 누구를 만나기도 하는데, 누구를 아무리 만나도 [어제 내가 너를 꿈꿨는데, 나를 보았는가?] 라고 해도 그는 [못 보았다]고 한다.

그것은 [몽자성(夢自性)] 꿈에서 스스로 이루어진 것이고, [몽식(夢識)] 꿈속에서 안다는 것이고, 그리고 또 꿈꾸는 자기가 누군지 모른다. 그래서 분명히 잠들었던 자기가 있는데, 꿈꾸는 순간에는 꿈꾸는 자기를 알 수가 없다. 이런 것을 꿈의 한계, 몽식(夢識)이라고 한다.

몽식(夢識)은 모두 망견[(妄見)] 허망하게 보는 것이다. 그 허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눈을 자꾸 비비다 보면 허공에 꽃이 보이게 된다. 그것을 망견이라고 한다. 허공이 울긋불긋하고 꽃이 생긴다. 그것은 [안화(眼花), 눈의 꽃] 라고 한다.

눈의 꽃은 망견이고 허망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 허공에 꽃이 없는데, 왜 꽃이 보이는가?] 그것은 눈을 비볐기 때문에 보이듯이 [꿈 속에서 왜 보이는가?] 그것은 꿈을 꾸었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지, 있어서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그 [꿈을 꾸는 순간에는 전혀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는 말이다. 그러면 [언제 알게 되는가?] 그것은 꿈에서 돌아 왔을 때, 꿈에서 깨어났을 때 알게 된다. 그것을 [현실]이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현실이라는 것은 꿈을 꾸기 전, 잠들었던 자기가 보이고, 또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살피는 것인데, 그것을 망견과 몽식이라 한다. 이와 반대되는 말로 각조(覺照)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반야심경의 조견오온은 몽식(夢識)과 반대되는 말이다.

꿈에서 인식하는 것과 전혀 다른, 깬 상태에서 여러 가지를 살피는 그것이 각조(覺照)다. 그런데 꿈으로 보면 지금 현실로서 각조하는 것이 허망한 것이 되고, 또 현실로 보면, 또 꿈이 허망한 것이 되는데 그렇다면 진짜는 무엇인가?

잠시라고 꿈을 꾸었을 때, 그 꿈의 세상이 진짜인가? 깨어난 세상이 진짜인가? 진실로 이 문제가 아주 오묘한 과제다.

우리는 꿈이 없이는 못산다. 꿈이 다 있다. 그러면 꿈도 자기 자신이다. 그러면 꿈에서 느끼는 그것이 참으로 나인지, 각조(覺照), 현실에서 느끼는 그것이 참으로 나인지, 오묘한 것이다. [인생의 참 주인은 누구인가?]

◆ 여기에 있어서 크게 보면, 망견(妄見)의 범위가 꿈에서 보는 몽식(夢識)만 망견이 아니라, 일상 우리 생활 전체에서 보는 것이 다 망견이다.

그러면 망견과 반대되는 말은 무엇인가? 진견(眞見), 참답게 보는 것이다. 참답게 본다는 것은 지혜가 나타나야 보는 것인데, 그것은 삶도 보고, 죽음도 보고, 태어나는 세계와 죽어가는 세계를 다 보았을 때, 그것을 진견(眞見)이라 부른다.

 

우리 인생에는 삶과 죽음이 다 있는데, 어디서 문제가 생기는가? 그것은 삶만 보고, 죽음은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큰 문제다.

진견(眞見)은 부처님께서 [삶과 죽음을 다 보셨다] 는 것이다. 하나만 보는 것은 망견(妄見)이라는 말이다.

참답게 보는 것이 바로 바르게 보는 것이다 라고 해서 그것을 정견(正見)이라고 한다. 꿈에서 볼 때, 분명히 침상 위의 누워있는 침상아가 있었는데, 못본다.

또 자기하고 더불어 같이 있는 그 사람은 없는데, 있다고 본다.

꿈에 자기하고 노니는 사람은 없는데, 그 사람을 보니까.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보고,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자기는 있는데, 보지 못한다. 이것이 전부 망견(妄見)이다.

그러면 정견(正見)은 무엇인가? 참답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고, 없는 것을 없는 그대로 보는 그것이 진견(眞見)이고, 정견(正見)이고 한다.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은 정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부 망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것을 공포라고 하고, 전도몽상이라 한다.

역사 속에서 보면, 꿈에 대한 이야기가 참 멋있는게 많다. 꿈에서 교훈적인 그런 사례가 있다. 이광수 선생의 작품에 가운데 ‘꿈’이라는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 소설의 대본이 되는 것이 바로 강원도 양양 동해바다에 있는 낙산사의 ‘조신‘이라고 하는 큰스님이 계셨다.

그 스님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 바로 ‘꿈’이다. 그런데 스님이 꿈을 아주 심각하게 꾸고 현실 속의 갈등을 완전히 해결했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구도적인 욕구와 세속적인 욕구 사이에서 발생한 갈등 때문에 정신적으로 아주 심각했다.

그렇다면 세속적인 욕구는 어디에서 생기는가?

첫째, 한 평생이 순간이라고 하는 사실을 모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것을 [무상을 모른다] 라고 말하고, 실제로는 죽음이 가까이 있는데, 전혀 의식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살아있는 것을 전제로 해서 생기는 욕구가 바로 세속적인 욕구다.

가령, “나는 죽어도 나의 후손은 계속 이어진다는 생각과 그 끝임없이 보이는 현상에 기초를 해서 펼쳐지는 욕구 충족이 세속적인 욕구이다.

따라서 ["보이는 것을 구한다"] 고 하는 생각이 세속적인 욕구이다.

또, ["참다운 세계를 깨닫는다"] 고 하는 정신이 구도적인 욕구이다.

그런데 수행자에게 이 두 가지 욕구가 동시에 들어오면 혼란을 느끼게 된다.

 

세속으로 갈 것인가? 구도로 갈것인가? 이 두 가지 길 가운데에서 고민을 한다.

책 제목 가운데 ‘세속의 길, 열반의 길‘이라는 글을 쓴 사람이 있다. [구도의 길이냐? 세속의 길이냐?] 이런 것에서 갈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출가를 하는데 재미있는 삭발 출가를 하게 된다. ‘나는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집에서 머리만 깍는다’, ‘영원히 출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3센티미터 자랄 때까지만 출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동안에는 ‘모두 참고, 절대로 화를 않내겠다‘, ’내가 할 일을 누구에게 미루지 않는다‘, 내 마음을 다스려 보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영원히 세속적인 욕구를 버린다든지,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순간만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다.

인도에서는 이런 것을 ‘육재일’, ‘십재일’이라고 해서 ‘재일’이라는 언어를 사용하였다. ‘재일’은 오늘 날 서양에서 말하는 ‘일요일’ 같은 개념이 아니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출가한 구도자’와 같은 삶을 한 번 살아 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출가와 세속의 근본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세속’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세계에 가치를 둔다] 는 것이고, ‘구도’라고 하는 것은 [진실의 세계에 가치를 둔다] 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종종 혼란을 일으킬 때가 있다.

 

그런 혼란이 일어날 때, [‘조신스님은 꿈에서 해결했다’]는 것이다. 꿈에서 하루 저녁에 백년을 격어야 할 일을 다 격어 버린 것이다. 세속적인 가치가 마지막에는 허무한 곳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다.

젊을 때, 이 죽음이 어떻게 온다는 것을 일찍이 알았으면 삶의 자세가 달랐을 것이다. 그렇지만 젊을 때는 죽음을 모르니까. 삶의 자세가 틀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 50년 후에 격어야 할 내용을 하루 저녁에 격게 되니까. 그 욕망이 다 통일이 된 것이다.

세속적인 욕망을 과감히 접고 일생을 수도로 정진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이 낙산사 조신 스님에 대한 꿈의 이야기다. 굉장히 중요한 철학과 가치관과 문화와 역사가 포함된 그런 꿈이다.

그런데 이것을 소설화하니까 책이 된 것이다.

그리고 밀양으로 가면, ‘아란각’이라고 하는 전각이 있는데, 그곳에도 중요한 의미가 전해지고 있다. 아랑이라고 하는 사람이 마을의 치한에게 억울하게 겁탈을 당하고 목숨을 빼앗겼다.

그래서 아주 억울해서 누구든지 밀양 고을 원님으로 오면、올 때마다 그 부사에게 ‘아랑’ 자신의 억울함을 규명하고 달래달라고 찾아가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원님이 돌아가시는 것이다. 이게 아주 참 묘하다.

억울해서 찾아가는 것은 ‘아랑‘이라고 하는 처녀인데, 억울하지도 않고, 힘들지도 않고, 고관대작에 속하는 밀양 부사, 고을 원님이 왜 죽는가? 억울한 아랑이도 않죽는데, 억울하지도 않는 밀양 부사가 왜 자꾸만 죽는가?

그래서 여러 사람이 죽었다. 여기가 아주 묘한 대목이다. ‘아랑이‘가 찾아가기만 하면 죽었던 것이다. 참 희안한 일이다. 그런데 마지막에 한 분이 않죽었다.

왜, 않죽었는가? 도대체 꿈에 나타나는 ‘아랑이’가 무엇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키포인트가 있다. 열쇠가 여기 있다. 놀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살피는데 있다.

[놀라지 말고, 살피는 그곳에서 해답이 나온다]는 것이다. 모든 인생 문제가 놀라는데서 꼬이고, 살피는데서 풀리는 것이다.

그 ‘아랑’의 이야기는 [‘살피는 마음’], [살피는 행동] 에서부터 풀리는 것이다. 그런데 전에 죽은 부사들은 ‘아랑이’가 머리를 풀고, 피를 흘리고, 죽을 때 그 모습으로, 땅에 뭍힐 때, 그 모습으로 나타나니면 놀라서 다 죽었다.

‘아랑이’가 말을 하나? 해치기를 하나? 모두 스스로 놀라서 죽었던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그 분은 지혜가 있어서 도대체 실체가 무엇인가?

 

자세히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랑이’ 자기를 해치지 않고 무슨 말을 할려고 해서 그 까닭을 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랑이’가 전후 사정과 사실을 이야기하였다는 것이다.

그후 ‘아랑이’를 위해서 ‘아랑각’을 짓고, 많은 사람들에게 해마다 ‘아랑재’를 지내게 하고, 죽은 이의 한을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 고전에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한‘이라는 것도 여러 사람이 인정해 주면 풀린다는 것이다. ’한‘은 인정해 주지 않는데서 생긴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왜 한이 많은가? 라고 했을 때, 애는 많이 쓰는데,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을 때, 병이 나는 것이다.

남편도 인정해 주지 않고, 자식도 인정해 주지 않고, 시부모도 인정해 주지 않고, 아무리 힘들어도 다 “수고했다“고 인정해 주면 화가 않생기고 병도 않생기는 것이다.

‘아랑이’가 죽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아무도 모르게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미치는 것이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을 인정해주고 제사를 지내주고 하니까 원한이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게 핵심이다.

인정을 받으면 화병은 없어진다는 것이다. 나이 어린 아이들도 질병이 다양하고 많이 고생한다. 그런데 먹고 공부만 하는데 무엇이 힘들까? 라고 하면 않된다.

병이 생긴다. 공부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놀고 싶은데 못 노는 것도 힘든 일이다. 놀고 싶은데 뛰어 놀지 못하는 고통을 이해를 하면 아이들의 병은 현저히 없어진다. 그래서 인정을 받으면 정신병은 없다.

‘한’이라는 것은 마음의 병이다. ‘억울하다’는 것이 마음의 병이다. 왜, 억울한가? 이해를 받지 못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니까 억울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인정을 않해줘도 내가 부처님께 가서 기도하고 자기 마음을 부처님께 말씀드리면 스스로 치유가 된다.

그 ‘한’이 좋은 쪽으로 공덕의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요즘 다들 바쁜데 자기를 인정해 줄 사람이 많지 않다.

이것도 ‘꿈’이다. 악몽을 살펴서 ‘아랑이’의 원혼이 풀리게 되었다.

 

그 부사가 취한 행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이겠는가? 아무리 무서운 모습으로 오고, 험상굿게 와도 미리 놀라지 않고 [‘살펴보았다’]고 하는 것이 정수이다.

그런데 세상을 미리 놀라는 사람이 너무 많다. 미리 정확하게 살피지 않고, 어떤 것이 좋다고 하더라도 살피고 점검해야 하는데, [각조]가 않되고, 묻지마 하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게 문제다. 사랑도 묻지마, 투자도 묻지마, 등산도 묻지마, 여행도 묻지마, 묻지마 졸도, 묻지도 않고 졸도해버리는 이와같은 것은 않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 위험한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아도 살피고, 아무리 무서워도 살피고, 살피는 곳에서 실체가 보이면 그게 진견이고, 참다운 것을 보면 정견이다. 그러면 해결되는 것이다. 바르게 보면 다 해결 된다는 것이다. 잘못보니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윤회와 고통은 망견에서 생기고, 모든 평화와 행복은 진견에서 생긴다. 또 망견은 잘못 보는 것인데, 잘못 보는 것은 사견이라고도 한다. 또 정견은 바르게 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견과 정견, 망견과 진견 또 몽식과 각조는 이렇게 다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아 가고 있는 것은 거의가 망견, 몽식 속에서 살아간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참선을 하라], [기도를 하라], [명상을 하라]고 하는 것은 그 실체에 들어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된다. 이것이 [행복한 법]이고, [평화로운 법]이다.

무엇이 기분 나쁘게 느껴지는 것은 그냥 놀라서 화를 내지 말고, 그 실체를 보라는 것이다. 실체를 보면 화낼 것이 없다. 또 무서워도 놀라지 말고 실체를 보라. 그 실체를 보면 놀랄 것이 없다.

예를 들면 넔 놓고 지나가는데, 뒤에서 차가 빵하고 소리가 나서 깜짝 놀랐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놀랄 일이 아니었다. 일상적으로 경적을 올릴 수 있는 일이다. 놀랄 일이 아니었는데 다만 자기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놀랐을 뿐이다.

‘아이쿠, 깜짝이야! 간 떨어질뻔 했다’고 말하는데, 차량에서 소리 한 번 났다고 간이 왜 떨어진다고 생각할까? 간이 그렇게 시원찮게 붙어 있지는 않다. 전혀 간 떨어질 일도 아니고, 놀랄 일도 아닌데, 스스로 살피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스님이 통도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가끔 극락암에 올라 갈려고 하면 그전에는 전부 걸어 다니고 했었는데, 그 솔밭 길을 오르면 꿩이 있다가 후닥닥 날아간다. 그러면 사람도 깜짝 놀란다. 꿩 날아간 다음에 생각해보면 꿩 날아가는 것이 놀랄 일은 전혀 아니다. 놀란다면 오히려 꿩이 놀라지, 내가 왜 놀랄까?

한 번은 경봉 노스님이 그런 법문을 하셨다. 그것은 [내 마음이 잠들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놀라는 것이다. 내 마음이 항상 살피고, 깨어 있으면 자동차 경적 소리도 놀라지 않고, 꿩이 날아가도 놀라지 않고, 누가 욕을 해도 저 욕하는 진실이 무엇인가? 그 진실을 살피면 마음의 동요가 없다.

자기 불만에서 저렇게 하는 것인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자기 욕심에서 하는 것인가? 내가 진짜 무엇을 크게 잘못을 했는데 그것을 사랑으로 충고해 주기 위해서 그런 것인가? 같은 욕이라도 의미가 다 다르다.

상대편이 욕하는 의미를 알기도 전에 자기 생각으로 화를 낸다. 이것이 놀라기부터 하는 것이다.

 

놀라서 미리 죽는 것이 ‘밀양 부사’만 그런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이 미리 놀라서 죽는 것이다. 충청도 말로 ‘지레 겁먹고 죽는다‘고 한다. 몽식과 각조, 망견과 진견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부터 120(1880)년 전에 술몽쇄언(述夢瑣言)이라는 책이 만들어졌는데, 꿈에 대해 100 가지 항목으로 서술한 내용이다. 아주 멋진 서술이다. 조선 후기의 불교신도인 월창거사(月窓居士) 김대현(金大鉉) 이라고 하는 분이 썼는데, 불교와 노장(老莊), 그리고 유교(儒敎) 사상을 합하여 명상(名相)을 배제하고 생사(生死)를 초연하게 보는 경지를 이상(理想)으로 삼았다.

거기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십인동침에 각성일몽이라(十人同寢 各成一夢).’] 열 명이 한방에서 같이 잠이 들었는데, 각각 꿈을 꾸었다. ‘일실 십세계(一室 十世界)’ 한방에서 열 가지 세계가 펼쳐진다.

‘갑몽이 부지을몽하고 을몽이 부지병몽(甲夢 不知乙夢 乙夢 不知丙夢)’ 갑이 을의 꿈을 알지 못하고, 을도 병의 꿈을 알지 못한다.

사람마다 각자의 꿈을 꾸고 있고, 또 시대마다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다. 예전 동아시아 산악지역에서는 자연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첫째는 숭배요, 다음이 예찬이었다. 산신과 용왕에게 숭배하였고, 시와 노래, 문장으로 자연을 예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 날은 자연에 대한 시보다 생활에 대한 시가 대부분이며, 또 자연은 생활 속에서 이용하는 것이라는 개념을 갖고 있다. 나에게 도움이 될 때, 자연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도움이 되지 않으면 관심을 갖지 않는다.

같은 맥락으로, 예전에는 나이든 사람은 그것만으로 인정을 받았는데, 지금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지 않으면 인정을 받지 못한다. 나이든 이가 대접을 받던 시대를 보고 살아온 이가 자신이 나이가 들었을 때, 그때와 같지 않은 대접을 받을 때, 혼란스러워진다.

또 그로 인해 마음의 병이 들기도 한다. 이미 세상의 가치가 변하였는데, 거기에 매달려 있다면 이것이 망견인 것이다.

현실을 살펴서 할 일을 할 수 있다면 행복할 수 있다. 과거에 젖어 있거나 다가오는 미래에 대하여 막연한 공포를 갖고 있다면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이든 사람도 나이 들어서 해야 할 일이 있기에 잘 살펴서 일을 하면 되는데, 젊었을 때만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같은 현실이라도 망견으로 본다면 불행할 것이며, 정견으로 본다면 행복해지는 것이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살펴서 바로 보면 어디나 기쁨이고, 잘못보고 놀라기만 하면 어디든 지옥이다. 죽음도 잘 보면 태어남과 다를 바가 없다. 인생에는 태어남과 죽음이 같이 있는데, 죽음을 거부하는데서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화’를 얼마나 자주 내는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행복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공포와 분노가 줄어야 행복이 늘어날 수 있다.

‘화‘는 왜 나는 것인가? 흔히 누군가가 잘못해서 ’화‘가 난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누군가가 잘못해서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항상 잘 해주어야 한다’]는 욕심에서 ‘화’가 나는 것이다. 욕심이 없다면 ‘화’가 나지 않는다.

 

욕심은 자기를 중심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아집‘이라고 한다. 나는 과연 영원하고, 모두가 나를 위해 살아줄 수 있는 것일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아집‘이 드러날 수 있는데, 살피고 경계해야 할 것이다.

깊이 살피고 또 살펴서 ‘아집‘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바로 ’도‘이며, ’해탈‘이다. ’아집‘이 사라지면 ’욕심’이 사라지고, ’욕심‘이 사라지면 ’분노‘가 사라지는 것이다. ’지혜‘가 높다는 것은 ’아집‘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노인의 재산이라면 이런 것이어야 할 것이다. 높은 ‘지혜’를 가지게 될 때, 노인의 참다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혜’를 닦고, 여유를 갖고, 삶의 의미를 챙기며, 살 때 깊은 맛이 드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젊을 때는 꿀이라는 말만 듣고 살았지만, 나이가 들면 실제로 꿀의 맛을 보는 것이다. 인생의 참 맛을 깊이 체험한 사람에게는 힘이 있다. 지혜와 경험의 힘이 생긴다. 정견으로 살피고, 또 살펴서 오늘도 좋아지고, 내일도 좋아져서 행복한 주인공으로 살아가길 바란다는 것이다.

태어나고 죽는 현실의 괴로움에서 번뇌와 고통이 없는 경지인 피안으로 건너,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과 같이 책끝에 실려 있는 문인(文人) 유운(劉雲)의 발문에 의하면, 김대현은 학문으로는 유불선(儒佛仙) 3교(敎)에 통달하였으며, 뜻으로는 세상을 각성케 함을 간절히 바랐다고 하는 독실한 학자로서 1870년(고종 7)에 죽었다.

 

- 종범스님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381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