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범스님

자성불(自性佛)과 원성불(願成佛)

수선님 2019. 2. 17. 11:42
 

 

 

자성불(自性佛)과 원성불(願成佛)

 

불(佛)이라고 하면 부처님인데, 부처님이면 참 좋다. 부처님이면 왜 좋은가? 부처님은 자기가 자기를 아는 지혜를 이루신 것이다.

 

그러니까. 지혜가 아니면 자기가 자기를 알 수 없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인지, 내가 나를 아는 지혜, 그 지혜를 이루셨기 때문에 좋고, 또, 모든 중생을 행복하게 해주는 자비를 실천하고 있다. 자비가 있으시니까. 좋고, 또, 부처님은 좌절이라든지, 절망이 없다.

 

항상 원력(願力)을 가지고 계십니다. 서원(誓願), 중생계가 다하고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잘못된 업이 다 없어질 때까지 정진을 멈추는 일이 없다.

 

또, 이런 원력(願力)이 없으면 부처님이 아니다. 그래서 좋다. 내가 나를 알고, 중생을 복되게 하고, 끝임없는 정진을 계속하고 계시니, 그 부처님보다 좋을 수가 없다.

 

그런데 그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중생, 중생의 각자 본성 속에 있다. 그것을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한다. 각자 중생의 본성(本性) 속에 있는 부처님을 자성불(自性佛)이라고 한다.

 

그 자성불(自性佛)이 원만하게 이루어진 부처님을 원성불(願成佛)이라고 한다. 그래서 늘 축원할 때, 구경원성살반야(究竟圓成薩婆若)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婆羅蜜)이라고 축원(祝願) 한다. 구경(究竟, 마지막)에 살바야(薩婆若)를 원만(圓成)하게 이루자인데, 살바야(薩婆若)는 부처님지혜(智慧)다.

 

부처님의 지혜(智慧)가 있고 부처님의 자비(慈悲)가 있고, 부처님의 원력(願力)이 있는 불지혜(佛智慧), 불자비(佛慈悲), 불원력(佛願力)는 이 세 가지는 항상 같이 다닌다.

 

지혜(智慧)없는 자비(慈悲)없고, 자비(慈悲)없는 원력(願力)없다. 이런 것을 원만하게 이룬 것을 원성살바야(圓成薩婆若), 살바야(부처님의 지혜(智慧)를 원만하게 이룬다. 그리고 구경원성(究竟圓成),마지막에 끝끝내 그것을 이루지 않고는 멈추지 않겠다고 한다.

 

무엇으로 이루는가? 그것은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婆羅蜜)로 부처님의 지혜를 원만하게 이루겠다고 하는 서원(誓願)을 항상 아침 저녁 조석(朝夕)으로 축원하는 큰 목표다.

 

그러니까. 중생 속에 있는 자성불(自性佛), 그 자성불(自性佛)을 원만하게 이루는 원성불(願成佛), 그것이 성불(成佛)이다.

 

그런데 자성불(自性佛)은 무엇인가? 기신론(起信論)에 보면, 믿는 것에는 네 가지, 사신(四信)이 있다. 첫째가 신진여(信眞如)인데, 진여(眞如)라고 하는 것은 진여자성(眞如自性)이다. 중생(衆生) 속에 중생(衆生)의 몸이 억 만 번 바뀌고, 바뀌고, 바뀌어도 참 그대로 똑같다. 그것이 진여(眞如)이고,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한다.

 

그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믿는 것이 자성불(自性佛)이다. 우리가 나기도(生) 하고, 죽기도(死) 하고, 늙기도(老) 하고, 병들기도(病) 하지만 그 중생(衆生) 속에 있는 각자의 본성(本性), 자성(自性)은 참 그대로 똑같이 있다. 진여(眞如)고, 진여자성(眞如自性)이다.

 

진여자성(眞如自性)이 중생(衆生)도 되지만 부처님도 되고, 선(善)도 되지만 악(惡)도 된다.

 

그런데 선(善)이 되었다고 해서 자성(自性) 달라졌는가? 악(惡)이 됐다고 해서 자성(自性) 달라졌는가? 달라지면 진여(眞如)가 아니다. 진여(眞如)는 자성(自性)이고, 자성(自性)은 진여(眞如)다.

 

자성(自性)이라고 하는 것은 늘 참 그대로 참과 같이 있기 때문에 자성(自性)이다. 참하고 달라졌다면 자성(自性)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과 같은가? 물(水)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여기다가 알코올을 넣으면 술이 되고, 간을 넣으면 소금물이 되고, 더 잘하면 간장, 된장이되겠지만 그 근본 물은 달라진 것이 없다.

 

물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는 상태에서 차(茶)도 되고, 술도 되고, 국도 되고, 주사약도 되고, 온갖 것이 다 된다. 사람 몸에 들어가면 사람도 되고, 짐승 몸에 들어 가면 짐승도 되고, 밥도 되고 않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그것을 이루는 물(水) 그것이 진여(眞如)다. 참(眞)과 같이 있는 것이다. 물(水)은 사람이 마시면 사람의 일부가 되고, 나오면 오줌이 되니까. 그래서 물은 항상 물이 되므로 그것은 자성(自性)이 된다.

 

그래서 그런 자성(自性)을 믿고, 그 다음에 신불(信佛), 신법(信法), 신승(信僧),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믿는데, 그 삼보(三寶)가 될려면 원성불(願成佛)이 돼야 한다. 부처님의 지혜를 원만하게 이루어야 그 가르침이 휼륭한 가르침이고, 그 휼륭한 가르침을 따르는 또 휼륭한 승가(僧家)가 형성된다.

 

그러니까. 승가(僧家)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연장(延長)이고, 또 부처님께서 가르친 법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연장(延長)이지, 불(佛)이 원만(圓滿)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법(法)이 원만(圓滿)할 수가 없고, 또 승가(僧家)도 원만(圓滿)할 수가 없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라고 하는 것은 원성불(願成佛)을 말한다. 그런데 그 속에는 자성불(自性佛), 진여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다. 그게 자성불(自性佛)이다.

 

육조단경(六祖壇經)이라고 하는 책에는 우리가 부처님을 공경할 때,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 이렇게 삼신불(三神佛)을 공경하는데, 법당에서도 삼신불(三神佛)을 모신다.

 

시무외인(施無畏印)은 손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부처님의 세계는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 두려움은 중생에게만 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무지(無智, 無明)의 동작이다. 훤히 알면 무섭지 않다. 모르면 무섭다. 그래서 [두렵다]고 하는 것은 전부 무지의 동작이다. 지혜(智慧)가 없을 때, 꼭 무서운 동작이 나온다.

 

부처님은 [두려움이 없다. 오너라]고 한다. 깨달은 지혜를 이루면 두려움이 없다. 그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많은 중생에게 원하는 데로 줄 수가 있다.

 

여원인(如願印or與願印)손바닥을 위로 향한 모습으로 [여원인(與願印)원하는 데로 다 준다]고 한다. 부처님이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어 중생이 원하는 것이면 모두 주겠다는 표현이다.

 

그러니까. 삼신불(三神佛)이 원성불(願成佛)을 보여 주는 건데, 육조단경(六祖壇經)에서는 그 삼신불(三神佛)이 무엇인가? 자성(自性)으로 말씀하신다.

 

청정법신(淸淨法身)은 여지성야(汝之性也)요. 청정법신(淸淨法身)이라고 하는 것은 너의 본성이다. 또 원만보신(圓滿報身)은 여지지야(汝之智也)요. 원만보신(圓滿報身)은 너의 지혜이다.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은 여지행야(汝之行也)라, 천백억화신(千百億化身)은 너의 행동이다.

 

이렇게 자성불(自性佛)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이다. 그래서 견성(見性)을 해서 성불(成佛)을 한다. 자성(自性)을 보는 것이 견성(見性)이고, 성불(成佛)이다. 그게 내(我)가 나(自)를 찾는 것이다.

게송이 있는데,

 

자성(自性)에 구삼신(具三身)하니 발명성사지(發明成四智)라.(나무 아미타불)

 

자성(自性)에 구삼신(具三身/ 법신, 보신, 화신)하니, 중생의 자성(自性)에 삼신(三身)이 갖추어 졌다. 발명(發明)하면 성사지(成四智)라.

 

요즘은 무엇을 새로 만들어 내면 발명(發明)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널리 펴서 밝히면 이라고 해석을 한다.

그래서 한자(漢字)에 함정(陷穽)이 많다.

 

출발한다는 발(發)자를 [편다]고 한다. 밝다고 하면 명사(名詞)인데, 밝힌다(明) 동사(動詞)로 한다. 명사(名詞)가 동사(動詞)가 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자성(自性) 속에 가지고 있는 삼신(三身/ 법신, 보신, 화신)을 펴서 밝히면 무엇이 되는가?] [성사지(成四智)하나니라. 네 가지 지혜를 이루나니라] 사지(四智)는 부처님이 가지고 계신 네 가지 지혜가 있다.

 

성소작지(成所作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네 가지 지혜를 말한다. 그것을 사지보리(四智菩提) 라고도 한다. 전오식(前五識), 제육식(第六識), 제칠식(第七識), 제팔식(第八識)이 있는데, 이 의식(意識)이 하나 하나 지혜(智慧)로 바뀐다.

 

전오식(前五識)이 변해서 성소작지(成所作智)가 되고, 제육식(第六識)이 변해서 평등성지(平等性智)가 되고, 제칠식(第七識)이 변해서 묘관찰지(妙觀察智)가 되고, 제팔식(第八識)이 변해서 대원경지(大圓鏡智)가 된다.

 

그래서 자성(自性)에 있는 본성(本性)을 펴서 밝히면 그 부처님만이 이룰 수 있는 네 가지 지혜[성사지(成四智)]를 이룬다. 자성(自性)이 없으면 이룰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불리견문연(不離見聞緣)하고, 보고, 듣는 인연을 여의지 않고, 초연등불지(超然登佛地)하나니라.(나무 아미타불) 바로(超然) 순서, 과정, 기다림이 없이 바로 한 번 탁 뛰어서 올라 가듯이 등불지(登佛地)라. 부처님의 지위에 오른다.

 

이것은 육조단경(六祖壇經) 참청기연품(參請機緣品) 여섯 번째에 나오는 게송이 있는데, 제자들이 가서 법문을 청해서 하나 하나 제자들에게 알려 주는 그런 법문이다. 그게 자성불(自性佛)이다.

 

그 자성불(自性佛)을 가지고 정말로 완전한 성불(成佛)을 원만하게 이룬다는 것이 원성불(願成佛)이다. 자성불(自性佛)과 원성불(願成佛)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같은 데서는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이라고 했다.

 

본각(本覺)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깨달은 것이고, 시각(始覺)이라고 하는 것은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러면 본각(本覺)은 무엇인가? 금(金)이 있는데, 저 돌멩이 속에 들어 있는 것과 같고, 시각(始覺)은 그 돌멩이에서 금(金)을 제련(製鍊)을 해서 순금(純金)으로 만들어진 금(金)과 같다.

 

그런데 그 순금(純金)도 본래 돌멩이 속에 있던 그 금(金)이지, 다른 별도의 금(金)이 아니다. 그래서 시각(始覺)이 되면 바로 본각(本覺)이라고 한다. 원성(願成)이 되면 바로 자성(自性)이 된다.

 

문제는 원성(願成)이 않되면 그 자성(自性)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게 아주 기막힌 일이다. 그 돌멩이 속에 들어 있는 금(金)은 틀림없는 금(金)인데, 금(金)인줄 모른다. 그것을 잘 제련(製鍊)을 해서 순금(純金)으로 만들어야 그게 금(金)인줄 안다.

 

내가 부처가 되어야 [내가 본래부터 자성(自性)이 부처였구나]라는 것을 안다. 그러지 않으면 모른다. 그것이 문제다. 자성불(自性佛)과 원성불(願成佛)은 똑같다. 원성불(願成佛)이 돼야만 [본래 내 진여자성(眞如自性) 속에 부처가 있었구나] 라는 것은 알게 된다. 그게 문제다.

 

하나도 달라진 것이 아닌데, 알기는 그때서야 알게 된다고 한다. 시각(始覺)이 돼야 본각(本覺)을 안다는 그것이다.

 

그 옛날 경봉 큰 스님께서 법상에 올라 가시면 무엇이고 하시는가 하면, [법사가 자리로부터 일어나서 일보, 이보, 삼, 사, 오보로 걸어 법상에 올라와서 입 열기 전에 그때 법문이 다 됐어]라고 설명하셨다. 또 [대중이 법사를 쳐다보고 오늘 무슨 말을 하려는고? 이런 생각 일으키기 전에 이미 법문이 다 됐어] 꼭 이런 말씀을 하셨다.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그 말은 대중이 법문에 무슨 말씀을 하실려나? 생각 일으키기 전에 법문이 다 됐다 . [법사가 법문 시작하기 전에 법문이 다 됐다] 는 말을 했을 때 비로서 청중은 그 말을 듣는다. 그렇지만 평소에는 모른다. 그때 이미 법문이 다 됐는지 모른다.

 

그게 중생이다. 그게 본각(本覺)인데, 기가 막힌 노릇이다. 본각(本覺)이 자성(自性)이고, 진여(眞如) 및 진여자성(眞如自性), 본각자성(本覺自性)인데, 시각(始覺)을 이루어야 비로서 [내가 진여자성(眞如自性)이 본래 부처였구나]를 안다고 한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일이다.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알 수 있나? 법문이라는 게 입 열기 전에 다 됐고, 들을려고 생각하기 전에 다 됐다면 어떻게 알겠나? 그거 알면 청중이라고 할 필가 있나?

 

그런 말씀을 통해서 들을 수 있듯이 자성불(自性佛)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원성(願成), 원만한 성불을 위해서 자성(自性)을 비로서 확실하게 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자성불(自性佛)의 세계를 믿고, 또 부처님이 이루신 원성불(願成佛)의 세계를 믿고, 수행하는 것이 신심(信心)이다.

 

신심(信心)은 믿는 순간에 원력(願力)이 생기게 된다. 그게 발심(發心)이다. 그래서 신심(信心)이 곧 발심(發心)이다. [나도 성불(成佛)해야 되겠다]고 믿으면 바로 원력(願力)이 생기게 된다.

 

않믿으면 원력(願力)이 않생긴다. 그래서 신심(信心)이라고도 하고 원력(願力)이라고도 하는데, 똑 같은 말씀이다. 믿으면 바로 원력(願力)이 생기고, 않믿으면 원력(願力)이 않생긴다. 천년(千年) 만년(萬年)을 설법(說法)을 해도 않믿으면 소용없다.

 

믿으면 바로 원력(願力)인데, 그게 바로 발심(發心)이다. 원력(願力)이 발심(發心)이다. 그래서 흔히 [발심(發心)했다]는 것과 [신심(信心)이 장하다]고 하는데, 신심(信心)이나 발심(發心)이나 똑같은 것이다.

 

원력(願力)을 바로 세우니까. 믿으면 바로 발심(發心)을 한다. 원(願)을 세우면 어떻게 되나? 제일 먼저 공덕(功德)을 닦는다. 그리고 점 점 점 닦아서 구경원성살반야(究竟圓成薩婆若)가 되면 그것이 바로 원성불(願成佛)이다.

 

원성불(願成佛)해서 보면, [자성불(自性佛)에서 조금도 다른 것이 아니구나]를 그때서야 알게 된다.

그것이 멀리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자기, 자성(自性)을 그때 알게 된다. 그것이 자성불(自性佛)과 원성불(願成佛)이다.

 

화엄경(華嚴經)을 보면,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 등각(等覺), 묘각(妙覺)이 있는데, 화엄경(華嚴經)에는 십신(十信)이 없고,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에는 십신(十信)이 있다.

 

그 이유, 십신(十信) 그 자체가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과 다르지 않다. 일단 발심(發心)하면 그 가운데 또 신(信)이 있다. 그 신(信)을 빼는 경우도 있고, 항목에 넣는 경우도 있는데, 똑같은 내용이다.

 

등각(等覺)은 평등할 등(等), 깨달을 각(覺)자인데, 부처님하고 거의 비슷한 단계를 등각(等覺)이라고 한다. 묘각(妙覺)은 묘할(妙), 깨달을 각(覺)자인데, 완전히 부처님을 말한다. 등각(等覺)에서 더 지나가야 묘각(妙覺)이 되어 원성불(願成佛)이 된다.

 

그러면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 등각(等覺)까지 모두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을 순류(順流)라고 한다. 순류(順流)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래로, 아래로 흘러 가는 것을 순류(順流)라고 한다.

그것은 중생 세계에서 부처님 세계를 향해서 점, 점, 점, 점 가는 것이다. 그런데 등각(等覺)까지가 순류(順流)이다. 그러면 묘각(妙覺)부터는 어떻게 되는가? 그때부터는 역류(逆流) 한다.

 

부처님의 믿음은 역류(逆流)하는 믿음이다. 류(流)를 거스르는 것인데, 아주 중요하다. 이 법문은 능엄경(楞嚴經) 제 8 권, 등각(等覺)을 설명하는 부분에 분명히 나와 있다.

 

무엇이라고 나와 있는가? [여래는 역류(逆流)이니, 여래라고 하면 거슬려서 흐른다] 라고 나와 있다. 이런 것은 공부를 잘하지 않으면 그냥 흘러 가버린다.

 

왜, 여래가 역류인지, 모른다. 항상 배울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을 배우다고 생각하고 신심 바짝 내야 이익이 있다. 겁을 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역류(逆流)를 해야 부처님이다. 역류(逆流)해서 흐르는 분이라야 부처님이다.

 

그런데 순류(順流)를 하면 아래로, 아래로 길을 따라 흐르면 등각(等覺)까지라도 원성불(願成佛)이 않되었다고 본다. [등각(等覺)은 무엇인가?] [이 보살은 순순히 흘러서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그 각(覺)의 세계, 묘각(妙覺)에 들어가서 만나는 것이다.

 

만나기는 만나는데, 방향은 틀린다. 등각(等覺)은 순류(順流)를 하고, 묘각(妙覺)은 역류(逆流)한다. 그래서 이런 분을 명위등각(名爲等覺)이라 한다.

 

한문 경전이 이렇게 되어 있으니, 이것만 보고서 어떻게 이해를 할 수가 있겠는가? 참 문제다. 정말로 중요한 말씀인데, 이것을 보고 알아 보라고 하니, 좀처럼 알아 지지는 않하고, 그냥 뭍어 둘려고 하니, 아까워서 아까워서 뭍어 둘수가 없고, 보통 고민이 아니다.

 

그러면 역류(逆流)와 순류(順流)는 무엇인가? 순류(順流)라고 하는 것은 계곡 물에서 출발해서 강물로 흘러 흘러서 바닷물까지 가는 그것이 순류(順流)다. 역류(逆流)는 바닷물에서 다시 올라 오는 그것이 역류(逆流)다.

왜 그런가? 완전한 부처님 세계가 되었으면 중생 세계로 다시 오는 것이다.

 

부처님 세계에 머물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성불이 모자라면 부처님 세계로 간다. 그리고 다시 오지 못한다. 그것이 역류(逆流)와 순류(順流)의 차이점이다.

 

우리 중생이 발심(發心)해서 부처(佛)가 될려고 하는 것은 순류(順流)다. 부처님 세계로 가는 그것은 계곡에서부터 흘러서 흘러서 바다까지 가는 것이 순류(順流)다.

 

그래서 모두 바다로 가서 도착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 다음은 바다로 가는 길을 모르는 그런 물길들을 향해서 [이쪽으로 가면 바다로 간다]고 이끌고 가는 것이다. 그것을 역류(逆流)라고 한다. 그것이 묘각(妙覺)이다.

 

그래서 묘각(妙覺)이 되면 우리가 흔히 아는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의 삼신불(三神佛)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화엄경(華嚴經)에서는 부처님이 십불(十佛)세계로 나타난다. 열 가지 부처님 세계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 모든 종류의 지혜를 다 이룬 세계이다. 그래서 중생이 팔만사천이면 부처님이 팔만사천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묘각(妙覺)이고, 역류(逆流)이다. 중생 하나 하나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아직 묘각(妙覺)과 원성불(願成佛)이 되지 못한다. 자기 자신을 그대로 지킬려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하나도 없으면 자기 자신을 지킬려고 하는 분상이 없다. 무엇이 두렵기 때문에 내가 나를 감싸고, 에워싸고, 지키고, 방어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공포가 일체 없으니까. 크면 큰대로 되고, 작으면 작은되로 되고, 물에 아무리 좋은 약이 녹아 있더라도 그 약을 지킬려고 한다면 그것밖에 않된다.

 

그런데 완전히 순수한 물이 되면 지킬 필요가 없다.

약이 되는 곳에 가면 약이 되고, 술이 되는 곳에서는 술이 되고, 밥이 되는 곳에 가서는 밥이 된다. 그것이 바로 역류(逆流)다. 그리고 십불(十佛)세계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워낙 지혜가 높고, 마음에 맺혀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면 다른 사람으로 말미암아 기분 나쁠 일이 전혀 없다. [나(我)는 나(自)니까]

 

내 자신이 워낙 두려움이 많고, 옹졸함이 많고, 자기를 지킬려고 하는 생각과 감정이 강하니까. 자기감정에 조금만 거슬려도 신경질적으로 화를 낸다. [그것은 무엇인가?] 자기 두려움에 자기감정이기 때문이다. [화(嗔)를 왜 내는가?] 그것은 자기 공포(恐怖), 자기감정이기 때문에 화를 낸다.

 

공포(恐怖)가 없으면 두려운 감정이 없고, 두려움이 없으면 화(嗔)를 내지 않는다. 그러면 [부처님은 화(嗔)를 내지 않았는가?], [부처님도 화(嗔)를 많이 내셨다]

 

그러면 [부처님은 왜 화(嗔)를 내셨나?] 화(嗔)를 내는 중생을 위해서는 화(嗔)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는가? 화(嗔)를 내는 사람에게는 화(嗔)밖에는 약이 없다.

 

한 대 때리면 그냥 후려쳐서 꼼짝 못하게 한다. [화(嗔)를 내지 않는 모습을 지켜야 된다] 또는 [화(嗔)내는 모습을 다른 사람에 보여주면 내 이미지에 굉장한 손상이 간다]는 것에 대해 아직까지 역류(逆流)를 못하고 있다.

 

그래서 화(嗔)를 내지 않는다고 절대 도인(道人)이 아니다. 도(道)가 낮으면 대접(待接) 더 받을려고 화를 못내는 수가 있다.

 

심리분석(心理分析)을 하면 어른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런 행동은 바로 어른 대접(待接) 더 받을려고 그 따위 짓을 하는데, 심보가 아주 훤출하지 못하다.

 

점잖은 모습을 보여야 점잖한 대접(待接)을 해준다는 생각을 하고 점잖은 대접(待接) 받을려고 그렇게 앉아서 아무 일도 않하는 그 따위 짓이 어울리겠나? 부처님의 일체종지(一切種智)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일체종지(一切種智), 일체 종류의 지혜를 다 얻었기 때문에 법신불(法身佛), 보신불(報身佛), 화신불(化身佛)의 삼신불(三神佛) 뿐만 아니라 십불(十佛)세계로 나타난다. 그 십불(十佛)세계가 무엇인가?

 

화엄경(華嚴經) 이세간품(離世間品)에 나와 있다. 성정각불(成正覺佛), [보리수 나무 밑에서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는 모습]이 성정각불(成正覺佛)이다. 또 그 다음에는 원불(願佛), [중생이 다 해탈(解脫)하기를 원한다] 고 하기 때문에 원불(願佛)이다.

 

업보불(業報佛), [부처님이 업을 지어서 그 과보를 받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시는 부처님]이다. [돼지고기를 드시고 배탈이 났다]든지, 그 밖에 부처님이 업보를 보여 주신 것이 많이 있다. 그래서 업보불(業報佛)이다.

 

그리고 주지불(住持佛), [항상 머물러 계시는 부처님]이 주지불(住持佛)이고, 열반불(涅槃佛)이 계시는데, [열반(涅槃)에 드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부처님]이 열반불(涅槃佛)이고, 법계불(法界佛)이 있다. 법계불(法界佛)은 [온 우주 법계가 다 부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이 법계불(法界佛)이다.

 

이것이 바로 화엄경(華嚴經)의 원성불(願成佛)이다. 그 다음 일곱 번째 심불(心佛), [마음이 부처님이다] 고 한다. 그래서 이런 것을 전부 공부하는 것이 화엄학(華嚴學)이다.

 

[심불(心佛)이 무엇인가?], [법계불(法界佛)이 무엇인가?] 그 의상대사(義湘大師)의 화엄법문을 들어 보면, 이런 것에 대한 법문이 있다.

 

또 여덟 번째는 삼매불(三昧佛), 그 [삼매(三昧)가 부처님이다] 다음 본성불(本性佛), 여기도 본성불(本性佛)이 나온다. 본성(本性)과 자성(自性), 그 다음 수락불(隨樂佛), [중생의 즐거움을 따라서 행동하는 부처님]을 수락불(隨樂佛)이라고 한다.

 

이게 바로 지혜가 높을 수 록 다른 사람에게 협력할 수가 있다. 그 지혜가 모자라고 두려움이 많을 수 록 절대 다른 사람과 협력할 수 없다. 자기 죽을까봐 두렵고, 자기 망할까봐 두렵고, 자기 잘못될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중생이 왜 욕심을 부리는가?] 그것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부처님이 왜 욕심을 않부리는가?] 그것은 [두려움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욕심내고, 화내는 사람에게 욕만 해서는 않된다. [얼마나 두려우면 저럴까?] 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지혜가 높아져야 그런 짜증과 불만이 줄어들지, 지혜가 모자라면 여러 가지 무서운 것이 많아서 그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그것이 중생(衆生)이다.

 

그렇게 십불(十佛)세계가 있다. 그래서 십불(十佛)세계의 중생을 제도하는데, 화엄경(華嚴經) 제 14권 현수품(賢首品)에 있는 게송인데,

 

중생형상 각부동(衆生形相 各不同), 중생의 형상이 다 각각 같지 않다.

 

행업음성 역무량(行業音聲 亦無量), 중생의 하는 짓이 다 행업인데, 음성은 다 다르다.

 

여시일체 개능현(如是一切 皆能現), 일체 중생의 형상, 행업, 음성을 다 그대로 나타낸다.

 

그것이 바로 묘각(妙覺)의 역류(逆流)하는 부처님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해인삼매 위신력(海印三昧 威神力), 이 원성불(願成佛)은 해인대정(海印大定)에 든다고 한다. 삼매(三昧)를 대정(大定), 큰 선정(禪定)이라고 번역한다.

 

큰 선정(禪定)이 무엇인가? 해인선정(海印禪定, 해인(海印)이라고 하는 것은 깊은 바다에는 온갖 우주의 삼라만상의 그림자가 다 잠기지 않는가? 그것을 비유로 말하고 있다.

 

그러면 그 삼매(三昧) 속에 국토세계(國土世界), 중생세계(衆生世界), 지정각세계(智正覺世界)가 다 들어 있다. 그래서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 한다.

 

부처님 지혜 안에 일체 중생(一切 衆生)이 다 있고, 일체국토(一切 國土)가 다 있고, 일체 불보살(一切 佛菩薩)이 다 있다. 그런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위신력(威神力)으로 그 많은 중생의 형상(形相)의 모습을 나타내고, 그 많은 중생의 업(業)의 모습을 나타내고, 그 많은 중생의 음성(音聲)의 소리를 나타낸다.

 

그게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위신력(威神力)이라고 한다. 이것이 원성불(願成佛)이다. 부처님이 성불해서 십불세계(十佛世界)로 온갖 중생형상, 중생업보, 중생음성을 다 나타내는데, 어떻게 나타내는가? 과거 성불하기 이전과 똑같이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방편, 신통 이와같은 일체를 자유자재로 나타내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불화엄(佛華嚴) 삼매력으로 그렇게 한다고 한다. 화엄경(華嚴經)에서 대표적인 삼매(三昧)가 해인삼매(海印三昧), 화엄삼매(華嚴三昧)다. 그 중에서 화엄(華嚴)라고 하는 것은 만 가지 공덕(功德)을 가지고 온갖 세계를 장엄하는 것이 화엄(華嚴)인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보현행(普賢行)이다. [보현(普賢)이라고 하는 넓게 넓게 어질게 한다]는 것이 보현(普賢)이다. 보현(普賢)이 온갖 공덕(功德)을 닦는다. 그 공덕(功德)행이 화엄(華嚴)인데, 그 화엄(華嚴)을 누가 닦는가?

 

부처님이 닦는데, 그것이 불화엄(佛華嚴)이다. 그것을 과행(果行)이라고 한다. 부처가 되고 나서 닦는 수행이 불화엄(佛華嚴)이다.

 

보통 사람이 보면, 부처되면 무엇하나? 궁금할텐데, 노는 것 같은가? 노는 것이 절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모른다.

 

부처가 되면 역시 보현행(普賢行)을 닦는데, 그때 보현행(普賢行)이 불화엄(佛華嚴)이다. 그러면 발심(發心)해서 보살행(菩薩行)을 닦는데, 그때 보현행(普賢行)이 바로 발심수행(發心修行)이다.

 

발심(發心)이라고 하는 것은 원(願)을 세워서 수행하고 닦는다고 한다. 그래서 발심수행(發心修行)의 보현행(普賢行)과 불화엄(佛華嚴)의 보현행(普賢行)이 다르지 않다.

 

부처님도 보현행(普賢行)을 닦고, 발심수행(發心修行)도 보현행(普賢行)닦아서 똑같다. 그것이 인행(因行)과 과행(果行)이 다름이 없다고 한다.

 

그것이 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혜(智慧)와 신심(信心)인데, 발심수행(發心修行)하는 사람은 오로지, 신심(信心)으로 닦는데, 그것이 발심수행(發心修行)이다.

 

부처님은 지혜(智慧)로 닦는다. 그래서 불화엄(佛華嚴)이다. 그게 바로 무엇인가? 원성성불(願成成佛)이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신심(信心)으로 공덕(功德)을 닦으면 그게 바로 성불(成佛)이다.

 

어린아이들하고 상담을 해보면 꼭 아이들은 한 번쯤은 자기 엄마가 진짜 엄마가 아니고 가짜 엄마라고 의심을 한다고 한다. [진짜 엄마 같았으면 이렇게 못되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진짜 엄마를 찾아 나선다. 그런 아이들에게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 그러면 큰 일난다. 정말 다리 밑에 간다. 가서 않온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아무리 무엇이라고 해도 [진짜 엄마다] 라고 믿어야 된다. 그때는 믿는 수밖에 없다. 믿고 엄마 말을 잘 따르면 그게 나중에 철이 들어서 알고 따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믿고, 발심수행(發心修行)하는 것과 부처 되어 가지고 화엄수행(華嚴修行)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인행(因行)이 곧 과행(果行)이고, 과행(果行)이 바로 인행(因行)이다. 자성불(自性佛)을 가지고 있는데, 원성불(願成佛)을 이루고자 하면 다른 것이 없고, 그냥 믿어야 된다.

 

그 어머니 품에서 진짜 엄마가 아니라고 의심하는 그 생각에서 [이 엄마가 내 엄마다]라고 믿어야지,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거기에 붙이면 그 어머니하고 멀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한 생각 믿고, 공덕(功德)을 닦는 그 순간에 이미 성불(成佛)하는 것이다. 여지없이 믿고, 털끝만한 틈도 주지 않고, 전체적으로 믿고 닦으면 그게 바로 성불(成佛)이다.

 

발심수행(發心修行)이 바로 불화엄(佛華嚴)이다. 불화엄(佛華嚴)이 발심수행(發心修行)이다. 대승불교(大乘佛敎)라고 하는 것은 신심(信心)과 원력(願力)으로 수행하는 것인데, 그 신심(信心)과 원력(願力)이 바로 성불(成佛)이다. 그것이 대승불교(大乘佛敎)이다.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붙이면 멀어져 버린다. [釋迦牟尼佛],[釋迦牟尼佛]이라도 했으면, [釋迦牟尼佛]을 바로 믿고 부르면 자기가 [釋迦牟尼佛]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입으로는 [釋迦牟尼佛]을 부르는데, 생각으로 이 [釋迦牟尼佛]을 왜 하지? 그래서 않된다. 그것이 바로 중생업(衆生業)이다.

 

그러니까. [南無 阿彌陀佛]을 불렀으면 [南無 阿彌陀佛]을 부르는 그것이 발심수행(發心修行)인데, 그 [南無 阿彌陀佛] 염불을 일심으로 믿고 하면 [南無 阿彌陀佛] 부르는 순간 순간 본인이 [南無 阿彌陀佛]이다. 그런 신심(信心)이면 바로 된다.

 

그러면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고 바로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된다. 그 엄마(母)가 진짜 [내 엄마다(母)]라고 믿는 순간에 바로 진짜 내 엄마(母)가 된다. 그 엄마(母) 떠나서 진짜 엄마(母) 따로 찾는 것은 아니다. 똑같다.

 

그래서 두 가지가 있는데, 자성불(自性佛)을 믿고, 자성불(自性佛)이 진여자성(眞如自性), 아주 휼륭한 자성불(自性佛)이니까.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닦으면 바로 원성불(願成佛)을 이룬다. 수행은 기술적으로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신심(信心)으로 한다.

 

요즘은 형식으로 자꾸 접근 하는데, 형식도 물론 중요하다. 그런데 형식이 아무리 전문가가 되고, 숙달된 달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는 않된다. 여지없이 털끝하나도 용납되지 않는 공간이 없는 전체적으로 믿는 온전한 신심(信心), 그것이 성불(成佛)이다.

 

신심(信心)이 온전해야 성불(成佛)하게 되지, 불교의 여러 가지 교리를 많이 안다든지, 무슨 의식(儀式)을 아주 능숙하게 한다든지, 그것만 가지고는 않된다.

 

그러나 진짜 엄마(母)를 놓고 보되, 이 엄마가 [진짜 내 엄마(母)]라고 믿을 때, 엄마를 사랑하고, 공경하는 형식만 잘한다고 그것이 되겠나? 속으로는 [아무리 그래도 이 어머니가 내 어머니가 아니지?] 그런 생각을 가지고 형식을 잘한다고 해서 진짜 엄마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불교(佛敎)라는 것이 이렇게 오묘(奧妙)하다. 그러니까. 불교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그런가? 여지없이 믿는 것, 그것이 불교(佛敎)다. 무엇을 믿는가? 자성불(自性佛)을 믿고, 원성불(願成佛)을 믿는다. [내 안에 부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을 잘 닦으면 원만한 지혜를 이룬다. 그래서 믿고 닦으면 금방 되고, 닦기는 닦는데, 않믿고 닦으면 않되고, 오래 간다.

 

그래서 일찰나(一刹那)에 되는 경우도 있고, 아승지겁(阿僧祗劫)을 닦아야 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아승지겁(阿僧祗劫)이라는 세월(歲月)이 얼마나 오랜 세월(歲月)인지, 말도 못하게 오랜 세월(歲月)이다.

 

그러면 왜 어떤 분은 아승지겁(阿僧祗劫)을 닦아야 되고, 어떤 분은 일찰나(一刹那)에 되는가? 여지없이 믿으면 일찰나(一刹那)에 되고, 않믿고 그냥 따라서 하면 아승지겁(阿僧祗劫)을 지나야 된다.

 

그게 바로 그 신심(信心)과 그 신심(信心)이 부족한 차이다.

 

 

 

중앙승가대학교 명예교수 종범스님

출처 : 수보리
글쓴이 : 아침이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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