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信心)과 사량(思量)
믿음과 생각, 사량(思量)은 생각이다. 신심(信心)이라. 믿는 마음인데, 이 신심(信心)이라고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을 설명한 불교학(佛敎學)이 유식(唯識)인데, 유식학(唯識學)이라고 하는 불교학(佛敎學)이 사람 마음의 구조를 설명하는 학문이다.
그런데 신심(信心)이 그 유식학(唯識學) 중에서 선(善) 십일(十一) 선심(善心)이 열 한 가지가 있는데, 그 마음 중에는 여덟 가지가 있고, 5십 한 가지가 있는데, 여덟 가지는 왕에 속하고, 5십 한 가지는 그 왕을 따르는 추종자에 속한다.
신심(信心)이라고 하는 것은 5십 한 가지 중에서 좋은 마음은 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을 선심(善心)이라 하는데, 그 선심(善心) 중에 첫째 마음이 신심(信心)이다. 그러니까. 좋은 마음 중에 제일 첫 번째 해당하는 마음이 신심(信心)이다.
그러면 믿는 마음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원효성사(元曉聖師)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해석(解釋)을 보면, “신심(信心)은 결정심(決定心)이다.” 결정(決定)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성유식론(成唯識論)에서는 신심(信心)을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가? 첫 번째가 승해(勝解)라고 한다. 승해(勝解)를 한 마디로 말하면 참을 인(忍)자다. “참는다”라고 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지혜(知慧) 지(知)자의 의미가 있고, 하나는 편안할 안(安)자의 의미가 있다.
“참는다”라고 하는 의미는 지혜(知慧)이고, 편안한 것이다. 그래서 신심(信心)은 참을 인(忍)자를 앞에 떡 놓았다. 그러니까. 심인(深忍), 깊은 참음의 세계라고 한다. 그 심인(心忍)이라고 하는 것은 승해(勝解), 휼륭한 이해(理解), 또 원효성사(元曉聖師)는 결정심(決定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첫 번째 신심(信心)이다. 신심(信心)은 딱 흔들리지 않는 일심(一心), 그래서 신심(信心)은 일심(一心)이라고 하고, 그리고 부동심(不動心)인데, 이게 그냥 일심(一心)이 되고, 부동심(不動心)이 되는 것이 아니다.
“틀림없다.” 고 하는 이런 휼륭한 이해(理解)가 먼저 와야 한다. 그래서 승해(勝解)라고 한다. “야! 이것이다.” 이렇게 “확실하다.” 이런 이해(理解)가 오지 않으면 일심(一心) 그리고 부동심(不動心)으로 믿음이 않생기고 결정심(決定心)이 않된다.
그래서 확실한 이해(理解)도 신심(信心)이고, 흔들리지 않는 결정심(決定心)도 신심(信心)이라고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신심(信心)의 내용이다.
두 번째는 낙욕(樂慾)이라. 신심(信心)은 즐겁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아! 틀림없다.” 이렇게 결정심(決定心)이 생기면 낙욕(樂慾)이라. 즐겁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는데, 이것을 희망(希望)이라고 한다. 낙욕(樂慾)이 바로 희망(希望)이다. 이런 것을 설명(說明)하는 것이 유식학(唯識學)이다.
그냥 대충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명칭, 정의, 또 의미, 성격 이런 것, 하나하나 분석해서 설명(說明)하는 그것을 불교의 유식학(唯識學)이라고 한다. 그래서 결정심(決定心)이 딱 들면 즐겁게 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것을 낙욕(樂慾) 즐겁게 하려고 하는 희망심(希望心)이 생긴다고 한다. 그 다음에는 신심(信心)이 딱 생겨서 즐겁게 하려고 노력을 하면 마음속에 복잡하다든지, 깨끗이 못한 마음이 싹없어져서 정심(淨心) 깨끗한 마음이 된다. 이것을 신심(信心)이라고 한다.
신심(信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결정심(決定心)이고,
둘째는 즐겁게 하는 낙욕심(樂慾心)이고,
셋째는 청정한 마음 정심(淨心)이다.
이런 신심(信心)이 없으면, 않된다. 그래서 이 신심(信心)을 가지고 도(道)도 닦고, 복(福)도 닦고, 학문(學問)도 닦고, 세간사(世間事)도 닦고, 이게 다 닦는다. 신심(信心) 하나 없으면 도대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다.
그래서 신심(信心)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래 가지고 부처님을 믿는데도, 이런 신심(信心)이 없으면 않된다.
이 신심(信心)으로 정진(精進)을 계속해 나가는 그것이 불자(佛者)이다. 이런 신심(信心)으로 닦고 또 닦고, 닦고 또 닦고 이렇게 닦아 나가는 그것이 불자(佛者)이다.
그런데 본지풍광(本地風光) 닦다보면 자기 원래의 본 모습이나 생각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게 사량(思量)이다. 이 신심(信心)으로 닦는 것이 불자(佛者)이지, 자기 생각으로 이러쿵, 저러쿵 해석하고 판단하고, 정의하는 이것은 아니다.
신심(信心)이 곡식(穀食)이라면, 사량(思量)은 풀, 잡초이다. 그래서 이 신심(信心)을 잘 키우기 위해서는 사량(思量)은 자꾸 배제(排除)를 해야 하는데, 사량(思量)은 망상(妄相)이고, 분별(分別)이고, 계교(計巧)이고, 잡념(雜念)이고 말이 많다.
이것을 한 마디로 번뇌(煩惱)라고 한다. 그래서 번뇌망상(煩惱妄相), 사량분별(思量分別) 이런 것이 들어서 신심(信心)을 흐리게 한다. 그러니까. 도(道)를 닦는데 가장 장애(障碍)를 주는 것이 사량분별(思量分別)이다.
이것이 들어오면 그게 마구니가 된다. 그래서 이 신심(信心)을 흐리게 만든다. 그러니까. 정진(精進)을 해 나가는데 굉장히 지장(支障)을 준다. 신심(信心)은 사량분별(思量分別), 망상계교(妄相計巧) 이것을 경계(警戒)하고, 조복(調伏)하고, 멀리하라는 것이다.
신심(信心)의 의미는 이와 같고, 무엇을 믿는가?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사신(四信)을 말씀하셨다. 신진여(信眞如), 신불(信佛), 신법(信法), 신승(信僧)의 사종신심(四種信心)이라고 하였다.
신진여(信眞如) 불법승과 우주 만불과 일체중생의 근본이다. 그래서 진여(眞如)를 믿고,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를 믿는다. 이것이 믿는 대상(對象)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결정심(決定心)을 가지고 진여(眞如)와 삼보(三寶)를 믿는 것이 불교(佛敎)의 신심(信心)이다.
그러면 삼보(三寶)가 무엇인데, 그 신심(信心) 믿음의 대상(對象)이 되는가?
첫째, 부처님이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왜 중요한 것인가? 모든 사람들은 탐욕(貪慾)을 위해 이 몸을 바친다. 뭐라고 해도 생존활동(生存活動)의 목표(目標)는 자기 욕망(慾望)을 충족(充足)시키는데 있다.
무슨 소리로 무엇이라고 해도 그것은 우욕사신(愚慾捨身)이라, 욕망을 위해서 몸을 버린다는 것이다. 다 우욕사신(愚慾捨身)하는 것이 중생 삶의 본질(本質)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그것을 하기 위해서 이 몸이 늙어 가는 것이다.
이 우욕사신(愚慾捨身)이 중생의 삶이다. 탐욕(貪慾)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이 중생의 삶인데, 부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부처님은 어떻게 사셨을까?
거창할 것이 전혀 없는데, 그것은 “내가 왜 사는가?” 내가 이루고 싶은 것, 내가 가지고 싶은 그것을 위해 산다. 그러다 보면, 몸은 점점 늙어 가는 것이고, 죽어 가는데 이게 몸을 버리는 것이다.
탐욕(貪慾)을 위해 몸을 버리는 것이 우리 본질(本質)이다. 뭐라고 해도 이것은 누구고 똑 같다. 그런데 부처님은 탐욕(貪慾)을 위해 돌아 가셨을까?
아니다. 부처님은 바로 해탈(解脫), 해탈(解脫)을 위해 사신 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다.
부처님은 탐욕(貪慾)이 아니고 해탈(解脫)이다. 해탈(解脫)은 무엇인가? 해탈(解脫)은 열반(涅槃)인데, 열반(涅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사(生死)가 없는 자기 본래(本來)의 세계를 얻으셨다. 생사(生死)없는 자기 본래(本來)의 세계로 돌아 가셨다.
이것을 진여(眞如)라고 하고 이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생사(生死)없는 자기 본래(本來)의 세계로 돌아 가셨는데, 어떤 방법(方法)으로 돌아갔는가?
돌아간 방법(方法)이 탁 하나다. 여러 가지가 하나도 없다.
그것은 무엇인가? 탐욕(貪慾)을 충족시키는 방법이 아니고 탐욕(貪慾)을 정화(淨化)시키는 방법이었다. 요게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다.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도 다 탐욕(貪慾)을 가지고 태어났다.
탐욕(貪慾)을 조상들이 물려주었다. 그런데 이 탐욕(貪慾)을 하나 충족시키고, 둘 충족시키고, 셋을 충족시키면서 인생이 늙어가고 죽음이 온다. 그러면 가지고 이루고자 하는 탐욕(貪慾)은 아직 많이 있는데, 몸만 먼저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서 한(恨)이 생기는 것이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은 태산(泰山)같이 많은데 몸은 벌써 죽는다. 이게 어쩐 일인가? 그래서 “아이고, 아이고” 하고 우는 것이다. 또 그 다음 반복(反復) 된다.
억만년 세월이 지나고 몸이 바뀌어도 탐욕(貪慾)을 충족(充足)시키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는데, 탐욕(貪慾)은 남아 있는데 몸은 가고, 욕망(慾望)은 남아 있는데, 몸은 가고, 이렇게 끝없는 윤회(輪回), 끝없는 고뇌(苦惱)가 계속 되는 것이 중생의 삶(生)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아주 획기적(劃期的)인 삶을 사신 것이다. 탐욕(貪慾)을 충족시키려고 할 것이 아니라 탐욕(貪慾)을 정화(淨化)시켜 버리자. 그래서 탐욕(貪慾) 하나를 정화(淨化)하면 탐욕(貪慾)으로부터 일어나는 속박(束縛)과 고통(苦痛)이 없어져 버린다.
그것을 해탈(解脫)이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본래(本來)의 나(我)와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열반(涅槃)이라고 하고 진여(眞如)라고 한다. 아주 간단한 방법(方法)이다.
욕망(慾望)은 똑 같이 있는데, 이것을 충족(充足)시키려고 하면 충족(充足)도 않되고 고통(苦痛)만 따르는데, 부처님은 그 방법(方法)을 쓰지 않고 탐욕(貪慾)을 소멸(消滅)시키고, 깨끗하게 정화(淨化)시켜서 모든 탐욕(貪慾)의 속박(束縛)으로부터 벗어날 뿐만 아니라 자기(自己) 본래(本來)의 자신(自信)을 만나서 그 지혜(知慧)를 얻으셨다는 것이다.
탐욕(貪慾)의 정화(淨化)에서 지혜(知慧)가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탐욕(貪慾)에 물들은 번뇌(煩惱) 속에서 살기 때문에 지혜(知慧)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이 위대(偉大)하신 것이다.
위대(偉大)한 것은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탐욕(貪慾) 하나 정화(淨化) 시킨 그것 하나뿐이다. 중생(衆生)이 왜 고통(苦痛)을 받는가? 탐욕(貪慾)에 끌려서 사니까. 거기서 고통(苦痛)이 오는 것이다. 원인(原因)은 그것 하나뿐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위대(偉大)하시고, 부처님의 가르침이 인과법(因果法)을 딱 말씀해서 모든 고뇌(苦惱)는 천지신명(天地神明)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조상(祖上)이 물려준 것이 아니고, 역사(歷史)와 사회(社會)가 물려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고 있다.
자업자득(自業自得), 유심소현(唯心所現)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과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 아니고는 않가르친다. 오직 내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면 그런 부처님만 가지고 되는가? 않된다. 여기서 아주 위대(偉大)한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승보(僧寶)가 출현(出現)했다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출현(出現)하셨고, 승보(僧寶)는 베나레스(바라나시) 녹야원(鹿野園)에서 출현(出現)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는 것과 동시에 부처님의 제자가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제자가 깨달음을 얻으면서 승보(僧寶)가 생겼다. 그 승보(僧寶)는 부처님으로부터 물려받는 동시에 또 새로운 역사가 출발(出發)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자상승(師資相承)으로 부처님 제자에서부터 제자로 제자로 오늘 날까지 내려오는데, 그러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부처님 제자들하고 제일먼저 전해주신 부처님하고 어떤 차이가 있는가? 똑 같은가? 똑 같지 않다. 그러면 다른가? 다르지 않다.
이것을 연속체(連續體)라고 한다. 연속(連續) 연속(連續)되는 연속성(連續性)이 있다. 이것을 계속 이어주는 상속성(相續性)이라고 한다. 이렇게 연속성(連續性), 상속성(相續性) 그리고 이것을 이어가는 사자상승(師資相承)이라고 한다. 상승(相承)이라고 하는 것은 똑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절대 다른 것도 아니다.
그래서 승보(僧寶)가 오늘 날까지 전해짐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하다.
이것을 비유로 말하면 무엇과 같은가? 다음과 같다.
부처님이 먼저 법을 설하신 것은 제일 먼저 발견하신 불(火)을 가지고 다른 것에다가 다시 점화(點火)를 시키는 것이다.
그게 설법(說法)이다. 그러면 그것을 받아들이면 점화(點火)가 된 것인데, 점화(點火)가 되어도 깊게 깨닫지 못하면 사라져 버린다.
깊게 깨달아야 생명력이 일어나는데, 그것을 발화(發火)라고 한다. 불씨하나가 온 산천(山川)을 다 태우는데, 어째서 태울 수가 있는가? 점화(點火)가 아무리 되어도 하나하나 풀이나 나무에서 새롭게 불이 발화(發火)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타지 않는다.
옮겨 붙으면 거기서 또 불이 발화(發火)가 되어 일어난다. 또 옮겨 붙으면 거기서 불이 또 일어나고, 계속 발화(發火)가 되고 또 점화(點火)가 되어서 온 산천(山川)을 불씨 하나가 다 태우는 것이다.
승보(僧寶)가 이와 같다. 부처님이 제자(第子)한테 설법을 하면 거기다가 점화(點火)를 시킨다.
그러면 불이 옮겨 붙는다. 그러나 이런 것이 아무 반응이 없고 신심이 않생기고 거기에 깨달음이 않생기면 발화(發火)가 되지 못하고 또 점화(點火)가 않되서 사그라져 버린다.
그렇지만 거기서 활짝 불이 일어나면 막탄다. 거기서 또 불을 옮겨 주면 또 탄다. 그러나 어디 가서 아무 곳에나 점화(點火)를 하고 돌맹이 같은 곳에 아무리 불을 붙여도 거기서는 발화(發火)가 않되니까. 사그라져 버린다.
그러면 부처님 외에 십대제자(十代第子)라든지, 용수(龍樹) ·마명(馬鳴) ·무착(無着) ·세친(世親) 같은 그런 제자라든지, 그 밖에 휼륭한 달마(達磨) ·혜능(慧能)같은 고승(高僧)들이 완전히 부처님의 불씨를 이어 받아서 자기에게서 새로운 그 발화(發火)가 되어 활활 타서 또 물려주는 그것이 승보(僧寶)이기 때문에 승보(僧寶)가 오늘 날까지 전해진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하고 똑같지도 않으면서 부처님하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것을 부처님의 연속성(連續性)이고 부처님의 상속성(相續性)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신심(信心)은 점화(點火) 시키는 것과 같고, 발심(發心)은 발화(發火)가 된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발심(發心)이 되어야 정말로 부처님의 법을 참으로 펼 수 있는 보살(菩薩)이고 도인(道人)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신심(信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지, 신심(信心)이 없으면 않된다.
그러므로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러면 이런 밑바닥에는 무엇이 있을까? 부처님도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진여(眞如)이다. 그리고 중생의 근본(根本)도 진여(眞如)이다.
그래서 화엄경(華嚴經) 제 80권, 입법계품(立法界品), 대정장10, 444하(下) 제일 마지막 부분에 어떤 말이 있는가? 하면 다음과 같다.
허공(虛空),진여(眞如),실제(實際),열반(涅槃),법성(法性),적멸(寂滅)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다.
유유여시진실법(唯有如是眞實法) 오직 이와 같은 진실법이 있어서
가이현시어여래(可以顯示於如來) 여래를 나타내 보일 수가 있다.
이렇게 설명을 하였다.
따라서 부처님은 누구인가? 적멸(寂滅), 부처님은 생멸(生滅)없는 적멸(寂滅)이다. 또 법성(法性), 만법(萬法)의 본성(本性) 또 열반(涅槃),실제(實際),진여(眞如),허공(虛空) 이런 법으로만이 부처님을 보일 수가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허공(虛空)과 같다. 부처님은 아무리 아무리 세월이 오래가도 변하지 않는 그것, 본래(本來) 그 진실상(眞實相)하고 같다고 해서 진여(眞如)이다.
진실상(眞實相)하고 전혀 다르지 않다고 하여 진여(眞如)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서 부처님을 나타내 보일 수가 있다. 이것이 화엄경(華嚴經)에 있는 게송(偈頌)이다. 그리고 화엄경(華嚴經) 제 1권, 대정장 10. 1 제일 첫 번째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시세존처우차좌(爾時世尊處于此座)
그때 세존께서 사자좌에 머물러서
어일체법성최정각(於一切法成最正覺)
일체법에 최상의 휼륭한 정각을 이루시니
지입삼세실개평등(智入三世悉皆平等)
지혜는 과거,현재,미래, 삼세에 들어가서 다 평등하고
부처님이 깨달은 진여실상(眞如實相)의 지혜(智慧)에는 시간(時間)이 없다.
시간(時間)이 없는 세계(世界), 이것이 부처님이 도달(到達)한 세계(世界)이고, 깨달은 세계(世界)이다.
시간(時間)이 없는 세계(世界), 지입삼세(智入三世), 지혜(智慧)가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삼세(三世)에 들어갔다.
생각에는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 삼세(三世)가 있는데, 지혜(智慧)에는 삼세(三世)가 없다. 그래서 평등(平等)하다.
그리고 기신충만일체세간(其身充滿一切世間) 부처님의 몸은 일체 세간에 충만했다. 공간이 없다.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지혜(智慧)이다. 이것이 법성(法性)이고, 진여(眞如)이고, 적멸(寂滅)이다.
이런 세계(世界)를 하나 턱 얻어 놓으면, 이것이 불자(佛者)가 돌아가야 할 최상(最上)의 목표(目標)이다.
생사(生死)없는 해탈(解脫), 시간(時間)과 생멸(生滅)이 없는 진여(眞如), 적멸(寂滅), 열반(涅槃), 법성(法性), 실제(實際), 허공(虛空)의 자리인데, 이 자리는 한 마디로 말해서 불지혜(佛智慧) 부처님의 지혜(智慧)라고 한다.
이것이 왜 않나타나는 것일까? 그것은 탐욕(貪慾), 번뇌(煩惱)가 가려서 그렇다. 그래서 이것을 얻는 방법(方法)은 욕망(慾望)을 채우는 방법(方法)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욕망(慾望)을 소멸(燒滅)시키고, 정화(淨化)시키는 방법(方法)으로 얻어진다. 이것이 참 묘(杳)하다.
이런 것을 경상도(慶尙道) 말로는 “디비쫀다”라고 한다. “디비”는 ‘뒤집다’ 라고 하고, “쫀다”는 ‘애쓴다’ 고 한다.
따라서 뒤집어서 애쓰는 그것이 “디비쫀다”는 말이다. 중생(衆生)은 욕망(慾望)을 채워야 되는 줄로만 아는데, 욕망(慾望)을 정화(淨化)시켜야 되는 줄은 까맣게 모른다.
그래서 도(道)를 닦다가도 욕망(慾望) 충족(充足) 쪽으로 자꾸 유혹(誘惑)이 생기는데, 이것을 마구니(魔軍)라고 한다.
도(道)를 닦다가도 욕망(慾望) 소멸(消滅) 쪽으로 하는 것은 정진(精進)인데, 욕망(慾望)을 충족(充足) 쪽으로 마구니(魔軍)라고 한다.
그런데 하다가 보면 욕망(慾望) 충족(充足)이 자꾸 일어난다. 그러니까. 이것을 완전히 항복(降伏)시키는 것이 항마성도(降魔成道) 마구니(魔軍)를 항복(降伏)시키고 성도(成道)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욕망(慾望)의 충족(充足)이냐? 욕망(慾望)의 정화(淨化)냐? 욕망(慾望)을 정화(淨化) 시킬 때, 이런 본래(本來)의 모습을 볼 수가 있지, 이것을 자꾸 충족(充足) 시키면 눈(眼)을 점점 가리기 때문에 않된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지혜(智慧)는 허공(虛空)과 같다. 허공(虛空)이 시작이 있나? 끝이 있나? 보이는 것이 있나? 않보이는 것이 없나? 일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허공(虛空)이다.
불지광대여허공(佛智廣大如虛空) 불지가 광대해 허공과 같다.
보변일체중생심(普遍一切衆生心) 일체 중생심에 두루하다.
이런 법을 이렇게 믿고, 잘 닦으면 그게 공덕(功德)인데, 이 신심(信心)으로 공덕(功德)을 잘 닦으면 되는데, 중생(衆生)이 가다가 또 욕망(慾望)이 일어나고, 가다가 욕망(慾望)이 일어난다.
이것을 번뇌(煩惱)라고 한다. 번뇌(煩惱)는 무엇인가? 욕망(慾望)이다.
욕망(慾望)은 채울려고 하면 내 몸만 상하지 결과(結果)는 허탈(虛脫)하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서 다 조상(祖上)들이 욕망(慾望)으로 고통(苦痛)받고 욕망(慾望)으로 죽어간 것이 우리 조상(祖上)이다. 우리는 그 조상(祖上)을 물려 받았으니까. 우리도 똑 같다.
실요세간제망상(悉了世間諸妄想) 세간의 모든 망상 다 알지만
불기종종이분별(不起種種異分別) 종종 다른 생각 일으키지 않는다.
그런데 그 지혜(智慧)에서 볼 때 그 욕망(慾望)을 위해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얼마나 허망(虛妄)한가?
그래서 서산(西山)스님께서 임종게송(臨終偈頌)를 떡 하나 지으시고 돌아가셨는데, 청허당집 제 4권본 권 1에 그 임종게(臨終偈)가 다음과 같다.
천사만사량(千思萬思量) 천 번 만 번 생각하는 천사 만사량이
홍로일점설(紅爐一點雪) 홍로에 떨어지는 한 점의 눈이며,
홍로(紅爐)라고 하는 것은 용광로(鎔鑛爐)처럼 활활 타오르는 화로(火爐)를 말한다.
일점설(一點雪)이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 눈 한점 딱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그 모양이다.
그렇게 허망(虛妄)한 것이 우리 생각인데, 그 생각을 붙들고 사는 그것이 우리 자신(自身)이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보니까. 그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泥牛水上行(니우수상생) 진흙소가 물에 들어가고
大地虛空裂(대지허공렬) 온 대지와 허공이 다 그대로 없어진다.
진흙소가 물에 들어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냥 한 순간에 진흙이 흐무러져 해체가 된다. 이런 것이다.
욕망(慾望)의 끝자락이 이런 것이다. 생각의 끝자락이 이렇게 허망(虛妄)한 것이다. 중생(衆生)의 생각이 그냥 인연(因緣) 따라서 그렇게 허망(虛妄)하게 사라지는 것이다.
이런 법문을 하셨다. 그래서 절에서 어릴 때부터 쭉 하신 법문을 가만히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젊을 때 들을 때는 그 법문이 그렇게 중요한지 전혀 몰랐다. 그런데 요즘 생각하니까. 그렇게 중요하다.
사량분별(思量分別)로 괜히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아주 일심정성(一心精誠)으로 잘 들으세요.
그러면 자기 깨달음에 그렇게 중요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항상 간절하게 자신의 생각을 경계(鏡戒)하고 신심(信心)으로 닦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문(法問)의 골자는 천분, 만분이 해도 이와 같다.
“신심(信心)으로 공덕(功德)을 닦고 자기(自己) 생각으로는 판단(判斷)하지 말아라.”
“사량분별(思量分別)하지 마라”
라고 하는 것이다. 매일 법문이 그렇다. “사량분별(思量分別)내지 말고 신심(信心)으로 닦아라.”
또 법문을 잘 들어야 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사량분별(思量分別), 참 무섭다. 어릴 때부터 듣던 법문이 바로 이런 것이다.
제일 많이 듣는 것이 무문관(無門關)이라고 하는 책에 제 2칙에 나오는 백장야호(百丈野狐)라는 법문이 있다.
거기에 중요(重要)한 화두(話頭) 48 가지를 정리해 놓았다. 그곳에 두 번째 나오는 화두(話頭)인데, 백장(百丈)스님이 법문(法問)을 하시다 보니까. 어떤 노인(老人)이 오래도록 다른 사람은 다 돌아가고 없는데, 혼자 가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물었다. “노인(老人)은 왜 가지 않습니까?” 그러자, “사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여우다. 내가 옛날 세상부터 나도 여기서 그 당시 호(呼)가 백장(百丈)으로 설법(說法)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와서 묻기를 대수행인(大修行人), 수행을 많이 한 사람이 있는데, 그 대수행인(大修行人)도 나쁜 짓을 하면 죄(罪)를 받고 좋은 행을 하면 복(福)을 받는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떨어지는가? 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때 내가 대답하기를 ‘불락인과(不落因果), 인과(因果)에 않떨어진다’고 하였다. 그 한 마디 대답을 하고 여우의 몸을 오백생(五百生) 동안 지금까지 받았다.”고 하였다.
무서운 것이다. 이것은 “자기 생각대로 부처님의 법(法)을 전한다면 큰일 난다”는 소리도 여기 있다.
말 한 마디 딱 하고 오백생(五百生)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후 노인(老人)이 말하기를“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말을 잘못해서 여우의 몸을 받았습니까?”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 그 백장(百丈)스님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것을 나에게 다시 물어라”하였다.
그래서 노인(老人)이 다시 물었다. “대수행인(大修行人)도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떨어집니까?”
그러자 백장(百丈)스님이 말하기를, “불매인과(不昧因果), 인과(因果)에 어둡지 않다.”
그리고는 그 말 한마디 탁 듣고 여우의 몸을 벗고 해탈(解脫)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 그러면 첫 번째 경계(鏡戒)하는 것은 “부처님의 법(法)을 자기 생각대로 말하지 마라”는 것이다. 큰일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수행인(大修行人)는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 말 한 마디 했다가 ‘오백생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후 백장(百丈)은 “불매인과(不昧因果), 인과(因果)에 어둡지 않다.”고 했는데, 여우의 몸을 벗고 해탈(解脫)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글자 한 자(字)가 차이가 나서 그렇게 되었을까? 그렇게 따지면 큰일 난다.
그러면 도인(道人)은 인과응보(因果應報)에 떨어지지 않는다거나 인과(因果)에 어둡지 않다거나 마찬가지다. 이것도 아무 소용(所用)없는 말이다. 이것은 생각을 붙이면 다 소용(所用)없다.
그런데 그 당시(當時) 백장(百丈)스님이 그 여우를 화장(火葬)을 뚝 다해 마치고 저녁에 법문을 해서 그런 내역을 쭉 이야기하니까.
백장(百丈)으로부터 인가(認可)를 받은 상수제자(上首第子) 황벽선사(黃檗禪師)가 있었는데, 황벽(黃檗)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면 고인(古人)이 말 한 마디 잘못하고 오백생(五百生) 동안 여우의 몸을 받았다면 질문할 때마다 전부 옳게 말한 선지식(善知識)은 무엇이 되었습니까? 라고 질문(質問)을 하였다. 이게 법(法)이다.
“누가 질문(質問)을 해도 하나도 틀리지 않고 옳게 말한 그 도인(道人)은 무엇이 되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생각을 가지고는 도저히 않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생각이 얼마나 허망(虛妄)한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백장(百丈)이 황벽(黃檗)을 보고, 말하기를, “이리 가까이 앞으로 와라. 너에게 말해주리라.” 그러자 황벽(黃檗)이 앞으로 가까이 다가 왔다.
와서는 백장(百丈)의 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황벽(黃檗)이 먼저 손바닥을 들어서 자기 스승인 백장(百丈)스님을 몸에 닿도록 때렸느냐? 손바닥만 탁 때리는 시늉만 했느냐?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사일장(與師一掌)이라. 손바닥을 들어서 하나 탁 해서 주었다고 한다. 빰을 쳤든지, 아니면 차마 빰은 않쳤을 것이라 생각은 하지만 맞아도 황벽(黃檗)이 먼저 손바닥을 준 것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법(法)으로 보면 백장(百丈)스님이 맞을 짓을 했다.
법(法)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곳에는 생각이 붙을 수 없는 자리라고 한다. “왜, 맞았는가?” “이렇기 때문에 맞았다.” 그것은 소용없는 소리다. 그러니까. 그때 백장(百丈)스님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박수소운(師拍手笑云) 백장은 손뼉을 마주 치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장위호수적(將謂胡鬚赤) 오랑캐 수염이 붉다고 여겼는데,
경유적수호(更有赤鬚胡) 붉은 수염의 오랑캐도 있구나.
선종(禪宗) 무문관(無門關) 제 2칙(則). 대정장 48. 293상(上)-중(中) 이렇게 대답하셨다. 이게 백장(百丈)스님 법문(法問)이다.
황벽(黃檗)이 손바닥을 한 되 치니까. 그때 백장(百丈)이 박수를 치면서 오랑캐 수염이 붉은 줄 알았는데, 붉은 수염의 오랑캐가 있구나. 라고 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것을 쉬운 말로 다시 바꾸면, “나 혼자만 알고 있는 줄 알았더니, 너도 알고 있구나.” 이 소리다.
이런 제자(第子)가 어디 있겠나? “법(法) 나 혼자 아는 줄 알았는데, 너도 아는 구나.”라는 소리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삼보(三寶)가 오늘 날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래서 백장(百丈)이 그런 황벽(黃檗)같은 제자(第子)가 나타났으면 그 법(法)이 황벽(黃檗)에게서 스스로 발화(發火)가 된 것이다.
그러면 황벽(黃檗)의 제자(第子)가 또 발심(發心)을 해서 도(道)를 이루면 거기서 또 발화(發火), 불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삼보(三寶)가 오늘 날까지 전해지는 것이지, 그냥 쉽게 되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의 법(法)이 연속체(連續體)로서 지금까지 내려온다는 것은 참 불가사의(不可思議)가 그런 불가사의(不可思議)가 없고, 그 신비롭기가 그렇게 신비로운 수가 없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아주 중요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法)과 다를 바 없는 법(法)이 지금까지 전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면 똑 같은가? 똑같지도 않지만 다른가? 다르지도 않는 법이 계속 삼보(三寶)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佛敎)이다.
그래서 거기에 왜 여우의 몸을 받기도 하고 벗기도 하는가? 이게 화두(話頭)이다. 매(昧)자를 써서 해탈(解脫)을 했고 낙(落)자를 써서 인과(因果)를 받았다고 하는 그런 생각은 억만년 해보아도 소용(所用)없다.
이게 바로 말없는 세계(世界)로 바로 인도(引導)하는 법(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제대로 알고, 제대로 말해야 하는데, 잘못 말을 하면 이렇게 여우의 몸을 받기도 하고, 잘못 말하면 큰일 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어릴 때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하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절에 날이면 날마다 제비가 울었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하면서 계속 울었다. 그래서 제비 때문에 대중들이 시끄러워 죽겠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큰 스님한테 가서 여쭈어 보았다.
“제비가 왜 저렇게 날이면 날마다 시끄럽게 웁니까?”
“그게 사연이 있다”
“무슨 사연이 있습니까?”
“이 절에서 그 전에 불교를 잘 가르친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무슨 불교의 부처님 법 중에 하나를 잘못 가르쳤다.
그래서 그것을 알고 크게 참회(懺悔)를 하고 그 잘못 가르친 법을 참회(懺悔)하기 위해서 일부러 제비의 몸을 받아 가지고 대중들에게 저렇게 깨우침을 주고 있노라.”
“그러면 왜, ‘지지배배’, ‘지지배배’ 합니까?”
“그게 아니라, 공자(孔子) 논어(論語)의 위정편(爲政篇) 제 2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지위지지(知謂知之),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부지위부지(不知謂不知),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시지야(是知也) 이것이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비가 이것을 대중들에게 계속 깨우치는 것이다.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
이것이 아는 것이다.” 지위지지(知謂知之), 불지위불지(不知謂不知) 이 구절을 소리대로 빨리 읽으면 마치 지지배배 하고 조잘대는 제비의 울음소리와 비슷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런데 제비가 이것을 하고 있으니, 지위지지(知謂知之), 부지위부지(不知謂不知), 시지야(是知也)를 매일 ‘지지배배’, ‘지지배배’ 소리로 하더라도 제비는 그것을 지금 읽고 있는데, 사람이 들을 때는 ‘지지배배’, ‘지지배배’ 소리 밖에 않 들리는 것이다.
한 번 해보세요. 지위지지(知謂知之), 부지위부지(不知謂不知), 시지야(是知也) 자꾸 해보세요. 어떻게 되나? 그런데 큰 스님이 이것을 턱 설명(說明)을 해주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제비도 참 대단하다.
대중(大衆)을 위해 일부러 제비의 몸을 받아서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라. 이것이 아는 것이다.” 참 대단한 것이다. 이게 법문(法問)이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해석(解釋)하고 자기 뜻대로 판단(判斷)하면 큰일 나는 것이다. 이게 제비가 우는 사연(事緣)이다.
제비가 그런 사연(事緣)이 있어서 울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량(思量)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絶對) 금물(禁物)이다. 생각하지 말고 오직 믿고 실천(實踐)하는 것, 그게 불자(佛者)의 정진(精進)이다.
생각하면 벌써 틀린다. 통도사(通度寺) 극락암(極樂庵) 바로 앞에 연못(蓮池)이 있었는데, 한 번은 경봉(鏡峰) 노스님이 어디를 가시다가 일부러 연못(蓮池)을 쳐다보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저 연못(蓮池)을 보면 저 멀리 있는 산이 보인다.” 그래서 영지(影池)라고 한다. 정말 산이 훤하게 비쳤다.
그러나 어릴 때는 뭣땜에 ‘산이 보인다’고 했는지 몰랐다. 산은 나도 보는데, 왜 저런 말씀을 하시나 몰랐다. 여기에 깊은 법문(法問)이 있다.
무슨 법문(法問)인가? 분명히 물속에 산이 보이는데, 산이 물속에 왔나요? 않왔지요? 그럼 어째서 산이 보일까요? 물 때문에 보이는 것이다. 물이 없는 다른 곳에는 산이 보이지 않는다. 여기에 깊은 법문(法問)이 있다.
비유경(譬喩經)에 보면, 인도라는 나라에 두 내외가 있었는데, 하루는 큰 독에다가 술을 담갔다. 술이 다 익어갈 때쯤 되어서 그 할머니가 가서 술독을 들여다 보니까.
술독에 어떤 할머니를 숨겨 놓았다. 그래서 할머니는 “어떤 할머니를 술독에 숨겼어요?” 이 할아버지한테 그냥 온갖 푸념을 다한 것이다.
이상해서 또 할아버지가 가서 보니까. 거기에 또 할아버지가 거기 숨어 있었다. 또 이럴 수가 있나? 그냥 두 내외가 싸움을 한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할머니, 어떤 할아버지가 숨겨져 있는지, 한 번 보자고 술독의 술을 다 퍼내도 없었다.
그런데 왜 없는데 보였을까요? 그것은 물(水) 때문에 보였던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해인삼매(海印三昧)라고 한다. 해인삼매(海印三昧)가 우리 마음(心)인데, 이 우리 마음 안에 몸(身)이라고 하는 그림자(影)가 턱 보이고, 저 산(山)이라고 하는 그림자(影)가 보인다.
그러니까. 중생세간(衆生世間), 기세간(器世間),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이 깨달음(覺)이라고 하는 것이 다 보인다.
이것이 해인삼매(海印三昧)다. 그래서 깨닫고 나면 이 몸(身)도 우리 마음에 비친 그림자(影)이고, 저 국토(國土)도 마음에 비친 그림자(影)이고, 온갖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이 깨달음의 세간(世間)도 다 마음에 비친 그림자(影)라 다 일체가 다 해인삼매(海印三昧) 뿐이다. 바로 이 도리(道理)다.
그래서 모두가 다 우리 지혜(智慧)의 그림자(影)다. 이것을 설명한 것이 해인삼매(海印三昧)다. 해인(海印)이라고 하는 것은 바다에 비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다는 무엇인가? 바다는 우리의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까맣게 모른다.
그래서 이런 것을 믿고, 왜 않보이는가? 탐욕의 그림자가 꽉 차서 못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믿고, 공덕(功德)을 닦으면 그런 번뇌(煩惱)가 다 밝아져서 환하게 보이게 되는데 그것을 정각(正覺)이라고 한다.
이제 마지막으로 비유를 들어 말하면 어떤 사람이 혼자 지나가다 보니까. 그림자가 따라왔다. 그래서 그림자를 보고 이렇게 이야기했다.
“너 어디서 왔나?”
“쉬~쉬~ 말하지 마라.”
“무엇이냐?”
“내가 너한테서 생겼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역역영자하처래(歷歷影子何處來) 역역한 그림자야! 어디서 왔느냐?
지지아시종여생(止止我是從汝生) 쉬! 쉬! 내가 너에게서 생겼다.
역역영자(歷歷影子), 분명하고 분명한 그림자야! 하처래(何處來), 어느 곳에서 왔느냐?
지지(止止), 쉬! 쉬! 말하지 마라. 아시종여생(我是從汝生), 나는 너로부터 왔다.
성불하십시오.
종범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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