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사제(無量四諦) 이것은
‘고제(苦諦)에 있어서 무량(無量)의 상(相)이 있고
내지 도제(道諦)에 있어서 무진(無盡)의 차별(差別)이 있는
대보살(大菩薩)이 수(修)하는 바로 별교(別敎)의 설(說)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까도 대부분 말을 다 했지만
그냥 무생사제(無生四諦)는 공(空)에만 너무 치우쳐서
현상적인 그런 우리 수행 같은 것을 무시한 것이지만은
무량사제(無量四諦)는 이것은 비록 공이라고 할망정
삼계는 분명히 우리 중생 견해에서는 있으니까,
삼계에도 역시 우리가 닦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 현상이 많이 있으니까, 우리 닦는 수법(修法)도
역시 무량(無量)의 상(相)이 있단 말입니다.
사성제가 있고, 12인연법이 있고, 육바라밀이 있고,
기타 계행도 오직이 많이 있습니까?
그와 같이 본래 당체는 공이로되 현상적인
상대유한적인 우리 경계에서는
그와 같이 상이 많단 말입니다. 무량의 상이 있단 말입니다.
또한 동시에 무량의 상이 있으니까 닦는 도제(道諦),
즉 말하자면 집제(集諦) 우리 번뇌 이것은 상이 아닙니까.
집제는 고의 원인이니까.
도제(道諦)는 이것은 닦는 우리 수행의 상인 것이고,
우리 번뇌의 집제도 역시 사실
따지고 보면 그와 같이 무량의 상인 것입니다.
탐진치(貪嗔痴), 108번뇌, 팔만사천번뇌
그래서 번뇌가 오직 많습니까. 그와 같이 번뇌가 많은지라,
따라서 번뇌를 우리가 단진(斷盡)하는
떼어버리는 차별(差別)도 또 역시 많단 말입니다.
내내야 번뇌에 따라서 번뇌를 없애기 위한
수법(修法)이 있어 놔서 수법도 한도 끝도 없이 많다 말입니다.
무진의 차별이 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은 대보살이 수(修)하는,
대보살은 이와 같은 것을 다 닦는 것입니다.
일반 소원 중생은 그냥 조금 닦고,
공에 착한 사람들은 허무만 있고 계행도 필요 없다.
자칫하면 아까 말한 무생사제의 범주 내에서는
자기 행동을 아무렇게나
‘아, 무어 당체가 공인데 무엇이 필요가 있으랴’
이와 같이 하기가 쉽단 말입니다. 허나 공은 공이로되
아까 말마따나 우리 번뇌도 역시 끝도 갓도 없이
무량의 상이 있고, 또한 번뇌를 녹이는 것이
이것이 수행이기 때문에 수행인 도제
역시 무진의 차별이 있단 말입니다.
이런 것을 다 공이지만 닦아야 한단 말입니다.
내내야 못 닦으면 그러면 우리한테 있는 그런 소중한
무량공덕(無量功德)을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을
우리가 계발(啓發)을 못 한께 말입니다.
아무리 많은 금광석(金鑛石)이 있다 하더라도
제련(製鍊)을 못하면 순금(純金)이 못 나오 듯이
불성이 소중하지만
못 닦으면 우리가 불성을 계발을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땅히 공은 공이지만은
우리가 아직 공을 본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도인이 공이라 하니까 그런가보다 하는 것이지
우리가 공을 지금 느낍니까?
못 느끼기 때문에 역시 참답게 공을 느끼고서 체험(體驗)하려면
그때는 인제 여기 있는 바와 같이
무량의 수행을 필요로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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