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스크랩] 사종사제(四種四諦) / 4,무작사제(無作四諦)

수선님 2019. 3. 3.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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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무작사제(無作四諦) 무작사제(無作四諦)라, 번뇌(煩惱) 즉(卽) 보리(菩提)요 생사(生死) 즉(卽) 열반(涅槃)의 도리(道理)에 입각(立脚)하여 단증(斷證;끊고 증하는)의 조작(造作;마음으로 헤아리는 범부의 짓거리)을 리(離)한 사제(四諦)이므로 무작사제(無作四諦)라 하며, 이는 원교(圓敎)의 사제(四諦)이다. 도인들은 법이자연(法爾自然)이라, 제대로 조금도 그때는 조작이 없이 지음이 없이 바로 행하지만, 일반 범부는 내가 해야 쓰겠구나 하고 억지로 행한단 말입니다. 마음으로 상(相)이 있게 하는 것은 이것은 조작인 것이고 마음으로 상이 없이하는 행동은 그것이 하나의 무상(無相)의 무위법(無爲法)이란 말입니다. 번뇌가 즉 보리라, 이런 것도 우리가 알기가 좀 어렵지요. 우리가 소중한 것은 내내야 결국은 보리인데 - 참다운 진리인데 - 보리라는 것은 참다운 진리 아닙니까. 참다운 진리가 우리가 인제 닦아야 할 것이고, 우리가 성취할 목적인데, 번뇌가 바로 보리다. 그래버리면 결국은 이것이 너무나 허망한 감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때에 해석을 잘해야 씁니다. 현상적 의미에서 본다면 분명히 번뇌와 보리가 이렇게 둘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내내야 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닦지요. 허나 영원적인 근원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상(相)에서 안 보고 체(體)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번뇌나 보리나 선이나 악이나 둘이 아닙니다. 항시 말한 바와 같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佛性)뿐이란 말입니다. 일체만상(一切萬象)을 근본에서 보는 바로 보는 그런 안목(眼目)에서 본다고 할 때는 일미평등한 불성인지라, 불성 가운데서 무슨 보리가 있고 또는 번뇌가 있고 두 가지 세 가지가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현상적인 상대유한의 중생차원에서 보니까 보리가 있고 도가 있고 그러는 것이지, 모두가 다 부처라는 - 무두가 다 부처로 볼 수 있는 - 그런 청정한 안목에서는 번뇌가 어디 흔적도 없지요. 따라서 이런 무작사제 이런 법문은 이것은 체에서 근본 근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중생 경계에서 안 보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불타(佛陀)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부처의 눈에서 본다고 할 때는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가 즉 열반이란 말입니다. 열반(涅槃)은 영생(永生)을 말하는 것이고 생사(生死)는 죽고 살고 하는 중생경계(衆生境界)를 말한다 말입니다. 헌데 이러한 것들이 아까 말마따나 근원에서 보면 번뇌가 바로 진리의 가장 순수한 진리인 보리요, 또는 죽고 살고 하는 생로병사(生老病死)나 인간세상의 상대유한의 그런 것이 바로 고생 바다가 아니라 바로 그때는 청정미묘한 행복(幸福)을 맛보는 극락세계(極樂世界)란 말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은 극락이나 불타나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있다 없다 좋다 궂다 하는 그런 관념을 항시 두면 아까 말마따나 같은 공부를 해도 마음이 괴롭고 그때는 유위법(有爲法)이라, 자꾸만 걸려버립니다. 우리가 행(行)은 다 하고 하지만 결국은 우리 마음자리는 역시 깨달아 버린 도인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근본 체(體)를 우리가 안 떠난단 말입니다. 우리 불교 수행자는 근본 체를 안 떠나야 쓴단 말입니다. 상에 얽매이지 않고 말입니다. 상에 얽매이면 결국은 마음이 괴롭고 몸도 거북하고 그런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원래 둘이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 이런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분명히 둘이 아닙니다. 꼭 지금 사람들은 제아무리 말을 해도 몸과 마음을 둘로만 생각하니까 문제가 큽니다. 몸과 마음은 절대 둘이 아닙니다. 몸과 마음은 둘이 아닌데 마음의 당체는 마음의 본질은 그때는 부처 아닙니까. 부처라는 것은 모든 공덕(功德)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부처 그것은 물질이 아닙니다. 순수(純粹)한 정신(精神)인 것입니다. 순수한 정신이 어떻게 운동하는 것인가? 순수한 정신이 운동하는 그런 법칙이나 운동하는 상황 따라서 물질이 보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물질이 보이는 것이지 원래 물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로 분자로 분석하고 원자로 분석하고 원자를 다시 소립자로 분석하고 들어가서 가사 중성미자(中性微子)나, 물질의 가장 미세한 것은 이제 중성미자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질량(質量)도 열량(熱量)도 없습니다. 질량 열량이 다 제로zero입니다.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질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energy만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그런 물질이 아닌 것들이 에너지가 어떻게 모아지는가? 어떻게 운동하는가? 거기에 따라서 원자가 생기고 무엇이 생기고 한다 말입니다. 물리학(物理學)을 공부한 사람들은 물질의 끄트머리가 텅 빈 것을 안단 말입니다. 단지 텅 비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만 모르는 것이지 비었다는 것은 아는 것입니다. 분석하면 내내야 제로가 되니까 말입니다. 순수 에너지 장(場)만, 순수 에너지인 전자기장(電磁氣場)만 우주에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그 장(場;field) 그것이 즉 말하자면 실체가 그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불성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순수에너지의 장 순수에너지 그 당체 그것이 불성인지라 불성은 우주에 충만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범부라 하더라도 역시 거기에 입각해서 사물을 봐야 한단 말입니다. 가장 근원에서 사물을 본단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고 할 때는 물질은 없습니다. 내 몸도 역시 내내야 결국은 물질이 아닌 순수한 불성기운이 이렇게 저렇게 뭉쳐서 운동하고 빙빙 돌아서 내 몸이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염파(念波)라, 식(識)의 파동(波動) 마음의 파동이 결국은 물질이 되었단 말입니다. 이런 말들은 여러분들이 잘 새기고 나중에 물리학을 다시 보고 그래서 음미해 보십시오. 생각의 파동, 마음 파동이 이렇게 저렇게 되어서 무엇되고 무엇되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이런 몸이란 당체는 사실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병(病)도 없습니다. 병도 분명히 없는 것입니다. 코레라 병균 자체도 역시 내내야 불성입니다. 지금 저 에이즈AIDS라 해서, 후천성면역결핍증해서 그 무서운 병을 말하고 하지만 그것도 내내야 따지고 보면 바이러스virus를 구성한 것은 순수한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으로 그런 무서운 바이러스가 되었거니 우리 생각만 불성에다 안주시키면 그런 바이러스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위대한 도인들은 신통(神通)을 다 한단 말입니다. 위대한 도인들은 하늘로 올라가고 별별 신통을 다 하거니 그런 바이러스나 병균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무엇인고 하면 삿되게 믿습니다. 물질이 있다. 내 몸이 이와 같이 있다하는 그런 고정관념(固定觀念)이 딱 박혀 놓으니까 이제 정신(精神)의 힘을 못 쓴단 말입니다. 정신의 힘은 물질이 어디가 팔이 하나 어긋나고 다리가 어긋나고 한 그런 정도 가지고서는 우리 마음을 움직이지 못 하는 것입니다. 원칙은 말입니다. 저번에 신문을 보니까 어느 목사 한 분이 양팔이 없고 양다리가 없습니다. 양팔이 없고 양다리가 없는데 공부해서 목사가 되었단 말입니다.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이른 감이 있으나 여러분들 가운데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이나 실상관(實相觀)이나 그런 관법(觀法)은 이와 같이 보리와 번뇌와 둘이 아니고 말입니다. 생사와 열반이 둘이 아닌 그 자리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천지우주가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성자리 그 자리를 안 놓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어서 그 자리를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 것이 공부인 것이지 놓쳐버리고 벌써 둘로 구분하고 셋으로 구분하고 그러면 그것은 체를 떠난 공부입니다. 체를 안 떠나야 참선(參禪)인 동시에 참다운 공부입니다. 참선은 무엇인가? 참선이라는 것은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敎是佛語)라, 선시불심이요,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라 하듯이 우리 마음이 그러한 일미평등(一味平等)한 불심(佛心)에서 안 떠나야 그래야 선(禪)인 것입니다. ‘이뭣고’나 ‘무(無)’자나 제아무리 외운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이 불심에서 떠나 버리면 그것이 선이 못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고 무엇을 부른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마음이 불심을 떠나 버리면 그때는 선도 못되고 참다운 염불(念佛)도 못된다 말입니다. 순간 찰나도 우리가 불심에서 안 떠나야 씁니다.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 즉 열반이라는 즉 구분이 없는 하나의 진리, 중생의 그릇 따라서 저 지옥중생(地獄衆生)은 하나의 진리를 제일 모르는 중생이고, 차근차근 올라와서 아귀(餓鬼)는 더 알고, 축생(畜生)은 더 알고, 사람은 좀 더 알고, 천상(天上)은 더욱 더 알고, 그때 극락(極樂) 가버리면 천지우주가 불성임을 확연히 다 알아버린다 말입니다. 그와 같이 일미평등(一味平等)한 우주가 하나의 그야말로 참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불타(佛陀)뿐인데 그 불타를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서 그와 같이 구분이 생긴다 말입니다. 다 알아버리면 그때는 천지우주가 내가 되고 내가 천지우주가 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겠지요.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가 즉 열반이라는 이러한 도리(道理)에 입각(立脚)해서, 이러한 도리에 입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수법(修法)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아까 말한 생멸사제나 무생사제나 그런 사제를 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차 아는 것이지 우리가 입각할 때는 역시 마지막 판에 있는 무작사제(無作四諦) 즉 말하자면 범부의 헤아림이 없는 사제란 말입니다. 이런 자리에 입각을 다 해버려야 씁니다. 그런데 지금 보통 나와 있는 사제법문 풀이를 보면 제일 밑에 있는 생멸사제(生滅四諦)만 겨우 해가지고서 이런 가장 소중한 끄트머리 부처님의 참 뜻인 무량사제(無量四諦)나 무작사제(無作四諦)를 안 해버리면 그때는 곤란스럽단 말입니다. 그래버리면 근원(根源)을 모르고서 줄거리는 모르고서 이파리만 집착(執着)하는 격이란 말입니다. 입각(立脚)하여 단증(斷證)의 - 끊고(斷) 증(證)하는 - 조작(造作)을 떠나버린단 말입니다. 번뇌가 원래 없거니 어디서 무엇을 끊으며 생사가 본래 없거니 무얼 떠나서 우리가 열반으로 간단 말입니까? 그러나 우리 범부지(凡夫智)에서는 역시 습기(習氣)가 있는지라 나쁜 버릇 때문에 못된 버릇 때문에 있다 없다 나다 너다 하는 버릇 때문에 습기를 안 떼어내면 우리가 여실히 본래 있는 공덕(功德)을 발휘(發揮)를 못하고 본래 있는 공덕을 우리가 수용해 못씁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상(相)을 내면 - 상을 두고 공부를 하면 - 공부가 잘 안 통한단 말입니다. 항시 그때는 상에 머물러버리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애쓰고 계행 지키고 참선도 한다 하더라도 그때는 ‘내가 범부다’ ‘내가 죄가 있다’ 그런 마음을 아예 말아야 씁니다. 어떤 경우에 참회(懺悔)할 때는 ‘짐짓코 상을 내서 내가 정말로 죄를 많이 지었구나’ 이와 같이 한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 공부하는 분상에서는 그때는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탕탕무애(無礙)란 말입니다. ‘다 비어서 천지우주가 오직 불성뿐이다’ 하는 거기다 마음을 딱 두어 버려야 공부가 빠르단 말입니다. ‘내가 죄가 있다’ ‘죄가 있다’ 이래서 참회하고 눈물을 흘리고 하지만, 그것도 필요는 하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생멸사제나 그런 정도에서 하는 것이니까, 그것은 참회해도 상을 두는 참회인 것이고 말입니다. 상을 안 두는 참회는 그때는 그러한 것을 떠나서 여기 있는 바와 같이 번뇌가 즉 보리요, 생사가 열반이라는 그러한 불타의 체에 입각해서 우리가 참회를 해야만 참다운 참회란 말입니다. 그래야만 죄의 근원이 끊어집니다. 고집멸도 사제 가운데서 중요한 것은 무어라 해도 도제(道諦) 즉 말하면 도(道) 이것이 멸(滅)에 이르는 길 아닙니까. 본래 생사가 없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번뇌의 습기(習氣)가 있는지라 마땅히 우리는 도를 닦아야만 비로소 열반에 이른단 말입니다. 닦되 역시 아까 말한 바와 같이 상을 두고 닦을 것이 아니라 상을 안 두고 닦는 소위 말하는 무위법(無爲法)으로 닦는단 말입니다. 우리가 상을 두어 놓으면 무위법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계행(戒行)을 지킨다 하더라도 역시 상을 두면 그것은 유위법(有爲法)인 것이고 말입니다. 상을 안 두면 무위법이란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저절로 상이 안 나올 수 없습니다만 상이 없다는 확신을 자꾸만 가져야 합니다. - 끝 -

      출처 : 가장 행복한 공부
      글쓴이 : 여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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