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스님

청화 큰스님 그는 누구인가

수선님 2019. 4. 21. 11:17

청화 큰스님 그는 누구인가


세수 75세인 청화스님은 '40년간의 장좌불와', '하루 일종식', '염불선의 실천자' 등 수많은 수식어가 뒤따르고 있다.

청화스님을 따르는 불제자들도 자연히 스님을 보는 것만으로 희열을 느낀다고 한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는데 앞길을 이끌어 주는 스승이 있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어두운 밤길에 등불과 같은 분이 청화큰스님이십니다." 이남덕(전 이화여대)교수의 말이다. 최하림시인은 큰스님을 일컬어 '맑은 꽃 비상하게 자기를 다스린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향훈'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청화 큰스님이 대중 앞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스님은 40년간을 주로 토굴에서 생활해 오다가 12년전 태안사를 맡고부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청화큰스님이 태안사를 맡은 것은 구산선문의 하나인 동리산문을 일으키려는 염원때문이었다.

동리산문은 혜철선사에 의해 개창된 이래 폐사 직전에 청화스님이 주석하면서 선문구산을 되찾게 되었다.
현재는 뜻있는 수행승에게 태안사를 맡기고 캘리포니아 금강선원에 주석하고 있다.


일본 메이지 대학 유학

1923년 전남 무안군 운남면에서 태어난 청화스님의 속명은 강호성이다. 청화라는 법명은 그의 스승인 금타스님에게서 받았다. 14살되던 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5년제 중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국내에 들어와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친구들과 함께 고향에 망운중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대학 진학을 결심하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메이지대를 1년간 다니다가 징병으로 국내에 끌려왔다. 진해에서 얼마동안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평소 진보적인 의식을 갖고 있던 그는 좌우익의 대립된 양사에 심한 갈등을 느꼈다.그의 출가는 무엇보다도 좌우익의 대립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나, 출가를 결심한 뒤에도 심적 갈등은 여전했다.

금타스님을 은사로 출가

부모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친 강호성은 끝내 출가의 결심을 꺾지 않았다. 청화스님은 출가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청년시절부터 철학을 좋아해서 동서양서적을 섭렵했습니다. 동양철학을 공부하다보니 자연히 불교서적을 접하게 되더군요. 불교입문서를 보고 나름대로 윤곽을 잡았었죠. 그런 뒤 절에 있던 집안의 육촌 동생이 공부하기 좋은 곳이 있다고 해서 바로 따라 나섰습니다. 처음에는 절에 가서 공부도 하고 수양도 하려고 마음먹었는데 금타 화상을 보는 순간 미련없이 출가를 해버렸지요."

한 집안의 장남으로서, 또 부인과 아들을 하나 둔 가장으로서 그의 출가는 집안의 극심한 반대를 필연적으로 안고 있었다. 스님은 장성 백양사 운문암에서 금타화상을 만나 스승으로 모시고 불문에 들었다. 금타스님은 호남불교를 일으킨 송만암선사의 제자로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서옹스님과 함께 수학했다. 청화스님은 금타화상을 스승으로 모셨으니 연담문하가 된다.


연담문하는 만암선사에 의해 호남불교의 큰 기둥을 세운다. 그 문하에 서옹스님이나 금타스님같은 이가 배출되었고 청화스님은 금타스님의 가르침을 받아 정통 통불교사상을 주창했다. 청화스님의 사상적 핵심은 금타화상의 절대적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루 한 끼 공양과 40년 동안이나 눕지 않는 장좌불와의 수행법은 바로 스승 금타화상의 영향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청화스님은 금타대화상의 가르침이 흐려지고 있는 것에 대해 애석해 하고 있었다. "금타대화상은 과학적인 시대에 금자탑을 이룩한 획기적인 분인데 사람들은 그 분을 비방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시대를 초월한 원통불교를 주창한 인물입니다"

금타화상은 1940년 "우주의 본질과 형량"이라는 글을 발표할 만큼 현대물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듯하다.

한국불교의 정통인 통불교를 주창해 온 금타스님의 그러한 사상과 수행법이 청화스님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자신의 40여년간 토굴생활 또한 몸에 밴 스승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

금타화상은 하루 한 끼를 공양하고 짚신을 손수 삼아 신는 등 청빈의 사상을 실천했으며 두타행으로 가행정진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실제로 청화스님은 하루 한 끼 공양과 손수 빨래를 하는 등 청빈한 삶을 살아 오고 있다. 그는 '무아무소유'의 실천수행자이기도 하다.

그가 금타스님을 모신 지 얼마 안 되어 스님이 입적한 뒤 줄곧 스승이 쓴 유고 "금강심론"과 "수능엄삼매도" 등을 통해 수행했고 뒷날 유고를 정리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청화스님은 금타스님의 "우주의 본질과 형량"을 이렇게 평가했다.

"금타화상의 우주론은 어디까지나 불설에 근저를 두고 불교의 우주관인 '삼천대천세계' 곧 10억 우주에 관한 초유의 체계화입니다. 그 점에서 참으로 귀중한 불교문헌이며 그 분의 사상은 큰 빛이 될 것입니다."


40년간 토굴생활

청화스님의 51년의 법랍 중 40여년 토굴생활과 장좌불와 정진은 수행자들에게 귀감이 되어오고 있다. 12년 전에는 태안사에 주석하면서 20여명의 납자들과 3년 결사의 회향을 마무리 짓는 등 수행인의 귀감이 되어오고 있다. 정통불교의 중흥을 주창해 온 청화스님은 불교가 분파된 것을 가슴 아프게 여겨 통불교를 주장해 왔다. 그의 사상의 골격은 염불선이다.

기자는 청화스님이 주석했던 수행처를 답사해 보았다. 청화스님은 금강선원이라는 현판을 내걸고 금강의 진리를 설파했다. 기자가 구례 사성암을 찾았을 때도 금강선원의 간판이 먼저 눈에 띄었다. 이 곳에서 청화스님은 6개월간 주석하면서 불법의 참된 진리 탐구에 전념했다. 청화스님이 주석했던 토굴들은 대부분 오지에 있다. 월출산 상견성암과 사성암 등이 그것이다.

현지답사를 통해 청화스님이 정토신앙에도 밝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정토삼부경"을 저술, 선과 염불, 정토신앙에 대해서도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청화스님이 주석했던 안성 칠장사의 경우 유가종의 원찰로 청화스님이 정중당이라는 편액을 붙이고 주석하자 수선납자들이 모여들기도 했다.

하루 한 끼 공양과 장좌불와의 수행법에 대해 청화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좌불와의 수련법은 나뿐만 아니라 수행자라면 모든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수행법입니다. 또한 단식이란 사람의 신체와 정신을 유지시켜 주는 최소한의 수단일 뿐 배를 불리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수행자는 적당히 먹는 것이 수행에 도움이 됩니다."

30년간 물만 먹고 살고 있는 양애란씨는 청화큰스님과의 만남에 대해 "큰스님은 나처럼 물만 드시지는 않지만 하루 일중식으로 수행에 정진하시는 도인이라고 정평이 나 있다. 내가 그 분을 만난 것은 나의 삶이 새로운 생명을 만난 것과 같이 기쁜 일"이라고 말했다.


40년간의 장좌불와

현장스님은 청화스님을 가리켜 한국의 밀라레빠라고 말했다. 철저한 계행으로 이름높은 티베트불교의 밀라레빠라는 단 한번도 바닥에 몸을 뉘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청화스님 또한 스승 금타화상의 수행법대로 출가 이후 40여년간 한번도 땅바닥에 누워 본 적이 없다.

청화스님에 따르면 일중식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토굴생활을 하다보면 혼자 여러 끼를 해먹기도 귀찮거니와 먹는 것으로 시간을 뺏기면 수행에 많은 지장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화스님은 묵언정진 수행로도 유명하다. 85년 태안사에서 3년간 묵언정진을 했고, 그 뒤 미국 금강선원에서 95년 6월 두 번째로 묵언에 들어갔다.

동리산문을 열고

85년 태안사에 주석하게 된 청화스님과 태안사의 인연은 각별하다. 6.25.전란 때 화재로 인해 폐허가 되다시피 한 절을 맡아 태안사 중흥의 원력을 세우고 20여명의 도반과 함께 3년 묵언 결사를 했다. 이 결사는 지금도 불자들 사이에 신화로 회자되고 있다.

무엇보다도 태안사와 청화스님의 인연은 염불선과의 만남이다. 여기에는 믿어지지 않는 얘기 한 토막이 있다. 염불과 선을 회통한 선사로 중국 초기 선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무상선사와 청화스님 사이에 1천 3백 여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인연이 그것이다. 이러한 인연관계로 청화스님과 염불선 태안사의 관계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필자와 청화스님과의 만남은 각별하다. 태안사 3년결사 회향법회 때 '바른 신앙과 밝은 생활'이라는 비디오 제작을 계기로 스님과 여러 차례 만날 수 있었다. 스님의 영상설법집을 10편을 잇달아 제작했고, 그 뒤 불교영상회보사가 기획한 "정중무상선사"의 출간을 뒤에서 돕기도 했다. 태안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염불선을 혜철선사에 의해 들여온 근원지이기도 하다. 청화스님이 태안사에 온 뒤 정중당을 세운 것도 범상치 않은 인연이다. 정중당은 무상대사가 일으킨 정중종과 이름이 같다. 물론 국제학계에 무상대사를 규명하기 전의 일이다.

필자가 청화스님에게 정중당의 의미를 물어보았다. 청화스님은 정중당을 지을 때 무상선사의 존재를 몰랐다고 했다. 1천 3백여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기막힌 인연은 이렇게 이어진 것이다. 정중종뿐만 아니라 청화스님이 주창한 염불선이 바로 무상의 염불선과 일치하고 있으니 범상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반면 청화스님은 필자에게 "염불선은 무상선사가 나보다 먼저 해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염불선이라는 새로운 회통적 선풍은 내가 제시했다."고 주장했다. 청화스님은 무상대사의 염불선에 대해 "정중무상대사" 서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선과 염불을 회통한 무상대사의 교화행각은 문파와 종파를 초월했으며 불문과 종교 일반의 고질인 법집의 계박을 초탈한 선교방편은 모든 종교인의 귀감이지요." 청화스님이 주창한 염불선은 한국 불교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조사선만이 유일한 선임을 주창한 한국 불교 교단에 일대 파란을 예고한 것이다. 스승 금타스님과 송만암선사의 사상 대립도 있었지만 염불선이 추기 선불교의 핵심수행법 중의 하나라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졌다.


청화스님은 염불선의 주창의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정통적인 지적 성향이 강한 사람에게 걸맞을 공안선이나, 의지력이 많은 사람에게 걸맞을 묵조선을 모두 긍정합니다. 그러나, 정통선 즉 염불선이란 내 마음이 곧 부처이고 천지우주가 역시 부처요,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미 닭이 달걀을 품듯이 빈틈없이 틀어쥔 상태의 수행인데 지, 정, 의 모두를 요하는 회통의 방법이지요."

염불선의 실체

염불선은 무상선사가 창안한 정통적인 수행법이다. 그 수행법은 혜철선사가 이 땅에 퍼뜨린 수행방법이다. 그런데, 육조 혜능계의 남종선의 시대를 맞으면서 이 땅은 오직 조사선, 공안선만이 최고의 선수행법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자연 청화스님이 주창한 염불선도 그러한 풍토에서는 뿌리를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청화스님이 주창한 염불선은 한국적인 선이다. 그것은 1천 3백년 전 무상이 창안한 염불선을 마조가 잇고 마조는 서당에게, 서당은 혜철에게 염불선을 잇게 한다. 동리산 태안사가 바로 혜철선사가 주석한 터전이고 청화스님이 1천 3백년 후 염불선을 일으킨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선불교에서 염불선이란 생소한 말이다. 청화스님은 염불선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 "내가 부처임을 믿는 그 마음이 바로 염불선입니다. 염불은 원효대사에서부터 서산대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전통이었습니다. 어느 시대 어디에서나 위대한 분들은 참선과 염불을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보고 실행하셨습니다. 우리 중생이 부처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부처임을 믿는 것이 곧 염불이죠. 그러므로 밖에서 부처를 구하면 단순히 복을 비는 방편 염불에 지나지 않지만 대상을 떠나 본체를 부처로 설정하고서 그것을 안에서 구하면 그것이 바로 염불선이 되지요."


실로 1천 3백년 만에 청화스님을 통해 염불선이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회통불교의 길

염불선뿐만 아니라 회통불교와 통불교를 주창해 온 청화스님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파성을 지양한 원융한 원통불교는 우리 불교가 앞으로 마땅히 지향해 가야 할 부분입니다. 진리 자체가 둘이 아니고 원통무애한 것이기 때문이죠. 정통조사라고 하는 분들은 다 치우침이 없었습니다. 신라의 원효, 의상, 고려의 보조, 나옹, 조선의 서산, 사명 등 시대를 주름잡은 분들이 모두 원통불교를 부르짖었습니다. 필연적으로 회통이 안 될 수 없었는데, 원통불교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아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저히 규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불성의 체험에 역점을 두어 정진한다면 원통불교로 회귀될 것입니다."

청화스님이 연 선의 세계

청화스님이 열어젖힌 선의 세계는 염불선을 바탕으로 한 통불교사상이다. "우리가 '천수다라니'를 외우든 '이뭣고'의 문자화두를 들던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하든지 구경 목적은 진여불성 자리를 발견하는 길입니다." 청화스님은 "무문관"이나 "육조단경"을 들어보이시면서 진정한 불성자리를 깨달으려면 청빈한 마음자리를 발견해야 된다고 말했다.


"선이란 우리의 마음을 중도실상인 생명의 본질에 머물게 해 산란하지 않도록 하는 수행법입니다. 우리가 선을 닦아 삼명육통이 되면 과거나 현재, 미래를 알고 천지우주를 두루 통관하는 안목과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신통력을 모아 최상의 영생의 행복을 느낄 수 있죠. 그것이 바로 불타의 경지입니다."

염불선을 통해 일가를 이룬 청화스님의 선 수행은 불성체험에 역점을 두는 '선오후수'로 정진해 불성에 안주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계사 부처님 오신 날 고승초청 법회에서 청화스님은 "지금 우리는 하나의 진리로 통합을 지켜야 합니다. 회통하지 않고서는 우리 불교가 살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도 다른 사람의 마음도 안정이 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참다운 깨달음의 날이고, 참다운 행복의 날이요, 영생할 수 있는 우주 해방의 날입니다. 누구나 부처님 광?의 등을 켜는 날입니다."라고 말했다.

미주포교의 시작

청화스님은 95년 6월, 태안사 중흥불사를 마감하고 미국을 건너가 묵언정진 결사에 들어갔다. 청화스님이 일군 490에이커(60만평)의 미국 금강선원(Diamond Zen Center)은 서구인들에게 한국의 선을 전하는 요람이 되고 있다. 청화스님이 미국으로 건너간 뜻은 달마가 남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을 전한 것과 같이 한국 땅에서 미국 땅에 선을 전하기 위한 구도의 여정이라고 술회했다.

"미국 불교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까해서 왔습니다. 미국에는 각국 불교들이 들어와 여러 갈래로 분열되어 서로 화합이 안 되어 있는 것 같아 한국불교가 그 구심점 역할을 담당하면서 각 종파간의 여러 집착과 갈등 해소를 하는데 다소라도 도움이 될까 하는 그런 뜻에서 온 것입니다."

 

 

 

 

 

 

 

 

 

 

 

 

 

 

동채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eastandsouth/8444854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