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공간

참선은 성불의 지름 길 - 성철스님

수선님 2019. 3. 24. 11:53

(5) 참선은 성불의 지름길

이제까지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계속 강조해 왔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을 깨치려고 하면 여러 방법이 있는데
교(敎)에 있어서는 중생의 근기에 따라〈삼승십이분교〉가 벌어지고
또 선(禪)에 있어서는 언어 문자를 버리고 바로 깨쳐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의 근본 입장에서 볼 때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기 전에 이미 알아 마쳤다 해도
까닭 없이 땅에서 넘어져 뼈를 부러트리는 사람입니다.

하물며 덕산스님이 비 오듯이 몽둥이로 때리고
임제스님이 우레 같은 할(喝)을 한다 하여도
곽 속에서 눈을 부릅뜨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송장이 곽 속에서 아무리 눈을 떠 봐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내가 법상에 앉아서
쓸데없이 부처가 어떻고 선이 어떻고 교리가 어떻고
이러니 저러니 하는 이 법문은 중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생들에게 독약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이 법문이 사람 죽이는 독약인 비상인줄 바로 알 것 같으면
그런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 불법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부처 되려는 병, 조사(祖師) 되려는 병,
이 모든 병을 고치는 데는
우리의 자성을 깨치면 이런 모든 집착을 벗어나서
참으로 자유자재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자기자성을 깨치지 못하고서는 집착을 버릴래야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신이 바른 사람이라면
부처님이나 달마조사가 와서 설법을 한다 하여도
귀를 막고 달아나 버려야 합니다.

예전에 무착(無着)이라는 스님이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그 절 공양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큰 가마솥에 팥죽을 끓이고 있는데
그 팥죽 끓는 솥 위에 문수보살이 현신(現身) 하였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큰 종을 치고 향을 피우고
대중을 운집(雲集) 시키려고 야단했을 터인데
무착스님은 팥죽을 졌던 주걱으로
문수보살의 뺨을 이리치고 저리치면서 말했습니다.

「문수보살은 너 문수보살이며 무착은 내 무착이로다」
그러자 문수보살이 게송을 읊고 사라졌습니다.

그와 같이 이 대중 가운데서
「성철은 저 성철이고 나는 나다.
그런데 긴 소리 짧은 소리 무슨 잠꼬대가 그리 많으냐」 하고
달려드는 진정한 공부인이 있다면
내가 참으로 그 사람을 법상 위에 모셔 놓고 한없이 절을 하겠습니다.
그런 무착스님의 기재가 참으로 출격장부(出格文夫)이며
시퍼렇게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내 밥 내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어깨서 남의 집 밥을 구걸하느냐 말입니다.
부디 내 밥 내 먹고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언어문자를 익히는 것뿐만 아니라
육도만행(六途萬行)을 닦아서 정각(正覺)을 성취하는 것이 어떠냐고
흔히 나에게 수화들이 묻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예전 조사스님들이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육도만행을 닦아 성불하려고 하는 것은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그런데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이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 갈 것입니까.
육도만행이 보살행으로서 아무리 좋다고 하지만은
바로 자기 자성을 깨치는 것만은 못한 것입니다.

이조 오백년 동안 불교계를 볼 때
서산(西山)스님을 대표라고 대개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는 것은 좀 틀립니다.
진묵스님이 말씀하셨듯이
명리승(名利僧)이지 참다운 도인(道人)이 아니더라 그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조 오백년 동안의 불교 대표자라고 학인들은 봅니다.

다음의 말씀은 서산스님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일생동안 어리석은 바보가 될지언정
문자승이 되길 바라지 않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산스님의 문집(文集)이
여러 권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그러나 이런 결심이 있었기 때문에
서산스님의 문집이 후세에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만
만일 그러한 투철한 각오가 없었다면
일종의 문자승이나 되고 말았지
어찌 이조오백년을 대표하는 스님이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앞으로 공부를 함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경전을 배우면서 참선을 하고,
참선을 하면서 경전을 배우고 조사어록을 얽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언어문자는 산 사람이 아닌 종이 위에 그린 사람인줄 분명히 알아서
마음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기 대중 가운데서도 여러 가지로 공부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염불하여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
주력으로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
경을 보아 삼매를 성취하여 성불한다는 등등.
그러나 그 무엇보다는 화두(話頭)를 참구하는 것이
성불하는 지름길이라고 조사스님들은 다 말씀합니다.
그러니 이 법회(法會) 동안에는
누구든지 의무적으로 화두를 해야겠습니다.
이제 내가 화두를 일러줄 터이니 잘 들으십시오.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니
이것이 무엇인고」
「不是心不是物不是佛이니 是什麽오」


내가 일러준 이 화두의 뜻을 바로 알면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되고 자성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이 화두의 뜻을 잘못 알고
마음이라 하면 어떻고 물건이라 하면 어떻고
부처라 하면 어떠냐고 하는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늘 마음 속에 「…이것이 무엇인고」 하고 의심을 지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지금까지 자기가 참구하는 화두가 있는 사람은
그 화두를 놓치지 말고 더욱 간절히 의심을 지어가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잠깐 동안이나마 조용히 앉아 있으면
항하사 모래알 같이 많은 철보탑을 만드는 것보다 나으니라.
칠보탑은 필경 부서져 티끌이 되거니와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바른 깨달음을 이루느니라」

부처님 당시에도 마음을 깨치는 방법으로
경행(輕行)과 좌선(座禪)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선정(禪定)을 익혀라〉고 간절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정(禪定)은 앉아 있든지 서 있든지,
말할 때나 말하지 않을 때나
마음이 망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한 곳으로 모이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오로지 경행과 좌선만을 가르치시고
다른 방법이 없었으니 우리들은 오직 참선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앞에 나온 임제스님과 덕산스님에 대해서
앞으로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잠시 언급할까 합니다.

두 분 스님은 예로부터 조사스님들 가운데서도
영웅이라고 칭송을 받는 분들입니다.
임제스님은 처음 황벽스님에게 와있으면서
수행의 태도가 순수하고 열심이었습니다.
그때 수좌(首座)로 있던 목주스님이 계셨는데 감탄하여
“비록 후배이기는 하나 대중과는 다른 바가 있구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임제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상좌(上座)는 여기 온 지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삼년입니다」

「그러면 황벽스님께 가서 법을 물어본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무엇을 물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황벽스님에게 가서
〈어떤 것이 불법(佛法)의 긴요한 뜻입니까〉 하고 물어보지 아니 하느냐」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황벽스님에게 가서 그렇게 물었는데,
묻는 소리가 아직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황벽스님이 갑자기 몽둥이로 스무 대나 때렸습니다.
임제스님이 몽둥이만 맞고 내려오니 목주스님이 물었습니다.

「여쭈러 간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제가 여쭙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조실스님이 갑자기 때리시니 그 뜻을 제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다시 가서 여쭈어라」
그 말을 듣고 임제스님이 다시 가서 여쭈니
황벽스님은 또 몽둥이로 때렸습니다.
이와 같이 세 번 가서 여쭙고 세 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습니다.

임제스님이 돌아와서 목주스님께 말했습니다.
「다행히 자비를 입어서 저로 하여금 황벽스님께 가서 문답케 하셨으나
세 번 여쭈어서 세 번 다 몽둥이만 실컷 맞았습니다.
인연이 닿지 않아 깊은 뜻을 깨칠 수 없음을 스스로 한탄하고
지금 떠날까 합니다.」

「네가 만약 갈 때는 황벽스님께 인사를 꼭 드리고 떠나라」
임제스님이 절하고 물러가자
목주스님은 황벽스님을 찾아가서 여쭈었습니다.

「스님께 법을 물으러 왔던 저 후배는
매우 법답게 수행하는 사람입니다.
만약 하직 인사를 드린다고 오면
방편으로 그를 제접하여 이후로 열심히 공부케 하면
한 그루 큰 나무가 되어
천하 사람들을 위해 시원한 그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임제스님이 와서 하직 인사를 드리니 황벽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너는 고안(高安) 개울가의 대우(大愚) 스님에게 가거라.
반드시 너를 위해 말씀해 주실 것이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을 찾아뵈오니 대우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서 오는고」
「황벽스님께 있다가 옵니다」

「황벽이 어떤 말을 가르치든가」
「제가 세 번이나 〈불법의 긴요한 뜻〉을 여쭈었는데
세 번 다 몽둥이만 맞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무슨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황벽이 이렇게 노파심철(老婆心切)로 너를 위해 철저하게 가르쳤는데
여기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 것이냐」

임제스님이 그 말끝에 크게 깨치고 말했습니다.
「원래 황벽의 불법(佛法)이 별것 아니구나」

대우스님이 임제의 멱살을 잡고 말했습니다.
「이 오줌싸개 놈아!
아까는 와서 허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더니
지금은 또 황벽의 불법이 별 것 아니라고 하니
너는 어떤 도리를 알았느냐, 빨리 말해보라! 빨리 말해보라」

임제스님은 대우스님의 옆구리를 세 번 쥐어박았습니다.
그러자 대우스님이 멱살 잡은 것을 놓으면서 말했습니다.
「너의 스승은 황벽이지 내가 간여할 일이 아니니라」

임제스님이 대우스님께 하직하고 황벽스님에게 돌아오니,
황벽스님은 임제스님이 오는 것을 보고 물었습니다.

「이놈이 왔다 갔다만 하는구나.
어떤 수행의 성취가 있었느냐」
「다만 스님의 노파심절 때문입니다」

「어느 곳에서 오느냐」
「먼저 번에 일러 주신대로 대우스님께 갔다 왔습니다」

「대우가 어떤 말을 하던가」
임제스님이 그간의 일을 말씀드리자 황벽스님이 말씀했습니다.

「뭣이라고!
이놈이 오면 기다렸다가 몽둥이로 스무찰이나 때려주리라」

그러자 임제스님이 말했습니다.
「기다릴 것 무엇 있습니까. 지금 곧 맞아 보십시오」
하면서 황벽스님의 뺨을 후려쳤습니다.

황벽스님이 말했습니다.
「이 미친놈이 여기 와서 호랑이 수염을 만지는구나!」

그러자 임제스님이 갑자기 고함을 치니 황벽스님이 말했습니다.
「시자야 이 미친 놈을 끌어내라」

그 후 임제스님이 화북(華北) 지방으로 가서 후배들을 제법하면서
사람만 앞에 어른거리면 고함을 쳤습니다.
그래서 임제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
우레같이 고함친다(喝)고 평하였습니다.

덕산스님은 처음 서촉(西蜀)에 있으면서 교리연구가 깊었으며
특히 금강경에 능통하여 세상에서 주금강(周金剛)이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스님의 속성(俗姓)이 주(周)씨였습니다.
당시 남방에서 교학을 무시하고
오직 〈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하는
선종의 무리가 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하여
평생에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금강경소초(金剛經疏鈔)를 젊어지고 떠났습니다.

가다가 점심(點心) 때가 되어서 배가 고픈데
마침 길가에 한 노파가 떡을 팔고 있었습니다.
덕산스님이 그 노파에게
「점심을 먹으려고 하니 그 떡을 좀 주시오」 하니,

그 노파가
「내 묻는 말에 대답하시면 떡을 드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드리지 않겠다」고 하니
덕산스님이 「그러자」고 하였습니다.

노파가 물었습니다.
「지금 스님의 걸망 속에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금강경소초가 들어 있소」

「그러면 금강경에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미래의 미음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스님은 지금 어느 마음에 점심을 하시려고 하십니까」

「점심(點心) 먹겠다」고 하는 말을 빌어 이렇게 교묘하게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이 돌연한 질문에 덕산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도 금강경을
거꾸로 외우고 모로 외우고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떡장수 노파의 한 마디에 모든 것이 다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래서 노파에게 물었습니다.
「이 근방에 큰 스님이 어디 계십니까」
「이리로 가면 용담원(龍潭院)에 숭신(崇信) 선사가 계십니다.」

점심도 먹지 못하고 곧 용담으로 숭신선사를 찾아 갔습니다.
「오래 전부터 용담(龍潭)이라고 말을 들었더니
지금 와서 보니 용(龍)도 없고 못(潭)도 없구만요」
하고 용담 숭신선사에게 말하니 숭신스님이 말했습니다.

「참으로 자네가 용담에 왔구만」
그러자 또 주금강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숭신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하루는 밤이 깊도록 숭신스님 방에서 공부하다가
자기 방으로 돌아오려고 방문을 나서다가
밖이 너무 어두워 방안으로 다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숭신스님이 초에 불을 켜서 주니 덕산스님이 받으려고 하자
곧 숭신스님이 촛불을 혹 불어 꺼 버렸습니다.
이 때 덕산스님은 활연히 깨쳤습니다.
그리고는 숭신스님께 절을 올리니 용담스님이 물었습니다.

「너는 어깨서 나에게 절을 하느냐」
「이제부터는 다시 천하 노화상들의 말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고 덕산이 말했습니다.

그 다음날 덕산스님이 〈금강경소초〉를 법당 앞에서 불살라 버리며,
「모든 현변(玄辯)을 다하여도 마치 터럭 하나를 허공에 둔 것 같고,
세상의 추기(樞機)를 다한다 하여도
한 방울 물을 큰 바다에 던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후배들을 제접 할 때는
누구든지 보이기만 하면 가서 몽둥이로 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덕산스님이 법 쓰는 것을 비유하여
〈비 오듯이 몽둥이로 때린다〉고 평하였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대중방을 뒤져
책이란 책은 모조리 찾아내어 불살라 버리곤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참선에 신심을 내어
자성을 바로 깨치도록 노력합시다.

 

 

* 법문 출처 : 해인지 <해인법문>
대한불교 조계종 홈페이지

마하반야바라밀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mirinae19/17204081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