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 십지(十地)에 관하여-십지와 보현행원과의 관계는?]
보살 십지는 화엄경 십지품에 나오는 열 가지 보살의 공부 단계입니다.
오늘은 이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십지는 이름 그대로 열 가지 지위로 구성되니, 초지(初地) 환희지, 제 이지(二地) 이구지(離垢地), 제 삼지 발광지(發光地), 제 사지 염혜지(焰慧地), 제 오지 난승지(難勝地), 제 육지 현전지(現前地), 제 칠지 원행지(遠行地), 제 팔지 부동지(不動地), 제 구지 선혜지(善慧地), 제 십지 법운지(法雲地)가 그것입니다. 각각 지위의 뜻은 생략하고, 전체적 개관을 살펴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순전히 '저의 견해'에 지나지 않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십지 중에서 초지에서 사지인 염혜지까지는 보살도(菩薩道) 실천을 위한 힘(得力)을 기르는 과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종교적 체험으로 환희를 일으킨 보살이 중생 제도의 서원을 세우며 실천을 위한 힘을 연마하는 준비 과정이 제 4지인 염혜지까지인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살은 환희심 속에서 일상 생활의 밝은 업을 짓게 되는데(이구지), 그 속에서 지혜의 빛이 솟으며(발광지) 마침내 이 세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지혜가 불꽃처럼 타오르게(염혜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지에서 사지까지의 단계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오지 난승지부터는 이렇게 길러진 힘으로 실지로 중생 제도의 길로 뛰어드는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살은 일체의 중생을 이익케 하고 구하기 위해 일체 세간의 기예를 모두 배웁니다. 즉, 중생의 삶 속에 뛰어들어 그들과 똑같은 삶을 삶으로써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난승지의 일입니다.
그러한 중생 제도행을 하게 되면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이론으로만 알았던 세상의 실상이 비로소 완전하게 보살의 눈앞에 드러나는 일입니다. 이것이 현전지입니다.
현전지에서는 초지에서 사지까지 힘을 기르는 동안 알았던 세상의 실상과는 다른 실상이 전개되는데, 그것은 초지와 사지의 단계에서 본 세계의 실상이 이론의 영역이었다면, 현전지에서 보는 실상은 생생한 살아있는 실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현전지에서는 '삼계에 있는 것은 오직 마음 하나(一心)이다!'라고 하는 저 유명한 유심게(唯心偈)가 나오는 것입니다.
발광지, 염혜지에서 본 세계가 유위법의 세계였다면, 현전지에서 보는 세계는 무위법의 세계입니다. 따라서 현전지에서 보살은 '이 세상이 모두 마음뿐이구나!' 하는 것을 사무치게 알게 됩니다. 보이는 세계, 보이지 않는 세계가 모두 마음에서 나온 것임을,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한 마음의 요동이 우주의 끈을 진동시키고 입자를 창조하여 천지 만물의 보이는 세계가 나오게 하는 것임을, 현실 세계에 직접 뛰어들어 울고 웃는 중생과 속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가는 보살에게 비로소 명명백백하게 보이는 것(現前)하는 것입니다.
현전지에서 비로소 진실한 세상의 실상이 보인다는 것은 우리가 대단히 주의해야 할 사실인데, 그것은 '세간의 중요성'입니다. '참된 공부는 세간, 세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현전지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전지에 이른 보살은 그 덕분에 한 단계를 뛰어넘게 되는데, 그것이 원행지입니다. 마치 우주 공간에 이른 로켓이 진공 속의 추진 엔진 가동으로 대기 속에서보다 훨씬 더 큰 속력을 얻게 되듯, 현전지의 공덕으로 보살은 일찍이 가지 못했던 먼 수준(遠行)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른 원행지에서 현전지에서 보았던 진공묘유의 세계, 활공(活空)의 세계가 전개됩니다. 즉, 그 전의 지위에서 보았던 공(空)이 단순한 공함이 아니라, 만물을 창조하고 만물을 유출케 하는 실로 오묘한 자리의 공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원행지에서는 모든 것이 생각생각(念念) 찰나찰나에 모두 이루어지니, 그것은 이 세상이 본래가 요동치는 생명의 자리며 연기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한 생각마다 십바라밀이 모두 만족되며, 생각 생각마다 대비가 가득하며, 생각 생각마다 부처님 사모함이 가득한, 그런 세계가 나타납니다.
8지인 부동지부터 십지인 법운지까지는 보살이 부처님 품속으로 들어가는 단계입니다. 즉, 7지까지는 보살 자신의 원력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이지만, 8지부터는 부처님 원력으로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보살과 부처가 둘이 아닌 세계, 보살과 부처가 하나가 된 세계인 것입니다. 여기서 주객의 이분법은 완전히 무너지며 주객불이의 세계가 전개됩니다. 그리하여 보살과 부처가 둘이 아닌 세계에서 끝없는 중생 제도가 이루어지는 것이 법운지의 단계입니다.
'어떤 공부를 하더라도 종국에는 마침내 부처님 품속으로 뛰어 들어야 한다, 그래야 완전하고 원만하게 된다'는 평소 저의 말씀은, 화엄경 십지 법문을 보면 결코 틀린 말씀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십지 법문에는 보살의 삶에 세 가지 큰 전환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초지의 단계로, 초지에서 보살은 비로소 이 세상의 실상을 체험하게 되어 환희심과 끝없는 비원이 솟아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전환입니다.
두 번째는 난승지로, 난승지에서 보살은 그동안의 자신을 위한 삶(?)을 버리고 현실 세계로 뛰어들게 됩니다. 심우도로 말하면 '입전수수'의 단계인 셈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의 전환인데,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부동지의 단계는 또 하나의 대 전환입니다.
보리심을 일으키고 중생제도의 힘을 닦고, 그렇게 닦은 힘으로 뛰어든 중생의 세계! 그 속에서 중생들과 똑같이 생사의 물결을 헤메이던 보살은 마침내 부처님을 만나고 부처님 품속에 안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는 보살이 무슨 일을 하든 모두 부처님의 공덕에서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겉보기에는 보살이 하는 것 같지만, 실지로는 부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온 몸과 마음에 부처님만 가득한 삶! 그런 삶 그런 세상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화엄경 십지 법문을 보면, 보현행원과 대단히 닮아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습니다.
가령 십지를 크게 둘로 나누면 초지에서 사지까지의 '지혜의 증장'과, '자비의 실천'인 오지부터 십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현행원의 공경, 칭찬, 공양, 참회까지의 '기본행원'이 지혜의 증장에 맞춰져 있고, 그 이후인 '응용행원'이 자비의 증장을 가져오는 것을 상기한다면 놀랄 만큼 유사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십지와 보현행원의 관계는 어떠한가?
보살십지가 주로 '보살의 수행 깊이'를 설한 것이라면, 그러한 십지를 '실지로 이루는 방법'이 보현행원입니다. 십지의 열 가지는 보살의 수행 단계에 관점이 맞춰져 있고, 보현행원 열 가지는 그런 세계를 실지로 가는 실천에 관점이 맞춰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지와 보현행원은 다른 세계가 아닙니다. 단계로 보면 십지요, 방법으로 보면 보현행원입니다.
보현행원은 십지의 전 단계를 관통합니다. 보현행원의 가장 얕은 단계가 초지인 환희지요, 보현행원의 가장 깊은 단계가 마지막인 법운지인 것입니다. 실지로 화엄경에는 십지의 전 과정에서 예경, 공양, 회향이 이루어집니다. 즉, 십지가 바로 '보현행원의 결과'인 것입니다.
보현행원품이 나오기 전 시대의 화엄승들은 십지품에 십바라밀이 나오는 것을 계기로 십지와 십바라밀을 연계 시켰지만, 제가 볼 때 그것은 바른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십지와 보현행원을 연계시켜야 완벽한 가르침이 탄생합니다. 즉, 이론적인 면이 강한 십지품에, 실천적 보현행원품이 가미되면 그야말로 '완벽한 화엄'이 되는 것입니다.
동채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eastandsouth/8444861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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