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은 믿는 마음, 흔들리지 않는 마음(不動心)이다. 마음이 흔들리면 신심이 아니다. 번뇌는 풀이나 흙탕물과 같고, 신행은 물을 맑고 향기롭게 하는 마니주와 같다.
한결같이 나아가는 마음(生決定心), 결정을 못하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신심이 아니다. 불자는 오직 마음에서 찾아야 하며, 마음 밖에서 허겁지겁 구해서는 안 된다.
마음을 가지고 끝임없이 부지런히 닦고 또 닦고, 실행하고 또 실행하는 것이 신행이다. 한 번 두 번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정진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표현하면 오래 구(久)자를 사용하여 ‘구구하게‘(오래오래)하면 ’필유입처(必有入處)‘라, ’반드시 되는 때, 경지가 있다’라고 한다.
고려 시대 보조스님이 초심행자에게 지은 글이 있는데 맨 마지막에 이런 글이 있다.
“여시구구하면 정혜가 원명이라.(如是久久 自然定慧圓明하야)” ‘수행이란 자연히 된다. 자연히 선정과 지혜가 둥글고 밝아진다.’ 이것이 수행의 결과이다.
선정이 밝아지면 마음에 동요가 없다. 동요는 무엇인가? 생활 속에서 미움과 사랑, 그것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선정이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근본과 현실을 훤히 아는 그것이 지혜다.
수행을 계속하면 사물 속에서 자연히 고통과, 근심, 걱정이라고 하는 것들이 없어지고 지혜가 저절로 밝아서 걸리고, 쫒기고, 힘들고, 괴로운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다른 사람이 뭘 필요로 하는지를 훤히 알아서 제악막작하고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하여 악은 저절로 않 짓게 되고, 선행은 저절로 하게 되는 그것이 수행의 목표이다.
그래서 구구하면 필유입처(必有入處)라. 오래 오래하게 되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것이 신행의 아주 높은 단계다. 그러면 신심, 신행에서 무엇을 믿는가? 상당히 중요하다.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첫째로 중요한 것이 인연법이다. 인연법을 믿는 것이 신심이다. 인연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문명사에서 보면, 이 세상 이치가 그 어떤 무엇이 지배하는 세력이 하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이 신(神)이 되었든, 조상이 되었든, 무엇이 되었든 지배하는 주체가 있다고 믿었다. 상당이 중요하다. 지배하는 세력, 주체가 있어서 인간이 행복하게도 되고 불행하게도 된다고 믿어 왔는데,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까. 그게 아니다 라는 사실이다.
인연이라는 것이 그렇게 종교적, 사상적, 문화적으로 엄청난 의미가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므로 이것이 있게 되는 이런 인연에 의해서 모든 것이 생기고 사라진다고 하는 인연생멸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생멸인데, 그런 생멸의 법칙은 인연이다. 그 어떤 의지적인, 계획적인 지배세력이나 지배주체는 없다]는 것을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나를 조종해서 내가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다. ‘누가 나를 뒤에서 조종해서 너는 이리가고 너는 저리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켜 주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세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것이다. 완전히 해방 되었다. 이것이 부처님의 인연법에 의미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다 달라지는가? 그것은 누가 나에게 은혜를 준다든지, 형벌을 주어서 보이지 않는 세력으로부터 지배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나에 업에 의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나는 나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것이 중요한 또 하나의 가르침이다. 이것을 자업자득이라고도 하고 인간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다. 이처럼 업을 어떻게 짓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이지, 누가 나에게 벌을 주는가? 상을 주는가? 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인연법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업은 누가 짓는가? 내가 짓게 된다. 나는 어떻게 짓는가? 마음이 짓게 된다. 그래서 이것을 신구의 삼업(身口意 三業)이라고 해서 신업, 행동으로 짓는 것, 구업, 말로 짓는 것, 의업, 생각으로 짓는 것이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말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여기에 따라서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는 것이지, 다른 누가 나를 잘되게 하고 잘못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깨우쳐 주셨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믿음이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그냥 우리가 흔히 듣고, 편하게 생각하니까. 이것이 대단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이것을 인류 역사에서 한 번 밝혀보면, 보통 일이 아니고 어마어마한 발전이다.
부처님 가르침 중에 모든 이치는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 인연법 하나 하고 또 하나는 각자 사람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잘될 수 있는 능력도 있고, 못될 수 있는 능력도 있다 라는 것이다. 그게 의지(意志), 마음, 일체는 유심조(一切唯心造)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보이지 않는 예속이나 속박으로부터 석방시켜준 말이다. 그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흔히 팔자(八字)를 이야기 하는데, 일체유심조라는 것은 모든 것이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으로서 팔자로부터 해방되었고, 흔히 우리는 조상을 잘못 두었다고 그러는데, 이 조상의 속박으로부터 석방된 것이고, 또 천지운수를 그렇게 타고 났다고 말하는데, 팔자와 같은 말이지만 천지운수의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저 높은 하늘을 아무리 아무리 올라가 보아도 그 무엇도 없는데, 사람의 생각이 그렇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무엇이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그런 보이지 않는 ‘지배한다’라고 하는 생각으로부터 해방시켜준 그것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그래서 내 마음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어마어마하게 넓은 세상과 유구한 역사 속에서 기나긴 세월 동안 수많은 중생들을 노예로부터 주인으로 만들어 준 말이다.
‘운명에 의해서 결정된다’ ‘어떤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고 하면 항상 그 세력에 딸려 갈 수 밖에 없는 노예가 된다. 나의 일을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것이 노예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요즘도 노예가 많다. 자기 일을 자기가 결정하지 못하고 꼭 누구한테 의지한다.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 희한(稀罕)하다.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가 책임지면 될텐데, 책임 않질려고 한다.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책임을 않지면 예속된다. 반드시 예속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내가 결정하고 내가 책임지는 그런 인격과 습관을 기르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보통 책임감 없는 사람이 꼭 다른 사람 의견에 따라한다. 그것도 잘못되면 [아이고, 누가 그렇게 하라] 고 했다면서 슬슬 빠져 나갈려고 한다.
이것은 아주 재미없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다. 완전히 모든 속박, 모든 예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준 것이다. 그래서 마음을 어떻게 내어서 업을 어떻게 짓는가에 따라서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는 것이지, 다른 누가 우리를 조절하는 세력은 없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기기도 하고 인연에 의해서 없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어마어마한 이야기다.
그리고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삶에 대한 목표, 삶에 대한 가치다. 이게 상당히 중요하다.
대부분 보면 무엇을 위해 사는지, 삶에 대한 가치와 삶에 대한 목적이 무엇인지, 그 근본과 지말적인 것과 혼돈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행복한 것이 근본인가? 권력과 재물을 많이 갖는 것이 근본인가? 하는 것이다. 권력과 재물을 많이 소유하고 장악해도 불행하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권력과 재물이라는 것이 행복을 위해 필요한 것인데, 이런 것을 평소에 가치혼란이 일어나서 행복은 생각지도 못하고 재물, 권력을 많이 소유하는 것을 목적으로 둔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이나 재물 때문에 오히려 불행을 초래한다. 그것이 바로 가치 중심의 사고체계에 대한 혼란이다. 이런 것이 많이 있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이 목적이 아니라 행복이 목적이다]라고 해야 한다. 사랑도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인데, 때에 따라서는 행복을 희생해서 사랑을 얻을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도 가치 혼란이다.
행복은 팽개치더라도 권력을 장악하고 싶다. 행복을 팽개치고 재산을 소유하고 싶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혼란의 대명사다. 행복이야 뭣이 어떻게 되든 간에 내가 구하는 사랑을 구하고 싶다고 하는데, 이런 것이 가치혼란이다.
그러나 행복을 희생시키는 어떠한 가치도 필요없는 것이다. 학문도 그렇다. 학문이 왜 필요한가? 사람에 행복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학문이 필요하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 때는 학문이 필요없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예술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가? 왜 노래를 잘 불러야 되는가? 왜 춤을 잘 추어야 되는가?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모두 다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본말(本末), 어떤 것이 근본이고, 어떤 것이 지말(枝末)인가? 라고 하는데,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삶에 가치, 삶의 목표를 무엇으로 가르쳐 주셨는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부처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고멸(苦滅)],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사성제 가운데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가 있는데, 멸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높다. 고멸성제로서 고(苦)가 없어진 경지, 그게 해탈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도 고멸(苦滅), 그 고통에서 소멸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苦)가 완전히 사라지면 그게 무엇인가? 바로 행복이다. 출가도 고멸(苦滅)을 얻기 위해 출가를 한것이고, 도를 닦는 것도 고통을 소멸시킬려고 도를 닦는 것이다.
깨달음도 깨달음이 목표가 아니다. 고멸(苦滅)이 목표다. 고를 소멸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닦다가 보니까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처음부터 깨달음을 얻을려고 한 것이 아니다. 고통만 없다면 깨달음을 않 얻어도 상관없지 않는가?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이 출가해서 수도한 목적이 고멸(苦滅)이다. 어떻게 하면 고에서 벗어날까. 그러다가 깨닫고 보니까. 그냥 고멸이 된 것이 아니고 깨달음을 통해서 고멸(苦滅)이 된 것이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고를 소멸시키는 절차,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그 고멸을 어떻게 했는가? 고(苦)는 무상이다. 고(苦)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무상(無相), 노병사(老病死)이다. 고(苦)가 어디서 오는가? 늙고, 병들고, 죽는데서 오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덧붙여서 애별이고(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고,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고,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해도 못얻고, 오음성고(五陰盛苦), 온갖 생각과 욕망이 너무 무성하니까. 이것이 고(苦)라고 해서 팔고(八苦), 나중에는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마지막에 고(苦)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럼 왜 온갖 것이 고(苦)로 돌아가는가? 무상(無相)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게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그것이 사라져 버리니까. 지금 사라지나 나중에 사라지나 결과가 사라지니까. 그것을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그래서 문제는 무상(無相)은 고(苦)다. 덧없고 부질없기 때문에 고(苦)가 오는 것이지, 덧없고 부질없지 않으면 고(苦)가 않온다. 무상에서 벗어날 줄 아는 것이 해탈이다.
생각을 해보세요. 젊음이 않좋은 것이 아니다. 좋다. 그런데 젊음이 금방 지나간다. 무상하다. 금방 늙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젊음도 고(苦)더라는 것이다.
재산도 무상하다는 것이다. 없어진다. 그래서 재산도 고(苦)가 된다. 권력도 없어진다. 권력도 고(苦)다. 아름다움도 없어지더라. 그렇기 때문에 고(苦)다.
그래서 부처님이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 밖에 없는 아들 라후라에게 세속적인 것을 않물려 주었다.
왕위도 않물려 주었다. 왜냐하면 어떤 것을 물려줘 봐도 무상하니까. 마지막에는 고(),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것이다. 무상한 것을 보니까. 그 무상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해탈에다가 의미를 부여한다. 이것이 불교의 삶의 가치다.
고()에서 벗어나는데, 삶의 의미가 있다. 이것이 고멸(苦滅)이다.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왕위를 택할래, 해탈을 택할래] 라고 할 때 아주 중요한 문제다.
요즘에는 왕이 귀하지만 옛날의 왕들은 굉장했다.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 때나 권력을 쓰지 않았다. 권력을 많이 쓰면 폭군이 된다. 권력을 예(禮)로 썼고, 권력을 법(法)으로 썼다. 신하에게 반말을 않하고 정책은 국민을 위주로 하고 때에 알맞게 하였다.
이러한 것을 요즘 사람들은 모른다. 왕이 얼마나 고뇌를 하고, 얼마나 생각이 깊었는지, 그러니까. 왕명만 안다. 왕의 명령은 따라야 된다는 것만 인식할 뿐이다.
불교의 가치는 전륜성왕, 제석천왕이든, 무엇이든 있지만 그것이 중심이 아니다. 그 위에는 성불이 있다. 전륜성왕이라도 괴로움이 있으니까. 의미가 없다. 제석천왕이라도 고통이 있으니까.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고멸도(苦滅道), 고멸해탈(苦滅解脫), 열반(涅槃) 이것을 중시하는 가치다. 고(苦)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세상의 어떠한 선행도 다른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다.
이것이 하화중생(下化衆生), 중생교화(衆生敎化), 이타보살행(利他菩薩行)이다. 그러니까. 내 스스로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다른 사람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이것을 불교의 삶의 목표라고 하고 삶의 가치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이런 것을 가르쳐 주셨다는 것이 참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래서 고통이 없는 행복을 위해 살아야 된다(苦滅). 다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을 주는 것이 중요한가. 다른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러한 가르침에 결정심(決定心), 부동심(不動心), 희락심(喜樂心), 희망심(希望心)을 갖는 것이 신심이다. 신심(信心)이 있으면 닦아야 된다. 그게 신행(信行)이다.
그러면 무엇을 닦는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게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첫째 복(福)이 있어야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환경과 신체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훈련하는 대로 들리고 보인다.
복(福)이 있는 사람은 그 만큼 잘 들리고, 잘 보이고 잘 할 수가 있다. 복(福)이 없으면 않된다. 그러니까. 복을 닦아야 된다. 복(福)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오복(五福)이라고도 하고 만복(萬福)이라고도 하는데, 첫째는 건강한 것이다. 이 몸이 죽기 전에는 몸에 지배를 받는다.
둘째는 가난하지 않는 것이 복이다. 너무 빈궁하면 않된다. 셋째는 나를 인정해주고 따라주는 사람이 있는 것이 복이다. 몸이 건강하고, 물질이 부족하지 않고,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고, 인정해주고, 따라주면 그게 우선 복이다.
그래서 몸에 좋은 것은 신복(身福), 재물에 있는 복은 재복(財福). 주변의 사람들이 도와주고 믿어주는 것은 인복(人福)이다. 인복(人福)이 없으면 아주 곤란하다. 재복이 없어도 곤란하고 재복이 없어도 곤란하다.
건강을 위해 많이 애를 써야 한다. 그래야 건강하다. 누가 절대 건강을 갖다 주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건강을 잘 지키지 못하고 부모 원망하는 사람 종종 있다. 부모가 나를 늦게 낳아서 그렇다고 한다. 몸도 훈련에 따라서 만들어 진다.
날씬한 것 좋아 한다고 삼일 굶었는데, 살이 않빠진다고 그런다.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조상 때부터 형성되어 와서 평생 이루어 왔는데, 삼 일만에 그게 고쳐지겠는가? 이것도 수행처럼 오래오래 구구하게 해야 한다.
끓임없이 계속 하면 된다. 3년 내지 5년만 쭉 마음먹고 하면 반드시 된다. 건강이라고 하는 것은 타고난 것이 없다. 굉장히 중요하다.
물질도 좀 부지런히 해서 절약하면서 쓰고 비축도 하고 또 다른 사람도 도와주는 것이 재복을 만들어 가는 것인데, 벌기는 적게 버는데 쓰기는 많이 쓰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정책이 잘못되어 신용불량자가 생겼다고 하는데, 정치가들은 말을 그렇게 해야 되지만 소비자들은 그렇게 말하면 않된다. 정책 차원에서는 카드정책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소비자 입장에서는 정부 정책이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자기 능력껏 카드를 사용해야지 대책없이 쓰면 어떻하나? 누가 책임 지겠는가?
조상이 와서 도와줄줄 아는가? 않된다. 팔자가 그것을 고쳐주는가? 않된다. 카드 정책을 방만하게 해도 소비자 입장에서는 ‘내가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 경제 능력만큼 활용 해야지, 지나치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까. 본인 책임도 있다. 완전히 정책 책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잘 써서 내가 책임질 만큼만 쓰고 나머지는 검소하게 살고 부지런하게 벌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나머지는 복을 짓는다.
그것이 물질을 가지고 복을 짓는 기본이다.
누가 결혼을 하는데, 만 원짜리 복권을 사서 선물을 했다. 그런데 그것이 당첨이 되고 하도 좋아서 신혼여행도 가지 않고 당첨금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그것이 선물한 사람의 것인가? 선물 받은 사람의 것인가? 당연히 선물 받은 사람의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것이 복이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것은 꼭 그것을 갖다 준 사람이 불행하다고 볼 수 없고, 받은 사람이 꼭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이다. 하지만 당첨되는 것에 모든 목표를 걸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안타까운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잘 알고 여실히 믿고 실천해서 그렇게 재물로서 복을 지어야 한다.
그리고 또 사람은 건강하고,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것이 재물로서 할 수 있는 것인데 그것만 갖고는 절대 못산다. 사람 속에서 성장하고 사람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으로 사랑받는 이것이 아니면 죽는다.
인복(人福 )이라는 것이 정말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다 인정 못 받아서 병이 생기는 것이다. [왜,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가?] 라고 생각한다. 전부 그 감정 속으로 들어가면 병들어 있는데, 인정 못 받아서 병든 것이다.
노인들도 마찬가지다. 노인이 요즘 인정을 잘 받지 못하고 있다. 큰 문제다. 옛날에는 노인의 값이 엄청나게 잘나갔는데, 요즘은 제값을 받지 못한다. 노인이 제값 받지 못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 문제가 보통이 아니다.
부모는 핵가족에서 제 육위()의 인생이다. 여섯 번째 지위에 올라간다. 이것이 무엇인가? 삼인(三人) 가족(家族)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얹혀살게 되면, 그 첫 번째 지위가 며느리, 두 번째 지위가 손자, 그 세 번째 지위가 누구겠습니까? 아들? 아니다. 강아지다. 그래서 핵가족에서 늘 그 며느리, 아이 엄마하고, 손자, 강아지하고 세 명만 사는 것이다.
그 다음 네 번째 지위가 낮에는 매일같이 밖에 나가서 일하고 밤마다 돌아오는 아들, 남편이다. 다섯 번째 지위가 낮에 와서 가끔 일해 주는 파출부 아줌마, 여섯 번째 지위가 아무것도 할 일도 없고, 권한도 없고, 능력도 없는 시아버지나 시어머니가 제 육위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거짓말 같은가? 핵가족에서 노인들의 역할이 없다. 역할이 없으니까. 지위가 없는 것이다. 강아지보다 못하고, 파출부보다도 못하다. 이렇게 되어서 어떻게 노인이 행복하겠습니까? 문제다. 그러니까. 인정을 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
이러한 현실을 어르신들이 잘 이해를 해서 자기의미를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팔자타령하고, 세상타령해 보아도 소용없다. 그래서 [왜, 나를 않알아 주느냐?],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가?] 상당히 중요하다.
모든 남성들을 조사해 보면, [왜,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가?]에서 남자의 속병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인정받지 못하면 남자는 아주 죽는다. 그래서 항상 [대단하다]고, 처음에는 거짓말로 자꾸 하다보면, 나중에는 진짜 그렇게 된다.
모든 여자들을 조사해 보니까. [왜,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가?],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하는 데서 모든 속병이 다 생긴다는 것이다. 거짓말이라도 다리니 외우듯이 [사랑한다 ...], [대단하다 ...]이렇게 하면 말처럼 된다는 것이다.
남편한테, 아들한테는 [대단하다]하고 매일 그렇게 말하고, 부인에게 딸에게 [사랑한다]고 하면 정말 사랑받을 일을 하게 되고, 인정받을 일을 하게 된다. 그런 것이 바로 복을 짓는 것이다.
내가 인정한 만큼, 인정을 받고, 내가 사랑한 만큼 사랑을 받든다. 이것이 닦는 것이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것이 팔자에 의해 내가 인정 못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업을 잘못지어서 인정 못받는다.
얼굴 잘못 태어났다고, 사랑 못받는다고 자꾸 수술만 하면 않된다. 같이 살다보면 얼굴이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모른다고 한다. 가끔 만나야 얼굴이 보이지, 늘 같이 자고, 같이 밥먹다 보면 얼굴이 않보인다고 한다.
생활을 고칠 생각은 않하고 얼굴만 뜯어 고칠 생각만 하면 가끔 만나는 사람에게는 효력이 있다. 늘상 만나는데 어떻게 효력이 있겠는가? 마비가 되어서 잘 모른다.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닦는 것, 그것이 신행(信行)이다. 복을 닦고, 또 사람을 인정하고, 사랑하고, 내 건강을 닦고 그렇게 한다. 그 다음에는 마음을 닦는 것이다. 이 마음은 살아 있을 때는 마음이라고 하고, 죽으면 영혼이 된다.
마음을 닦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째는 내가 사람과 물질에 하는 것을 작은데, 너무 많이 기대를 한다. 이것을 집착이라고 한다. 집착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에 너무 의지하고, 사람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좋은 물건이 있으면 그것을 꼭 갖고 싶고, 소유하고 싶고, 사람도 좋은 사람 있으면 그렇게 좋아하고 싶고, 사랑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근심 걱정이라고 하는 것은 물질이나 사람에게 자꾸 끌리고, 매이고, 집착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집착을 줄이면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물질이라는 것도 조금 모자라면 모자라는데로 쓰면 되고, 사람도 나를 설사 사랑을 않해주고 인정을 않해주더라도 내가 잘하다가 보면 나중에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당장 받을려고, 너무 성급하게 집착을 하다보면, 점점 더 미워진다. 애증에서 조금씩 조금씩 줄여 가야 한다. 좋아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너무 지나치게 싫어하니까. 거기에서 문제가 생기고 근심이 있는 것이다.
내가 사람과 물질에 너무 지나치게 집착을 하는데서 고통이 오니까. 그 애증심을 조금씩 조금씩 줄여 가는 것이다. 중요한 신행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또 마음을 닦는 것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내 수양이 되는 것이다. 자기를 절제하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가 없다.
보통 마음을 닦는다고 하면, 참선을 생각하고, 참선한다고 하면, 딱 몸부터 고친다. 그러나 그것은 몸을 바로 잡는 것이지, 마음 닦는 것이 아니다. 체조나 운동, 스트레칭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허리부터 세우고 눈부터 딱 감는다. 그것은 허리 세우고 눈감는 것이지, 마음 닦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러면 몸을 벌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 마음 닦는 것은 사람을 보고, 사물을 보더라도 거기에 미운 마음과 집착하는 마음을 적게 일으키면, 그것이 마음을 닦는 것이다.
미움과 사랑에서 마음이 흔들려서 마음이 괴로운 것이다. 눈을 감고 않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더라도 그 미움과 사랑의 마음을 조금 적게 일으키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을 적게 일으키면 그것이 마음을 닦는 것이다.
천 사람 만 사람을 보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에 빠지지 않으면 편안한 것이다. 부처님을 보면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사람 않볼려고 매일 눈감고 계시는 것은 아니다. 매일 눈뜨고 다니셨다.
아무리 많은 사람을 봐도 볼 때마다 해탈이다. 해탈이 무엇인가? 눈을 감아서 해탈이 아니고,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으니까. 그것이 해탈이다.
좋은 경치를 않봐야 내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하면 않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초심자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런데 마음 수양이 어느 정도 되면, 많은 것을 보더라도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가 되면 그게 마음 닦는 것이다.
단풍이 흐느러지게 좋을 때인데, 오대산 중대 보궁에서 보면 대단히 좋은 정경이다. 그런데 어떤 분이 그곳에 와서 눈 딱 감고 허리 세우고 참선하다고 앉아 있었다. 참 딱해 보였다. 눈 감고 앉아 있을려면 자기 집에 앉아 있지, 왜 오대산까지 오는가? 그렇지 않는가?
눈감고 않보는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보더라도 미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이 마음을 닦는 수행이다. 그런데 자꾸 혼동을 한다. 아주 중요한 문제다.
상대편의 마음을 조금 편안하게 해주는 그것이 마음을 닦는 것이다. 상대편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면 그것은 마음을 잘못 닦는 것이다. 말을 해도 내 입장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편을 먼저 생각해서 편안함을 줄 수 있도록 이야기 하면, 그게 마음을 아주 잘 닦는 것이 된다.
조주록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조주 스님에게 가서 물었다.
[지옥은 누가 갑니까?]
[내가 가지!]
[스님같이 대단한 도인이 왜 갑니까?]
[내가 지옥을 가야 그대를 만날 것이 아닌가?]
이게 얼마나 멋진 이야기 입니까? 결론은 [네가 지옥은 간다]는 말이다. 그런데 [네가 지옥간다], [지옥에 갈 사람은 너다] 이렇게 말하면 얼마나 상처가 됩니까? 그래서 [내가 가지!]라고 하였다. [지옥에 가는 주인공은 너지만 내가 가야 너를 만날 수 있지 않느냐?], [너를 만나기 위해 내가 지옥에 간다] 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옥 가는 주인공은 그 사람이다. 이렇게 상대편에 대한 배려, 아량이 바로 마음 닦는 방편이다.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덕(德)을 닦는 것이다. 덕(德)을 닦는 것은 무엇인가? 상대편을 자꾸 북돋아서 그 사람이 좋은 일 하는 것, 그것이 덕(德)을 닦는 길이다.
사람은 북돋아 주어야 한다. 능력이 있기는 있는데, 쓰지를 못한다. 지금 능력만 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를 보아서 자꾸 복돋아서 이런 일도 해보고, 저런 일도 해보고,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격려도 하고 칭찬도 하고 그렇게 해서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고,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그것이 덕(德)을 닦는 길이다.
그렇게 자꾸 하면 그것이 바로 신행(信行)이다. 믿고 행하는 것이다. 사람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능력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눈으로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내세도 물론 그렇게 된다고 하지만 내세까지 기다리기만 하고 있으면 않된다. 그래서 일생성불(一生成佛), 대심범부(大心凡夫) 범부는 범부인데, 큰 마음을 갖게하는 것이 불교다.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금생에 깨달음을 얻은 후에 해탈하라고 했지, 내생에 해탈하라고 하진 않았다. 우리는 귀(耳)를 가지고 우주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우리의 눈을 가지고 삶과 죽음이 없는 오묘한 이치를 볼 수가 있다.
그리고 당장 우리가 행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걱정, 근심을 않하면 그것이 해탈(解脫)이고, 그것이 행복(幸福)인데, 사람들은 업(業)에 자꾸 이끌려서 좋아하고 미워하는 애증(愛憎)에 끌리고 끌리고 자꾸 끌려서 그것을 실행을 못한다.
그래서 바로 행복할 수 있는 힘이 있는데,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 오래 오래 하면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했듯이 닦고 또 닦고, 하고 또 하고, 실행하고 또 실행하면, 저절로 되는 것이지, 기다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닦는 것 중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이 하지는 않으면서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다. 깨달음을 기다리면서 닦는 것은 않된다.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고 하고 또 하고, 닦고 또 닦고 그러면 자연히 된다.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수행의 묘법이다.
기다리지 말고 끝임없이 하라. 그러면 그것이 신행이다. 우리는 짧은 인생에 불법을 만났다. 신심을 잘 간직하고 잘 닦아서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 종범스님
수보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haha723/14000376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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