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타스님 자경문 - 시작하는 마음. 제 1 강
初發心自警文(초발심자경문)이라고 할 때는 初心ㆍ發心ㆍ自警文. 세 가지라는 뜻이고, 초발심자경문이라는 것은 책 제목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誡初心學人文(계초심학인문)이라는 것이 한권입니다.
發心修行章(발심수행장)이라는 것이 둘째 권이고요.
야운비구의 자경문이라는 것이 십부경이라고도 하고 셋째 권입니다.
세 권을 한데 묶어서 초발심자경문이라고 하는 겁니다. 시대적으로도 다르고 분량도 다르고 완전히 다른 책입니다. 책 세 권을 한데 묶어놓은 겁니다. 계초심학인문은 보조스님 글이고,
발심수행장은 원효대사의 신라 때이고.
자경문은 원효대사 때라고도 하고 나옹스님 때라고도 하고요.
그것은 야운비구라는 이의 정체가 분명치 않으니까 그런 겁니다.
지금 하는 것은 계초심학인문을 하는 겁니다.
誡初心學人文 = 초심학인을 경계하는 글이라는 말입니다.
그 경계할 誡자가 말로 경계하는 것이니까 말씀 言자가 붙었거든요.
말로 경계할 誡. 그것이 상형문자로 어떤 모양을 두고서 한 것입니다.
말씀 言변에 경계 戒한 誡자가 밑에 말뚝을 두 개 박고 위에 간짓댕이를 하니까 떡 하니 바리케이트가 됩니다. 울타리가 되지요.
그 위에는 창 戈(과)자를 해서 떡 버티니까 울타리를 해놓고,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창을 들고 섰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線을 잘 지키라는 말이지요.
접근하면 발포한다는 그 미군부대처럼 이 선을 넘어가지도 말고, 넘어오지도 말고 이 선을 단단히 지키라는 것이 경계할 誡자인데, 그 경계할 誡자가 말씀 言변이 붙었기 때문에 말로 경계할 誡자입니다.
初心學人文이라고 할 적에는 初發心이라는 말이 처음 발심했다는 말인데, 그 처음 初자 글자도 옷 衣=衤변에 칼刀자를 했기 때문에 옷을 만들 때는 제일 먼저 칼을 어떻게 대느냐에 따라서 속옷도 되고 겉옷도 되고 아래옷도 되고 웃옷도 됩니다. 옷 衤변에 칼刀. 칼은 가위나 같은 거니까요. 어떻게 마름질을 했느냐에 따라서 옷 모양이 되는 거니까요.
처음 初라는 글자도 그런 뜻이다 이 말입니다.
마음 心자 역시 심장을 표시한 겁니다. 양쪽의 점은 폐장이고 밑에 지라이고 마음 心자는 심장을 표시한 겁니다. 마음 心자 글자 모양이 하트 모양입니다.
初心 = 처음 發心했다는 말이지요. 처음 발심만 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발심을 해서 불법을 배우려고 하는 사람. 아이들이 배우는 것이니까 밑에 아들 子자아닙니까? 글자가 위에는 가둬놓고 배운다는 뜻입니다. 절구 학 자인데 아이들을 가둬놓고 그 틀에 맞추어서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이 배운다는 뜻으로 배울 학자라고 합니다.
사람 人자는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 라는 말이 있지요?
갈대가 서로 기대고 서있는 것처럼. 혼자 서있는 것이 아니고 서로 기대고 서있는 것이 갈대거든요. 갈대가 혼자 있으면 들어 눠야 되거든요.
버티어 서지를 못하는데 서는 것은 다른 갈대하고 서로 기대고 버티기 때문에 서있는 것이지요. 사람이 두 다리를 벌리고 있으면 사람 人자 모습이거든요.
글월 文자도 역시 그런 겁니다. 뚜껑을 떡 덮어서 이런 것도 배우고 저런 것도 배우고, 左로 가는 것도 배우고 右로 가는 것도 배운다는 말입니다. 글월 文자가 그런 뜻입니다. 初心學人을 경계하는 글이더라. 그것이 제목이고, 誡初心學人文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만들어진 것이냐고 할 것 같으면 보조국사에 의해서 송광사에서 만들어진 글로서 송광사의 많은 대중을, 300명 이상 되는 많은 대중들을 거느리기 위해서 淸規(청규)를 만든 겁니다. 규율을 만든 겁니다. 본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律藏(율장)이 있지만, 율장은 호한하고, 넓고 큰 것이고요. 청규는 그것을 간추려가지고 그때 그 시대에 그 사중에 맞도록, 그 형편에 맞도록 규율을 짠 것이 “청규다” 이 말입니다.
맑고 깨끗한 규율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계초심학인문이라고 하지만 일명 청규의 부분에 있어서는 “송광청규”라고 그래요. 송광사의 청규라고... 우리나라에서 “청규”라고 하는 것은 이것이 제일 처음이고,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지요. “송광청규” 가요. 간단하고 명료한 글들입니다.
밑에 저술한 사람의 이름이 있는데 海東沙門 牧牛子가 述(해동사문 목우자 술)하노라. 海東沙門. 바다 동쪽이라고 하는 것은 서해 바다를 말하는 것이고, 중국에서 볼 때 海東이라고 하면 우리 한국을 가리키고 옛날에는 “東邦小國(동방소국)이다.” 동방에 있는 조그만 나라다. ←이런 소리도 썼고, 바다 동쪽이라고 할 때는, 중국에서 한국을 말할 때 海東이라고 그랬고, 신라나 고려 한국 스님들이 중국을 가 가지고 “어디서 왔느냐?”
“해동에서 왔습니다.” ←이렇게 자기 있는 곳을, 한국을 해동이라고 옛날부터 불러 왔다고 합니다.
沙門(사문)이라고 하는 말은 범어 = 산스크리트어인데요. “사마나” 그렇지요. 모래 沙자 문 門자. 글자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음역이니까요.
사문이라고 하는 말은 번역을 하면 근식이라. 부지런할 勤자 쉴 息자.
부지런히 하고 쉰다는 말이 되겠지만 勤修定慧(근수정혜)하고 息諸煩惱(식제번뇌)라. 부지런하게 선정과 지혜를 닦아가면서 모든 번뇌를 쉬어라.
번뇌망상을 쉬고 부지런히 선정과 지혜를 닦아서 上求菩堤下化衆生(상구보리하화중생)하는, 위로 보리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이것이 사문이다 이겁니다. 沙門이라는 해석이 구체적으로 많이 있지만, 중노릇 잘하는 사람. 중이라는 뜻을 사문이라고 그래요. 중으로서는 그것이 중노릇이니까요. 上求菩堤下化衆生. 부지런히 모든 정혜를 닦고 모든 번뇌망상을 쉬고서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이, 그것이 沙門. 중이니까요. 중을 “沙門 = 사마나” 다시 말하자면 바꿔 말해서 求道者(구도자)다. 도를 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요.
牧牛子(목우자)라고 하는 말은 “소 먹이는 자다.” “마음의 소를 먹이는 사람이다.” 보조국사의 자기 호입니다. 보조국사가 자기의 표호를 牧牛子라고 했거든요. 다시 말해서 언제든지 “마음 다스리는 사람이다.” ←이런 뜻이지요. 소를 마음에 비유해서 소 찾는 글 10가지가 있지요.
소를 찾으러 나가서, 소 발자취를 보고, 그 다음에 소를 보고, 소를 찾아서 소를 길 들여서 끌고 가는 얘기가 있잖아요. 尋牛圖(심우도)라는... 어쨌든 간에 소를 먹이는 자다. 자기의 호를 牧牛子라고 했거든요.
述(술)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자기 말이 아니고, 부처님 말씀에 의지해서, 부처님의 율장에 의지해서 부처님의 율장에 있는 말씀을 참작해서 현 시대에 맞춰서 지은 글이기 때문에 지을 述자를 쓰지 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著作(저작)이라고 할 때는, 본래 없던 것을 자기가 만들어 낼 때는 作이고요. 述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지금 형편에 따라서 논술한다. 그래서 술할 述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스님들이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 “나는 述이라고 하지 作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랬어요.
이것은 자기를 조금 겸손해서 述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말하자면 海東沙門 牧牛子가 作이라고 해도 안 될 것은 아니지요. 그렇지만 述而不作이라고 해서 作이라고 하지 않고 述이라고 한다 옛날 사람들은 그랬습니다.
논술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보조스님에 대해서 보조스님이 어떤 분이냐? 목우자가 어떤 분이냐? 오늘은 보조스님 얘기를, 좀 덜 알려진 얘기를 해야 되겠습니다.
“보조스님” 할 것 같으면 우리나라 조계종의 宗主(종주)라고도 하고, 또 중흥조라고도 하는데요. 그 法脈(법맥)을 따져서 왈가왈부 하는 얘기가 많이 있지만, 고려시대에 고승들이 많이 있고 물론 신라시대에도 많이 있지만, 그 고승들의 일관된 저술 들이 거의 다 없어져 버리고, 보조스님 저술이 거의가 다 그냥 그대로 소롯이 남아 있거든요. 보조스님의 저술이 定慧結社文(정혜결사문)ㆍ修心訣(수심결)ㆍ眞心直說(진심직설)ㆍ원돈성불론ㆍ간화결의론ㆍ법집별행록절요. 이런 것들이 그냥 소롯이 남아 있습니다. 이 외에도 많아요. 보조스님 저술은 거의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보조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안전하고 보조스님의 법문이 구구절절이 사람의 근기에 맞추어서 말씀하시어서, “참~ 지당하신 말씀이다.” 이렇게 모두 감복을 해서 현재 우리 한국불교의 바탕이 보조스님의 법어가 무슨 所依經典(소의경전)처럼 바탕이 되어 내려왔습니다. 다른 스님들의 저술들도 많았는데 다 없어지고, 보조스님 저술만이 소롯이 남아 있는 것이 특이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보조스님의 모든 행장을 말할 것 같으면 모두 자세히 적혀져 있는 책들이 많고, 보조사상에 대해서 논술들도 많고 하니까 보조스님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면 그런 책들을 참작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연대라든지 그런 것을 다 분명히 알 수 있는데요. 보조스님 얘기를 대충 한다면 지금부터(이 강설은 2007년전의 녹음입니다.) 884년 전, 1158년이라고 그랬어요. 고려 의종 12년에 황해도 서흥이라는 곳에서 탄생을 하셔서 16세에 출가하셨다고 그러는데, 16세에 출가했다고도 하고 또 여덟살에 출가했다고도 그래요.
그런데 그 碑文(비문)에 볼 것 같으면 “年甫(연보) 8세에” 그랬거든요. 연보 8세에 출가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甫자를 뭐라고 풀이할 것인지 그 甫자 풀이에 따라서... 甫자 풀이가 분명하지 않아요. 甫자 풀이가 분명하지 않으니까 ‘젖 떨어진 여덟살’ 이런 식으로... 그러니까 그 甫자가 氵+甫하면 나루 浦자가 되고, 口+甫하면 젖 먹일 哺자가 되거든요. 포유동물 그러지요. 포유동물이라고 할 수도 있지요. ‘젖 떨어지고 난 뒤 여덟살에’ 이런 식으로 보려고 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덟살에 출가한 것이 아니고, 뒤에 법납이 36세이고 53세에 돌아가셨다고 하는 것을 치면 16세라야 맞거든요. 그래서 그 甫자가 誤(오)자다. 두 再(재)자다. 약간 비슷하잖아요. 再자를 甫자라고 써진 것이 아니냐? ←이렇게 학자들이 보는 겁니다. 어쨌든 열여섯 살에 출가했다고 하는 것이 신빙성이 더 있는 편이지요. 여덟 살이 되었든 열여섯 살이 되었든 그것은 상관없는 것이지만, 또 한쪽에서는 몸이 약해서 여덟 살 부터 절에 다니기 시작해서 머리를 깎은 것은 열여섯 살에 깎은 것이 아니냐? ←이렇게 보는 학자들도 있다고 그랬어요. 아무튼 간에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요.
16세에 종휘 선사라는 스님한테 출가를 해서... 그 때는 승과라는 제도가 있었어요. 승과라는 것이 요새 고등고시처럼 고시 제도가 있었어요. 스님들 가운데 그 계급이 아홉 가지 계급이 있었는데요. 대선법계. 그 다음에 중덕법계. 그 다음에 대덕법계. 그 다음에 대사법계. 그 다음에 삼중대사.
그 다음에 총석. 그 다음에 총섭. 이런 아홉 가지 계급이 있었는데 제일 먼저 대선법계에 합격하면 그것을 승선이라고 그래요. 승을 뽑는다는 말입니다. 승선에 합격되어 2~3년 되면 자동적으로 중덕으로 올라가고 대덕으로 올라갑니다.
세상에서도 초시에 합격하면 다음에 진사. 그 다음에 뭐 뭐 이렇게 올라가잖아요. 알성급제까지도 있지만요. 그것이 말하자면 맨 처음 출세의 입문이 대선법계입니다. 그 당시에 고려불교는 귀족불교거든요. 아들이 둘 같으면 하나는 으레 중 만드는 것이 풍습이고 아들이 셋 넷 같으면 둘은 중 만드는 것이 풍습이어서 국민의 3분의 1이 중이었대요.
지금 타일랜드ㆍ태국 같은데 가면 중노릇을 한번 하지 아니 했으면 사람 취급을 못 받아요. 중노릇을 한번 한 사람이라야... 중노릇을 얼마씩 했느냐에 따라서 그 대접을 받게 돼 있어요. 국왕도 왕 노릇 하려면 태자 때 일단 중이 되어야 됩니다. 최소한도 3개월 이상 맨발 벗고 바루 떼 들고 걸식하고 중노릇을 해야만 됩니다.
요즘 우리 한국의 처자들은 신랑감 고르려면 그 사람 무슨 대학 나왔는가? 서울대학을 제일로 치지만 태국에서는 그 사람 스님노릇은 얼마나 했는가? 스님노릇 아니 했으면 장가 못갑니다. 태국에서는 그렇다고요.
택시 기사들도 빨리 돈 좀 벌어서 우리 엄마 살도록 다 해놓고. 중 될까 했는데 큰일 났다고 아주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군대 한번 갔다 와야 하는 것처럼 거의 의무적으로 중이 한번 되어야만 그야말로 사람대접을 받게 되어 있어요. 스님노릇을 한 10년 했다든지 20년 했다든지 하면 스님들도 계급이 쫙 올라가지요. 마하라는 계급도 있고, 그 위에 쭉 올라가면 프라왕눈이. 프라기피쏘고니. 최고의 계급이 쏜대기라는 계급입니다.
쏜대기라고 하는 계급이 여섯 사람이 있어요. 우리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대종사. 그 위에 상카라아자라는 것이 있거든요.
“상카라아자” 라면 승왕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종종스님이 상카라아자지요. “상카” 는 승이라는 말이고
“라아자” 는 왕이라는 뜻이거든요. 상카라아자 = 승왕. 그러니까 태국에는 왕이 둘입니다. 인왕이 있고 승왕이 있지요. 영국에서 1년에 1~2대밖에 생산 안 한다는 로스로이가 거기에 2대 있는데, 하나는 인왕이 타고 하나는 승왕이 탑니다. 그 차가 나선다고 하면 으레 앞뒤로 헌병차들이 쫘~~ㄱ 에스코드 하지요. 상카라아자가 돌아가시고 나면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상카라아자가 되거든요. 또 밑의 계급 한 사람이 자동적으로 올라오게 돼 있어요.
상카라아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쏜대기 권위가 자기 방에 앉아서 전화로 “교통부 장관 불러라.” 하면 자기 바쁜 볼일 보다가도 쏜대기가 오라면 번개같이 가야 돼요. 장관들이 대통령이 오라는데 “지금 바쁘니까 있다가 갈께요.” 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총알같이 쫓아가야 될 것 아닙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쏜대기가 오라면 언제든지 쫓아가서 뜰팡 밑에 무릎 꿇고 합장하고 있거든요. “여름방학을 했는데 우리학교에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한국. 인도학생이 5명이 있는데 5명의 비행기표를 좀 가지고 오지”
“예 예, 알겠습니다.” 즉시에, 다른 사람 것 취소하고서라도 갖다 바쳐야 됩니다. 그 정도 권위가 있습니다. 태국에는 그렇게 출가한 스님으로서 그 권위가 존중되기를... 고려시대에도 아마 그랬던가 봐요.
출가스님들의 권위는 지금 현재로서는 태국이 제일이고, 在家(재가).
세속화된 불교로서는 현재 일본이 제일이고 그렇지요. 일본과 태국은 제일 반비례지요. 대조적이지요. 일본도 신깐센을 타고 야마구찌에서 동경까지 가면서 보면 동네 동네마다 가운데 높은 기와집이 있거든요. 그것은 절입니다. 그 동네의 촌장이 바로 스님입니다. 요즘 여기는 이장 반장을 따로 뽑고 지지고 하지만, 거기는 그런 것도 없어요. 일본은 그래요.
일본은 으레 그 절 스님이 그 동네를 다스리는 촌장입니다.
염화실 카페 http://cafe.daum.net/yumhwasil/8ANP/43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지혜의 공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타스님 자경문 - 시작하는 마음. 제 3 강 (0) | 2019.04.07 |
---|---|
일타스님 자경문 - 시작하는 마음. 제 2 강 (0) | 2019.04.07 |
하늘의 중심에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 있는 자미원(紫微垣)이 있고, (0) | 2019.04.07 |
보살 십지는 열 가지 보살의 공부 단계입니다 (0) | 2019.04.07 |
불이중도의 생활 실천법 - 법상스님 (0) | 2019.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