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乘起信論
馬鳴菩薩造
원순 역
[서분]
(논-1)
온 누리에 가득하신 우리 부처님
뛰어난 업 온갖 지혜 두루 갖추고
걸림없이 자유 자재 몸을 나토며
중생들을 구하시는 자비로운 분
그 모습은 법의 성품 진여의 바다
그 안에는 무량공덕 갖추고 있어
참 진리를 여실하게 닦으신 이여
거룩하신 불법승께 귀의합니다.
(논-2)
중생들의 온갖 의심 풀리게 하고
집착으로 생긴 견해 버리게 하며
참 대승의 바른 믿음 일깨워 주어
부처님 씨 이어 가기 바라옵기에.
[정종분]
(논-3)
논에서 "어떤 법이 대승에 대한 믿음의 근본을 일으킬 수 있다"고 하니, 이 때문에 반드시 이 내용을 말해야 한다.
(논-4)
이 내용은 다섯 부분으로 설명하니 어떤 것들이 그 다섯인가? 첫째는 '논을 쓰게 된 인연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부분'이요, 둘째는 '대승의 법(法)과 의(義)는 무슨 내용인가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부분'이요, 셋째는 '법(法)과 의(義)를 자세히 풀이하는 부분'이요, 넷째는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부분'이요, 다섯째는 '수행의 이익을 보여 주어 공부할 것을 권하는 부분'이다.
(논-5)
처음은 논을 쓰게 된 인연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논-6)
물음: 무슨 인연으로 이 논을 만듭니까?
대답: 이 인연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어떠한 것들이 그 여덟인가?
첫째, 인연을 뭉뚱그려 한마디로 말하면 중생들이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궁극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 것이니 세간의 대가와 명예와 존경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둘째, 여래의 근본 뜻을 풀이하여 중생들이 모두 그 뜻을 바르게 알아 그릇됨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셋째, 마음의 좋은 뿌리가 성숙한 중생들이 대승법을 받아들여 대승법에 대한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넷째, 마음의 좋은 뿌리가 적은 중생들이 믿음을 닦아 익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다섯째, 중생들이 방편을 배워 악업을 녹이고 그 마음을 잘 보호하여 어리석음과 잘난 체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삿되고 나쁜 악업의 그물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섯째, 중생들이 지행(止行)과 관행(觀行)을 닦아 익혀 범부와 이승(二乘)의 허물을 고치도록 바라는 것이다.
일곱째, 중생들이 염불에 전념하는 방편을 배워 부처님 앞에 새롭게 태어나 굳은 믿음에서 물러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덟째, 중생들에게 수행의 이익을 보여 주어 수행을 하도록 권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 논을 쓰게 된 인연이다.
(논-7)
물음 : 경 가운데 이 법을 다 갖추고 있는데 다시 설명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대답: 경 가운데 이 법이 있더라도 중생의 마음과 행동이 다르고 법을 받아들여 이해하는 인연이 다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는 중생도 근기가 뛰어났고 법을 말씀하시는 분의 능력도 뛰어났기에 오롯한 소리로 한 번 말함에 여러 계층의 중생들이 똑같이 이해하여 논이 필요치 않았다.
그런데 여래께서 입멸하신 뒤에는 혼자 힘으로 불법을 많이 들어야 이해하는 중생이 있을 수 있고, 혼자 힘으로 불법을 적게 듣고도 많이 아는 중생이 있을 수 있으며, 스스로 불법을 알 수 있는 힘이 없기에 많은 논의 도움이 있어야 알 수 있는 중생도 있을 수 있으며, 또한 분량이 많은 논은 번거롭게 여기고 여러 가지 뜻을 간단하게 정리한 것을 좋아하여 적은 글에 많은 뜻이 담겨 있더라도 이해할 수 있는 중생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보기들과 같이 이 논은 여래의 깊고 넓은 법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치를 담으려고 하기에 이 논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논-8)
이미 '논을 쓰게 된 인연이 무엇인가'를 말했고, 이어서 '대승의 법(法)과 의(義)는 무슨 내용인가'를 말하겠다. 대승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는 법(法)이요, 다른 하나는 의(義)이다.
법(法)이란 중생심을 말한다. 이 마음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법을 담고 있으므로 대승의 뜻을 드러내 보인다. 왜냐하면 이 마음에 있는 진여의 모습이 곧 대승의 체(體)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에 있는 생멸인연의 모습이 그 자체의 상(相)과 용(用)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의(義)에도 세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 체대(體大)이니 모든 법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상대(相對)이니 여래장이 여래의 성품에서 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용대(用大)이니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좋은 인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며, 모든 부처님이 본디 쓰는 것이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이 법을 써서 모두 여래의 경지에 다다르기 때문이다.
(논-9)
이미 '대승의 법(法)과 의(義)는 무슨 내용인가'를 설명했고, 이어서 '법(法)과 의(義)를 자세히 풀이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이 부분에는 세 단락이 있는데 무엇이 셋인가?
첫 번째는 '올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삿된 집착을 다스린다는 것'이며, 세 번째는 '도 닦을 마음을 내어 공부하는 모습을 분별한다는 것'이다.
(논-10)
'올바른 뜻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 법으로 말미암아 두 종류의 길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마음에 있는 진여의 길이며, 또 하나는 마음에 있는 생멸의 길이다.
이 두 길이 모두 저마다 모든 법을 거두어들이니 이 이치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 이 이치는 두 길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논-11)
마음에 있는 진여는 곧 하나의 법계로서 '전체 큰 모습으로 있는 법에 들어가는 길의 바탕'이다. 이른바 마음의 성품이 불생불멸이니 모든 법은 오직 망념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을 뿐이다. 망념을 여읜다면 경계로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없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이 본디부터 말에 있는 모습과 이름에 있는 모습과 마음이 인연한 모습을 여의어서, 마침내 평등하여 변할 것이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어 오직 한마음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진여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든 말은 임시로 세워진 개념이어서 실체가 없이 다만 망념을 따르므로 그 실체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12)
진여란 또한 어떤 모습이 없으니 이는 최선을 다한 표현으로 말에 기대어 말을 버린 것을 말한다. 이 진여의 바탕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없으니 모든 법이 다 참되기 때문이며, 또한 세울 수도 없으니 모든 법이 다 똑같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말하거나 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진여라고 한다.
(논-13)
물음 : 이런 뜻이라면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따라가야 진여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대답: 모든 법을 말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이나 말할 법이 없고, 생각하더라도 생각하는 사람이나 생각할 법이 없다는 것을 알면 이를 수순이라 하고, 만약 망념을 여읜다면 '진여 그 자리에 들어갔다'고 한다.
(논-14)
다시 이 진여는 말로 분별하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참으로 진실한 공(空)이니 마침내 진실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참으로 진실한 불공(不空)이니 그 자체에 번뇌가 사라진 여래의 성품에서 나오는 공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논-15)
공(空)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는 본디부터 오염된 모든 법과 서로 붙어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모든 법의 차별된 모습을 벗어나 있는 것을 말하니 진여에는 헛된 망념이 없기 때문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진여의 자성은 모습이 있는 것도 아니요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아니요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며, 유(有)와 무(無)를 다 함께 갖춘 모습도 아니다. 또한 같은 모습도 아니요 다른 모습도 아니며, 비일상(非一相)도 아니요 비이상(非異相)도 아니며, 같거나 다른 모습을 다 함께 갖춘 모습도 아니다.
나아가 전체 입장에서 말하면 모든 중생에게 기대었기에 헛된 마음으로 생각마다 분별하는 것은 모두 진여와 서로 붙어 어울리지 않으므로 공(空)이라도 한다.
만약 헛된 마음을 벗어나면 실로 공(空)이라도 할 것도 없기 때문이다.
(논-16)
불공(不空)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법의 바탕이 공(空)이어서 망념이 없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곧 진심이니 진심은 늘 변하지 않고 깨끗한 법이 가득 차 있기에 불공이라도 한다. 또한 취할 수 있는 어떤 모습도 없으니 망념의 경계를 벗어나 오직 이 진심을 증득해야만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논-17)
마음에 있는 생멸은 여래장에 기댄다. 그러므로 생멸하는 마음이 있다. 말하자면 불생불멸이 생멸과 화합하여 같은 것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닌 것으로 이를 일러 아리야식이라고 한다.
(논-18)
이 식(識)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므로 모든 법을 거두고 모든 법을 낼 수 있다.
(논-19)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각(覺)의 뜻이요 또 하나는 불각(不覺)의 뜻이다.
(논-20)
각(覺)의 뜻은 마음의 바탕이 망념을 여읜 것을 말한다. 망념을 여읜 모습은 허공계와 같아 어떤 곳이라도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는 법계와 똑같은 모습이니, 곧 여래의 평등한 법신이다. 이 법신으로 말미암아 본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본각의 뜻은 시각(始覺)의 뜻에 맞서서 말하니 시각이 곧 본각과 같기 때문이다. 시각의 뜻은 본각으로 말미암아 불각이 있고 불각으로 말미암아 시각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논-21)
또 마음의 근원을 깨달았기에 구경각이라고 하고, 마음의 근원을 깨닫지 못했기에 구경각이 아니라고 한다.
(논-22)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범부들은 앞생각이 나쁜 생각을 일으킨 것을 알고 뒷생각을 그칠 수 있기에 이 나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을 범부각(凡夫覺)이라고 해도 이는 불각(不覺)이기 때문이다.
이승의 지혜를 얻은 이나 대승의 가르침에서 처음 공부할 마음을 낸 보살들은 다른 모습인 망념을 깨달아 그 생각에 '번뇌로 달라진 모습'이 없으니, 이 거친 분별로 집착하는 모습을 버렸기 때문에 상사각(相似覺)이라고 한다.
법신보살은 '번뇌로 달라진 모습'이 없다는 경계에 머무는 마음을 깨달아 그 생각에 '나로 바뀌어 머무는 모습'이 없으니, 이 분별하는 거친 망념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수분각(隨分覺)이라고 한다.
보살의 모든 수행을 다 한 이들은 방편을 다 갖추어 한 생각에 맞서 마음이 처음 일어나는 모습을 깨달아 그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망념의 모습'이 없으니, 이 미세한 망념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마음의 참 성품을 볼 수 있고, 그 마음이 늘 이어지니 구경각(究竟覺)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경에서 "중생이 무념(無念)을 볼 수 있다면 부처님의 지혜로 간다"고 말한 것이다.
(논-23)
또 '마음이 일어난다'고 표현하여 마음에는 알 수 있는 처음 모습이 없는데도 처음 모습을 안다고 말한 것은 곧 무념을 말한다. 이 때문에 모든 중생을 각(覺)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중생들은 본디부터 생각마다 이어져 아직 망념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을 시작이 없는 때부터 시작된 무명이라고 한다.
무념을 얻은 자라면 마음의 모습이 생겨나고• 머무르고• 바뀌고• 사라지는 것을 아니 무념은 평등하기 때문이다.
또한 참으로 시각도 없으니 그 까닭은 네 가지 각의 모습이 한꺼번에 같이 있기에 모두 스스로 내세울 것이 없이 본디 평등하여 한결같은 각(覺)이기 때문이다.
(논-24)
다시 본각을 오염된 정도에 따라 분별하면 두 가지 모습이 생기지만 본각과 서로 떨어지지 않는다.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맑은 지혜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다.
'맑은 지혜의 모습'이란 법력의 훈습에 따르고 여실하게 수행하여 온갖 방편을 다 갖추기에 화합식(和合識)을 깨뜨리고 이어지는 망념을 멸하여 법신으로서 순수하고 맑은 지혜를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마음이 분별하는 모든 모습이 다 무명이더라도 무명의 모습이 각(覺)의 성품을 여의지 않으므로 무너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너뜨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는 마치 큰 바다의 물이 바람으로 물결치고 움직일 때에도 물의 모습과 바람의 모습이 서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물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바람이 그치면 움직이는 물결의 모습은 사라지나 축축한 물의 성품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중생의 본디 성품인 깨끗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으로 움직이며 마음과 무명의 모습이 다 형체가 없어 서로 떨어지지 않더라도, 마음은 움직이는 성품이 아니므로 무명이 없어지면 상속하는 마음이 곧 없어지나 참 지혜의 성품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란 맑은 지혜에 따라 뛰어나게 오묘한 온갖 경계를 만드는 것이다. 말하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의 모습은 끊어짐이 없이 늘 중생의 근기에 따라 자연스럽게 서로 붙어 어울리며 온갖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모든 중생들이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논-25)
다시 각(覺)의 바탕의 모습은 네 종류 큰 뜻이 있기에 허공과 같고 맑은 거울과도 같다.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참으로 진실한 공(空)의 거울'이니, 마음의 경계에 나타나는 모든 모습을 멀리 떠나 있기에 나타날 수 있는 어떤 법도 없음을 말한다. 각의 바탕은 각조(覺照)의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因)으로서 중생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울'이니 참으로 진실한 불공(不空)을 말한다. 세간의 모든 경계가 모두 그 가운데 나타나지만 별다른 것이 각에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각의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도 아니며, 각의 바탕은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부서지는 것도 아니어서 늘 한마음에 머무른다. 이는 모든 법이 곧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며 또 오염된 모든 법이 오염시킬 수 없는 곳이니, 지혜의 바탕이 움직이지 않고 어떠한 번뇌도 없이 중생을 훈습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이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난 거울'이니 불공(不空)의 법을 말한다. 이는 번뇌장애와 지혜장애를 벗어나고 생멸과 어울린 모습을 떠나 맑고 깨끗하여 밝기 때문이다.
넷째는 '연(緣)으로서 중생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거울'이니 '법이 두 가지 장애를 벗어난 거울'에 따라 두루 중생의 마음을 비추어 그들이 마음의 좋은 뿌리를 닦게 하는 것을 말한다. 각의 바탕이 중생들의 생각을 따라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논-26)
불각의 뜻은 무엇인가? 진여의 법이 하나라는 사실을 참으로 진실하게 알지 못하기에 불각의 마음이 일어나 망념이 있게 된 것을 말한다.
망념은 자기 모습이 없으나 본각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길을 잃은 사람이 방향에 기대기에 길을 잃었으나 방향에 대한 집착을 여의면 길을 잃음도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다. 각에 기대기에 어리석지만 각의 성품에 대한 집착을 여읜다면 불각이 없다, 불각인 헛된 생각이 있기에 이름과 뜻을 알아 참된 각이라고 설하게 되나, 불각의 마음을 여읜다면 말할 만한 참된 각(覺)의 자기 모습도 없다.
(논-27)
다시 불각으로 말미암아 세 가지 모습이 생기니 불각과 서로 붙어 어울려 다닌다. 무엇이 그 세가지인가?
첫째는 무명인 업의 모습이다. 불각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움직임을 업이라고 하지만 이 사실을 깨달으면 마음이 움직이지를 않는다. 마음이 움직이면 괴로움이 있으니 결과가 원인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능견(能見)의 모습이다. 마음의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볼 수 있기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봄이 없다.
셋째는 경계로 나타난 모습이다. 능견으로 말미암아 헛된 경계가 나타나기에 능견을 떠나면 경계가 없다.
(논-28)
경계로 나타난 모습의 연(緣)이 있기에 다시 여섯 가지 모습이 생기니 무엇이 그 여섯인가?
첫째는 ‘세간에 있는 지혜의 모습’이니 경계로 말미암아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분별하는 마음이 이어지는 모습’이니 세간에 있는 지혜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괴로움과 즐거움이 생기고 그것을 분별하여 망념을 일으키는 것이 서로 맞아떨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집착하는 모습’이니 분별하는 마음이 이어지는 모습으로 말미암아 망념의 경계를 반연하고 괴로움과 즐거움에 머물러 마음이 집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넷째는 ‘실체가 없는 이름을 붙이는 모습’이니 헛된 집착으로 말미암아 실체가 없는 이름을 짓고 말로 나타내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업을 일으키는 모습’이니 실체가 없는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찾고 집착하여 온갖 업을 짓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업에 얽힌 괴로운 모습’이니 업 때문에 그 과보를 받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29)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명이 오염된 모든 법을 낼 수 있으니, 오염된 모든 법이 모두 불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논-30)
다시 각과 불각에는 두 가지 모습이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같은 모습이고, 둘째는 다른 모습이다.
같은 모습이란 비유하면 온갖 모양의 질그릇이 모두 똑같이 미세한 흙가루의 성품과 모습인 것처럼 무루(無漏)와 무명의 온갖 허깨비와 같은 업도 모두 똑같은 진여의 성품과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경에서 이 진여의 뜻에 기대어, ”모든 중생이 본디부터 열반과 깨달음에 늘 들어가 있기에 이는 수행으로 이루어지거나 인연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진여의 성품과 모습은 마침내 얻을 것도 없고 또한 볼 수 있는 빛깔도 없다. 빛깔을 볼 수 있는 것은 오직 오염된 법을 따른 허깨비와 같은 업이 지은 것이기에 ‘지혜의 빛깔로서 불공(不空)’의 성품이 아니다. 참 지혜의 모습은 볼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다른 모습이란 온갖 질그릇의 모습이 다른 것처럼 무루와 무명은 다르다. 이와 같이 무루와 무명은 오염된 법의 허깨비와 같은 차별을 따르고 있고, 그 성품은 오염된 허깨비와 같은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논-31)
다시 생멸의 인연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른바 중생이 마음에 기대어 의(意)와 의식(意識)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논-32)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아리야식에 기대기에 무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논-33)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상태로 한 생각이 일어나 능견(能見)과 능현(能現)으로 나누어 경계를 취하고 망념을 일으켜 이어가기 때문에 ‘의(意)’가 된다고 한다. 이 의(意)에는 다시 다섯 가지 이름이 있으니 무엇이 그 다섯인가.
첫째는 업식(業識)이라고 하니 무명의 힘으로 깨닫지 못한 상태로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전식(轉識)이라고 하니 움직인 마음에 기대어 모든 경계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는 현식(現識)이라고 하니 이른바 모든 경계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밝은 거울이 사물의 모습을 나타내듯 현식도 그러하여 다섯 가지 경계를 상대하면 곧 앞뒤가 없이 나타난다. 이는 모든 삶 속에 있는 인연의 흐름에 따라 저절로 언제나 경계 앞에 있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식(智識)이라고 하니 오염된 법과 맑은 법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상속식(相續識)이라고 하니 망념이 맞아떨어져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과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속에서 지은 좋은 업과 나쁜 업을 잃지 않게 하기 때문이며, 또 현재와 미래에 받을 괴로움과 즐거움의 과보를 어김없이 받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재의 마음으로 하여금 이미 지나간 일을 문득 생각하게 하고, 미래의 일을 각성하지 못하고서 자기도 모르게 헛되이 걱정하게 하니, 이 때문에 삼계는 거짓으로서 오직 마음이 지을 뿐이다.
마음을 여의면 바깥의 여섯 가지 경계가 없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모든 법이 모두 마음에서 일어나 망념으로 생겼기에 모든 분별은 곧 자기 마음을 분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여 얻을 수 있는 어떤 모습도 없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세간의 모든 경계는 모두 중생의 헛된 마음인 무명에 따라 머무를 수 있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은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 얻을 수 있는 어떤 실체도 없으며 오직 헛된 망념일 뿐이다. 마음이 생기면 온갖 법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논-34)
다음에 말한 의식이란 무엇인가. 곧 이 상속식(相續識)이 모든 범부들의 집착이 깊어짐으로 말미암아 ‘나’와 ‘내 것’이라고 헤아리는 온갖 헛된 집착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따라 반연하여 여섯 가지 경계를 분별하는 것을 의식이라고 하며, 분리식이나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이라고도 한다. 이 식은 견애(見愛) 번뇌로 말미암아 번뇌를 더 늘어나게 한다는 뜻에 기대었기 때문이다.
(논-35)
무명 훈습에 따라 일어난 식(識)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성문이나 연각의 지혜로 깨달을 바도 아니다. 이 식은 보살이 처음 바른 믿음을 내고 관챃하는 수행에 따라 법신을 증득하면 조금이나마 알 수 있지만, 보살 구경지에서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직 부처님만 다 아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마음은 본디 자기 성품이 깨끗하고 맑더라도 무명이 있고, 무명에 오염되어 오염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염된 마음이 있더라도 늘 그 성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 뜻은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논-36)
말하자면 마음의 성품은 늘 망념이 없기에 불변이라고 한다.
(논-37)
하나의 법계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지만, 문득 망념이 일어나니 이를 무명이라고 한다.
(논-38)
오염된 마음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여섯인가.
첫 번째는 ‘집착으로서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오염된 마음’이니 성문 연각의 해탈과 믿음이 맞아떨어지는 위치에 기대야 이 마음을 멀리 벗어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끊임없이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오염된 마음’이니, 믿음이 맞아 떨어지는 위치에 기대고 방편을 닦아 익혀야 차츰차츰 버릴 수 있는 것으로서 맑은 마음의 위치를 얻어야 마침내 이 마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분별하는 지혜로서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오염된 마음’이니 절도 있는 아름다운 삶의 위치에 기대어 잘못된 삶을 차츰차츰 벗어나고 결정된 틀이 없는 방편을 쓰는 위치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이 마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네 번째는 ‘드러난 모습으로서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오염된 마음’이니 몸의 활동이 자재하여 거침새가 없는 위치’에 기대야 이 마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능견(能見)으로서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오염된 마음’이니 마음이 자재한 위치에 기대야 이 마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는 ‘근본 업으로서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오염된 마음’이니 보살의 수행이 다 끝나는 경계에 기대어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야 이 마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논-39)
하나의 법계를 알지 못하는 이는 믿음이 맞아떨어지는 위치에서 자기 마음을 살피고 무명을 다스려서 끊는 법을 배워 맑은 마음의 경계에 들어가야 자기 능력에 따라 무명을 벗어날 수 있으며, 나아가 여래의 경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모든 무명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논-40)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마음’이라고 말한 뜻은 ‘마음[心王]’과 ‘마음의 작용[念法]’은 다르지만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의 차별에 따라 아는 모습과 연(緣)의 모습이 같기 때문이다.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라고 말한 뜻은 마음 자체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언제나 다름이 없지만 아는 모습과 연(緣)의 모습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논-41)
또 오염된 마음이란 뜻은 ‘번뇌 걸림돌’이라고 하니 진여의 근본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며, 무명이란 뜻은 ‘지혜 걸림돌’이라고 하니 세간에서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지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염된 마음에 따라 능견(能見)과 능현(能現)이 헛되이 경계를 취하여 평등한 성품을 어기기 때문이며, 모든 법이 늘 고요하여 일어나는 모습이 없는데 무명으로 깨닫지 못한 채 헛되이 법과 어긋나므로 세간의 모든 경계를 따르는 온갖 앎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논-42)
다시 생멸하는 모습을 분별하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첫째는 거친 모습이니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며, 둘째는 미세한 모습이니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기 때문이다.
또 거친 가운데 거친 모습은 범부의 경계이고, 거친 가운데 미세한 모습과 미세한 가운데 거친 모습은 보살의 경계이며, 미세한 가운데 미세한 모습은 부처님의 경계이다.
(논-43)
이 두 종류의 생멸은 무명 훈습에 따라 있으니 이른바 인(因)에 기대고 연(緣)에 기댄다. 인(因)에 기댄다는 것은 불각의 뜻이기 때문이며, 연(緣)에 기댄다는 것은 헛되이 경계를 만드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因)이 없어지면 연(緣)이 없어지고, 인(因)이 없어지기에 ‘주와 객으로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이 없어지며, 연(緣)이 없어지기에 ‘주와 객으로 맞대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물음: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라면 어떻게 그 마음을 이어가며, 이어가는 마음이라면 마침내 없어진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
대답: 없어진다는 것은 오직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만 없어지지 마음의 바탕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바람이 물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 물이 없어지면 바람의 모습도 끊어져 기댈 것이 없겠지만 물은 없어지지 않기에 바람의 모습은 이어진다. 오직 바람만 사라지기에 움직이는 모습이 따라서 없어져도 물은 없어지지를 않는다. 무명도 그러하여 마음의 바탕에 따라 움직인다. 만약 마음의 바탕이 없어진다면 중생 자체도 사라져 기댈 것이 없겠지만 마음의 바탕은 불멸이기에 그 마음은 이어갈 수 있다. 오직 어리석음만 없어지기에 생멸하는 마음의 모습이 따라서 없어지나 참마음의 지혜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논-44)
다시 네 가지 법이 훈습하는 뜻이 있기에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이 끊어지지 않고 일어난다.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깨끗한 법이니 진여라고 하고, 둘째는 오염된 모든 법의 인(因)이니 무명이라고 하며, 셋째는 헛된 마음이니 업식(業識)이라고 하고, 넷째는 헛된 경계이니 여섯 가지 경계를 말한다.
(논-45)
훈습의 뜻은 무엇인가. 마치 세간의 옷에는 실제 향기가 없지만 사람이 향으로 훈습하기에 향기가 있는 것과 같다. 이 훈습의 뜻도 이와 같다. 진여라는 깨끗한 법은 실제 오염된 것이 없으나 다면 무명으로 훈습하기에 오염된 모습이 있고, 무명이라는 오염된 법은 실제 맑은 업이 없으나 다만 진여로 훈습하기에 맑은 작용이 있다.
(논-46)
어떻게 훈습하기에 오염된 법을 일으키는 것이 끊어지질 않는가. 이른바 진여라는 법에 따라 무명이 있고, 무명이라는 오염된 법의 인(因)이 있기에 진여를 훈습한다. 진여를 훈습하기에 곧 헛된 마음이 있고, 헛된 마음이 있기에 곧 무명을 훈습하여 진여라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 상태로 헛된 생각이 일어나 헛된 경계를 나타낸다. 헛된 경계인 오염된 법의 연(緣)이 있기에 곧 헛된 마음을 훈습하고 그 헛된 생각으로 집착하여 모든 업을 짓게 하므로 몸과 마음에 있는 온갖 괴로움 같은 것을 받는다.
이 헛된 경계가 훈습하는 뜻에는 곧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증장념(增長念) 훈습이고 또 하나는 증장취(增長取) 훈습이다.
헛된 마음이 훈습하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업식 근본 훈습’이니 아라한과 벽지불과 보살들에게 모두 생멸하는 괴로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을 더 늘어나게 하는 훈습’이니 범부에게 업에 얽힌 괴로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무명이 훈습하는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근본 훈습이니 업식을 이루게 하는 뜻이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일어난 견혹(見惑)과 애혹(愛惑)이 훈습하니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을 이루게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논-47)
어떻게 훈습하기에 깨끗한 법을 일으키는 것이 끊어지질 않는가. 이른바 진여라는 법이 있기에 무명을 훈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명을 훈습하는 인연의 힘으로 헛된 마음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좋아하게 된 것이다.
이 헛된 마음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좋아하는 인연이 있기에 곧 진여를 훈습하여 스스로 자기 성품을 믿고, 중생의 마음은 헛되이 움직인 것으로서 다른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헛된 마음을 멀리 벗어나는 법을 닦는 것이다.
다른 경계가 없음을 여실히 알기에 온갖 방편으로 깨달음을 이루는 수행을 일으켜 집착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수행을 오랫동안 훈습한 힘 때문에 무명이 없어진다.
무명이 없어지기에 마음이 일어남이 없고, 마음이 일어남이 없기에 경계가 따라서 없어진다. 인(因)과 연(緣)이 모두 없어지기에 마음의 모습이 다 사라지니 열반을 얻어 자연스럽게 활동하는 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논-48)
헛된 마음이 훈습하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의 훈습이니, 모든 범부와 성문 연각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에 따라 힘이 닿는 대로 최고의 도를 향하여 차츰차츰 나아가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의(意) 훈습이니, 모든 보살이 도 닦을 마음을 내어 용맹스럽고 빠르게 열반에 나아가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논-49)
진여 훈습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자체 모습의 훈습이며, 또 하나는 용(用)의 훈습이다. 자체 모습의 훈습이란 시작이 없는 때부터 무루법을 갖추고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을 준비하여 경계를 만드는 성품이다.
이 두 가지 뜻이 늘 훈습하는 것에 따라 힘이 있기 때문에 중생들이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즐기며, 스스로 자기 몸에 진여라는 법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도 닦을 마음을 내어 수행하는 것이다.
물음: 이런 뜻이라면 모든 중생에게 진여가 있기에 똑같이 훈습할 것인데 어찌 믿음이 있고 없는 것과 같은 많은 차별이 있습니까. 모두가 한꺼번에 스스로 진여라는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똑같이 열반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답: 진여는 본디 하나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무명이 있기에 본디부터 자기 성품의 차별이 두텁거나 엷어서 같지 않기 때문이다. 갠지스강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근본번뇌가 무명에 따라 차별을 일으키고, 아견(我見)과 애염(愛染) 번뇌가 무명에 따라 차별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모든 번뇌는 무명에 따라 앞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차별을 일으키는 것이니 오직 여래만이 이를 알 수 있다.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을 이룩하는 데는 인(因)이 있고 연(緣)이 있으니 인연을 갖추어야 이룩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나무 가운데 있는 불의 성품이 불을 일으키는 근본 원인이지만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불 놓는 방편을 빌리지 못한다면 스스로 나무를 태울 수 없는 것과 같다. 중생도 그러하니 비록 열반을 이루게 하는 근본 원인이 훈습하는 힘이 있더라도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 모두를 만나 그 분들로 연(緣)을 삼지 않는다면 스스로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바깥 연(緣)의 힘이 있더라도 안의 깨끗한 법이 훈습하는 힘이 아직 없는 이라면 끝내는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열반 찾기를 즐겨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인(因)과 연(緣)을 다 갖춘다면 이른바 스스로 훈습하는 힘이 있고, 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자비와 원력과 지켜주는 힘 때문에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이 있는 것을 믿기에 마음의 좋은 뿌리를 닦아서 익힌다. 마음의 좋은 뿌리를 닦아서 익힌 힘이 무르익었기에 곧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가르침을 만나 기뻐하고 열반의 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논-50)
용(用) 훈습이란 곧 중생의 바깥 인연이 주는 힘이다. 이와 같은 바깥 인연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치가 있지만 간단히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차별 인연이고 또 하나는 평등인연이다.
차별인연이란 공부하는 사람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께 기대어 처음 공부할 마음을 내 도를 찾기 시작할 때부터 부처님의 경지를 얻을 때까지, 그 가운데 보거나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과 보살들이 모두 권속이 되기도 하고 부모나 친척이 되기도 하며, 또는 심부름꾼이나 아는 친구나 원수가 되기도 하며, 또는 보시•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섭(同事攝)을 일으키기도 하며, 나아가 하는 일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보살행의 인연이 된다. 이와 같이 불보살님께서 일으키는 자비로운 큰마음을 가지고 훈습하는 힘으로 중생들의 좋은 마음의 뿌리가 더 늘어나게 되어 보는 이나 듣는 이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 차별 인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가까운 인연이니 빠르게 도를 얻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먼 인연이니 오랜 시간이 지나야 도를 얻기 때문이다. 가까운 인연과 먼 인연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보살행을 더 늘어나게 하는 인연’이며, 또 하나는 ‘불도를 받아들이게 하는 인연’이다.
평등인연이란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원력으로 중생들을 모두 괴로움에서 건지고자 자연스럽게 이들을 훈습하여 언제나 버리지 않는 인연이다. ‘중생들이 불보살과 같은 바탕이라고 아는 데서 나오는 힘’이기에 중생들이 보고 듣는 것에 감응하여 자연스럽게 그 활동을 나타내니, 이른바 중생들이 삼매 속에 들어가야 모든 부처님을 평등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논-51)
이 체(體)와 용(用)의 훈습을 분별하면 다시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아직 맞아떨어지지 않은 훈습이니, 범부와 이승과 처음 도 닦을 마음을 낸 보살들이 의(意)와 의식의 훈습으로 믿음의 힘에 기대기에 수행할 수는 있으나 아직 분별이 없는 마음이 체(體)와 맞아떨어지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며, 아직 자재한 업의 수행이 용(用)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이미 맞아떨어지는 훈습이니, 법신 보살이 분별이 없는 마음을 얻었기에 모든 부처님의 지혜와 용(用)과 맞아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오직 법력에 따르고 자연스럽게 수행하여 진여를 훈습하고 무명을 없애기 때문이다.
(논-52)
또 오염된 법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 훈습하여 끊어지질 않다가 부처님이 되고 난 뒤에 끊어진다. 그러나 깨끗한 법의 훈습은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끊어짐이 없으니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진여라는 법이 늘 훈습하기 때문이다. 헛된 마음이 없어지면 법신이 드러나 용(用)의 훈습을 일으키니 그러므로 끊어짐이 없다.
(논-53)
또 진여 자체의 모습이란 범부 •성문 •연각 •보살 •부처님 모두에게 더 보태거나 뺄 것이 없다는 것이다. 과거에 생긴 것도 아니요 미래에 없어질 것도 아니다. 끝내는 언제나 변함이 없이 본디부터 그 성품이 스스로 모든 공덕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체에 큰 지혜 광명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하게 아는 뜻이 있기 때문이며, 자기 성품에 깨끗하고 맑은 마음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상락아정(常樂我淨)의 뜻이 있기 때문이며, 시원하고 변하지 않는 자유로움의 뜻 모든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난 열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갠지스강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불리(不離) •부단(不斷) •불이(不異)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부처님의 법을 다 갖추고, 나아가 만족하여 조금도 모자란 뜻이 없기에 여래장이라고 하며 또한 여래 법신이라고도 한다.
물음 : 위에서 진여 그 바탕은 평등하여 모든 모습을 벗어났다고 말했는데, 어찌 다시 진여 바탕에 이처럼 온갖 공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대답 : 실로 이 모든 공덕의 뜻이 있더라도 차별이 없는 모습이기에 똑 같은 한 맛으로서 오직 하나의 진여일 뿐이다.
이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분별이 없는 것으로 분별된 모습을 벗어났기 때문에 다를 것이 없다.
다시 무슨 뜻으로 차별을 말할 수 있는가. 업식에 따라 생멸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떻게 보이는가. 모든 법이 본디 오직 마음뿐이기에 실로 망념이 없는 것이나, 헛된 마음이 있어 깨닫지 못한 상태로 헛된 생각을 일으켜 모든 경계를 보기에 무명이라고 말한다. 마음의 성품이 헛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큰 지혜 광명의 뜻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보는 것을 일으키면 보이지 않는 모습도 있게 되나, 마음의 성품이 보는 것을 떠나면 곧 법계를 두루 비추는 뜻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성품이 없어 상(常)도 아니고 낙(樂)도 아니며 아(我)도 아니고, 정(淨)도 아니다.
뜨거운 고뇌로 쓰러지고 변화하면 자유롭지 않으며, 나아가 갠지스강 모래알 수만큼 많은 헛되이 오염된 뜻을 갖추게 된다.
이 뜻을 상대하기에 마음의 성품이 움직임이 없으면 갠지스강 모래알 수보다 더 많은 모든 맑은 공덕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있고 다시 앞의 법을 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공부가 모자라나, 이처럼 깨끗한 법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은 곧 한마음이니 다시 생각할 것이 없기에 만족하여 법신 여래장이라고 한다.
(논-54)
또 진여의 용(用)이란 이른바 모든 부처님이 본디 인지(因地)에서 자비로운 큰마음을 일으키고, 모든 바라밀을 닦아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며, 크나큰 서원을 세우고 중생계를 다 건져 해탈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세월을 한정하지 않고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자기 몸처럼 취하기에 중생이라는 모습을 취하지 않는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중생과 자기 몸이 진여로서 평등하여 다를 게 없음을 실답게 아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큰 방편으로 쓰는 지혜가 있기에 무명을 없애고 본디 법신을 보니 자연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으로 나타나는 온갖 작용이 있다. 곧 진여와 평등하여 모든 곳에 두루하고 또한 얻을 수 있는 용(用)의 모습도 없다. 무엇 때문인가.
모든 부처님은 오직 법신의 지혜에 있는 몸이며 최고의 진리일 뿐 세간의 이치로서 경계가 없기에 베풀고 만드는 헛된 조작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이 보고 듣는 것을 따라 이익을 얻기에 용(用)이라고 말할 뿐이다.
(논-55)
이 용(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경계를 분별하는 식(識)에 기대어 범부와 이승이 본 것을 응신이라고 한 것이다. 전식(轉識)이 나타난 사실을 알지 못하기에 밖에서 왔다고 보고 한정된 색에 집착하여 진실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업식에 기대어 모든 보살이 처음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에서부터 보살의 마지막 수행단계까지에서 본 것을 보신이라고 한 것이다. 보신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이 있고, 그 색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습이 있으며, 그 모습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이 있다. 머물고 기대는 과보도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온갖 장엄이 있고, 어떤 곳에도 나타나니 곧 그 끝이 없고 다함이 없기에 한정된 모습을 벗어난다. 그 감응한 곳을 따라 늘 머무를 수 있기에 망가지거나 잃어버릴 것이 없다. 이와 같은 공덕이 모두 모든 바라밀과 번뇌 없는 보살행의 훈습과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훈습’으로 이루어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즐거운 모습을 다 갖추었으므로 보신이 된다고 말한다.
또 범부가 본 것은 거친 색이니 여섯 갈래 중생의 나쁜 길을 따라 저마다 보는 게 달라 온갖 유형으로 즐거운 모습을 받는 것이 아니기에 응신이 된다고 한다.
다시 처음 도 닦을 마음을 낸 보살들이 본 것은 진여라는 법을 깊이 믿기에 조금이나마 보신을 보는 것이다. 그 색의 모습과 장엄 따위의 일들은 오고감이 없으며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모습을 떠나 오직 마음에 따라 나타날 뿐 진여를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이 보살은 아직 스스로가 분별하고 있으니, 이는 법신의 위치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맑은 마음을 얻는다면 보는 바가 미묘하여 그 작용이 차츰차츰 뛰어나다가 보살의 수행단계가 다 끝나면 보는 경계가 다할 것이다. 업식을 벗어나면 보는 모습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서로가 색의 모습으로 서로 보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물음 : 부처님의 법신이 모두 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벗어났다면 어떻게 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대답 : 이 법신 자체가 색의 바탕이기에 색을 나타낼 수 있다. 말하자면 본디부터 색과 마음은 둘이 아니다. 색의 성품이 곧 지혜이기에 색의 바탕에 형체가 없는 것을 지혜의 몸이라고 한다. 지혜의 성품이 곧 색이기에 법신이 모든 곳에 두루한다고 한다. 나타난 색은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형태가 없다. 마음대로 시방세계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보살과 보신과 장엄들이 저마다 차별된 모습을 보일 수 있지만, 모두 분별할 수 있는 한정된 형태가 없으므로 서로 방해하지 않는다. 이는 마음이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여의 자유자재한 용(用)을 뜻하기 때문이다.
(논-56)
다시 생멸의 길에서 진여의 길로 들어가는 내용을 드러낸다. 이른바 오음(五陰)에 있는 색과 마음을 추구해보면, 육진 경계는 끝내 헛된 생각이 없고 마음은 모습이 없기에 아무리 찾아도 결국 얻을 수 없다. 마치 사람이 헤매기 때문에 동쪽을 서쪽이라고 하나 방향은 실로 바뀌지 않듯,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의 어리석음으로 마음을 헛된 생각이라고 해도 마음은 실로 움직인 것이 아니다. 만약 관찰하여 마음에 헛된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곧 수순하여 진여의 길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논-57)
삿된 집착을 다스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삿된 집착이 모두 다 아견(我見)이니 ‘나’를 여읜다면 삿된 집착이 없다는 것이다. 이 아견에는 두 가지가 있다.
(논-58)
무엇이 그 둘인가. 하나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주재자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이다.
(논-59)
‘변하지 않는 하나의 주재자로서 내가 존재한다는 견해’란 모든 범부에 기대어 말한 것이니 다섯 가지가 있다. 무엇이 그 다섯인가.
첫째는 경에서 “여래 법신은 마침내 적막하여 허공 같다.”고 한 말을 듣고, 이 말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인 줄 알지 못하기에 곧 허공이 여래의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허공의 모습은 헛된 법이니, 그 바탕이 없어 실답지 않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 색을 상대하기에 볼 수 있는 모습이 있어 마음이 생멸하게 하지만 모든 색법이 본디 마음이기에 실로 바깥의 색은 없다. 바깥의 색이 없다면 허공의 모습도 없다. 이른바 모든 경계는 오직 마음이 헛되이 일으키기에 있는 것이니, 마음이 헛된 움직임을 벗어나면 모든 경계는 사라진다. 오직 하나의 참마음만이 어떤 곳에서도 두루하지 않은 데가 없다. 이는 여래의 크고 넓은 성품 지혜의 가장 뛰어난 뜻을 말하니, 허공과 같은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는 경에서 “세간의 모든 법이 끝내 그 바탕이 공(空)이고, 열반과 진여라는 법도 끝내 공(空)이며, 본디부터 스스로 공(空)이어서 모든 모습을 벗어났다.”고 한 말을 듣고, 이 말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방편인 줄 모르기에 곧 진여와 열반의 성품은 오직 공(空)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를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진여에 법신 자체가 불공(不空)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니, 여래의 성품에서 나오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다 갖추었기 때문이다.
셋째는 경에서 “여래장은 늘어나고 줄어드는 것이 없이 그 바탕에 모든 공덕의 법을 갖추었다.”고 한 말을 듣고,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곧 여래장에 색과 마음의 법이 있으므로 근본성품이 차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오직 진여의 뜻만 기대어 말할 뿐이니, 생멸의 오염된 뜻이 나타남에 따라 차별을 말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경에서 “모든 세간의 삶과 죽음으로 대두된 오염된 법이 모두 여래장에 기대어 있기에 모든 법이 진여를 여의지 않았다.”고 한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기에, 여래장 자체에 모든 세간의 삶과 죽음과 같은 법을 다 갖추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여래장은 본디부터 오직 갠지스강 모래알보다 더 많은 깨끗한 공덕만 있어 진여의 뜻을 여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에, 갠지스강 모래알보다 더 많은 번뇌인 오염된 법은 오직 헛되이 있을 뿐 그 성품 자체가 본디 없어 시작이 없는 때부터 일찍이 여래장과 서로 붙어 어울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여래장 자체에 헛된 법이 있다면 이것을 증득하여 영원히 헛된 법을 없앤다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경에서 “여래장에 기대기에 삶과 죽음이 있고, 여래장에 기대기에 열반을 얻는다.”고 한 말을 듣고, 이해하지 못하므로 “중생은 시작이 있다.”고 하고, 시작이 있다고 생각하므로 또 “여래가 얻은 열반은 그 끝이 있어 다시 중생이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상대하여 다스릴 것인가. 여래장은 과거에 시작인 어떤 시점도 없기에 무명의 모습도 시작이 없다. 만약 삼계 밖에 다시 중생이 시작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곧 외도의 경에서 말한 것이다. 또 여래장은 미래의 끝인 어떤 시점도 없으니 모든 부처님이 얻은 열반도 이와 맞서 미래의 끝인 어떤 시점도 없기 때문이다.
(논-60)
‘모든 법에 실체가 있다는 견해’란 무엇인가. 이승의 아둔한 근기에 기대기에 여래께서는 다만 “변하지 않는 하나의 주재자로서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만 말할 뿐이다. 그러나 말한 내용이 가장 뛰어난 법이 아니기에 이승은 오음에 생멸이 있다고 보고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여 헛되이 열반을 취한다.
(논-61)
또 마침내 헛된 집착을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오염된 법과 깨끗한 법은 서로 맞서 기댐으로 있게 되는 것으로서 말할 만한 근본성품이 없다는 사실을 으레 아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은 본디부터 물질도 아니요 마음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요 알음알이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어서 끝내 말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도 말이 있게 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으레 알아야 한다. 여래께서는 훌륭한 방편으로 임시 말로써 중생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 취지는 모두 헛된 생각을 떠나 진여에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모든 법을 생각함으로써 마음이 생멸하게 되면 참된 지혜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논-62)
‘도 닦을 마음을 내어 공부하는 모습을 분별’한다는 것은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한 도를 모든 보살이 도 닦을 마음을 내어 수행해 나간다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논-63)
간단히 도 닦을 마음 내는 것을 말하자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는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고, 둘째는 ‘알고 행하면서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며, 셋째는 ‘증득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다.
(논-64)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낸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어떤 사람에게 기대고 어떤 행을 닦아 믿음을 이룩해야 도 닦을 마음을 낼 수 있는가.
이른바 ‘어떤 길로 갈지 결정되지 않은 중생’이 마음의 좋은 뿌리를 훈습한 힘이 있는 것에 기대기에 업의 과보를 믿고 열 가지 좋은 행을 일으켜, 삶과 죽음에 있는 괴로움을 싫어하고 깨달음을 구하고자 모든 부처님을 만나 몸소 공양하고 믿음을 수행하며 일만 겁을 지나 믿음을 이룩하는 것을 말한다.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그들을 가르쳐 도 닦을 마음을 내게 하며, 때로는 자비로운 큰마음의 힘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도 닦을 마음을 내며, 때로는 바른 법이 멸하려고 할 때 법을 보호하고자 하는 인연으로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들이다.
이처럼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낸 사람들은 반드시 도를 이루게 할 길로 들어가 끝내 도 닦는 공부에서 물러나지를 않으니, 이를 여래의 씨앗 가운데 머물러 바른 인(因)과 맞아 떨어진다고 한다.
만약 어떤 중생이 마음의 좋은 뿌리가 적다면, 아득히 먼 옛날부터 번뇌가 매우 두텁기에,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더라도 하늘의 신이나 인간의 씨앗을 일으키며 또는 이승의 씨앗을 일으킨다. 설사 대승을 찾는 사람이 있더라도 근기가 일정하지 않으므로 어떤 때는 공부에 나아가고 어떤 때는 공부에서 물러난다.
때로는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아직 일만 겁을 지나지 않았어도 그 가운데 좋은 인연을 만나기에 또한 도 닦을 마음을 내기도 한다. 이른바 부처님의 겉모습을 보고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며, 때로는 많은 스님들을 공양하므로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며, 때로는 이승의 가르침으로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며,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배워 도 닦을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 닦을 마음을 낸 것은 아직은 모두 굳은 마음들이 아니므로 나쁜 인연을 만나면 때로는 도에서 물러나 이승의 위치에 떨어지게 된다.
(논-65)
다시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낸다는 것은 어떤 마음을 내는 것인가. 간단히 말하면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는 곧은 마음이니, 바로 진여라는 법을 생각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이니 좋은 모든 행을 즐겨하기 때문이요, 셋째는 자비로운 큰 마음이니 중생의 모든 괴로움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음 : 위에서 법계는 하나의 모습이며 부처님의 바탕에 둘이 없다고 말했는데, 무슨 까닭에 오직 진여만 생각하지 않고 다시 온갖 좋은 행을 찾아 배워야만 합니까.
대답: 비유하면 큰 여의주의 바탕이 맑고 깨끗하나 잘 다듬어지지 않은 것과 같다. 사람들이 여의주의 성품을 생각하더라도 온갖 기술로 갈고 다듬지 않는다면 끝내 깨끗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생의 진여라는 법도 그 바탕이 텅빈 듯 깨끗하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가 있다. 사람들이 진여를 생각하더라도 온갖 방편으로 그 진여를 닦아 익히지 않는다면 또한 깨끗해질 수 없는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번뇌가 모든 법에 두루하기에 좋은 행을 모두 닦아 이 힘으로 번뇌를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좋은 모든 법을 수행하면 저절로 진여라는 법을 따르기 때문이다.
간단히 방편을 말하자면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근본을 행하는 방편’이다. 이는 모든 법의 자기 성품이 생겨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고 헛된 견해를 벗어나 삶과 죽음에 머물지 않으며, 모든 법은 인연의 어울림으로 업과(業果)를 잃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고 자비로운 큰마음을 일으켜서 모든 복덕을 닦아 중생을 거두고 교화하며 열반에 머물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머무름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허물을 멈출 수 있는 방편’이다. 이는 자기 허물을 뉘우치고 부끄러워하여 나쁜 모든 법을 멈추고 더 키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모든 허물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셋째는 ‘마음의 좋은 뿌리를 일으켜 늘리는 방편’이다. 이는 부지런히 삼보를 공양•예배•찬탄•기뻐하며 모든 부처님에게 법을 말씀하시기를 청하는 것이니, 삼보를 아끼고 공경하는 순수한 마음 때문에 믿음이 커져 무상도(無上道)를 구하려고 하며 또 불법승(佛法僧) 삼보의 힘이 보호하기 때문에 업장을 녹여 마음의 좋은 뿌리에서 물러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어리석음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넷째는 ‘큰 원력의 평등한 방편’이다. 말하자면 미래 세상이 다하도록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빠짐없이 모두 무여열반을 얻게 발원하는 것이다. 이는 법의 성품에 수순하여 단절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법의 성품이 크고 넓어 모든 중생에게 두루하고 평등하여 다를 것이 없어 나와 남의 경계를 생각하지 않는 가장 뛰어난 적멸이기 때문이다.
(논-66)
보살이 이 마음을 내기에 조금이나마 법신을 볼 수 있고, 법신을 보기에 그 원력대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여덟 가지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이른바 도솔천에서 내려와 모태에 들어가 머물다, 모태에서 나와 출가하여 도를 이루고, 법을 설파하다가 열반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보살을 법신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과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속의 유루업을 아직 끊어버릴 수 없으므로, 태어난 곳에서 미세한 괴로움과 서로 붙어 어울리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업에 얽힌 괴로움은 아니니 큰 원력의 자유자재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경에서 때로는 “방편으로 나쁜 길로 물러나 있음은 진실로 공부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다.”고 말하는 내용과 같으니, 그 뜻은 다만 처음 도를 배우는 보살로서 아직 바른 위치에 들지 못하고 게으른 자들이 두려워하기에 그들에게 용맹심을 내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은 도 닦을 마음을 한 번 낸 뒤에는 두려운 마음을 멀리 벗어나 마침내 이승의 경계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동안 어려운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열반을 얻는다는 소리들 듣고도 약해지거나 두려워하지를 않는다. 이는 모든 법이 본디 열반임을 믿고 알기 때문이다.
(논-67)
‘알고 행하면서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수행하는 보살이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행’을 완성하고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회향’하는 마음을 내는 것으로서, ‘믿음을 이룩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보다 경계가 더욱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보살은 처음 바른 믿음에서 첫 번째 아승지겁을 거쳐 수행이 오롯해지려고 하기에 진여법의 진실에 대해 깊은 이해가 드러나 닦는 수행이 생멸 변화하는 겉모습을 벗어난다.
그리하여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인색하거나 탐욕이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보시바라밀을 수행하고,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오염될 것이 없어 오욕의 허물을 떠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지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괴로움이 없어 성내거나 번거로움을 벗어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인욕바라밀을 수행하고,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몸과 마음의 모습이 없어 게으름을 벗어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정진바라밀을 수행하며,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늘 안정되어 그 바탕에 어지러움이 없는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선정바라밀을 수행하고,
법의 성품에 있는 바탕은 밝아 무명을 여읜 줄 알기에 이에 수순하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한다.
(논-68)
‘증득하여 도 닦을 마음을 내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정심지(淨心地)에서 보살의 구경지(究竟地)까지 무슨 경계를 증득한 것인가. 이른바 진여이다.
전식(轉識)으로 말미암아 경계를 말하지만 깨달음은 경계가 없고 오직 진여에 있는 지혜뿐이므로 법신이라고 한다.
이 보살은 한 생각에 빠짐없이 시방세계에 도달하여 모든 부처님을 공양하고 법을 말씀하시기를 청한다. 이것은 오직 중생들을 가르쳐 이익을 주고자 함이나 글자에 기대지는 않는다.
때로는 ‘보살이 닦아야 할 열 가지 마지막 수행단계’를 뛰어넘어 빠르게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약하거나 겁이 많은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아승지겁을 수행해야 부처님의 도를 이룬다고 말한 것은 게으르고 잘난 체하는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수한 방편을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지만, 실로 보살의 수행으로 반드시 깨달을 수 있는 이는 근기가 평등하고, 도 닦을 마음을 낸 것도 평등하며, 깨달은 것도 또한 평등하여 이를 뛰어넘는 법이 없다. 모든 보살이 다 세 아승지겁을 거치기 때문이다,
다만 중생의 세계가 다른 데에 따라 보고 듣는 근기와 욕구와 성품이 다를 뿐이므로 행하는 것 또한 차별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 이 보살이 도 닦을 마음을 낸 모습에는 미세한 모습을 보이는 세 가지 마음이 있다. 무엇이 그 셋인가. 첫째는 ‘참 마음’이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방편으로 쓰는 마음’이니 스스럼이 없이 두루 행하여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기 때문이요, 셋째 마음은 ‘업식(業識)’의 마음’이니 미세하게 생멸하기 때문이다.
(논-69)
또 이 보살은 공덕이 다 이루어져 색구경처(色究竟處)에서 모든 세간 가운데 가장 높고 큰 몸을 보인다. 이는 한 생각에 진여와 맞아떨어진 지혜로 무명이 단숨에 사라진 것을 말하니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한다.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진여의 활동이 있기에 시방세계에 나타나 중생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
(논-70)
물음 : 허공이 끝이 없으므로 세계가 끝이 없고, 세계가 끝이 없으므로 중생이 끝이 없고, 중생이 끝이 없으므로 그 마음의 차별도 끝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경계를 한정지을 수 없으므로 알고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무명이 끊어졌다면 마음에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기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부릅니까.
대답: 모든 경계는 본디 한마음으로서 상념을 벗어나지만 중생들이 헛되이 경계를 보기에 마음에 분별할 있는 한정된 모습이 있다. 헛되이 상념을 일으켜 법의 성품과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은 헛된 견해와 생각을 벗어나 어떤 곳이라도 그 지혜가 두루하지 않는 곳이 없으니 마음이 진실하기 때문이며, 모든 법의 성품이 그러하다. 자체가 헛된 모든 법을 환하게 비추는 큰 지혜의 작용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이 있어 모든 중생들이 마땅히 알아야 할 곳을 따라 모두 온갖 법의 이치를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낱낱이 아는 지혜’라고 부른다.
물음 : 모든 부처님께서 자연스런 업이 있어 모든 곳에 나타나 중생에게 이익을 줄 수 있다면 모든 중생이 부처님과 그 분의 신통변화를 보거나 설법을 듣고 많은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세간의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일을 볼 수 없습니까.
대답 :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평등하고 모든 곳에 두루하여 억지 의도가 없기에 ‘자연스런’이란 표현을 쓴다. 다만 중생의 마음에 따라 나타날 뿐인데, 중생의 마음은 거울과 같다. 거울에 때가 끼면 모습이 나타나지 않듯, 중생의 마음에 번뇌가 있으면 법신이 나타나지를 않는 것이다.
(논 -71)
이미 ‘법(法)과 의(義)를 자세히 풀이하는 부분’을 설명했고, 다음은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여기서는 반드시 도를 이루게 할 길로 아직 들어가지 못한 중생들을 위하여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것’을 설명한다.
(논-72)
무엇을 믿음이라 하고 어떻게 수행하는가. 간단히 말하면 믿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그 넷인가.
첫째는 근본을 믿는 것이니, 이른바 진여라는 법을 즐겨 생각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부처님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늘 부처님을 가까이하고 공양 공경하며 착한 마음을 일으켜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구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법에 큰 이익이 있음을 믿는 것이니, 늘 모든 바라밀을 수행하는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넷째는 스님들이 바르게 수행하여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도 가져다줌을 믿는 것이니, 늘 모든 보살들을 즐겨 가까이하고 실다운 행을 배우려고 하기 때문이다.
(논-73)
수행에 다섯 가지 방편이 있기에 이 믿음을 이루게 할 수 있다.
(논-74)
무엇이 그 다섯인가.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지관(止觀)이 다섯 가지 방편이다.
(논-75)
보시를 어떻게 수행하는가. 찾아와 구하는 모든 사람들을 보면 가지고 있는 재물을 힘이 닿는 대로 베풀고 인색한 마음을 버려 그 중생들을 기쁘게 한다. 그들이 재난을 만나 두려워하면 능력이 있는 대로 두려워하는 마음을 없애 준다. 법을 구하는 중생이 있다면 알고 있는 대로 방편을 가지고 말하나 명예와 존경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까지 같이 생각하고 그 공덕을 깨달음에 회향해야 한다.
계율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른바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나쁜 인간관계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남을 이간시키거나 나쁜 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말을 꾸미지 않아야 한다. 욕심•시기•속임수•사실을 비트는 것•분노•삿된 견해를 멀리 떠나야 한다. 출가 수행자라면 번뇌를 없애기 위하여 시끄러운 곳을 멀리 떠나 늘 고요한 곳에 머물면서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어려움을 참아 이겨내는 수행들을 해야 한다. 작은 죄에도 두려움을 내고 부끄러워하며 허물을 뉘우쳐야 한다. 여래께서 만든 계율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다른 사람의 헐뜯음을 막아 헐뜯는 중생들에게 죄를 짓지 않게 해야 한다.
인욕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른바 다른 사람의 괴롭힘을 참아내며 앙갚음할 마음을 갖지 않아야 한다. 또한 이익과 손해, 명예와 체면의 손상, 칭찬과 헐뜯음,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법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디어여 한다.
정진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이른바 좋은 모든 일에 게으르거나 물러날 마음이 없어야 한다. 마음먹은 것이 굳세어 약하고 두려운 마음이 없어야 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과거 속에서 헛되이 받은 몸과 마음이 모두 커다란 괴로움이니 아무런 이익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때문에 모든 공덕을 부지런히 닦고 자신은 물론 남의 이익까지 생각하는 마음으로 모든 괴로움을 서둘러 벗어나야 한다. 또 사람들이 믿음을 갈고 닦더라도 전생부터 지은 무거운 죄와 악업의 장애가 많이 있기에, 때로는 삿된 마구니와 모든 귀신들의 괴롭힘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세간의 일들이 여러 가지로 꼬이기도 하며, 때로는 병고에 시달리게도 된다. 이런 많은 장애들이 있기 때문에 부지런히 용맹정진을 해야 한다. 아침저녁으로 여섯 때 모든 부처님께 예배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해야 한다. 부처님께 설법을 청하고 중생의 모든 기쁨을 따라서 기뻐하며 그 공덕을 깨달음에 회향해야 한다. 늘 쉬지 않고 정진하여 모든 장애를 벗어나면 좋은 마음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논-76)
지관(止觀)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지(止)란 모든 경계에 끄달리는 마음을 그치는 것이니, 사마타관(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관(觀)이란 인연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습을 분별하는 것이니, 위빠사나관을 수순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수순하는가. 이 두 뜻으로 차츰차츰 닦아 익혀 서로 여의지 않는다면 지(止)와 관(觀)이 함께 드러나기 때문이다.
(논-77)
만약 지(止)를 닦는 자라면 고요한 곳에 머물러 단정히 앉아 뜻을 바르게 한다. 몸 속에서 일어나는 숨이나 어떤 모습에 기대지 않고, 허공에 기대지 말며, 지수화풍(地水火風)과 견문각지(見聞覺知)에 기대지 말아야 한다. 모든 생각은 생각대로 모두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마저 없어야 한다. 모든 법은 본디 어떤 모습이 없어 생각마다 불생불멸이고, 또한 바깥 경계를 생각하는 마음을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 그 뒤에 마음을 마음으로 없애니 마음이 흐트러지면 곧 그 마음을 거두어 정념(正念)에 머물러야 한다. 이 정념이란 오직 마음일 뿐 바깥에 경계가 없다는 사실을 으레 알아야 한다. 이 마음 또한 근본실체가 없기에 생각마다 얻을 수 없다.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의 모든 행위에서 늘 방편을 생각하고 이치대로 살피며 오래 공부하다 보면 그 마음을 가질 수 있다. 이 마음을 가졌기에 차츰차츰 가세게 물이 흐르듯 진여삼매에 들어가 번뇌를 없애고 믿음을 키우기에 서둘러 공부에서 물러나지 않는다. 이 공부는 오직 부처님의 법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고 헐뜯는 죄 많은 사람들과 아만이 있거나 게으른 사람들만 빼니, 이런 사람은 삼매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논-78)
다시 이 삼매에 기대기에 곧 법계가 하나의 모습인 줄 안다. 이는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중생의 몸과 평등하여 다를 게 없음을 말하니, 이를 일행삼매(一行三昧)라고 한다. 진여가 삼매의 근본이니 사람들이 이를 수행하면 차츰차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삼매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으레 알아야 한다.
(논-79)
때로는 어떤 중생은 마음의 좋은 뿌리가 없어 마구니나 외도나 귀신들의 모든 홀림을 받는다. 앉아 공부하는 가운데 두려움을 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거나 때로는 미남 미녀들의 모습들로 나타날 때, 이들이 오직 마음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이 경계는 곧 사라져 마침내 괴롭지가 않은 것이다.
(논-80)
때로는 하늘의 모습이나 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또한 여래의 모습을 만들어서 부처님의 상호를 다 갖춘다. 때로는 다라니를 말하고 또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말한다. 떼로는 평등•공(空) •무상(無相)•무원(無願)•무원(無怨)•무친(無親)•무인(無因)•무과(無果)•끝내는 비어 고요한 것이 참된 열반이라고 한다. 때로는 사람들이 과거 전생의 일을 알게 하고 또한 미래의 일도 알게 한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얻고 변재가 막힘이 없어 중생들이 세간의 명리에 집착하게 한다. 또 사람들을 자주 성내게 하거나 기쁘게 하여 그 성품이 오락가락하게 한다. 때로는 지나치게 애정이 많고 잠이나 병이 많아 그 마음을 게으르게 한다. 때로는 갑자기 정진을 시작하다 뒤에 바로 멈추게 하고 믿음이 없어 의심이나 쓸데없는 생각이 많게 한다. 때로는 본디 뛰어난 수행을 버리고 다시 쓸데없는 공부를 하게 하며, 세상일에 집착하여 온갖 일을 번거롭게 만든다. 또한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삼매 비슷한 것을 얻게 하지만 이들은 모두 외도들이 얻는 경계이므로 진짜 삼매가 아니다.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나 이틀, 사흘이나 이레를 선정 속에 머물게 하고, 자연의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얻게 하며, 몸과 마음이 상쾌하고 배고프거나 목이 마르지 않아 사람들이 그것을 좋아하게 한다. 때로는 먹는 것이 일정하지 않게 금방 많다가 금방 적게 하여 사람들이 낯빛을 바꾸게 한다.
이런 이치이므로 수행하는 이들은 늘 지혜롭게 관찰하여 마음이 삿된 그물에 떨어지게 않게 해야 한다. 부지런히 정념(正念)으로 이들을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업의 장애를 멀리 여읠 수 있으므로, 외도가 갖는 삼매는 모두 아견(我見)•아애(我愛)•아만(我慢)을 여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니, 그들의 삼매는 세간의 명예와 이익과 존경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의 삼매란 보는 모습에 머물지 않고 얻는 모습에 머물지 않으며, 나아가 선정에서 나와도 게으르거나 거만한 것이 없어 모든 번뇌가 차츰차츰 엷어진다. 모든 범부가 이 삼매의 법을 익히지 않고서 ‘여래가 될 수 있는 성품’에 들어간다는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세간의 모든 선정 삼매를 닦아 거기에 맛 들여 자주 집착을 일으키면 아견(我見)으로 말미암아 삼계에 묶이니 외도와 함께 하는 것이며, 선지식의 보호를 멀리하면 외도의 견해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논-81)
또 한마음으로 부지런히 이 삼매를 배우고 익힌 이는 지금 세상에서 열 가지 이익을 얻으니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 언제나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과 보살의 보호를 받는다.
둘째, 모든 마구니와 악귀들이 겁을 주지 못한다.
셋째, 아흔다섯 가지 외도와 귀신들이 어지럽히지 못한다.
넷째, 깊고 오묘한 부처님의 법을 헐뜯지 않기에 무거운 죄가 차츰차츰 엷어진다.
다섯째, 모든 의심과 나쁜 견해가 사라진다.
여섯째, 여래의 경계에 있는 믿음이 크게 늘어난다.
일곱째, 근심과 회한을 벗어나 삶과 죽음의 문제에서 용맹스럽게 공부를 하며 겁을 내지 않는다.
여덟째, 그 마음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잘난 체하는 마음을 버렸으므로 다른 사람이 괴롭히지 않는다.
아홉째, 비록 선정을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삶의 모든 경계에서 번뇌를 줄일 수 있고 세간의 삶을 즐기지 않는다.
열째, 삼매를 얻으면 바깥 인연의 모든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
(논-82)
또 사람들이 지관(止觀)만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때로는 게을러져 좋은 일들을 즐기지 않고 자비로운 큰마음을 멀리하기 때문에 관관(觀觀)을 닦는다.
관관(觀觀)을 닦아 익히는 이는 모든 세간의 생멸하는 법은 오래 머물 수 없어 금방 변하고 사라지며, 모든 마음이 생각마다 생멸하므로 괴로움이라고 보아야 한다. 과거에 생각한 모든 법이 어슴푸레 형체가 없이 꿈과 같음을 보아야 한다. 현재 생각하는 모든 법이 번개와 같음을 보아야 한다. 미래에 생각할 모든 법이 구름이 문득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세간의 모든 몸뚱이가 깨끗하지 못하고 온갖 더러움으로 가득 차 하나도 즐거워할 것이 없다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모든 중생이 시작이 없는 때부터 모두 무명이 훈습한 것 때문에 마음이 생멸하게 되어 이미 모든 몸과 마음의 큰 괴로움을 받았고, 현재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다그침이 있으며, 미래에 받을 괴로움이 그 끝이 없어 버리고 떠나기가 어려운데도 이를 깨닫지 못하니 참으로 불쌍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 곧 용맹스럽게 “바라옵건대 제 마음이 분별을 떠나 시방세계에 두루하고 착한 모든 공덕을 수행하며 미래가 다하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편으로 모든 중생들을 괴로움에서 건져 그들에게 열반의 즐거움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고 큰 서원을 세워야 한다.
이런 원력을 일으키므로 모든 삶이 있는 곳에서 좋은 모든 일들을 능력에 따라 처리하고, 배우고 익히는 일을 버리지 않아 마음에 게으름이 없어야 한다. 오직 앉을 때 지관(止觀)에 전념하는 것만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에서 해야 할 일인지 아닌지를 관찰해야 한다.
(논-83)
수행자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의 모든 생활에서 모두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이른바 모든 법의 자성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만 다시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과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비록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과보를 생각하지만 또한 그 자성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止)를 닦는다면 세간에 대한 범부의 집착을 다스리고 오음에 대한 이승의 약하고 두려운 생각을 버릴 수 있으며, 관(觀)을 닦는다면 자비가 없는 이승의 좁은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범부의 마음을 떠날 수 있다.
이 뜻으로 지(止)와 관(觀)은 서로 돕고 떨어질 수 없다. 지(止)와 관(觀)을 함께 닦지 않는다면 깨달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없다.
(논-84)
또 중생들은 처음 이 법을 배우면서 바른 믿음을 갖고자 하지만 그 마음이 약하다. 그 까닭은 이 사바세계에서는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만나 친히 공양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루기 어렵다’고 걱정하며 공부에서 물러나려고 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여래께서 ‘뛰어난 방편이 있어 믿음을 거두고 보호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한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께 바라는 사람의 원대로 다른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 늘 부처님을 보고 영원히 나쁜 길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경에서 “만일 어떤 사람이 한마음으로 서방 극락세계에 계신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그가 닦은 마음의 좋은 뿌리를 회향하여 부처님의 세계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면 곧 태어나 언제나 부처님을 보기 때문에 끝내 공부에서 물러날 일이 없다.”고 말한 내용과 같다. 부처님의 진여에 있는 법신을 보고 늘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 마침내 그 세계에 태어나서 바른 선정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논-85)
이미 ‘믿음과 다섯 가지 방편을 수행하는 부분’을 말했다. 다음은 ‘수행의 이익을 보여 주어 공부할 것을 권하는 부분’을 말하겠다. 이와 같이 대승에 있는 부처님의 소중한 모든 법을 내가 이미 다 말한 것이다.
(논-86)
어떤 중생이 여래의 깊고 깊은 경계에서 바른 믿음을 내며 헐뜯지 않고 대승의 도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으레 이 논을 가지고 생각하고 닦아 익혀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최고의 도에 다다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듣고도 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실하게 이어받아 반드시 모든 부처님이 수기한다는 것을 으레 알아야 한다.
(논-87)
설사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한 중생들을 교화하여 그들에게 열 가지 좋은 행을 행할 수 있게 하여도, 잠깐 겨를에 어떤 사람이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하는 공덕만 못하다. 앞에 있는 공덕보다 이 법을 바르게 생각한 공덕이 더 뛰어나 뭐로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이 이 논을 가지고 하루 밤낮을 수행하면 거기에서 오는 공덕은 헤아릴 수 없으므로 다 말할 수가 없다. 가령 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이 저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속에 그 공덕을 찬탄하더라도 다 찬탄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법성에 있는 공덕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의 공덕도 이와 같아서 그 끝이 없다.
(논-88)
어떤 중생이 이 논의 내용을 헐뜯고 믿지 않는다면 그 허물의 과보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큰 괴로움을 받는다. 이 때문에 중생들은 오직 우러러 믿을 뿐 이 법을 헐뜯어서는 안 된다.
헐뜯음으로써 심하게 스스로를 해치고 또한 다른 사람까지 해쳐 삼보의 모든 씨앗을 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여래가 모두 이 법에 따라 열반을 얻었기 때문이며, 모든 보살이 이 법으로 수행하여 부처님의 지혜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논-89)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과거의 보살도 이 법에 따라 맑은 믿음을 이루었고, 현재의 보살도 이 법에 따라 맑은 믿음을 이루며, 미래의 보살도 이 법에 따라 맑은 믿음을 이룰 것이다.
(논-90)
이 때문에 중생들은 이 법을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
[유통분]
(논-91)
세상 모든 부처님의 크고 깊은 많은 뜻들
제가 이제 형편 따라 모든 내용 설명하여
진여 법성 이 공덕을 아낌없이 회향하니
두루 모든 중생계에 이익 있게 하옵소서.
무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nature0820/13757478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대승기신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신론> 에서 아뢰야식과 여래장은 동일한 것 (0) | 2019.04.21 |
---|---|
마명보살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0) | 2019.04.07 |
대승기신론(한문/한글-원순역) (0) | 2019.04.07 |
[스크랩]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4강 (0) | 2018.03.11 |
[스크랩]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제13강 (0) | 2018.03.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