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인문과학 1

알라야식의 연원에 관한 一考/권오민

수선님 2019. 4. 7. 12:43

알라야식의 연원에 관한 一考

―上座 슈리라타의 18界 이해를 중심으로

권오민/경상대학교 철학과 / 인문학연구소


Ⅰ. ‘알라야식’ 개념의 유래와 ‘界’

Ⅱ. 蘊·處·界 3科의 분별

1. 초기경전에서의 3科 분별

2. 3科 假實에 관한 普光의 언급

3. 上座의 3科 분별

Ⅲ. 上座 슈리라타의 一切法 이해

1. 12處의 분별

2. 勝義有로서의 ‘界’의 의미와 隨界

3. 일체법(12처)의 異熟生說

4. 일체법과 마음(心)

 

Ⅳ. 결어


‘알라야식(ālaya vijñāna, 阿賴耶識)’은 유식사상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초기 유가행파 문헌에서는 그 異名으로 種子(bīja)나 界(dhātu) 등이 언급된다. 이에 따라 일반적으로 경량부의 종자설이 알라야식 이론의 기원으로 알려지지만, 그렇다면 다만 은유적 표현인 ‘종자’라는 개념의 연원은 무엇인가? 종자 또한 界의 뜻이라고 한 이상 界는 이미 초기경전에서 18界나 ‘種種界’라는 형태로 설해지고 있기 때문에 종자에 선행하는 알라야식이라는 개념의 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체제법(생사윤회와 열반)의 生因의 의미를 갖는 유가행파에서의 界(즉 알라야식)와 세계의 구성요소를 의미하는 초기경전에서의 界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 다만 의식의 대상을 의미하였던 초기불교의 法界(제18계)가 어떻게 眞如法界, 여래 法身의 의미로 변용될 수 있었던가? 본고에서는 중현의 『순정리론』에 인용된 경량부의 上座 슈리라타(Śrīlāta)의 18계의 이해를 통해 이것의 알라야식(혹은 種子識)으로의 변용 과정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상좌는 온·처·계 3科 중 界의 실유만을 인정하였다. 10가지 有色處(5근·5경)는 衆微가 화합할 때 비로소 所依와 所緣이 되기 때문에 世俗有(가유)이다. 따라서 그것의 차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의식의 대상이 되는 한 그것은 모두 외적존재로서 法處에 포섭된다. 다시 말해 12처(일체법)는 법처의 차별일 뿐이다.


둘째, 이에 반해 界는 處의 所依로서 勝義有이다. 그럴 때 법계는 12처의 소의라고 할 수 있다. 즉 상좌는 界를 種種의 법이 훈습하여 이루어진 종자·공능 등으로 이해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隨界(anudhātu) 혹은 舊隨界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수계는 諸法生因(혹은 일체법의 종자)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일 찰나의 마음[一心] 중에 具有한다. 이런 까닭에 상좌는 일체법(12처)을 異熟生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셋째, 상좌는 수계의 마음과 이로부터 생겨난 현행의 마음(즉 了別境識)을 구별하였다. 아마도 그는 이를 각기 心(citta: 集起)과 識(vijñāna: 了別)으로 이해하였을 것인데, 유가행파에서는 이를 集起心과 種種心 혹은 異熟識과 轉識이라 이름하였다. 그의 滅定有心說에서의 마음 또한 바로 이러한 種種界를 갖춘 마음이었을 것인데, 유가행파에서는 이를 알라야식이라고 하였다.


Ⅰ. ‘알라야식’ 개념의 유래와 ‘界’


동아시아 유식사상(법상종)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는 알라야식(ālaya vijñāna, 阿賴耶識)이라는 개념은 언제 어떠한 연유에서, 어떠한 경로를 통해 형성된 것일까? 불교가 계시종교가 아닌 이상, 또한 ‘알라야식’이라는 말이 일상의 언어개념도 아니고 초기불전에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것의 출현에는 필연적 곡절이 있었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그 연유를 相續(saṃtāna)의 문제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교가 생성의 철학이라는 것, 일체의 有爲諸法은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되풀이한다는 ‘無常의 刹那滅論’은 초기불교 이래 너무나도 자명한 전제였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을 수 없지만, 그렇다면 소멸과 생성 사이의 비단절적인 연속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에 따라 설일체유부에서는 諸法의 찰나생멸론과 삼세실유설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異熟因 異熟果(행위와 그 결과)처럼 시간적 간격을 갖는 인과관계나 죽음과 재생의 경우 無表業이나 中有와 같은 개념을 설정하기도 하였지만, 그 밖의 부파에서도 역시 세계의 상속이나 존재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개념으로 不失法(정량부), 根本識(대중부), 有分識(상좌부), 補特伽羅(독자부), 窮生死蘊(화지부), 一味蘊 즉 勝義의 보특가라(설전부), 種子(경량부=譬喩者) 등을 설정하였고, 어떤 이들은 ‘종자’를 隨界·熏習·功能·不失·增長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호칭하기도 하였다.


불교교학 상에서 유가행파의 알라야식 또한 유부의 삼세실유설을 포함하여 이러한 제 개념과 동일한 위상을 갖는다. 이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 世親의『 成業論』이다. 여기서는 먼저 신표업의 본질이 形色이라는 유부 毘婆沙師의 학설, 行動이라는 정량부의 학설, 마음의 차별에 의해 생겨난 別法이라는 日出論者(쿠마라라타)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에 따라 다시 결과를 낳게 하는 법으로 간주된 無表業과 過去業, 心不相應行蘊에 포섭되는 增長·不失壞 등의 별법을 비판한 다음, 마음의 相續에 훈습된 思(cetāna) 功能의 轉變과 差別說(경량부)을 언급하고서 無心定(無想·滅盡定)에서 마음의 상속이 끊어지는 경우를 난점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명으로 入定心의 等無間緣說(유부), 色心互熏說(선대 궤범사), 滅定有心說(비유자)을 인용 비판하는데, 세 번째 학설의 경우 이 때 마음은 제6 意識이라는 그들의 해명에 대해 비판한다. 즉 멸진정의 상태에서도 존재하는 마음이 의식이라면 그것은 선·염오·무기성 중의 그 어떤 것도 될 수 없기에 이 때의 마음은 世友(一類의 經爲量者)가 주장하듯이 細心 즉 異熟識(異熟果로서의 識)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이숙식은 능히 後有를 상속하고 [소의]신을 執持하기 때문에 阿陀那識, 일체 제법의 종자를 攝藏하고 있기 때문에 阿賴耶識이라고도 이름하는데, 이를 상좌부의 경(아함)에서는 유분식으로, 대중부와 화지부의 경에서는 근본식과 궁생사온으로 설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불교학계에서 ‘알라야식’이라는 말은 쉽게 수용하기는 어려운 술어였을 뿐더러 어쩌면 매우 낯설고 황당한 말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래서 성문 所傳의 경에서 설한 유분식 등에 빗대어

말하였을 것이다.(이는『 성유식론』상에서 알라야식의 다섯 경증 중 제5) 이에 따르는 한 당시 알라야식 개념의 일반적 술어는 異熟識이었다. 비록『 성업론』을 비롯한 유가행파의 논서에서 “나(여래)는 어리석은 이들이 아다나식(=알라야식)을 자아로 집착할까 염려하여 설하지 않았다”는『 해심밀경』의 설로써 기존 성문승들이 생소하게 여긴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을지라도 그들이 알라야식의 경증의 하나로 “世間衆生, 愛阿賴耶·樂阿賴耶·欣阿賴耶·憙阿賴耶”라는 경설을 유부 所傳의『 증일아함』에서 인용하고 있듯이, ‘알라야’라는 말은 이미 기존의 대·소승 경론에서도 언급되지만 대개는 貪의 이명으로 사용되고 있다.1)

1) ‘네 가지 아뢰야’는 현존『 증일아함』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불본행집경』권33

「 범천권청품」하(T3, 805c18ff)에 상응구(但衆生輩, 著阿羅耶(隋言所著處), 樂阿

羅耶, 住阿羅耶, 喜樂著處, 心多貪故. 此處難見. 其處所謂十二因緣. 十二因緣, 有處

相生. 此之處所, 一切衆生, 不能睹見. 唯佛能知)가 언급되는데, 여기서 ‘알라야’ 즉

탐착의 대상은 12인연이다. 그러나『 대비바사론』권65(T27, 338a1-5)에서는 무

위의 아라한에 대해 “離諸渴愛, 破阿賴耶, 無上究竟, 無上寂靜, 無上安樂―”이라 논

설하며,『 구사론』권16(T29,87c2-6)과『 순정리론』권42(동, 579a18-21)에서는

見聞覺知 중 見은 안식에 의해 증득된 것이라는 유부학설의 경증(“佛告大母: 汝意

云何? 諸所有色, 非汝眼見; 非汝曾見; 非汝當見; 非希求見, 汝爲因此起欲·起貪·起

親·起愛·起阿賴耶·起尼延底·起耽著, 不?”: 그러나『 잡아함』 권13 제312경, T2,

90a8-10에서는 다만 “於彼色起欲·起愛·起念·起染着, 不?”로, SN. IV. 72에서는

“atthi te tattha chando vā rāgo vā peman ti.”로전함)에도 아뢰야가 언급되며,

『 순정리론』권50(동, 621a24-27)에서도 이 경문을 貪·瞋·慢이 自相惑이라는

주장의 경증으로 전하는데, 普光(T41, 260c14ff)은 여기서 欲등 7가지는 모두

탐의 이명으로 아뢰야(ālaya)는 執藏(애착의 뜻)으로, 니연저(nikānti,혹은 nyati)는

執取 혹은 趣入 沈滯(집착의 뜻)로 번역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상좌슈리라타가

욕탐과 유탐의 경증으로 인용한 경에서도 아뢰야가 언급된다.(“上座所持契經亦說,

‘若緣欲界起染·起貪·起阿賴耶·起尼延底·起諸耽著, 是欲貪相.’”:『 순정리론』권45,

동, 600a22-24) 한편『 대반야바라밀다경』권576(T7, 976a2; 976c24f; 977b18;

978a5f)에서는 부처의 妙法覺慧나 일체법의 本來空寂에 대해 논설하면서 “―無取·

執·無礙·無著·無阿賴耶·無尼延底”라는 말을 언급하는데, 이 역시 탐의 이명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섭대승론』제2「 所知依分」에서는 “세존께서 所知(3性)의 근거가 되는 알라야식을 어디서 설하였던가?”하는 물음에 제1설로서 “무시이래 界가 일체법의 평등한 근거이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온갖 趣로 윤회하며 아울러 열반을 증득한다(無始時來界 一切法等依 由此有諸趣 及涅槃證得)”는『 阿毘達磨大乘經』의 伽他를 인용한다. 즉 무시이래 展轉相續한 界(dhātu)가 일체법(염오와 청정)의 근거가 된다는 것으로, 여기서 ‘계’를 玄奘역본『 世親釋』 (T31, 320a23)에서는 원인의 뜻으로,『 無性釋』(T31, 383a6f)에서는 雜染法의 원인이 되는 種子의 뜻으로 해석하며,『 성유식론』(T31, 14a17ff)에서도 능히 온갖 종자를 執持하여 현행법의 소의가 되는 원인(열반은 이것의 還滅)으로 해석한다.


비록『 성유식론』에서 제8식(알라야식)은 자성이 미세하여 작용으로밖에 나타낼 수 없기에 이같이 설하였다고 해설하고 있을지라도 ‘界’는『 유가사지론』 이래 원인(hetu)·종자(bīja)·본성(prakṛti)등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알라야식 개념의 연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초기불교에서 말한 ‘界’의 의미 변용에 관해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경량부 종자설의 ‘종자’ 또한 界의 뜻이었다고 한다면, 界는 종자에 선행하는 알라야식의 연원이라 말할 수 있다. 경량부 종자설은 『순정리론』 상에서 譬喩者(Darṣṭāntika)의 종의로 설해지고 있는데 (이에 관한 上座 슈리라타의 개념은 隨界 혹은 舊隨界), 그렇다면 다만 은유적 표현인 ‘종자’라는 개념의 연원은 무엇인가?


더욱이 眞諦역『 섭대승론 世親釋』(T31, 156c16ff)에서는 阿黎耶識이라는 [의미의] 界는 解(如來藏의 覺照)를 자성으로 하는 것으로 중생의 무차별성(不異)으로서의 본질(體類), 일체 聖法의 원인, 法身의 성취(生), 결코 파기되거나 다함이 없는 眞實, 自性善의 藏(곳간) 등의 다섯 뜻으로 해석하며, 나아가『 기신론』에서는 이를 法界, 여래의 평등법신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이 같은 개념은 초기경전에서 설해진 18계의 ‘界’나 法界(제18계)와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다. 이러한 거리의 간격을 해소하지 못하는 한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고 단언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필경 양자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사상은 끊임없이 해석되고 변모한다. 불교사상 또한 예외가 아니다. 불교는 도그마가 아니다. 어떻게 초기불교의 ‘法界’가 諸法(일체법) 生因이나 一眞法界라는 의미로 변용 비약될 수 있었던가? 그같이 변용하게 된 계기나 경로는 어떠하였던가? 필자는『 순정리론』에 인용된 경량부 上座 슈리라타(Śrīlāta)의 18界의 이해를 통해 양자 사이의 간격을 해소해보려 한다. 양자의 연결고리만 찾는다면 유가행파의 알라야식이나 여래장사상의 연원을 초기불교로까지 소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알라야식’이나 ‘여래장’이라는 용어 자체는 다만 언어적 가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Ⅱ. 蘊·處·界 3科의 분별


1. 초기경전에서의 3科 분별

주지하듯이 초기불교에서는 분석(분별)론적 방식에 통해 자아(ātman)와 같은 영원하고도 단일 보편의 존재를 비판하는데, 그 대표적인 방식이 이른바 3科分別로 일컬어진 5蘊·12處·18界이다.


生聞이라고 하는 바라문이 물었다. “무엇을 一切라고 합니까?”

불타께서 말씀하였다. “일체란 12入處이니, 眼과 色, 耳와 聲, 鼻와 香, 舌과 味, 身과 觸, 意와 法,

이것이 바로 일체이다.”『( 잡아함』 제319경)


여기서 眼 등은 인식주관(6根, indriya)이며, 色 등은 그 대상(6境,viṣaya)으로, 이는 각기 眼識 등의 依(āśraya)와 所緣(ālambana)이 된다. 이에 따라 12처(6근과 6경)라는 형식의 분별은 여기에 6識이 더해 짐으로써 18界로 설해지기도 하고, 이러한 根·境·識 삼자의 관계(화합: 觸)에서 비롯된 여러 심리현상[心所]으로 확대되어 설해지기도 하며, 이에 근거하여 色·受·想·行·識의 5蘊이라는 형식으로 정리하기도 한다.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무엇이 種種의 界인가? 이를테면 眼界·色界·眼識界, 耳界·

聲界·耳識界, 鼻界·香界·鼻識界, 舌界·味界·舌識界, 身界·觸界·身識界, 意界·法界·意識界이니,

것을 일컬어 종종의 界라고 한다.”『( 잡아함』제451경)


生聞이라고 하는 바라문이 물었다. “무엇이 一切法입니까?”

불타께서 말씀하였다. “眼과 色과 眼識과 眼觸과 안촉을 인연으로 하여 생겨난 受로서 苦·樂·

不苦不樂과, 耳·鼻·舌·身·意와 法과 意識과 意觸과 의촉을 인연으로 하여 생겨난 受로서 고·낙·

불고불락이니, 이것을 일컬어 일체법이라고 한다.”『( 잡아함』 제321경)


眼과 色을 緣하여 眼識을 낳고, 세 가지[三事]의 화합이 觸이며, 촉은 受·想·思와 俱生하니,

이 네 가지(受·想·思와 識)는 無色蘊이며 안과 색은 色蘊이다.『( 잡아함』 제306경)


이러한 3과의 분별은 사실상 無常(=苦)과 無我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자아관념(我見)과 여기서 비롯된 일체의 번뇌 또한 이에 대한 正觀을 통해 끊어진다. 경에서는 이를 三種觀義라고 하였다.:

“무엇을 三種觀義라고 한 것인가? 비구가 만약 고요한 나무 밑이나 노지에서 蘊·處·界를 觀察하고 올바른 방편으로 그것을 思惟하는 것을 ‘삼종관의’라고 한다.”『( 잡아함』제42경)


곧 초기불교에서의 무지란 우리에게 경험된 세계가 영원하고, 단일한 자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으로, 이러한 무지로 인해 탐욕과 증오 등의 번뇌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후 有部 아비달마에서는 3科의 상호포섭관계를 비롯한 이에 대한 분별 해석이 교학의 기본과제가 되었으며, 초기경전 상에서 설해진 업과 번뇌 등 그 밖의 法이나 교학체계의 이론적 정합성을 위해 도출된 개념과의 관계를 밝히는 과정에서 이를 종합하여 色法·心法·心所法·不相應行法·無爲法이라는 5位의 체계로 정리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각각의 제법이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實有, dravya sat)인가, 다만 언어적 개념적 존재(假有,prajñapti sat)일 뿐인가”하는 假實의 문제는 당시 제 부파 사이의 주요문제 중의 하나였다.


2. 3科 假實에 관한 普光의 언급

『구사론』제1「 界品」(T29, 4c14-5a7)에는 蘊·處·界 3科의 假實 문제가 名義의 해석과 관련되어 설해지고 있다. 여기서 논설된 유부학설에 따르면, 온(skandha)은 積聚(rāśi)의 뜻이고, 처(āyatana)는 生門(āya-dvāra)는 뜻이며, 계(dhātu)는 種族(gotra)의 뜻이다.


좀 더 부연하면, 蘊의 경우 경에서 “과거·미래·현재의 것, 내적이고 외적인 것, 거칠고 미세한 것, 저열하고 수승한 것, 멀리 있고 가까이 있는 것, 이와 같은 일체[의 색]을 하나로 취합[一聚,ekadhyam]하여 색온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적취’의 뜻으로 해석하였으며, 處의 경우 根과 境은 심·심소법을 낳는(āya) 門(dvāra, 통로)이 되기 때문에, 界의 경우 하나의 相續을 구성하는 다양한 種類 즉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근본(ākara: 生本)이 되기 때문에 각기 ‘생문’과 ‘종족’의 뜻으로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世親은 “蘊이 만약 다수의 실체가 적취된 것이라면 자아와 마찬가지로 이 역시 假有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2) 衆賢은 “[경에서는] 積聚가 바로 蘊의 뜻이라고 설한 것이 아니라 [과거·미래의 색 등] ‘적취의 所依’를 온의 뜻으로 설정한 것으로, 색 등의 5온을 떠나 별도의 자아를 추구할 수 없듯이 적취의 소의를 떠나 별도의 적취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고 해명한다.3)

2)『 구사론』권1(T29, 5a11-14).

 

3)『 순정리론』권3(T29, 343c24-344a12).


한편 세친은, 자신의 주장대로 적취물이 가유라면 有色處(5근과 5경) 역시 다수의 극미가 적취되어야 비로소 심·심소의 生門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가유라고 해야 한다는 이설(普光에 의하면 경

량부: 주18 참조)에 대해 “만약 극미 각각에 處의 작용이 없다면 極微所集의 根과 境이 화합하여 작용할 때 비로소 處의 뜻(즉 심·심소의 生門)이 성립되며, 그럴 경우 12처가 아니라 근·경 화합의 6처만이 존재한다고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이를 거부한다.4)

4)『 구사론』권1(T29, 5a22-26). 그러나 세친은『 유식이십론』 제7송(世尊密意趣

說有色等處: T31, 75b)에서 12처설을 密意(abhiprāya)로 간주하여 이것의 실재성을

부정한다. 이에 대해 이종철(1996, p.197)은 “세친이 비록『 석궤론』에서〈 한정

사 ‘eva’가 개입된 境·有境의 관계〉를 도입하여 유부 논리의 미비점을 보완하였다

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12처의 실유설’에 따르고 있으며,『 유식이십론』에 이

르러 사상적 변모를 보이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상적 변모의 계기는

무엇인가? 보다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우선 생각나는 몇 가지 사실을 언

급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境과 有境’(후술)의 새로운 모색을 통해 12處의 실재성

을 부정한 것은 상좌 슈리라타였다. 둘째, 그에게 있어 12처설은 다만 境과 有境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주16)有色處(5근·5경)의 차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

다. 이에 따라 ‘眼見色 내지 意了法’의 경설을 世俗說로 간주하였다.(주28; 73) 셋

째, 중현은 상좌가 12處를 승의유로 설한 경 『( 一切有經』: 잡아함 제319-321경)

을 부정하고 有色處 假有論을 주장한데 대해 “부처를 일컬어 스승이라 하니, 이에

무리 짓지 말아야 한다”는 空花(空見)論者의 견해를 인용하여 비판하며『( 순정리

론』권4, T29, 352a11), 상좌 또한 12처설은 眼 등의 5根과 意根이 경계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은 不了義라고 해석한다.(주30) 혹은 有色處의 4대소조를

설하고 있는『 順別處經』(잡아함 322경)을 유부 찬술의 非佛說로 간주한다.(주17)

이종철(동, p.200)은『 유식이십론』에서의 12처의 해체를〈 실체의 이차적 환원〉

이라 칭명하였는데, 우리는 그 단초를 상좌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普光은 이러한 논의에 기초하여 3科에 대한 유부 毘婆沙師와 세친과 경량부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毘婆沙宗(유부)에서는 蘊 등의 3門(科)이 모두 실유의 법이라고 주장하며, 經量部에서는 蘊과 處는 가유이며 오로지 界만이 실유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여기서 論主 세친의 뜻은 [온에 대해] 경에서 “간략히 하나로 취합[一聚]하여”라는 말을 설하였기 때문에 蘊은 가유로, 그 밖의 두 가지(處·界)는 실유로 인정하는 것이다".『 구사론기』권1末(T41, 29a25-27).


보광의 이 문구는 이후 동아시아 俱舍學에서 일반적인 상식으로 회자되었지만,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다.6) 중현이 지적하였듯이, 蘊이 積聚한 것이기 때문에 假法이라면 受·想蘊 등은 무엇의 적취이며, 有色處 역시 극미가 적취하여 소의(眼 등의 5根)와 소연(色 등의 5境)이 된 것이라면 眼界 내지 身界, 色界 내지 觸界는 어찌하여 적취물이 아니라는 것인가?7) 유부에 의하는 한 18계는 12처 중의 意根을 7心界(意界와 眼識界 내지 意識界)로 확장시킨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色處와 色界는 동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6) 金東華(1971, pp.66-68)는 “有部의 의견은 一切諸法의 實體가 恒有한다는 근본적인

脚地에서 이 三科도 역시 그 실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經部가 주장하는 의

미를 상상하건대 蘊은 積聚를 그 義로 하는 고로 이것이 假法일 것은 논의의 여지가

없으며, 또한 處 역시 제 요소가 積聚하여 비로소 所依의 六根이 되고 所緣의 六境이

되어 그로부터 識이 生하게 되는 것인 고로 假法이며, 界만은 實法이라고 한 것인 듯

하다. 그런데 世親은 處와 界는 實法으로 인정하고 오직 蘊만은 假法이 아니면 안된

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만약 諸 有爲法의 和合聚의 義가 蘊義라

는 것을 시인한다면 蘊은 假有라고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蘊이라는 것은 다수의 실

체가 積聚하여 共所成인 까닭이다. 즉 共所成인 것은 有爲法이요, 有爲法은 假法인

까닭이라는 것이다.”고만 설명하고 있으며, 深浦正文(1979, p.94) 역시 보광의 논설

을 전재하고 있을 뿐이다. 西義雄(1975, p.504) 또한 有部宗에서 3科의 實有를 주장

하고, 三者(유부·경량부·세친) 공히 界를 실유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處에 대해 경량부는 假有로, 세친은 實有로 주장하게 된

이유를 다만 보광의 논설에 따라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즉 경량부는 所依(5根)와

所緣(5境)이 극미의 집적이라 주장하기 때문에, 세친은 處의 경우에는 적집의 방식

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경량부가 오로지 界만이 실유라고 주장

한 이유에 대해 해명한 글을 접하지 못하였다. 加藤純章는 그의『 經量部の硏究』

(1989, p.175) 제2부 2장「極微の和集と和合」에서 3科 假實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極微和合의 가유인 蘊·處와 실유인 界의 관계에 대해 곤혹스러움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상좌와 毘婆沙師의 處·界의 假實에 관한 상위를 다만 그들의 인식론(극미의

화합과 화집)에서 더듬고 있을 뿐이다.

7)『 순정리론』권4(T29, 351c28-352a3) 참조.


보광 또한 이 같은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하고 있다. 즉 그는 “색온 중의 5根과 5境을 10處와 10界로 설정함을 인정[許, iṣṭā]한다”는『 구사론』의 문구(T29, 3c23-26)에 대해 “毘婆沙師는 11가지 종류의 색온 가운데 (5)근과 (5)경을 10처·10계로 인정하였지만, 경량부에서는 處는 가유, 界는 실유임을 주장하였기에 處를 界의 본질[體]로 여길수 없었다. 즉 그들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인정한다’고 말한 것이니, 이는 곧 [毘婆沙의 학설을] 함께 믿지 않음을 나타내는 말이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8)

8)『 구사론기』권1末(T41, 25a2-5).


여기서 경량부는 누구이며, 그들은 어떠한 까닭에서 蘊과 處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오로지 界만을 인정한 것인가? 그들에게 있어 處와 界의 차이는 무엇인가? 체르바스키가 말하였듯이 蘊이 존재의 조건(요소)이라면 處는 인식의 조건인데, 이 양자를 부정하고서 그들은 존재와 인식에 대해 어떻게 해명하는가?


3. 上座 슈리라타의 3科 분별

衆賢의 傳言에 의하면 앞서 보광이 지칭한 경량부는 上座 슈리라타(Śrīlāta)이다.9) 그는 4성제의 勝義와 世俗에 대해 논의하면서 “멸제를 제외한 3諦(苦·集·道)의 경우, 假[法]은 바로 世俗諦이지만 그것의 所依가 된 실체[實物]는 勝義諦이기 때문에 2諦와 통한다”10)고 전제한 다음 “蘊은 오로지 세속(가유)이지만 [그것의] 소의가 된 실체는 바야흐로 승의(실유)이니, 處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界는 오로지 승의이다”고 말하고 있다.11) 또한 ‘有色處 假有論’을 주장하면서도 “處는 가유, 界는 실유”(주20)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9)『 구사론』 상에 인용된 경량부가 上座 슈리라타(Śrīlāta)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권오민(2009a; 2009b) 참조.

 

10)『 순정리론』권58(T29, 665c29-666a2).

11)『 순정리론』권58(T29, 666b5-7).


그는 어떠한 까닭에서 蘊·處의 실재성을 부정하고 界의 그것만을 인정하였던 것인가? 온·처의 소의가 된 실체(dravya)는 무엇이고, 이것과 界(dhātu)는 어떠한 관계인가? 그가 생각한 승의유는 무엇인가?


유부에 있어 세속유(saṃvṛti 혹은 prajñpti sat)란 어떤 사물을 물리적으로나 관념적으로 分析하였을 때 그 사물에 대한 지각이 사라지는 존재를 말하며, 승의유(paramārtha sat)는 그렇게 分析되더라도 그것에 대한 지각이 그대로 존속하는 존재이다. 예컨대 色(색온의 색, 물질일반)은 극미나 향·미 등으로 분석될지라도 그것 또한 색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지각은 여전히 존재하며, 受·想 등의 경우 관념적으로 분석되어 일 찰나에 이를지라도 ‘수’ 등에 대한 지각은 여전히 존재한다.12)

12)『 구사론』권22(T29, 116b15-25)에서 取意.


따라서 유부에 의하는 한, 온·처·계는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설혹 분석될지라도 自相을 상실하지 않는 존재로서, 이를 배제하고 자아는 지각되지 않기 때문에 승의유이며, 자아는 이를 통해 드러나

기 때문에 다만 세속유일 따름이다. 그리고 3科는 유위·무위의 일체법을 포섭함에 있어 廣略의 차이만이 있을 뿐으로, 蘊은 일체의 유위법을, 處와 界는 일체법(즉 5온과 무위)을 포섭하는 것이다.

13) 따라서 일체법을 3科로 설정한 이유 또한 온·처·계 자체의 차별 때문이 아니라 교화할 유정의 어리석음이나 근기 혹은 기호의 차이에 따른 것이었다.14)

13)『 대비바사론』권73(T27, 378c18-21).;『 구사론』권1(T29, 4b14-15).

14)『 구사론』권1(T29, 5b4-8). 즉 心所에 어리석어 그것을 자아로 집착하는 이에게는

소를 受·想·思 등으로 나누어 상설한 5온을 설하고, 色에 어리석은 이에게는 그것

5근과 5경으로 분별한 12처를 설하였으며, 色心에 어리석은 이에게는 그것을 10가

(5근과 5경)와 7가지(意와 6識)로 분별한 18계를 설하였다. 혹은 利根과 중간과 鈍

에게, 혹은 간략한 글[略文]과 중간의 글과 자세한 글[廣文]을 즐기는 이에게 순서대

로 온·처·계를 설하였다.


그러나 상좌의 경우, 다수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이나 그 근거가 된 법을 세분할 때 본래의 명칭을 상실하는 것이 세속유이며, 그렇지 않은 것이 승의유이다.15) 그는 이에 따라 “다수의 존재로 이루어진 蘊과, 다수의 극미로 분석될 때 소의와 소연(生門)이라는 명칭을 상실하는 하는 有色處는 가유(세속유)이며, 그것의 근거가 된 실체는 실유(승의유)”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곧 온·처는 단일한 존재가 아니라 다수의 요소로 분석될 수 있다는 말로서, 더 이상 분석되지 않는 실유의 界와는 차별된다. 상좌 슈리라타에 있어 3科는 본질적으로 다를뿐더러 그것의 설정이유 또한 3과 자체의 차별 때문이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말한다.

15)『 순정리론』권58(T29, 666b12-16). 완전한 인용은 주38)을 참조할 것.


"[5]蘊을 설한 것은 [외도 범부가] 주장하는 一合(아트만과 같은 전체성)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해서이고, [12]處를 설한 것은 境(viṣaya)과 有境(viṣayin)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해서이며, [18]界를 설한 것은 境과 有境과 [이에 따라] 생겨난 識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 순정리론』권3(T29, 344b3-5).


3과에 대한 상좌의 이해는 유부와 근본적으로 다르며, 세친과도 다르다. 이제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른지 중현의 傳言을 통해 살펴보자.


Ⅲ. 上座 슈리라타의 一切法 이해


1. 12處의 분별

1) 有色處 假有論

앞서 상좌는 蘊과 處는 그것의 소의가 된 실체만이 승의(즉 실유)라고 하였는데, 이는 필경 5근·5경(즉 색온)의 근거인 大種極微와 受·想·思, 그리고 識의 개별적 실재성을 염두에 둔 발언이었을 것

이다. 현실 상에서 경험되는 5근과 5경은 질적으로는 지·수·화·풍 4대종과 四大 所造(색·향·미·촉)의 聚集이며, 양적으로는 물질의 최소단위인 극미의 취집인 有對의 聚色이기 때문이다. 이에따라 그는 소조색의 실재성을 부정하였을 뿐더러 이를 본질로 하는 有色處(5근·5경: 觸境의 경우 4대종과 소조색을 본질로 함)의 가유를 주장하였다.17)

17) 10處(5근·5경)의 소조색과 法處所攝의 무표색에 대해 설하는 경은『 順別處經』

(현존 잡아함 제322경)인데, 상좌는 이를 佛說로 인정하지 않는다.(권오민, 2009c,

pp.152f 참조) 경량부(譬喩論師)의 ‘所造色 無別體說’은『 순정리론』권5(T29,

356b21-29)에 인용된다. 참고로 譬喩者는 일체 심소법의 무별체설을 주장하지만

『( 순정리론』권11, 395a1-19), 상좌 슈리라타는 受·想·思 3법의 개별적 실재성

을 인정한다.(동 권10, 384b12f)


5識의 소의(즉 5근)와 소연(즉 5경)은 다같이 실유가 아니니, 극미 하나 하나는 소의와 소연이 되지 않기 때문으로, 衆微가 和合하여 비로소 소의와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18)

18)『 순정리론』권4(T29, 350c5-7).


이에 따르면, 5근과 5경의 근거가 되는 개별적인 극미만이 실유이다. 상좌는 處의 실유를 주장한 세친과는 달리 각각의 극미는 處의 작용(즉 5식의 生門: 소의와 소연)을 갖지 않으며, 여러 극미가 화합할 때 비로소 처의 작용을 갖는다고 주장하였다. 앞서 말한 대로 5근과 5경이 分析되어 다수의 극미로 환원되면 ‘소의(根)’와 ‘소연(境)’이라는 본래의 명칭을 상실하기 때문에 세속유(가유)이다.


그러나 만약 소의도 소연도 극미 和合의 가유라면, 다시 말해 안식의 근거가 되는 안근이 극미 화합의 가유로서의 작용만을 갖고, 그것의 실제적 대상인 색경 역시 극미 화합의 가유라고 한다면, 이에 대한 인식 또한 진실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이에 따라 상좌는 계속하여 5識은 虛僞의 妄失之法이라고 말한다.19)

19)『 순정리론』권4(T29, 350c7-13) 참조.


중현은 인식의 진실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상좌의 논의에 대해 ‘壞法宗(空花論의 대승)보다 더한 것’[T29, 350c18]이라거나 ‘壞法論과 가까운 것’[351b13], ‘壞法論宗에 안주하는 것’[351c18]이라는 말과 함께 장문에 걸쳐 비판하지만[350c18-352a25], 그 핵심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5식은 無分別(自性分別)이기 때문에 ‘(극미의) 화합’을 소연의 경계로 삼을 수 없다. 다시 말해 ‘화합’은 실유가 아니기 때문에 計度分別(意識, 즉 사유)에 의해 파악될 뿐이다. 둘째, 상좌의 주장대로라면 5식뿐만 아니라 의식의 소연도 모두 거짓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중현은 상좌가 말한 ‘(극미의) 화합’을 바이세시카 학파의 和合(samavāya)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현종론』(T29,788c14ff)에서 “화합이란 다수의 법에 대해 일으키는 단일한 언어적 관념”이라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극미(色性)와는 별도의 존재로서 직접 지각될 수 없는 것이다. 유부에 의하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단 일한 극미는 현상하지 않으며, 다수의 극미가 집합(和集: 無間의 근접생기)할 때 비로소 5識의 소연이 된다. 중현은 이러한 유부의 견해를 드러내기 위해 다시 上座 문도들의 말을 통해 자파의 견해와는 대비되는 그들의 입장을 확인하고 있다.


"그 논사(상좌)의 문도들은 세간의 문헌을 익혀 여러 명의 맹인의 비유를 인용하여 자신들의 종의를 [다음과 같이] 논증하고 있다. “傳說에 따르면, 맹인 각각에는 색을 보는 작용이 없으며, 여러 명의 맹인들이 和集하여 (다시 말해 함께 모여) 있더라도 역시 색을 보는 작용을 갖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극미 하나하나는 소의가 되는 일도 없고 소연이 되는 일도 없으며, 다수의 [극]미가 화집하여 있을 때에도 역시 이 같은 작용은 갖지 않는다. 따라서 處는 假有이며, 오로지 界 만이 實有이다.”20)

20)『 순정리론』권4(T29, 350c14-17). 이에 대해 중현은 이러한 비유는 바로 상좌

자신의 주장(주18)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유부의 경우 이미 극미 자체

가 소의(5근)와 소연(5경)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맹인의 비유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T29,352a15-21)


유부의 논사인 중현으로서는 ‘화합’과 같은 언어적 개념은 무분별(자성분별)인 5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할 수밖에 없지만, 이에 관한 상좌의 생각은 전혀 다르다. 심·심소의 次第生起를 주장하는 상좌(혹은 譬喩者)에 의하는 한 외계대상(=所緣)은 識을 낳는 所緣緣과 識에 나타난 所緣境으로 구분되며(그렇지 않을 경우 찰나멸론을 어기게 되거나 심·심소의 대상이 동일하지 않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21) 이러한 소연경(識에 나타난 전 찰나 대상의 형상)이 意地(의식현상)를 통해 전전 상속함으로써 이에 대한 일련의 지식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衆微가 화합하여 비로소 소연이 된다’는 말은, 각각의 극미는 지극히 미세하여 5식의 소연연(발생緣)이 되지 않는다거나 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勝義인 각각의 극미를 분별할 수 없기 때문에) 화합(상호접촉)한 극미 聚集의 형상을 소연(경)으로 삼는다는 말이지 극미와는 별도의 존재인 ‘화합’ 자체를 소연으로 삼는다는 말이 아니다.

21)『 순정리론』권19(T29, 447b16-23). 陳那는 그의『 觀所緣緣論』(T31, 888b12f)에서

이를 ‘生識의 緣과 帶相의 所緣’이라 하였다.


또한 인식의 차제생기를 주장하는 한, 다시 말해 根·境(제1찰나)으로부터 識(제2찰나)이 발생하고, 여기에 나타난 외계대상의 형상(相)을 다음(제3) 찰나의 意識이 인식한다고 주장하는 한,22) 5식(제2찰나)은 유부가 주장하듯이 현재의 대상을 소연(경)으로 삼는 것도 아니다. 5식의 대상은 과거법이다.23) 따라서 5식 상에 나타난 형상은 마치 거울에 비친 영상처럼 실유가 아니며, 이에 관한 인식 또한 진실이 아니다. 중현은 이러한 그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22)『 순정리론』권10(T29, 385b17-18).;『 구사론』권10(T29, 53a19-21). 心·心所의

次第生起에 따른 上座의 인식론에 대해서는「 불교철학의 학파적 복합성과 독단성(2):

陳那의 觀所緣緣論에서의 외계대상 비판의 경우」에서 밝힐 예정이다.

23)『 순정리론』권8(T29, 374b12), “有執, 五識境唯過去.” 여기서 ‘어떤 이(有)’는 두말

할 것도 없이 上座이다. 동론 권19(447b19-20), “彼(譬喩者宗)說, 色等若能爲緣, 生

眼等識, 如是色等, 必前生故.” 상좌는 이에 따라 비존재인 과거법 역시 인식의 대상

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T29, 487a17f: “上座此〈六處分別〉中, 廣爲方便, 立無

境識”), 이에 대해서는 권오민(2007, pp.31-37)에서 논의하였다.


"여기서 上座는 “眼 등은 오로지 世俗인 和合으로서의 작용을 가질 뿐이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이같이 말하였다. “안 등의 5근은 오로지 世俗有일 뿐이니 [극미 하나하나는 소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 그리고 5근에 의해 발생한 識은 오로지 세속유를 반연할 뿐이니, 무분별이기 때문으로, 마치 맑은 거울에 온갖 색의 영상[像]이 비친 것과 같다. 바로 이같은 이치에 따라 [5]식은 의지할만한 것이 되지 않는 것으로, 佛世尊께서 ‘智에 의지하고 識에 의지하지 말라’고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意識은 세속유와 승의유를 모두 반연하기 때문에 그 자체 의지할만한 것이기도 하고 의지할만한 것이 아니기도 하다.”24)

24)『 순정리론』권26(T29, 486c18-25).


2) 有境과 境

상좌가 주장하듯이 5식의 소의와 소연이 되는 10가지 有色處가 극미화합의 가유라면, 그리하여 5식의 대상이 거짓된 것[妄境]이라면,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도 聖語가 아니라고 해야 한다. 혹은 眼·色이나 色·聲 등의 차별도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즉 그는 극미의 有方分과 그것의 상호 접촉을 인정하였는데, 그럴 경우 能觸(身根)과 所觸(觸境)의 구별이 모호해져 有境(즉 根)과 境의 차별도 상실되고 만다.25) 중현 또한 이 같은 사실을 비판의 한 논거로 삼고 있다.26)

25)『 순정리론』권8(T29, 372c27-373a1).; 권오민(2010), p.115 참조.

 

26)『 순정리론』권4(T29, 351c14ff).; 권4(351c25-28).; 권5(357b9ff).; 권8(373a12-13).


유부의 경우 실유의 法은 自相(svalakṣaṇa)을 갖으며, 이에 따라 제법은 차별된다. 즉 眼根은 色을 보는 것, 耳根은 聲을 듣는 것, 鼻根은 香을 맡는 것, 舌根은 味를 맛보는 것, 身根은 觸을 느끼는 것, 意根은 法을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좌는 이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던 것인가?


그는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고, 보지 않은 것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聖語”라는 경설『( 衆集經』, T1, 50b29)이나 ‘안근은 색을 보는 것’ 내지 ‘의근은 법을 아는 것’이라는 경설은 다만 세간의 언어적 관습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27) 즉 根·境(제1찰나)이 존재할 때 識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識(제2찰나)이 존재할 때 근·경은 이미 소멸하였다. 현재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인식(識)이라는 단일한 사태(唯法, dharmamātra) 뿐이기 때문에 그것을 主客 能所로 구분하려는 것은 인간의 사유나 언어적 관습일 뿐이라는 것이다.28) 즉 12處는 세간의 언어적 관습에 따라 境(viṣaya)과 有境(viṣayin)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해 [가]설한 세속설일 뿐으로(주16), 有色處의 차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27)『 순정리론』권4(T29, 351c16), “若謂, ‘隨世俗說, 如是言(於見言見)無斯過者,’”;

7(367b27f), “爲順世情, 假興言說, 眼名能見, 識名能了.” 상좌는 경에서 “識이

了別한다”고 하여 識을 요별의 주체(了別者)로 설한 것 역시 世俗說이라 주장한

다.(주73 참조)

28) 이른바 根見·識見을 부정하는 경량부(혹은 譬喩者)의 和合見說이다.『( 구사론』

권2,T29, 11b1-6;『 대비바사론』권13, T27, 61c8ff)『 순정리론』(권7, 367

b24-c1)에서는 이를 譬喩論師의 설로 전한다. 상좌 슈리라타에 의하는 한 和合

見說의 ‘和合’은 통상의 논의처럼 根·境·識 三事나 심·심소의 俱起 相應의 화합

(深浦正文, 1979, p.41; 加藤純章, 1989, p.24)이 아니라 次第生起하는 인과적

관계를 말한다.『( 순정리론』권10, T29,384c8, “[上座]旣許三法互爲因果名

爲和合.”; 동, 386b24f, “先有根境識三因果性故, 受方得起. 是故根境, 於受起

時, 亦有展轉能生功用.”) 이러한 상좌의 논의는 유가행파의 그것과 궤를 같이

한다. 즉『 유가사지론』(권56,T30, 610a19-27)에서는 “勝義의 道理에서 볼

때 諸法의 自性은 衆緣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찰나멸이기 때문에, [실

유의]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見의 주체는 안근도 안식도 아니지만, 世俗의

道理로 볼 때 안근은 見의 가장 수승한 조건이기 때문에 이를 주체로 설정할

수 있다”고 논의하며,『 대승아비달마잡집론』(권2, T31, 703b12-15)에서

는 “일체법은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에 見의 주체는 안근도 안식도 아니며,

그것의 和合을 ‘見’이라 가설한 것이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境과 有境에 대해서도 유부와는 매우 다르게 해석한다. 유부의 경우 두말할 것도 없이 전술한대로 眼 등의 6근이 有境이며 色 등의 6경이 境으로, 이는 부동의 사실이다. 그러나 상좌는 眼등의 5근은 色 등을 경계로 삼고, 의근은 法을 경계로 삼지만, 결국 5근과 의근도 (과거 전 찰나의 법으로서) 一切法에 포함되므로 이 역시 의근의 경계가 된다고 말한다.29) 즉 그는, 12처는 境과 有境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해 설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안 등의 5근과 의근이 경계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설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諸法으로서 意의 行相(즉 所緣境)이 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모두는 法處에 포섭된다고 말하고 있다.30)

29)『 순정리론』권3(T29, 344b7), “然一切法, 皆意根境.”; (344b25-26), “五(根)取自境,

(根)緣一切, 有何雜亂?”

 

30)『 순정리론』권3(T29, 344b14-15), “又上座說: 諸法無非意所行故, 皆法處攝.”


일체법이 의근의 대상이라고 한 이상 (의근도 일체법에 포함되므로) 12처는 결국 법처 하나로 총괄될 수 있다. 그는 이같이 말한다.


"진실로 1處(즉 법처)만이 존재할지라도 차별상에 근거하여 1처 중에 그밖의 다른 11처를 설정한 것으로, 말하자면 처음의 眼處 역시 法處라고 이름할 수 있고, 나아가 意處 역시 법처라고 이름할 수 있으며, 최후의 법처는 오로지 법처라고 이름할 뿐이다."31)

31)『 순정리론』권3(T29, 344b17-19).


이 같은 12處의 해석은 自相과 共相에 따른 제법의 분별과 간택을 추구하는 유부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상좌의 주장은 중현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境과 有境이 구별 없이 뒤섞인 것으로 혼란스럽다. 중현에 의하는 한 불타께서 處를 설한 까닭은 도리어 境과 有境의 뒤섞임이 없는 작용을 뒤섞임이 없이 설정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32)

32)『 순정리론』권3(T29, 344c13-14).


3) 內法과 外法

‘일체법(12處)은 법처에 포섭된다’는 상좌의 주장은 그것의 內外 분별에도 혼란을 야기한다.『 대비바사론』(T27, 381b8-c2)에 의하면 세존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內門에 대해 靜慮를 닦게 하였기 때문에, 나아가 제자들로 하여금 먼저 內觀(內法에 대한 念住)을 닦게 하였기 때문에 內外에 대해 분별하게 된 것으로, 유부에서는 자아의 근거가 되는 6근과 6식을 내 적인 것(ādhyātmika)으로, 그 밖의 6경을 외적인 것(bāhya)으로 분별하였다.


이에 대해 상좌는, 我執(ahaṃkāra)의 依止가 되는 마음(6識身)의 所依를 내적인 것, 所緣을 외적인 것으로 분별한 세친(經主)33)과 마찬가지로 내외의 기준을 6식에 두어 6식의 소의가 될 때는 내적

인 것으로, 의식의 소연(즉 法境)이 될 때는 외적인 것으로 분별하였다.34) 따라서 그는 앞서 일체법이 의근의 대상이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안근 등은 소의가 될 때는 내적인 것이지만, 소연이 될 때는 외적인 것이 된다.


"그(상좌)는 말하였다.: 예컨대 意根은 內處에 포섭되지만 의식의 소연이 될 때는 또한 外處에 포섭된다.35) 또한 상좌는 말하였다.: 眼 등이 내적인 것 외적인 것 모두와 통한다는 주장은 결정코 성립될 수 있으니, 세존께서 “필추들은 존재하는 모든 眼으로서 혹은 과거의 것이나, 혹은 미래의 것이나, 혹은 현재의 것이나, 혹은 내적인 것이나, 혹은 외적인 것이나―(중략)―. 意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음을 필추들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35)『 순정리론』권6(T29, 361c2-5).


이에 대해 중현은, 상좌의 주장은 결코 경에서 설한 적이 없는 불확정적 사실[不成]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개별적 특성마저 뒤섞어 버렸으며,37) 그럴 경우 4念處觀에서의 身·受 등도 외적인 것이라 해야 한다고 힐난한다.

37)『 순정리론』권6(T29, 361c21-22; 362a5-6). 중현은 상좌가 인용한 경문에서 ‘외적인

것’은 彼同分의 안근이나 識의 소의와 동일하지 않은 몸(즉 타인의 몸)에 존재하는 안근

(색)으로 해석한다.


상좌는 어떠한 이유에서 일체법(12처)을 法處로 총괄하여 의근의 대상으로 설정하였으며, 그것을 모두 외적인 법으로 분별하였던 것인가? 상좌(경량부)와 이에 영향 받은 세친 학설에 대한 비판서라고 할만한『 순정리론』에서는 이에 대한 그의 변명을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컨대 이는 인식을 제법의 인과적 繼起관계로서 설명하는 그의 인식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그는 동일한 순간에 공존하는 根·境·識의 상호접촉과 이와 俱生하는 제 심소(受·想 등의 大地法)에 의해 인식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다시 말해 직접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根·境(제1찰나)을 인연으로 하여 識(제2찰나)이 생겨나고, 여기에 나타난 경계대상의 형상을 다음 찰나 意識(제3찰나)이 인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일체법(12처)은 모두 의식의 소연이 되며, 소연이 된 이상 그것들은 모두 ‘외적인 것’이 된다.


이같이 일체법은 모두 법처로 통괄되며, 그것은 모두 의식의 소연이 된다고 하는 (다시 말해 마음 상에 나타난 형상이라고 하는) 그의 생각은 분별의 철학이라고 할만한 유부의 교학체계를 일탈한 것으로, 이는 결국 그의 상속설(즉 수계설)과 이에 따른 인식론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 勝義有로서의 ‘界’의 의미와 隨界

그렇다면 상좌는 어떠한 까닭에서 界의 실유를 주장한 것인가? 處가 가유이고 界가 실유라면, 眼處와 眼界 내지 觸處와 觸界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은 5식의 소연(5境)이 가유라면, 색 등의 5界를 소연으로 삼는 경우 그것 또한 가유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도대체 그에게 있어 ‘계’란 어떤 의미인가?


앞서 언급하였듯이 상좌는 “蘊과 處는 세속(가유)이지만 그것의 所依가 된 실체[實法]는 승의(실유)이며, 界는 오로지 승의이다”(주11)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사실로 본다면 승의유란 어떤 사물의 근거가 된 존재이며, 界를 승의유라고 한 이상 이 또한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승의와 세속의 二諦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만약 다수의 존재[多物]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有’라고 시설하였으면 이를 世俗이라 이름하며, 다만 단일한 존재[一物]에 대해 ‘유’라고 시설하였으면 이를 勝義라고 이름한다. 또한 [어떤 존재의] 근거가 된 법을 細分하여 분별할 때 본래의 명칭을 상실하는 것을 일컬어 세속이라 하며, [어떤 존재의] 근거가 된 법을 세분하여 분별할 때 본래의 명칭을 상실하지 않는 것을 일컬어 승의라고 한다."38)

38)『 순정리론』권58(T29, 666b12-16)


중현은 이에 대한 반증을 통해 그의 주장을 비판한다. 즉 이러한 정의에 따르는 한 觸·法의 2界 또한 다수의 존재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유라고 해야 할 것이며, 苦諦(온·처·계) 또한 세분하더라도 그 명칭(즉 ‘괴로움’)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에 “고제는 세속유와도 통한다”는 그의 주장(주10)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현과 상좌 사이에는 소통하기 어려운 근원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유부에 의하는 한 觸處와 觸界는 동일한 것으로 분류의 갈래를 달리할 뿐이다. 즉 촉처는 身識을 낳는 ‘門’으로서 설정된 것이며, 촉계는 生의 相續을 구성하는 ‘種類’로서 설정된 것이다. 또한 觸에는 11가지(4大種과 7所造觸)가 있지만, 각각으로 세분(분석)되더라도 ‘촉’이라는 자성(지각)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에 실유이다.


그러나 상좌의 논의에 의하면, 촉처와 촉계는 다르다. 인식(身識)의 門이 되는 촉처는 다수의 존재(4대종)로 이루어진 가유이지만, 그것의 근거가 된 4대종은 촉계로서 실유이다.39) 중현은 이 같은 상좌의 생각을 “[촉·법의] 2界는 파괴되고 쪼개질 때에도 ‘계’의 특성이 상실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승의이다”는 말로 전하고,40) 이에 대해서도 역시 “蘊과 處가 파괴되어 쪼개질 때에도 [온·처의 특성인] [積] 聚와 [生]門의 뜻은 상실되지 않는다”고 반증하지만,41) 상좌는 애당초 蘊과 處를 다수의 화합물로, 界를 그것의 所依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중현은 다시 그의 생각을 이같이 정리하고 있다.

39) 상좌에 의하면 觸界는 오로지 大種性이며, 7所造觸은 대종의 차별이다.『( 순정리론』,

T29, 352c1-8; 353b14-20; 354b21-27; 355a3f 참조)

40)『 순정리론』권58(T29, 666b9-10).; 동론 권33(533a12-14).

 

41)『 순정리론』권58(T29, 666b10-11).


"이 두 가지(處와 界) 역시 차별되니, 다수의 존재가 화합한 것을 ‘處’라 이름하고, 그러한 각각의 개별적 존재를 ‘界’라고 이름한다."42)

42)『 순정리론』권4(T29, 351c29-352a2).


그리고 계속하여 “그는 處와 界를 설정하는 방식이 동일하지 않으며, 도무지 올바른 이치도 그 밖의 다른 논거[量] 즉 經證도 없다. 다만 저 上座가 자의에 따라 설정하였을 뿐이다”고 힐난하고 있다.43)

43)『 순정리론』권4(T29, 352a3-5).


사실 ‘界(dhātu)’라고 하는 말은 ‘處(āyatana)’와는 어원적으로든, 불교교학 상의 의미로든 그 위상이 다르다. āyatana가 장소, 영역, 거처 등을 나타내는 반해, ‘―에 놓다’ ‘―을 주다’ ‘산출하다’는 뜻의 어근 √dhā(任持 能持로 漢譯)에서 파생한 dhātu는 層(layer), 요소, 성분, 혹은 語根 등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處는 심·심소가 머무는 장소, 界는 현상을 구성하는 차별적인 요소(自性)의 뜻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데,『 대비바사론』에서의 해석 역시 대체로 그러하다.44)

44)『 대비바사론』권73(379a11ff)에서는 處를 12가지 뜻으로, 권71(367c21ff)에서는 界를

8가지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普光은,『 구사론』제1「 分別界品」은 蘊·處·界의 3科를 밝힌 章임에도 ‘계품’이라 이름한 이유에 대해 “界란 性이며, 性은 곧 體이니, 이 품에서는 諸法의 體를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있다.45) 참고로 중현은『 순정리론』에서 이를「 辯本事品」으로 改名하였는데, 여기서 ‘본사’는 아마도 mūla dravya(本體, 근본실체)의 역어일 것이다.

45)『 구사론기』권1(T41, 1c1f).


혹은 상좌는 擇滅(열반: 이는 법처에 포섭됨)의 실재성을 비판하면서 그 논거로서 “일체법은 12처이다”, “이러한 12처에는 다 戱論이 존재하며 모두 무상하다”는 경설을 인용하며,46) 중현도 이를 확인하고 있다.(중현은 이 경에서는 계속하여 ‘12처에는 다 熱惱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유루의 12처에 근거하여 密意로서 설한 것이라 해석한다)

46)『 순정리론』권17(T29, 434a24ff). 여기서 ‘此十二處, 皆有戱論’는 경설을 어떻게 이해

야 할 것인가?『 유가사지론』권2(T30, 284b11f)에서는 一切種子識(즉 알라야식)

自體의 最勝因은 淨·不淨의 業이 아니라 ‘戱論에 樂著하는 것’이라고 논설하는데, ‘戱論’

界·種姓·自性·因·薩迦耶·阿賴耶 등과 함께 種子(즉 名言種子)의 異名으로 일컬어진다.

(동, 284c11ff)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보건대 ‘界’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진실의 실체’(상좌에 의하면 勝義有)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며,47) 이같은 점에서 ‘界’는 ‘處’와 위상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47) 참고로 아함『( 잡아함경』권28, T2, 199a15-17)에서는 界를 甘露(不死, amṛta)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한편 高翊晋은 일찍이「 阿含法相의 體系性 硏究」라는 논문에서 “18界는 六六法(6根·6境·6識·6觸·6受·6想)에 대하여 그것의 실상을 밝힌 眞如法界이며, 六六法은 그것의 진여법계인 18계를 근거로 緣起한 有爲世間이다”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논의의 可否는 별도의 문제로 제켜두더라도 ‘界’를 蘊·處 등과 구별하고 있다는 점만은 설일체유부 계통과는 다른 불교사상사의 또 다른 일면을 예고한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松本史郞은 “여래장사상은 dhātu-vāda(基體說)이며, 이는 佛說(=연기설)에 어긋나기 때문에 불교가 아니다”고 주장하여 이른바 批判佛敎라는 새로운 불교학의 場을 열었다고 평가받기도 하였는데, 그의 주장에 대한 可否의 판단 또한 유예하지만, “dhātu(=locus, 基體, 실재)는 dharma(=super locus, 超基體, 비실재)의 원인”이라는 사유는, “5온과 12처(法)는 가유이지만, 그것의 소의가 된 실체 즉 18계는 실유”라고 주장한 상좌 슈리라타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여래장사상에서 여래장(혹은 진여법성, 佛界, 法界)을 알라야식의 淸淨分(圓成實性)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유식사상에서의 알라야식 또한 萬法(일체법=諸法)을 발생시키는 기체 즉 界(dhātu)로 이해할 수 있다.(실제 중현은 경량부의 種子bīja나 상좌의 隨界anudhātu를 기체나 토대 즉 所得諸法의 生因로 이해하여 이를 비판한다)


 

사실 유부에서도 18계를 어떤 한 상속을 구성하는 種類 즉 그것을 생겨나게 하는 根本이나 토대(ākara)의 뜻으로 해석하였지만, 상술한대로 處와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유가사

지론』에서는 ‘界’를 원인[因], 種子, 本性, 種性, 微細, 任持의 여섯 가지 뜻으로 해석하며,50) 나아가 無着은 그의『 大乘阿毘達磨集論』에서 ‘一切法의 種子’, ‘능히 自相을 任持하는 것’, ‘능히 因·果性을 任持하는 것’, ‘일체법의 차별을 攝持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는데,51) 이에 대해『 雜集論』에서는 다시 다음과 같이 해설하고 있다.

50)『 유가사지론』권56(T30, 610a1-2). 이에 반해 ‘處’에 대해서는 諸心·心所의 生長門,

緣, 方便, 和合性, 所依止, 居住處의 여섯 가지 뜻으로 해석하는데(동, 611b5-7), ‘화합

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심·심소와 관계한다. 또한 ‘화합성’의 경우, 10가지 有色處는

‘극미화합’이라는 상좌의 견해와 일치한다.

 

51)『 대승아비달마집론』권1(T31, 666c27-28).


‘一切法의 種子’의 뜻이라고 함은, 아뢰야식 중에 [존재하는] 제법의 종자에 의거하여 ‘界’라고 말한 것이니, 界는 바로 원인의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능히 因·果性을 任持하는 것’이란, 18계 중에서 根·境의 諸界와 6識界가 바로 그와 같은 순서(즉 因性과 果性)임을 말한다. ‘일체법의 차별을 攝持하는 것’이란 諸經에서 설한 地 등의 諸界 및 그 밖의 界가 상응하는 바에 따라 모두 18계에 포섭됨을 말한다.52)

52)『 대승아비달마잡집론』권2(T31, 704b25-c2).


『구사론』(T29, 18c9-11) 상에서도 ‘계’를 種子(bīja)의 의미로 이해하는 異說(普光과 稱友 공히 經部師 Sautrāntikāḥ)이 설해지지만, 이 같은 점에서 본다면 초기 유가행파에서 ‘界’는 일체법(12처)을 낳고 그것의 차별을 포섭하는 종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Ⅰ장에서 밝힌 대로 ‘界가 일체법의 평등한 소의’라는 경설은『 섭대승론』 이래 알라야식의 첫 번째 논거였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학계에서 지적된 바로서, 예컨대 山部能宜는 “유가행파의 최초기의 종자설은 ‘界’라는 개념과 친연성이 강한데, 선행한 18계 각각이 후 찰나에 대응하는 법을 산출하는 힘을 지닐 때 ‘종자’로 간주되었다”고 말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사상의 연원을 초기경전(예컨대『 잡아함경』 제444경: 주87, 제494경)에서 설한 種種界에서 구하기도 하였다.(주91 참조)


상좌 또한 ‘계’를 種種의 法이 熏習하여 이루어진 種子로 이해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이러한 다수의 종자에 수반(隨逐)되는 힘을 隨界(anudhātu, 혹은 舊隨界purva-˚)라고 하였다. 이는 제 유정이 相

續 展轉하는데 원인(즉 因緣)이 되는 것으로 一心(일 찰나의 마음)중에 갖추어져 있다.54) 상좌의 수계설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문이 필요하지만,55) 그는 界를『 섭대승론』에서의 알라야식의 첫 번째 경증과 마찬가지로 현행하는 일체법의 所依로 간주하였다. 예컨대 隨眠(anuśaya)의 의미를 ‘현행하는 번뇌인 纏(paryavasthāna)의 원인적 존재(因性)로서 항상 수반되는 것’, 다시 말해 ‘번뇌의 수계’로 이해하였으며,56) 무루법의 종자 역시 淨界라고 하였는데,57) 18계 또한 일체법의 소의로서 그것이 훈습된 종자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3科 중 이 것만을 實有라고 주장하였을 것이다.

54)『 순정리론』권18(T29, 440b3-4), “然上座言: 因緣性者, 謂舊隨界. 卽諸有情相續展轉,

能爲因性.”; (440b15f), “此爲何相? 是種種法, 所熏成界, 以爲其相, 此亦難知.”; (442b1

-2),“又彼上座如何可執言? ‘一心具有種種界, 熏習一心多界.’”(주86) 참조.

55) 이에 대해서는 三友健用(1980),「 舊隨界について」; 加藤純章(1989),『 經量部の硏究』

제2장 6절「 上座の隨界說」; 박창환(Changhwan Park, 2007), The Sautrāntika Theory

of Seeds(bīja) Revisited 제3장 ‘Śrīlāta’s Theory of Subsidiary Karmic Elements

(Anudhātu)’을 참조할 것.

56)『 순정리론』권45(T29, 597b27-c14) 참조. 따라서 無明 또한 실재하지 않으며 다만

그것은 무명의 隨界로서 존재한다.(동론 권28, 499b3f, 彼宗義, 雖無無明―若謂彼(무명)

無明隨界,―”)

57)『 순정리론』권15(T29, 421a16ff), “若謂淨界本來有者, 因旣恒有, 何緣障故, 無漏果

法曾未得生?―如何復執, 淨界爲種?”(무루종자를 설정한데 대한 중현의 힐난)


참고로『 유가론「』섭결택분」에서는 18계를 간략히 ① 眼 등의 法에 대한 眼界와 같은 法界로서의 의미. ② 種姓에 머무는 이가 갖는온갖 [무루]界인 淨界로서의 의미. ③ 18界 처럼 무시이래 종성에 머무는 이든 머물지 않는 이든, 열반으로 나아가는 이든 나아가지 않는이든 어떠한 유정도 성취하는 本性界로서의 의미. ④ 이러한 온갖界(18계)의 淨·不淨法은 일찍이 熏習된 것으로 勝劣의 생이나 열반의 원인이 된다는 熏習界로서의 의미. ⑤ 결과를 초래하고서 멸한 已與果界로서의 의미. ⑥ 결과를 초래하지 않고서 멸하거나 멸하지 않은 未與果界로서의 의미라는 6가지 갈래로 분별하는데,58) ①과 ②는 유루·무루법의 所依(종자)로서의 界, ③과 ④는 본성(자성)으로서 존재하는 것(말하자면 本性住)과 선·불선에 의해 훈습된 것(習所成)으로서의 界, 그리고 ⑤와 ⑥은 界의 與果性에 근거한 분별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추측컨대 18계를 일체법의 소의로, 수계를 種種의 法이 훈습되어 이루어진 界로 간주한 상좌 역시 18계는 本性界로, 수계는 熏習界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58)『 유가사지론』권56(T30, 610a7-17).


3. 일체법(12처)의 異熟生說

유부 제법분별에 의하면, 眼 등의 5界와 色·香·味·觸의 4界는 異熟生(vipāka-ja, 전생의 선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것)·所長養(supacayika 음식이나 수면 등에 의해 후천적으로 길러지는 것)·等流性(naiṣyandikā, 동류의 성질을 지닌 원인의 결과, 즉 等流果)이지만, 聲界의 경우 단절되기도 하고 다시 생겨나기도 하기 때문에 다만 소장양·등류성이며, 7心界와 法界는 極微所成이 아니기 때문에 다만 이숙생·등류성이다. 그리고 有實事(dravyavat, 堅實을 본질로 하는 무위)는 법계뿐이며, 見道의 첫 찰나인 苦法智忍은 等流性이 아니기 때문에 一刹那(kṣaṇika)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意·意識·法界가 포섭된다.


그러나 상좌 슈리라타는 12處에 근거하여 一切法은 이숙생이며, 소장양은 이숙의 상속을 護持하여 단절되지 않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59)『 순정리론』 상에서는 그의 논거를 네 가지로 전하고 있는데,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9)『 순정리론』권5(T29, 359a8-10).; 동, (359b1-4).


첫째, 유부의 주장대로라면 하나의 所依身 중에 이숙에 의한 것과 장양에 의한 것이라는 두 종류 眼處 등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안식등을 발생시키는 이러한 두 根의 작용은 별도로 관찰되지 않기 때문에 이숙생과는 다른 별도의 소장양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유부에서도 聲處의 원인(즉 대종)은 이숙생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에, 성처 역시 이숙생이라고 해야 한다.


셋째, 異熟生(果)은 원인에 의해 단박에 낳아지는 것, [원인에 따라] 저절로 일어나는 것으로, 되풀이하여 노력하지 않고서도 생겨날 수 있다.


넷째, 眼 등과 이것(聲)은 마땅히 동일하다고 해야 한다. 만약 “聲處가 이숙이라면 無心定의 상태에서도 항상 작용해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면, 意處 등의 경우는 어떠한가? 만약 “의처 등은 [전후로] 상속한다”고 말한다면, 이 역시 옳지 않으니, 이숙생은 단절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60)

60)『 순정리론』권5(T29, 359a10-16).


이에 대해 중현은, 色·聲處(身·語業)와 意·法處는 선·불선·무기의 三性과 통하기 때문에(이숙과는 오로지 무기임), 무루법을 이숙생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일체법은 12처에 포섭된다고 하는 한) 무정물[非情]도 이숙생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에, 나아가 일체의 결과는 숙세의 원인(즉 이숙인)에 의한 것이라는 외도의 주장과 동일하기 때문에 상좌의 주장은 마치 큰돌에 의지

하여 깊은 물에 떠 있을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한다.61)

61)『 순정리론』권5(T29, 359a17-b5).


이에 상좌는 “종자가 거름을 자양분으로 삼아 능히 싹을 낳듯이,62) 현재의 衆緣도 이숙인이 결과를 낳는 것을 돕는 功能을 갖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宿作外道(즉 Nigaṇṭha, 尼乾子)의 주장과 동일하지 않다”고 해명하며, 중현 또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일체법이 모두 오로지 이숙인에 의해 낳아진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고 논박한다.63)

62)『 순정리론』권18(T29, 441a26).

63)『 순정리론』권5(T29, 359b5-6).


상좌는 어떠한 까닭에서 18界에 근거하여 이를 5類로 분별한 유부와는 달리 12處에 근거하여 일체법을 다만 異熟生으로 분별하였던가? 그는 중현이 힐난한 것처럼 異熟生과 所長養과 等流性이라고 하는 말의 뜻도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인가?64) 일반적으로 이숙과는 원인과 시간적 간격을 갖는 것(동시나 무간이 아님)인데, 그는 어떠한 까닭에서 ‘단박에 낳아지는 것[頓引發]’이라고 말한 것인가? 상기의 논설만으로는 실로 요령부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64)『 순정리론』권5(T29, 360a14-15).


그런데 중현은, “이숙인이란 불선과 선으로 오로지 유루이다(異熟因不善 及善唯有漏)”는『 俱舍論本頌』「( 根品」제54송 후반)에서의 ‘오로지’라는 말을 해석하면서 상좌의 학설과 동일한 내용을 有餘師의 설로 전하고 있다.


有餘師는 “일체의 결과는 다 이숙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였으므로, 그는 ‘이숙인은 그 자체 일체의 원인을 포섭한다’는 사실 또한 인정해야 할 것이니, [본송에서의] ‘오로지’라고 하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이와 같은 유여사의 그릇된 생각[橫計]과 함께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설한 말이다.

그는 어떠한 연유에서 “일체의 결과는 다 이숙이라 이름한다”고 주장한 것인가?

契經에서 “이러한 大光明은 무엇의 이숙인가?”라고 설하였으며, 또한“두 종류의 施食에 의해 초래된 이숙은 평등하고 평등하다”고 말하였으며, 또한 “愛는 受의 이숙이다”고 설하였으며, 또한 “여래가 만약 이러한 말을 설하지 않는다면, 모든 시절의 중생에게 이와 같은 이숙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고도 말하였으며, 또한 “이러한 꿈은 무엇의 이숙인가?”라고 설하였으며, 또한 “모든 세간에서도 역시 먹을 것[食] 등을 설하여 즐거움의 이숙이라 한다”고 하는 등 이러한 유형의 말씀이 매우 빈번하게 설해지고 있기 [때문이다].65)

65)『 순정리론』권16(T29, 427a3-10). 유부처럼 경설 이면의 별도의 뜻을 구하지 않고

설 자체만으로 그 뜻을 이해하려는 것은 상좌 특유의 성교관이다. 권오민(2009),

「 佛說과 非佛說」Ⅳ-1 ‘상좌 슈리라타의 불설론’ 참조.


물론 중현은 이에 대해 “무루법은 이숙과를 갖지 않는다”거나 “불선과 선의 유루법만이 이숙인이 된다”고 설한 또 다른 계경을 인용하여 유여사가 인용한 경에서의 ‘이숙’이라는 말은 교화할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비유적으로 假說한 것이라고 해명하고서, 만약 일체의 결과가 다 이숙이라면, [6因으로 차별되는] 온갖 원인도 다 이숙인이라고 해야 하며(다시 말해 일체법이 異熟生이라면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 예컨대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난 탐·진·치 등도 모두 宿業에 의한 것이라고 해야 하며), 그럴 경우 離繫(Nigaṇṭha: 宿作外道)의 邪論과 동일한 것이 되고 만다고 비판하는데,66) 그는 이에 대한 유여사의 辯을 이같이 전하고 있다.

66)『 순정리론』권16(T29, 427a10-b9).


[宿業을 원인으로 한다고] 인정하더라도 무슨 과실이 있을 것인가? 여러 형태의 신체가 숙업의 결과이듯이, 현행하는 번뇌의 차별 역시 그러한 것이다.67)

67)『 순정리론』권16(T29, 427b7f).


만약 여기서의 有餘師가 上座라면, 그가 생각한 이숙인(숙업)은 자이나교에서 주장한 실체로서의 업물질(pudgala)이 아니라 종자로서 상속한 18界와 여기에 훈습된 隨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상좌가 12處에 근거하여 일체법을 다만 異熟生으로 분별하였던 것은 앞 절에서 말한 대로 18계를 현행의 사태 즉 法(dharma: 12처)이 아니라 그 같은 법의 因緣性(所依)이나 거기에 훈습된 선·불선의 종자 즉 隨界로 이해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이해한 因緣 또한 등무간연이나 소연연 등과 차별되지 않는다. 그에 의하면, 불타께서 4緣을 설한 까닭은 미래세 “일체법이 一法에 因(能作因)과 緣(增上緣)이 된다”고 설하는 자들의 생각을 막기 위해서였다.68)

68)『 순정리론』권19(T29, 449b10-11). 상좌에 의하는 한 증상연은 인연성과 모순되지

으며(동론 권18, 442a25f), 직접적으로 서로 관계하지 않는 것은 원인(즉 능작인)의

을 갖지 않는다.(동론 권18, 449a17-20)


이처럼 상좌의 수계는 중현이 비판한 것처럼 因緣의 성격뿐만 아니라 等無間緣과 所緣緣으로서의 수계,69) 前生因으로서의 수계(그는 俱生因을 부정한다),70) 또 다른 생(즉 後時의 6處)이라는 결과(이숙과)를 초래하는 이숙인(업과 번뇌가 훈습된 6處)으로서의 수계71) 등 일체법의 현상을 가능하게 하는 원인(因緣)이나 種子(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당연히 선·불선의 유루 뿐만 아니라 무루의 종자[淨界]도 포함된다.(주57)

70)『 순정리론』권15(T29, 419a7ff).

71)『 순정리론』권18(T29, 440b21f), “此舊隨界體不可說, 但可說言, 是業煩惱所熏六處, 感餘生果”


處가 다수의 존재(실체)가 화합한 가유이고 그러한 각각의 존재가 界라면, 그리고 이 때 ‘계’는 種種의 법이 훈습하여 이루어진 종자(즉 隨界)의 의미라고 한 이상, 혹은 ‘內法과 外法’의 분별에서 논의하였듯이 일체법은 법처에 포섭되며, 그것이 이숙인(수계)으로서 一心중에 俱有한다고 한 이상, 현행의 일체법(12처)은 이숙생(이숙과)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좌가 생각한 이숙인은 유부에서 제시한 이숙인과 그 성격이 본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異熟生은 후천적 가행(=소장양이나 등류성)이 아니라 원인(즉 선천적으로 훈습된 수계=種子의 展轉·隣近功能)에 의해 단박(無間)에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라는 상좌의 세 번째 논거 또한 이러한 수계설에 근거할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다.72)

72) “만약 이같이 [번뇌와 업에 의해 훈습되어] 무간에 낳아진 6處가 원인이 되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라면, 順後受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오로지 무간의 원

인만이 이숙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과실은 없으니, 隣近과 展轉의 功

能이 결과를 견인하기 때문으로, 이는 마치 꽃의 종자 따위가 갖는 인근과 전전의 공

능이 결과를 인기하여 낳는 것과 같다.(若是無間能生異熟六處爲因, 能感果者, 是則應

無順後受業, 唯無間因生異熟故. 無斯過失, 鄰近展轉能牽果故, 如花種等鄰近展轉能引

果生)”:『 순정리론』권18(T29, 441a13-16). 예컨대 싹이나 줄기 꽃은 종자의 공능

이 전변·차별되는 순간 저절로 낳아진다


4. 일체법과 마음(心)


1) 了別識과 不了別識

앞서 논의하였듯이 상좌는 根·境·識의 三事와 이에 따른 意地(제 심소)의 次第生起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럴 경우 境(외계대상, 所緣) 또한 刹那滅하기에 동일한 소연에 대한 인식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는 소연을 시간적으로 識의 生因으로서의 所緣緣과 識에 나타난 형상으로서의 所緣境으로 구분하였고, 意地의 소연은 5識상에 나타난 형상이 전후 인과적 관계로서 유사하게 상속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비록 5識의 생인이 된 소연은 외계존재일지라도 그것은 과거(전 찰나)의 존재일 뿐(주23) 현재찰나에 존재하는 것은 識을 통해 상속한 그것의 형상으로, 인식이란 결국 識의 자기인식(svasaṃvedana, 自證)에 지나지 않는다.


즉 상좌에 따르면 경에서 ‘識이 요별한다’고 하여 식을 요별의 주체(즉 了別者)로 설한 것은 世俗說일 따름이다.73) 불교논리학파의 말을 빌리자면 (안)식이란 결국 대상인식(arthādhigati)에 다름 아니다. 이에 따르는 한 인식(pramāṇa, 量)과 인식결과(pramāṇaphala,量果)는 동일하다.

73『) 순정리론』권25(T29, 484b19-22), “彼上座言: 契經中說, ‘識是了者.’ 此非勝義,

是世俗說. 若是了者是識, 亦應說爲非識. 謂若能了說名爲識, 不能了時, 應成非識,

不應非識可立識名.”;『 구사론』권30(T29, 157b20-24) 참조.


그런데 중현은 이와 관련하여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즉 그는 “識이 요별의 주체라는 경설은 세속설”이라는 상좌의 견해를 「변본사품」에서 “오로지 法性에 대해 作者를 가설한 것은 識을 떠나 [별도의] 了別者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막기 위해서였다”는 有餘師의 말로 인용한 뒤 이에 대한 그의 해명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現見하건대 그림자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즉 그림자가 처소를 달리하여 연속적[無間]으로 생겨날 때, [실제로는] 움직이는 일이 없을지라도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識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다른 경계대상으로 상속하여 생겨날 때, 動作하는 일(즉 요별작용)이 없을지라도 ‘了別者’라고 말한 것이다.74)

74)『 순정리론』권3(T29, 342a22-27).


즉 그림자가 찰나찰나 위치를 달리하여 생겨나는 것을 ‘움직인다’고 말하듯이, 識이 어떤 대상에 緣하여 생겨나면 그것이 바로 요별이다. 그림자의 운동이 가설이듯이, 식의 작용(요별) 또한 가설이다. 그럴 경우 그림자가 광명의 장애를 인연으로 하여 본체로부터 생겨난 것이라면, 根과 境을 소의·연으로 한 識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 유부의 경우 두말할 것도 없이 일체의 식은 전 찰나의 식을 等無間緣으로 삼아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일체법의 원인이 되는 온갖 종자(種種界)가 일 찰나의 마음(一心) 중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상좌의 경우 대상을 요별(인식)하는 현행의 識(말하자면 了別境識)은 응당 종자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해야 하며, 이러한 識과 온갖 종자를 갖추고 있는 마음(말하자면 種子識)은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앞서 “경에서 識을 了別者로 설한 것은 세속설이다”는 주장의 논거로서 “識이 了別하는 것이라면 요별하지 않을 때는 識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사실을 제시하였다.75) 이에 대해 중현은 응당 “현재의 식으로서 요별하지 않는 것은 없을뿐더러 아직 생겨나지 않은 식이나 이미 소멸한 식도 識의 性類이기 때문에 ‘식’이라 말할 수 있으며, 그 밖의 제4의 식을 설정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76)

75)『 순정리론』권25(T29, 484b21f), “謂若能了說名爲識, 不能了時, 應成非識. 不應非識

立識名.”(주73)

76)『 순정리론』권25(T29, 484b23-28).


여기서 ‘능히 요별하지 않는 識’이란 어떤 식을 말함인가? 滅定有心說에서의 마음(즉 細心)이 그러한 것임은 두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그렇다면 상좌의 경우에도 대상을 요별하는 識(즉 了別境識)은

유가행파에서 異熟識(알라야식)을 의미하는 心(citta)과 구별되는 것인가?


2) 心의 名義에 관한 異釋

불교에서 마음은 5온·12처·18계 중에서 각기 識蘊·意處·7心界(意界와 6識界)로 일컬어졌듯이 心(citta)·意(manas)·識(vijñāna)이라는 세 가지 명칭으로 불려진다. 유부에 의하는 한 이 세가지는 다만 작용하는 양태에 따른 명칭상의 차별일 뿐 자성에 따른 본질적인 차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77) 이는 대개 어원에 따라 거듭하여 쌓는 것(cinoti)·사유하는 것(manute)·대상을 식별(인식)하는 것(vijñānāti)으로 해석되어 각기 集起·思量·了別(구역은 增長·能解·能別)이라는 말로 漢譯되었다.

78)

77)『 대비바사론』권72(T27, 371a19-b29). 여기서는 이 세 가지를 ① 다만 명칭상의

차별, ② 과거(意)·현재(識)·미래(心)의 차별, ③ 界(心)·處(意)·蘊(識) 등 施設에 따른

차별, ④ 種族(gotra, 心)·生門(āya-dvāra, 意)·積聚(rāśi, 識)라는 3科의 名義에 따

차별, ⑤ “心은 능히 遠行하고 獨行한다”, “제법에는 意가 선행한다”, “結生識”이라

경설에 따른 遠行(心業)·前行(意業)·續生(識業)이라는 업의 차별, ⑥ 또 다른 경설에

따른 彩畵·歸趣·了別이라는 업의 차별, ⑦ 滋長·思量·分別이라는 업의 차별등으로 설

명한다.

78)『 구사론』권4(T29, 21c20f);『 순정리론』권11(T29, 394c17), “集起故名心. 思量

故名意. 了別故名


즉 心(citta)의 어원 √cit는 ‘알다’, ‘이해하다’의 뜻이지만, 그것은 다시 √ci(‘쌓다’ ‘모으다’)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집기’라고 번역한 것이다. 곧 마음에 의해 선·불선 등의 온갖 心所와 事業 등을 쌓게 되기 때문이다. 意(manas)는 어근 √man(생각하다)에 근거하여 ‘사량’으로 번역한 것이고, 識(vijñāna)은 vi-jñā(다르게 알다)에서 유래한 것이므로 ‘요별’이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현장역『 구사론』에는 “淨·不淨의 界에 의한 種種의 차별(citra)이 있기 때문에 ‘심’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으로, 이러한 ‘심’은 다른 마음에 所依止가 되기 때문에 ‘의’라고 이름하였으며, 能依止가 되기 때문에 ‘식’이라 이름하였다”는 有釋이 인용된다.79) 普光에 의하면, 이는 citta(心)를 citra(種種)에 근거하여 해석한 것으로, 그는 이를 유부의 두 번째 해석으로 이해하였지만,80) 稱友(야쇼미트라)는 마음(citta)을 어원적 관점에서 ‘熏習의 안주처(bhāvanāsaṃniveśa)’로 해석한 경량부(Sautrāntika)와 유가사(Yogācāra)의 견해로 이해하였다.81) 보광은 필시『 순정리론』에 의거하여 그같이 이해하였을 것으로, 중현은『 구사론』의 “淨·不淨의 界에 의한 種種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심’이라 이름하였다”는 말을 “種種의 뜻이기 때문에 ‘심’이라 이름하였다”고 교정하여 유부학설로서 언급하였기 때문이다.82)

79)『 구사론』권4(T29, 21c21-23), “復有釋言: 淨不淨界種種差別, 故名爲心. 卽此爲

他作所 依止故名爲意, 作能依止故名爲識.”; L. de La Vallee Poussin,

Abhidharmakośabhāṣyam Vol. I, p.205, “Some say that the mind is termed citta

because it is spotted (citra) by good and bad elements.―”;『 구사석론』권3(동,

180c4), “善惡諸界所增長故名心-.”;AKBbh 6123-621, “citaṃ śubhāśubhavir

dhātubhir iti cittam.: 淨·不淨界가 집적된 것(cita)이기 때문에 마음(citta)이다.”

범본 校訂者(荻原雲來)의 각주에 의하면 원래의 寫本에 citra(種種)로 되어 있었던

것을 眞諦 역(所增長)과 티베트 역(bsaga pa, citam)에 근거하여 citam으로 정정

하였다고 한다. 이에 櫻部建(1968, p.301 주1)은 범본의 cita를 다시 직전(유부)의

해석 cinotīti cittam(集起故名心)과 중복되지 않는 신역의 형태(citra, 種種)으로 고

쳐 번역하고 있지만, 兵藤一夫(1982, pp.24-27)은 티베트 역과 眞諦 역, 稱友釋으

로 볼 때, 또한 유가행파 전통에서는 마음을 √ci의 과거수동분사로 해석하기 때문에,

安慧와 滿增의 釋에서도 모두 bsaga Pa(citam)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현장 譯의 citra

는 사본의 書寫人이나 현장 자신의 오독 가능성을 고려한다. 그러나 그는,『 순정리

론』(T29, 394c)과『 현종론』(동, 803a)에서 ‘種種’으로 번역하고 있고,『대비바

사론』에서도 citra 즉 彩畵(種種雜色)로 해석하는 異說이 있으며(본고 주77의 ⑥),

팔리 아비달마『( 앗타 사라니』, p.63)에서도 그러하기 때문에 현장도 이에 따랐

지 혹은 직전의 유부 해석과의 중복을 피하기 위해 citram이라 하였을 것으로도

추측한다. 아무튼 兵藤一夫는 cinoti와 cita는 다같이 √ci에서 파생된 말이지만, 전

자가 마음을 행위의 주체자 능동자로 본 것이라면, 후자는 마음을 행위[에 기인하

는 잠세력, 종자]의 축적자로 본 것으로, 후자의 사유방식은 칭우가 이 논설의 說

者로 해석한 유가행파와 경량부에 타당하며, 이 같은 관점에서 ‘어떤 이’의 마음의

해석은 citram보다 citam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고 하였다.

80)『 구사론기』권4(T41, 83b10ff), “第二說, 說一切有部解. ― 卽以種種釋心義也.”

81) 荻原雲來,『 稱友 俱舍論疏』(2), p.80.; 兵藤一夫(1982), p.25.; 박창환(2007),

p.131.: citaṃ śubhāśubhavir dhātubhir iti cittaṃ. bhāvanāsaṃniveśayogena

sautrāntikamatena yogācāramatena va.

82)『 순정리론』권11(T29, 394c18f), “或種種義故名爲心. 卽此爲他作所依止故名爲意,

作能依止故名爲識.


즉 ‘다른 마음에 소의지가 된다’고 함은 전 찰나의 마음은 후 찰나의 마음에 근거가 된다는 말로서 이러한 전 찰나의 마음(안식 내지 의식)을 ‘意’라 하고, ‘능의지가 된다’고 함은 현행의 마음은 전 찰나의 마음인 意에 의지한다(혹은 소의인 根과 소연인 境에 의지한다: 稱友)는 말로서 이러한 현재찰나의 마음을 ‘識’이라 한다는 것은 유부의 정설이기 때문에83) 마음은 곧 種種의 뜻을 갖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다.

83)『 구사론』권1(T29, 4b4-6).


그러나『 구사론』에서 인용한 有釋처럼 “淨·不淨의 界에 의한 種種의 차별(citra)이 있기 때문에(현장역), 혹은 淨·不淨의 界가 적집되어(citaṃ) 있기 때문에 ‘심’이라고 이름한다(범본)”고 말할 경우, 문제가 달라진다. 法寶는 여기서의 ‘계’를 性·因의 뜻으로 이해하였고,84) 상좌 슈리라타 역시 앞서 논의한대로 ‘界’를 種種의 법(업과 번뇌)이 훈습하여 이루어진 종자의 뜻(즉 수계)으로 해석하여 그것은 일 찰나의 마음 중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중현은, 이 같은 상좌의 주장은 ‘勝義의 法은 오로지 하나의 본질[體]만을 갖는다’는 正理에 위배된다고 비난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그의 말을 인용한다.

84)『 구사론소』권4(T41, 534b22).


일 찰나의 마음[一心]은 種種의 界를 갖추고 있다. 일 찰나의 마음 중에 다수의 界가 훈습되어 있다. ― 마음 자체는 단일할지라도 그 안에는 다수의 界가 존재한다.85)

85)『 순정리론』권18(T29, 442b1f; 4), “又彼上座如何可執言: 一心具有種種界. 熏習一心

界. ―若言, ‘有心其體雖一, 而於其內界有衆多.’―” 이에 대해 중현은 ‘마음’과 ‘다수의

界’는 그 자체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에 '계’가 하나가 되든지 마음이 다수가 되어야

한다고 비난한다.


만약『 구사론』 상에서의 有釋이 경량부(상좌) 설이라면, “무루와 유루(칭우에 의하면 선·불선)의 온갖 종자(界)가 갖추어져(훈습되어) 있기 때문에 心이라 이름한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전술한대로 상좌는 마음 중에 갖추고 있는 유루·무루의 種種界를 ‘舊隨界’라고 하였다.86)

86) 이에 대해 중현은 이같이 비판한다.: “만약 一心(일 찰나의 마음) 중에 여러 품류의

界가 隨逐하는 것이라면,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다수의 마음의 수계(心隨界)로

터 그 후 다만 한 가지 품류의 마음만이 일어나는 것인가? 즉 일시에 일체의 모든

의 소의와 경계대상과 等無間緣과 因緣이 존재하거나 또한 갖추어져 있음에도 어

하여 그러한 [일체의 모든] 識이 함께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러한 소의 등은

각각의 찰나에 모두 능히 일체의 모든 식을 낳을 수 있는 것인데, 어떠한 법이 장애

하여 동일한 시간에 하나의 근(根)으로부터 다수의 식을 함께 낳지 못하는 것인가?”

『( 순정리론』권18, T29, 441c10-15) 이에 대한 상좌의 변명은 이러하다.; “一念에

하나의 根이 두 가지 識을 함께 낳는 경우가 있으니, 예컨대 하나의 身根을 공유하는

命命鳥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동일한 처소에 두 가지 신근은 생겨날 수 없으니, 그

럴 경우 有對의 法性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가지 識’이란 種種界를

갖춘 마음(즉 不了別識)과 이를 인연으로 하여 생겨난 현행의 了別識으로, 세친은

이를 集起心과 種種心이라 하였다.(“心有二種. 一集起心, 無量種子集起處故. 二種

種心, 所緣行相差別轉故.”:『 성업론』, T31, 784c7ff) 그에 따르면 두 마음 중 種

種心이 결여된 상태가 無心位이다.


이러한 해석은 비록 상좌의 경증으로는 인용되지 않을지라도 초기경전 상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예컨대『 잡아함』 제451경(T2, 115c: Ⅱ.1의 인용문 참조)에서는 種種界로서 18계를, 제452-454경(T2, 115a-c)에서는 種種의 觸·受·想 등의 諸法生因으로서 種種界(18계)를 설하고 있으며, 제444경(T2, 114c-115a)에서는 깊이와 너비가 각기 1由旬이나 되는 곳에 쌓여있는 眼藥丸[열매 더미](a heap of akṣa-[fruits] rāśi)87)의 비유로써 界의 無量함에 대해 논하고서, 이 같은 ‘계’의 성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중생은 항상 界와 함께 하고 界와 화합해 있다. 즉 중생은 不善心을 행할 때 不善界와 함께 하고, 善心을 행할 때 善界와 함께 하며, 勝心·鄙心을 행할 때 勝界·鄙界와 함께 한다.

『( 잡아함』 제445-448경, T2,115ab)

중생은 항상 界와 함께 하고 界와 화합해 있다. ― 鄙心을 행할 때 鄙界와 함께 하고, 殺生 내지 飮酒를 행할 때 살생界 내지 음주界와 함께 하며, 불상생 내지 불음주를 행할 때 불살생界 내지 불음주界와 함께 한다.

『( 잡아함』 제449경, T2, 115c)

중생은 항상 界와 함께 하고 界와 화합해 있다. ― 不信을 행할 때 불신界와 함께 하고, 犯戒와 無慚·無愧를 행할 때 범계界와 무참界·무괴界와 함께 하며, 信을 행할 때 信界와 함께 하고, 持戒와 慚·愧를 행할 때 지계界와 참界·괴界와 함께 한다.

『( 잡아함』 제450경, T2, 115c)


여기서 ‘界’는 유부의 해석(Ⅱ.2)처럼 생을 구성하는 다양한 種類(ākara; 生本)의 의미88)라기보다 항상 중생의 마음과 화합하여 함께하고 있으면서(衆生常與界俱, 與界和合) 현행의 온갖 심·심소를 낳는 종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다수(種種)의 界가 갖추어져 있는(훈습되어 있는) 마음을 유가행파에서는 一切種子識, 즉 알라야식이라고 하였다.『 유가사지론』에서는 알라야식의 還滅相에 대해 논의하면서 이것이 一切雜染의 根本, 一切法의 種子라는 사실의 논거로서 앞서 언급한 種種界의 경설을 인용한다.


이러한 일체[법]의 종자로서의 알라야식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薄伽梵(세존)께서는 “眼界·色界·眼識界 내지 意界·法界·意識界가 존재한다”고 설하였으니, 알라야식 중에는 種種의 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경에서 惡叉聚의 비유를 설한 것도 알라야식 중에 다수의 界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89)

89)『 유가사지론』권51(581b17-21).


여기서 세존 설은『 잡아함』 제451경에서, 惡叉聚(akśarāśi, 악차 열매더미)의 비유는 동 제444경에서 설해진 것으로,90) 유가행파의 알라야식과 종자설의 사상사적 자취를 이러한 아함의 諸經에서 찾을 수 있듯이91) 상좌의 ‘種種界(구수계)를 갖춘 마음’ 또한 역시 그러하며, 이러한 점에서 마음에 관한 상좌의 설은 유가행파의 그것과 궤를 같이 한다고 말할 수 있다.

90) 이러한 惡叉聚의 비유는 18界와 이것의 展轉의 異相性인 種種界의 무량의 차별(無量界)를

밝히면서도『( 유가사지론』권56, T30, 609c26f),『 잡아함』의 所說을 嗢拕南(udanaṃ)

으로 정리한「 攝事分」(동론 권96, 846c26ff)에서도 인용되며,『 성유식론』(T31,8a22ff)

에서는 종자의 본유설에 대해 논의하면서도 인용되는데, 이같이 유가행파에서 인용한

Akśarāśi-sūtra를『 잡아함』제444경(여기서는 眼藥丸: 주87 참조)으로 비정한 이는 袴

谷憲昭(1981,「 三乘說の一典據: Akśarāśi-sūtraとBahudhātuka-sūtra」)이다.

91) 山部能宣(1987, pp.32-33)은 袴谷憲昭의 연구(前註 참조)에 근거하여『 잡아함』제444

(Akśarāśi-sūtra)의 교설은『 유가론「』섭사분」의 ‘住自性界’와 ‘習增長界’의 설에

의해 이론화되었고, 그것은「 섭결택분 五識身相應地 意地」의 수도론(즉 還滅門)의

전제가 되었으며, 아마도『 성유식론』의 본유설 또한「 섭사분」의 설을 달리 말한

것일 것이기에 여기서의 본유설은 예상 밖으로 思想史 上의 사실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

고 말한다.


마음(心) 뿐만 아니라 意와 識의 규정 또한『 유가사지론』에서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으로 여겨진다. 즉 상좌는 種種界를 갖추고 있는 마음(이를테면 종자식)을 ‘心’으로, 이에 따라 일어난 마음으로 무간에 멸한 전 찰나의 마음을 ‘意’로, 대상을 요별하는 현행의 마음을 ‘識’으로 이해하였다. 물론 그에게 있어 이러한 세 마음이 別體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앞서『 구사론』 상에 인용된 有釋(주79)에 의하면, 종종계를 갖춘(혹은 ‘계’가 적집되어 있는) 마음은 현행의 마음에 종자의 형태(즉 공능)로 잠재되어 있는데, 현행의 마음에 依止가 되는 (다시 말해 等無間緣이 되는) 전 찰나의 그것이 ‘意’이고, 이에 依止하여 나타난 현행의 마음이 ‘識’이다.『 유가사지론』의 경우 역시 ‘心’을 일체종자에 따른 依止性인 異熟의 알라야식으로, ‘意’를 항상 [現]行의 의지가 되는 것이나 6識身이 무간에 멸한 것으로, ‘識’을 소연의 경계대상을 직접적으로 요별하는 것으로 정의하여 意와 心을 각기 6識의 等無間緣으로서의 소의와 種子로서의 소의(일체종자인 阿賴耶識)로 간주하였다.92)

92)『 유가사지론』권1(T30, 280b6-11), “云何意自性? 謂心意識. 心謂一切種子所隨依止性,

所隨性, 體能執受, 異熟所攝阿賴耶識. 意謂恒行(依止性)意及六識身無間滅意. 識謂現前了

別所緣境界. 彼所依者, 等無間依, 謂意. 種子依, 謂如前說一切種子阿賴耶識.” ( )는 宋元

明 3本.


나아가 이러한 주장에 따르는 한 응당 滅盡定 등의 無心位에서는 受·想 등의 심소를 수반하는 현행의 識만 소멸할 뿐 심소를 수반하지 않는 종종계를 갖추고 있는 마음(citta)은 소멸하지 않는다고 해

야 하는 것으로, 상좌의 ‘滅定有心說’에서의 ‘심’도 바로 이것이었을 것인데,93)『 유가사지론』 등의 유가행파 문헌에서도 역시 멸진정의 문제를 알라야식의 한 논거로 삼고 있는 것이다.94)

93)『 순정리론』권15(T29, 420b20), “彼(상좌)許滅定中有心現行.”; 권80(771c15;

c18-20) 참조. 멸진정 등 無心位에서의 마음의 상속문제에서 야기된 ‘滅定有心

說’에 관한 논의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 때 ‘마음’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하

는 문제와, 전통적으로 경량부 설로 평석된 先代軌範師의 ‘色心互熏說’과의 관계

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대비바사론』에는 멸진·무상정에서는 細心은 멸하지

않는다(권151, T27, 772c21-24; 권 152, 774a14-17)거나 想·受만이 멸할 뿐

心은 존재한다(권152, 775a22f)는 譬喩者의 설이 인용되는데, 세 번째 설은

『 순정리론』(권13, T29, 403a21-24)에서도 譬喩論者의 설로 인용되지만, 앞

의 두 설(細心說)은『 구사론』(권5, T29, 25c26-28)과『 성업론』(T31,784

a2-4)에서 世友(經部異師)의 설로 전한다. 즉 세친은『 성업론』에서 ‘滅定有心’

의 마음을 다만 제6 意識이라는 이(T31, 784a7)와 細心이라는 一類의 經爲量者

(世友)를 구분하여 전자를 비판하고 후자를 ‘일체종자를 갖춘 異熟果識’으로 이

해하고 있다. 문맥상으로 볼 때 상좌가 말한 마음은 전자이고, 상좌의 제자 邏摩

(Rāma) 역시 “멸진정 중에서 意處는 괴멸되지 않으며, 이에 따라 意識은 생겨난

다”고 주장하였는데『( 순정리론』권26, T29, 485c24-27), 그렇다면 세심(종자

식)과 현행의 마음(혹은 제6의식)은 어떤 관계인가? 참고로『 성실론』에서는

무상정에 심소법도지만 미세한 것이라고 말한다.(“是〈무상정〉心心數法, 微細

難覺, 故名無想.”: 권7, T32, 289b15) 또한 동아시아 불교전통에서 색심호훈설을

근본 경량부[本經部]인 쿠마라라타의 학설로, 멸정유심설을 지말 경량부[末經部]

인『 바사론』의 譬喩師와 상좌 슈리라타의 학설로 이해하지만(高井觀海, 1978,

p.171), 색심호훈설은 사실상 滅定無心을 전제로 한 학설로서 유부문헌 상에서는

『 구사론』이 初出이기 때문에, 쿠마라라타를 婆沙 이전의 인물로 보기 어렵기 때

문에 멸정유심설이 색심호훈설에 비해 오래 된 학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성업

론』(T31,783c20-24)에서는 색심호훈설을 멸정유심설과는 별개의 학설로 인용

하며,『 유가사지론』(권51, T30, 583c2-10)에서도 색심호훈설을 설하고 있기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알라야식을 설정하지 않은 聖敎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고

(따라서 滅定無心), 이미 설정한 성교의 경우 제법의 종자는 모두 알라야식에 근

거한다고 말한다.『( 유가사지론』, 동, 584a27-b1, “復次此所建立種子道理, 當

知! 且依未建立阿賴耶識聖敎而說. 若已建立阿賴耶識, 當知! 略說 ‘諸法種子, 一切

皆依阿賴耶識.’”: 袴谷憲昭, 1986, pp.99f 참조) 이러한 사실로 본다면 멸정유심

설과 색심호훈설을 계통을 달리하는 학설로 이해된다.

94)『 유가사지론』권51(T30, 579c13-16). 여기서는 알라야식의 8理證(존재증명) 중

제7.;『성유식론』(T31, 17c25ff). 여기서는 10理證 중 제9.


Ⅳ. 결어


불교사상사에 관한 기존의 시각을 통해 본다면 전통의 성문승과 대승의 보살승 사이에는 분명 단절의 간격이 존재한다. 우리는 통상 法有와 法空, 自利와 利他, 혹은 佛說과 非佛說이라는 모순개념을 통해 양자 사이의 간격을 확인한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인간의 사상은 끊임없이 해석되고 변용되며, 불교사상 또한 결코 예외가 아니다. 해석과 변용을 허락하는 불교의 유연성은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결코 단점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여래정법의 7德 중의 하나이다. 불교 제학파 사이의 단절의 간격은 해석과 변용을 고려하지 않은(혹은 고려하려고 하지 않는) 폐쇄적 불교(학)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있다. 이는 사실상 도그마이다.


동아시아 불교사상의 기반이 된 여래장(불성 혹은 本覺) 사상의 단초라고 말할 수 있는 유가행파의 ‘알라야식’이라는 개념 역시 ‘諸法(일체법) 生因’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개념상으로나 사상사적으로 ‘제법의 인연화합’으로 세계를 해명하는 기존의 불교(사실상 설일체유부)와는 궤를 달리한다. 유가행파의 제 문헌에서 언급한대로 우리는 대개 根本識이나 窮生死蘊, 혹은 種子와 같은 개념에서 그 연원을 추구하지만, 앞의 두 개념은 유가행파의 문헌에서만 그 단편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고, ‘종자’의 경우『 구사론』에서 전한 종자설(상속전변차별설)만으로는 논의의 한계가 있거니와 이 또한 현존의 초기경전에서 그 연원을 찾기 어렵다.95) 또한 경량부의 종자개념이 이미 根本識 등과 더불어 알라야식과 동일한 개념으로 간주된 이상 다시금 종자설의 기원에 대해 추적해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에 필자는 알라야식이나 종자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 界(dhātu)에서 그것의 기원을 찾으려고 하였다.

95)『 잡아함경』권31 제893경(T2, 224c)에서 다섯 종자(根種子·莖種子·節種子·壞種子·

種種子)에 대해 설하고 있지만, 주된 내용은 종자가 훼손되지 않고 地界와 水界를

을 때 발아하여 성장하듯이 業 또한 煩惱·愛·見·慢·無明이 있어야 行이 생겨나며, 나

아가 識·名色·六入處·觸 등의 연기支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참고로『 발지론』(T26,

1031c13-16)에서는 “(아라한은) 뿌리가 땅[地界]에 내리는 일도 없고 잎도 없

가지도 없다”는 게송을 해설하면서 (다섯 종자의) 뿌리는 有取識(번뇌를 갖는 식),

地界는 4識住, 잎은 我慢, 가지는 愛의 비유라고 말한다.


초기경전에서 ‘界’에는 無量의 種種界가 존재한다고 하였을지라도 대표적인 용례는 18界이다.『( 유가론』에 의하면 종종계는 18계의 展轉의 異相: 주90) 이는 5蘊·12處와 더불어 세계(일체법)에 대한 기본적 분별방식이었기에 이후 제 부파에서는 이에 대한 假實문제가 교학의 핵심문제로 부각되었다. 설일체유부에 의하는 한 온·처·계 3科는 廣狹의 차이만이 있을 뿐 동일한 것으로 그들은 이 모두의 實有를 주장한 반면, 세친은 處와 界의 실유를, 경량부는 오로지 界의 실유만을 주장하였다. 이는 普光을 통해 동아시아 俱舍學 전통에서 상식처럼 회자되지만, 오늘날에 있어서조차 여기서 경량부는 누구이고, 그들은 어떠한 까닭에서 界의 실유만을 주장하였으며, 處와 界의 차이가 무엇인지 밝혀진 바는 거의 없다.


衆賢의 傳言에 따르면, 여기서 경량부는 上座 슈리라타(Śrīlāta)이다. 상좌에 의하면 蘊은 積聚의 뜻이기 때문에, 5근과 5경의 有色處는 대종소조, 衆微 화합이기 때문에 가유(세속유)로서, 근·경(12처)의 차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즉 의근의 경계대상(법처)은 자상을 지닌 객관의 존재가 아니라 전 찰나의 5識 상에 나타난 형상이며, 5근과 의근(전 찰나 5식) 또한 과거의 법으로서 (一切法에 포함될뿐더러) 의식의 소연이 되는 한 外法(外處)에 포섭되기 때문에 12처는 法處 하나로 총괄된다. 이에 따라 그는 處를 설정한 이유를 다만 境과 有境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한 것, 다시 말해 1처를 12처로 廣說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蘊과 處는 世俗有이지만 그것의 근거가 되는 실체는 勝義有라고 주장하였는데, 18계를 바로 그러한 실체 곧 일체법의 원인(因緣性)으로 이해하였고, 이에 따라 일체법(12처)은 異熟生임을 주장하였다. 나아가 번뇌와 업 등의 種種의 法이 훈습하여 이루어진(성취된) 界를 ‘隨界’ 혹은 ‘舊隨界’라고 하였다. 이는 생멸의 현상과 그 還滅인 열반을 해명하는 그의 고유개념으로(譬喩者는 이를 ‘種子'라고 함), 상좌가 3科 중 오로지 界만이 실유라고 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수계는 응당 諸法生因(혹은 일체법의 종자)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一心(일 찰나의 마음) 중에 具有한다. 이러한 마음은 대상을 인식하는 현행의 마음(즉 了別境識)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그 또한 이러한 마음을 心(citta)으로, 현행의 마음을 識(vijñāna)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다.(意는 전 찰나의 5識)『 성업론』(T31, 785b5-11)에서는 이를 무량의 종자가 집적된 集起心과 소연의 행상이 차별되어 일어나는 種種心, 혹은 異熟識과 轉識이라 이름하고, 이러한 두 가지 식은 원인과 결과로서 하나의 소의신 중에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상좌의 二心俱起說(주86 참조) 또한 바로 이에 관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성업론』을 포함하여 유가행파 문헌에서 일체의 종자를 갖춘 異熟識은 멸진정 등의 무심위에서의 마음의 상속을 해명하는 논거로 사용되는데, 상좌의 滅定有心說에서의 ‘마음’이나 수계의 마음(즉 種子識)’ 역시 그러한 것이었다.


附記

衆賢의『 순정리론』 상에 인용된 上座 슈리라타 학설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본고는 하나의 단편적인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수 년 전부터 상좌 슈리라타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오면서, 필경 그의 저작으로 전해지는『 經部毘婆沙』에서 인용되었을 방대한 논설에 놀랐고, 그럼에도 일찍이 논의되지 않았던 점에 또 놀랐다. 그의 논설 하나 하나에서, 중현이 비판한 그의 생각 하나 하나에서 유가행파와 불교지식론학파(因明)를 떠올린 것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法稱에 의해 논의된 문제는 중현이 그(상좌)를 비판하면서 제기된 것이기도 하였다. 이는 곧 법칭과 상좌 슈리라타는 어떤 식으로든 관계하고 있다는 말이다. 소승이니 대승이니, 유가행파니 경량부니 하는 것은 하나의 假言的 개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동일한 문제를 두고 동일한 場에서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비바사론』이나『 유가사지론』에서의 모든 논의를 하나의 이론체계로 구성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비쳐졌다. 그들의 이론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Ⅰ장에서 말한 여래장사상 계통의 법계와 초기불교의 법계는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상좌 슈리라타는 蘊·處·界 3科 중 界만을 勝義有로 여겨 그것을 世俗有인 蘊과 處의 所依로 이해하였다. 또한

‘有境과 境’의 분별에서 일체법(12처)은 인식의 대상(즉 境)이 되며, ‘內法과 外法’의 분별에서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은 外法이므로 일체법은 法處로 총괄된다고 하였는데, 그럴 경우 法界 또한 일체법의 소의(種子), 일체법의 隨界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게 있어 18계는 境과 有境과 이에 따라 생겨난 識의 차별상을 밝히기 위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불교에서의 18계에 관한 해석의 문제이다.


그런데 根·境·識을 次第生起에 따른 인과적 관계로 이해한 그에게 있어 인식은 주객 능소로 구분될 수 없는 단일한 사태(唯法,dharma mātra)로서 주객(根·境)의 차별은 인간의 사유나 언어적 관습에 불과하며, 이에 근거한 인식 또한 진실이 아니다. 그리고 譬喩部 논사에 의하는 한 괴로움과 즐거움은 分別力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실유의 경계대상에 근거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96) 그럴 경

우 이러한 주객이나 고락의 분별심 또한 界로서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96)『 순정리론』권53(T29, 639b4-10)


나아가 상좌는 一心(일 찰나의 마음) 중에 이러한 種種界(즉 수계)가 훈습되어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다.97) 그리고 8心現觀을 주장하면서 苦法智(예류과의 初心)에 의해 3結을 단박에 끊고 그것의 隨界를 永斷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 분별과 번뇌의 종자인 수계가 영단된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98) 유가행파에서는 그것을 ‘마음의 진실성(원성실성)’이라 하였다.

97)『 순정리론』권62(T29, 684b21ff).; 동(686b27f) 참조.

98) 袴谷憲昭(1981, p.244)는 예컨대『 잡아함』 제444경처럼 무량의 種種界를 설하고

는 경전은 有情界(sattva-dhātu)를 一界(eko-dhātu)로 보려는 다른 경향의 경전에

해 유정계를 다양성(nānātva)으로 파악하려고 한 전통 중에서 형성된 것으로, 그

결과 훗날 三乘說의 전거가 되었다고 논의하는데, 그렇다면 양자는 처음부터 계통을

달리한 것인가?


경량부(비유자)의 종자도, 상좌의 수계도, 유가행파의 알라야식도, 여래장사상의 법계도 본질적으로 상속의 문제에서 발단한 것으로, 애당초 초기불교의 18계에 대한 이해를 달리한 데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혹『 기신론』의 眞妄和合의 알라야식이나 ‘一法界’라는 개념 또한 상좌 슈리라타에 의한 이 같은 사유의 전환에 정초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억측일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도 역시 ‘연기(혹은 중도)’를 설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이다”고 해야 할 것인가?99)

 

99)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상좌 슈리라타의 연대기에 관한 것이다.『 순정리론』에

의하면 그는 衆賢이나 世親과 시대를 함께 한 자였지만 노령이었다. 중현은 그를 다수

의 문인과 제자를 거느린 ‘朽昧上座’ 즉 ‘늙은이’ 혹은 ‘늙어빠진 우매한 이’『( 순정리

론』권46, T29, 604a5)라고 호칭하기도 하며, 등무간연에 관한 그의 이설에 대해 “이

는 바로 상좌의 年齒(나이)가 노쇠하여 헛된 말을 내뱉은 것일 뿐이다(但是上座其年衰

朽, 出虛之言)”(동론 권19, 445b6f)거나 찰나의 生滅은 분별하여 설하기 어렵다는 그

의 말에 대해 “나이가 이미 과년하여 늙고 쇠퇴한 시기이거늘, 어찌 능히 헤아릴 수 있

을 것인가?(尙年已過, 居衰耄, 豈能測量)”(동론 권20, 450b16f)라고 조소하고 있기 때

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대개 玄奘의 전승『( 대당서역기』)에 따라 세친을 중현의 선배

로 간주하지만, 티베트의 전승이나 『 순정리론』의 文勢로 볼 때 중현이 스승(혹은 선

배)일 가능성이 크다.(이에 대해서는 권오민, 2008,「 衆賢과 世親」을 참조할 것) 따

라서 상좌는 비록 양인과 동시대를 살았다고 할지라도 세대를 달리한 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중현이 세친의 선배였다면 세친과 상좌의 연령 대는 더욱 벌어진다. 그러나 무

엇보다 상좌의 배후에『 잡아비담심론』에서 3회 언급되고,『 대비바사론』에서 90회

정도 인용되는 譬喩者(Darṣṭāntika)라는 그룹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참

고로 加藤純章(1989, pp.62f)은 아무런 논거도 없이(다만 중현이 세친의 後進이었다는

현장의 전승에 근거하여) 상좌 슈리라타, 세친, 중현을 각기 20년의 차이를 두고 연대

기를 구성하고 있다. 비록 추정이라 하였지만, 가히 소설을 방불케 한다. 중현이『 순

정리론』을 저술하였을 무렵, 상좌 슈리라타는 상당히 고령이었기 때문에 80세로 가

정하고, 중현은 10여 년에 걸쳐『 순정리론』을 저술한 직후 목숨을 마쳤다고 전하기

때문에 그 때를 40세라고 한다면, 세친은 이 때 60세 정도『( 구사론』은 50세에 완

성)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실론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gikoship/15782637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