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게송 모두 사구게이는 하나 그중에서도 우리가 기억하고 사유할만한 게송을 고른다면 다음의 일곱 가지가 있다.
1)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무릇 있는바 모든 모습은 현상적이어서 필경에는 허망해진다. 예를 들면 물질을 부수거나 한 덩이로 뭉쳐 보라. 그 현상이 바뀌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뭉치거나 부수지 않는다 해도 세월이 가면 성주괴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모습 있는 것은 언제까지나 믿을 수 없다고 한다.
믿다가 소멸되면 허망할 것이니, 믿고 의지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그러나 믿지 않고 의지 않는다 해서 허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비록 예견된 허망이라서 허망감이 덜할 수는 있겠으나 진리적인 입장에서 볼 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진리적 깨달음이 새롭게 요구된다.
사구게 후구에서는 만약 모든 상을 볼 때, 상 아닌 것을 보면, 바로 진리를 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비상 즉 상 아닌 것이 무언지 간파해야 한다. 상 아닌 것이란 그 상을 존립시킨 바탕을 말한다. 그 바탕이란 우주이다. 우주란 넓게 보는 안목을 말한다. 제상이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을 말한다. 그러나 허공이라 해도 맞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우주라 해도 맞지 않는다. 상외의 모든 것을 볼 때 비상을 보는 것이니 이 비상은 제상속의 관계성이다. 관계성을 보라는 것이다.
제상의 관계성은 인연을 말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있다. 제상이 있으므로 우주적 상이 성립된다. 이 말은 그 상과 우주를 통관하는 것이다. 통관의 주체는 마음이다. 즉 마음을 보라는 것이다. 결국 제상 속에서 마음을 보는 것이 비상을 보는 것이다. 마음을 보는 것이 바로 여래의 경지이다.
2) 知我說法 如筏喩者 法尙應捨 何況非法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진리를 설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내가 설하는 것은 진리로 향하는 방편이지 그 말이 진리는 결코 아니라고 말이다. 그래서 내 말에 의지하여 수행의 과(결과)를 얻었을 때는 그 말씀을 타고 온 배처럼 버리고 떠나기를 당부하신다. 바다에서는 배로 가야하고 뭍에서는 수레나 발로 가야 한다. 허공에서는 날개로 날아야 하고, 땅속에서는 굴을 파고 가야한다.
우리가 피안에 이르는 길은 물도 산도 허공도 굴속도 지나야 한다. 지나온 뒤안길에 매달려서는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다. 피안으로 가는 진리의 말씀도 이와 같아서 법도 버리거늘 어찌 법 아닌 것이 머물 수 있겠는가를 말씀하신다.
결국 부처님의 법은 꼭 필수의 사항이지만 방편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도 항상한 진리가 아닌 무상을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신다. 금옥같은 말씀도 인연에 따라 변하는 무상이라며 머물지 말기를 천명하고 계신다. 자신의 말을 슬며시 감추어 흔적을 없애시는 부처님의 말씀은 상없는 상으로써 중생을 제도하는 것으로 법집에서 벗어나기를 가르치신다.
3)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모습에서 여래를 찾거나 모습에 머물면 진리를 보지 못한다고 말씀하신다. 모습뿐만이 아니라 부처님 음성에서 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여래의 모습이나 음성이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모습과 음성을 통하여 진리로 나아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나아가더라도 모습과 음성에 집착하지 말고 그 뜻을 좇으라는 가르침이다. 가령 우리가 법회에 가서 큰스님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그 장엄한 육신이나 진리를 설하는 음성에서 머문다면 아직 친견했다고는 할 수 없다. 큰스님을 친견했다는 것은 그 큰스님의 마음과 내 마음이 이심전심되었을 때나 가능하다.
만약 이심전심이 안 되고 모습과 음성을 가슴속에 간직하였다면 아직은 사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사도는 성취감이 있는듯 하나 세월이 지나면서 허망이 찾아든다. 부처님 당시에 밧가리 라는 노인은 부처님 모습을 뵙고싶어 병이 들었다. 결국 부처님이 밧가리 앞에 나타나 내 육신을 보고자 하는 자는 진리를 얻을 수 없다고 경책했다. 이와 같이 모습과 음성은 우리를 도리어 혼미하게 하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4)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세상사는 모두 함이 있고 댓가를 바라는 속제이다. 그 법의 속성은 꿈같고 환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고 이슬 같고 번개 같으며 덧없어 꿈같은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꿈 같다함은 깨어나면 쓸데없는 것이며, 환 같다는 것은 눈병에 걸린 사람이 보는 것과 같아서 좇으면 망신을 당한다는 것이며, 물거품 같다함은 아무리 마셔도 갈증을 해소할 수 없는 것이어서 알맹이 없는 헛 껍질 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또 그림자 같다함은 잡으려고 발버둥쳐도 잡히지 않는 것을 말하며, 이슬 같다함은 행복하다해도 행복의 달아남은 삽시간이며, 번개같다함은 진리인 줄 생각한 광명이 순간적으로 어둠으로 바뀌는 유위법을 말한다.
유위법이란 모습에 취한 세간사람의 사는 방법이란 점이라면, 무위법은 모습을 벗어나 모습의 실체를 분명히 인식하고 살아가는 법이다. 즉 유위법을 떠나서 유위법을 통관하여 깨닫는 것이 무위법이다. 엄밀하게 보면 유위법의 상대개념이 무위법은 아닌 셈이다. 무위법은 유위법과 비유위법을 포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5) 如來者 無所從來 亦無所去 故名如來
여래란 진리의 이명이다. 진리는 존재성이 아니다. 물론 개념성도 아니다. 진리를 존재로 억지를 부린다면, 그 표현을 온 우주에 편만한 것으로 볼 수는 있다. 편만하기에 어디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온다거나 간다거나 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어디에나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리를 구한다고 주장하면 마치 바다에서 물을 찾는 것 같고, 땅에서 흙을 찾는 것과 같다. 본래 구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구했다고 믿지 못한다. 내 손에 쥐어져야 확인 할 수밖에 없는 좁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왜 좁은 마음을 지니게 되었을까? 나 중심의 사고로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중생은 환자와 다르지 않다. 환자는 병을 치료할 약을 먹어야 한다.
약이란 비상을 먹는 것이다. 비상을 어찌 먹을 수 있는가? 비상은 유상과 함께 먹어야 한다. 유상 속에 비상이 있음을 알고 유상과 비상을 분해하면 된다. 그것은 타고난 소화능력으로 가능하다. 소화가 된 후라야 무위법이 가능해진다.
6)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應無所住 而生其心
6조 스님은 말씀하신다. 무주라야 비로소 무념의 경지에 든다고, 주함이 없는 삶의 양태는 바로 자유자체이다. 자유인이라면, 한 곳에서 전전긍긍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 곳이란 색성향미촉볍의 각 체를 말한다. 대경에 머물고 그것에 집착하고 있다면 빨리 그곳을 벗어나라. 머물수록 미궁에 빠지게 된다. 만약 6경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머물러도 부담은 없다. 그러나 자신은 금물이다 언제 업습이 생기어 날지 아무도 모른다.
이 사구게에서 6조 스님은 깨달음을 얻으셨다 한다. 출가하기 전에 나무꾼으로 있을 때 초견성을 하셨고, 홍인 5조 스님의 이 대목 법문 중에 6조 스님은 오도를 하셨다고 하니 의미 있는 대목이다. 우리도 일상생활 속에서 이 구절을 음미하며 삶의 좌표로 삼는 것이 중요하리라 본다.
이 6경에 대하는 6식(안이비설신의)을 거두어드린다면 능히 머무름 없는 인간상이 될 수 있다. 머무름 없는 인간상이 된다면 이 때야 말로 그 마음을 일으켜 써도 무루복이 되며 무위법이 되는 것이다.
7) 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修一切善法 卽得阿耨多羅三藐 三菩提
진리의 법은 고하가 없으므로 평등하다. 그래서 불법은 평등하다고 한다. 평상심시도 라는 선구도 사실은 평등법을 지칭한 것이다. 평상과 평등의 마음이 된다면 흔들림이 없다. 시비곡직에도 초연해 진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란 평등법이란 것이니 차별상이 없는 것을 말한다. 차별상이 없으려면 마땅히 근본 마음자리로 가기 전에는 불가능하다. 근본자리에서 마음을 쓸 때 평등법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평등법을 이름하여 큰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어느날 중국의 방 거사는 마조 스님을 뵙고 만법과 짝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다. 마조 스님은 서강의 물을 죄다 마시면 알려 주마 하고 답했다한다. 방 거사는 여기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는데, 방 거사는 서강의 물뿐만 아니라 오대양의 물조차 다 마셨나 보다. 일체 분별과 불평등이 사라진 본마음을 보았을 터이니..
이 본 마음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4상인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사라진 다음, 다시 바른 법을 닦아갈 때 가능하다. 수행에는 점차도 때론 필요하다. 근기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수행자는 우선 사상을 버리고 참된 법을 닦아갈 때 아뇩다라삼보리가 현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過去心不可得 現在心不可得 未來心不可得
우리의 마음은 종잡기 힘들다. 어떤 것이 마음이고 어떤 것이 생각이고 어떤 것이 지각인지 분별하기 어렵다. 이것은 우리의 조직과 신경들이 연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본 마음에서 단계별로 파생되어 갈 때 다른 양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의 규명은 어렵고 혼선만 가중된다. 그래서 본마음과 마음이라고 두 줄기로 표현한다.
이 마음은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현상적 양태는 시간과 여건에 따라 수 만가지로 변전된다. 변전되는 마음을 규명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듯하다.
이렇듯 존재하는 마음이라지만 과거의 마음은 이미 지나갔고,
현재의 마음은 잡으려야 잡히지 않고 미래의 마음은 아직 다가오지도 않았으니 얻으래야 얻을 수 없는 노릇이다.
6조 스님은 과거의 마음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현재의 마음은 머무를 수가 없고 미래의 마음에는 업습이 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즉, 본마음의 경지를 토로하고 계신다. 이 사구게는 선사들의 화두에서도 많이 인용하는 사구게이다.
그러나 금강경 주요 7게송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불기 2552년 3월 30일 정 안
동채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eastandsouth/3263475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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