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구게

금강, 화엄, 열반, 법화경의 핵심사상 - 법상스님

수선님 2020. 3. 8. 12:29
금강, 화엄, 열반, 법화경의 핵심사상
 

 

금강경과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의 사구게에 대해
한번 살펴볼까 합니다.
금강경의 핵심 사상이
금강경의 사구게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 등도 마찬가지로
사구게를 살펴봄으로 해서 그 경전에 나타난 사상의 핵심을
공부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 경전에 나타난 사구게를
공부해 보도록 하지요.
먼저 금강경 사구게 먼저입니다.

먼저 사구게(四句偈)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금강경의 한 구절을 살펴보지요.


[금강경]에 보면

佛告須菩提 若善男子善女人 於此經中
불고수보리 약선남자선녀인 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等 爲他人說 而此福德 勝前福德
내지수지사구게등 위타인설 이차복덕 승전복덕

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해석해 보면
"만일 어떤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에서 사구게만이라도 받아지니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주면(受持爲他人說)
그 복덕은 앞에서 말한 칠보로 보시한 복덕보다 더 수승(殊勝)하니라."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와 같이 경전에서는
사구게를 수지하고 타인에서 설명해 주는 공덕에 대하여,
이 공덕은 항하의 모래 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에
칠보(七寶)를 가득히 채워서 보시를 한 복덕보다 더 수승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구게란 글자 그대로 경전에 등장하는
네 글귀로 된 게송을 의미합니다.
네 글귀로 되어 하나의 의미를 가지는 경전의 말씀을 의미하지요.

다시 말해 경전 가운데서 네 글귀로 된 짧은 한 문구 만이라도
읽고 외우며 남을 위해 설명해 주라는 말인데
꼭 사구게로 정형화된 틀 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경전에 등장하는 그 어떤 짧은 법문이라도
소중하게 받아지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먼저 금강경의 사구게를 살펴보지요.
금강경에는 사구게가 곳곳에 많이 등장하지만
우선 핵심이 되는 네 가지 사구게를 옮겨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무른 상이 있는 바는 모두 허망한 것이니
만약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곧 여래를 볼 것이다.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 미촉법생심 응무소주 이생기심
不應住色生心 不應住聲香 味觸法生心 應無所住 以生其心
응당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 행사도 불능견여래
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첫 사구게부터 살펴보면
범소유상,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이라고 하면
두두만물 일체 현상계에 벌어진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꼭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안이비설신의 육근으로 감지할 수 있는 모든 대상을 의미하지요.

바로 일체 모든 현상계가 개시허망이란 말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상이 있는 바 모든 것이, 일체 현상계가
상이 아님을 즉 개시허망임을 바로 보면
즉견여래한다, 즉 여래를 보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바탕이 텅 비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그 어떤 것도 나툴 수 있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도리어 꽉 차서 인연따라 모든 것을 나툽니다.

나무와 나무를 비빔으로써 불을 얻었다면
불이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나무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공기 중에서 나온 것도 아니며,
비비는 내 손에서 나온 것도 아니지만
분명이 이렇게 불이란 상을 가지고 나투었단 말입니다.

인연따라 나툰 것일 뿐입니다.
세상 모든 만물, 범소유상은 다 이처럼 인연따라 잠시 나투고,
인연이 다 하면 소멸될 뿐
어느 것도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눈귀코혀몸뜻으로 촉할 수 있는 모든 상(相)은
다만 인연따라 잠시 나툰 것일 뿐 고정된 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볼 수 있으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범소유상이,
한낮 인연따라 허망하게 잠시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이라는 것을
바로 보아 정견(正見)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상에도, 그 어떤 경계에도, 그 어떤 현상계에도
휘둘리거나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살아가며 그 어떤 경계나 현상계가 다가오더라도
다만 인연따라 허망한 경계가 일고 사라질 뿐임을 알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여여하며 성성적적하게 깨어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여여부동하여 오고 감이 없는 여래를 볼 것이란 말입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을 바로 깨치면 그대로 부처의 자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음 사구게는 말하고 있습니다.
"색(물질)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성향미촉법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 것이니,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보통 우리가 마음을 일으킬 때는
육근, 안이비설신의, 즉 눈귀코혀몸뜻이
색성향미촉법을 대상으로 마음을 일으키게 마련입니다.

쉽게 말해 눈으로 물질인 색을 보는데
여여하게 아무런 분별없이 바라보지 못하고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일으킵니다.
머무른다는 말은 집착한다는 말입니다.

좋아하는 연인을 볼 때와
미워하는 사람을 볼 때
우리 마음은 좋다고 집착하고 밉다고 집착하여
대상에 좋고 싫음의 분별을 덮씌우고는
그 좋고 싫은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서 마음을 일으킵니다.

좋은 대상에 대해서 사랑을 하고
미운 대상에 대해서는 다툼을 일으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상은 늘 허망하기 때문에
잠시 인연따라 좋고 싫게 나타날 뿐이지
고정되게 좋고 싫은 대상 하고 딱 정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수행자는
색성향미촉법의 대상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고,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야 하는 것입니다.
머무름 없는 행, 함이 없는 행이야 말로
모든 수행자들의 실천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집착, 방하착의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깨닫겠다고, 부처를 찾아 나서는 이들이 많지만
부처라는 것 또한 대상으로 정해 놓고
찾아 나서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잘못 가고 있는 것입니다.
육근으로 부처를 만나고자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눈으로 형상의 부처를 보려고 하거나,
귀로서 부처의 음성을 들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를 찾지 못합니다.
눈귀코혀몸뜻 육근으로 촉할 수 있는 대상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금강경의 다음 사구게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형상으로 나를 보거나 음성으로서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니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한다."

그러니 어때요?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이란
다 허망하며 다만 잠시 인연따라 생하고 멸할 뿐인 겁니다.
모두가 다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으며
그림자 같고 이슬이며 번개와 같은 것이라고
잘 관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일체 현상계의 모든 생멸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응당 이와 같이 관해야 한다."

이처럼 금강경의 사구게는
연기, 공, 무집착, 무아라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결국에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아십니까?

그렇게 허무한 것이니까 세상 살 필요도 없고,
다 필요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인가 하고 착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괴로워하고, 답답해 하고, 서러워하고, 욕심부리며 살던
바로 그 괴로움의 대상인 이 현상 세계가
모두 공하여 허망하고 꿈같고, 환영같고, 번개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집착하지 말고, 괴로워 하지도 말고, 걸리지 말고
여여하게 시원스럽게 당당하게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이 현상세계는 다 허망하여 물거품 같은 것이지만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움직이는 이 놈이 있다는 것은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사실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놈은 누구냐? 하고 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 공하고 허망하다는데 그럼 허망으로 끝나는 것인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바탕에 나를 이끌고 가는, 이 허망한 현상계를 이끌고 가는
본래자리, 진면목, 자성불, 불성, 주인공, 한마음 이라 불리는
바로 이 본래마음이 있다는 말입니다.

상이 상이 아님을 보면 여래를 볼 것이란 말은,
이 현상세계 모든 상들을
허망하고 꿈과 같으며 환영과 같고 헛개비와 같다고 바로 관하라는 말이고,
그렇게 현상계의 생멸법을 바로 관했을 때 여래를 본다,
즉 부처가 되고 깨닫는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의 실천법이 바로 응무소주 이생기심인 것이지요.
세상 다 허무한 것이니까 다 필요없고, 마음을 일으킬 것도 없다가 아니라
마땅히 마음을 일으키고 살라는 말입니다.
마음 일으키지만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집착하지 말고 살라는 말입니다.
왜요?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허무한 것이고 공한 것이니 집착할 것이 없기 때문이지요.
허무하고 공하다는 현상계를 잘 관할 수 있어야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의 실천은 힘을 받게 됩니다.

그러니 어때요?
잘 관(觀)하며 살 수 있어야
세상이 다 공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바로 볼 수 있고
그를 통해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실천할 수 있으며,
나아가 여래를 보며(見性) 부처(成佛)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화엄경(華嚴經)]의 사구게를 한 번 살펴 봅니다.
다음은 [대방광불화엄경]의 제일사구게입니다.

若人慾了
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만약 사람들이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진리)를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비추어 관할지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


만약 사람들이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를 알고 싶다면,
다시 말해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두루 통용되는
참된 진리, 참된 근본을 알고자 한다면 하는 말입니다.

참된 근본이란 곧 나의 근본이기도 하고,
온 우주 산하대지 두두만물의 근본을 말하는 것이고,
부처의 근본이기도 하며 법계(法界)의 근본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근본, 참 진리, 부처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할 것이니
'일체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법계의 성품이 바로 나의 성품이고, 법계의 근본이 나의 근본이기 때문에
법계의 성품을 관하라는 말이 바로 나의 근본을 살피라는 말이며,
나의 참성품 즉 불성(佛性)을 찾으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그 근본이 '마음'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부처님을 알고자 한다면
법계의 성품을 관해야 하고
성품을 관하면 '일체유심조'를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마음 하나 일으켜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을 만들어 내고,
마음으로 이 우주 법계 모든 세상을 만들어 내며,
마음으로 삼독심(三毒心)을 일으키고 마음으로 삼학(三學)을 닦아나갑니다.
마음으로 번뇌와 집착을 일으켜 육도(六道)를 윤회하게 되고,
마음으로 집착을 끊고 해탈 열반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 자리 깨치면 텅 빈 충만이며,
여여하고 적적한 부처요,
깨치지 못하면 두두만물 산하대지
천차만별로 벌어지는 중생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이든 부처든 그 근본은 마음 하나에 있는 것입니다.

물은 인연따라 수많은 물결을 만들어 내고,
그 물결은 때론 거칠고 때론 고요하게 늘 변하지만,
아무리 요동을 쳐도 물결은 그대로 물이고
물이 그대로 물결이지 둘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결이 중생이고 물이 부처라고 했을 때,
그 둘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닌 한 몸입니다.
그런데도 물결은 물이 되려고 늘 애를 씁니다.
중생은 깨달으려고 부처가 되려고 애를 쓴다는 말입니다.
마음을 가지고 깨달아 보겠다고 애를 쓰고,
마음으로 물결을 잠재워 보겠다고 그래서 물이 되겠다고 애씁니다.

그러나 물결의 성품을 잘 관해 보면
물결이 그대로 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본래부터 물결은 물이었고, 물이 물결을 잠시 인연따라 만들어 냈을 뿐인데
이 마음이란 놈이 자꾸 물이다 물결이다 분별하고 착각해서
공연히 번뇌 망상만 키워놓았단 말입니다.

그러니 물은 고요하다고 분별하고,
물결은 요동친다고 분별하는 것은 우리 마음일 뿐
근본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만 일어나지 않는다면(無心)
이 세상은 아무런 일어날 일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천차만별로 세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면 세상은 그대로 고요합니다.
마음이 있으면 중생이고,
무심(無心)이면 부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게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그림을 잘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오온(五蘊)(세상)을 그려낸다.
그래서 마음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다 그려낸다.
마음과 같이 부처 또한 그러하며
부처 같이 중생 또한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똑같아서 차별이 없다.
모든 것은 다 마음 따라 변한다는 것을 부처는 잘 안다.
만일 이렇게 바로 알면 그 사람은 부처를 볼 것이다.'

마음 하나 깨치면 부처고
마음 자리 깨치지 못하면 중생이기 때문에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한 몸인 것이란 말입니다.


또한 징관(澄觀)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마음
도 '부처 마음' 아님이 없어서 곳곳에서 도를 이루나니,
한 티끌도 불국토 아닌 곳이 없도다.
참과 거짓, 물건과 내가, '하나'를 들추면 '전체'가 거두어지고
'마음'과 '부처'와 '중생'은 혼연히 일체가 되리라.


[화엄경]의 가르침은 이처럼
두두물물 산하대지 온 우주 법계가 그대로 부처라고 말합니다.
일체 모든 것은 그대로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인 것입니다.
중생이 그대로 부처이며, 마음이 그대로 부처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를 찾고자 애쓰고 멀리 찾아 나설 것이 없습니다.
바깥으로 애써 찾아 나서려 하지 말고
지금 여기에서 마음 안으로 깊이 들어가 관한다면
그대로 마음이 부처이며, 중생이 그대로 부처임을 깨칠 수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에 대해서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모양(相)은 다만 인연가합으로 인해 만들어 졌을 뿐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음을 바로 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관하면
여래를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화엄경] 사구게와 다른 말이 아닙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을 보고자 한다면
법계의 성품을 관하고 그것은 다름아닌 마음이란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법계의 성품을 바로 관하면
이 세상은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인연따라 잠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실체 없는 이 세상을 만들어 냈으며
마음으로 중생도 부처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이 마음을 잘 관하고, 법계의 성품을 잘 관하면
다시 말해, 상이 상이 아니라 다만 마음이 만들어 낸 것임을 잘 관하면
바로 여래를 볼 것이다 하는 말인 것입니다.

[화엄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말은
이 세상이 이렇게 벌어진 것은 모두 마음의 장난이라는 말입니다.
무언가가 딱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와 같은 마음이 장난을 쳐서 그렇게 만들어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실체가 없어요.
[금강경]의 말씀처럼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이며 그림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를 찾겠다고 하는 수행자가
제 마음을 들여다 보지 않고 바깥으로 찾아 나서면서
형상으로 부처를 찾거나 음성으로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이는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부처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화엄경]과 [금강경]의 가르침은
궁극에 다른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다만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의 모양(상)을 모양이 아니라고 바로 관하도록 이끌어
이 세상이 공하고 텅 빈 이치를 내세움으로써
그 이면에 있는 참성품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으며,

[화엄경]에서는
법계의 성품을 관하여
마음이 부처도 중생도 만들고 있음을 깨닫도록 이끌어
이 세상이 본래 부처였음을 보도록 안내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사(事)의 관점에서 세상을 관하도록
[화엄경]은 이(理)의 관점에서 부처를 관하도록 이끌고 있는 것이지요.
[금강경]은 차별상을 관함으로 근본으로 들어가도록 이끌고,
[화엄경]은 바로 근본을 관하도록 이끌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금강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는 경이라면
[화엄경]은 부처님을 설하는 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금강경]에서는 방편을 통해
모든 것들을 부정하고 파함으로써 근본을 드러내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가르침이라 할 수 있을 것이고,
[화엄경]에서는 그대로 부처의 세계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화엄경]은 부처님 자내증(自內證)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기에 깨닫자 마자 3.7일간 설한 것이라 하는 것이지요.
반면에 [금강경]은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을 파함으로써
바른 것을 드러내 주고 있는 경전인 것입니다.
그 파하는 방법으로 무(無), 공(空)을 많이 사용하지요.

그러나 결국에는 [금강경]이든 [화엄경]이든
올바른 관 수행을 통해서
근본의 깨달음으로 이끈다는 점에서
다만 방편의 차이일 뿐, 똑같은 진리를 설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으로 [법화경]의 사구게를 살펴보겠습니다.

諸法從本
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불자행도이 내세득작불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므로
우리가 이와 같이 닦고 닦으면 내세에는 부처를 이룰 것이다.


제법(諸法) 즉 이 세상 모든 것은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여 청정한 것이라는 말은
그대로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이나
[화엄경]의 '일체유심조'와 다른 말이 아닙니다.

제법이란 즉 [금강경]에서의
상이 있는 바 모든 것 즉 범소유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스스로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말은
세상 모든 것이 허망하다는 말에 다름이 아니지요.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는 세상 모든 것이
얼마나 번잡하며 끊임없이 시비분별을 일으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은 모두 고정된 실체로 있는 것이 아니라
허망한 것, 공한 것이기에
본래 청정하고 고요하다는 말인 것입니다.

각기 존재 본연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마음으로 만들어 진 것일 뿐(일체유심조)이므로
허망하여(개시허망) 본래는 청정하다는 말이지요.(상자적멸상)

그러니 모든 수행자가 이와 같이 닦고 닦으면
부처를 이룰 것이다 했습니다.
이 말이 그대로
[금강경]의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나
[화엄경]의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과 같은 말입니다.

일체유심조라는 것을,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는 것을,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이라는 것을
바로 관함으로써 닦고 닦으면 여래를 볼 것이다,
부처를 이룰 것이다, 삼세 일체의 부처를 볼 것이라는 말입니다.


[열반경]의 사구게도 마찬가지입니다.

諸行無
常 是生滅法 生滅滅已 寂滅爲樂
제행무상 시생멸법 생멸멸이 적멸위락
모든 현상은 한시도 고정됨이 없이 변한다는 것이
곧 생하고 멸하는 생멸의 법이니
이 생멸에 집착함을 놓으면
곧 고요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제행이라는 말은
[법화경]의 '제법', [금강경]의 '범소유상', [화엄경]의 '일체'와 같은 말
입니다.
일체 모든 것들은 항상하지 않아 늘 변하는 생멸법이니
이 생멸에 집착하는 마음만 놓아버리면
이 세상의 법인 생멸법을 초월하여 열반의 경지에 들 것이란 말입니다.

이 말도 똑같은 말입니다.
제행무상, 즉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생멸법이고
이 세상은 그대로 생멸법이기 때문에
생멸이라는 집착을 놓으면 그대로 고요하다, 열반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금강경]에서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임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는데
범소유상이 개시허망이라는 말은
항상하지 않으며(무상), 고정된 실체가 없고(무아)
그렇기 때문에 일체는 공(空)으로 허망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온통 괴로움이라고
부처님께서 삼법인(三法印)의 교설로써 말씀하지 않으셨겠어요.

그런데 이렇게 무상하여 허망하지만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볼 수 있다면,
다시 말해 무상한 생멸법을 바로 관하여
생멸에 집착하는 마음만 놓아버릴 수 있다면
여래를 볼 것이다, 고요한 열반에 이를 것이다고 한 것입니다.

조금 어려웠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사유해 보신다면
금새 이해가 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연기법과 삼법인, 중도와 공사상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진다면
아주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금강경]과 [화엄경] [법화경] [열반경]의 사구게에 대하여
공부를 해 보았더니 어떻습니까.
다 다른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다 같은 말인데 이렇게 설명하고 저렇게 설명하고,
방편을 달리하고 관점을 달리하여
근기가 서로 다른 이들에게 다양한 설명을 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입
니다.

이상에서처럼 [금강경]의 '범소유상 개시허망'
화염경의 '일체유심조'
[법화경]의 '제법종본래 상자적멸상'
[열반경]의 '제행무상'
또한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이런 게송이 설명하는 바는 다른 말이 아니라
다 같은 의미로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가르침의 실천인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은
[아함경]의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말이나,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는 말이나 어디 다를 게 있겠습니까.

이 말은 다시 말해
연기법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며,
중도, 공, 무상, 무아, 무집착, 무소득, 무소유에 대한
그리고 모든 부처님 말씀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모두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설한 것들이지요.

근본은 하나이지만
부처님께서는 근기가 다양한 중생들을 위해
다양한 말씀으로 설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수많은 말씀들은 다 다른 말이지만 다 같은 말인 것입니다.

나아가 부처님께서는
수많은 방편으로 수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결국에는 한 말씀도 하신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아시겠는지요!
[태백산 망경사 유일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