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구하고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자는
중생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법을 구하고자 한다면
대중과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청담스님
‘인생의/헛된 삶과/참된 길’
청담스님
우리인간이란 본래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 또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이며, 그저 막연히 생겨났으니 살 때까지는 죽지 못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 고달픈 삶에 쫓기다 보면 이런 문제들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각박한 현실생활이 아닐까?
그러나 우리는 이런 문제들을 생각하기 이전에 벌써 살고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나는 잘 사는 문제를 가지고 말하려 한다. 농사짓는 사람이나 장사하는 사람이나 고기잡는 사람이나 공장직공, 정치인, 학자, 종교인 심지어는 석가, 공자, 예수에게 물어 보더라도 잘 살려는 마음, 이 생각만은 똑같이 가지고 있으리라.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을 잘 산다고 할 수 있는가? 인간이 누구나 잘 살려는 이 한 마음을 가졌을진댄 잘 살 수 있는 어떤 법칙이 필요한 것은 틀림없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잘 사는 법을 말하기 전에 먼저 어떤 것을 잘 사는 것이라고 하는가를 묻고 싶다. 세계의 경제를 한 손에 쥐고 주무르는 재벌이나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제왕이 되거나 또 사자후의 웅변을 토하며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서늘하게 만들고 천하의 독자를 붓 하나로 놀라게 하는 큰 문호가 된다면 이것을 일러 잘 사는 것이라고 할 것인가?
부귀와 명예를 헌신짝같이 던져버리고 뜬구름과 흐르는 물로 살림을 삼아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양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을 일러 잘 사는 사람이라 할 것인가? 아니다. 이 모두가 겉치레의 잘 사는 방법이 될지는 몰라도 참된 의미의 잘 사는 방법은 되지 못하리라.
그러면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인가? 부족함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구할 것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원망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성냄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미움과 질투가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공포와 불안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강제와 속박이 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해탈과 자유가 있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보다 위없는 것이 잘 사는 것이요, 마음에 흡족한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인간의 일평생을 백년이라 한다면 이 일평생을 흔히 살아간다고 한다. 이 귀중한 한평생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 누구를 위해서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는 흔히 이런 문제들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머리엔 흰 머리카락이 얹혀 있고 얼굴엔 주름살이 잡히는 수가 있다. 만약 인간들이 이런 이유를 모르고 그저 먹고 자고 성생활만 즐기며 살아간다면, 이는 저 금수들의 생활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사람들은 흔히 ‘살아간다’ 한다. 그러나 살아간다는 말은 아무런 내용이 없는 말이다. 가령 인간이 백년을 살 권리를 가지고 와서 하루 살았다는 말은 하루 죽었다는 말 외에 또 무슨 다른 뜻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까 일년을 살았다는 말은 곧 일년을 죽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살아간다는 말은 죽어간다는 말이라 해도 옳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짓고, 장사하고, 정치하고, 경제하고,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죽지 않으려는 것인데 그래도 죽어야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 아닌가. 이는 참으로 비참한 사실이다. 권력, 재력,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의 일생은 따지고 보면 죽음이라고 하는 큰 구렁이한테 뒷다리를 물려 들어가는 개구리의 운명과 다를 것이 없다. 그런 인간들이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을 볼 때는 정말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구렁이한테 물린 개구리는 구렁이 뱃속에 완전히 들어가기까지 오직 구렁이가 결정할 것이지 개구리에겐 아무런 자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죽음도 인간의 자유의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죽음 그 자체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천하의 영웅과 만고의 호걸도 이 죽음 앞에선 아무런 반항도 못하고 그저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마치 남의 일처럼 새까맣게 잊고 살아가고, 아니 죽음이라는 구렁이에게 다가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세계에서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과학자, 종교가. 철학자 등 일체 중생이 누구나 다 업보중생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보는 견해도 역시 업안으로 밖에는 보지를 못함이 또 사실이다. 우리 일체 중생이 이 업안(業眼)을 해탈하여 진리의 눈(心眼)으로 세상을 만들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 심성수양(心性修養), 즉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함이니 견성(見性)이다.
견성이란 자기 성품 바탕 자리 일체만유(一切萬有)의 본성(本性)자리, 곧 진리이니 이 진리인 본심자리를 맑고 청정히 가져 만사만리(萬事萬里)를 통찰할 줄 아는 지혜의 눈을 얻는 것이다. 중생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이상하고 묘하게도 성품은 각자가 모두 지니고 있으면서도 못 보고 못 찾는 것이 묘한 이치라 할 수 있겠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각자가 지니고 있는 성품을 보고 이 고해(苦海)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 범부 중생은 탐내는 마음,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과 재물에 대한 욕심, 색에 대한 욕심, 음식에 대한 욕심, 오래 살고자 하는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 다섯가지 즐거움을 누려 보고자 하는 병에 걸린 환자들이다. 그러니 이 탐진치 삼독과 오욕병을 고치지 아니 하고는 자기 성품을 볼 수 없나니, 먼저 삼독과 오욕병을 버리고 육바라밀을 행해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해서 죽음에 직면해 있는 우리 일체 중생이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서 죽음에 직면해 있는 우리 일체 중생이 불안과 공포에서 헤어나서 영원한 절대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를 사바세계라 한다. 모든 생명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서로 빼앗고 서로 죽이고 잡아먹는 약육강식하는 하나의 수라장(修羅場)이라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 현실세상은 과거 무량겁을 내려오며 서로가 지어놓은 죄악의 업력(業力)으로 만들어진 인과응보의 보복의 결산장(決算場)이기 때문에 서로가 지은 업력과 그 업보로 괴로운 재난이 눈앞에 전개된다. 우리는 이것이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인과응보의 법칙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아 자기 성품을 바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성품을 보라 함은 나의 실체, 존재성(存在性)을 알라 함이요, 나의 실체를 알라함은 나의 영원한 삶을 터득함이다. 우리 인간이 이것 이외에 또 무슨 할 일이 있단 말인가?
1969.6.29
장로원장 재직시
청담스님
1902년~1971년
1926년 한영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55년 조계종 총무원장
1960년 불교신문 초대 발행인 겸 편집인
1966년 통합종단 제2대 조계종 종정
1970년 조계종 조계종 총무원장
염화실 카페 http://cafe.daum.net/yumhwasil/8Hqs/64 에서 복사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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