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세 가지 특성三法印
마성/팔리문헌연구소 소장
삼법인설의 의의意義
불교의 특징을 나타내는 교의敎義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교설은 삼법인설입니다.
그런데 이 교설의 명칭과 내용이 상좌불교와 대승불교에서 서로 다르게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상좌불교에서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를 띠-락카나(Ti-lakkhana, 삼상三相)라고 부르는데, 대승불교에서는 뜨리-다르마-락사나(Tri-dharma-laksana, 삼법인三法印)로 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 교설을 상좌부 전통에서는 일반적으로 '존재의 세 가지 특성' 혹은 '우주와 그 안에 포함된 모든 것들의 일반적인 속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주로 이 교설을 법인(法印, dharma laksana)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습니다. 법인이란 글자 그대로 '진리의 도장' 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대승불교에서 '불법佛法이라는 징표' 혹은 '불교하는 증거' 의 의미로 쓰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어떤 사상이나 주장에 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인 셈입니다. 즉 길이를 재는 자(척尺) 나 무게를 재는 저울(칭秤)과 같이 어떤 것이 진본眞本임을 인증認證하는 직인職印과 같은 것입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이 법인이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 혹은 경전의 진위眞僞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문例文이 [구사론광기具舍論光記]권1에 나오는 다음의 대목입니다.
즉 "만약 이 법인에 따르면 곧 불경佛經이고, 이 법인에 위배되면 곧 불설佛說이 아니다."1)
또한 남방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삼법인의 정형구定型句는 다음과 같습니다.
즉 제행무상(諸行無常,Sabbe sankhara anicca), 일체행고(一切行苦, Sabbe dukkha), 제법무아(諸法無我, Sabbe dharma anatta) 입니다.2) 하지만 북방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일체행고 혹은 일체개고(一切皆苦,anatta)대신 열반적정(涅槃寂靜, Sranta-nirvana laksana or Santam-nirvanam)을 삽입하여 삼법인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다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포함시켜 사법인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3)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무상하다' 고 하는 것은 초기불교에 있어서 처음부터 주장된 근본적이 교설의 하나입니다. 초기불교에 있어서 무상은 인간이나 현상계의 모든 것에 대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존재는 무상이며 끊임없이 죽음에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이 자주 설해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목숨은 정해져 있지 않아 얼마나 살지 알 수 없다, 괴롭고, 짧으며, 고뇌에 시달리고 있다. 태어난 자들은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 늙음에 이르면 죽음이 다가온다. 실로 생生이 있는 자들의 정해진 길은 이런 것이다. 익은 과일은 빨리 떨어질 위험이 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태어난 자들은 죽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는 항상 죽음의 두려움이 있다. 이를테면 옹기장이가 만든 질그릇이 마침내 모두 깨어지고 마는 것처럼 사람들의 목숨도 또한 그와 같다. 젊은이나
어른이거나,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나 모두 죽음에 굴복하고 만다.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이른다.4)
오래된 경전에서는 이처럼 인간 존재는 변화하여 멈추지 않는 것, 그 신체는 덧없으며 부서지기 쉽다고 하는 사실을 되풀이하여 설하며, 그것과 함께 세간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경전에서는 무상을 다음과 같은 정형으로 완성 정리하였습니다.
지어진 모든 것은 무상하다. 생生, 멸滅하는 성질을 지닌 것으로 생겨나서는 소멸한다. 이것들을 적멸寂滅하는 것이 바로 안락安樂이다.5)
이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諸行無常' 고 하는 구절은 그 후 불교의 근본 입장을 나타내는 징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무상이란 물질이든 마음이든 모든 형상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여 멈추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로,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인간이 태어나고 생성하는 것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무상이라고 하는 것이 오로지 헛되이 슬퍼하고 탄식해야만 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붓다의 만년의 언행을 기록한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에서는 나이 80에 이르러 병을 얻어 열반에 들려고 한 붓다는 비통해 하는 제자 아난다에게 스승이 죽은 후 자기 자신과 스승이 밝힌 법을 의지처로 삼아 살아갈 것을 설하고 다음과 같은 최후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어진 것(無常)은 변하기 쉬운 성질을 갖고 있다.
게을리 하지 말고 노력하라.6)
여기서 모든 존재는 왜 무상한 것인가? 그 이유는 제행諸行 즉 모든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하는 표현 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어진 것(sankhara, 行) 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인因과 연緣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어진 것은 그것을 구성하게끔 하는 원인이 없어지면 반드시 소멸합니다. 즉 모든 현상세계가 무상한 것은 그것들이 연기緣起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기하고 있는 존재는 모두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 아니며 항상 변화하여 멈추지 않는 무상한 존재인 것입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초기불교의 실천적 인식이 당면한 최초의 문제는 인생이 괴로움(苦)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고(苦, dukkha)' 란 자기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은 끊임없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항상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병듦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입니다. 이상의 생,노,병,사를 사고四苦라고 합니다. 또한 사랑하면서 헤어져야 하는 것도 괴로움이요(애별리고愛別離苦), 미워하면서도 만나야 하는 것도 괴로움이요(원증회고怨憎會苦), 애써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요(구부득고求不得苦), 다섯 가지 집착이 쌓이는 것(오취온五取蘊)도 괴로움(오음성고五陰盛苦)입니다. 이것을 앞의 넷과 합쳐 팔고八苦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苦'라는 것은 결국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경험하는 것이 어째서 苦인가? 그것은 바로 일체의 사물은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항상 변하여 찰나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변화해 가는 덧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괴로움인 까닭은 그것이 모두 무상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여러 가지 인연이 합쳐짐으로써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항상 변하고, 또 잠시라도 머물러 있는 일이 없습니다.
고라는 명제는 '열반涅槃은 낙樂이다' 고 하는 어구에 상대되는 것으로, 열반은 낙이라고 하는 것이 고뇌를 해탈한 성자의 입장에서 말한 것이라면, 일체는 고라고 하는 것은 아직 해탈을 얻지 못한, 갈애渴愛, 집착執着을 갖고 있는 범부의 입장을 나타낸 것입니다.7)
제법무아諸法無我
초기불교에 있어서 무아설은 무상설과 더불어 오래전부터 주장된 교설로서, '제행무상諸行無常' 과 함께 '제법무아諸法無我' 가 불교를 다른 철학, 종교와 구별시키는 삼법인의 하나로 꼽히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불교의 근본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교설입니다. '무아無我' 라고 하는 말의 원어는 팔리어로 보통 아낫따anatta라고 쓰는데, 이는 '아我가 아닌 것' 이라고 하는 의미와 '아我'를 갖지 않은 것' 이라고 하는 의미의 말입니다. 한역 경전에서는 '비아非我' 또는 '무아無我' 라고도 번역되고 있습니다.
또 넓게는 불교 전반에 걸쳐 '어떤 사물이 실체적 자아를 갖지 않은 것' 이라든지
'아트만은 존재하지 않는다' 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며, 또는 '나의 것이 아닌 것' 이
무아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무아anattan 라고 할 때 부정되는 그 대상은 인도 일반에서 본다면 물론 아트만attman이지만 우파니샤드 등에 근거하는 인도 정통파 철학의 아트만 설을 부정하기에 앞서 초기불교에서는 먼저 불교를 신봉하고 실수實修하는 자에 대하여 실천상의 이유로서 무아설을 설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오래된 경전 안에서는 다음과 같은 무아가 설해지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나의 것이라고 집착하여 동요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라.[그들의 모습은]메마른 개울에서[허덕이고]있는 물고기와 같다. 이것을 보고 '나의 것' 이라고 하는 생각이 없이 행하여야 한다. -모든 생존에 대해 집착하는 일 없이8)
나의 것이라고 집착한 것을 탐하여 구하는 자들은 걱정과 슬픔과 인색함을 버리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안온安穩을 얻은 모든 성인들은 소유所有를 버리고 행하는 것이다.9)
여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무아설은 무엇보다 먼저 '나의 것이다', '자신의 소유이다' 라고 생각에 대한 부정입니다. 무엇인가를 나의 것이라 하고 자신에게 속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 대한 망집妄執으로, 수행자는 먼저 이 같은 아집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인가를 '자신의 것이다' 라고 보는 것은 일체의 사실을 잘못 파악하는 것으로, 진실로 자신의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다' 또는 '이것은 남의 것이다' 라고 하는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그는 [이와같은]나의 것이라고 하는 관념이 없기 때문에 '나에게 없다' 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다.10)
이처럼 '나의 것' 이라고 하는 아집을 버리는 것은 소득所得, 소유所有의 관념을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나의 것' 이라고 집착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그것은 경전에서 설하는 바에 따르면 모든 것의 존재의 연기緣起된 것이며
따라서 무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존재는 항상 생生하고 멸滅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자신의 소유라 해도 영원히 자신의 것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것' 이라고 하는 관념에 대한 부정과 함께 초기경전에서 내가 아닌
것을 나(我,attman) 라고 간주하는 사실을 배척합니다. 나我가 신체를 아트만이라고 집착하는 생각을 부정하고 개인의 존재와 그것고 관련하여 현상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구성 요소가 '무아無我' 라고 주장합니다.
인도 철학의 여러 학파들에 있어서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다 할지라도 모두 아트만attman은 절대 유일의 것이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불교에서는 이것을 '상일주재아常一主宰我'라고 표현하고 있음) 라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대해 불교는 처음부터 현실의 괴로움에서 해탈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희론戱論이라 하여 부정하고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무상, 고, 무아
이처럼 불교의 무아설에서는 '나', '나의 것' 이라고 하는 집착이 비판되고 일체의
존재에 아我가 없다고 주장되어 상일주재常一主宰의 형이상학적 실체인 아트만이 부정되는데, 이 무아설은 다시 무상, 고와 동일한 취지로 설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를테면[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건도편犍度篇에서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식識이 각각 무상이며 괴로움 이라고 설합니다. 즉
"비구들이여, 색은 무아이다. 수는 무아이다. 상은 무아이다. 행은 무아이다.
식은 무아이다" 라고 설한 후 이 무상, 고, 무아 등 세 가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움인 것은 무아이다. 무아인 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 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아트만'이
아니다. 여실히 올바른 지혜로써 이같이 관찰해야 한다.11)
마찬가지로 수, 상, 행, 식이 각각 무상하며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고 괴롭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는 사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상, 고, 무아의 교설에는 몇 가지 형태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대화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알려지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색은 상주常住한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렇다면 무상한 것은 괴로움인가 혹은 즐거움인가?
세존이시여, 그것은 괴로움입니다.
그렇다면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화하는 본성을 지닌 어떤 것을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아我이다' 라고 볼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색(色, 물질적 형태)은 과거, 현재, 미래의
안에서든 밖에서든, 조악하든
그렇다면 무상하고 괴로우며 변화하는 본성을 지닌 어떤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이다', '이것은 나의 아(我)이다' 라고 볼 수 있겠는가?
세존이시여,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비구들이여, 그렇기 때문에 일체의 색(色, 물질적 형태)은 과거, 현재, 미래의,
안에서든 밖에서든, 조악하든 미세하든, 열등하든 미묘하든,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여실하고 올바른 지혜로써 보아야 할 것이다.12)
계속하여 수, 상, 행, 식에 대해서도 동일한 설명을 되풀이하고 난 후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비구들이여, 가르침을 들어 뛰어난 제자는 이와 같이 관찰하여, 색(色)을 싫어하고 수受를 싫어하고 상想을 싫어하고 행行을 싫어하고 식識을 싫어한다. 싫어하기 때문에 탐욕에서 벗어나며, 탐욕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해탈한다. 해탈한다면 '나는 이미 해탈하였다' 고 하는 지혜가 생겨 '생존은 이미 다하였다. 청정한 행(行, 梵行)을 실수實修하였다. 해야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나아가 다시는 이러한 생존을 받는 일이 없다'고 아는 것이다.13)
이러한 가르침을 들었을 때 비구들은 크게 기뻐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믿고 모든 번뇌를 끊어 심해탈心解脫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구성 요소 하나하나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괴로움이고 괴로움이기 때문에 무아라고 하는 주장은 초기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의 실천적인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14)
Notes:
1) “若順此印卽是佛經, 若違此印卽非佛說.”[大正藏 41, p.1中.]
2) Dhammapada 277-279.
3) 平川彰著, 李浩根譯, [印度佛敎의 歷史] 上篇 (서울 : 民族社, 1989), p.71.
4) Suttanipata 574-578.
5) [長部經典] Ⅱ, p.157; “ancca vata sankhara, uppadavaya dhammino. uppajjitva nirujjhanti, tesam vūpasamo sukho.”
6) [長部經典] Ⅱ, p.156; “Vayadhamma sankhara appamadena sampadetha.”
7) 水野弘元 著, 金炫 譯, [原始佛敎](서울 : 志學社, 1985), p.85.
8) Suttanipata 777.
9) Suttanipata 809.
10) Suttanipata 951.
11) [相應部經典] Ⅲ, p.22.
12) [相應部經典] Ⅲ, pp.67-68.
13) [相應部經典] Ⅲ, p.68.
14) 후지타 코타츠 外, 권오민 옮김, [초기, 부파불교의 역사] (서울 : 민족사, 1989), pp.82-88.
[출처] 붓다의 생애와 사상 42 삼법인|작성자 제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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