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실천행
김 상 현
Ⅰ. 머리말
불교는 결코 관념적인 종교가 아니며, 이론만을 추구하는 학문도 아니다. 의지적인 노력에 의해서만 허망을 진실로 전환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실천적인 종교다. 修行이나 敎化, 그 어느 것도 실천행에 의해서만 이룩할 수 있는 것이고, 萬行과 萬德을 이루고서야 근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불교는 주장한다. 따라서 불교에서의 실천행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 元曉(617~686)의 실천행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원효는 뛰어난 學僧이면서 동시에 無碍의 자유인이었지만, 또한 용맹으로 정진하던 修行者였다. 그는 “근원으로 돌아가는 큰 깨달음은 공을 쌓은 뒤에야 얻는 것”이라고 하면서 “만약 하나의 선이라도 갖추어지지 않으면 근원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니,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萬行을 갖추어야 한다”고 인식했고, 자신의 허물 돌아보며 참회할 줄도 알았던 수행자였고, 千村萬落을 누비며 대중을 교화하던 거리의 스승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여러 저서에는 發心과 修行, 그리고 敎化 등에 대한 언급이 적지 않다. 이에 본고에서는 원효의 發心修行論과 懺悔論, 止觀二行論과 一味觀行論, 그의 實踐行의 특징 등에 관해서 종합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Ⅱ. 發心修行과 懺悔論
1. 發心修行論
원효의 ?發心修行章?에는 그의 종교적인 체험이 스며 있다. 발심은 發菩提心으로, 궁극적인 깨달음인 菩提에 뜻을 일으켜 구하는 것이다. 원효는 “直心, 深心, 그리고 大悲心을 發한다면 惡한 것을 버리지 아니함이 없고, 善한 것은 닦지 아니함이 없으며 한 중생도 제도하지 아니함이 없기에 이를 無上菩提心이라 한다”고 했다. 또한 그에 의하면, 發心에도 業의 果報를 믿어서 능히 十善을 일으키는 福分의 善을 일으키는 것과, 生死의 고통을 싫어하고 無上의 도를 구하는 道分의 마음을 발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원효는 세간의 부귀영화와 二乘의 涅槃을 돌아보지 않고 한결같이 三身의 菩提를 원하는 것, 이것을 無上菩提心이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발심수행장?에서 발심과 수행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했다.
모든 부처님이 寂滅宮을 장엄하신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을 버리고 고행한 까닭이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서 맴도는 것은 끝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한 때문이다. …… 사람은 누구인들 산에 들어가 수도할 생각이 없으랴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애욕에 얽혀 있는 탓이다. …… 좋은 음식으로 길러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고,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고 게을리 하랴. …… 수행이 없는 빈 몸은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껴봐도 보전하지 못한다. …… 四大는 곧 흩어지니 내일 살기 기약 없고, 오늘은 이미 저녁,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리로다.
이처럼 원효는 허망한 몸을 좋은 음식으로 살찌우거나 비단 옷으로 감싸며 허송 세월을 보낼 일이 아니라, 마음을 발해 수행에 몰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행자가 바른 願을 세우는 일은 중요하다. 올바른 원과 뜻이 서지 않은 상태의 노력은 헛된 세월만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원효는 수행자가 올바른 뜻을 가져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말세의 수행자 중에는 바르게 원하는 이는 적고, 거짓으로 구하는 사람은 많다. 명예와 이익을 구하면서 밖으로만 고요한 모습을 나타내어 헛되게 세월만 보낸다면 定을 얻을 수가 없다. 이처럼 거짓으로 구함을 떠난 것을 뜻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곧게 마음을 정하여 이치에 합당하게 하고, 자기를 제도하고 다른 사람을 구제하여 無上의 道에 이르도록 하는 것을 뜻을 바르게 한다고 이름한 것이다.
이처럼 수행자가 세운 뜻과 발원은 올바른 것이어야 하고, 근원을 향한 것이어야 하고, 세상에 빛이 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임을 원효는 강조했던 것이다.
원효는 諸佛에게 禮拜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 때문에 그는 “修行人이 諸佛에게 예배하면, 諸佛은 이들을 보호하여 능히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했던 것이다. 禮拜諸佛을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는 원효의 생각에는 그의 신앙 체험과 깊은 信心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그의 이 같은 신심은 다음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믿음이란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하는 말이다.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고, 수행으로 얻을 수 있음을 믿으며, 닦아서 얻은 때에는 무궁무진한 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이 세 가지의 믿음을 일으킨다면, 능히 불법에 들어가 모든 공덕을 나타나게 하고 모든 魔의 경계로부터 벗어나 더 이상 높음이 없는 도에 이른다.
이상은 믿음에 대한 원효의 설명이다. 그에 의하면, 믿음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치가 실로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치란 도리, 진리 등과도 같은 말이지만 佛性, 眞如의 법 등이 보다 가까운 뜻이다. 이치가 있다고 믿는 것은 근본을 확신하는 것인데, 근본은 곧 眞如의 법이다. 진여의 법은 모든 부처님이 귀의하는 바며 온갖 행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 이치는 닦아서 가히 얻을 수 있음을 믿는다. 그리고 닦아서 얻은 이치에는 무궁한 공덕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를 결정적으로 그렇다고 믿는 일, 그것이 믿음을 일으키는 일이라고 원효는 말했다. 佛法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지혜와 덕을 믿고 생각해야 한다. 이에 관해서 원효는 ?無量壽經宗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成所作智에는 불가사의한 지혜가 있다. 이 지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을 이룩한다. …… 이를테면, 한 생각으로 부처님의 이름을 칭하여 수많은 세월 동안 지어온 무거운 죄를 길이 소멸하고, 十念으로 부처님의 덕을 생각하여 능히 이 현실세계 밖의 과보를 일으키는 등의 일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모든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덕을 언제나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새롭게 發心한 사람일지라도 실제로 수행에 정진하기란 어렵다. 이에 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들의 수행에 있어서 일찍이 수행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행하기가 어렵다. 지금도 닦지 않는다면, 지금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훗날에도 역시 닦지 못할 것임에, 이와 같이 오래오래 되면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그 어려움을 우러러 익힌다면, 익혀 행함이 점점 늘어나 어려움이 바뀌어 쉽게 될 것이다. 이것을 새로 發心한 이가 닦아 나아가야 할 대의라고 한다.
수행이 어렵다고 내일로 미룬다면, 훗날에도 여전히 어렵다. 지금은 어려워도 노력하면 차차 쉬워질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수행자의 정진에 대해서 불부비개로 불을 일으키는 일에 비유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했다.
불부비개로 불을 내려할 때 처음 더운 기운이 날 듯 하는 것으로 煙法에 비유했다. 행자가 부지런히 닦아 쉬지 않는 것은 마치 불을 낼 때 불부비개로 잠시도 쉬지 않고 부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 煙法 이전에는 罪가 강하고 福이 약하여 수행하기 쉽지 않음이 마치 산에 오르는 것과 같고, 忍法 이후에는 죄가 약하고 복이 늘어나기에 수행이 어렵지 않음이 마치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같다.
수행 경력이 적은 사람의 수행이란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겹지만, 정진으로 수행의 공덕이 불어나면 그 사람의 수행은 산에서 내려오는 것처럼 쉬워진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의 修行觀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바탕하고 있다.
2. 業障과 懺悔論
원효의 ?大乘六情懺悔?는 그 자신의 종교적 고백이며 信書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을 “저자 원효의 종교 체험이 샘솟는 양서”라고 평한 경우도 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法界에 의지해 노닐려 하는 이는,
行住坐臥몸가짐에헛됨없어야한다.
언제나諸佛의불가사의한덕생각하고,
언제나實相생각하여業障을녹여야하리.
널리 六道의 한없는 중생 위해,
시방의한량없는부처님께歸命하리라.
法界에 遊行하려 한다면, 行住坐臥 등의 몸가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부처님의 덕을 언제나 생각하고 천명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을 생각하며 모든 장애를 녹여 없애야 한다. 眼耳鼻舌身意 六情이 뿔뿔이 흩어져 헤매게 그대로 두고서는 안 된다. 원효는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과거의 잘못된 業障은 역사의 짐이자 굴레일 수 있다. 따라서 과거의 잘못에 대한 자기 반성과 懺悔가 요구되는 것이다. 원효는 “모든 惡業의 장애는 참회로써 제거하는 것”이라고 했고, ?金剛三昧經?의 “만약 本心을 잃으면 곧 마땅히 참회해야 하는데, 참회의 법은 淸凉한 것”이라는 구절에 주목하기도 했다. 그러나 참회로써 과거의 잘못된 행위 그 자체를 없앨 수는 없다. 다만 먼저 지은 업이 현재에까지 흘러드는 것을 차단하려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 원효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에 지은 죄는 本識의 종자에 배어들어 종자가 항상 흘러 현재에 이르는 것이니, 이 도리로 말미암아 과거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참회는 죄의 종자의 흐름이 막 생길 때, 그것을 다스려 그 죄의 종자를 현재에까지 흘러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 전에 있던 죄는 참회로 미칠 바가 아니며, 그것을 전에 있던 것이 아니게 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이 나타나지 못하게 할뿐이니,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오직 참회만이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전의 죄를 참회한다는 것은 종자의 왕성한 작용을 현재에까지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오늘을 무방비상태로 내맡겨 둘 수는 없다. 과거의 잘못이나 죄악의 힘이 오늘의 삶에까지 범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참회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부처님 앞에 깊이 부끄러워하는 마음 내어,
菩提心 발하고 성심으로 참회합니다.
나와 중생은 시작도 없는 그 옛날부터
無明에 취하여 한량없는 죄를 지었으니,
五逆이나 十惡業 짓지 않은 것 없고,
내가 짓고 남도 시켰으며 짓는 것 보고서 기뻐했으니,
이와 같이 많은 죄 셀 수조차 없다.
諸佛과 賢聖들 그것을 증명해 알고 있으니,
이미 지은 죄 깊이 부끄러워하는 마음 발해,
아직 짓지 않은 죄 또 다시 짓지 않으리라.
우리들의 業障은 어제오늘 지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먼 옛날부터 지어온 수많은 잘못들이 쌓여서 역사의 멍에를 만들었다. 그러나 罪業에도 그 실체나 自性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죄업의 실체가 없기에 반성과 참회의 길이 열리며, 죄업을 소멸할 방법이 있게 된다. 죄업의 실체가 없기에 죄업의 공포에 집착하거나 사로잡히지 않아도 좋다. 그렇다고 죄업의 실체가 없다는 말을 따라 도무지 죄업이란 없다고 착각하여 뉘우칠 줄 모른다면 더 많은 고통에 얽혀들 것이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放逸하여 뉘우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아니하고,
業의 實相을 사유하지도 않는 이는,
비록 罪의 自性 없지만 장차 지옥에 들어갈 것이다.
마치 종이호랑이가 幻術士를 삼켜 버리듯.
모든 業障은 妄想을 쫓아서 생겨난다. 이 때문에 顚倒된 갖가지 망상에 얽혀서 온갖 번뇌를 일으키고 자기 스스로 얽매인다. 원효가 “중생의 六根이 일심을 따라 일어난다. 그것은 스스로의 根源을 배반하고 뿔뿔이 흩어져 六塵을 일으키게 된다. 六情을 統攝하여 일심이라는 本心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했던 것도 이 까닭이다. 眼․耳․鼻․舌․身․意의 六情을 통제 없이 내버려두면 고통의 상황을 초래한다. 이 때문에 원효는 六情을 統御하여 참회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효와 관련이 있는 참회수행의 한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보자. 원효의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로 嚴莊이 있었다. 그가 원효를 찾아 도를 물었던 시기는 문무왕(661~680) 때로, 원효의 나이 44세로부터 64세에 해당한다. 엄장에게는 廣德이라는 道伴이 있어서 서로 가깝게 지냈다. 물론 광덕도 출가 수행자였다. 엄장은 南岳에 암자를 세우고, 농사지으면서 수행했다. 광덕은 芬皇寺 서쪽 마을에 은거하여 신 만드는 것으로 업을 삼고 처자를 데리고 살았다. 이들은 조석으로 다짐하며 누구든지 먼저 극락세계로 가게 되면 반드시 알리도록 하자고 약속했다. 비록 처자를 데리고 살았을 망정 이들은 열심히 수행했던 것이다. 어느 날 저녁, 엄장이 사는 암자의 창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西方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 오게.” 엄장이 문을 열고 나가서 둘러보니, 구름 밖에서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리고, 빛이 땅에까지 뻗어 있었다. 광덕이 먼저 서방정토로 往生했던 것이다. 이튿날 엄장은 광덕이 살던 곳으로 찾아가 보았다. 광덕은 과연 죽어 있었다. 이에 엄장은 그 아내와 함께 유해를 거두어 장사지냈다. 장사를 마치고 난 뒤 엄장은 광덕의 아내에게 말했다. “남편이 이미 죽었으니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떠하오.” 그 처가 좋다고 하였다. 엄장은 그 집에서 머물렀다. 밤이 깊어 엄장이 정을 통하려 하니, 그 부인이 부끄럽게 여기면서 말했다. “스님이 정토를 구하는 것은 가히 고기를 잡으러 나무에 오르는 격입니다.” 엄장이 놀라고 의아해 하면서, “광덕도 이미 그러했는데, 나 또한 거리낄 것이 있겠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이 말했다. “남편은 나와 함께 10여 년이나 함께 살았지만, 하루 저녁도 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서로 관계를 했겠습니까? 다만 밤마다 단정히 앉아 한 마음으로 阿彌陀佛을 稱念하거나, 16觀을 하여서, 이미 觀이 성숙, 밝은 달이 창에 비치면 때때로 그 빛에 올라가서 정좌하고 앉기도 했습니다. 정성이 이와 같았으니, 비록 西方淨土로 가지 않으려고 한들 어디로 가겠습니까? 대개 천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으로써 알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스님의 觀은 동쪽으로 간다 하면 옳을지언정 서방정토는 알 수 없습니다.” 엄장은 부끄러워하며 물러 나왔다. 그리고는 원효에게 가서 간곡하게 도를 구했다. 원효는 錚觀法을 만들어 그를 지도하였다. 이윽고 엄장도 몸을 깨끗이 하고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쳐 한 마음으로 觀을 닦아 또한 西方淨土로 가게 되었다.
錚觀法은 元曉本傳과 ?海東高僧傳?에도 기록할 정도로 의미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쟁관법은 징 같은 것을 치면서 염불하는 수행법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金光明經?에는 金鼓를 치면서 懺悔하는 내용이 있어서 주목된다. 이 경의 懺悔品에 의하면, 바라문이 金鼓를 치면서 懺悔의 偈頌을 연설하는 것을 꿈속에서 듣고 깨어난 信相菩薩이 부처님에게 나아가 꿈속에서 들었던 것을 아뢰고 아울러 자기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懺悔․發願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음의 偈頌도 그 중의 하나다.
이 金鼓에서 나오는 아름답고 묘한 소리는
중생들이 당하는 온갖 괴로움을 모조리 덜어 없애주나니.……
탐욕과 진심과 어리석음으로 마음이 흔들리고
애정에 붙잡혀서 여러 악을 짓고 있나이다.
옷과 밥과 여색과 그리고 모든 고뇌에
이끌려 지내는 까닭에 모든 惡業 많이 지었나이다.……
누구든지 성심으로 한 번 참회하는 이는
이런 많은 죄가 모두 멸하여 없어지나이다.
참회․권청․수희․회향․발원 등 대승보살의 공통된 규범인 五法을 밝히고 있는 참회품은 이 경의 근본 주장이 되고 있다. ?금광명경?을 특별히 ?金鼓經?이라고 하는 것도 金鼓를 치면서 참회하는 내용에 주목한 때문이다. 원효는 ?금광명경소? 8권 및 ?금고경의기?를 저술하기도 했고, 자신의 여러 저서에 이 경을 자주 인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원효가 ?金光明經?을 중시했던 사실에 유의하면, 그가 창안한 錚觀法의 연원이 信相菩薩의 金鼓懺悔念佛行에 있을 것이라는 견해는 경청할 만 하다. 금고를 치면서 참회게송을 소리내어 읊듯이 쟁관법도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수행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는데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Ⅲ. 止觀二行과 一味觀行論
1. 五悔와 止觀論
원효의 교학 체계와 관련하여 ?起信論疏?에서 이론적인 면을 제시했다면, ?金剛三昧經論?은 실천원리를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곧 高翊晉의 경우인데, 그는 ?起信論?이 원효의 眞俗圓融無碍哲學의 성립 이론을 밝혀준 것이라면, ?金剛三昧經論?은 그러한 이론을 토대로 한 실천원리, 즉 一味觀行의 교문을 제시한 것으로 생각했다. 원효가 ?金剛三昧經論?을 통해서 실천수행을 보다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大乘起信論疏?에서는 이론적인 면만을 제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와 관련하여 ?起信論疏? 자체는 그대로 실천원리를 포함한 완벽한 철학체계로 평가해야 되지 ?金剛三昧論論?의 실천적 경향을 강조하기 위하여 상대적으로 ?起信論疏?의 실천적 요소를 약화시켜서는 안 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起信論疏?에도 止觀의 수행을 강조하는 등 실천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起信論疏?를 ?金剛三昧經論?과 대비하여 전자가 이론적인 면을, 그리고 후자가 실천원리를 각각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기는 곤란하다. 그런데 ?起信論疏?에서는 信成就에 이르는 수행 과정에 중점을 둔 것인데 반해, ?금강삼매경론?은 信成就 이후의 수행 과정에 역점을 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起信論?의 修行信心分에서도 止觀의 수행이 강조되고 있지만, 그것은 正定聚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위해서 설한 것이라는 점에서 볼 때, ?起信論疏?에서는 신성취에 이르는 수행과정에 중점을 둔 것이라는 이 견해는 경청할 만 하다.
?大乘起信論?에는 修行信心分이 있다. 아직은 正定聚에 들어가지 못한 중생을 위해서 설한 내용이다. 믿음은 있지만 수행이 없다면 곧 그 믿음은 성숙하지 못하고 어떤 인연을 만나게 되면 곧 물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大乘起信論?에서는 施門, 戒門, 忍門, 進門, 止觀門 등 五門을 닦아서 믿음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한다. 원효는 이 오문을 六波羅密과 관련지어 이해했다. 곧 止觀門은 六度 중의 定과 慧를 합해서 닦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합하여 지관문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大乘起信論?에서는 施門, 戒門, 忍門, 進門의 네 가지는 간략하게 서술하고 止觀門 만은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원효는 施門, 戒門, 忍門, 進門의 네 가지 수행 그 자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해석을 가하지 않은 채 수행자가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에 대해서만 설명을 덧붙였다. ?起信論?에서는 말했다. “많은 장애가 있기에 더욱 용맹정진 하여야 한다. 밤낮으로 諸佛에게 예배하고, 성심으로 참회하고, 권청․수희하며, 보제에 회향하기를 항상 쉬지 않는다면, 모든 장애로부터 벗어나고 선근이 더욱 자랄 것이다.” 이처럼 ?기신론?에서는 예배, 권청, 참회, 수희, 회향 등의 五悔를 나란히 강조했다. 그런데 이 오회에 대해서 원효는 총과 별로 구분하여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諸佛에게 禮拜한다고 한 것은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인데, 마치 빚진 사람이 왕에게 의지하여 붙으면 債主가 어찌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수행하는 사람도 諸佛에게 禮拜하면 諸佛의 보호를 받아 모든 장애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네 가지 장애란 첫째 악업의 장애인데 참회하여 소멸하는 것이고, 둘째는 정법을 비방하는 것이니 권청으로 소멸하는 것이고, 셋째는 다른 사람의 수승함을 질투하는 것이니 수희로서 대치하는 것이며, 넷째는 삼유를 즐겨 애착하는 것이니 회향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장애가 수행자로 하여금 모든 수행을 내지 못하게 하며, 보리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이러한 네 가지 行을 닦아서 대치하는 것이다.
?기신론?에서 오회를 나란히 열거했음에 비해, 원효는 오회 중에서도 제불에게 예배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해석했다. 예배제불은 모든 장애를 제거하는 방편을 총체적으로 밝힌 것이고, 나머지는 따로 네 가지 장애를 제거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원효는 ?기신론?에서 제시한 네 가지 장애를 대치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유가론?과 ?금고경?에 그 자세한 설명이 있다고 했다. 실제로 ?金鼓經?, 즉 ?금광명경?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선남자야, 네 가지 최대의 업장이 있어서 청정하게 하기가 어렵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보살의 율의에서 극히 중한 죄를 범함이요, 둘째는 대승십이부경에 대하여 비방하는 마음을 냄이요, 셋째는 자신의 일체 善根을 늘리고 기르지 못함이요, 넷째는 유심에 탐착하는 것이다. 또 네 가지 업장을 다스려 없애는 법이 있다. 무엇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십방세계일체여래에게 지심으로 친근하여 일체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요, 둘째 시방의 일체 중생을 위하여 모든 부처님을 권청하여 모든 묘법을 설하게 하는 것이며, 셋째 시방 일체 중생이 성취한 공덕을 隨喜하는 것이며, 넷째 가진 바 일체의 공덕 선근을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경에는 참회, 권청, 수희, 회향 등을 말하고 있지만, 여기에 발원이나 예배 등을 덧붙여 오회라고 하는 것이다. 아무튼, 원효는 ?金光明經?에서 설한 장애의 대치법인 五悔와 같은 구체적인 수행 방법에 대해서 주목했던 것이다.
원효의 수행론에서 중요한 것은 止觀二行이다. 그는 “止觀雙運 萬行斯備”라고 했다. 모든 밖의 境界相을 생각하면 마음이 산란하게 된다. 밖의 생각을 잊으면 고요하게 된다. 止란 밖의 모든 境界相을 멈추어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止만을 닦는다면 마음이 가라앉아 게을러지고 여러 선을 구하지 않고 대비를 멀리 떠나게 된다. 이 때문에 觀을 닦아야 한다. 관이란 대상을 관조하여 인연생멸상을 분별하는 것이다. 원효는 止觀雙運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기도 했다.
止와 觀의 두 수행은 반드시 함께 이루어져야 함은 새의 두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두 바퀴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실어 나르는 능력이 없고, 만약 한 날개가 없다면 어찌 허공을 나는 힘이 있으랴. 그러므로 止와 觀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곧 菩提의 도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止觀二行의 수행을 매우 강조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止를 수행하여 범부의 住着하는 고집과 이승의 겁약한 소견을 다스릴 수 있고, 觀을 닦아서 널리 중생을 살펴 대비를 일으키기에 이승의 옹졸한 마음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범부의 나태한 뜻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마음은 가라앉아도 안 되고 지나치게 흥분해서도 안된다. 원효는 등지의 마음으로 진여삼매에 들어갈 것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가라앉거나 들뜬 마음을 멀리 떠나 자연스럽게 머무르기 때문에 等持라고 한다는 것이고, 또한 等持의 마음으로 진여의 상에 머무르기 때문에 진여삼매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삼매를 等持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삼매는 止觀에 통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원효의 다음과 같은 견해는 주목된다.
相을 따라 논하자면, 定을 止라 하며 慧를 觀이라고 하지만, 사실을 말하면 定은 止觀에 통하는 것이며 慧도 또한 그러한 것이다.
이처럼 定이 止만을 의미하지 않고 止觀에 통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원효는 定을 옹색하게 이해하지 않고 역동적으로 설명한다. 定은 三昧로, 흔히 正思라고 번역한다. 定에 들어 있을 때 관계되는 경계를 깊이 살피고 바르게 생각하기 때문에 正思라고 하는 것이다. 昏沈한 상태에서 어떤 경계에 머문다면 그것은 禪定이 아니고, 거짓된 지혜로 추구하는 것도 선정이 아니다. 그래서 원효는 진정한 定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의 경계에 머무름에도 두 가지가 있다. 만약 한 경계에 머무르면서도 昏迷하고 闇昧하여 자세히 살피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昏沈이며, 만약 한 경계에 머물러 있으면서 가라앉지도 들뜨지도 않은 채 자세하고 바르게 思察한다면 이를 곧 定이라고 하는데, 생각하고 살피는 것으로서 昏沈과 구별한다. 그럼으로 마음이 머물거나 옮겨 다니는 것으로서 禪定과 산란함의 다른 모습을 구별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재빠른 판단은 비록 빨리 바뀌어 가지만 定이 있기 때문이고, 느리고 둔한 생각은 비록 경계에 오래 머물러도 이는 산란함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원효는 禪定을 단순히 한 경계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마음이 가라앉지도 들뜨지도 않은 채 자세하고 바르게 思察하는 것을 진정한 定이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만약 마음이 가라앉는 번뇌에 물들면 마음을 채찍질하여 들리게 해야하고, 만약 마음이 들뜨는 번뇌에 오염되면 마음을 단속하여 가라앉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의 禪 이해는 止와 觀을 포괄하는 것으로 그가 비판한 世間의 假號禪과는 다른 것이었다. 世間의 禪은 참된 禪이 아니라고 원효는 비판했다. 곧 “世間의 禪은 相을 취하여 마음이 일어나므로 이것은 곧 마음을 일으킨 것이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고요한 것이 아니기에 참된 선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2. 一味觀行論
원효는 ?금강삼매경?의 宗要를 一味觀行으로 파악했는데, 이는 경의 종지를 밝힌 辨經宗 중의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알 수 있다.
이 經의 宗要는 전개와 종합이 있는데, 종합하여 말하면 一味觀行이 그 요체가 되고, 전개하여 말하면 十重法門이 종지가 된다. 관행의 觀이란 橫的(공간적)이니 境界와 智慧에 통하며, 行이란 縱的(시간적)이니 그 원인과 결과에 걸쳐 있다. 결과는 五法이 원만함을 말하는 것이고 원인은 六行이 완전히 갖추어짐을 말한다. 또한 지혜란 本覺과 始覺의 두 가지 깨달음이고 경계란 眞과 俗이 사라진 것이다.
이처럼 ?금강삼매경론?의 수행 구조는 觀과 行으로 설명되고 있다. 觀은 경계와 지혜에 통하는 것으로 공간적으로 논한 것이다. 그리고 行은 六行備足을 因으로 해서 五法圓滿의 果를 얻는 것으로서 이는 시간적으로 논한 것이다. 觀이 인식의 문제라면 행은 실천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식의 주체와 인식의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智와 境이다. 智는 本覺과 始覺이다. 이것이 인식의 주체다. 지혜로움은 삼매로부터 온다. 인식의 대상을 경이라고 했다. 흔히 그 대상을 眞과 俗으로 분별하지만, 진과 속이 별개로 있지 않음을 이 경은 강조한다. 어떤 행으로 어떤 결과에 이를 수 있는가? 이것이 실천의 문제다. 十信, 十住, 十行, 十廻向, 十地, 等覺 등의 행을 닦아 五法, 즉 五眼이 원만해지는 결과에 이른다.
?금강삼매경?의 본론에 해당하는 無相法品으로부터 如來藏品까지는 이 경의 주제인 인식과 실천에 관한 문제가 두루 서술되어 있다. 無相法을 觀해야 함을 밝힌 것이 무상법품의 내용이다. 모든 妄想이 무한한 과거로부터 流傳하게 된 것은 다만 相에 집착하여 分別해 온 병 때문이다. 이제 흐름을 거슬러 근원에 돌아가고자 하면, 먼저 모든 상을 파해야 한다. 이 까닭에 無相法을 觀해야 함을 처음에 밝힌 것이다. 無生行品은 주관적인 생각을 없애야 함을 밝혔다. 비록 모든 형상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만약 자기 생각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으면, 주관적인 생각이 일어나 本覺에 들어맞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상법품과 무생행품은 헛된 형상을 버리고 근본에 들어가는 것을 설하고 있다. 올바른 인식은 대상의 세계를 실재하는 것으로 보아도, 주관적인 자기 생각에 이끌어 들여서 굴절시켜도 안 된다. 인식의 주체와 대상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本覺利品과 入實際品은 본각에 의한 참된 행을 일으켜 교화하는 것을 설하고 있다. 보살이 무생행에 의해 능히 본각의 자리에 되돌아와 본각의 이익으로써 중생을 두루 교화하는 것을 본각이품에서 밝혔다. 무생행에 의해 본각에 되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자기 집착이 없으면 본각의 자리에 契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본각에 의지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중생들은 곧 허망함으로부터 實際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입실제품을 밝힌 것이다.
眞性空品과 如來藏品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과 또 거기로부터 나오는 것을 설한다. 眞如의 법은 모든 공덕과 行德을 두루 갖추고 있어서 眞性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진성은 모든 名相을 초월한다. 그래서 眞性空이다. 객관적 형상에도 주관적인 생각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본각의 이익으로 교화하여 실제에 들어가니, 이로써 萬行이 구비되었을 뿐 아니라, 또 이로부터 자유롭기에 眞性空을 밝힌다. 만행은 如來藏一味根源에 돌아간다. 여래장은 진과 속이 둘이 아닌 하나의 실제다. 일체 모든 법이 여래장에 속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여래장은 곧 본심에 돌아간 것이다.
이 경의 본론이 여섯 장으로 되어 있지만, 그 6품은 모두 한 맛이다. 객관적 형상과 주관적 생각이 본래 따로 있지 않다. 본각도 근본이 없고, 실제 또한 한정하기 어렵다. 참된 성품도 알맹이 없는 공이다. 어떻게 여래장의 성품이 따로 있다고 할 것인가? 그러기에 一味觀行이다. 이상은 ?금강삼매경?의 내용을 원효의 論釋에 의해서 정리해 본 것 인데, 그는 이 경 전체의 내용을 一味觀行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원효는 이 경의 宗旨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제시했던 것이다.
이 觀門에는 처음의 信解로부터 等覺에 이르기까지 六行을 세운다. 六行이 원만하면 九識이 轉顯하여 無垢識을 들어내어 淸淨法界를 이룬다. 또 나머지 八識을 轉變시켜 四智를 이루면 五法이 원만해지고 三身이 이에 구비된다. 이와 같이 因果는 경계와 지혜를 떠나지 않지만, 경계와 지혜는 둘이 아닌 一味의 관행으로 이 경의 종지를 삼다.
六行에 대해서는 이 경의 入實際品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곧 十信行, 十住行, 十行行, 回向行, 十地行, 等覺行 등이 그것이다. 이 六行은 보살의 수행계위를 말한 것이다. 보살의 수행계위에 대해서는 ?華嚴經?에서 자세히 설한 교설임은 이미 원효가 지적한 바와 같다. 화엄에서 말하는 보살의 수행계위는 52位다. 곧 十信, 十住, 十行, 十回向, 十地, 等覺, 妙覺이 그것이다. 그런데 육행에서는 等覺까지만 언급했을 뿐, 妙覺의 경지는 언급하지 않았다. 원효는 이 까닭을 육행에서는 수행의 계위만을 나타내었고 그 果位는 제외시켰기 때문에 묘각의 경지는 취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金剛三昧經?에서 육행은 行의 因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히 果位를 제외한 수행의 계위만을 나타내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원효는 보살의 수행계위에 따라서 ?金剛三昧經?의 내용을 해석하기도 했다. 經에서는 “저 중생들로 하여금 心神을 安坐시키고 金剛의 자리에 머물러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으킴이 없고 마음이 항상 安泰하게 하면 곧 한 생각도 일어남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원효는 이를 보살의 수행계위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이란 十信 이전의 일체 중생이다. ‘심신을 안좌시킨다’고 한 것은 十住를 지나고 마음을 三空에 안좌시켜 결정코 물러나지 않기 때문에 안좌라고 한 것이다. ‘금강의 자리에 머문다’고 한 것은 初地 이상에서는 法身을 證得하여 모든 壞滅을 떠나는 것이 금강과 같기 때문이다.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남이 없다’고 한 것은 等覺位에서는 그 움직이는 생각이 본래 고요한 것임을 깨닫고 그것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항상 安泰하다’고 한 것은 妙覺位에 이르러서는 마음의 근원은 생겨남도 없고 멸함도 없음을 알게됨으로 본래 움직이는 생각이 없어 처음도 없고 끝도 없기 때문이다. 항상 생각의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편안하고 처음도 없고 마지막도 없기 때문에 태연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究竟覺을 얻으면 생겨나고 없어지는 일념의 四相이 없을 것이니, 그러므로 ‘일념도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보살의 수행계위에 따라서 경전의 내용을 해석하기도 했던 것이다. 六行은 51位의 수행계위를 차례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수행계위도 결국은 一覺에 포함되고 만다. 처음 十信으로부터 等覺에 이르기까지의 이와 같은 육위에 있는 모든 행은 다 一覺에 의하여 포섭되어 이루어진다고 원효는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本覺과 始覺은 둘이 아니므로 이를 一覺이라고 한다. 시간적인 측면에서 수행의 단계로 설명되던 육행도 결국은 공간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 本․始 兩覺의 智慧와 만나고 마는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六行이 원만하면 九識이 轉顯하여 無垢識을 들어낸다고 원효는 말했다. 이에 대해서 원효는 ?金剛三昧經論?의 本覺利品에서 보다 자세히 논했다. 九識인 唵摩羅識은 곧 本覺이다. 그리고 본각에 돌아간다는 것은 心源에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一心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면 八識의 모든 물결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一心이 나타날 때 八識이 모두 轉變하므로 四智가 원만해진다. 본각에는 自利와 利他가 구비되어 있다. 따라서 六行이 원만하여 본각을 얻게 되면 그것은 곧 大智慧光明을 얻게 된 것이고, 그 광명은 세간의 어둠을 비쳐 광명을 얻게 한다. 본각에 도달한 사람은 본래 기동함이 없지만 그렇다고 寂靜에 머물지 않고 항상 일어나 두루 교화한다. 이상은 원효의 論釋을 적당히 요약해본 것이다. 그런데 一味觀行을 중심으로 하는 원효의 수행론에는 唯識思想의 영향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九識의 轉顯이나 八識의 轉變, 그리고 四智의 원만 등의 표현에는 全人格을 허망에서 진실 쪽으로 전환시키려는 轉依가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無垢識에 이르기 위한 수행으로는 華嚴敎學에서 강조하는 육행이 제시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Ⅳ. 元曉 實踐行의 特徵
1. 自利와 利他의 具顯
보살의 실천행은 수행과 교화의 두 방면에 관련된다. 곧 上求菩提하는 向上門에도, 그리고 下化衆生의 向下門에도 실천행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효의 실천행은 자신을 위한 自利行과 남을 위한 利他行을 함께 구현하려는데 있었다. 원효가 생각하는 보살도란 선정과 지혜를 닦되 동시에 大悲도 실천함으로서 자신은 물론 남도 함께 이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金剛三昧經? 중의 “於如慧定 以悲俱利”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如如한 智慧와 禪定에서 大悲로 이익을 함께 한다’고 한 것은 앞의 지혜와 선정은 모두 여여한 도리에 순응하는 것이기에 ‘여여한 지혜와 선정에서’라고 하였고, 이 중에서도 대비를 닦아 自利와 利他에 상응하기 때문에 ‘이익을 함께 한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대비를 버리고 바로 선정과 지혜를 닦는다면 二乘의 지위에 떨어져 보살도를 장애하고, 만일 자비만 일으키고 선정과 지혜를 닦지 않는다면, 범부의 병에 떨어질 것이니 그것은 보살의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禪定과 智慧는 自利를 위한 것이고 大悲는 利他를 위한 것이지만, 만약 대비를 버리고 선정과 지혜만을 닦는다면 菩薩道가 아닌 二乘의 지위에 떨어지고 말 것이라고 원효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수행자가 선행을 즐기지 않거나 대비를 멀리하게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止만을 닦지 않고 반드시 觀도 함께 닦아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止만을 닦으면 마음이 가라앉거나 혹은 게으름을 일으켜 여러 善行을 즐기지 않고 대비를 멀리 여의게 된다. 이 때문에 觀을 닦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여러 선행을 자기의 능력에 따라 버리지 않고 修學하여 마음에 나태함이 없으니, 오직 앉았을 때에 止에 전념하는 이외에는 나머지 일체에서 행해야 할 것과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모두 마땅히 관찰해야 할 것이다.
이상은 ?大乘起信論?의 내용이다. 원효는 이 내용을 大悲觀, 誓願觀, 精進觀 등으로 이해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관찰해야 하는 것일까? ?金剛三昧經?에서는 무엇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이냐는 大力菩薩의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內行이나 外行의 出入이 둘이 아니고, 하나의 相에 머물지 않고 마음에 얻거나 잃는 것이 없어서 하나이면서 하나가 아닌 자리인 깨끗한 마음에 흘러 들어가면 이것을 관찰이라고 한다.
경전 중의 이 부분을 원효는 觀의 相을 밝힌 것이라고 이해하고 다음과 같이 內行과 外行을 해석했다.
內行이란 관에 들어가 고요히 비춰보는 행이고, 外行이란 觀에서 나와 세간을 교화하는 행이다.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중도를 잃지 않기 때문에 둘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외행을 세간을 교화하는 행으로 해석했는데, 이 또한 대비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의 이타행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金剛三昧經?에는 觀行을 理入과 行入으로 나누어 설했는데, 원효는 이 二入觀行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理入이란 도리를 따라서 믿고 이해는 하지만 행을 증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理入이라고 하는데, 그 위치는 地前에 있는 것이다. 行入이란 도리를 증득하고 행을 닦아 생겨남이 없는 행에 들어감으로 行入이라고 하는데, 그 위치는 地上에 있다.
곧 이입은 初信解로부터 十回向에 이르는 四位의 단계에 속하며, 행입은 지상의 단계, 즉 十地行位와 等覺行位의 단계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효는 行入에도 自利行入과 令他行入의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즉 일체 세간의 복락과 菩提大涅槃果 등에 대해 아무 것도 구하는 것이 없고 평등한 도리를 통달하여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없어서 경계의 바람에 울리지 않는 것, 이것은 자리행입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行에 들어가 二空을 증득하여 人法의 相을 떠나게 하는 것으로 능히 두루 일체를 구할 수 있는 것, 이를 영타행입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원효는 行入을 自利行入과 令他行入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2. 初地菩薩의 敎化行
?금강삼매경론?에는 출가와 재가의 어느 한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는 대목이 있다. 곧 이 경 入實際品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 그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여, 이와 같은 사람은 二相에 있지 않느니라. 비록 出家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在家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 때문이다. 비록 法服이 없고, 波羅提木叉戒를 갖추지 않았다 할지라도, 또한 布薩에 들어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능히 제 마음으로 無爲自恣하여 聖果를 얻으며, 二乘에 머무르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갈 것이고, 뒤에 地를 다 채우게 돨 때에 佛菩提를 이루게 될 것이다.
출가와 재가, 그 어느 한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경의 이 대목은 원효의 출가와 환속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비록 출가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구절에 대해 원효는 말했다. “경전에서 이 두 모습에 있지 않으며 비록 출가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재가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한 것은 道俗二邊의 상에 떨어지지 않기에 변을 떠나는 훌륭한 이익이다.” 또한 그는, “비록 법복은 없더라도 성과를 얻는다”고 한 경전의 구절을 “敎門에서 제정한 계율에 구애를 받지 않고 능히 제 마음으로 도리를 판단하고 소연히 하는 일이 없는 것 같지만 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자재의 훌륭한 이익”이라고 해석했다. 출가와 재가, 혹은 道俗 두 가지 모습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원효의 이 말은 그의 還俗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보게 해준다.
원효는 無碍自在하여 일시에 몸을 백 곳에 나타냈다고 하는데, ‘分軀於百松’ ‘分百身’ ‘數處現形’ ‘百處現形’ 등의 표현이 대개 이 뜻이다. 일찍이 원효는 송사로 인해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에 나타냈던 일이 있고, 이로 해서 모두들 그의 位階를 初地라고 했다. 그리고 원효는 현재 華嚴地에 머무는 大權菩薩로 이해되기도 했고, 聖種性의 大宗師로 인식되기도 했다. 十信, 十住, 十廻向, 十地, 等覺, 妙覺 등 보살의 수행계위 52位 중의 十地는 41位로부터 50位에 해당하고, 十地 중의 初地는 歡喜地다. 그런데 十信으로부터 十廻向까지는 凡夫位, 그리고 初地 이상은 聖者位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구분에 의할 때, 원효의 위계가 初地였다거나 그가 華嚴地에 머무는 大權菩薩이었다는 설은 그가 聖者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는 인식을 토대로 하여 생겨난 것이었다. 그리고 원효가 聖種性의 大宗師였다는 설은 金富軾이 1125년(인종 4)에 지은 「靈通寺大覺國師碑銘」에 보이는데, 다음이 그것이다.
불법이 梁 大通 원년 정미(527)에 처음 신라에 들어온 뒤 1백여 년만에 義想과 元曉가 일어나니, 두 분은 聖種性의 大宗師였다. 末光의 비친 바 餘波의 가한 바에 모두 암흑 속에서 벗어나 高明에 나아갔다.
佛體性의 종류를 여섯 가지로 분류한 六種性 중의 네 번째가 聖種性이다. 이것은 十地位 중에서 種性을 證見하고 凡夫의 性을 끊은, 즉 聖位에 證入한 단계를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원효의 설명이 참고된다. 그는 “十地位 중에서 種性을 證見하고서 凡夫의 性을 끊기 때문에 聖種性이라 한다”고 하여 十地의 菩薩位는 곧 聖種性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해석한 바 있기 때문이다. ?화엄경?에는 初地菩薩이 부지런히 정진하면 백 명의 부처를 볼 수 있고, 능히 백 가지로 변신할 수 있다는 구절이 있다. 원효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부처의 몸이 실제로는 작은 티끌의 수와 같이 많은 몸이 아니지만, 自在한 때문에 티끌과 같은 몸을 나타낸다.
이처럼 원효는 초지보살이 능히 백 가지로 변신할 수 있다고 한 ?화엄경?의 구절을 自在한 때문에 수많은 몸을 나타낸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따라서 초지보살은 대자유의 몸이 된다는 ?화엄경?의 내용과 원효가 백 곳에 몸을 나타내었기에 그의 위계를 초지라고 했다는 설화는 같은 문맥이라고 하겠다.
다른 한편으로 원효의 위계가 初地였다고 하는 것은 그가 理入의 경지를 넘어서 行入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에 의하면, 六行 중 앞의 信․住․行․回向의 四位는 理入의 계위고, 뒤의 地․等覺의 二位는 行入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행입이란 이론적이고 관념적인 이해의 단계를 지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실천의 단계로 접어든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元曉의 位階가 初地에 해당한다는 인식은 그의 실천행에 대한 높은 평가에 그 배경이 있다고도 하겠다. 원효의 실천행이 修行은 물론이고 敎化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던 사실에 유의하면, 그의 위계가 初地에 해당한다는 평가는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Ⅴ. 맺음말
본고는 원효의 실천행을 수행과 교화의 두 측면에서 살펴본 것이다. 원효는 그의 ?發心修行章?에서 發心과 修行의 중요성을 서술했고, ?大乘六情懺悔?에서는 모든 惡業의 장애를 懺悔로 제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大乘起信論疏?에서는 信成就에 이르는 수행 과정에 중점을 두고서 止觀의 수행을 논했고, ?金剛三昧經論?에서는 一味觀行을 통해서 本覺의 근원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밝혔다.
원효의 수행관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 기초한 것이었고, 깊은 신심과 종교적 체험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五悔 중에서도 禮拜諸佛을 가장 중시했던 경우나, 자신이 창안한 錚觀法으로 嚴莊의 수행을 지도했던 점, 그리고 世間의 禪을 비판하면서 浮沈 없이 자세하고 바르게 思察하는 것이 진정한 禪이라고 주장했던 것 등이 그렇다. 원효 실천행의 두드러진 특징은 自利와 利他를 함께 닦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수행자가 大悲를 실천하지 않고 禪定만을 닦는다면 菩薩道가 아닌 二乘의 지위에 떨어지고 말 것이기에, 止의 수행만이 아니라 觀도 함께 닦아야 한다고 했던 경우다. 이러한 원효의 수행관은 자신의 교화활동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훗날 원효의 位階가 初地에 해당된다는 설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원효 인식의 배경에도 그의 실천적인 수행과 교화에 대한 높은 평가가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불종사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01193704043/12410776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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