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거봉(巨峰) 태고 보우(太古 普愚 1301~1382)선사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宗祖)로 추앙되고 있는 고려말엽의
태고보우(太古普愚) 스님은 한국불교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매우 특별한 스승이다.
스님을 중심으로 한 불제자들이, 불교의 선과 교, 돈오와 점수의 일치를 추구하고,
민중사회와 멀리하여 부패한 고려 불교를 쇄신하고자 보조국사 지눌스님이 전개했던
<정혜결사 定慧結社>의 정신을 지주로 삼아 보조국사 입적 이백 년 후에
<고려불교조계종>을 보조국사가 주석했던 전남 조계산 송광사에서 개창했고,
그 법맥이 <조선불교조계종>을 거쳐 오늘날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신라 말기부터 시작된 한국불교의 종파분열은 그 근원이 중국불교의 오조(五祖) 홍인스님의 제자인
혜능(慧能)과 신수(神秀)가 갖고 있었던 “진리의 깨달음”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식이 풍부했던 신수는 어느날 자신의 깨달음을 스승과 대중에게 보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선시(禪詩)를 지어 스승의 방문 앞에 붙였다.
신시보리수(身是菩提樹)
심여명경대(心如明鏡臺)
시시근불식(時時勤拂式)
물사야진애(物使惹塵埃)
-몸은 곧 보리수요, 마음은 맑은 거울과 같으니,
부지런히 씻고 닦아, 먼지가 앉지 않도록 하리라-
이를 본 일자무식의 공양간 나무꾼에 불과했던 혜능이
문자를 아는 동료에게 대필시켜, 신수의 시문 옆에 붙였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명경역비대(明鏡亦非臺)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보리는 본디 실체가 없고, 밝은 거울 역시 실체가 없어,
본디 한 물건도 없는데, 어디에 먼지가 앉는다 말인고.-
두 제자의 스승인 홍인스님은, 일단 “혜능의 글에는 깨우침이 없다” 하며, 글을 떼어내라고 명한 뒤,
다음날 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는 혜능을 찾아가 말없이 주장자(지팡이)로 세 번 부엌바닥을 쳐
“삼경에 찾아오라!”는 암시를 주었다.
스승이 주장자로 세 번 부엌바닥을 친 뜻을 깨우친 혜능은 삼경에 스승을 찾아가
의발을 전수받아 달마선사의 법통을 잇는 여선 번째 조실스님(六祖)이 됐지만,
신수와 그를 따르는 대중의 반발을 피하고자 강남으로 야반도주하여,
그 곳에서 돈오敦悟(깊은 참선 가운데 찰나의 깨달음을 얻는 방편)를 중시하는
선종(禪宗)의 기풍을 크게 일으켰고,
신수는 북방에서 점수漸修(경전공부와 수행으로 깨달음을 얻는 방편)를 중시하는
교종(敎宗)의 종조(宗祖)가 되어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신라와 고려의 유학승들이 중국대륙으로 유학하여, 어느 스승 문하에서 학업을 성취했는지에 따라서,
당시 한국불교는 다섯 교종의 사찰과 아홉 선종의 사찰(五敎九山禪門)로 분립하여,
서로 자신들의 이론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던 것이다.
원효성사께서 이를 안타까이 여겨, 오늘날 한철학의 원류라고 불리우는 < 화쟁론>을 제시하여,
진리를 전하는 언어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하고, 언어 자체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이견의 대립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역설했다.
원효성사께서는 형이상학적 철학이 단지 말장난이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면서,
철학의 논리가 언어의 해석차이로 말미암아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공존해야 함을 누누이 설명했다.
그럼에도 원효성사의 간절한 염원은 수백 년이 지나도 각 종파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스님이 원효성사의 <화쟁론>을 금과옥조로 받아들여
고려불교를 하나로 통일시키려는 노력을 한 결과로 부분적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돈오냐 ? 점수냐? 하는 논쟁은 수백 년을 이어왔다.
한국불교계에서 고승대덕으로 추앙받고 있는 스님들은 하나같이
“돈오와 점수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다”라는 가르침을 남기신 분들이다.
이러한 고승대덕의 한 분이신 태고보우 스님은,
속성은 홍주 출신의 홍씨.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이며,
그 어머니 정씨가 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나서 스님을 낳았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스님은 열세 살에 출가하여 회암사 광지스님의 제자가 되었고,
열아홉 살부터 <만법귀일 萬法歸一>의 화두(話頭)를 붙잡고 혼자서 참구하면서,
선수행(禪修行)에 몰두하였다.
1337년 가을에는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 圓覺經>을 읽다가
"모두가 다 사라져 버리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고 한다."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지해(知解)를 타파하였다고 한다.
1347년 7월에 원나라 호주 천호암(天湖庵)으로 가서 중국 임제종의 거두(巨頭) 석옥(石屋) 스님을 만나
학업성취를 인가받고, 달포 가량 석옥스님의 곁에서 임제선(臨濟禪)을 탐구하였다.
태고보우스님이 고려로 돌아가려 하자 석옥스님은 태고보우 스님의 저서인
<태고암가>의 발문을 써주는 한편, 깨달음의 신표로 가사(袈裟)를 주면서,
"이 가사는 오늘의 것이지만 법은 영축산에서 흘러나와 지금에 이른 것이다.
지금 그것을 그대에게 전하노니 잘 보호하여 끊어지지 않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태고보우 스님은 1348년에 고려로 돌아와 중흥사에 머물렀으며,
더욱 수행 정진하고자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가 네 해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산중자락가 山中自樂歌 산속에 살며 스스로 즐거운 노래>를 짓기도 하였다.
이 산중자락가가 실려 있는 스님의 문집인 <태고화상어록 太古和尙語錄 > 두 권과
<태고유음 太古遺音> 여섯 책에는 스님의 사상과 경지를 알게 하는 법어와 시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스님의 불교철학에 대한 깊이와 경지가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雲山吟 운산음 구름산을 노래함
山上白雲白 산상백운백 산 위의 흰구름 더욱 희고
山中流水流 산중유수유 산 속 흐르는 물 또 흐르네
此間我欲住 차간아욕주 이 속에서 나는 살고파
白雲爲我開山區 백운위아개산구 흰구름 나를 위해 한 자리 비워주네
我亦隨君馭淸風 아역수군어청풍 이 몸도 그대처럼 맑은 바람 타고서
江山處處相追遊 강산처처상추유 강산 곳곳 마음대로 노닐면서
追遊爲何事 추유위하사 노닐면서 무슨 일 하여 볼까나
堪與白鷗戱波頭 감여백구희파두 흰 갈매기 동무하여 파도 위에서 놀아 볼까
또한 공민왕이 청빙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물었을 때에는,
거룩하고 인자한 마음이 모든 교화의 근본이요 다스림의 근원이니,
빛을 돌이켜 마음을 비추어 보라고 하였고,
때의 폐단과 운수의 변화를 살피지 않고서는 안된다고 답하였다.
스님은 또 공민왕의 개혁정치에 동참하고 있던 개혁승 신돈과는 다른 관점에서
왕도 송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고,왕도를 한양으로 옮겨 민심을 쇄신하고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태고보우 스님은 1382년 여름에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고는
곧 소설산으로 돌아와, 12월 17일에 언어와 동작이 혼미해지더니, 23일 문인들을 불러
"내일 유시(酉時)에 내가 떠날 것이니, 지군(知郡 : 군수)을 청하여 인장을 봉하도록 하라."고 한 뒤,
이튿날 새벽에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유시가 되자 단정히 앉아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니,
세속나이 여든 두 살이요, 법랍으로는 예순아홉 살이었다.
辭世頌 사세송 사바세상 떠나며
白雲買了賣淸風 백운매료매청풍 흰구름 팔아서 맑은 바람 사니
散盡家私徹骨窮 산진가사철골궁 살림살이 바닥나 뼈 속까지 가난하네
留得數間茅草屋 유득수간모초옥 남은 건 두어 간 띠집 뿐이니
臨別付與丙丁童 임별부여병정동 떠난 뒤 불 속에 던져버리게
이 선시는 태고보우(1301~1382) 스님에게 임제선의 법맥을 전수한
중국의 석옥청공스님이 입적에 앞서, 태고보우 스님과 함께 임제법맥을 이어받은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4) 스님을 통하여
태고보우 스님에게 남긴 임종게송으로 알려져 있다.
맑은 바람이 좋아보여서 그 맑은 바람을 사려고 흰구름을 팔았다.
가진 것이라고는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 줄기 맑은 바람뿐.
그런데 그 바람은 이미 가버렸고 흰 구름마저 바람 따라 어디론가 흘러가 버렸다.
이것이 태고보우 스님의 스승인 석옥 스님의 살림살이다.
그 살림살이가 실은 바닥이 나서 뼈에 사무치게 가난하였다.
남은 건 두어 칸 띠로 얽은 집 하나뿐.
그 집이란 무엇을 뜻하는지?
불이 꺼지고 재가 식어 싸늘하게 된 듯한 아무 쓸모없는 깡마른 한 줌 육신이 아니겠는가?
그 육신조차 이제 이 세상 떠나니 그것마저 불 속에 던져버리라는 것이다.
제이제이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jj-maumdaro/98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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