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설(二諦說)의 설립 목적
-세속제의 복권과 그릇된 공 이해의 교정-
강찬국(연세대 박사과정)
1. 들어가는 말
이제설은 중관학의 특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으며, 필자도 그러한 통설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부류에 속한다. 그리고 이 글 역시 이제설에 대한 정확한 이해야말로 중관학파의 이론적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길일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시도되고 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유명’한 개념들이 그렇듯이, 하나의 개념이 정착되기까지와 그 이후의 전개과정 속에서 다양하게 얽히는 사유의 난맥상 때문에 유명한 개념일수록 명료한 윤곽을 그려내는 데 있어서의 난해함이란 더욱 증폭되기 마련이다. 이제설 역시 그 유명세와 난해함이 비례관계를 갖는 대표적인 이론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필자에게 이제설은 결코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항상 가까이에서 주변을 맴돌기만 하는, 안타까운 느낌의 대상이다.
이 글에서는 이제설 이해를 위해 반드시 헤쳐가야 할 여러 가지 길들 중에서 가장 초입에 해당하는 문제에 애초부터 논의의 범위를 국한하고자 한다. 이제설은 어떤 단선적인 분석틀로 파악될 수 있는 이론이 아니라는 그 안타까운 느낌이 아마도 필자로 하여금 공손히 이제설의 최초의 발상지점으로 되돌아가도록 요구한 것 같다. 그 초입에서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제설의 기본의도는 첫째, 공의 해악으로 인해 실추된 세속제의 권위를 다시 복권하려는 데 있다. 둘째, 세속제의 권위가 실추된 이유는 공의 이론을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이므로 이제설은 그릇된 공 이해를 교정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이렇게 도출된 모종의 결론이 미약하나마 이제설의 전모를 드러내는 데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할 뿐이다.
2. 이제설 해석의 방향 설정을 위한 선행 질문
이제설에서는 왜 두 가지의 진리를 제시하는가? 이것이 이 글에서 이제설의 이해를 위한 초입에 서서 던지는 질문이다. 이제설에 따르면 진리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세속제이고, 또 하나는 제일의제이다. 세속제는 단적으로 세간의 진리, 즉 생사의 고통으로 윤회하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진리이고, 제일의제는 출세간의 진리, 즉 생사의 고통을 여읜 열반의 세계에서 실현되는 진리이다. 이제설 이해의 관건은 어디까지나 이제설의 골격을 이루는 이 두 가지의 진리, 세속제와 제일의제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놓여 있다. 예를 들어, 절대와 현상이라는 큰 제목 아래에 이제설의 문제를 그 하부 주제로 다루고 있는 무르띠에 따르면, 세속제가 대상으로 삼는 영역은 현상이고 제일의제의 대상은 절대의 지평이다. 즉 무르띠는 절대와 현상이라는 짝개념이 갖는 다분히 수직적인 위계구조 속에서 세속제와 제일의제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무르띠의 해석에 따르자면 이제설은 결국 제일의제에 가서 궁극적 진리를 찾는 구조의 진리설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무르띠의 예에서 보듯이, 세속제와 제일의제의 관계 설정의 문제가 이제설 해석의 관건이 됨은 분명하다. 사실 양자의 관계 설정의 문제가 관건이 되는 가장 명약관화하고도 근원적인 이유는 이제설이 일제설(一諦說)이 아니라 이제설(二諦說)이라는 이제설 자체의 내적 구조 속에 미리부터 잉태되어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이제설에서는 왜 두 가지의 진리를 제시하는가”라는 질문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진술될 수 있겠다. 이제설에서는 왜 세속제와 제일의제 중에서 하나만을 선택하여 진리로서 제시할 수 없었는가? 진리가 두 개라는 이제설은 과연 어떤 의도를 충족시키고자 등장하는가?
3. 이제설 등장 경로의 전모
앞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여기서 채택하는 방식은 이제설이 직접 거론되기 이전의 사건정황과 등장 경로를 살펴보는 것이다. 화살이 겨냥하는 과녁이 어디인지를 측정하기 위해 화살이 날아가는 궤적을 따라갈 수도 있겠지만, 활시위를 당기는 사수의 손끝에로 시선을 돌리는 일도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것이다. 이제설을 다루고 있는 ?십이문론? 「관성품」은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시작된다.
변하는 모습이 있음을 보니 모든 존재는 그 자성이 없고 자성이 없는 존재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들이 다 공하기 때문이다.
見有變異相 諸法無有性 無性法亦無 諸法皆空故.
모든 존재의 공함을 주장하는 이 게송에 대한 ?십이문론? 에서의 자체적인 해설과 길장(吉藏)의 ?십이문론소? 에서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만일 모든 존재에 자성이 있다면 결코 변해서는 안 되겠지만, 모든 존재들이 다 변한다는 사실이 눈에 보인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그 자성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또, 만일 어떤 존재가 확고한 자성을 갖는다면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발생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자성이 여러 가지 인연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면 자성은 만들어지는 존재이리라. 만들어지지 않는 존재는 다른 것에 의존하여 자성이라고 불리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공하다.
諸法若有性 則不應變異 而見一切法皆變異 是故當知諸法無性 復次若諸法有定性 則不應從衆緣生 若性從衆緣生者 性卽是作法 不作法不因待他名爲性 是故一切法空.
(게송의) 하반부는 무상함의 뜻을 논파하니, 상주함이 없으면 무상함도 없게 됨을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대저 성인이 무상함을 말한 것은 상주함이 없음을 밝힌 것이지 무상이 있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상반부는 무상함을 빌려 상주함을 제거한 것이고, 하반부는 무상함마저도 버리는 것이다.
下半破無常義. 明在常旣無亦無無常. 所以然者. 夫聖人言無常者. 明其無有常非謂有無常. 上半借無常除常. 下半亦捨無常.
게송의 내용은 자성이 있는 존재나 자성이 없는 존재나 모두 다 공함을 밝히고 있다. 우선 게송에 대한 ?십이문론? 의 해설에서는 모든 존재의 무자성을 논증하는 데 논의를 국한한다. 우선 자성[=자기동일성]이 있는 존재는 동어반복이지만, 동일성을 특징으로 삼으므로 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존재는 발견될 수 없다. 또 변하는 존재는 역시 동어반복이지만, 인연에 의존하므로 인연에 의존하는 존재는 무자성이다. 인연에 의해 지어진 존재는 그 자체로 지어진 존재이므로 지어지지 않은 존재(不作法)가 존재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한편 인용한 길장의 ?십이문론소? 에서는 게송의 하반부에 해당하는, 자성이 없는 존재의 공함에 대한 해설이 행해진다. 무자성인 존재는 자성이 있는 존재에 의존하여 있는 것인데, 이미 자성이 있는 존재가 없으므로 무자성인 존재도 없다. ?십이문론? 에서의 해설이 존재의 무자성만을 논증하고 자성이 없는 존재의 공함에 대한 논증을 생략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연기론적인 사유에 철저하기만 하다면 자성이 없는 존재의 공함에 대한 논증은 존재의 무자성을 논증하는 맥락 속에 이미 포함되는 논의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십이문론? 「관성품」은 중관학파의 표어인, 모든 존재의 공함을 선언하는 게송으로 시작된다.
이에 대해 중관학파의 공의 이론에 대한 반대론자는, 공의 이론이 유지되는 한 불교 내부에서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성제와 사사문과와 현인 및 성자 그리고 불․법․승 삼보도 공할 것이라고 주장하여 중관학파의 내적 논리의 모순을 지적한다.
[반대론자] 만일 모든 존재가 공하다면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다. 만일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다면 (사성제 중) 고성제도 없다. 고성제가 없다면 집성제도 없으며, 고집성제가 없다면 멸성제도 없다. 멸성제가 없다면 고의 지멸에 이르는 도성제도 없게 된다. 만일 모든 존재가 공하여 그 자성이 없다면 사성제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 사성제가 없기 때문에 사사문과도 없으며 사사문과가 없기 때문에 현인이나 성인도 없다. 이런 것들이 없기 때문에 불․법․승(삼보)도 역시 없게 되며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다 없게 된다. (그러나) 이는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가 다 공해서는 안 된다.
問曰 若一切法空 則無生無滅 若無生滅 則無苦諦 若無苦諦 則無集諦 若無苦集諦 則無滅諦 若無苦滅則無至苦滅道 若諸法空無性 則無四聖諦 無四聖諦故 亦無四沙門果 無四沙門果故 則無賢聖 是事無故 佛法僧亦無 世間法皆亦無 是事不然 是故諸法不應盡空.
그런데 여기서 반대론자가 거론하는 사제로부터 불․법․승 삼보에 이르기까지의 체계적 질서를 불교의 모든 부파가 인정할 것인지는, 적어도 중관학파의 관점에서도 긍정되는지는 굳이 당면한 논의에서 다룰 필요가 없는 문제일 것이다. 어쨌든 반대론자는, 불교에서 주장하는 불․법․승 삼보 등의 진리와 공의 이론이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모든 것이 공하다면 불․법․승 삼보 등 불교의 내적 진리들도 헛되다.
이제 이제설이 있다. 다음과 같다.
[중관논사] 두 가지 차원의 진리가 있는데, 첫째는 세속제이고 둘째는 제일의제이다. 세속제가 있기 때문에 제일의제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세속제에 의지하지 않으면 제일의제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으며, 제일의제을 터득하지 않으면 열반을 증득할 수가 없다. 만일 (이런) 두 가지 차원의 진리에 대해 모른다면 (수행의 도상에서) 스스로 좋아지거나 남을 좋게 하거나 양측 모두 좋게 하는 일에 대해 알 수가 없다. 이와 같아서 만일 세속제를 알면 제일의제에 대해 알게 되고, 제일의제를 알면 세속제에 대해 알게 된다. (그러나) 그대는 지금 세속제에 대해 설하는 것을 듣고 그것을 제일의제라고 말한다. 그래서 잘못에 빠지는 것이다.
答曰 有二諦 一世諦 二第一義諦 因世諦 得說第一義諦 若不因世諦 則不得說第一義諦 若不得第一義諦 則不得涅槃 若人不知二諦 則不知自利他利共利 如是若知世諦 則知第一義諦 知第一義諦 則知世諦 汝今聞說世諦 謂是第一義諦 是故墮在失處.
여기까지가 이제설이 등장하기까지의 문제상황의 전모이다. 이제 다소 급하게 진행되어왔던 이제설의 등장경로를 다시 한번 음미해보도록 하자.
4. 세속제의 복권: 이제설의 목적(1)
우선 공의 이론의 반대자가 비판의 목표로 삼고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살펴보자. 반대론자는 불교 내에서 참인 것으로 통용되는 다양한 명제들이 하나의 체계 속에서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불교에서는 세계를 생멸하는 것으로 이해하므로 고성제가 성립하고 성립한 고성제의 원인은 생멸하는 세계를 상주하는 것으로 집착하는 데 있으므로 집성제가 동시에 성립한다. 고․집성제의 성립은 고의 지멸과 거기에 이르는 길로서의 멸․도성제를 자동적으로 야기한다. 사사문과는 이러한 사성제의 구조를 전제하는 한에서 도달되는 현인과 성자의 복덕이며, 그러한 현인과 성자를 정점으로 하여 불․법․승 삼보가 존숭받게 된다. 돌이켜 보면 생멸하는 세계의 무상성으로부터 불․법․승 삼보가 성립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은 불교 내에서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는 일상적 진리체계이다. 그런데 공의 이론은 불교적 상식에 속하는 기존의 진리체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리게 된다. 모든 것이 공하다고 그 이론에서는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언해야 할 점은 공의 이론의 이러한 해악은 불교 내에서만 발생하는 사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단적으로 모든 것이 공하다는 전칭 명제는 불교 내부의 진리만에 국한될 리가 없다. 불교 내부의 진리를 포함한 모든 일상적 진리들, 예를 들어 해는 동쪽에서 뜬다든가,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든가, 심지어 절대자의 존재, 적어도 타자에 의존하여 생존할 수밖에 없는 유한자의 한계를 자기비판함으로써 그 반대급부로 필연적으로 상정되고 동경되기 마련인 초월자의 존재가 있다든가 등등의 세간의 진리들을 일거에 폐지하는 결과가 공의 이론에 의해 초래된다. 그리하여 공의 이론과 세간의 일상적 진리체계들은 심각한 모순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이 명약관화해지는 것이다.
위와 같은 사태 분석을 통해 우리는 중관학파의 대답의 목표가 어디로 설정될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반대자의 비판적 질문의 목표가 공의 이론과 세간법의 양립불가능성에 있으므로 이에 대한 대답은 자연히 양자의 양립가능성, 특별히 공의 이론과 결코 불협화음을 일으키지 않고도 성립가능한 세간법의 본래적 성격을 논증하는 데에 기본적 목적을 두게 된다. 그러니까 이러한 중관학파의 대답의 목적을 실현시켜줄 이론으로 등장하는 내용이 곧 이제설인 것이다. ?십이문론? 에서의 중관학파의 대답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는 이제설의 기본 구조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두 가지 차원의 진리가 있는데, 첫째는 세속제이고 둘째는 제일의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이제설의 등장경로를 기억하는 한 적어도 글머리에서 이제설에 대해 던졌던 일말의 의혹, 즉 “이제설은 제일의제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위계구조를 갖는 것이지 않겠는가”라는 의혹은 망각되어도 좋을 듯하다. 이제설의 설립목적의 무게중심은 차라리 세속제에 있지 결코 제일의제에 있지 않다. 이 새로운 설법방식이 마련되어야 하는 애초의 필연성은 어디까지나 반대론자의 주장이지만, “공의 이론에 의해 헛된 것으로 폐기될 처지에 빠진 세간의 진리”를 복권하려는 의도 속에 놓여 있다. 이제2설은 제일의제의 무소불위를 공연히 반복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가 아니다.
5. 그릇된 공 이해의 교정: 이제설의 목적(2)
세속제의 복권을 의도하는 이제설의 기본 성격과 관련하여 한 가지 더 지적되어야 할 지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이제설의 기본 의도로부터 추론될 수 있는 중관학파의 공 개념의 성격에 대한 문제이다. 다시 반대론자의 주장을 이제의 구조에 대입하여 새겨보면, 그들의 비판은 중관학파의 제일의제인 공에 의해 세속제인 세간의 일상적 언어체계가 모두 비진리의 영역으로 타락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그들은 이제설에 대해서도, 제일의제인 공과 세속제는 상호 모순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양자는 결코 양립가능하지 않으며, 결국 이제설 자체도 그 두 가지 진리로서의 설립근거를 잃게 된다고 일관되게 그들의 주장의 골자를 피력할 것이다.
그런데 반대론자의 주장에서 드러나는 공의 의미에 대한 그들의 이해의 핵심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십이문론? 에서의 맥락을 돌이켜 보면, 모든 것이 공하다는 중관학의 기본명제가 진술되자마자, 그들은 공의 의미를 일종의 무지막지한 타자배제의 논리전략으로서 이해하고서 그 이론의 내적 모순이 빚는 가공할 폐해들을 조목조목 예시했었다. 반대론자의 정체는 불교 외부의 지식인일 수도 있겠고, 어쩌면 불교 내부의 건전한 수행자의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공의 이론 내에 잠복하는 불경한 신성모독의 단초를 발견하고 이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어쨌든 반대론자의 이해에 따르면, 중관학파의 공의 이론은 극도의 자기보존적 이기성을 띤다. 왜냐하면 공의 이론이 함장하는 타자배제의 논리전략에 따라 공의 이론 이외의 모든 타자적 진리들은 부정될 수밖에 없으며, 오로지 긍정되는 대상은 중관학파의 공의 이론 자체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론자들의 비판이 아무리 모순 없는 정합성을 띤다 하더라도 애초부터 공의 이론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그릇된 것이라면 중관학파에 대한 그들의 준엄한 비판은 부당한 것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공의 이론을 둘러싸고 있는 사태들의 정황은 반대론자들이 그리는 구도대로 그리 수월하게 펼쳐져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글의 한계를 벗어나는 내용이겠지만 짧게나마 반대론자의 이해의 부당성을 입증할 만한 몇 가지 사례들을 거론해보자. 사실 공의 이론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전통적으로 부처님도 교화하지 못한다고 비판되는 악취공자(惡取空者)의 전형을 이룬다. 이른바 악취공자란 공 이외의 어떤 원리도 부정하는 전형적 회의론자를 일컫는데, 반대론자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또한 공의 이론을 위해 마련된 중관학파의 또 하나의 교과서인 ?중론? 의 귀경게(歸敬偈)나 유명한 삼제게(三諦偈)에서 보듯이 공의 이론은 어디까지나 타자와의 상호의존성을 의미하는 연기론의 다른 이름으로 설해지는 것이므로 공의 이론을 타자배제의 논리로 이해하는 방식은 무분별한 회의주의적 악취미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결국 이제설을 제시하는 중관학파의 또 하나의 의도는 타자부정과 독존적 자기긍정의 논리전략이라고 주장하는 반대론자의 공의 이론에 대한 부당한 이해를 비판하여 교정하려는 데 있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교정작업은 더 나아가 공의 이론에 대해 타자로서 성립하는 세속제의 복권을 통해 실현될 것이라고 성급하게나마 추측해볼 수 있겠다.
6. 맺음말
이제설은 세속제를 복권시킴으로써 세속제와 제일의제의 양립가능성을 증명하려는 목적을 갖는다. 아울러 이제설은 공의 이론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제공하려는 의도 아래에서 제시되고 있는 이론이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이 두 가지 성격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제설의 기본 의도가 세간의 진리를 복권함으로써 세간법과 공의 이론 또는 세속제와 제일의제의 양립가능성을 증명하는 데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그 가능성이 이제설을 통해 실제로 어떻게 구현되는지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따져봐야 할 문제로 엄연히 남아 있다. 어떻게 세속제도 진리이고, 동시에 제일의제인 공의 이론도 진리일 수 있는가? 세속제는 공 개념의 부정성 앞에서 어떻게 스스로의 진리를 긍정적으로 정립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헤쳐가야 할 길은 진리를 오로지 제일의제의 빛 아래에서 이해하려는 일원론적 해석의 길보다 더 험난하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제일의제와 세속제를 동등한 두 개의 진리로 이해하려 할 경우 양자에 대한 내용 이해의 문제와 더불어 “진리는 하나이다”라는 보편학의 기본 전제마저도 부정해야 하는 또 하나의 부담을 덤으로 짊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설을 세속제의 부정과 제일의제의 절대적 긍정이라는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가 적어도 ?십이문론? 의 맥락 속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상황이라면, - 위와 같은 불길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 단적으로 세속제와 제일의제의 동시긍정이라는 형식의 해석의 길을 여지 없이 선택해야 한다.
임기영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dlpul1010/2359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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